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예천군에 있는 예천여중은 1974년 양궁부를 창단했다. 그해 겨울방학에 1학년생 김진호는 양궁부의 문을 두드린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먼 거리를 날아가 과녁에 꽂히는 게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양궁부 언니가 다가와 가입을 권유했다. 당연히 양궁에 소질이 있는지는 따져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재능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1977년 10월 예천여고 1학년 김진호는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했다. 김진호는 “최고의 컨디션이었지만 시골에 있는 학교였기 때문에 실력을 가늠할 수 없어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게다가 경기 이틀 전 김진호는 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평소와는 다른 손가락으로 활시위를 당길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김진호는 1위를 차지했고 이듬해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경기대회에 나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고교 1학년생 김진호는 국가대표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그저 활을 열심히 쏘다 보니 어느새 국가대표가 돼 있었다. 2남2녀 가운데 막내인 김진호는 태어난 뒤 처음으로 집을 떠나 생활하게 됐다. 하지만 어린 나이였다. 김진호는 태릉선수촌에서 자주 눈물을 흘렸다. 외롭기도 했고 집에도 가고 싶었다. 함께 훈련하는 선배들이 다독이며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김진호는 1978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했다. 여자양궁대표팀에 대한 기대치는 그리 높지 않았다. 한국은 아시아경기대회 출전 사상 처음으로 양궁 종목에 선수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김진호는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단체전에서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좋은 성적에 고무된 대한양궁협회는 이듬해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 여자대표팀만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김진호는 다시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그 무렵 태릉선수촌의 훈련 시설은 열악했다. 김진호는 “지금 한국 선수들이 쓰는 양궁 장비나 훈련 시설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그때는 모든 게 많이 부족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김진호는 열악한 여건에서도 훈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5관왕(30m, 50m, 60m, 개인 종합, 단체전)에 올랐다. “잘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지, 꼭 1등을 해야 한다는 각오는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때가 정말 좋았던 시절이었다.” 김진호가 연일 금메달을 따자 베를린 교민들은 그에게 선물 공세를 펴며 큰 관심을 보였다. 김진호 자신도 처음 참가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 기분이 좋았다. 한편으로는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린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김진호는 1980년 예천여고를 졸업한 뒤 한국체육대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열린 이탈리아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나며 부진했다. 그해 4월 어깨를 다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진호는 대한양궁협회의 지원과 스스로의 노력 그리고 신앙의 힘으로 재활에 성공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은메달을 획득했고 198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는 다시 한번 5관왕에 올랐다. 금메달을 따 낼 때마다 각종 기록이 쏟아졌지만 김진호는 기록을 의식하지 않았다. 양궁은 자신과 싸우는 경기로 실력이 좋아지면 기록은 당연히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2번의 세계선수권대회 5관왕’이라는 타이틀은 김진호에게 세계 최정상의 궁사라는 영예와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부담을 줬다. 많은 이들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여자양궁 개인전 금메달은 당연히 김진호의 차지라고 생각했다. 김진호는 “부담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고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올림픽을 앞두고 양궁대표팀은 다른 종목 선수들보다 먼저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특별 관리 종목이었던 것이다. 김진호는 경기 열흘 전쯤에 현지에 가서 컨디션을 맞추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대표팀은 그보다 훨씬 이른 대회 한 달 전에 로스앤젤레스 땅을 밟았다. 198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충분한 전지훈련으로 경기 감각을 익혔지만 이번에는 빨리 현지에 간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 김진호는 “오랜 시간을 현지에서 보내다 보니 신체 리듬이 흐트러졌다. 경기 5일 전 컨디션이 다시 최고 수준으로 올랐지만 계속 긴장을 하다 보니 몸 상태가 엉망이 됐고 결국 컨디션이 바닥인 상태에서 경기를 치르게 됐다”고 털어놨다. 한국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이전까지 여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하지 못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당시 세계 최고 궁사였던 김진호가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문제 삼아 올림픽 불참을 선언했고 한국도 이에 동참하는 바람에 메달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한국의 첫 올림픽 여자 금메달리스트가 나온다면 여전히 김진호가 유력했다. 그러나 김진호는 0점을 두 번이나 쏘는 최악의 컨디션을 보였고 한국 최초의 올림픽 여자 금메달리스트의 영예는 대표팀 막내 서향순에게 돌아갔다. 김진호는 동메달을 따며 선전했지만 스스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경기 내용이었다. “화가 많이 났다. 그렇게 형편없는 경기를 한 적이 없었다. 최고의 기량을 유지하던 시기였는데 좋지 못한 결과를 내 무척 아쉬웠다.” 올림픽이 끝난 뒤 김진호는 스스로에 대한 불만으로 한동안 활을 잡지 않았다.
활을 내려놓은 뒤 한체대 대학원에서 공부에 전념했다. 물론 국가대표팀에서도 나왔다. 그러다 ‘한 번만 다시 해 보라’는 어머니의 권유로 다시 활을 잡았다. 2년 뒤인 1986년 김진호는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3관왕에 올랐지만 대회가 끝난 뒤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선수로서 한창인 25살 때였다. “활을 잘 쏘던 때였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은퇴를 일찍 한 게) 무척 아쉽다. 아마 힘들었던 국가대표 선발 경기가 원인이었을 것이다. 올림픽이나 아시아경기대회, 세계선수권대회 등에 출전하려면 누구든 꼭 선발 경기를 치러야 하는데 이게 더 큰 부담이었다.” 김진호는 은퇴한 뒤 다시 한체대 대학원에서 학업에 힘썼다.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고 9년 전 김진호가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 5관왕에 오르며 화려하게 등장했듯이 여고생 궁사 김수녕이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우승하며 세계 최고 여궁사의 자리에 올랐다.
또 한 명의 신궁 김수녕의 등장에 대해 김진호는 “잘 물러났다고 생각했다. 후배들이 못할 때 선배가 물러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뛰어난 후배가 나와 다행이었다. 내가 은퇴한 뒤 김수녕을 포함해 훌륭한 후배들이 많이 나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 결혼한 김진호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두고 있다. 김진호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를 보며 선수 생활을 다시 할까 고민했지만 그동안 해 오던 공부를 접고 활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포기했다. 김진호는 이듬해인 1995년 한체대 체육학과 전임교수에 임용돼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김진호에게 양궁은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친구와 같다. 김진호는 “양궁을 한 덕분에 집중력도 기르고 심신을 단련할 수 있었다. 양궁은 내 인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양궁은 외로운 스포츠다.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순간은 적막하기 그지없다. 선수 시절 김진호는 활시위를 당기면서 자신의 자세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가장 잘 쏘던 때의 기억을 더듬어 기본 자세를 찾아야 활을 쐈다. 김진호는 “내 자세를 지키면 편안하게 쏠 수 있었고 결과도 잘 나왔다. 나머지는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김진호는 자신이 세계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데는 신앙의 힘이 컸다고 믿고 있다. 김진호는 “양궁은 마지막 세 발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경기다. 마지막 세 발을 쏠 때면 긴장감이 최고치에 이른다. 그럴 때면 기도를 하게 된다”고 고백했다. 김진호는 한국양궁이 강한 이유로 더 많은 걸 가르치려 하는 지도자와 피나는 노력을 하는 선수를 꼽았다. 여기에 협회의 꾸준한 관심과 지원이 더해지면서 한국 양궁은 1984년 LA올림픽부터 2004년 아테네올림픽까지 여자 개인전 6연패를 달성했고,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2008년 베이징올림픽까지 이룬 단체전 6연패의 기록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김진호는 팬들에게 “올림픽에서 양궁은 금메달을 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많은 선수들이 한국 양궁의 이름값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금메달 만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부담감과 싸우면서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플레이에 박수를 보내 주는 게 좋겠다.” 김진호의 생활신조는 ‘정직하고 항상 남에게 베풀며 살자’다. ‘정직’은 신 앞에서 부끄럼 없는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뜻하고 ‘베푸는 삶’은 교육에 대해 김진호가 갖고 있는 마음가짐이다. 인생의 목표는 ‘먼저 운동했던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양궁에 대한 모든 지식과 기술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려고 한다. 김진호는 학생들에게 전공과목을 지도하는 것만큼 인성교육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사회에 나가기 때문에 사회에 맞는 인재가 될 수 있게 인성교육에 신경을 쓴다. 김진호는 “학생들이 긍정적인 자세로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갈 수 있다면 만족한다”고 말했다. 선수 시절, 외로움 속에서 철저히 자신만을 위해 활을 쐈던 궁사 김진호는 이제 후배들의 건강한 미래라는 목표를 향해 묵묵히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첫댓글 정말 대단한... 고향 예천의 보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