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라틴어:Sanctus Ignatius de Loyola)
1556년 7월 31일) 또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스페인어:Ignacio de Loyola)는 스페인 바스크 귀족 가문의 기사이자 (1537년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의 은수자이자 사제, 신학자이다. 또한 그는 예수회의 창립자이자 초대 총장이기도 하다.
이냐시오는 가톨릭 개혁 시기에 특출난 영적 지도자로 급부상하였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그의 충성은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교계제도에 대한 절대적인 순명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3]
1521년 팜플로나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그는 회복을 위해 병상에 누워서 치료하는 동안 여러 가지 교회서적을 탐독하면서 깊은 회심을 하게 되었다. 특히 작센의 루돌프가 쓴 《그리스도의 생애》를 읽고 그는 지금까지의 군인 생활을 청산하고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위대한 영적 지도자의 본보기를 따라 여생을 하느님을 위한 일에 헌신하기로 다짐하였다.
1522년 3월 이냐시오가 몸을 추스르고나서 몬세라트의 성모 성당을 방문하였을 때,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환시를 체험하였다.
이후 그는 고행의 복장을 하고 만레사에 있는 깊은 동굴 안에 들어가 머물면서 기도와 극기로 1년간의 세월을 보냈다.
또한 그는 고행과 문전걸식을 하며 가시 돋친 허리띠를 두르고 연일 단식을 하였다. 이와 같은 명상 생활을 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영신수련》이다. 1523년 9월, 이냐시오는 성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그곳에 머무르고자 하였으나, 당시 예루살렘 성소들을 관리하였던 프란치스코회원들이 받아들여주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유럽으로 돌아왔다.
1524년부터 1537년까지 이냐시오는 스페인과 파리에서 신학과 라틴어, 인문학 등의 공부에 전념하였다. 이냐시오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청빈과 순결, 순명을 맹세하며 결집하였다.
1539년 이들은 예수회를 조직하였으며,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1548년에는 이냐시오가 구성한 영신수련이 인가를 받았다. 이냐시오는 1556년 7월에 선종하였다. 1609년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1922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영신수련과 피정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지정하였다. 이냐시오는 또한 군인들과 예수회원, 바스크 지방, 기푸스코아 주, 비스카야 주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몬세라트·만레사
스페인 동부 작은 도시 만레사의 한 바위산 동굴. 그 위에 지은 성당 밖을 나서자 맞은편으로 평지돌출로 우뚝 솟은 몬세라트 산이 보인다. 스페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동굴의 하나이지만 이곳은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를 창립한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 영성(靈性)이 탄생한 곳이다.
1522년 3월 25일 이 동굴에 거적을 걸친 걸인 행색의 청년 이냐시오가 다리를 절며 들어섰다. 스페인 북서부 로욜라의 영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 영웅을 꿈꿨다. 그러나 1521년 팜플로나에서 벌어진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두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수차례 뼈를 깎는 수술을 받았지만 완치되지 않았다. 이때 입은 부상은 '귀부인의 기사'를 꿈꾸던 이냐시오를 '성모의 기사'로 변모시켰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인들의 삶이 영웅담보다 더 가슴 뛰게 하는 것을 알고 회심(回心)한 후 이냐시오는 집을 떠나 몬세라트에 도착해 자신이 기사(騎士) 시절 보물보다 아꼈던 검(劍)을 이곳 성모상에 바치고 대신 순례 지팡이를 짚었다.
몬세라트 산속의 수도원(위). 예수회를 설립한 이냐시오 성인(아래 가운데)은 이 수도원을 찾아와 성모상 앞에 기사의 옷과 칼을 바치고 수도자로 거듭나게 된다. 아래 오른쪽 사진은 올리브나무를 깎아 만든 탁발통. /주교회의 제공·김한수 기자
지난 11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순례 단이 찾은 이 동굴에선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500년 전 이냐시오는 이곳에서 1년 가까이 손발톱과 머리카락을 깎지 않고 단식하며 기도했다. 동굴 성당 앞 진열장에 전시된 탁발통은 이냐시오가 500년 전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 탁발통을 들고 마을에 내려가 구걸하다가 동굴로 돌아올 때마다 몬세라트 산을 바라보며 회심의 순간을 잊지 않고 되새겼을 것이다. 이냐시오는 왜 골짜기, 봉우리마다 은수자(隱修者)들이 수도하고 베네딕도 수도원이 있는 몬세라트 산을 떠나 이 동굴로 왔을까.
동굴에서 바라본 풍경은 그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동굴 바로 오른편으로는 약 500m 거리에 대성당, 그 아래로는 마을이 보인다. 동굴에서 속세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다. 이냐시오는 세상을 등지고 혼자 수행하거나 수도원 울타리 안에 갇히는 영성을 바라지 않았다. 훗날 '영성수련'(1548)이란 제목의 책으로 정리된 이냐시오의 영성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 '활동 중에 관상(觀想)하기', 그리고 가난과 겸손 등이 대표적 특징. 그것은 속세로 뛰어드는 현실적·적응적 영성이었다. 르네상스와 과학 발전에 대한 대응도 능동적이었다. 이를 위해 예수회는 그때까지 수도회의 격식도 걷어버렸다. 수도회를 특징짓는 복장과 수도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시간도 없앴다. 격식 차릴 시간에 한 걸음 더 뛰자는 것. 그래서 예수회원들은 "우리는 항상 한 발을 들고 산다"고 한다. 일반적인 수도회의 '청빈 정결 순명'이라는 3대 서원(誓願)에 더해 '교황에 대한 순명'을 서원하는 예수회는 언제든 교황의 명이 떨어지면 달려나갈 준비가 돼 있다는 것. 중세 가톨릭 수도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화로 무장해 가톨릭 청년들의 가슴을 뛰게 한 이냐시오 영성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던 가톨릭 입장에서 프로테스탄트 파도를 막는 방파제였고,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선교엔 개척자였다.
10일 오전 방문한 스페인 북부 로욜라의 이냐시오 생가(生家) 옆에 세워진 예수회 수도원 식당 입구벽엔 중국 관복(官服)을 입은 마테오 리치를 비롯해 터번을 두르는 등 각 지역 복색을 한 초기 선교사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모두 '현지의 풍습과 전통을 존중하라'는 예수회의 선교방식을 생생히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스페인의 한 작은 동굴에서 작은 샘물처럼 시작된 이냐시오의 영성은 500년 동안 전 세계로 흘러 지난 2013년 마침내 첫 예수회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의 전통답게 세상의 눈높이에 맞춰 바티칸을 개혁하며 정체상태였던 가톨릭교회에 쇄신의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편집 : 원 요아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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