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산천
십일월 첫째 토요일이다. 이른 아침 마산 합성동으로 나가 의령행 시외버스를 탔다. 차창 밖 시야에 들어온 산들은 단풍이 물들었다. 함안 가야를 지날 때 추수를 끝낸 들판은 비닐하우스를 비롯한 뒷그루 작물을 키웠다. 군북에서 월촌을 지나 정암다리를 건너니 의령 관문이었다. 구릉 들판을 걸어 남천을 건너니 덕곡서원이 나왔다. 큰형님이 고향을 지키고 계시는 마을 들머리였다.
어릴 적 읍내까지 학교에 다니면서 자갈길을 한 시간 걸었다. 세월이 흘러 보도가 확보된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덕실은 상리와 중리와 하리로 나뉜다. 고향집은 문을 닫은 초등학교가 위치한 중리다. 폐교된 터는 청소년수련원으로 바뀌었으나 학생 수 감소로 그 마저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모양이다. 개울을 따라 마을 어귀로 드니 벼를 거둔 논에 심은 마늘이 싹이 돋아 파릇했다.
고향은 산골이라 일찍 찾아온 가을이 더 깊어가는 듯했다. 큰형님 댁을 찾기로 한 것은 일손을 거들 계획인데 일거리가 없었다. 벼는 추수를 끝냈고 마늘까지 심어 싹이 가뭄에도 싹이 돋아 있었다. 대봉 감을 따는 일도 끝나 가락동 농산물거래소로 거의 올려 보냈다. 일철 주말이면 진주와 마산에 사는 조카가 아버지를 찾아 일손을 도와주어 큰형님은 농사를 수월하게 지었다.
칠순 중반 큰형님 내외는 가을걷이를 끝내고 집안에 머물렀다. 고향에 들리니 진주 근교 반성에 사는 공직에서 은퇴한 매제가 처갓집을 찾아왔다. 매제는 차를 운전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왔다. 나와 같이 들게 될 반주가 염려되어 차를 두고 온 듯했다. 농사일은 거들 거리가 없어 큰형님 내외와 매제와 함께 벽화산 산행에 나섰다. 고향 집에서 고문당을 거쳐 단장먼당으로 올랐다.
산마루에 이르니 고향 산천이 한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땔나무를 하거나 소를 먹인다고 누볐던 산자락이었다. 고문당 고개 너머 밭뙈기는 고구마를 심어 지게에 짊어지고 집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 시절은 쌀이 귀해 겨울 한 철은 고구마가 주식이다시피 했다. 농촌이 고령화되다 보니 산골의 논밭들은 묵혀져 갔다. 겹겹이 산 너머는 아침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아 운치를 더했다.
벽화산 상봉으로 가는 길목 증조부 내외분 산소에서 절을 올리며 자손이 다녀감을 아뢰었다. 산비탈을 올라 상봉에 이르니 산불감시초소는 근무자가 없었다. 태양광으로 발전시킨 감시 카레라는 작동되는 듯했다. 상봉에서 건너편 뱍화산 정상으로 향했다. 풀을 잘라 정비가 잘 된 헬기장에서 배낭에 넣어간 간식을 꺼내 먹었다. 단감과 밀감으로 나와 매제는 맑은 술도 몇 잔 비웠다.
잘록한 산허리 새미고로 가니 행정 구역이 다른 화정면 석천마을이 보였다. 산비탈을 올라 산등선을 따라 가니 의령교육청 산악회에서 세운 정상 표석이 나왔다. 해발 고도가 522미터였다. 높은 산마루에는 합천 이 씨와 칠원 제 씨 무덤이 있었다. 비탈을 내려선 고개에는 수암마을로 가는 등산로가 뚜렷했다. 외지에서 벽화산성을 찾거나 벽화산으로 등산하는 이들이 다닌 듯했다.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벽화산성은 가야시대 축조된 석성으로 추정된다. 산봉우리 주변을 들쭉날쭉한 돌을 덧대어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왜구를 물리쳤다는 애기도 전한다. 성터 여기저기 기왓장 조각이 보이고 동문에는 샘터도 있다. 성안은 일제 강점기 공동묘지로 쓰여 지금도 여러 무덤들이 빼곡하다. 북동쪽 산성 일부는 근년에 복원공사를 하기고 했다.
척곡마을로 내려와 고향집에 닿으니 점심때가 늦었다. 매제가 마련해온 오리고기를 구워 반주를 곁들였다. 매제와 함께 큰형님 댁에서 하룻밤 같이 지내기로 했던 당초 계획은 차질이 생겼다. 매제의 서울 친구들이 진주로 내려와 얼굴을 보자는 전화가 빗발쳤다. 매제를 보내고 나니 고향집에 머물 명분이 약해졌다. 이튿날 일요일을 온전히 보내려고 서둘러 창원으로 돌아왔다. 20.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