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비 열흘 만에 모든 길 끊어지고
성안에도 벽항(僻巷)에도 밥 짓는 연기 사라졌네
태학(太學)에서 글 읽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문안에 들어서자 떠들썩한 소리 들려
들어보니 며칠 전에 끼니거리 떨어지고
호박으로 죽을 쑤어 근근이 때웠는데
어린 호박 다 따 먹고 (중략)
항아리같이 살이 찐 옆집 마당 호박 보고
계집종이 남몰래 도둑질하여다가
충성을 바쳤으나 도리어 야단맞네 (중략)
작은 청렴 달갑지 않다
이 몸도 때 만나면 출세 길 열리리라
안 되면 산에 가서 금광이나 파보지
만 권 책 읽었다고 아내 어찌 배부르랴 (후략)
-『조선일보/최영미의 어떤 시』2023.07.24. -
정약용이 22세에 지은 한시인데 소설 장면처럼 사실적이고 표현이 치밀하다. 장마를 소재로 다산은 시를 여러 편 지었는데 내용 묘사가 풍부해 당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근대 이전의 문인 혹은 한학자 중에 다산만큼 치열하게 당대의 삶을 글로 남긴 이는 없었다.
‘벽항(僻巷)’은 외따로 떨어진 동네, ‘태학(太學)’은 성균관을 말한다. 성균관에서 글을 배우는 학생인 다산은 처자식에 계집종까지 딸렸으니 생활이 빠듯했을 게다. 그는 안빈낙도를 찬미하지 않았다. “때 만나면 출세 길 열리리라”(솔직한 당신!) “안 되면 산에 가서 금광이나 파보지”(이런 실사구시 정신이 나는 좋다) 사대부 지식인인 척하지도 않는!
〈최영미/시인·이미출판 대표〉
호박은 조상들의 끼니를 해결해주는 채소였다. 호박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정확하지 않은데, 중국이나 일본을 거쳐 1600년대 초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 시대에 호박은 ‘승소’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승려가 먹는 채소라 해서 ‘승소(僧蔬)’다.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다가 점차 유행하며 양반들도 먹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말기가 되어서야 호박은 서민의 부식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알려진다. 당시 호박은 구황작물이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이 지은 『남과탄(南瓜歎, 1784년)』’이라는 시에 구황작물로써 호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밭에서 기르던 호박으로 끼니를 때운 일, 그마저도 다 먹고 없자 옆집 호박을 훔쳐 온 여종을 나무라는 아내의 이야기가 담긴 시다. 여기서 ‘남과’는 호박을 뜻하고 ‘탄’은 ‘탄식할 탄(歎)이’다. ‘호박 탄식’, 또는 ‘호박 넋두리’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