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의 법칙.
서로 다른 종족이 극과 극으로 진화되어 마침내 충돌하게 되면,
그곳의 자연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여 진화한 종족이 강자의 면모를 갖추어 승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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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1월 1일.
P.M 2:11.
'나와 같은 세계에서 온 여왕이라?’
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분명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자신 외에,
이계로 출입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은 적은 없었다.
‘이거 피곤하게 됐는데.’
분명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대륙의 상황을 자신에 유리하게 바꾸려 할 것이다.
현이 애초에 계획했던 진로에서 크게 틀어질 수도 있는 변수였다.
‘이걸 어찌해야하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현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바로 옆엔 레이노첼이 앉아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현은 어색하게 한번 웃어주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레이노첼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하고는,
앞에 있는 호수에 돌 던지는 일을 계속했다.
그들은 한 참 말을 달리던 중, 호숫가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말들도 근처에 묶어두고, 잠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며 쉬고 있는 중이었다.
[퐁당!]
조그마한 돌멩이가 둥근 물결로 투명한 접시를 만들어내며 호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레이노첼은 그 돌멩이의 마지막 흔적인 맑고 투명한 접시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 투명한 접시는 계속해서 커지더니, 유유히 모습을 감췄다.
레이노첼은 그 별것 아닌 일에 의외로 흥미를 느낀 듯,
뾰족한 귀를 쫑긋거리며 옆에 있는 다른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퐁당~.]
또 하나의 돌멩이가 물결에 마지막 흔적을 남기며 호수 밑바닥으로 모습을 감췄다.
호수의 물은 예쁜 에메랄드빛을 띄고 뭍엔 맑게 밑바닥을 비추었지만,
호수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밑바닥이 점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대체 이 호수가 얼마나 깊을까하는 궁금증도 안게 되었다.
현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중, 호수에 생긴 물결을 보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문명 돌멩이가 닿은 면적은 분명 한 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돌멩이가 물결에 남긴 흔적은 그에 비해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직접 영향을 준 하나의 점에 비해 상당히 넓게 퍼져나가는 물결의 원.
분명 다렌느역시 한명의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그녀가 이곳에 몰고 올 파장은,
그가 보고 있는 호수위의 물결과 같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이곳에서 가지게 될 위치와 영향력은...
“...빌어먹을...”
그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일단 그녀에 대해 상세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여왕, 기사, 마차, 섭정.
‘잠깐만, 여왕과 섭정? 기사와 마차?’
현의 머릿속에 대략적인 계획의 지도가 잡히는 듯 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레이노체..ㄹ...”
그는 자신의 앞에 벌어진 상황을 이해할 필요성을 느꼈기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현의 앞에 벌어진 상황은 상당히 생뚱맞은 것이었다.
레이노첼이 자신의 머리보다 약간 큰 바위를 머리위로 들고는,
여기저기로 비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팔과다리는 몹시 후들거렸지만,
얼굴만큼은 무언가에 잔뜩 호기심을 품은 어린아이의 그것이었고,
뾰족한 귀는 연신 앙증맞게 쫑긋거렸다.
“...뭐해?”
“아? 이거한번 호수에 던져보려고.”
“이봐~, 그만 두라고. 그래서 뭐하게? 물만 튀고 좋을 것 없어.”
그래도 레이노첼은 막무가내였다.
“이걸로, 호수 전체에 물결이 치도록 만들겠어! 잘 보라고!”
“아-. 그럴 거라면, 그 돌로는 무리일 것 같은데.”
“으쌰!”
레이노첼은 기어코 머리통만한 바위를 호수 가운데로 힘껏 던졌다.
곧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물을 튀겼다.
[푸웅~~더엉~.]
꽤 거대한 물살이 요동을 치며 사방으로 튀었다.
확실히 강한 파장의 물결이 생겨나며 사방으로 퍼졌지만,
호수 전체를 뒤덮기에는 조금 무리일 듯싶었다.
“아아, 하지 말라니깐, 그걸 기어코.. 시끄럽게 뭐야.”
“에엥, 역시 무리였나?”
현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고,
레이노첼 역시 실망한 표정으로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보다, 나 물어볼게 있어 레이노첼.”
자리를 툭툭 털며 일어나던 현은 말을 이으려했지만,
레이노첼의 탄성에 기회는 사라졌다.
“어어! 저것 봐!”
“응?!”
현은 호수 중앙을 응시했다.
호수 중앙에선 거대한 파장이 생겨나며 물거품이 솟아나고 있었다.
현은 불길함을 느끼고 맥궁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레이노첼은 마냥 기쁜 듯 소릴 질렀다.
“이것 봐, 내말이 맞잖아! 가능하다니까!”
[피키잉-.]
순간 호수 중앙부터 호수전체로 분부시게 밝은 빛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휩쓸고 지나갔다.
현과 레이노첼은 바로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레이노첼도 그제 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침을 삼켰다.
[쿠구구구구구!]
거대하지만 짧은 진동이 한번 호수에 울리더니,
호수중앙에서 뭔가 푸른빛을 발하며 튀어 올라왔다.
[투화악!]
둔탁한 물의 파열음이 들리며 튀어 오른 ‘그것’은,
대략적인 형상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튀어 올랐고,
푸른빛을 발산하고 있어서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현이 그제 서야 화살을 메기고 시위를 당겼지만, 빛 때문에 겨눌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것’이 현과 레이노첼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레이노첼은 자신이 한 행동에 비해 상당히 충격적인 지금의 결과에 대해,
납득하기 어려운지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고,
나무에 매두었던 열제와 칸은 긴장했는지 연신 발굽으로 땅을 굴렀다.
이윽고 밝은 빛의 ‘그것’은 그들의 코앞에 도달했다.
“.....”
현은 말없이 ‘그것’을 노려보았다.
밝은 빛 때문에 눈이 몹시 아팠지만, 활을 겨누고 있는 이상, 눈을 뗄 수는 없었다.
‘그것’에게서 의외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당신들이 나를 깨웠나요?”]
현은 반사적으로 활시위를 놓을 뻔 했다.
예전 차원의 문을 통과할 때 만났던 푸른 눈의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말이 전달되어 움찔했던 것이다.
현은 방금 자신이 하려했던 짓과 그에 이어질 일들을 상상하며 전율했다.
“누, 누구세요?”
레이노첼이 잔뜩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현은 이번에도 활시위를 놓을 뻔 했다.
현은 자신이 너무 긴장했음을 깨닫고 자신을 진정시켰다.
앞에 있는 ‘그것’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적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현은 침착하게 ‘그것’에게 외쳤다.
“당신은 누구요? 모습을 드러내시오!”
그의 말에 마침내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잠시 후 마침내 ‘그것’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현은 잠시 짧은 신음을 흘렸다.
레이노첼 역시 짧은 신음을 흘릴 뿐, 별다른 말을 하질 못했다.
현은 순간 허무함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일단 그들은 잠시 공포 비슷한(?) 혼란으로 몰아넣은 ‘그것’은,
일단 ‘작았다’.
현의 팔뚝보다 약간 큰 정도의 크기.
그리고 생김새는 상당히 생뚱맞았다.
그 생뚱맞은 생김새를 설명하자면, 푸른빛의 윤기가 나는 비늘을 가진 이구아나가,
에메랄드빛 바탕의 알록달록 투명한 나비날개를 달고 있는 모습.
게다가 크다고 해야 할지 작다고 해야 할지 고민되는 크기의 방울달린 더듬이.
‘이렇게 생긴걸 뭐라고 하더라?’
현은 잠시 동안의 침묵을 틈타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그동안 ‘그것’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둘을,
까만 눈을 나름대로 귀엽게 깜빡거리며 바라볼 뿐.
순간 레이노첼과 현의 입에서 동시에 말이 튀어나왔다.
“페어리 드래곤?”
[“맞아.”]
그 페어리 드래곤은 웃는 건지 찌푸리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현은 일단 겨누고 있던 활을 거두었다.
이렇게 작고 약하게 생긴 것에게 활을 겨누기도 뭣했다.
현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우리가 너를 깨웠다고?”
[“그래.”]
현은 문득 레이노첼이 던진 바위가 생각났다.
레이노첼도 문득 그 생각이 스쳤는지, 잔뜩 죄스런 표정을 지으며 현의 눈길을 피했다.
“방금 전 호수중앙에 떨어진 돌 때문에 깬 거라면 우리가 깨운 게 맞아.”
현이 레이노첼을 향한 따가운 눈길을 거두고는,
페어리 드래곤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페어리 드래곤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긍정했다.
[“그런데 당신들은 페어리가 아니잖아?”]
“뭐?”
[“나를 깨운 돌은 페어리 퀸을 부활시킬 5명의 페어리만 가질 수 있는데?”]
페어리 드래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호수중앙에서 무언가를 건져 올려 보여주었다.
분명 아까의 그 돌이었다. 크기도 같았고, 색도 같았다.
아까와 약간 다른 점이라면,
아까는 보이지 않던 꼬불꼬불한 문자들이 빛을 발하며 새겨져 있다는 것 뿐.
“아!”
순간 레이노첼이 탄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나 이 전설 들은 적 있어!”
“전설?”
현은 영문을 몰라 벙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마 내 기억이 맞을 거야, 고대 역사서에서 본적이 있는데,
예전 제 2차 대륙전쟁 때, 3제국이 줄다리기를 한창 하던 중,
동쪽 사막국가연합이 우군으로 끼어들면서 좌군과 중앙군이 크게 패퇴했거든.
그 상황에서 좌군과 중앙군이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 후퇴를 하던 때였어.”
때는 3제국을 통틀어 가장 강성했던 중앙군의 제국인 샤크메트력으로 244년.
5년간의 2차 대륙전쟁으로 대륙엔 피바람이 불었고,
그 피바람은 평화롭던 다른 종족에게까지 들이닥쳤다.
엘프는 자신들의 숲을 지키기 위해 우군으로 들어갔고,
페어리들은 엘프와 같은 이유로 중앙호수와 동서남북 4개호수를 지키기 위해,
중군에 가담했다.
분명 오크와 같은 다른 종족들에게도 전쟁의 영향이 미쳤지만,
그들은 알 수 없는 행동을 되풀이하며 서북의 한 작은 반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3제국이 한군데씩 속한 3개 군은 5년간이나 계속된 전쟁에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는 국력으로 팽팽한 힘겨루기만 계속했다.
그러던 중, 연말쯤 해서 동쪽에서 나타난 이민족이,
꽤 강성했던 사막의 여러 왕국들을 단숨에 통일시키고 정권을 쥐게 되자,
중립선언을 깨고 대륙무역의 중요한 파트너였던 우군에 합세했다.
초기엔 별다른 차이가 보이지 않았지만,
사막국가 연합에서 연마다 7번에 달하는 출병을 감행하자,
중군과 좌군이 서서히 서쪽으로 밀려나며 팽팽함이 깨지고,
승리의 저울은 우군에게로 기울었으며 좌군과 중군은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막국가연합은 중앙집권의 거대한 제국으로 변했고,
전쟁의 막바지에 이른 246년.
7년간의 전쟁을 끝내겠다며 20만의 대군을 추가 파병하기에 이른다.
이에 큰 타격을 입은 좌군과 중군은 페어리들의 땅인 중앙호수와,
4개 호수를 모두 포기하고 만다.
중군의 모든 인간병력이 후퇴하자 페어리들은 호수를 지키기 위해,
단독으로 방어를 했지만, 계속해서 몰려오는 몇 십만의 군대를 막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페어리들의 영혼이자 날개이며 여왕인 페어리 퀸 셀르윈은,
5명의 페어리 나이트에게 자신의 심장의 일부와 봉인석을 나누어주며,
후에 중앙호수에 다시모여 자신을 깨우고 페어리들의 유토피아를 재건하기로 약속했다.
그 후, 페어리 나이트들은 중앙호수와 4개의 호수에 잠들었고,
페어리 퀸의 심장은 호수 근처에 숨겨놓았다.
마지막 페어리 나이트는 눈물을 흘리며 중앙호수 속으로 가라앉는 페어리 퀸을 보며,
중앙호수를 지키겠다고 하늘에 맹세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군의 승리로 끝날 것 같았던 제 2차 대륙전쟁.
그러나 결과마저도 그들의 손에서 이루어지질 못했다.
바로 동쪽에서 나타난 검은 눈과 검은머리를 가진 이들로 이루어진 군대.
그들은 3제국과 제후국들을 단숨에 완파시키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로인해 전쟁은 승자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남은 것은 패자뿐이었고,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싸늘한 시체와 영혼,
전쟁이 끝난 후 그 전쟁의 의미를 찾지 못한 생존자들의 허무함,
밤마다 촛불 밑에서 눈물을 흘리는 유족들.
그리고 국가들의 분열과 몰락이었다.
이후 엘프들은 전쟁에서 얻은 상처를 어루만지며 숲 속으로 사라졌고,
대륙은 서북반도로부터 퍼지기 시작한 암흑의 기운이 휘감았다.
“뭐, 이런 전설이었는데. 여기가 그 호수였을 줄은 몰랐네.”
레이노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현은 곰곰이 생가하기 시작했다.
‘지도로 본적이 있는 것 같아. 커다란 중앙호수와 그를 둘러싼 네 개의 호수.
이게 그중 가장 동쪽의 것이었지.’
“ugs, antmstodrkrdmf rmfjgrp go?"
“뭐?”
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레이노첼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레이노첼도 현의 대답을 못 알아들었는지, 깜짝 놀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마법스크롤의 유효시간이 지났구나!’
현은 품에서 마법스크롤을 하나 꺼내어 찢었다.
빛으로 빛나는 마법진이 현의 몸을 두르며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현이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레이노첼에게 물었다.
“아까 뭐라고 그랬어?”
“아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냐고.”
“이 페어리 드래곤 말이야.”
[“나?”]
“그래.”
현은 페어리 드래곤을 여기저기 유심히 뜯어보더니 심각한 얼굴로 질문했다.
“페어리 나이트는 어디 갔지?”
그 말에 레이노첼도 놀랐다.
“맞아! 전설에는 페어리 나이트와 페어리 드래곤이 같이 잠들었다고 했는데.”
[“그건 잘못된 기록이야.”]
페어리 드래곤이 더듬이를 살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는 전쟁을 끝으로 페어리는 멸족됐어.”]
“뭐?”
둘은 놀랐다. 현은 ‘멸족’이란 단어에 놀랐고,
레이노첼은 ‘전설과 다른 진실’에 놀랐다.
[“사실, 전쟁이 끝나고 각 호수로 이동하던 중, 데스나이트에게 공격을 받았어.”]
레이노첼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이름만으로도 공포를 심어주는 존재, 데스나이트.
페어리 퀸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페어리 나이트들이 그들에게 당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페어리 드래곤들은 어떻게 이곳에 무사히 잠들 수 있었을까?
[“페어리 나이트들은 싸우다가 죽고 말았어. 역시 데스나이트들은 이길 수가 없었지.
나이트가 죽고 혼자 남게 된 나도 싸우다가 죽을 뻔 했어.
하지만 죽을 위기에 처한 순간.”]
페어리 드래곤은 슬픈 눈을 하며 말을 이었고,
레이노첼은 침통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현은 페어리 드래곤의 얘기를 듣는 중에도 계속 생각에 잠겼다.
[“검은 눈과 검은 머리를 가진 기사들이 데스나이트를 물리쳐주더군.”]
현은 화들짝 놀라 생각에서 깨어났다.
‘검은 눈과 검은 머리를 가진 기사들?!’
현이 놀라는 와중에도 이야기는 계속해서 흘렀다.
[“그들은 내 의식이 희미해져가는 중에 말을 해줬는데, 악마들은 죽였다고,
다른 요정들은 모두 죽었지만, 나와 같은 모양의 도마뱀들은 근처 호수에 수장해줬다더군.
유품도 같이 말이야.”]
페어리 드래곤은 씁쓸한 과거가 떠오르는지 우물쭈물 거리다가 말을 끝맺었다.
현은 얘기가 끝나자마자 다급히 질문했다.
“이봐 몇 가지만 물어보자.”
[“그러도록 해.”]
“그 검은 눈과 검은 머리를 가진 기사들이 나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나?”
페어리 드래곤은 현의 다급한 물음에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 하더니,
확실하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음~. 아마도 비슷했던 것 같아.
특징이라면, 기사들은 하나같이 목을 완전히 둘러싸는 보호구를 하고 있었어.
그 점이 무척 특이하더군.”]
진실과의 거리는 크게 좁혀졌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목을 둘러싸는 갑옷의 형식은 고구려 쪽이 두드러졌지만,
다른 삼국(백제, 신라, 가야.)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현이 입고 있는 갑옷도 열제의 후손이기에 고구려의 것이었다.
“그것 말고는 없나?”
[“또 한 가지 있다면.... 아! 세발달린 까마귀가 새겨져 있는 투구를 쓰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너도 같은 투구를 쓰고 있군.”]
이걸로 확실해졌다. ‘삼족오’ 태양의 상징이자 고구려의 상징.
페어리 드래곤들을 구해준건 고구려의 기병임이 확실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이 이곳에?’
하지만 일단 그 궁금증은 제쳐두고 다른 질문을 해야 했다.
“그럼 너의 주인인 페어리 나이트는 죽었다. 그럼 넌 이제 어쩔 셈이지?”
페어리 드래곤은 페어리 나이트의 죽음이 현의 입에서 거론되자,
맑고 검은 눈에 다시 한번 슬픔이 더해졌다.
[“나는 후에 페어리 퀸를 부활시켜줄 마법사나 성기사가 나를 깨우게 된다면,
그를 따라다니며 도와주겠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모두들 페어리를 잊었어.
페어리족은 세상 속에서 잊혀 진거야. 먼지 쌓인 옛 역사서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우린 대륙에서 밀려나고 말았어.”]
실제로 그러했다. 대륙은 이제 인간들의 세상이었다.
몬스터들도 가끔 모험가들에 의해서 깊은 산속이나 숲, 동굴 등에서 발견 될 뿐.
약육강식의 세계인 대륙에서 패해,
외진 곳에서 그나마 개체 수 유지에 힘을 기울이며 살고 있었다.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의 법칙.
서로 다른 종족이 극과 극으로 진화되어 마침내 충돌하게 되면,
그곳의 자연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여 진화한 종족이 강자의 면모를 갖추어 승자가 된다.’
현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여기서도 인간은 결국 승리자이자 파괴자인 것이었다.
“결국은 인간이 승리한거군.”
현은 작게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페어리 드래곤은 듣지 못하고 얘기를 계속했다.
[“우릴 잊었으니 되살리려하는 마법사나 성기사도 없겠지.
그래서 그때 날 도와준 이들의 후예를 찾아가서 부탁해 볼 생각이야.
나중에 꼭 보답하겠다고.”]
“혼자서? 어디 있는 줄 알고?”
레이노첼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사이 현의 얼굴엔 음흉한 미소가 짙어졌다.
[“글쎄?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야 할 일이지.”]
“그럼 그때까지 우리와 함께 다니는 건 어때?”
현이 갑작스레 제안했다.
페어리 드래곤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나쁘지는 않은 듯,
싫은 듯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너를 깨워준 사람.. 아니 다크엘프도 여기 있고 말이야.
여행을 하다보면 뭐가 얻게 되는 게 있겠지. 어때?”
호네야크 왕국의 서쪽국경 노르펠드 평원.
그곳엔 메마른 땅위에 푸석거리는 잡초와 벌레들이 미약하게나마 남은,
자신의 생명을 뜨거운 햇빛에게서 지켜내려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긴장된 상황을 가까스로 견뎌내며,
양쪽으로 버티고 선 두 무리의 인간들이 있었다.
그중 한쪽에서 흰 백마를 타고 풀 플레이트메일을 입은 한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앞으로나서 자신의 앞에서 살기등등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노켈 왕국 군사들의 대형을 쭉 둘러보았다.
확실히 자신을 따르는 군사들보다 같으면 같았지, 결코 적지 않은 수의 군사들이었다.
그는 이번엔 뒤로 돌아 긴장된 시선으로 적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잔뜩 굳은 얼굴로 떨리는 손으로 병장기를 움켜잡고 있는걸 보니,
상당히 긴장된 듯 했다.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자신의 기사들과 기마대,
그리고 보병들을 하나하나 눈을 마주쳐가며 둘러보았다.
분명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믿는다.’ ‘승리를 확신한다.’
그들은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그런 부하들이 자랑스러웠다.
자신을 믿고 계속 따라와 준 부하들이 고맙고도 자랑스러웠다.
이제 그 기대에 보답할 때였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힘껏 외쳤다
“위대한 호네야크 왕국의 군사들이여! 준비가 되었는가!!”
“펜챠! 호네야크!!!”
서대륙 천하의 맹장 펜챠 오리헨트(Pencha Orrihent).
그가 소드를 하늘높이 치켜들며 외치자, 수만의 군졸들도 목이 터져라 외쳤다.
“영광의 승리가 눈앞에 있다!!!”
펜챠가 다시 한번 목청껏 외쳤다.
그리고 그의 부하들 역시 함성을 지르며 외쳤다.
“영광의 승리를 향해!!!”
그가 말을 몰아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하늘높이 쳐들고 있던 소드를 천천히 내리며 넓은 벌판을 사이에 두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노켈의 군사들을 향해 겨누었다.
그는 낮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천천히 목소리를 높여갔다.
“저 겁 없고 정의를 모르는.”
[따각 따각.]
그의 말이 경쾌한 발굽소리를 내며 앞으로 전진 하자,
[쿠구구구-.]
그를 따르는 부하들의 발소리.
“그저 나약하고 교만하기 짝이 없는!”
[따가닥 따가닥.]
그의 말이 점점 속력을 내기시작했다.
[쿠쿠쿠쿠쿠쿠쿠쿠-.]
이제 발소리는 큰 소리를 넘어서 지축을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으로 변해갔다.
반대편 노켈의 군사들은 그들의 전진을 지켜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점점 커져 지축을 뒤흔드는 발소리에 긴장은 갈수록 더해져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건방진 노켈의 군사들에게 악마의 비웃음과 처절한 패배를!!”
“와아아아!!”
“호네야크에겐 천사의 미소와 영광의 승리를!!”
“이랴!!”
“우와아아아아!!”
[쿠과과과과과!!]
펜챠가 앞장서 말을 달리자, 그의 기사단과 기마대가 뒤따라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이어 각종 병장기를 든 보병들이 힘차게 함성을 지르며 따라 뛰었다.
사방에선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울렸고, 함성소리와 땅을 울리는 진동은,
서로를 잡아먹으려는지 점점 높아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