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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770K를 걸을 때 그를 만났다.
평범한 모습도, 평범한 장비도 아니었다.
한 눈에 척 봐도 그는 '전문 트레커'였다.
낮에 길에서 우연히 보았고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그런데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해가 저물 때쯤 우리는 예약한 펜션에 입실했는데
그는 그 집 마당 한켠에서 주인의 허락을 받은 뒤에 텐트를 치고 있었다.
빨간 옷에 빨간 배낭을 멘 바로 그였다.
그에게로 갔다.
작은 코펠에 라면을 끓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짠했다.
초면이었지만 밥을 함께 먹자고 했다.
숟가락 하나만 더 얹으면 될 일이었고, 아내도 좋다고 했다.
식사를 하면서 긴 얘기를 나눴다.
막걸리도 한 잔 나눴다.
광활하고 검푸른 동해바다가 발 아래로 펼쳐진 시원한 발코니에서 커피까지 마시며 살가운 대화를 이어갔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그의 텐트로 가보니 그는 텐트 안에서 짐을 꾸리고 있었다.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고, 그도 감사하다고 했다.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그는 '고성'을 향해, 우리는 부산 '오륙도'를 향해 힘차게 출발했다.
그 이후엔 지속적으로 서로 문자와 사진을 주고 받았다.
그가 '서해랑길'을 지날 땐 대부도 부근에서 만나 오리백숙을 함께 먹으며 밀렸던 얘기를 한참 나눴다.
'남파랑길' 구간에서도 내 누님과 친구, 동기 등 4명에게 연락하여 나 대신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해 달라고 했고,
모두가 자신의 일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다.
고마웠다.
순수한 마음으로 그의 여정에 격려를 보내고 싶었다.
마음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행동으로 실행하고 싶었다.
'통영'에서 '코타키나발루'까지 요트로 대항해를 나선 이후로도 서로 연락하며 건투를 빌었다.
어제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월간 산' 3월호에 그의 인터뷰 기사가 났다고 했다.
즉시 열어 보았다.
진솔한 그만의 인생 냄새가 행간에 가득했다.
사람 사는 세상엔 '향수 냄새'가 아니라 '사람 냄새'가 나야 한다고 믿는다.
후자가 더 오래오래 깊은 감동을 주기 때문이며 감사와 영감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인터뷰 내용 전문을 그대로 옮겨 본다.
육신의 나이는 조금 들었지만 마음과 영혼은 언제나 푸르고 고결한 청년,
그의 인생여정에 더욱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오늘 새벽 큐티시간에도 그를 위해 기도했다.
멋지고 행복한 아침이다.
파이팅.
울트라 도보 여행가, 백패킹 도사, 자유인으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우리 땅 5,800km를 224일간 25kg 배낭을 메고 완주한 이헌준(58)씨다.
그는 지난해 4월부터 11월까지 8개월간 경북 안동을 출발해 낙동강 자전거길을 따라 부산으로 가서, 해파랑길을 따라 동해안을 거쳐 강원도 고성에 이르렀다.
여기서 평화누리길을 따라 강화도 통일전망대까지 횡단했으며, 다시 해남 땅끝까지 서해랑길을 따라 걸었다.
이후 해남에서 남파랑길 따라 남해안을 거쳐 부산 오륙도까지 횡단했다.
한반도 둘레를 따라 완주한 그는 제주도로 가서 올레길을 걷고, 울릉도와 독도까지 갔다가 포항에서 안동으로 걸어서 돌아왔다.
섬으로 이동할 때 이외에는 모두 걸어서 완주했으며, 일정의 9할 이상을 텐트 치고 야영했다.
끼니의 절반 이상은 직접 해결했다.
텐트, 침낭, 매트리스, 식량, 버너, 코펠 등을 가득 담은 그의 그레고리 펠리세이드 80리터 배낭은 25kg에 달했지만, 몸을 무게에 적응시켜 매일 25~30km를 걸었다.
환갑을 앞둔 나이에 폭염과 장마를 묵묵히 겪어내며 고행에 가까운 대장정을 끝낸 것.
일기를 쓰듯 매일 페이스북에 여정을 사진과 글로 기록해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코리아둘레길앱, 올뎃스템프앱, 두루누비앱, 맵스미앱을 활용해 도보 완주를 인증했다.
30~40일 정도의 백두대간 일시종주는 봤어도, 200일이 넘는 둘레길 여행이라니, 놀랍고 궁금했다.
둘레길 대장정이 끝나고 인터뷰를 위해 연락했더니, 그는 "요트 여행을 가는데 한 달쯤 걸릴 것"이라 했다.
224일을 걷고,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요트를 타고 동남아로 간다니, 어떤 사람일지 궁금증은 더 커졌다.
지난해 12월 초 요트를 타고 떠난 그는 1월 중순이 되어 돌아왔다.
강렬한 붉은색 등산복과 붉은색 안경테, 긴 수염과 자연스럽게 기른 헤어스타일.
멀리서 봐도 범상치 않은 자연인의 아우라가 풍겼다.
그는 말수가 적었다.
인터뷰하기 어려운 축에 속했지만, 솔직하고 겸손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걷고, 식사를 하고, 또 걷고, 차를 마셨다.
그는 작은 것에 감사하고 행복해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조용하지만 편안한 웃음으로 상대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그만의 내공이 있었다.
"60일 넘게 걸으니, 25kg 무게가 익숙해졌어요.
1인용 가벼운 텐트를 쓰다가 3kg이 넘는 국산 텐트로 바꿨어요.
좁고 가벼운 텐트보다 무게가 있어도 공간이 여유로운 게 좋더라고요."
어떻게 이런 '울트라 도보 여행'을 시작했는지 물었다.
몇 년을 거슬러 올라 그는 2015년 터키에서 출발해 스페인까지 5,500km를 250일 동안 걸어서 유럽을 횡단했다. 주로 유럽 시골을 걸었는데 그때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
풍경도 좋았고 시골 사람들의 정도 좋았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제대로 둘러보고 시골 정을 느껴보자'고 결심했으나, 개인 사정으로 2022년이 되어서야 실행으로 옮겼다.
긴 여정에서 '한국인의 정'도 느꼈다.
해질 무렵 마을 이장이나 동네 어르신께 허락을 받아 정자에 텐트를 쳤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마을회관에서 자라고 문을 열어 주는 일도 많았다.
할머니들이 밥을 차려주기도 하고, 반찬이나 김치를 포기째 챙겨 주기도 했다.
무거운 김치는 짐이 되지만 버릴 수 없어 며칠간 김치만 먹기도 했다.
아침은 간단히 행동식으로, 점심은 지나다 마주치는 식당에서 먹고, 저녁은 라면이나 '스프밥'을 해먹었다.
코펠에 밥할 때 라면 스프를 넣으면 간이 짭짤하게 맞춰져 별다른 반찬 필요 없었다.
쌀과 라면스프로 끼니를 해결한 셈이다.
그가 본 시골의 실상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포장된 길과 산길 할 것 없이 버려진 쓰레기가 많았다.
야산에도 쓰레기가 넘쳐 났는데 '여기까지 들고 와서 버릴 정도의 열정이면 돈을 내고 버리는 게 나을 텐데'하는 생각을 숱하게 했다고 한다.
시골 내륙은 농사 쓰레기를 비롯해 TV 같은 가전제품이나 생활 쓰레기가 많고, 해안가는 버려진 어구 같은 해양 쓰레기가 넘쳐 났다.
게다가 시골은 사람이 거의 없고 농사도 외국인이 짓는 경우가 많았다.
환경에 대한 의식도 없지만 치울 사람도 없다는 것.
그에게 힘들어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을 묻자, "없었다"고 답한다.
"저도 신기한데, 아침에 배낭을 메면 피곤한 게 없었어요.
잠도 하루에 4~5시간밖에 안 잤어요.
새벽 2~3시면 일어나서 뒤척이고 휴대폰 보다가 해 뜨면 걷고, 오후 4~5시면 마무리했어요."
사람도 별로 없는 시골을 혼자 걷고, 혼자 잘 때 외로움과 무서움은 어떻게 극복했는지 물었다.
"시골 촌놈이라 무서운 게 없어요. 장거리는 혼자 가는 게 더 편해요. 걷고 싶을 때 걷고, 쉬고 싶을 때 쉬고. 원래 말수가 적어서, 하루에 한마디도 안 하는 게 익숙해요. 혼자서도 잘 놀고 심심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경치만 봐도 좋고, 걷는 것 자체로 좋았어요."
오히려 그를 힘들 게 했던 것은 걷기가 아닌, 페이스북 댓글이었다.
매일 일기를 써서 인터넷에 올리면 사람들의 잔소리가 쏟아졌는데 그게 스트레스였다.
하루에 37km를 걸었다고 적으면, '더운데 무리하는 거 아니냐'는 댓글이 달리고, 적게 걸으면 짧게 걸었다고 뭐라 하는 댓글이 올라왔다.
사람들의 댓글로 인해 페이스를 잃어 두 달을 고생했다고 한다.
장기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건, 직업이 없어서다.
돈이 필요할 땐 아르바이트를 해서 여행 경비를 조달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솔로이기에 가능한 자유로움이다.
"친구들은 자식 키워서 시집장가 보내고, 경제적으로도 왕성하게 일할 나이인데, 저는 그 반대이니 부러워하는 친구도 있지만 안 좋게 보는 친구도 있죠.
저는 돈 버는 걸 내려놓았어요.
돈은 없지만 가진 것에 만족해요.
친구들 소고기 먹을 때 돼지고기 먹으면 되고, 돼지고기 먹을 때 야채 먹으면 돼요. 우리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요. 조금만 내려놓으면 행복해요. 행복은 내 안에 있으니까요."
처음부터 직장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지독히 일에 몰두했던 시절도 있었다.
이헌준씨는 서울 충무로의 인쇄소 출력실에서 23년간 일했다.
군 제대 후 40대 중반까지 일만 했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회사에서 살다시피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할 때도 등산 경력이 적지 않았다.
쉬는 날은 거의 산으로 쏘다녔다.
"매일 야근하고 밤샘 작업했죠. 수작업할 땐 한 달 동안 하루도 못 쉴 때도 있어요. 새벽 2~3시까지 일하고 아침 7시 출근했죠. 주 6일 근무에, 옛날에는 다 그랬어요. 그럴 때도 쉬는 날은 산에 갔어요. 갈 수 있는 데가 산밖에 없었으니까. 산에 가서 스트레스 푸는 거죠."
"1986년 군 생활을 경기도 연천 고대산 정상에 있는 부대에서 했어요. 그때는 제대하면 산에 절대 안 간다고 했는데, 술 담배를 끊으면서 체중이 10kg 불어 운동 삼아 2000년부터 등산을 했어요."
2005년부터는 거의 매주 산행을 하여 100대 명산은 물론이고, 백두대간을 두 번 종주했다.
주로 장거리 종주를 즐겼는데 "아무 생각 없이 걸을 수 있어 좋고, 정상에 섰을 때 기분이 좋다"고 한다.
2013년 2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이 폐업하면서, 모처럼 좋아하는 산행과 여행을 제대로 할 기회가 생겼다.
마침 친형이 40년 넘게 스페인에 살고 있어, 얼굴도 볼 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회사가 문 닫았을 때는 막막하여 실의에 빠졌으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2015년 유럽을 횡단할 땐 서쪽으로 간다는 큰 틀만 잡아놓고 무조건 국도와 마을길을 따라 걸었다.
"경로는 그날그날 현장에서 길을 정했다"며 "현지인이 추천하는 곳도 들르며 걷다 보니 오래 걸렸다"고 한다.
세밀한 계획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어서 250일 만에 유럽을 도보횡단한 것.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보름 정도만 고생하면 누구나 무거운 배낭을 멜 수 있어요. 배낭무게가 25kg인 줄 알고 걸었는데 어느 날 숙소에서 저울이 있어 재어 보니 30kg인 거예요. 다음날부터 어깨가 아픈데 아는 게 병이다 싶더군요."
동유럽에서는 숙소와 식당을 주로 이용했다.
1만5,000원이면 하루 먹고 잠잘 수 있어 가능했다.
물가가 비싼 곳에서는 텐트를 치고 코펠로 음식을 해 먹었다.
그래서 "숙소를 예약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없었다"며 "유럽은 동네마다 축구장이 있어 숙소가 비싸면 축구장 처마 밑에 텐트를 쳤다"고 한다.
일정의 4할을 야영으로 해결했다.
"저는 외국어를 못 해요. 영어를 전혀 못 해도 안 되는 건 없었어요. 떠나기 전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손짓 발짓만 해도 필요한 건 다 해결되었어요."
모두 10개 나라를 거쳤는데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에서는 현지 언론사 인터뷰도 했다.
붉은 등산복을 입은 동양인이 80리터 배낭을 메고 태극기를 달고 다니니 눈에 띄었던 것.
번역앱으로 인터뷰한 내용이 기사에 실리고, 곳곳에서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았다.
덕분에 현지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무섭고 불안한 건 가진 자들의 것이에요. 저는 가진 게 없고 거지꼴이라 두려울 게 없었어요. 물론 현금이 있었지만 강도를 만나도 괜찮도록 깊이 숨겨뒀어요. 딱 한 번 위기가 있었어요. 세르비아에서 청년들이 워낙 살갑게 굴어서 같이 맥주도 마시고 마음 놓고 있었는데, 그 친구들에게 6만 원을 도둑맞았어요. 오히려 예방주사가 됐죠. 이후부터 아무리 친절해도 가방은 꼭 지켰어요."
유럽을 횡단하면서 그는 '자유인 이헌준'으로 거듭났다.
유럽 횡단 후에는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모로코 해안선 300km를 걸었다.
그는 "유명한 관광지만 아니면 친절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후 고향 안동의 부모님의 건강이 악화되어, 몇 년간 안동에서 간병에 매진했다.
부친(93)과 모친(89)이 눈을 감는 것을 곁에서 지킨 뒤 2022년 참았던 여행 본능을 분출했고, 그것이 224일간의 코리아둘레길 완주였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기행으로 보이는 그의 대장정은 부모를 간병하는 동안 꾹꾹 눌러온 것들의 자연스런 표출이었다.
경제력이 부족해도, 말수가 적어도, 그에게는 친구가 많다.
자유인 이헌준의 성향을 잘 아는 이들이기에, 식사에 초대하고, 여행에 초대하기도 한다.
2014년 한국인 최초로 요트 세계일주를 한 김승진 선장도 그들 중 한 명이다.
김 선장은 이씨가 코리아둘레길을 걸을 때도 세 번이나 찾아와 응원하고 밥을 사주었다.
대장정을 마친 후에는 뒤풀이 여행으로 동남아 요트 여행에 초대해 40일간 배에서 같이 지냈다.
"별장을 갖고 싶지는 않아요. 별장 있는 친구를 두는 게 더 좋아요. 관리 안 해도 되고 묶이지 않고 다닐 수 있고요. 요트도 손 가는 게 엄청 많아서, 요트를 사기보다는 요트 가진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좋아요."
뭍이든 바다든 적응을 잘하는 그는, 파도가 높았을 때도 멀미 한 번 하지 않았다.
세계 어디를 가서도 멀미나 설사를 한 적 없을 정도로 여행 체질이라는 것이 그의 자랑이다.
"망망대해에서는 바다밖에 안 보여요. 밤에는 숱한 별과 바다 속 플랑크톤의 일종인 야광충이 빛을 내는데 너무 아름다웠어요."
올해는 본지에 '거칠부 다이어리'를 연재하고 있는 고영분씨가 계획한 히말라야 트레킹에 참가할 예정이다.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는 그의 눈은 벌써 웃고 있다.
그의 여행관을 물었다.
"여행은 얻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거예요. 자연을 보면서 하나씩 툴툴 털어버리는 거죠. 세상 살다 마음의 찌꺼기가 쌓이면 가서 털어버리는 거. 그게 제가 생각하는 여행이에요. 여행 가서 뭘 얻었나, 뭘 느끼고 왔나가 아니라 비우고 오는 거죠. 여행 갈 때 저는 계획을 안 짜요. 출발지와 종착지만 정해 놓고 갑니다. 짜 놓고 가는 것보다 즉흥적으로 부딪혀서 느끼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의 블로그 사진을 보면 10년 전에도 빨간색 등산복을 입은 걸 볼 수 있다.
빨간색을 선호하는 이유는 "사진이 잘 받아서 좋고, 칙칙하지 않아서 좋고, 산에서 조난당해도 눈에 띄어 좋다"는 것. 다 내려놓고 사는 도인 같은 그에게 남은 욕심이 있는지 궁금했다.
"아직은 욕심이 많아요. 장비 욕심이죠. 그러니 배낭이 무겁죠. 가져가서 한 번도 안 꺼낸 물건도 있어요. 이제 살면서 차차 내려놓아야죠."
어딘가에 빨간색 옷을 입고 큰 배낭을 메고 걷는 이가 있다면, 사람들은 멀리서도 "이헌준이다"라고 외칠 것만 같다.
갖기보다는 내려놓는 삶을 택한 '빨간 도사 이헌준'의 다음 발걸음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