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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伴鷗亭)에서
靑酸臨黃河(청산임황하)-푸른산은 황하까지 다달았는데
下有長安道(하유장안도)-산밑에 장안까지 가는 길이 잇구나
世上名利人(세상명리인)-세상에서 명리만 쫓는 사람들은
相逢不知老(상봉부지노)-서로가 만나도 어른됨을 모르리리
황희(黃喜)
황희(黃喜)정승의 반구정(伴鷗亭)을 찾아서
역대 명사들의 호(號)중에서 가장 멋있는 호(號)를 꼽으라면 황희(黃喜)정승의 호인 방촌(厖村)이다.
방촌(厖村)의 뜻은 “삽살개가 짓는 마을” 이라는 뜻이다.
얼마나 서민적이고 목가적이고 낭만적인가
1392년 고려가 멸망한다.
황해도 개풍군 골짜기에는 고려에 충절을 바친 의리있는 신하들이 고려의 복원을 꿈꾸며 모여 있었다.
그곳에는 젊은 20대의 황희도 있었다.
사람들은 황희를 고려의 국권회복에 참여하기를 설득했다.
골짜기는 혁명군에 의하여 화재가 발생하여 아수라장이 된다.
화재가 잡힌 후 황희는 그곳에 없었다.
황희는 멸망해가는 고려를 버리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선택한 것이었다.
파주시 문산면에는 갈매기가 나는 반구정(伴鷗亭)이 있다.
황희는 역사 속에서 마음씨 좋은 “허허”정승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정의롭고 강직하며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으므로 많은 시간을 귀양살이에서 보냈다.
특히 황희는 태종의 뜻에 맞지 않은 말만했다.
고려의 구신(舊臣)이며 정종이 태종에게 선위하자 그 교서를 가져가서 태종을 옹립한데 큰힘이된 박석명(朴錫命)이 황희를 관직에 추천한 것은 유명하다.
황희는 조선(朝鮮) 시대(時代) 초엽(初葉)의 대언사(代言司)의 으뜸 벼슬인 지신사(知申事) 직책을 받았다.
그것은 항상 권력을 쥐려는 처남인 민무구 형제를 황희가 처단한 공로였기에 태종의 신뢰가 두터웠다.
태종은 황희를 하루를 못 보아도 답답하다 할 정도로 태종을 사랑했다.
태종은 황희를 마치 자식같이 사랑했다(조선왕조실록)
그러나 황희는 태종의 눈에 벗어난 짓을 하고 있었다.
황희가 장자인 양녕대군을 두둔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왕위계승은 장자원칙이 있었다.
황희는 그 원칙을 고수한 것이다.
결국 황희는 양녕대군을 두둔한 죄로 귀양을 간다.
자신을 아들처럼 사랑하는 태종에게 양녕을 택하면서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당시 이조판서로 재직하던 황희는 대부분의 신료가 세자인 양녕대군의 폐위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폐장입유(廢長立幼-장자를 폐하고 아랫사람을 세움)는 재앙을 부르게 되는 근본 이옵고, 또 세자가 비록 미쳤다고 하오나, 그 성품은 가히 성군(聖君)이 될 것이오니, 치유에 주력하시기 바라옵니다.”라며 국왕의 판단에 재고를 요청하였다.
이로 인하여 황희는 귀양을 가게 되는데 처음 황희의 유배지는 서울 근교에 있었으나 주위신하들의 서울에 가까운 유배지는 안 된다는 탄원으로 전북 남원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남원의 명소 광한루(廣寒樓)
황희의 두 번째 유배지는 광한루였다.
그러나 지금의 광한루는 “황희”의 이름보다 춘향으로 더 유명하다.
그러나 광한루는 1419년 황희가 유배지에서 세운건물이다.
황희는 남원의 맑은 하천인 요천(寥川) 강변에 “일재(逸齋)”라는 서재(書齋)를 짓고 살았는데 그 후 일재(逸齋)의 터에 조그마한 누각를 세워 광통루(廣通樓)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곳에서 독서로 소일하였다.
그 후 정인지가 광통루(廣通樓)를 광한루라고 이름을 고치고 송강 정철이 연못 만들었으며 남원부사 장의국이 재임중 광한루를 개축하고 오작교(烏鵲橋)를 축조했다.
황수신(黃守身)의 광한루일기에 있다.
황희는 유배지에서 몸가짐을 근신하며 은둔(隱遁) 생활을 하였다.
유배지의 생활은 형벌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황희는 유배지의 철저한 윈칙을 지켰다.
황희의 일화 중에 술 취한 아들에게 절을 시킨 것은 유명하다.
술에 취해도 예절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희는 아들을 사랑했지만 교육은 엄격했다.
조선조에서 재상까지 청백리로 거론되는 인물로는 약 18명이 거론된다. 그 가운데 단연 첫 번째로 꼽히는 이가 황희이다. 황희의 맏아들은 일찍부터 출세하여 벼슬이 참의에 올라 돈을 모아 살던 집을 새로 크게 짓고 낙성식을 하였다. 그 자리에는 고관들과 권세 있는 친구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집들이 잔치가 시작될 때 아버지 황희가 돌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선비가 청렴하여 비새는 집안에서 정사를 살펴도 나라 일이 잘 될지 의문인데, 집을 이렇게 호화롭게 하고는 뇌물을 받지 않았다 할 수 있느냐. 나는 이런 궁궐 같은 집에는 조금도 앉아 있기가 송구스럽구나.” 그리고는 음식도 들지 않고 즉시 물러가니, 아들은 낯빛이 변하였고 자리에 참석하였던 손님들 역시 무안해졌다.
황희 비가 새는 초가에서 살면서, 있는 것이라고는 누덕누덕 기운 이불과 서책이 전부였다 이러니, 아들의 호사가 불편했을 것이다.
과연 최장수 재상을 지냈으면서 이처럼 청빈하였으니 청백리가 됨은 당연할 것이다.
요즘 전 현직 고위관리들이 그림이다 뇌물로 검찰청 출입을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광한루에서 2km떨어진 곳에 풍계서원(楓溪書院) 이 있다.
이것은 황희와 황희의 매형 오상덕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풍계서원은 정조 12년(1788)에 지었으나,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어 황희의 영정만을 모셔오다가 1909년 복원하였다.
황희를 기리는 서원은 전국각지에 있다.
남원에는 황희의 조부모 묘소가 있다.
그러나 황희는 개성에서 태어났다.
황희가 태어나기 전에 조상들은 남원을 떠났다.
황희의 할아버지가 남원을 떠나야 큰 인물이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장수(長水) 황씨(黃氏)의 남원 조상 묘비는 황희가 세웠다고 한다.
남원과 인연이 깊은 황의는 남원에 유배후 4년만에 한양으로 귀향한다.
세종인 충녕을 반대 했던 황희는 세종대왕에게는 필요한 인재였다.
국정의 안정을 위해 황희가 필요했다.
황희가 장자인 양녕을 지지한 것은 장자 왕위계승 원칙을 위한 것임을 세종대 잘 알고 있었다.
세종에게 인정받은 황희는 소신을 다하여 세종을 보필하였다.
세종은 조정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재상들의 재산이 많고 궁궐에 근무하는 인원이 70명은 너무 많다고 하였다.
인원을 줄여서 불필요한 재정지출을 막았다.
황희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많았지만 세종은 황희의 단호하고 결단 있는 정책을 지지했다.
황희는 강한 리드 십으로 국경의 변방 방위를 철저히 하면서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김종서도 황희를 두려워했다.
한번은 술에 취한 김종서의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주기도 했다.
이때 김종서가 말하기를 “전쟁에서도 낯빛이 변하지 안했는데 황희 앞에서는 머리가 숙여진다. 고 했다.
황희는 모친상 부친상을 당해도 3년상을 치루지 못했다.
황희가 없으면 국정 수행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왕이 3년상을 허용하지 않했다.
세종은 황희를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으로 파격적으로 승진시켰다.
세종은 세종8년까지는 무능한 임금으로 평가 받았다.
황희와 맹사성을 기용하면서 세종의 이름이 빛나기 시작했다.
세종은 문화면 힘써 훈민정음이나 아악을 정비하고 혼천의 우량계인 측우기를 제작하였다.
전부 황희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황희는 태평세월 속에서도 정치를 엄격히 했다.
87세에 반구정으로 돌아와서 3년을 지낸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87세까지 직책을 맡았다.
영의정만 18년을 지냈다.
반구정에서 임진강을 내려다보면서 쉴 수 있는 여생을 감사히 여겼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지은 반구정기에 갈매기와 벗하며 해오라기 같이 지냈다.
조정에 인재가 아무리 많아도 방촌은 그를 찾는 사람에게 깨달음의 대상이 된다.
반구정 아래는 황희의 동상과 유적비가 있다.
아무욕심없이 오직 나라를 위해 세종대왕의 업적을 위해 산 사람이다.
반구정은 갈매기와 여생을 보내려고 만든 정자라는 뜻이다. 조선조 5백년을 통틀어 으뜸가는 명재상이라 일컬음을 받는 황희는 재상으로 무려 20여 년 이상을 있으면서, 태종으로부터 세종∙ 문종에 이르는 3대를 섬겼다. 이처럼 당대에 부러울 것이 없던 황희가 굳이 왜 말년에 미물인 갈매기와 여생을 보내려고 했을까?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권력의 무상함을 느낀 것일까?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은 이른바 ‘자분(自分)’을 생활의 중요 덕목으로 생각하였다.
자기 분수에 맞게 생활한다는 것이다.
이글을 쓰면서 방촌(厖村) 황희(黃喜) 청렴(淸廉)한 공직자(公職者)가 눈에 쉽게 띄지 않은 것을 탄식(歎息) 한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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