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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속리산국립공원 안에 있는 암자인 복천암(福泉庵)에는 한글창제의 비밀이 숨어 있어, 소설의 소재와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복천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산내 암자이다. 복천암은 호서 제1선원으로 금강산 마하연과 지리산 칠불암과 더불어 구한 말 3대 선방 중의 하나였다. 1882년에는 경허선사가 한동안 머물렀고, 1913년에는 법주사 선원으로 문을 열었다. 1922년 동산 스님이 33세의 나이로 복천 선원에서 하안거를 나면서부터 복천암은 본격적인 선원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는 전강스님이 복천선원 조실을 맡아 제방의 납자들을 제접 했고, 1943년에는 성철, 청담스님이 정진, 수행을 하기도 했다. 6.25 때 폐원된 것을 1967년 금오스님이 법주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다시 복천선원 문을 열었다. 1970년 대 법주사 주지였던 탄성스님의 권유로 마지못해 복천암에 오게 된 월성 스님이 현재까지 복천선원 선원장으로 30여 년째 주석하고 있다.
진옹(震翁) 월성(月性 : 속명 金守省) 스님은 1952년 구례 화엄사로 출가해 금오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한 후 20년 넘게 해인사, 송광사, 칠불사, 불국사, 각화사선원 등 전국 제방선원에서 수선 안거했다.
복천암은 신라 성덕왕 19년인 720년에 창건되었으며, 고려 공민왕(재위 : 1351-1374)이 극락전에 무량수(無量壽)라는 편액을 친필로 써서 내렸다. 조선 세조가 1464년 이 절에서 신미(信眉)·학조(學祖)·학열(學悅) 등과 함께 3일 동안 기도를 드린 뒤 절에 이르는 길목의 한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깨끗이 낫자 이 절을 중수하도록 하고, ‘만년보력(萬年寶曆)’이라는 사각옥판을 내렸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불에 탔으나 곧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전과 나한전·선방·요사채 등이 있다. 그 중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곧 중건한 건물로 공민왕의 친필인 무량수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유물로는 부도 2기가 전한다. 그 중 복천암수암화상부도는 성종 11년인 1480년 제작된 것으로 신미의 부도이다. 팔각원당형 부도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이 부도 뒤에 있는 복천암학조등곡대사부도는 중종 9년인 1514년에 제작된 것으로, 일반적인 석종형 부도보다 훨씬 발전된 형식을 띠고 있어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절 옆 큰 바위 틈에는 절 이름과 관련 있는 샘인 복천이 있다.
세조대왕과 세종대왕 두 왕이 복천암을 자주 찾았던 이유는 가물거나 장마 때나 줄어들지도 넘치지도 않고 항시 한 결 같이 샘솟는 약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염산김씨(永山金氏)인 신미(信眉)대사(1403-1480)는 충북 영동 출생의 집현원 학사로 조선에서 유일하게 범어(梵語)에 능통하여 세종대왕의 밀명을 받고 복천암, 홍천사, 대자암 등에서 비밀리에 한글을 창제했다고 한다. 실제로 신미대사는 서울 돈암동 홍천사에서 세종대왕을 처음으로 알현했는데, 그 때 세종대왕의 밀명을 받고 한글을 창제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서울 홍천사는 최근 한글창제의 산실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국어학계에서는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글을 창제한 것을 정설로 보고 있다. 그런데『세종실록』어디에도 실제로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창제에 주도적으로 기여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훈민정음 해례』 서문을 쓴 정인지조차 “집현전 학사들 중에 어느 누구도 훈민정음의 오묘한 원리를 알지 못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조선 세종 태학원 강상원 박사는 신미대사의『법어록』과『동국정운』의 표기법이 정확히 일치하고,『능엄경의 언해』에서도『동국정운』의 표기법과 일치한다고 밝혔다. 그런가 하면 복천선원 선원장 월성스님이 친동생인 집현전 학사 김수온(金守溫)이 쓴『복천보강』,『효령대군 문집』,『조선실록』,『영안김씨 족보』 등 각종 자료를 근거로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산파 역할을 했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상문, 신숙주 등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한글을 창제했다고 주장하는 정설은 신빙성이 없다고 한다. 특히 성삼문은 한글이 창제될 무렵 집현전에 들어 왔고, 신숙주는 한글창제 2년 전에 들어왔지만 입성하자마자 그 다음해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그들이 한글창제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집현전 부제학 실무담당 최만리를 비롯해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이 한글 창제 반포를 반대하는 상소문까지 올린 것으로 보아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대왕을 도와 한글을 창제했다는 가설은 이제 힘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1990년대 중반에 중앙일보에 ‘암자로 가는 길’을 인기리에 연재한 적이 있는 전남 보성 출신의 소설가 정찬주(61세)는 18년 전인 1996년에 속리산 복천암에 들러 월성 주지스님으로부터 신미대사가 세종대왕의 부탁을 받고 한글창제를 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고 2013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해서 2014년 9월에 소설『천강에 비친 달』을 탈고해 도서출판사인 작가정신에서 단행본으로 발간함으로써 한글창제의 역사를 복원했다고 한다.
소설『천강에 비친 달』은 조선 세종 2년인 1420년에 태종비(妃) 원경왕후의 천도제가 열린 흥천사에 세종이 직접 참석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세종과 신미대사가 운명적으로 만나면서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의 비화가 전개된다. 조선왕조 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를 구가한 왕으로 평가받는 세종대왕. 그가 이룩한 찬란한 업적, 한글창제에 공을 세운 또 한사람이 있었으니 조선 초 범어(산스크리트어) 전문가이자 학승인 신미대사이다. 소설가 정찬주는 신미대사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탄생시켰음을『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낱낱이 풀어나간다. 신미대사는 세종이 일러준 상형(象形)의 바탕, 즉 자음은 혀 모양, 입술 모양, 이 모양을 바탕으로, 모음은 천지인을 바탕으로 하여 글자꼴을 만들고, 이 자모에 범자의 자음과 모음처럼 가획과 합용, 교합을 통해 우리 글자인 정음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신미 대사뿐 아니라 우리 글자를 만들려는 일념 하나로 세자(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일부 사헌부 대신들과 집현전 학사들이 협력하고 조력하는 모습이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유불(儒彿) 갈등과 왕권과 신권(臣權)의 대결을 비롯해 한글 창제를 둘러싼 갈등 양상과 시대상을 생생하게 구현함으로써 독자들을 흥미진진하게 한다.
세종대왕이 창안하고 신미대사가 만든 훈민정음 28자는 유불(儒佛) 싸움의 진흙탕에서 불(佛)이 살아 남긴 우리 한민족의 소중한 글자이다.
세종과 신미대사가 배불숭유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의기투합해 한글을 창제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백성이 인간다운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이룩하고자 한 뜻이 통했던 까닭이다.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가엾이 여겼던 두 사람은 우리 글자를 만들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달빛과 같이 만백성의 고통을 어루만져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바랐던 것이다.
세종대왕의 애민사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우리 글자로 손수 만들어 두루 알린 대목에서도 엿보인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한 신미대사의 노고를 잊지 않고 보답하기 위해 금동 아미타삼존불을 조성해서 신미대사의 주석 처였던 속리산 복천사에 시주했으며 신미대사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子)’라는 존호를 내리라는 유언도 남겼다. 여기서 ‘우국이세(佑國利世)’는 세종대왕이 ‘나라를 위하고 세상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한편 복천암 사적비의 기록을 보면, "세종은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대사로부터 한글 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 초기 유학자인 성현(成俔, 1439-1504)의 저서인『용재총화(?齋叢話)』나 이수광(李睡光)의『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도 언문은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 가장 유력시 되는 설은 한글의 범자(梵字) 모방설이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신미대사가 범어를 모방해 실제로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것은 숭유억불정책으로 집현전 학자들 중에 불교를 배척하는 학자들이 있었고, 세종이 한글을 오랫동안 지키고 스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미대사에 대한 세종의 신뢰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국어학계에서는 복천암 월성 주지스님의 증언과 소설『천강에 비친 달』을 참고해 한글창제 과정을 새로 조사연구해 한글 창제 원리와 과정을 정확하게 다시 정립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1. 정찬주, 『천강에 비친 달』, 작가정신, 2014.9.
2. “복천암(福泉庵)”, 네이버 두산백과, 2014.11.22.
3. 이택용, "충북 보은 속리산 복천암", 네이버 사이트, 2009. 5. 31.
4. 채문기, "악행도 나를 일깨우는 스승...세상에 내칠 사람 없어", 법보신문 1261호, 2014.9.17일자.
5. 허은정, “한글은 절에서 스님이 만들었습니다 - 정찬주 작가의 소설 ‘천강에 비친 달’…억불시대 세종과 신미대사의 한글창제 비화”, 불교신문3046호,2014.10.4.일자.
6. "신미대사와 한글날은 무슨 관계?", 불교뉴스, 2014.10.9일자.
7. 사랑지기, “한글창제와 신미대사 이야기”, 네이버 사이트, 2014.10.9.일자.
8. 조정진, “훈민정음은 세종과 신미대사의 합작품이다?”, 세계일보, 2014.10.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