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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새벽에(1)
마 28:1-10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마 28:1-10 / [예수께서 부활하시다;막16:1-8,눅24:1-12,요20:1-10] 안식일 지나고 그 이튿날 동이 틀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갔다. 2)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더니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다. 3) 천사의 얼굴은 찬란하게 빛났고 옷은 눈부시게 희었다. 4) 이것을 본 경비병들은 겁에 질려서 죽은 사람처럼 땅바닥에 엎어졌다. 5) 그때 천사가 그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를 찾고 있는 줄을 내가 안다. 6) 그러나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이 누우셨던 곳을 와서 보라. 7) 그리고 빨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분을 뵐 것이오' 하고 전하라. 나는 이 말을 전하러 왔다.' 8) 여자들은 겁에 질렸으나 한편 기쁨에 가득 차서 무덤에서 뛰어나와 천사가 말해 준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단숨에 달려갔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그 여자들 앞으로 걸어오시며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여자들은 땅에 엎드려 예수의 발을 붙잡고 경배를 드렸다. 10)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곧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라.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안식일 다음 날 새벽, 무덤에 간 여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주의 천사를 만납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먼저 가셨다고 전합니다. 두려움과 큰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달려가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평안을 전하십니다.
부활의 첫 번 목격자(1-6) 복음의 핵심이자 절정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반복해서 자신이 삼일 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6:21; 17:23; 20:19).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3시 경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토요일을 거쳐 주일 오전 부활 때까지 무덤에서 머무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씀처럼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사실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무덤을 보려고 온 것일 뿐이었습니다(1). 그런데 이들은 천사를 통해 부활의 소식을 가장 처음 듣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6) 곧 이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처음으로 만나 뵙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9). 이 여인들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의 확신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지금도 주십니다. 부활은 이론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논쟁을 통해 경험할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가만히 생각하게 될 때, 또한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묵상할 때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6).
부활의 첫 번 증인(7-10) 두 여인은 부활을 체험하자마자 부활을 전하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부활의 첫 증인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실은 무덤을 지키는 자들도 부활을 목격하기는 했으나, 그들은 무서워 떨기만 했을 뿐, 여인들이 느꼈던 큰 기쁨이 없었습니다(4). 부활의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라고 다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의 기쁨을 알아야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8). 예수님의 부활이 내게 기쁜 일이면 부활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믿는 사람에게 확증하시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부활을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면, 부활의 기쁨이 식은 것입니다.
적용: 당신은 주님의 부활하심에 대한 확실한 체험이 있습니까? 요즈음 주님에 대한 당신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당신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기뻐하며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려는 마음의 자세가 당신에게는 얼마나 있습니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첫 만남이 있었던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살아나심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아주 평범하게 평안하냐? 물으시면서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부활을 너무나 쉽게 이루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부활을 믿는 자에게만 그 부활이 당연한 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 설 교 >
갈릴리에 가서 보고 들은 이야기
마 28:9-10 / 김명혁목사
갈릴리는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역입니다. 특히 부활하신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에게 제일 먼저 분부하신 말씀이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리로 가라”고 하신 분부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형제들에게 가서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28:1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14:27,28).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갈릴리에 집착하셨는지 오늘 아침 그 이유를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을 세 지역으로 나누는데 남부 지역이 유대 지역이었고, 중부 지역이 사마리아 지역이었고, 북부 지역이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이방과 같은 지역이었고 이방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갈릴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멸시를 받는 사람들이 살던 소외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주 관심은 갈릴리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그의 사역의 대부분은 갈릴리에서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 받기를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분부하셨지만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만나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열 한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만나시고 마지막 선교 위임령을 부여하신 곳이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 가서 주님을 마지막으로 뵈옵고 주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들었습니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를 뵈옵고.” 이제 갈릴리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갈릴리에 대한 관심이 선지자 이사야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 탄생을 예언하면서 메시야 탄생을 통한 큰 빛이 이방의 땅 갈릴리에 비췬다고 예언했습니다. 사9:1,2을 읽습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여기 스블론과 납달리는 모두 이방의 땅 갈릴리 지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남방의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실 것이지만 조만간 그 빛이 이방의 땅 갈릴리에 비췰 것을 미리 예언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에 주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땅에 머물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이 비록 예루살렘에서 일어났고 성령 강림의 사건이 비록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 강림의 복음이 예루살렘에 머물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만간 구원의 복음이 사마리아는 물론 사마리아보다 더 북방인 갈릴리를 통해 이방의 세계로 퍼져나갈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이방을 향한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향한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과 천민들과 멸시를 받는 사람들을 위한 종교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하신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내신 곳이 바로 갈릴리였고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하신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애굽에 피난 갔다가 오셔서 사신 곳이 바로 갈리리 나사렛이었습니다.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마2:22,23).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가난한 자들과 천민들과 멸시를 받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서 사셨습니다. 아마 그래서 미국 유학에서 갓 돌아온 한경직 목사님이 서울이나 평양에 머물지 않고 평안북도 신의주로 가서 목회를 시작하셨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신 후에는 갈릴리 북쪽인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셔서 사시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2-16).
그리고 그곳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서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마4:17). 그리고 바로 그곳 갈릴리에서 안드레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가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4:18,19).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전하신 곳도 가장 중요한 이적을 행하신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산상 설교를 하신 곳도 갈릴리였고,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곳도 갈릴리의 가나였고, 백부장의 하인과 베드로의 장모와 가나안 여자의 딸과 야이로의 딸을 고치신 곳도 모두 갈릴리였습니다. 오 천 명을 먹이선 곳도 갈릴리의 벳세다 광야였고 물 위를 걸으시고 폭풍을 잔잔케 하신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의 모든 가르침과 거의 모든 이적과 거의 모든 사역을 갈릴리에서 하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이시고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열 한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마지막으로 뵈온 예수님의 모습은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멸시와 저주를 당하시던 약한 모습이 아닌 높이 들림을 받으신 영광스런 모습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영광스런 모습이었습니다. 도마처럼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라고 경배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지극히 영광스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자리를 옮겨(감람원으로) 하늘로 올리워 가시는 주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놀라움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는 지극히 영광스런 모습이었습니다. 열 한 제자들이 정신을 잃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천사들이 나타나서 그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열 한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본 예수님의 모습은 땅에 속한 분이 아닌 하늘에 속한 분이었습니다. 저들이 따르던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속한 분도 아니었고, 나사렛에 속한 분도 아니었고, 예루살렘에 속한 분도 아니었고, 이스라엘에 속한 분도 아니었습니다. 저들이 마지막에 본 예수님은 온 땅에 속하신 분이었고 하늘과 온 우주에 속하신 분이었습니다. 아니 온 땅과 온 우주를 손에 쥐시고 온 땅과 우주를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셨습니다. 저들은 이제 민족주의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회복이 저들의 관심사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저들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열 한 제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들은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는 말씀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땅 끝으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세계 선교의 사명을 부여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선교대위임령’이라고 부릅니다. 땅 끝으로, 모든 족속으로, 이방을 향하여, 복음을 들고 달려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왜 갈릴리에서 하셨습니까? 갈릴리는 이방이었고 이방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갈릴리 저 넘어 북쪽에 안디옥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리고 그 너머에는 갈라디아와 소 아시아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쪽으로 가면 마게도냐의 빌립보와 데살로노니가와 로마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복음을 들고 먼저는 천민들이 사는 갈릴리로 가고 그리고 안디옥을 지나 소 아시아와 마게도냐 각지로 달려가야 할 것으로 미리 보여주시고 싶어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행11:19에 보면 예루살렘에 살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스데반의 일로 박해를 당했을 때 서북쪽 베니게와 구브로를 거쳐 안디옥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해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전하는데.” 그리고 후에는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해서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갈릴리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창12:1-3에 나타난 성부 하나님의 관심이 아브라함에게만 있지 않았고 “땅의 모든 족속”에게 있었던 것처럼, 부활 승천하시는 성자 예수님의 관심도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에게만 있지 않았고 이방의 땅 갈릴리와 갈릴리 저 너머에 자리 잡고 있던 땅끝의 모든 이방 족속에 있었던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도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관심이 갈릴리와 갈릴리 저 너머에 있는 이방의 모든 나라들과 족속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평생 선교사의 삶을 한 번도 살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고 이스라엘에만 머물러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갈릴리로 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천사들의 말씀에 제대로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의 가슴에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서 지금이라도 갈릴리와 갈릴리 저 너머에 있는 이방의 모든 나라와 민족들에게로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서 살지 못한다면 그들을 자주 찾아가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오늘의 갈릴리와 갈릴리 저 너머의 이방은 어디입니까? 우리 나라 선교의 초기에 하디 목사를 통해 회개와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함경도의 원산과 길선주 목사에 의해서 회개와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평양과 한경직 목사에 의해 사랑과 봉사와 구원 운동이 일어났던 평안도의 신의주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함경도와 평안도에 머물지 말고 저 너머 중국과 러시아와 동남 아시아와 저 멀리 중앙 아시와와 아프간까지 가라고 분부하시는 줄 압니다. 저는 오늘의 땅끝은 공산권 지역과 모슬렘권 지역과 불교권 지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과 중국과 동남 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이방의 모든 민족을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목사와 선교사들이 태극기 뺏지를 달고 다니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멸시를 받는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외국인들을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과 따뜻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인즈 워드에게 주신 소외된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과 착한 마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갈릴리와 이방을 품으신 주님의 마음과 생각과 눈물을 품고 주님처럼 살다가 주님처럼 죽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가 기도한 다음에 “갈릴리 마을 그 숲 속에서”를 다 같이 부르겠습니다. 1절은 성가대원들만 2절은 교역자들과 교사들만 부르고 그리고 다시 1절과 2절은 다 같이 부르겠습니다.
예수 부활의 기쁨
마 28:8-10 / 백장흠목사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여자들이 먼저 차지하였습니다. 왜 예수께서는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이후에 먼저 보여주셨나요? 여자들에게 보여주셔야 소문이 속히 날 것 같아서였다는 재담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면 몇 가지 달라지는 게 있답니다.
1)외모에 신경 쓰지 않던 이가 꾸미기 시작한답니다.
요즈음 말로 얼짱 몸짱이 되려고 애쓴답니다. 몸짱 열풍을 몰고 온 사람은 일산에 사는 한 가정 주부 정다연씨(39)였답니다. 그녀는 의사로부터 마른 비만이라는 진단을 받고 근처의 휘트니스센터에서 몇 년간 몸을 단련했습니다. 이후 늘씬한 몸을 만든 정씨는 자신의 사진과 함께 트레이닝법을 모 인터넷사이트에 연재하고 이것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전국 최고의 인기인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여자가 갑자기 몸치장하면 뭐라고 표현합니다.
2)열등감이나 우울증에 사로잡혀 있던 이가 쾌활하고 말이 많아진답니다. 기쁨이 생긴답니다.
3)삶에 의욕이 없던 이가 갑자기 생기가 넘치게 된다고 합니다.
4) 관심이 없던 이가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그리움을 알게 된답니다. 여인들이 예수의 시체를 위하여 무덤을 찾아갔다가 살아나신 예수를 만나고 기뻐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0:20절에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들이 ‘기뻐하더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그렇게 사랑하던 여인들이 죽은 예수가 아닌 살아나신 예수의 모습을 보았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예수의 부활은 우리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문제는 기쁨을 기쁨으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인류에게 큰 기쁨입니다.
1. 부활이 우리의 기쁨이 되는 이유는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바로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는 말씀대로입니다. 누구도 이 죄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선하게 살아라. 도덕과 윤리를 지키라고 말은 할 수 있으나 내가 너의 죄를 사하였느니라 이 말은 아무도 못합니다. 할 수도 없습니다. 죄는 벌이 따릅니다. 이것을 누가 피할 수 있습니까? 죄는 불행의 근원입니다. 범죄하고 행복하다는 이를 보았습니까? 마음에 항상 불안합니다. 양심에 자책감을 받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평안함이 없습니다. 죄를 범하면 일이 잘되지 않습니다. 죄는 축복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행 난행을 하였습니다. 그런다고 죄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수시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죄 값을 담당하려고 돌아가셨는데 부활하지 아니하였다면 죄 값으로 돌아가신 것으로 끝납니다.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속죄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사형선고 받은 자의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사형을 면하는 길입니다. 죄수번호 몇 번 당신은 감형 받아 사형선고에서 3년형이다 라고 하였다면 3년이라는 세월이 길지도 않고 옥중에서의 삶이 그렇게 고마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담 이후에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할 수 없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승리를 보장받았기 때문에 기쁨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승리를 선언하신 날입니다. 내가 이겼다. 이긴다는 것처럼 좋은 게 없습니다. 이겨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시합에 나가서 매 게임마다 집니다. 지는 선수는 선수대접을 못 받습니다. 군대가 전투를 합니다. 졌습니다. 이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겨야 삽니다. 이겨야 환영받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이깁시다. 영적인 전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부활신앙으로 승리합시다. 승리는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영광입니다. 실패는 비극입니다. 서러움입니다. 억울합니다. 안쓰럽습니다. 이깁시다. 절망에서 이겨야 합니다.
왜 낙심하십니까? 예수께서는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산을 옮긴다고 하였습니다. 낙담이라는 산들을 옮길 수 있습니다. 믿음은 기적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이성을 초월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은 인간이 상상 할 수 없는 놀라운 힘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집시다.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왜요? 예수님이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망을 이겼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여기 기뻐하였다는 말은 전율할 만큼의 기쁨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항의를 못합니다. 사망의 지배를 받고 사는 인간들입니다. 아무리 큰소리를 치던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초라하게 보입니다. 죽음을 이기거나 극복한 이는 없습니다. 죽음을 대신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다 두려워합니다. 죽음 앞에는 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연구하는 게 무엇입니까? 더 오래 사는 것을 연구개발하고 있습니다. 더 오래 사는 연구는 할 수 있어도 죽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지는 못합니다. 연구한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심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겁내지 아니 합니다.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을 믿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바울은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를 완전히 사형해도 좋다는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여 자기들의 법으로는 합법에 의하여 사형선고를 내려 드디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는 완전히 죽었습니다. 다리를 꺾지 아니하여도 되었습니다. 확실하게 죽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부활하셨습니다. 사망은 생명을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죽음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합니다. 사람이 이사 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 죽었다고 말합니까? 이사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동안 살다가 육신이 죽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100세가 넘으면 세상을 떠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세상에서 천국으로 이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을 밝히 말하기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의 집에서 생명의 집으로 이사하였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5:24)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말대로 사망입니다. 믿는 사람은 이사하는 것입니다.(할렐루야) 예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것같이 우리도 예수의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기에 죽음은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얼마 전에 미국 뉴스위크지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미국 사람들 중에 94%는 신의 존재를 믿고 있으며 77%는 천국이 있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불과 24%랍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도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신앙으로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진리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정의가 승리하였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정의를 부르짖다가 비참하게 패하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이 사형을 받을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재판 자체가 불의 한 거 였습니다. 최고의 법정에서 예수는 죄를 찾지 못했다 라고 하였습니다.(요 18:38) 빌라도의 아내가 남편에게 권면하기를 저 옳은 사람에 대하여 상관하지 말라고 까지 하였습니다.(마 27:19) 죄 없는 사람도 죽이는 것은 불의입니다. 불법입니다. 세상은 불의가 이기는 것 같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세상은 불의가 이기는구나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부활하심으로 아니다 불의는 이기는 게 아니라는 게 증명되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으시는 이가 있습니까? 불의가 이기지 못합니다. 의가 승리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끝까지 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의롭게 살면서 힘든 분들이 계십니까? 기다리세요. 의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잘살려고 하기보다는 의롭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 불의한 중에 무엇을 기대할게 아니라 의롭게 살려고 하여야 합니다.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불의가 무엇입니까? 옳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명분을 찾으려 하지 맙시다. 자기가 옳다고 외친다고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의가 의입니다. 예수를 죽인 자들은 분명히 불의에 의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재판 자체가 불의한 재판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죄를 찾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죽였습니다. 불의는 일시적으로 이기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의가 이기는 것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일시적인 승리를 추구하지 맙시다. 바르게 옳게 살려고 하여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의를 지키는 이들에게 확실한 승리를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힘들어도 의롭게 사는 이들에게는 기쁨입니다.
3. 부활은 소망입니다.
예수는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예수님처럼 다시 부활한다는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고전 15:~) 나무를 심었습니다. 사과나무입니다. 첫 열매가 홍옥이라는 사과입니다. 다음해에는 국광이라는 사과가 여는 게 아닙니다. 첫 열매대로 홍옥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도 죽습니다. 언제인가는 죽습니다. 건강을 관리하고 과학적인 연구를 하여 더 오래 살 수는 있는지 모르나 죽지 아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어도 다시 삽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제 부활하느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가 죽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죽었다면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실 때 무덤이 열리고 부활하게 됩니다. 우리 살아남은 자들은 공중에 휴거됩니다. 이때 부활은 1차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계속 무덤 속에 있다가 예수께서 공중 혼연 잔치와 천년왕국이후에 1차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 모든 사람들이 부활합니다. 이는 영원한 형벌을 받기 위한 부활입니다. 그래서 사망의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복이 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잘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차 부활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주님이 믿는 이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1-2) 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살아도 소망이 있는 이와 없는 이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소망입니다. 그러기에 기쁨입니다. 사람들이 자살합니다. 왜 그러합니까?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살은 더욱 비극입니다. 틀림없이 지옥 갑니다. 자살하는 이유는 힘들다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괴롭다고 호소합니다. 하기야 자살하는 이의 심정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게 예수의 부활입니다. 예수의 부활신앙으로 희망을 가지세요. 믿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여러분들의 사업이 삽니다. 가정이 삽니다. 우울증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육체적인 우울증보다 더 무서운 게 영적 우울증입니다. 영적 우울 증세는 이러합니다. 1) 영적인 삶, 신앙생활에 무력합니다. 유혹이 왔을 때 이기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말 한 마디를 듣고도 시험에 듭니다.
2) 신앙생활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우왕좌왕 합니다.
3) 영적 생활에 불만이 많고 신앙생활에 흥미가 없습니다. 교회생활에 불만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 못됩니다. 입에서 감사가 나오고 기쁨이 있는 신앙은 가장 건강한 신앙상태입니다.
4) 은혜생활을 깊이 있게 하지 못합니다. 육신적인 우울증 때문에 자살하게 된다고 하는데 영적인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큰 손해를 입습니다.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늘 나라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는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다.
첫째,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으면 기쁨입니다. 부활을 믿고 기쁘고 기쁘도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죽어도 사는 것입니다.
둘째,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기셨습니다. 승리합시다. 세상에서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기쁨입니다. 사단의 세력을 이깁시다. 지고 우는 자가 되지 맙시다. 이기고 기뻐합시다. 육신생활을 승리하여야 합니다. 가정생활도 승리하여야 합니다. 내가 처한 곳에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확실하게 이기고 이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23:11) 실패하였습니까?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약하여지면 지는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하세요. 용기를 내세요. 예수가 우리들에게 승리를 보장하셨습니다. 이기고 이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소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식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건강하지 못해서 이 병원 저 병원에 전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낙심은 마귀가 주는 은사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불행을 치료하는 한 가지 약이 있는데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믿기에 하늘나라의 소망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움 아무리 얼짱 몸짱 하여도 나이가 들면 별 볼일 없습니다. 진정으로 아름다움은 소망 있는 삶입니다. 소망은 감옥이라도 평안과 기쁨입니다. 절망에도 희망의 창문은 열려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실패하였어도 실패한 것으로 끝날 뿐이고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63년 3월 8일 그 유명한 워싱턴 대행진에서 한 연설 중에 나는 꿈이 있다 라는 내용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어려움이 첩첩이 쌓여 있어도 그러나 나는 꿈이 있다. 꿈만 버리지 않는다면 절망의 동산에서 희망의 반석을 캐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꿈만 버리지 않는다면 미국내의 꽉 찬 불협화음을 형제애의 아름다운 심포니로 변화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활신앙으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넷째, 예수의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새벽에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즉시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 왜 예수께서 여자들을 제일 먼저 만났을까? 자동차 중에서 세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무엇입니까? BMW라고 합니다. 여자들의 입이 바로 BMW라고 합니다. 즉, Big mouth woman의 약자입니다. 여자분들의 입이 빠릅니다. 우리는 BMW가 되어 예수 부활하셨다 라고 힘있게 신속하게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거기서 나를 보리라
마 28:7-10 / 김광일목사
엘리자베스 퀴버 워스는 죽음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한 사람입니다. 한 번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환자들의 병동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많은 환자들이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흑인 간호사가 환자들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면 모두들 얼굴이 환해지고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죽을 때도 평안하게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궁금하여 그 흑인 간호사에게 물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환자들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저들이 기쁘게 임종을 맞이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때 흑인 간호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나의 좋으신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옳습니다. 좋으신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과 소망이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길에서 만나 하는 인사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였습니다. 그러면 상대방도 "그 분은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화답하였답니다. 우리도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분은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절망과 죽음의 무덤 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절망을 말하는 날이 아닙니다. 오늘은 죽음을 말하는 날이 아닙니다. 오늘은 소망을 말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승리를 말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부활을 말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영생을 말하는 날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 가신 곳은 어디입니까? 본문 말씀에 보니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 26:32에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수 차례 예언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셔서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 아니라 갈릴리로 먼저 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어떠한 곳입니까? 예루살렘이 붙잡혀 고난 당하고 죽임 당한 비극의 현장이라면 갈릴리는 주님을 만난 은혜의 현장입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갈릴리는 처음 사랑이 있던 곳입니다
가이드 포스트지에 킬링거 부인의 간증이 실렸습니다. 이혼한 지 만 1년이 되던 날, 그녀는 모든 것이 먹구름에 싸여 자살하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우연히 딸의 책상에서 딸의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숙제물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여덟 쪽인데 매 쪽에 한 살부터 여덟 살 때까지의 사진 한 장씩을 붙이고 자기의 삶을 설명한 숙제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쪽에 End(끝)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의 글씨 옆에 담임선생님의 'Your beginning'(너의 시작이다)이라는 글씨가 'End'라는 글씨를 내리 누르듯이 크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킬링거 부인이 새 출발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여덟 살 난 아이가 이야기의 끝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마흔이 된 자기도 결코 끝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 믿고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여덟 살의 어린아이가 자신의 숙제에 "끝"이라고 썼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던 것처럼 마흔살이지만 킬링거부인은 내 삶은 이제 시작이라는 믿음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고향이었습니다. 고향이 그리워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심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리는 열 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곳입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이 주님을 처음으로 따라나섰던 감격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겠다는 첫사랑이 있었던 것도 갈릴리였습니다. 3년 동안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을 위하여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결단했던 곳이 바로 갈릴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의 모습은 십자가 사건을 전 후로 해서 모두 절망하고 끝이라고 생각하며 좌절하였습니다. 열정은 식었습니다. 감격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불안과 두려움만 있었습니다. 처음 열정과 감격과 사랑이 다 사라져 버리고 비겁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가졌던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처음 감격을 회복하라, 처음의 열정을 회복하라"는 주님의 뜻이 이 명령을 통하여서 내리신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그들에게 처음 사랑과 감격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끝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생각이지, 하나님에게는 시작점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시작을 가능케 하는 예수님을 향한 첫 사랑을 회복시켜주는 갈릴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갈릴리는 진정한 회개가 있는 곳입니다
1999년 4월 20일 히틀러의 생일날 미국 콜로라도의 리틀톤이라는 마을에서 두 학생의 총기 난사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히틀러 신봉자인 두 학생은 학생들을 한 곳에 몰아 놓고 총구를 들이대고 한 사람씩 물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대부분의 학생들이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두 학생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캐시 버낼이라는 학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리고 너희들도 역시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한다" 화가 난 두 학생은 "너는 네가 믿는 하나님 곁으로 가라" 말하여 총을 난사하였습니다. 캐시 버낼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거룩한 순교의 순간입니다. 이 사건이 끝난 뒤에 학생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캐시 버낼의 순교 앞에 자신들의 비겁함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그 후 그들의 부끄러움이 신앙의 각성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캐시 버낼의 담대한 신앙 고백의 장면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고, 잠자던 많은 심령 속에 부흥의 불길을 지피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미국 전역의 학교에서 "우리도 캐시 버낼을 따르자" 는 신앙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캐시 버낼의 부활 신앙은 그를 담대하게 만들었고, 담대함 가운데 맞이한 그의 순교는 놀라운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갈릴리로 가라는 명령은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죄악의 길이고, 잘못된 길이기에 거기서 떠나라"는 주님의 절대적 명령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옛날의 그물을 붙들고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 못 잡은 베드로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게 하시매 153마리의 고기를 잡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기적을 체험케 하심은 베드로를 회개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를 부인하고 나를 버리고 도망간 죄를 다 용서하시며 내가 너희들을 믿는다 하시며 진정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갈릴리로 가라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가지 말아야 곳인 죄악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서지 말아야 할 곳인 잘못된 곳에 서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야할 곳은 예루살렘의 출세와 세상적인 자리가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은혜를 주시는 갈릴리로 가는 회개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잘못된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못된 곳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시간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용서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하시는 "갈릴리로 가라"는 주님의 명령 앞에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갈릴리는 새로운 사명이 있는 곳입니다
목화는 두 번 꽃을 피웁니다. 세상의 모든 식물들은 한 번 꽃을 피웁니다. 그러나 목화는 두 번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가지와 줄기가 건강할 때 예쁜 꽃을 피웁니다. 두 번째 꽃은 온몸이 시들어서 말라 죽어가면서 솜꽃을 피웁니다. 목화가 마지막 솜꽃을 피울 때는 말라비틀어지면서 아름다운 솜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갈릴리로 가는 사람은 모든 것을 희생함으로 헌신하면서 주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걸어갈 때 그곳에 진정한 부활의 기쁨이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마치 목화가 마지막 솜꽃을 힘들어 죽어갈 때 아름답게 피어내듯이 힘들고 어려워도 마지막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 주님께서 아름다운 삶으로 승화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갈릴리로 제자들을 부르심은 그들의 감격과 열정을 되살려 부활의 주님 안에서 믿음의 확실한 근거와 소명을 얻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사명을 확인하고 받은 제자들은 후에 모두 다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로마에서 순교 당하였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죽었습니다. 열 제자 모두가 주님을 위하여 순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톱에 짤려서 죽습니다. 맹수의 밥이 됩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헌신하였습니다. 부활의 진정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게 맡겨진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사명은 기억하고만 있는 과거에 속한 것이 아니라 현재 움직이며 일하는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사명은 비젼입니다.
한 사람이 교통사고로 머리와 눈을 다치고 눈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시력은 회복되었으나 이번에는 기억력이 저하되기 시작했습니다. 기억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장기간하여 기억력이 많이 좋아졌으나 다시 시력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담당 의사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과거에 집착하는 기억력을 찾으시겠습니까? 아니면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시력을 찾겠습니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미래의 사명을 선택하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무덤에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출발지인 갈릴리에서 만나야 합니다. 갈릴리에서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갈릴리에서 잘못된 신앙을 회개해야 합니다. 갈릴리에서 식어진 사명감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갈릴리에서 세상을향한 복음의 비젼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갈릴리로 갑시다.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라디에서의 만남과 나눔과 기쁨
마 28:9-10, 행2:42-47 / 김명혁목사
저는 인생은 만남과 나눔과 기쁨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지난 한 주간 동안 극동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도 만남과 나눔으로 기쁨의 시간들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현지 러시아 목회자 50여명과 한인 선교사 20여명이 한데 모여 “연해주 목회자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기도와 교회 성장”이란 주제로 최복규 목사, 홍영기 목사, 김명혁 목사가 강사로 수련회를 인도했는데, 은혜와 감동과 기쁨이 충만한 유익한 수련회였습니다. 몇 가지 하이라이트만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한인 선교사 가족들과 즐거운 만남과 나눔의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월요일 오후 4시경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하자 현지 선교사들의 반가운 영접을 받고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블라디보스톡 호텔로 향했습니다. 호텔에 들러 여장을 푼 후 정호상 선교사의 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간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차를 타자마자 선교사 집에서의 저녁 식사를 취소하고 블라디에서 사역하고 있는 20여 가정의 선교사 부부들과 자녀들을 제일 좋은 식당에 모이도록 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호텔에서 여장을 푼 후 그곳에서 제일 좋다는 한국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2시간 정도 전에 급하게 연락을 취했기 때문에 2,30여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을 했는데 46명 정도가 식당에 모여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가운 얼굴들이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들을 나누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한국어, 영어, 러시아어로 부르고 간단한 인사의 말을 전한 다음 1인 당 10불 정도 하는 한정식을 모두 맛있게 먹었습니다.
사모 선교사들이 “기가 살아난다”고 말했습니다. 주로 남자 선교사들끼리 모이곤 하는데 사모 선교사들을 함께 불러주어서 너무 좋고 신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이 원하면 목요일 오후 다시 한번 식사 대접을 할 수 있다”고 말하니까 거기 모였던 10여명의 청소년들(선교사 자녀들)이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습니다. 함께 모여 음식을 먹으며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의 교제를 얼마나 사모하고 갈망하는 지를 역력하게 보고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싼타 도밍고에서 모였던 선교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잠간 전한 후 선교사들의 노고와 아름다운 협력 사역을 치하한 후 목요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습니다.
목요일 오후 선교사 부부들과 몇몇 자녀들을 데리고 바닷가 분위기 있는 러시아 식당으로 가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즐거운 교제의 시간을 다시 가졌습니다. (수요일 오후에는 저의 강의 시간을 줄이고 러시아 목회자들을 데리고 바닷가 러시아 식당으로 가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선교지에 가서 선교는 하지 않고 선교사들을 이곳 저곳으로 데리고 다니며 맛있는 음식만 나누어 먹으니 그것이 옳은 일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동우 목사님이 강조하는 대로 그리고 제가 깨달은 대로 선교는 설교나 강의나 전도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교사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노는 것도 선교라는 것입니다.
고등학생이 된 은덕이라는 여학생이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습니다. 5년 전 내가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했을 때 어린 아이들 20여명과 몇 시간 동안 신나게 놀아 준 일이 있는데 그때 내가 어린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그 때 은덕이는 초등 학생이었습니다. 은덕이는 그 사진을 고이 간직하였다가 다시 자기들을 찾아온 나에게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저는 토요일 오후 블라디 공항을 떠나기 전 조그만 예쁜 나무 상자 3개를 사서 은덕이와 다혜와 고은이에게 전해주라고 선교사 한 사람에게 전했습니다. 인생은 만남과 나눔과 기쁨입니다. 선교도 만남과 나눔과 기쁨입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이별을 생각하든지 이별을 가상할 때마다 가슴이 콱 막히는 답답함을 느끼곤 합니다. 그 옛날 어머니와의 나의 이별을 다시 가상할 때도 그렇고, 선교사들의(고향 및 가족으로부터의) 이별을 내가 가상해 볼 때도 가슴이 콱 막히는 답답함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자주 찾아가서 자주 만나주고 위로와 사랑을 나누며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둘째, 블라디에서 ‘교회사 이야기’를 실험해보았습니다.
소련선교회 20년 역사상 현지 러시아 목회자들을 상대로 수련회를 개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지의 한인 선교사들은 이번 “연해주 목회자 수련회”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모인 50여명의 러시아 목회자들이 거의 전부 러시아 침례교회에 속한 목회자들이었습니다. 러시아 침례교회는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과거 극심한 박해를 받은 경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예배 의식적으로 배우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극히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정서를 지닌 러시아 침례교회 목회자들에게 강의나 설교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의 “기도와 교회성장”을 소개하기 전에 쉬운 말과 편안한 자세로 저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한 후 “교회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과 진리가 중요하지만 성경과 진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성경과 진리를 바로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가르침과 조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성령의 조명을 받은 사람이 많은데 그들의 생각과 삶과 주장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것들을 비교해서 살펴보는 ‘교회사적 안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초대교회의 300여년 동안의 역사를 살펴보면 같은 성경의 가르침과 같은 성령의 조명을 받은 교회들이 그들이 처한 지역적 환경에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로마 교회, 알렉산드리아 교회, 칼타고 교회, 비잔틴 교회 등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색깔과 입장이 각각 다른 교회들이 이단들이 아니었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교회요 그리스도의 교회들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후에는 기독교가 로마 카톨릭 교회와 정교 교회와 개신교 교회로 나뉘어졌는데 그 세 교회들도 모두 이단들이 아니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로마 카톨릭교회로부터도 배워야 하고 어떤 때는 정교회로부터도 배워야 한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개최된 WCC 총회에서 개신교의 몇몇 신학자들이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발표한데 비해 정교회의 주교는 종교다원주의를 비판하며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했는데 개신교의 자유주의자들의 주장보다 정교회의 보수적인 입장이 더 옳았다는 말도 했습니다.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러시아 침례교회 목회자들이 아마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두들 진지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좀 의아하게 생각을 하면서도 잘 받아드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장로교회만이 제일 옳은 것도 아니고 침례교회만이 제일 옳은 것도 아니고 순복음교회만이 제일 옳은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칼빈만이 제일 옳은 것도 아니고 루터만이 제일 옳은 것도 아니고 웨슬레만이 제일 옳은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제한되어 있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단이 아니면 서로서로 배워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흐믓해 하고 모두들 좋아하는 듯 했습니다.
올바른 ‘역사적 안목’을 가지기 위해서는 과거와 끊임 없이 대화를 하여야 하고 또한 미래와도 끊임 없이 대화를 하여야 한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땅과 자신에 집착하지 말고 나 자신과 땅에서 벗어나 저 위에서 나를 내려다 보는 ‘초연’의 자세를 지니는 것도 필요하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저 위에서 아니 저 마지막 종말의 정점에서 나를 내려다 보는 ‘종말적 초연’의 자세를 가지도록 힘쓰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생각의 눈이 띄어지는 듯했습니다.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시간에 대해서 그리고 문화에 대해서 설명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흘러가는 물과 같은 그리고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인간의 시간 속에서 사는 무상한 존재들이지만 영원 자체가 되시는 예수님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영원을 붙잡기만 하면 우리의 무상한 삶이 영원에 속하게 된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영원과 시간이 만나는 종교라고 설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는 플라토주의나 불교와 달리 영원과 연결되는 현재를 사는 종교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는 무조건 적대시하는 ‘배타적인’ 태도와 무조건 받아드리는 ‘적응적’ 및 ‘종합적’ 태도와 양자간의 관계를 역설적으로 보는 ‘이원론적’ 태도가 있는데,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부정을 거쳐 변혁을 시도하는 ‘변혁적’ 태도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어거스틴과 칼빈과 요나단 에드워즈가 문화변혁주의를 가르쳤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교회의 기도의 인물들 길선주 목사,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김삼환 목사를 소개하며 저들의 처절한 회개의 기도와 헌신적인 사역 때문에 한국교회는 부흥과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복음의 세 가지 특징은 약함과 착함과 땅끝 지향적 주변성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의 모형은 하늘을 버리시고 사람이 되신 성육의 사건과 성육적 삶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모두들 아주 좋아했고 모두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며칠 동안 함께 먹고 함께 강의하고 함께 지나면서 아주 가까워졌고 아주 친해졌습니다. 대신측 부흥사 최복규 목사님의 부흥회 설교도 잘 받아드렸고 순복음교회의 홍영기 목사님의 순복음적 강의도 대체로 잘 받아드렸습니다. 며칠 동안에 극히 보수적이고 배타적이던 저들의 생각과 안목이 확 트여지고 넓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며칠 동안 하루에 두 번씩 러시아 목회자들과 탁구를 열심히 쳤는데 너무 재미가 있었습니다. 거의 매번 내가 이겼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해 주셔서 탁구도 잘 치게 되었다고 러시아 목회자들이 즐겁게 말하곤 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의 교회사 이야기의 실험”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셋째,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합니다.
저는 처음에는 알지 못했는데 우리가 목회자 수련회를 시작하는 시간부터 주 정부의 종교담당관이 비서 한 사람을 데리고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수련회에 ‘참석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살피려고’ 온 것이었습니다. 주최측에게 참석자들의 명단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주최측도 러시아 목회자들도 모두 긴장을 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꼬투리를 잡히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선교사들은 항상 그런 긴장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그 종교담당관은 어느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지성인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정교회에 속해 있었을 것입니다. KGB 즉 정보부에서 보냈을 것이라는 말을 나중에 주최측이 나에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첫날 이야기식 강의를 열심히 했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다음 날도 강의 시간에 맞게 일찍 나와서 나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습니다. 노트에 빼곡히 강의 내용을 적고 있었습니다. 셋째 날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최측이 놀라는 기색이었습니다. 그 종교담당관이 저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갔습니다. “좋은 강의를 해 주어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제는 제가 저의 일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고 알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나라와 사회를 건강하게 지탱하는 힘과 정신이 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에 거룩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데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순교가 교회의 씨앗이 된다는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세미나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다음에 다시 오시면 ‘물질 주의’ ‘진화론’ 등에 대해서 강의를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 좋은 모임이었습니다.” 너무나 의외의 반응이었습니다.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주최측이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교회사 이야기의 실험이 성공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사 이야기는 지나간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여기 저기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살아있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사의 이야기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주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성령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블라디보스톡 목회자 수련회가 은혜와 감동과 위로와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좋은 수련회가 되도록 새벽마다 기도해주신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힘에 넘치는 사랑의 헌물로 지원해주신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선교사님들을 마음껏 대접할 수도 있었고 몇 분들에게는 100불씩 격려금도 전달하면서 사랑과 위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여러분들의 풍성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헌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들의 쓸 것을 넘치게 채우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 여러분들에게 감사, 그리고 현지에서 지금도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선교사님들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이것으로 선교 보고를 마칩니다.
갈릴리의 활기
느헤미야 12:43, 마태복음 28:7-10 / 이성희목사
경상북도 칠곡군 장천면 옥계동은 아주 작은 시골마을입니다. 말 그대로 ‘옥계’입니다. 구슬 같은 실개천이 있는 곳입니다. 11년에 전에 돌아가신 저의 선친은 이곳을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2년여 짧은 목회를 하신 곳이지만 아버님 목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작은 시골교회를 목회하시면서 묵상하시고, 묵상하신 글을 많이 쓰셨습니다. 구슬 같은 개천의 물소리를 들으시면서 깊이 하나님을 체험하신 곳입니다. 아버님은 항상 그곳에 마음이 돌아가면 활기를 얻으셨습니다. 순수한 목회의 열정과 감정이 살아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중요한 것은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갈릴리는 화려한 곳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비해볼 때에 아무 존재도 없는 북방지방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시골 동네 출신이었기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이 말은 나다나엘이 한 말이지만 나다나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시각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곳은 스승의 삶, 말씀, 정신, 사랑, 3년의 삶이 묻어 있는 곳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50대의 최대의 적은 용기 상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50대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힘든 시기입니다. 감격의 상실은 패배를 느끼게 합니다. 인생에서 분명히 성공하고도 감격의 상실로 패배감을 가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분명히 성공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감정의 패배로 헤매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35장에는 야곱의 가정적 환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딸 디나가 세겜 사람들에게 욕을 당합니다. 디나의 오라비들인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이용하여 살인을 합니다. 이 때 야곱은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라고 합니다. 환난을 당하고, 무기력하고, 진퇴양난인 가정적 신앙적 위기를 맞이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와 언약을 베푸신 벧엘로 올라가 활기를 찾습니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울적할 때마다 돌아가는 마음의 고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갈릴리에서 보리라고 하십니까? 예루살렘은 정치와 경제의 도시입니다. 갈릴리는 순수한 서민들의 도시입니다. “도시는 마귀가 만들었고, 하나님은 시골을 만드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갈릴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시골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담겨져 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성지순례를 몇 차례 했습니다.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여러번 가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은 도시형입니다. 어디에 가나 장사꾼들이 우글거립니다. 시끄럽고 복잡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도 고난의 길도 소란스럽고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갈릴리는 한적하고 조용합니다. 고요히 묵상하기에 좋은 인상적인 지역입니다. 이곳을 예수님도 사랑하시고 좋아하셨던 것입니다.
‘스피리츠’(spirits)라는 말의 어원은 ‘생기를 불어넣는’이란 뜻을 가진 라틴어 ‘스피라레’(spirare)에서 왔습니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정신이 생겼고, 영혼이 생겼고, 정신을 차리고 살아갑니다.
흔히 ‘정신 놓고 산다’ 혹은 ‘정신 놓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신을 놓는다는 말은 생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정신 놓고 산다는 것은 활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니 잠시나마 정신을 놓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사시니 정신을 붙잡았습니다. 정신을 붙잡으니 갈릴리에 활기가 넘쳤습니다. 갈릴리에 보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갈릴리가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갈릴리가 활기를 되찾은 까닭이 무엇일까요?
1.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되어 활기가 넘칩니다.
마태복음 28:7에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의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애급 피난에서 돌아오신 후 나사렛에 머무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나사렛의 예수’ 혹은 ‘갈릴리 사람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보지 못할 줄로 알았던 나사렛 사람 예수님을 갈릴리에서 다시 보게 되는 기쁨이 갈릴리에 활기가 넘치게 하였습니다.
다 돌아가시게 된 부모님이 눈도 못 뜨고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아들이 왔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큰 아들 왔습니다”라는 말에 큰 눈을 뜨고 손을 뻗습니다. 못 볼 줄 알았던 사람을 만나면 눈도 커지고 다시 활기가 넘칩니다. 그리던 사람을 다시 보는 것은 활기를 되찾는 일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보세요.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베다니의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줄을 내가 믿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고백의 대상인 예수님을 다시 뵙게 되니 얼마나 활기차고 기쁨이 넘쳤겠습니까?
창세기 33장에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삼촌의 집에 갔다가 20년의 하란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이 형님을 만나는 극적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부의 극치입니까? 어떤 면에서는 당시의 수사법 가운데 과장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마 야곱은 정말 형님을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감격적이고 형님이 용서하고 자신을 만나준 것이 고마웠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9:3에는 여리고로 가시는 예수님을 삭개오가 만납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라고 합니다. 5절에는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라고 합니다. 이 장면은 삭개오와 예수님이 서로 보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니,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보시니 활기가 넘칩니다. 예수님은 “내려오라, 내가 네 집에 있어야겠다”라고 하십니다. 이 때 삭개오는 “내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 주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의 것을 억지로 빼앗았으면 네 갑절을 갚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구원은 삭개오와 예수님이 서로 보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보면서 영혼의 활기를 되찾은 것입니다.
연예인이나 인기 스포츠맨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사진을 찍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일전에 김연아가 학교에 나타났습니다. 총장까지 김연아 마중을 나왔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핸드폰을 들이대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도 가끔은 “TV에서 봤습니다”라는 인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TV에 나온 목사님’이라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여 제가 ‘팬 서비스’까지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치원 애들도 노래합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유명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예수님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활기가 넘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욥은 수많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다시 회복합니다. 재산도 자녀도 건강도 다시 회복한 다음에 그는 “지금까지 내가 주님을 듣기만 했는데 이제는 주님을 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훨씬 더 확실합니다. 보게 되면 활기가 넘칩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읽은 영어 수필집에 있었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어떤 영국인이 인도에 가서 어린 시절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인도코끼리가 새끼를 낳게 되었고 아기 코끼리와 아주 친하게 지냈습니다. 얼마 후에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서 아쉽게 아기 코끼리와 헤어졌습니다. 오랜 후 그가 성인이 되어 다시 인도에 돌아왔습니다. 어느 코끼리인지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집에 사환으로 있던 인도사람은 오래 전 친하게 지내던 아기 코끼리가 자라 이젠 늙은 코끼리가 되었다고 그 코끼리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코끼리는 어릴 때 그 소년을 만나 얼마나 기뻐하는지 발을 구르고, 몸을 뒤뚱거리고, 귀를 펄럭이고 소년을 태우고 즐거워하더랍니다. 코끼리가 사람을 식별하는 것은 후각으로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래전에 만났던 사람이지만 그 냄새로 사람을 식별하여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것은 더 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최근에 출판된 마르바 던의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마르바 던은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리를 잘 쓰지 못합니다. 당뇨가 심하여 신장에 문제가 생겨 투석을 하고, 시각장애가 와서 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주 훌륭한 영성신학자입니다. 그녀는 ‘기쁨’(Joy)의 첫 글자를 항상 대문자로 쓴다고 합니다. 기쁨이 환경으로 인한 단순한 벅참이나 행복이나 감격을 뜻하는 말이 아님을 상기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삶이 변화되면 그 깊고 영속적인 확신과 감사와 신뢰가 내 것이 되는데 바로 그것을 나타내고 싶을 때만 ‘기쁨’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 기쁨을 회복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 활기를 다시 얻습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얼마나 좋은 찬송입니까?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 나라의 활기를 느낍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보는 즐거움으로 우리 삶에 활기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을 만났던 사역의 중심지로 가므로 활기가 넘칩니다.
마태복음 28:10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만났습니다.
‘연상’(associa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플 때 듣던 노래를 들으면 다시 아파집니다. 입덧이 심할 때 입던 옷을 입으면 구역질이 납니다. 원래 장소로 가면 그 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심리현상을 연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 3년의 공생애를 지내던 그 때의 감격을 되살리려고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보자고 하십니다.
결혼 후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결혼사진을 다시 꺼내보고, 연애편지를 다시 읽어보고, 신혼여행지 함께 가보는 등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렇게 옛날을 다시 회상하므로 당시의 감정을 다시 되찾고 어려움을 해소하고 가정을 회복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옛날의 그 자리로 돌아가 보는 것은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는 ‘허영의 시장’이 있습니다. 허영의 시장은 만나고 싶지 않던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입니다. 죽은 것처럼 활기 없는 영혼이 모여 있습니다. 인간다움이라곤 없으며 탐욕과 교만과 분노 등이 모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전혀 인간다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잡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탐욕의 도시입니다. 이런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제자들을 보리라고 하십니다. 갈릴리는 소박한 사람들의 마을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사랑이 묻어 있는 곳입니다.
그 때의 감격과 사랑과 진실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과는 파괴된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제자들은 산산조각이 나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전적 헌신을 다짐하고 따랐던 첫 사랑의 장소가 그들에게 필요했습니다.
갈릴리는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고기를 잡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베드로를 만나던 날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여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곳이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여 그 좋은 직장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갔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갈릴리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갈릴리는 모든 제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빛 아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발견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바라보니 활기가 넘쳤습니다.
마태복음 4:23에는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구석구석 안다니신 곳이 없습니다. 갈릴리는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과 기적이 묻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갈릴리는 기쁨과 놀람의 자리입니다. 이곳을 회상하면 활기를 되찾습니다.
잭 하일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치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 일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함께 하지 않으므로 절망하고 탈진합니다. 이제 다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이전의 사역을 회상하니 활기가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린 바압은 ‘즐겁게 안식할 날’에서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은 기도와 놀기 둘 다를 포함한다고 하였습니다. 놀지 않고 기도만 하는 안식일이나 기도는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안식일은 둘 다 반쪽짜리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놀지 않고 기도만 하면 활기가 없고 의무적인 종교로 변질합니다. 기도는 하지 않고 놀기만 하면 영적으로 둔해지는 일탈 행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영성생활, 영성훈련을 한다고 하면서 감격적 신앙의 생활이 없으면 활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참 생활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고, 전하면 활기가 없습니다. 부활 후의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다시 예수님의 사역, 예수님의 말씀을 회상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3년을 사시면서 주무시고, 피곤해 하시고, 화를 내시고, 주리신 예수님을 갈릴리에 와서 이런 예수님의 삶을 다시 보니 활기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를 만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시작해서 갈릴리의 일들을 얘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주실 때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갈릴리의 일을 말씀하시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활기가 넘칩니다.
결 론
사무엘 하드리(Hardly)는 19세기에 뉴욕의 주정꾼, 창녀를 전도하던 전도자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사무엘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고 유언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는 타락하여 도박꾼이 되고 주정뱅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자살을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1882년 4월 18일 44세에 개심하였습니다. 그는 4일간 금식을 하면서 과거를 청산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주정꾼들과 창녀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 후 매년 4월 18일이면 그는 자청하여 감옥에 들어가 참회하며 기도하는 날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감옥은 하드리에게 주님을 다시 만나는 갈릴리입니다. 자신의 사역을 돌보는 자리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갈릴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회상하는 갈릴리입니다. 이런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의 감격으로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갈릴리로 가라
마 28:6-20 / 박지온목사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목을 "갈릴리로 가라!" 그렇게 했습니다. 10절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갈릴리로 가라 하시고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이 거기서 누구를 본다 구요? '나를 보리라!'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갈릴리에서 보게 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쭉 말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만은, 지난주에는 6절 말씀을 중심으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어떻게 했다 구요? '살아나셨다!'그랬습니다. 결국은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그랬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라는 그런 말씀의 방향을 우리가 붙잡아야 되겠다는 것을 특별히 말씀드렸고, '하나님의 계획대로'라는 것은 여러분과 저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메시아가 되시는 이 사건 자체도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어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들이 내 생각이나 감정과 기분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실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형편과 어떤 사건에 처하든지 이걸 발견하게 되면 벌써 우리는 해답을 받았다는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성취에 감사와 기쁨을 발견하고 볼 수가 있죠. 그리고 이 사실이 이해되면, 지금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우리가 불평하고,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하는 이런 의심과 불 신앙의 역사는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조금 더 나가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말씀하시던 대로, 또 이스라엘이 바라던 어떤 그런 민족적인 구원이라든가 이런 어떤 것들로, 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그 역사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어려운 고통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그러면서 견디기 힘든 그런 고백들이 지지난 주에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실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어떠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이나 마음이나 감정이나 느낌과 상관없이 가장 최고의 축복과 역사로 하나님은 이루어 가십니다.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얼른 볼 때에는, '도저히 이것은 견디기 힘들다! 어렵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런 없었으면 좋겠다!'라는 그런 어떤 모습도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랬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제 다시 부활하시면서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나시면서, 그러면서 그 제자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신 것이 뭐냐하면, '갈릴리로 가라! 만약에 내가 살아난다! 죽었다! 이런 어려움이 온다! 사건이 생긴다!' 이런 여러 가지 모든 것이 일어나거든 너희는 뭐라 그랬느냐 하면, '갈릴리로 가라!'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예수님이 어려움 당하게 되고, 인간의 생각과 뜻과 전혀 상관없이, 뭔가 감정과 기분과 상관없이, 이런 사건들이 생기거든, 염려하지말고, 의심말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니까! 그것을 붙잡고 갈등하지말고 갈릴리로 가라! 그렇게 당부를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자들은 이 사건을 당하면서 시체조차도 근처에 가기 힘드는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그렇게 있다가, 간절히 사모하는 여자들로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뭐라 그랬느냐 하면, '제자들에게 말해라!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갈릴리로 가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갈릴리에 가야 나를 만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겠습니다 만은, 제자들이 어디서 불림을 받았습니까? 갈릴리에서 불림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처음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역사 속에, 그 축복 속에 들어오게 된 배경이 갈릴리입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로 가라고 한 것은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할 수가 있습니다 만은, 그저 간단히 우리가 쉽게 생각해야 될 것이 뭐냐하면, 현장으로 돌아가라는 그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죽음과 멸망에 처해 있던 현장! 그들이 사단과 또 저주 속에 매여있던 그 현장! 예수님께서 이런 모든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하시고, 그 완전히 해결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구세주가 되시는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실 때에 완전하게 그 사명을 이루신,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 예수님을 어디에서 확인해야 되느냐? 제자들에게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이 있는 현장, 너희들이 서있는 그런 현장으로 돌아가라!'
그런데 이 말씀 속에서 뭘 우리가 깨달아야 되느냐 하면, 현장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옛날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만나고 그분과 함께 임마누엘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삶의 역사는, 그건 멀리 어떤 그 꿈속에서 산다던가, 어떤 뭐 하나의 새로운 어떤 세계 속에서 산다던가, 그런 것이 아니고, 내 직장과 내 삶의 현장과 내 삶의 그런 본래의 모습 속으로, 그 속에서 확인해야 된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해주시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 신앙생활은 잘못 들어가게 되면 하나의 도피적인 그런 신앙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함께 변화 산에 가셔서 변화된 모습을 봤을 때에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을 했느냐 하면, 모세와 예수님과 또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감격스러워서, '내가 여기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또 엘리야 위해서, 모세를 위해서 초막 셋을 짖고 여기서 항상 계속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눈을 떠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세도 엘리야도 없고 예수님만 있더라!' 그것이 마태복음 17장에 이야기죠.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뭔가 은혜를 받는다! 또 성령의 어떤 체험을 하게 된다! 또 어떤 그 상황을 갖게 되면 현실을 잃어버리고, 실제의 삶을 잃어버리고 뭔가 신앙을 막연하게 현실적인 도피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가 좋사오니...'하는 어떤 그런 것을 생각할 수가 있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현실 도피가 아니고, 신앙생활은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현실과 사건에서 저주와 고통과 문제해결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고, 현실 속에서 체험하고, 현실 속에서 이겨나가고, 현실 속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이 사실을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것이 잘못되어져서 역사 속에서 많은 잘못된, 그릇된 그런 길을 갔던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해가 잘못 되어서 중세 수도사적인 기독교 신앙생활! 그래서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 잘 한다는 사실 자체가 현실을 도피해서 산에 올라간다던가, 은둔 생활을 한다던가, 도피생활을 한다거나 이렇게 하고, 심지어는 지상에 와서 사는 생활 속에서도 30자나 높이 뭔가 이렇게 시설물을 만들어서 그 위에 올라앉아서 묵상하고, 그렇게 기도하고 밑에서 꿰어서 주는 빵을 받아먹고 하는 이런 사건들까지 생겼던 그런 부분들입니다.
그래서 이 운동을 수도원 운동이라 그러고, 뭐 기도원 운동이라고 그럽니다 만은, 요즘도 어떤 면에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그런 장소를 준비하는 기도원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이런 어떤 그 기독교 역사에 참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이런 문제들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을 바로 붙잡지 않으면, 그러니까 바로 시정하지 않고 바로 방향을 붙잡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현실과 자꾸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신앙이 이루어지고, 현실 속에서 신앙생활이 되어야 되는데, 이것이 안될 때는 자꾸 멀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가장 현실적이고, 기도라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그리고 전도라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데도, 우리의 삶에 있어서 기도와 또 복음이라는 것, 전도라는 사실이 내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지는 그런 문제들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부활 이후에 참 복음의 성격이 뭐냐? 현실에서, 삶에서, 신앙생활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된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내 삶과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자체가 내 삶으로 이어져와야 된다!'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요즘 우리가 계속해서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을 기록한다거나, 그 다음에 복음에 말씀을 내가 기억해서 기도제목을 삼고, 그걸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말씀을 내 삶으로 끌어들이는 것! 이걸 말하자면, 말씀이라 그러면 옛날에는 도저히 내가 생활도 안되고, 말씀 그 자체가 내 삶에 잘 안 되는 너무 높은 지경에 있는 그런 수준의 말씀이 아니고, 말씀이 나의 삶으로 끌어들이고, 내 생활과 내 사건 속에 말씀이 함께 하는 것!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을 적고, 말씀을 기록하고,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제목을 잡고, 성취되고 안 되고를 체크해 나가면서 살아가는 이런 어떤 자세 자체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래서 여기 본문 말씀에서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누구를 본다 구요? 복음을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이 수도원이나 기도원이나 어떤 망상이나 환상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과 저의 삶이요, 생활이요, 사건입니다. 이 축복된 역사가 사실이 아니면 늘 우리신앙은 붕 떠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지금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자꾸 교인들이 힘을 잃어가고, 힘이 없어지는 것은 뭐냐하면, 우리 삶에 사실적인 역사가 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종교 생활은 사실적으로 그들이 그 종교생활을 누리고 즐길 수 있는데도 기독교인들은 사실적으로 안됩니다. 뭔가 구체적으로 내 생활과 삶이 복음이 안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온다는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먼저 뭐라 그랬느냐?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너희들의 삶에 현장에서, 옛날에 너희가 있던 저주와 죽음의 현장에서 또 그 속에서 불리워졌고, 제자로 택함을 받았고, 제자로 세움을 받았던 그 장소로 가라! 거기서 누구를 만나느냐?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삶의 밖에서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게 잘못된 겁니다.
그래서 이걸 먼저 우리가 구체적으로 조금 이해하려면 복음이라고 그럴 때에, '복음에 뿌리를 내린다!'그러는데, 지금까지는 그냥 막연하게 뭔가 예수 그리스도 말하고, 복음을 말할 때에 이 복음자체가 사실은 내 생활과 삶으로 연결되어지지를 못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복음이라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 자다!' 그냥 어떤 면에서 내 생활과 삶에 도움을 주는, 그리고 나는 그 복음을 이용해서 내 어떤 육신생활에 유익을 보는 이런 것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해결자라는 그런 사건자체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 자체가 여러분과 저의 생명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본질이요, 근본입니다. 그 분은 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그게 아니고 복음 없이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삶의 존재 자체가 거부되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문제, 모든 사건 속에서 먼저 뭘 생각해야 되느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니면, 또 그분과 함께 있는 임마누엘의 사실적인 역사가 아니면 우리의 삶은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과 어떤 문제나 어떤 어려움 속에서든지 먼저 우리가 확인해야 될 것, 그 복음을 통한 삶이, 그 역사가 내 안에 있느냐? 이것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데로, '내가 뭔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용한다!'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복음자체가, 생명자체가 바로 내 존재가치가 되어야 됩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내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복음에 뿌리가 내린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뭐가 이루어져야 되느냐? 성령으로 이루어져야 됩니다. 내 생각으로, 내 기분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많은 설명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에 생략하고 지나갑니다 만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복음! 사람을 보는 것이나, 사람을 느끼는 것이나, 사람을 대하는 것이나, 또 사건과 일을 느끼고 보고 대하는 모든 것들, 그리고 내가 어떤 방향을 향할 때에, 그 방향을 뭘 통해서 보느냐? 전부 예수 그리스도! 그걸로 통해서 본다! 그럴 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보지 않는 것은 내 삶의 가치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나 무슨 사건이 생길 때에 오직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이 일을 볼 때에,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볼 때에,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바로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보는 그때에 뭐냐? 그때에 모든 일이나 사건이나 삶에 가치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히 체질이 되어야 됩니다.
이것은 내가 어떤 그 지혜를 가지고 뭔가 그 예수를 이용하려고 하는, 도움을 받고, 그 다음에 그 도움을 가지고 내가 뭔가 성공하기 위한 어떤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삶 자체가 나의 삶의 가치로 완전히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뿌리가 되어야 되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뭔가 신앙생활하면서 아프다, 슬프다, 기쁘다, 좋다, 나쁘다! 뭐 어떤 모든 것도 전부 뭐로 봐야 되느냐?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그리스도로 통해서 이것이 가치에 기준이 결정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의 신앙생활자체는 이 사실이 저절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어디서 이루어지느냐? 누림이라는 말이 늘 우리 마음속에 말은 많이 하지만 가장 안 되는 부분이 이것이거든요. 그리스도를 누린다! 복음을 누린다! 신앙생활을 누린다! 그렇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누린다는 사건이 뭐로 연결되느냐 하면, 기도라는 것으로 여러분과 연결되는 거죠. 모든 문제가 그저 기도로!
그래서 기도라고 그럴 때에, '어떤 안타까운 마음으로 안되어 가지고 기도한다!' 그런 것이 아니고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랬습니다. 바로 이 복음과 연결되면서 모든 문제나 사건이 닥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뭐가 나옵니까? 기도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라는 말 자체가 사건과 문제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구하는 기도가 아니고, 그 기도라는 사실자체가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이 축복 된 삶을 현장에서 누린다는 것이 기도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제가 이 건강 문제를 계속해서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1년, 2년 그저 잠깐 지나가는 어떤 아프다는 것보다도, 오랫동안 지속해서 오는 건강문제 때문에 내게 오는 것이 뭐냐하면, 상당히 어려울 때가 많아요. 참기도 어렵다, 참기도 힘들다... 그런데 여기서 뭘 나는 느끼느냐 하면, '아, 하나님 앞에 내가 신앙생활이라는 자체가...' 이것이 뭘 어떤 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어떤 상황을 변화시키고, 그 다음에 안 좋은 일들을 좋아지게 만들고, 아프던 것을 안 아프게 만들고, 이런 것이 거의 기도로 연결되거든요. 그런데 뭔가 이 깊이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아픈 자체도 평안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뭘 말로서 형용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 구요. 그것이 지난번에 조금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은, 내가 지금 하나님에 현실적인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는 것이 복음에 바탕이 아니고, 복음에 뿌리가 깊이 내려지지 않으면, 내가 구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연결이 안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금 나를 다스리고, 지금 나를 인도하시고, 지금 이 사건과 이 문제, 안 된다고 하는 이 문제 속에서도 임마누엘 하신다는 사실이 확실히 믿어진다는 것이 복음에 뿌리거든요. 이것은 내 힘으로,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더라 구요. 성령으로 이 사실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면 얼른 생각할 때에 내 생각에는 좋은 것 같은데,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아닌데, 그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뜻과 계획을 성취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 아셔야 될 것이 내 뜻이 아니다 싶을 때는 내게는 괴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일 때에는 어느 것이 성취가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좋고 안 좋고 와는 상관없이 거기에 축복과 역사가 연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내 뜻이 이루어졌다!' 참 좋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닐 때는 잠시는 좋은 것 같은데, 엄청난 피해와 괴로움과 고통의 열매가 따라온다는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나를 깨닫고 볼 수 있는 길이 뭐냐? 이 어려운 현실과 어려운 삶에서 도저히 이해가 안되고, 이해가 될 수도 없는 그런 삶에서 나를 보고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 만나고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지금 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볼 수 있다! 여러분 지금 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뭐로?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 자이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선언하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현장에서 비로소 내가 깨닫고 볼 수 있다! 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현장이라는 말이 상당히 참 묘한 말입니다. 얼른 생각하면 이것도 현장이요, 저것도 현장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현장이라고 말할 때에 여러분의 실질적인 삶에서, 그러니까 괴로움과 고통과 저주와 아픔이 실제로 존재하는 그 장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 도피하는, 그러니까 내가 생각해서, 내 이상추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그것은 현장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그런 어떤 방향으로 나갈 때는, 말하자면 우리도 똑같이 어디로 빠지느냐? 종교로 빠지고, 우리도 옛날 중세의 가장 암흑기에, 기독교의 암흑기에 빠졌던 바로 그런 수도원 운동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현장! 갈릴리로 가라!' 그곳에서 뭘 하려고 그러느냐? 그곳에서 뭘 하느냐? 진짜 사명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마지막 제자들에게 육으로 있는 동안에 갈릴리로 가라 말씀하시면서, 갈릴리로 가서 뭘 했느냐?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16절에서 20절의 내용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그곳에서 사명을 주시는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뭘 깨달아야 되느냐하면, 여러분들이 사명, 사명! 그럴 때에 교회 안에서 막연하게 충성하겠나이다! 그 다음에 기도할 때에 충성하겠나이다! 찬송 부를 때에 막 뜨거운 감정으로 충성하겠나이다! 중요한 겁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 복음 위해서 충성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직장과 생활과 삶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지금 놓쳐버리고 있는 부분이 뭐냐하면, 많은 경우 이것이 안되면 종교로 떨어진다고 그랬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충성하는데, 내 삶에서는 충성이 안돼요. 직장 생활 속에서는 충성이 안 되요. 내 기분과 내 생각, 심지어는 이것이 연결이 안되면 교회 안에서까지 내 느낌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어떤 면에서 우리는 감정에 많이 속을 때가 있습니다. 내 느낌에 많이 속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막 충성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충성한다는 내 느낌이 교회 안에서조차 안 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내 삶의 현장에서 비로소 참 사명에 눈이 열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직장과 여러분의 생활터전에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비로소 우리 주님이 여러분과 제게 명령하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우리가 흔히 전도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만은, 전도라는 말은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여러분과 저의 현장에서, 삶으로 주님 앞에 충성하는 길이 전도라는 현장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교회가 새로이 건축되어 집니다. 새로 건축이 되어지는 모든 상황 속에서 사명이, '건축되어졌다! 교회가 커졌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사건을 통해서, 정말 오늘 16절로부터 20절까지 주어지는 이 현장에서의 사명이 확인되는 기회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엄청난 축복과 역사로, 그냥 막연하게 뭔가 내 유익, 내 생각으로 끝나지 말고, 세계 복음화와 그리고 내 삶의 현장에서, 내 직장현장에서, 그리고 나를 보내신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현장에서 삶이 회복되는 놀라운 축복이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와서 보고 가서 이르라
마 28:5-7 / 강성찬목사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창 1장2장에서는 아담과 언약을 맺으시고 순종 할 때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겠다고 하셨니다.
창 3:15에는 범죄한 아담과 하외에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통하여 회복 시키시겠다고 하십니다.
창 6:18에 언약이라는 말로 홍수 심판을 하지 아니 할 것을 약속 합니다.
창12장에 와서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 하시고 약속의 땅과 후손이 땅의 티끌처럼 될것을 약속 하십니다.
출20장의 모세언약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계승이요 성취로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습니다.
삼하7:8-16에는 다윗에게 주신 말씀으로 왕조에대한 언약적 의미가 함께 합니다.
렘 31장은 새 언약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의 마음 속에 새겨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것임을 말씀 하는바 이는 에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 지는 은혜와 연결 됩니다.
새롭게 완전히 회복되는 그 때가 바로, 법궤가 있었던 이스라엘의 가장 신성한 장소인‘시온’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그 때임을 예레미야는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행 10:34-43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초대받아 행한 설교이며, 내용은 길지 않지만 이방인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입을 열어”(34절) 설교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곧이어 언급될 이야기의 권위를 암시하는데 이방인에 대한 구원을 선언하는 중대한 선언을 나타내기 위해 이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 한 말이 바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적인 조건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인데,‘외모’는 단순한 얼굴 생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과 종교적 제의와 관습들을 가리키며 형식적인 경건주의를 상징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짓는 관습까지 지칭합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생애와 복음 전파 사역을 간단히 설명하면서도 그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 즉 온 세상 사람에게까지 확대되는 것이기에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기 전에 보았던 환상을 통해‘깨닫게 된 교훈’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39절에 묘사된 것처럼 온 인류의 죄를 위해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은 바로 십자가 죽음을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십자가 대신‘나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을 구약 예언의 성취로 나타내는 동시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하는 이중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에 이어 부활 사건에 대해 증거하면서 당시 사도들이 증거한 내용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것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40절에서는 부활 사건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미 본문과 같은 내용의 설교를 여러 차례에 걸쳐 설교한 점을 미루어 보아(행 2:32 ; 3:15 ; 4:10 ; 5:30), 부활이 초대 기독교에 있어서 선포의 주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죄사함이 선포됨으로써 베드로의 설교가 종결되는데(43절) 복음이 사람에게 끼치는 결과가 핵심적으로 진술된 부분입니다.
마 28:1절에“안식일이 다 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은 오늘날로 보면 일요일, 즉 주일이 시작되는 여명의 시간에 이른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전통적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일이 아닌 주일 예배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 날은 역사상 최초의 주일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 부활로 말미암아 주일로 대체되어 지키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다시금 새롭게 재창조하셨음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은 이미 예수님의 무덤을 먼저 확인했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였습니다(마 27:61참조). 그들이 갔을 때 일어났던 일을 묘사한 2-4절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기록들로, 예수님의 무덤에서 목격한‘큰 지진’과‘천사 강림’을 보도합니다. 지진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여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성경에서는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마 27:51;출 19:18;시 68:8;행 16:26;히 12:26). 따라서 본문에서 지진이 발생했다고 증거하는 것은 예수님 부활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함께 역사하고 계셨음을 뜻합니다(엡 2:5-6).
다음으로는“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2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에서‘앉았는데(에카데토)는 미완료시제로 마치 무덤을 찾아올 여인들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앉아 있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 본문에서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무덤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마 27:64-66)은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무서워 떨었는지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 합니다(4절).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을 믿었던 여인들 또한 무서워 떨기는 했지만 큰 기쁨이 함께 한 경건한 두려움이었음을 성경은 증거합니다(8절). 이것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될 때 나타나는 자연적인 심리 상태입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들이“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찾기 위해 무덤에 온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행동을 감찰하시며 동행하고 계셨음을 말해 주는 동시에, 평소 예수님에 대한 여인들의 신실한 마음과 자세를 인정받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여인들에게 천사는‘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빈 무덤’을 직접 확인시켜 줍니다. 이렇게 부활의 소식을 들은 그 여인들에게 천사들은 예수님 부활의 메시지를 빨리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중요한 사명을 맡겼습니다. 7절의“가시나니”(프로아게이)는 현재 진행적인 의미가 아닌 생생한 미래를 나타내는 말인데,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신 약속 그대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도착하여 거기서 그들을 만날 것이라는 뜻입니다(10절). 한편으로, 당시 유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예수님의 부활 현장을 최초로 목격하는 부활의 산 증인으로 남자가 아닌 여자를 택하셨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 날이 채 밝지도 않은 시간에 두 여인이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며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아직도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로, 평소에 예수님을 무척이나 사랑하며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날도 그들은 무덤에까지 갔었고, 요셉이 자기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를 넣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간 것까지 자신들의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저 가만히 집에 있을 수 없었기에 새벽같이 예수님의 무덤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마침내 무덤 앞에 온 순간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일에 숨이 넘어갈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강한 지진이 일어나서 더 이상 두 발로 서 있기 힘들어 주저앉은 그들의 눈에는 믿기 어려운 광경이 계속해서 보였기 때문입니다. 혼란 속에서 그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설마 정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부활이 일어난 것일까….’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재로 힘든 그 여인들에게 이제는 예수님의 무덤과 시체마저도 제대로 찾을 수조차 없는 그런 믿기 어려운 현실만이 무덤 앞에 서 있는 그들에게 남겨져 있을 뿐입니다.
미국의 노부부가 성지순례차 고향 땅 이스라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장의사를 찾아 시신 처리와 장례 절차를 물었습니다. 장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묻힐 경우 축복도 받고 비용도 150달러면 충분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시신을 방부처리해 미국으로 공수하는 방식인데,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5000달러나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인은 망설이다 결심했습니다. 비싸더라도 미국으로 시신을 옮겨 묘지에 묻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땅에 묻히면 그 옛날 어느 분처럼 자기 아내가 부활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감당하기 어렵다는 ‘뼈 있는’ 이유였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바랍니다. 지금의 아내와 남편들도 함께 부활을 바라는가요. 부활의 생명이 오늘의 유한한 생명 속에 꽃피고 열매맺기를 정녕 바라는가요.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그 이후 펼쳐질 복된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결과는 미리 알고 있는 우리지만, 아직 그 결과를 모른 채 두려워 떨고 있는 그 여인들보다 얼마나 신실하게 부활신앙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미 눈으로 확인했으면서도 아직 내 심령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의심의 영은 계속해서 주님을 향해 가고자 하는 나에게‘설마, 설마, 정말로?’라는 공허한 질문을 하며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아무리 크게 외쳐도 우리들 마음에 참된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합니다. 부활에 대한 참된 믿음과 그 능력에 힘입어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무덤’안에 천으로 싸여서 누워 있는 시체와 다를 바 없는 인생입니다. 아니, 이미 주님이 가고 없는 빈 무덤 안에서 고집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인생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문제가 나의 문제가 아닙니까?
1827년 스코트랜드의 항구에서 배에 올라탄 노인 목사가 있었습니다. 성 안드레 교회에서 50년간 설교한 라이트 목사 (Henry Francis Lyte)였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따뜻한 곳에 살아야 하겠다는 의사의 지시를 따라 프렌치 리비에라로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첫번 기항지인 프랑스의 북부 항구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아침 출항 시간에도 라이트 목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여관방을 열었더니 노인 목사는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며 책상에는 밤사이에 쓴 시 한 편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전세계가 애송하는 찬송가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Abide with me) 입니다.
날은 빨리 저물고 어둠이 짙어가는데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아무도 나를 위로해 줄 수 없을 때 오직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주여, 나와 함께 거하소서
작은 인생은 썰물처럼 멀어가고
땅의 기쁨과 영광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변하지 않는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주님의 축복이 내 곁에 있으면 병도 힘을 못쓰며 눈물도 쓰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죽음도 무덤도 승리의 개가가 되리이다 내 눈을 감기 전에 십자가를 보게 하소서 하늘의 새벽이 밝아올 때 허망한 땅의 그늘은 사라질 것이오니 사나 죽으나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는 여인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해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여 주시며“마침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제자들에게 빨리 가서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예수님의 약속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무시당하던 것에 익숙해 있던 여인들은 또다시 새로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전 것과는 확실하게 다른 혼란임을 깨닫고 즉시 마음을 가다듬고 새롭게 힘을 내어 그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빈 무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은 과감히 버린 채‘두려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려가는 그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깊은 탄식 아래 발걸음을 재촉하며 예수님의 무덤으로 올라가던 그 모습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입니다.
빈 무덤을 떠나 세상 속으로 부활의 복음을 들고 가는 여인들의 모습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아름다움과 감동을 주지 않습니까?
그리스의 한 철인이 친구에게 쓴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그는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이런 말을 썼다.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새 종교집단이다. 사람이 죽어도 슬퍼하지 않고 기뻐하며 그들의 신에게 감사의 예식을 드린다. 그들은 시체를 들고 묘지로 행렬할 때 마치 즐거운 소풍이나 가듯이 노래를 부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행진한다.”초대 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전해주는 산 증거이다. 초대 교인들은 부활의 신앙, 영생의 확신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남기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남겼으며 예수는 영원한 생명을 남겼다.”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유산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남기신 부활의 믿음,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지금 우리 마음 속에는 어떤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몸으로 마음으로 입으로 외치는 복음은 어떠한 복음입니까? 해마다 돌아오는 부활절은 우리에게 어떤 인생의 의미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까?
“빈 무덤에서 나오십시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빈 무덤에서 나오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빈 무덤에서 나오십시오. 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주님의 능력을 다시금 깨달으며, 우리 모두 빈 무덤을 뒤로 하고 경건한 두려움과 기쁨을 함께 안고 빨리 세상 속으로 달려나가야 할 때입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조선의 정세는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웠습니다. 당시 국제 사회는 조선을 ‘소망 없는 은둔의 땅’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황무지이기 때문에 더욱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미국의 젊은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였습니다. 그들은 순교의 각오로 파송을 자원했습니다. 1885년 4월5일 부활절. 거센 풍랑을 헤치고 한 척의 배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습니다. 단순한 입항이 아니었습니다. 이 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오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조선땅을 밟았습니다. 황무지에 소망의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펜젤러는 본국에 보낸 첫 선교 보고서에서 이날의 감동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다. 그날 사망의 철창을 쳐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조선의 결박을 끊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빛과 자유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천사의 말을 듣고 보고 가서 전하는 여인들처럼 부활의 소식을 전하며 사명 감당하는모두가 됩시다.
부활절 이후
마 28:5-6 / 김남수목사
부활절 이후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활절을 지나고 그 다음 주일, 부활 하신 주님을 제자들이 만나기도 하고, 또 뵙기도 했습니다.
그 때 상황이,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조용히 한 번 생각해 보면서, 묵상해 보니 네 가지 단어로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충격, 혼란, 흥분, 두려움” 이라는 네 단어입니다.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어느 분이 남편이 세상을 떠나 장례식을 치르고 장지에다 관을 묻고, 집으로 돌아 와서, 3일째 되는 날 남편의 묘소를 찾아 가려고, 아침 일찍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돌아 와서 “여보” 라고 말을 한다면 보통 강심장이 아니면 기절하거나 충격을 받아 쓰러질 것입니다. 3일전에 분명히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가시관을 쓰시고, 대못에 박히시고, 창에 허리를 찔러 완전히 피를 다 쏟고, 운명하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내고, 돌로 단단히 묻어서, 막아서, 봉해진 사람이 살아 났다는 소문과 함께 여기 저기 나타났다고 하고, 그리고 제자들 앞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저들에게 나타났을 때 제자들의 충격이 어떠했겠습니까? 이것은 충격중의 충격일 것입니다. 또 혼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보았다 하고, 어떤 이는 못 보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부활 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그럴 리가 없다고 하고, 내 손으로 만져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엄연한 사실이 있는데 죽은자가 어떻게 살아 날 수 있느냐는, 이성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도저히 불가능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느냐, 그래서 이성과 신앙의 갈등, 지성과 믿음의 혼란, 또 신앙과 현실의 혼란과 갈등이 온다는 것은 대단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6절에도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라고 했고, 또 마가 복음 16장 14절에 보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하고 믿지 않음을 책망 하셨습니다.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보았다 하고, 어떤 이는 보지 못하였다 하고, 어떤 이는 믿는다 라고 하고, 어떤 이는 믿지 못한다 하는 그런 혼란 속에 있었을 겁니다. 물론, 그들 중에 어떤 이는 너무 기뻐서 흥분 했을 겁니다. 그러면 그렇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는 위대한 기적을 베푸셨던 분인데, 죽음으로 끝날 수 없다, 살아 나셨다 라고 외치는 흥분된 제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과, 염려에 가득 찼을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도망갔던 사람들은 주님을 무슨 면목으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저들의 두려움일 것입니다. 그 중에 제일 힘든 사람이 베드로 였을 겁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말씀하실 때, 네가 닭이 두 번 울기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시니까, 죽을 일이 생겨도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큰 소리를 치지 않고, 그렀습니까?. 기도해 주십시오 라고 했으면 나중에 면목이라도 있을 텐데, 장담하고, 맹세했는데, 3번씩이나 어이없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비겁하게 모른다고 부끄럽게도 실수한 베드로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주님을 어떻게 만나고, 그 분을 어떻게 다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여러가지 갈등과 두려움과 흥분과 혼란과 충격이 저들에게 있었을 겁니다. 이 때에 주님이 40일을 같이 계시다가, 저들에게 확실하고 분명한 메시지와 명령과 약속을 주시고 떠나십니다. 두려움과 흥분과 혼란과 충격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세가지 주셨습니다.
첫째는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같이 가주마 하는 약속인 것입니다. 두 가지는 명령이고, 하나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는 Stay, 머물러라, 하나는 Go, 가라는 말씀을 주시고,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는 I will go with you 함께 가겠다는 약속을 주신 겁니다.
첫 번째 이 기다리라는 말은 누가복음24장 49절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거하라, 머물러라, 떠나지 말고 여기 있어서 그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가리켜서 오순절을 거친, 성령 충만한 경험을 거친 다음에야 그 다음 명령을 준행할 수 있는 단계적 명령이었습니다. 성령은 중생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구원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내주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내재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먼저 우리를 중생하게 하십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아니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본 사람도 만난 사람도 없습니다. 시기적으로 2,000년 전의 분입니다. 장소는 저 중동지역의 팔레스타인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신 분이었습니다. 인종적으로도 우리는 한국인이고, 그 분은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 분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결혼하지 않고, 로마의 사형수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운명한 한 청년의 이름입니다.
도대체 2,000년 후에 관계없는 한국 사람이 미국에 살면서 그 가난한 청년 한 사람의 이름을 이렇게 수 많은 사람이 따를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그 때의 사건과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친히 인쳐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믿게 해 주셨으므로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성령이 도와 주셨으므로 우리가 믿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와 주셨으므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으므로 믿게된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결정은 내가 하지만, 성령께서 믿음을 주시고, 믿게 해 주셔서 우리가 믿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해 주심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고 구원 받을 수 없고,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예수 믿을수 없기 때문에 예수 믿는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있을 때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구원의 영이십니다. 그 후에 성령은 우리는 믿게 하신 후에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내주라는 말은 거주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딘가 우리의 거주지를 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곳에 있던지 살 수 있는 주소가 있듯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우리 안에 와 계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 안에 거주지를 정하고, 성령의 전을 삼으시고, 우리를 성전 삼고, 우리 안에 와 계시는 성령이시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어떤 분은 집 주소만 정하고, 집은 정해 놓고 늘 돌아 다니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와 같이 있겠다고 약속하시고, 한 번도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항상 거기에 계시고, 내실, 재실 하시는 분으로 성령이 같이 계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중생의 영이시고, 구원의 영이시고, 함께하시는 내주와 내재의 영으로서 우리와 같이 계시는데, 구원 받고 성령 충만함을 받을 때까지 너희는 이 성에 거하라. 여기 머무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중생하지 않고, 뛰어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능력과 성령 충만함을 받기 전까지는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함을 받고, 나가려면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한 오순절까지 제자들의 성령 충만을 기다리면서 기도했으며, 성령이 강림하시는 오순절의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명령은 가라, Go and Preach! 가서 전파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네가 너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명령인 것입니다. 성령은 선교의 영이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저들은 뜨거워져서, 반드시 꿈을 꾸고, 성령 하나님의 신이 임재 하시면 비전과 꿈을 갖게 되며, 성령의 거룩한 힘이 오면 선교할 열정과 꿈을 주시고,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 갈등과 혼란과 충격과 기쁨 속에서도 혼란 속에 있어서 이 두 사이에 머뭇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끝까지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나가기 위해서 성령 충만 받아야 하며, 성령 충만 받아서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교의 비전을 말하는 것이고, 선교의 영이신 성령의 사역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 후에는 선교 신앙이 되어야 말씀인 것입니다. 부활절 이후에는 오순절이 있고, 오순절 후에는 땅끝까지 가라는 명령이 따라 온 것처럼, 부활절이 지나면, 성령 강림절, 성령 강림을 통하면 반드시 세계 선교하는 비전과 꿈이 우리에게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현대 야구의 영웅이 두 사람 있습니다. 하나는 Chicago Cubs의 Sammy Sosa, Boston Red Sox의 Pedro Martinez 선수인데 이 두 선수는 야구의 영웅입니다.
두 사람은 일년에 합치면 25million 달러를 받습니다. 놀랍게도 두 사람이 오늘 여러분이 보신 비디오의 도미니카 출신입니다. 이 선수들의 스토리를 보면, 아주 어렸을 때 가난하게 살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Sammy Sosa 는 1969년 11월 12일 7 형제 중의 5번째로 태어나 7살 때 아버지가 돌아 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구두 닦는 일과 오렌지로 주스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세차를 하며 돈을 몇 푼씩 받아 집의 생계를 도와 주는 아주 가난한 소년이었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어린 시절부터 고생을 했습니다.
Pedro Martinez 선수도 Manoguayabo 에서 태어났는데, Sammy Sosa 의 출생지와 멀지 않은곳이었습니다. 이 선수도 7형제 중에 5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혼자서 아이들을 양육했는데, 가난하게 태어나 그 역시 생존을 위해서 막일을 했습니다. 놀이라고는 아무런 장난감도 없어, 나무 가지를 잘라 야구 배트를 만들고, 양말을 둥글게 말아 야구공 대신으로 만들어 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13세 때 Sammy Sosa 에게 어떤 미국인이 그 곳에 회사가 있어 방문했던 차에 그에게 구두를 닦게 했습니다. 정성스럽게 일을 하는 그에게 가끔 선물을 주면 감사 해하는 Sammy Sosa 의 단골 손님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미국인이 야구 글러브 하나를 그에게 선물합니다. 이 선물 하나가 이 소년의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 놓게 됩니다. 그 소년은 글러브를 받고 열심히 운동을 했는데, 천재적인 소질이 있어, 실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2년 후에 이 소년은 필라델피아 팀과 계약을 하게 됩니다. 갑자기 선수가 된 것입니다. 미국의 한 감독이 그의 재질을 알아 보고 데려 다가 15세 소년을 선수로 계약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야구 협회에서 미성년자라고 해 계약이 결국 파기 되었지만, 이렇게 시작이 돼서 그는 여러 구단을 거쳐 마침내 Chicago Cubs의 선수로 세계적인 영웅이 됩니다. 98년의 한 해의 한 시즌에서는 홈런을 62을 쳤습니다. 한 달에 20개의 홈런을 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여러 종류의 야구의 상을 받고 계속해서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Pedro Martinez 선수는 투수입니다. 뉴욕 Yankees 는 Pedro Martinez 선수에게 혼이 난 적도 있었습니다. 게임 자체가 이루어 지지 않을 뻔 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잘 던지는 투수를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98년에는 MVP상을 받고, 99년에는 Hank Aaron 상을 받고, 역사에 없이 2년을 계속해서 최고의 상이라 하는 CY Young 상을 99년, 2,000년 연속으로 받은 선수는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이 두 선수는 미국의 영웅입니다. 미국의 위대한 야구 선수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두 선수뿐만 아니라 미국의 메이저 리그에 25%가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이라는 겁니다. 또 놀랍게도 이 선수들은 Saint Pedro de Macoris 라는 동네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한 동네에서 모든 야구 선수들이 배출 되었다는 겁니다. 조사해 보니, 이 미국 신사가 구두를 닦으면서 글러브 하나를 전해 주고, 그 소년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그 모습을 보고, 미국에 돌아 와서 야구 선수들이 쓰다 버린 야구 배트와 글러브를 그 동네 아이들에게 전해 주었다는 겁니다. 25년 전의 이야기 입니다. 그 동네 아이들이 야구 훈련을 했다는 겁니다. 이번에 저는 도미니카를 방문하면서 축구로 선교를 하려고 했는데, 축구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오래 전에, 25년전에 미국 신사, Bill Chase라는 사람인데, 그가 아이들에게 야구 도구를 갖다 주고, 그 때를 시작으로 20년 만에 미국 전체 리그를 휩쓴 야구의 위대한 영웅이 나왔고, 미국 역사에 남는 위대한 홈런 기록을 갱신하는 선수가 나왔고, 세계적인 투수가 배출 되어 미국 야구를 세계적인 위치로 올려 이끌어 놓고, 선수의 25%가 다 그 마을 출신이라고 하는 믿을 수 없는 통계를 오늘 보면서, 저는 오늘 야구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구 글러브를 갖다 주었는데, 그 결과가 무엇인가를 말씀 드린다면, 오늘 우리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과 오늘 우리가 전해주는 사랑의 이 복음이 25년 후에 과연 이 위대한 영웅을, 신앙의 위대한 거인을 만들어 간다는 비전을, 꿈을, 가치를 볼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비전과 꿈이 확실하다면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투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대가 경제 자본주의 체재에 있기 때문에 시간을 내는데, 가치를 잽니다. 돈을 투자할 때 돌려 받을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시간이나 물질을 투자 할 때는 그만한 이윤과 돌려 받을 것을 생각하고 하지, 그렇지 않으면 안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사역이 이 가치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비전을 볼 수 있을 때만 시간도 물질도 투자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야구 배트와 다 낡은 몇 개의 글러브를 갖다 준 결과가 오늘 미국을 휩쓰는 야구의 위대한 영웅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을 전해주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들에게 무엇인가를 복음과 함께 줄 수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을 만들어 낼 줄 믿습니다. 오늘 보신 도미니카와 여러분의 교구가 맡은 남미의 여러 선교지를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거기에 꿈을 심고, 시간을 투자하십시오. 물질을 쏟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번에 혼두라스에 우리가 세운 학교의 개교에 앞서 다녀 왔습니다. 그 곳의 어린이들은 길거리에서 맨 발로 먼지를 뒤집어 쓰며 짐승같이 뛰어 다니며 형편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갈 때마다 그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음식을 나누어 주고, 학용품을 전달했습니다. 지금 그 마을 전체가 우리가 전해준 티셔츠를 입고 있습니다. 어른,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우리가 전해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만장의 티셔츠를 나눠 주었습니다. 그런 어린이들을 학교에 입학시킨다고 하니 부모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비디오, 텔레비전, 컴퓨터 등 현대식의 훌륭한 설비로 뉴욕의 어느 학교보다 잘 지어진 학교에서 몇 백 명의 어린이들이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어린이들을 잘 교육시키면, 위대한 일꾼들이 나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학부모를 모아 회의를 했습니다. 회의를 하고 수업료를 얼마나 내야 하나 하니, 한 달에 수업료 백 불은 받아야 된다고 하는데, 그 동네가 가난하여 10불 낼 수 있는 가정도 반 밖에 되지 않아 우리가 95불을 지원하고, 5불만 받기로 했습니다. 그나마 5불 내기도 어려운 가정은 무상으로 공부를 가르쳐 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어린이들을 입학 시켰습니다.
이제 그 곳에서 길거리에서 짐승처럼 다니던 어린이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을 받아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들이 될 줄 믿습니다.
뉴욕에 있는 우리들도 여름 방학에는 자녀들을 모두 데려 다 하나님 말씀으로 키워야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이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회를 위해서 투자해야 되고, 교회는 긴 안목을 내다 보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투자해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과 사랑하는 어린 아이들이 여름 동안 내내 텔레비전 앞에서 우두커니 앉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 2세들을 좋은 교사들이 여름 동안 잘 가르쳐서 훌륭한 신앙을 한 차원 발전시키게 될 줄 믿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께서 이 위대한 꿈을 보실 수 있길 바랍니다. 이런 가치를 부여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이런 우선 순위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치 있는 곳에 투자하십시오. 가치 있는 곳에 시간을 투자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 도:
고마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해야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주님 원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주님 가라고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혼란 중에도 배우게 됩니다. 충격 속에서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고, 가치를 부여 할 수 있도록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이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기다리라, 머무르라, 그러나, 이제는 가라, 그리고 전파하라, 외치라 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 같이 가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가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주님의 이 명령의 뜻을 이 말씀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게 하옵소서.
주님! 가치 있는 것과 영원한 것에 눈이 열려서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투자 할 수 있게 하시고 쓸데 없는데 낭비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가 작은 일과 보잘것없는,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투자를, 시간과 물질의 투자를 쏟게 해 주시고, 위대한 신앙의 영웅들이 나올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마 28:5-6 / 김남수목사
사순절, 부활 주일을 지내며 우리는 바쁜 시간을 지냈습니다. 새벽 기도를 매일하고, 금식 기도를 하고, 오늘 새벽에 부활절 연합 새벽 예배, 또 낮 예배까지 바쁘게 지냈습니다. 교회 생활 하는 것이 바쁩니다. 성탄절이 지나면 수난절, 수난절이 지나면 부활절, 부활절이 지나면 오순절, 오순절 지나면 감사절, 감사절이 지나면 다시 성탄절, 계속해서 모이고, 이렇게 지내다 보면 바쁘게 지냅니다. 이렇게 주님 중심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절기를 중심으로 계속 돌아 가다 보면 결국 주님 품으로 돌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이 Circle인데, 교회 캘린더대로 늘 바쁘게 지내는 것은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 Circle을 벗어나면 복잡해 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바쁜 것이 낫지, 세상에서 복잡해져 좋은 것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저도 바쁘게 지냅니다. 제가 교회 일로 바쁘지 않고, 밤 늦게까지 술 마시고, 노름하러 다니고, 나이트 클럽에 가는 걸로 정신 없이 바쁘게 지낸다면 그것이 복잡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 Circle이 늘 주님 안에서 돌아가는 것이 은혜요, 축복인 줄 믿습니다.
교회 일이 힘들다, 교회 일이 많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 절기이기 때문에 교회를 신앙적으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쓰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두 발 달린 자전거를 부지런히 패달을 돌려야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고 달리는 것처럼, 안 돌리면 쓰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원래 그렇게 열심히 해야 잘 가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가다 세상으로 쓰러지게 되고, 넘어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즐거움으로 하는 사람은 축복이 되고, 날마다 신나는 일이 생기게 될 줄 믿습니다. 억지로 하는 사람에겐 힘이 들지만, 감격과 신나는 일을 하면 그것이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올 줄 믿습니다. 신나게 주님을 섬기면,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섬기면, 그것이 은혜요, 축복인 줄 믿습니다. 교회에 절기가 많고, 모임이 많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열심히 주님 중심으로 살아 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궤도에서 벗어나, 감사절, 성탄절, 부활절 무슨 상관 있느냐며, 관계없이 먹고 노는 날이라고 딴 궤도에서 돌기 시작하면 이 사람은 복잡해 지는 것입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별들이 돌듯이, 늘 주님 중심으로, 교회 중심으로 돌아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 해 주시고, 그 자체가 은혜요, 은혜를 사모하는 자체가 축복인 줄 믿습니다.
교회 생활의 창조 신앙과 부활 신앙은 가장 중요한 두 산맥을 이루고 있습니다. 창조의 신앙이 모든 신앙의 기초라면, 부활 신앙은 모든 신앙의 핵심인 것입니다. 창조 신앙이 모든 신앙의 기본이라면, 부활 신앙은 모든 신앙의 중심인 것입니다. 창조 신앙 없이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듯이 부활 신앙 없이 기독교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부활절은 기독교의 한 부분이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이고, 자체요, 중심이라고 말해야 될 것입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부록이 아니라, 본론이고, 부활 신앙 이전에는 기독교도, 기독교인도, 교회도 없었기 때문에 부활에서 교회가 시작되고, 부활에서 교인이 시작되고, 부활에서 기독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예수님께서 돌아 가셨다가 살아 나신 것을 믿는 것이 부활 신앙인 것 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도 산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석가도, 공자도 마호메트도 소크라테스도 모두 죽었습니다. 다시 살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셨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살아 나셨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부활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승천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구주 이신 줄 믿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맨하탄의 1836년에 세워진 오래되고 유명한 어느 신학교에서의 일입니다. 그 신학교에는 한국에서 온 교수 한 분이 계시는데, 종교간의 폭 넓은 교류를 위해서 한국의 스님을 한 분 초청했습니다.
참선의 깊은 관심을 가진 신학생들이 찬불가를 부르고, 살풀이를 하고, 불공을 드리고, 아멘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너무 보수적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비위에 맞지 않습니다. 아니 성경에 맞지 않습니다. 신학교에서 불교와 세미나를 하라는 이야기는 교리에도 성경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아 나셨습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가 다른 종교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교주의 무덤이 없습니다. 다른 교주들은 무덤이 있어, 무덤을 금으로 치장을 하고 화려하게 장식을 하고 있지만, 기독교의 예수님의 무덤은 여기다, 저기다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이곳 저곳이라고 해 혼란이 옵니다. 도대체 어디가 진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덤을 남겨 놓지 않았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라는 묘비가 없습니다. 시체 또한 없습니다. 부활 하셨으니까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종교가 없는 것을 우리가 갖고 있는데, 그것은 부활 이라는 것입니다. Resurrection 이 부활이라는 것은 우리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 흉내를 낼 수 있지만, 죽었다가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흉내를 내고, 모방할 수 있지만, 사람의 생명은 죽었다가 사는 부활은 누구도 Copy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의 구주가 되었으며,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는 살아 났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 부활 신앙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부활 신앙, 그를 믿음으로 우리의 삶의 진정한 문제를 해결 받고,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아침에 묵상하는데, 성령께서 예수 이외에 다른 소망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묵상을 해 보니까 사실 예수 안에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인류가 그렇게 무겁게 지고 가는 양심, 깊은 영혼 속에 있는 죄를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인도의 Ganges강가에 는 수많은 오물들이 흘러갑니다. 화장실에서 나온 오물들이 그대로 강가로 흘러 갑니다. 그 강 근처에서 사람을 화장시켜서 그 재를 강가에 뿌리면, 극락에 간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 강물을 성수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없어 장작이 모자라 타다만 시체를 그대로 강가로 던져 버린 그런 강물 속에 목욕을 하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그 물을 마시면 죄를 씻고, 거룩해 진다고 그 지저분한 물을 마시는 수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죄 사함은 커녕 병균만 마실 것 같습니다. 물로 씻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찬 물로 빨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 사함을 받는 이 진리를 부활 신앙과 연결 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죽으셨으며, 살아 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는 행동에 옮긴 것이지만, 악은 속에 있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악한 생각들과 죄의 본능을 지니고 있는 악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야 우리가 이것을 해결하고, 치료 받고, 변화 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누가 우리를 변화 시킬 수 있습니까? 누가 이 속에 있는 악한 생각과 이 악의 생각을 치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사적인 이야기는 말을 안 하려고 애쓰지만, 해당 되시는 분은 용서하고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혹시 잘 못 전하면 듣고 제가 나중에 고치겠습니다.
누가 우리 안에 있는 이 죄악과 죄의 근성을 바꾸고 변화 시킬 수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만 하실 줄 믿습니다. 지금도 살아서 역사 하시는 그 분의 부활 신앙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근본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Thomas Arnold 박사는 나는 여러 해 동안 역사를 연구하고, 조사한 결과, 문헌, 유물, 고증을 조사하던 중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셨다는 사실 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 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 사회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 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이해 할 수 있는 사건이며, 유물과 고증과 문헌을 참고하고, 역사를 조사한 결과 역사학 교수로서 확실하다고 고백 했다는 것입니다.
칼 버튼은 성탄절과 부활절 설교는 짧을수록 좋다고 했습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역사적 사실, Historical Fact 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믿는 다고 하는데 자꾸 설명을 부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십가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습니까?
그가 부활 하신 것을 믿습니까? 확실하게 믿습니까?
주님은 부활하셔서 여러분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하셨으니 잘 믿고, 주님 섬기며 주님 중심으로 살게 되시기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일생 동안 살다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 분의 능력에 붙잡혀 영원한 부활 생명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부활하셨다는 사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 감사합니다. 이제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부활 신앙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부활의 능력이 삶에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는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마 28:5-6 / 김근중목사
얼마 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내용을 다룬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대로 예수님은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설을 가지고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1. 역사의 고증이 증명합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 주일하교 3학년에 정서장애를 가진 '필립'이라는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필립은 정서 장애자인데도 성경말씀 만큼은 너무도 좋아했습니다. 예수님 얘기만 나오면 환하게 웃었습니다. 어느 부활절 아침, 주일학교 시간에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부활절을 상징하는 계란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계란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계란 모양이었고 반이 열릴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계란을 나누어 주면서 부활에 대한 설명을 한 다음에 아이들에게 15분의 시간을 주며 부활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을 교회 정원에 나가서 계란 속에 집어넣어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15분이 지난 후 밖으로 나갔던 아이들이 다시 교실로 모두 돌아왔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자기가 가지고 온 것들에 대해 하나씩 설명하도록 시켰습니다. 한 아이가 나와서 자기의 계란을 열었더니 거기에는 꽃이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예쁜 꽃은 생명을 상징했습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살아 있는 꽃을 보면서 박수를 쳤습니다. 두 번째 아이가 또 자기의 계란을 열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주 아름다운 나비가 들어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나비는 생명을 상징했습니다. 세 번째 아이가 와서 또 자기의 계란을 열었습니다. 거기서는 돋아나는 파릇파릇한 잎사귀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 네 번째로 필립 차례가 되었습니다. 정서 장애를 겪고 있던 필립이 앞에 나왔습니다. 학생들이 바보같은 필립이 무엇을 가지고 왔을까 하고 주목했습니다. 필립은 한참을 주저하며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괜찮아. 필립, 그냥 뭐 가지고 왔니? 한번 열어 봐." 그러니까 필립이 자기의 계란을 조심스럽게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학생들이 손가락질 하면서 막 웃어 댔습니다. "그럼 그렇지, 필립은 아무 것도 못 가지고 왔어." 그런데 필립이 갑자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있잖아요." 예수님의 '빈 무덤'은 예수 부활의 확실한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최근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예루살렘의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 라틴어로 '슬픔의 길'이라는 뜻)라는 곳을 가 보았습니다. 그 곳은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선고를 받은 이후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지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800m 정도 되는 순례 길입니다. 그 길 마지막에 위치한 예수님의 장사지냄을 기념한 성묘교회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으로 알려진 '정원무덤'에도 가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곳을 기념하여 세운 승천교회도 가 보았습니다.
'정원무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무덤은 영국군의 한 장군이 고고학적 증명을 통해 발견했는데 현재 예수님의 무덤으로 인정받고 있는 곳입니다. 제가 찍어 온 사진을 스크린으로 보면서 설명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히브리어로 '골고다' 라틴어로 '갈보리'라고 했는데 그 뜻은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곳 산의 바위가 해골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옆 벽에는 초기 기도교인들의 표식인 앵크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무덤은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인데 문에는 'He is not here for he is risen' ('그는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임) 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비어 있는 무덤이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사학자 토마스 아놀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보다 완전하게 증명될 수 있는 사실들이 인류 역사 가운데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한때 영국의 무신론 자였던 리틀 스톤경과 길버트 웨스트는 자기들이 무신론을 주장하는데 두가지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바울의 변화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반증하기 위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동안 연구한 후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 하기를 "우리는 더 이상 이같은 반대자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네 우리는 이 연구를 통해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우리들이 잃어버린 죄인임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몇 년 전 프랑크 모리슨이라는 미국 변호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할 목적으로 "누가 돌을 움직였는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내려 가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읽다, 그만 성령의 감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 때부터 그의 변호사의 기질을 살려 오히려 부활의 사실성을 철저히 변호하는 논리를 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어지는 순간 인생과 세계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2. 성경의 증언이 증명합니다.
안식 후 첫날(주일) 새벽에 마리아를 중심한 여인들이 향품을 발라주기 위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 입구를 막아 두었던 돌이 굴려져 있었고 무덤 안에 들어가 보니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눅24:1-3).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시체가 없음으로 인하여 누가 훔쳐 간 줄 알고 근심하며 울고 있을 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사람 모습)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말하고,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고 말하면서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제 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눅24:4-8).
여인들이 천사의 말을 듣고 무서움과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빨리 달음질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저희에게 직접 나타나 "평안하뇨"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예수님 시체를 다른 데로 옮겨 두었거든 그 곳을 알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신 줄 알고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했습니다 (마28:8-10, 요20:11-18, 고전15:5-8).
베드로가 여인들에게 무덤이 비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무덤 속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이 입었던 수의(세마포)만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같이 놓이지 않고 따로 개켜져 있었습니다. '개켜 있더라'는 헬라어로 엔테튀리그메논(εντητυλιγμενον)으로서, 사용하기 전 상태처럼 둥그렇게 말린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세마포를 가지런히 개어 놓고 두건도 따로 개어 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20:3-7, 20, 27).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들은 여인들이 무덤을 떠난 이후 성 중으로 들어가 대제사장에게 보고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서 파수꾼들로 무덤을 지키도록 했는데(제자들이 훔쳐 가지 못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무서워 도망해 온 파수꾼들의 보고를 듣고 장로들과 의논하고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파수꾼들에게 돈을 주며 "제자들이 밤에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고 거짓말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말까지 오늘날까지(마태복음을 기록할 시점) 유대인들 사이에 두루 퍼져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습니다 (마28:11-15).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를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마16:21, 17:22-23, 막9:9-10, 요2:19-22, 사도행전3:18, 고전15:3-4, 베드로전서2:24). 고린도전서15:3-4에"~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습니다.
3. 교회의 확장이 증명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밤을 새우며 읽었던 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기자가 세계에서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해서 약 300여명의 글을 삭제하지 않고 기록해 놓은 책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불신자도 있었고 이종교인도 있었고 기독교인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내세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경험하기 전과 후의 생활이 180도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자기의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자기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경험하고 내세가 있다는 사실과 내세에 어떤 심판이 기다리고 잇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생활이 바뀌지 않을 없습니다. 모든 삶의 기준을 죽음 이후로 삼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12차례에 걸쳐 부활체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막16:9), 예루살렘에서 여인들에게 (마28:9),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에게 (눅24:34),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막16:12), 예루살렘에서 10사도에게 (눅24:39- 도마 없을 때), 예루살렘에서 11사도에게 (요20:26- 도마 있을 때), 갈릴리 해변에서 7사도에게 (요21:1), 갈릴리 산에서 11사도에게 (마28:16), 갈릴리에서 500여 형제에게 (고전15:7), 예루살렘에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게 (고전15:7), 감람산에서 승천할 때 사도들에게 (막16:19),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 바울에게 (행9:3-6) 보여 주셨습니다. 바울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기에게도 보여 주셨고 예수님을 본 자가 태반이나 살아 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시점에서) (고전15:2-8).
베드로와 요한는 예수 이름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공회원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결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순교하기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도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으나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예수를 증거했고 마침내 순교까지 했습니다 (눅24:52-53, 행4:19-20, 9:19-21).
부활체를 목격한 사도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할 때에 많은 무리가 은혜를 입어 회개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을 사도들이 정해 준 규례를 생명 내놓고 지켰고 성전에 모여 기도하며 순전함으로 예전을 행했습니다. 사랑이 충만하여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를 도왔기 때문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태동한 교회가 오늘날엔 전 세계에 퍼져 교회가 없는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행2:41-47, 4:33- 37).
로마시대 황제들의 박해, 종교개혁기의 구라파에서 교황권의 박해, 영국 국교회 여왕의 박해, 2차 세계대전의 독일 히틀러, 소련 스랄린, 중국의 모택동, 일본의 천황, 6.25전쟁 김일성 등 수 없는 기독교인을 학살하고 교회를 잔해했습니다 (재암리 사건 등). 그래도 기독교는 없어지지 않고 가장 많은 곳에 전파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종교가 되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를 가도 호텔마다 성경책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이런 기적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자는 다르게 삽니다. 19세기 최고의 시인 롱펠로우는 인생의 쓰라린 경험자였습니다. 아내가 젊어서 오랫동안 앓다가 죽었고 재혼한 아내마저 몇 년 안되어 부엌에서 화상을 입고 앓다가 또 세상을 떠났습니다. 롱펠로우가 75세가 되어 그의 임종이 가까왔을 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두 부인의 사별뿐 아니라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오신 것으로 아는데.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시들을 쓸 수가 있었습니까.” 이에 롱펠로우는 마당에 보이는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사과나무는 몹시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립니다. 옛 가지에서 새 가지가 조금씩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새 생명을 계속 공급받아 인생의 새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권세, 죄의 권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권능을 우리에게 덧 입혀 주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죽어도 마지막 날에 다시 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고전15:51-58).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한다고 했습니다 (마28:20).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παρκλητοs: '곁에서 돕는 자'라는 뜻임)으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요14:16).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릴 돕고 계십니다. 아무리 큰 고통 중에 있을 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생각하고 일어나야 합니다. 부활을 보장받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마 28:5-10 / 김충식목사
Ⅰ. 기독교의 특징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죽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을 믿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가 사랑과 윤리, 정직과 정의를 실현하면서 사람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불교나 유교나 이슬람에서도 주장하는 덕목이며, 공산주의에서도 추구하는 이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면, 다른 종교는 모두 죽은 사람을 믿지만 기독교는 지금도 살아계신 분을 믿는 것입니다. 이슬람 사람들은 마호메트(Mahomet)의 무덤을 자랑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Saudi Arabia) 메디나(Medina)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있는 관을 지금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이 묻혔던 무덤을 볼 수는 있지만 그곳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습니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메트는 죽은 것으로 끝났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불교계에서는 2009년 9월에 석가모니의 유골이 경주에 온다고 떠들썩했습니다. 석가모니의 유골이 수십 년 전에 인도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불교 국가들은 크게 흥분했습니다. 인도 불교 당국에서는 발견된 석가모니의 유골을 유리관 속에 정성껏 모시고, 시가행진(市街行進)을 했습니다. 이를 보기 위해서 수십만의 불교도들이 거리에 나와서 길가에 부복(俯伏)하는가 하면, 유골을 보면서 감격하여 울음을 터트리는 등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기독교 선교사 한 사람이 옆에 있는 친구에게 ‘만일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유골이 뼈 조각 하나만이라도 발견되었다면 아마 기독교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종교인데, 예수님의 유골 일부분이라도 발견된다면 기독교는 모두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와 타종교의 다른 점은 죽은 사람을 믿는 것과 지금도 살아계신 분을 믿는 것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 뷰렌」이라는 신학자는 ‘부활 이전에 그리스도인은 없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른 종교를 신앙하지 않고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어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Ⅱ. 성경은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몇 단계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첫 단계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삼 일 만에 살아나실 것을 주님이 직접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것입니다. 공생애 기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면서 이적과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많은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나는 이제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다, 그러나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을 세 번 예고하십니다. (마태 16:21, 17:22 이하, 20:18-19)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장면은 몇 가지로 묘사되는것에 비해 살아나신다는 표현은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는 똑같은 말을 사용하므로 부활의 확실성을 제자들에게 주지시키신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가,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을 증거하는 기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한 성경은 4복음서에서 모두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라는 과거형을 사용합니다. 본문 6-7절 말씀도 ‘살아나셨다’는 말씀이 두 번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을 강력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이 강림한 후 교회가 세워지고, 초대 교회의 유명한 두 인물인 베드로와 바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바울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님이 고난당하고 죽음을 당하셨다가 제 삼일에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머리로도 이해되고, 마음으로도 받아들이고, 온 몸으로 느끼는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 어느 교회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에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분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지금 살아있는 분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을 이야기 해보세요’ 합니다. 어린이들이 ‘카터 대통령’, ‘클린턴 대통령’, ‘부시 대통령입니다’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어린이가 손을 들면서 ‘저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아니, 지금 살아계신 분들 중에서 말해보세요’ 했더니 이 어린이가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은지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선생님은 그것도 몰라요?’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안 믿고, 죽은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가면서 생명이 없는 그리스도인과 생명이 없는 교회가 점점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믿기보다는 의례적인 신앙생활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몹시 안타깝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주님의 살아계심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먼저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3:15)하며, 사도행전 5:30을 보면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하면서, 31절에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합니다. 하나님이 주님을 부활시키어 영원한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보면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행 13:30)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님은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셨다가 또 다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썩지 아니하시는 분으로 영원히 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가장 위대하게 여기는 왕인 다윗과 비교를 하면서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행13:36,37) 합니다. 위대한 다윗 왕도 죽어서 썩었는데, 예수님은 썩지 아니하는 영원한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Ⅲ.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곳에는 부흥과 축복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흥왕하고, 부흥하고, 발전하고, 번창하는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를 이끌었던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신을 가졌을 때에, 교회는 살아서 움직였고 부흥이 되었고,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여 급기야는 로마까지도 정복을 하여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살아계신 주님을 믿을 때에는 기독교가 크게 흥하는데, 문제는 교회와 성도들이 풍족해질 때에 신앙적으로 나태해지면서 교회가 쇠퇴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보다는 죽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죽이고 대신 자신들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세 교회가 암흑시대가 된 것입니다. 역사가 가르치는 교훈은, 주님이 살아계신 곳에는 부흥과 번창이 있지만, 죽은 예수님을 믿거나, 주님 대신에 인간이 영광 받으려는 곳에는 타락은 물론이고 암흑의 세계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 등 모두에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1953년에 기독교선교단체인 C.C.C 세계총재가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때는 김포공항이 없었기에 여의도 공항에서 비행기를 내려 시내를 들어올 때에, 서울 시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면서 ‘한국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불가능한 나라다’ 하였습니다. 쓰레기통에서는 예쁜 장미를 볼 수 없습니다. 더럽고 지저분한 쓰레기만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은 희망이 없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대학생 선교단체인 C.C.C 세계총재가 평가한 것입니다.
그런데 1988년도 서울올림픽이 있은 이후 세계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은 「기적의 나라」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불가능한 나라가 어떻게 기적의 나라가 될 수 있었을까요? 흔히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하고, 경제 개발 및 여러 계획을 잘 수립하여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일부분은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만일 새마을 운동이나 경제 계획을 잘 세워 기적의 나라가 될 수 있다면 지금도 새마을 운동하는 나라들이 다 잘 살아야 합니다. 북한도 항상 경제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기고, 천리마 운동같은 것을 하여 우리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일합니다. 그렇다면 북한도 잘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한국이 기적의 나라가 된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나라가 기적의 나라가 된 근본적인 이유는 195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한국은 영적으로 가장 활동적인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성도들의 수가 늘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인한 의식이 달라졌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의식으로 인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없는 중에도 평안했습니다.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당당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도의 열기가 온 강산을 뒤덮었습니다. 산골짜기마다 기도원이 있었을 뿐 아니라 소나무를 붙잡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살아계신 주님이 계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신 주님이 한국의 기적을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곳은 초대교회나 로마나 영국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를 막론하고 부흥과 번영과 발전과 축복이 있습니다.
Ⅳ. 문제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신앙이 점점 식어 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은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태평성대를 이루고 평안할 때에 교회가 타락한 것처럼, 주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어느 정도 살 만하니 예수님이 없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예수님에게 제사 드리는, 모양만 있는 성도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교회 한번 가는 것을, 절에 한번 갔다 오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 주간에 며칠 동안 기도원을 다녀왔습니다. 강남금식기도원이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가보니 한산하였습니다. 한얼산기도원은 1970년대 이천석 목사님이 계실 때에는 언제가든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예배당은 가득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당시에 은혜 받던 추억이 있어 가보았습니다. 많이 변한 것에 매우 놀랐습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기도원까지 펜션이 가득 들어섰고, 기도원은 썰렁했습니다. 예배당을 들어가니 심령부흥성회라 하여 강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하는데 낮 집회에 강사님을 포함하여 12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기도의 열기가 하늘을 찌를 듯 하고 살아계신 주님을 사모하며 부르짖던 것들이 엊그제 같은데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형편이 좋아지니 기도의 열정과 열기가 사라지고, 조용한 것을 선호하고, 점잖게 예수 믿기를 원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죽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시간을 내어서 오랜만에 고향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예배당 안을 들어 가보니 그랜드 피아노도 있고 강대상도 우리 교회보다 더 멋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을씨년스럽고 삭막한 느낌이 드는지요? 어려서 교회를 다닐 때에는 비록 초라한 교회였어도 따뜻한 온기가 있었고, 언제 교회를 찾아도 활동적이었고 살아있는 교회같았는데, 지금은 갖출 것은 다 갖추었는데도 무엇인가 비어 있는 허전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혹시 죽은 예수님을 믿고 있지는 아니한지 철저히 자아성찰을 해야 할 것입니다.
Ⅴ.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심은 그리스도인의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무덤을 떠나는 여인들을 만나서 “너희가 평안하냐” 물으셨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평안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평안은 어느 한 가지만 충족되어진다고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건강만 있다고 평안하지 않습니다. 물질만 있다고 평안한 것도 아닙니다. 남편이 돈만 잘 벌어온다고 평안한 것도 아니요, 자녀가 공부만 잘 한다고 평안한 것도 아닙니다. 주일에 교회 한번 다녀왔다고 해서 평안한 것도 아닙니다. 평안은 모든 것들이 충족되어질 때에 진정한 평안이 주어집니다. 영적으로 매우 충만하다 할지라도 육신이 찌르는 것 같은 아픔과 고통이 있을 때에 큰 평안을 얻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부분이나 일시적인 평안보다는 전인적인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여인들은 주님이 주시는 전인적인 평안을 소유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초대교회를 통해 보여주는 증거이며, 예수님을 영접한 나라들과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을 믿고, 그 분과 함께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완전한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8:20을 보면 주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시는데, 만일 예수님이 죽은 것으로 끝났다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끝 날까지 함께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기에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천사의 부활절 멧세지
마 28:1-6 / 임현수목사
로마의 어느 장군에게 부활 신앙을 증거 했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고 특별히 좀 포악한 장군이어서 그런지 전도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도 받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고 하니 나는 예수를 안 믿겠소.>
아니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그런데 이 장군은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고 하기 때문에 못 믿겠다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죽인 사람들이 워낙 많은데 그들이 다 살아난다고 생각하니 큰일 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원수가 살아나는 것은 싫었던 모양 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사실 우리는 믿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허구 입니다. 의도 필요 없고, 심판도 의미를 잃고, 선도 행할 필요가 없고, 사랑도 인내도 모두 의미를 상실하는 것 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는 도덕 윤리는 꽃병에 꽂아놓은 꽃과 같아서 금방 시들게 되어 있습니다.뿌리가 없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정의는 죽을 수가 없기에 예수는 부활 했고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에 예수는 부활 했다고 말 합니다. 그리고 진리는 영원하기 때문에 예수는 부활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진리도,사랑도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부활이라는 것은 그런 철학적인 부활도 아니고, 톨스토이 식의 문학적인 부활도 아니고, 환생이나 윤회 같은 종교적인 부활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식물이 다시 싹이 나듯이 피어나는 자연 현상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죽은 자를 살리는 재 창조의 능력입니다.
비겁하여 계집종 앞에서도 벌벌 떨던 베드로도 부활의 진리를 믿게 되는 순간 담대히 외칩니다.
행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3:13 …..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람들은 예수를 죽였고 하나님은 그를 부활 시키셨습니다. 여기에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부활은 능력 입니다. 그러나 부활에는 멧세지가 있습니다.
부활절에 우리가 받아야 하는 멧세지는 무엇 일까요?
이 시간 저는 여러분을 인류 역사상 최초의 부활절 현장으로 모실려고 합니다.
때는 약 2,000년 전 입니다. 장소는 예수님이 묻히셨던 무덤입니다. 그 날 예배의 설교자는 천사였습니다. 그는 번개 같은 모습으로 흰옷을 입고 부활 새벽 첫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돌 강단 위에 섰습니다. 여러분 천사의 멧세지를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날 예배의 청중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꼭 두 사람이 참석 했는데 둘 다 여자 였습니다. 그 두 여자는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리아> 라는 친숙한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설교자였던 천사는 매우 간단한 설교를 했습니다.
천사의 설교는 간단한 두개의 요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첫번째 요지는 <와서 보라>는 멧세지 입니다.이것은 초청입니다.
마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그리고 두 번째 요지는 <가라>는 멧세지 입니다. 이것은 파송입니다.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와서 보라>는 것은 초청입니다.이것은 주님의 부활의 사실을 확인하라는 초청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부활의 사실을 억지로 믿도록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부활의 사실을 와서 보고 확인하라고 초청하십니다.
무덤은 비었습니다. 빈 무덤은 부활의 증거였습니다. 무덤은 부활을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부활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무덤은 별로 중요한 것이 못 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무덤에 관심이 많습니다. 마리아가 무덤 밖에 서서 울었던 것도 무덤에 주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양지바른 언덕에 위치한 무덤이 명당 이라고 해서 마치 그곳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무덤준비에 애를 씁니다.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이 부질 없는 일에 골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무덤에 입고 들어가는 수의에 대해서도 지나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 입니다. 남한에서는 수의 베옷 한 벌에 2,000불에서 3,000불이 나갑니다.(남녁포,안동포,강원산)그런데 고위 공무원이나 기업인들은 안동포에 황금가루를 뿌린 1억원 짜리 수의를 입힌다고 합니다. 제 정신이 아닙니다.
무덤이란 잠시 머물러 있는 곳 입니다. 무덤에 영원히 머물러 있는다면 인간처럼 불행한 존재도 없을 것 입니다. 그런데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은 죽어서 묻힐 무덤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 입니다.그러나 우리는 무덤에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운명 하시자 마자 부활 승천 하시지 않으시고 굳이 모든 인간들이 거쳐가는 무덤에 잠시 계셨던 것은 우리에게 부활을 보여 주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덤이 영원한 우리의 처소가 아님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부활 하신 것 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탐구해 보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조사하고 탐구한 사람 가운데 부활 신앙을 고백하지 않은 사람은 역사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변호사 가운데 유명한 프랭크 모리슨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부활이란 하나의 신화에 불과 하다고 생각 했습니다. 부활은 근거 없는 것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부정하기 위해서 연구를 시작 했습니다. 그는 변호사답게 일세기의 재판 문서들을 중심으로 연구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의 놀라운 사실 앞에 그는 압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살아계신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제가 부활절 때 마다 소개해 드리는 책 입니다. 이 책 제 1장의 토픽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 Book that refused to be written. 이 책은 원래는 쓰여지기를 거절 했던 책 이라는 제목 입니다. Who moved the Stone 이라는 책 입니다.
현재 미국 그리스도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사람 가운데 Josh Mcdowell 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법률학도였습니다. 그는 휘튼 대학과 탈봇 seminsry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부활이 가장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합리적인 이성을 갖고 있는 내가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가 있는가? 그러나 부활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는 무려 하루 3시간 씩 거의 일년을 부활에 대해서 역사적인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도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도 책을 썼습니다.
The resurrection factor 라는 책입니다. 이 사람은 오늘날 전세계의 대학생들에게 기독교의 부활을 변증하는 최고의 학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부활의 사실을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와서 보시기 바랍니다.
무덤은 왜 비었을 까요? 설명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대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분은 다시 시셨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와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다시 시셨습니다.
둘째로 천사의 멧세지는 가라는 것 입니다. 이것은 명령 입니다. 7절 입니다.
마 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빨리 가라고 하십니다. 가되 갈릴리로 가라고 하십니다. 거기 가서 그 분은 다시 사셨다고 외치라는 것 입니다. 왜 하필이면 갈릴리 입니까? 갈릴리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 입니다. 갈릴리는 가장 슬픔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 이었습니다. 갈릴리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갈릴리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활의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부활의 능력으로 승리하게 될 것 입니다.
눌려있는 사람들이 부활의 소식을 듣는다면 이것은 해방의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슬픔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부활의 소식을 듣는다면 이것은 기쁨의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병든 사람이 부활의 복음을 듣는다면 이것은 치료의 복음이 아닐까요?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부활의 소식을 듣는다면 이것은 무덤 건너편에 약속된 희망의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소식을 들은 사람 들 입니다.그렇다면 당신은 이 소식을 전하고 계십니까? (어제 블루어에서. 노스욕에서.. 아프칸에서. 카작에서. 중국에서.)
적은 무리여 두려워말라! 부활절 새벽에 외쳤던 천사의 멧세지가 이것 입니다.
두려워말라. 그는 살아 나셨느니라. 그는 여기 계시지 않느니라. 이소식을 전해야지 슬픔에 잠긴 사람들이 기쁨을 얻습니다.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이 희망을 얻습니다. 죄책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죄사함의 자유를 얻습니다.
질병에 얽매였던 사람들이 치료를 얻습니다. 죽음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무덤 건너 편의 소망을 얻습니다.
이 소식은 매우 시급한 소식 입니다.
그래서 빨리 가서 외쳐야 합니다.
땅 끝까지 가야 합니다.
모든 족속에게 이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빈 무덤의 진실
마 28:-16 / 홍문수목사
만물이 소생하는 새 봄, 부활절 예배에 참례하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때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예수가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야? 뭐, 자기가 구세주라고? 그렇게 맥없이 죽으면서 큰소리를 치다니!” 제자들은 이미 도망가 버렸고, 소수의 사람만이 슬픔에 잠긴 채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 후 사흘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몇몇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고 새벽 미명에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연약한 여인들인지라 무덤의 큰 돌문을 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파수꾼들에게 사정을 하면 될까 하는 기대를 갖고 갔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이미 돌문이 치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천사가 돌을 치우고 그 위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번개같이 빛나서 파수꾼들(4절. 수직하던 자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깜짝 놀란 여인들에게 천사가 뭐라고 말합니까? 본문 5절~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이제 그것은 ‘빈 무덤’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사역하던 미국인 스탠리 존스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한번은 길거리에서 사람들 앞에 선 채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있던 모슬렘 한 사람이 퉁명스럽게 말을 겁니다. “여보시오! 우리 마호메트는 실제 인물이요. 그의 무덤이 메카에 있단 말이요. 그런데 당신네 예수의 무덤은 없지 않소?” 그러자 선교사가 기회다 싶어 이렇게 대꾸합니다. “아, 그래요? 사실은 예수님의 무덤도 있습니다. 그런데 텅 비어 있죠. 왜냐하면 죽었다가 부활하셨거든요.” 이 말에 그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가버렸습니다.
지금 성지 예루살렘에 가 보면 골고다 언덕과 무덤을 기념하여 세운 성묘교회(콘스탄티누스 로마황제가 어머니 헬레나의 요청으로 AD 336년 건축함)가 있습니다. 그 교회당 안에 예수님의 기념 묘소가 있는데, 거기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습니다! 텅 빈 무덤입니다. 그래서 흔히 기독교를 가리켜 ‘빈 무덤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빈 무덤’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빈 무덤은 다음 세 가지 사실에 대한 ‘물증’입니다.
[1] 빈 무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사실에 대한 물증입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보면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구세주 되심을 부정하려는 많은 도전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악한 원수 마귀의 계략입니다. 마귀는 인간이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인간의 구원을 훼방하려고 합니다. 아주 교묘하게. 그래서 때로는 아주 유식한 사람들을 동원해서 그럴 듯하게 예수님의 부인하게 만듭니다.
요즘 신문에 보도되는 <유다복음> 같은 것도 그런 유입니다. 대단한 문서가 발견된 것처럼 야단들입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배반해고 그 결과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유다야말로 진짜 훌륭한 사도인 셈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깁니다. 한 마디로 이것은 고대 이단의 문서입니다. 그런 것을 발견해 놓고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흔들 수 있을 것인 양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단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이비(似而非)예요. 그럴 듯한데 완전히 틀린 겁니다. 그리고 이단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단은 생겼다가 교주가 죽으면 슬그머니 사라져버립니다. 반면 기독교 복음은 2천년의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오는 참 진리입니다. <유다복음>은 AD 1세기~2세기에 걸쳐 유행하던 영지주의(Gnosticism) 이단의 아류에 불과합니다. 나타났다 사라진 이단입니다.
또 수년 전 소설책으로 발간되었다가 최근 영화화되어 곧 개봉되는 <다빈치 코드>(댄 브라운의 추리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생긴 딸(사라)과 그 후손들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중세교회가 그 비밀을 아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라 처형하고 숨겼다는 겁니다. 그 비밀을 지켜온 기사단 중에 다빈치가 있었는데, 그의 그림에 비밀을 담은 암호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다빈치 코드’라는 것이죠. 문자 그대로 ‘황당무계한 추리’일 뿐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들은 그냥 무시하면 됩니다. 그러다가 마는 겁니다. 걸려서 실족하는 사람만 손해입니다. 성경공부를 조금만 해도 충분히 분별이 되는데,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데, 그것도 모르고 휩쓸리면 정말 딱한 일입니다. 이런 이단들이나 엉뚱한 소리들이 때때로 등장하는 것은 마귀의 도전인데, 그러면 왜 하나님이 막지 않고 허용하실까요? 그 이유는 ‘신앙의 진정성’을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오히려 이런 기회에 참 그리스도인들을 골라내고, 그 신앙을 연단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이단 사설 중에서 특히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게 많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가 무너지니까, 어떻게 해서든 부활을 거짓으로 주장하려고 기를 씁니다. 그래서 도난설, 환각설, 조작설, 가사설, 무덤 오인설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빈 무덤이 있고,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 도망갔던 제자들이 다시 모여 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가 2천년 동안 부흥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산 사람을 위해서도 목숨 바치지 못하고 도망갔던 그들이 시체를 위해 충성하고 순교했다면 ‘희대의 코미디’이죠. 도무지 말이 되질 않습니다.
어쨌든 분명하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 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만천하에 증명하셨습니다. 롬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에 하신 말씀대로 그 죽음은 인간의 죄를 대신한 대속의 죽음입니다. 인간이 모두 죄인이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데, 예수 십자가 대속을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습니까? 부활이 있다면 이 모든 게 사실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희대의 사기꾼이 되는 겁니다. 그럴 수 없죠.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부활절 아침에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구세주임을 다시 한번 고백하시고 참 그리스도인으로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2] 빈 무덤은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하시는 사실에 대한 물증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가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승천이죠. 그분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령을 통해 오늘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그리고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요14:18~20을 보면 예수님이 미리 예언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마귀 권세, 사망 권세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님! 그분이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면 세상에 무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가 종교개혁을 추진하면서 많은 박해와 사련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사흘 동안 내내 심한 스트레스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 캐티가 상복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루터가 묻습니다. “아니, 누가 죽었소?” 아내는 퉁명스럽게 외마디로 대답합니다. “하나님이요!” 루터는 화가 나서 말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불경스런 말이요? 하나님이 죽었다니 ... ?”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가 말합니다. “당신의 지금 모습을 보니까 꼭 하나님이 죽은 것 같구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낙심한 채 며칠을 꼬박 틀어박혀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루터는 통회 자복합니다. 그리고 용기를 얻어 종교개혁을 완수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를 위해 죽었다가 부활 승리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하고 강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마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러분! 정말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아무쪼록 오늘 부활절 아침에 그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시련도, 문제도 다 극복하고 당당히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빈 무덤은 그리스도인들도 장차 부활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물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성도의 부활에 대한 물증이요 샘플입니다. 고전15:20을 보십시오. “ ...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라는 것은 샘플 혹은 모델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모델 하우스에 가 보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아직 집이 지어지지 않았지만 지어질 집의 모습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우리 성도들이 장차 예수님 재림 하실 때 부활할 모습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 그 육체는 흙으로 돌아갑니다.(전12:7 참조)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흙으로 돌아갔던 육체가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부활의 몸으로 변화됩니다. 바로 그때 성도들의 무덤도 2천년 전 예수님의 무덤이 그랬듯이 다 열리고 빈 무덤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부활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 몸은 현재의 것과 전혀 달라질 겁니다. 질적으로 달라집니다. 눅24:36~43 보면 예수님의 부활체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제자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갑자기 한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유령인 줄 알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못 자국이 난 손을 보여주면서, 구운 생선 한 조각을 잡수어 보이심으로 유령이 아닌 부활체임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부활체가 얼마나 자유하고 신기한 몸인지 조금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 소설 중에 <벽을 뚫고 다니는 사람>(Passe-murailles)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쟝 뤽 꼬르네트(Jean-Luc Cornette)와 스테판느 우와리(Stephane Oiry) 두 사람의 공저인데, 그 주인공이 투명인간처럼 벽을 뚫고 다닙니다. 물론 이것은 공상소설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정말 그런 식이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신기한 몸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부활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썩지 않고 하늘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 이해가 되시지 않겠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세요. 계란이 껍데기 속에 갇혀 있을 때 장차 닭이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몰라도 홀연히 그 놀라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부활 장에서 부활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전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우리는 부활체가 어떤 것일지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몸이 부활 후에는 영원하고 영광스런 것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아름다운 것과 건강한 것을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간은 누구나 쇠하고, 병들고, 추해지고, 장애가 생기고, 죽고, 썩고 ... 그렇게 됩니다. 이것이 죄인 된 모든 인간들의 비극적인 운명입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부활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활만이 인간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부활은 죽음과 질병도 고치는 ‘완전한 치유’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 자신의 부활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예수님과 늘 동행하면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이 좋은 예수님, 우리 위해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 가족과 이웃에게 꼭 전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