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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새벽에(2)
마 28:1-10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 설 교 >
빈 무덤의 진실
마 28:1-6 / 홍문수목사
만물이 소생하는 새 봄, 부활절 예배에 참례하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때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예수가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야? 뭐, 자기가 구세주라고? 그렇게 맥없이 죽으면서 큰소리를 치다니!” 제자들은 이미 도망가 버렸고, 소수의 사람만이 슬픔에 잠긴 채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 후 사흘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몇몇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고 새벽 미명에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연약한 여인들인지라 무덤의 큰 돌문을 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파수꾼들에게 사정을 하면 될까 하는 기대를 갖고 갔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이미 돌문이 치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천사가 돌을 치우고 그 위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번개같이 빛나서 파수꾼들(4절. 수직하던 자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깜짝 놀란 여인들에게 천사가 뭐라고 말합니까? 본문 5절~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이제 그것은 ‘빈 무덤’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사역하던 미국인 스탠리 존스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한번은 길거리에서 사람들 앞에 선 채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있던 모슬렘 한 사람이 퉁명스럽게 말을 겁니다. “여보시오! 우리 마호메트는 실제 인물이요. 그의 무덤이 메카에 있단 말이요. 그런데 당신네 예수의 무덤은 없지 않소?” 그러자 선교사가 기회다 싶어 이렇게 대꾸합니다. “아, 그래요? 사실은 예수님의 무덤도 있습니다. 그런데 텅 비어 있죠. 왜냐하면 죽었다가 부활하셨거든요.” 이 말에 그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가버렸습니다.
지금 성지 예루살렘에 가 보면 골고다 언덕과 무덤을 기념하여 세운 성묘교회(콘스탄티누스 로마황제가 어머니 헬레나의 요청으로 AD 336년 건축함)가 있습니다. 그 교회당 안에 예수님의 기념 묘소가 있는데, 거기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습니다! 텅 빈 무덤입니다. 그래서 흔히 기독교를 가리켜 ‘빈 무덤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빈 무덤’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빈 무덤은 다음 세 가지 사실에 대한 ‘물증’입니다.
[1] 빈 무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사실에 대한 물증입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보면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구세주 되심을 부정하려는 많은 도전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악한 원수 마귀의 계략입니다. 마귀는 인간이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인간의 구원을 훼방하려고 합니다. 아주 교묘하게. 그래서 때로는 아주 유식한 사람들을 동원해서 그럴 듯하게 예수님의 부인하게 만듭니다.
요즘 신문에 보도되는 <유다복음> 같은 것도 그런 유입니다. 대단한 문서가 발견된 것처럼 야단들입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배반해고 그 결과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유다야말로 진짜 훌륭한 사도인 셈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깁니다. 한 마디로 이것은 고대 이단의 문서입니다. 그런 것을 발견해 놓고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흔들 수 있을 것인 양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단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이비(似而非)예요. 그럴 듯한데 완전히 틀린 겁니다. 그리고 이단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단은 생겼다가 교주가 죽으면 슬그머니 사라져버립니다. 반면 기독교 복음은 2천년의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오는 참 진리입니다. <유다복음>은 AD 1세기~2세기에 걸쳐 유행하던 영지주의(Gnosticism) 이단의 아류에 불과합니다. 나타났다 사라진 이단입니다.
또 수년 전 소설책으로 발간되었다가 최근 영화화되어 곧 개봉되는 <다빈치 코드>(댄 브라운의 추리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생긴 딸(사라)과 그 후손들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중세교회가 그 비밀을 아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라 처형하고 숨겼다는 겁니다. 그 비밀을 지켜온 기사단 중에 다빈치가 있었는데, 그의 그림에 비밀을 담은 암호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다빈치 코드’라는 것이죠. 문자 그대로 ‘황당무계한 추리’일 뿐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들은 그냥 무시하면 됩니다. 그러다가 마는 겁니다. 걸려서 실족하는 사람만 손해입니다. 성경공부를 조금만 해도 충분히 분별이 되는데,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데, 그것도 모르고 휩쓸리면 정말 딱한 일입니다. 이런 이단들이나 엉뚱한 소리들이 때때로 등장하는 것은 마귀의 도전인데, 그러면 왜 하나님이 막지 않고 허용하실까요? 그 이유는 ‘신앙의 진정성’을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오히려 이런 기회에 참 그리스도인들을 골라내고, 그 신앙을 연단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이단 사설 중에서 특히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게 많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가 무너지니까, 어떻게 해서든 부활을 거짓으로 주장하려고 기를 씁니다. 그래서 도난설, 환각설, 조작설, 가사설, 무덤 오인설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빈 무덤이 있고,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 도망갔던 제자들이 다시 모여 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가 2천년 동안 부흥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산 사람을 위해서도 목숨 바치지 못하고 도망갔던 그들이 시체를 위해 충성하고 순교했다면 ‘희대의 코미디’이죠. 도무지 말이 되질 않습니다.
어쨌든 분명하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 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만천하에 증명하셨습니다. 롬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에 하신 말씀대로 그 죽음은 인간의 죄를 대신한 대속의 죽음입니다. 인간이 모두 죄인이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데, 예수 십자가 대속을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습니까? 부활이 있다면 이 모든 게 사실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희대의 사기꾼이 되는 겁니다. 그럴 수 없죠.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부활절 아침에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구세주임을 다시 한번 고백하시고 참 그리스도인으로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2] 빈 무덤은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하시는 사실에 대한 물증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가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승천이죠. 그분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령을 통해 오늘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그리고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요14:18~20을 보면 예수님이 미리 예언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마귀 권세, 사망 권세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님! 그분이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면 세상에 무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가 종교개혁을 추진하면서 많은 박해와 사련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사흘 동안 내내 심한 스트레스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 캐티가 상복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루터가 묻습니다. “아니, 누가 죽었소?” 아내는 퉁명스럽게 외마디로 대답합니다. “하나님이요!” 루터는 화가 나서 말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불경스런 말이요? 하나님이 죽었다니 ... ?”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가 말합니다. “당신의 지금 모습을 보니까 꼭 하나님이 죽은 것 같구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낙심한 채 며칠을 꼬박 틀어박혀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루터는 통회 자복합니다. 그리고 용기를 얻어 종교개혁을 완수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를 위해 죽었다가 부활 승리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하고 강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마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러분! 정말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아무쪼록 오늘 부활절 아침에 그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시련도, 문제도 다 극복하고 당당히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빈 무덤은 그리스도인들도 장차 부활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물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성도의 부활에 대한 물증이요 샘플입니다. 고전15:20을 보십시오. “ ...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라는 것은 샘플 혹은 모델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모델 하우스에 가 보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아직 집이 지어지지 않았지만 지어질 집의 모습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우리 성도들이 장차 예수님 재림 하실 때 부활할 모습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 그 육체는 흙으로 돌아갑니다.(전12:7 참조)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흙으로 돌아갔던 육체가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부활의 몸으로 변화됩니다. 바로 그때 성도들의 무덤도 2천년 전 예수님의 무덤이 그랬듯이 다 열리고 빈 무덤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부활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 몸은 현재의 것과 전혀 달라질 겁니다. 질적으로 달라집니다. 눅24:36~43 보면 예수님의 부활체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제자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갑자기 한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유령인 줄 알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못 자국이 난 손을 보여주면서, 구운 생선 한 조각을 잡수어 보이심으로 유령이 아닌 부활체임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부활체가 얼마나 자유하고 신기한 몸인지 조금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 소설 중에 <벽을 뚫고 다니는 사람>(Passe-murailles)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쟝 뤽 꼬르네트(Jean-Luc Cornette)와 스테판느 우와리(Stephane Oiry) 두 사람의 공저인데, 그 주인공이 투명인간처럼 벽을 뚫고 다닙니다. 물론 이것은 공상소설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정말 그런 식이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신기한 몸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부활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썩지 않고 하늘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 이해가 되시지 않겠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세요. 계란이 껍데기 속에 갇혀 있을 때 장차 닭이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잘 몰라도 홀연히 그 놀라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부활 장에서 부활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전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우리는 부활체가 어떤 것일지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몸이 부활 후에는 영원하고 영광스런 것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아름다운 것과 건강한 것을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간은 누구나 쇠하고, 병들고, 추해지고, 장애가 생기고, 죽고, 썩고 ... 그렇게 됩니다. 이것이 죄인 된 모든 인간들의 비극적인 운명입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부활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활만이 인간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부활은 죽음과 질병도 고치는 ‘완전한 치유’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 자신의 부활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예수님과 늘 동행하면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이 좋은 예수님, 우리 위해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 가족과 이웃에게 꼭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말씀대로 살아나심
마 28:1-15 / 박지온목사
1부 예배에 박 목사님의 메시지를 듣는 동안에 아들이야기를 하더라 구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용돈을 주면 십일조 떼고, 선교헌금으로 십이조를 떼고, 또 십삼조는 건축헌금 떼고, 그러니까 불평이 너무 많은 겁니다. 천 원 주면 300원을 빼야 하니까! '다는 아이들은 천 원 다 쓰는데 나는 왜 300원을 떼느냐고...' 그런 불평 속에서 정착하기가 상당히 힘들고 어렵더라! 어느 정도 이것이 이제 뭔가 믿음으로 받게 되니까, 이번 설에 용돈이 갑자기 많이 생겼습니다. 몇 십 만원이 생기니까 하는 말이, '십일조, 십이조, 십삼조를 하나님 앞에 드렸더니만 하나님이 내게 복을 쏟아부어 주더라고...' 그게 이제 응답이 보인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린아이 하나의 고백이지만, '내가 어떤 자세로 신앙 생활하느냐?' 이게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나와도, 복을 쏟아 부어줬는데도 모르고 앉아있는 겁니다. 왜? 신앙에 자세가 안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감사가 나올 수 없는 거죠. 전에는 뭔가 용돈을 받았지만, 그래도 그게 '하나님이 복을 쏟아 부어주더라!' 이런 고백이 안 나오거든요. 그러나 내가 어떤 신앙의 자세로 섰느냐? 그걸 가지고 우리가 흔히 그릇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 성도들이 속고 있는 것이 뭐냐하면, 조금만 그릇준비가 되면 늘 입이 벌어져 있고 감격 감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지만, 그게 지금 안보이거든요. 안보이고 또 안되게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말씀에서 뭘 제목으로 선택했느냐 하면, 6절 말씀을 우리가 다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래서 제목을 "말씀대로 살아나심"이라고 그렇게 제목을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도 말씀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는 역사도 말씀대로, 여러분과 저의 모든 사실과 사건도 뭐대로? 말씀대로! 이런 말씀대로의 신앙의 배경이 확인되면 모든 사건과 일들이, 시각이 달라지는 겁니다. 뭐 내게 어렵다! 힘들다! 이 모든 것들이 뭐라 구요? 말씀대로!
여러분 말씀 대로라는 배경이 바로 누구입니까? 받아합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가 하나님의 뜻 대로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그 배경이 뭐냐?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대로! 그러니 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 보내어졌다! 돌들도 그냥 무심히 이 땅에 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확실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목적이 있어서 보내어 졌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내게 되어지는 사건과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지금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이루시는 뭐라 그랬습니까? 과정에 있을 뿐이지,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왜, 저런 일이 생기느냐?' 그런 우연히 나오는 문제는 아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말씀대로' 그러면,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과 역사 속에 서 있는 자의 고백인 것이 바로 이해가 되어야 되죠. 저나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또 우리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현장을 찾을 때에 뭐냐?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어디서 자꾸 발생하고,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느냐하면, 말씀대로 하나님의 계획을 찾아 나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은 어디에? 말씀 속에 다 예언하고, 이미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 말씀을 붙잡고 나갈 때에 현장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아, 성경에 말씀대로 지금 이루어져 가고 있구나!' 그렇게 이해가 되는데, 그것이 안될 때에 뭐가 나오느냐? 내 개인의 감정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게 복음으로 뿌리 내지지 않으면 자꾸 사단이 틈타게 되는 배경이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에 뿌리를 내린다!' 그게 바로 뭡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여러분과 저의 삶에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완전히 바탕이 되어야 되죠. 그 다음에 무슨 문제와 사건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흑암이 들어올 통로가 없는 거죠. 그게 안되면 흑암에 통로가 되고, 흑암의 역사에 모든 뿌리가 되어 있는 것을 바로 성경에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시기 때문에 이 갈등을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중에서 볼 수 있죠. 분명히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 속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어려운 고통과 고비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취되어 가는 과정임을 확인하고, 또 믿음으로 이 사건을 맞이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잖아요. 그때에 첫 번째 가서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이여, 원하시면 이 잔을 물러가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안 받고 구세주가 되면 안됩니까? 내가 십자가를 안 지고 메시아가 되면 안됩니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할 수 있거든요. 말이 되거든요. 한번 받아합시다. "말이 되네!" 우리가 기도 속에서 이런 일들을 많이 겪게 되죠.
저는 이 뭔가 상당히 누구보다도 현실적으로 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계획이다!'이래가지고 참기도 하고, 그 다음에 뭔가 하나님 계획을 고통 속에서, '무슨 계획이 있을까!' 찾아보기도 하고, 이렇게 하다가 무슨 생각이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은 창조주 아니십니까! 이렇게 안 해도 할 수 있는데, 꼭 이렇게 사람을 반 죽여가면서 만들어 가야 됩니까? 하나님 오늘이라도 확 한번 기적을 주시고, 뭘 주시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말이 되거든요.
그 다음에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주님도 똑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참 사람으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또 두 번째로 나가서, '하나님, 내가 이 잔을 안 마시고, 십자가 안 지고 메시아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꼭 기도 뒤에 붙인 것이 뭐라 그랬습니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게 믿음의 자세에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내가 어떤 자세로, 어떤 그릇으로,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느냐? 사건과 문제를 놓고서 내가 어떻게 그 사건과 문제를 이해하고 해석하느냐! 배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참 복음으로 뿌리내리지 못하면, 자꾸 사단의 통로가 된다는 배경이 바로 이러 배경이거든요. 우리가 복음에 진짜 뿌리를 내려놓고, 참 복음에 서 있지 못하면 뭐가 나오느냐? 사단이 들어올 수 있는 자세로 바꾸어지게 됩니다. 뭔가 순간, 순간 욕심과 순간, 순간 감정과 순간, 순간 내 뜻과 내 생각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내 뜻과 내 생각을 하나님 앞에 말할 때도 얼마든지 합리성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참 복음에 뿌리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그게 안되어 있는 만큼 이런 배경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문제나 모든 사건이 전혀 비 복음적으로 이해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전혀 다른 복음적으로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것이 바로 안 되었을 때에, 자꾸 종교로 빠진다는 것 참 듣기 싫은 말이죠. '네가 복음이 안되었구나! 복음에 뿌리를 아직 못 내렸구나!' 참 듣기 싫은 말이죠. 그 말 한마디가 듣기 싫은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 그만큼 흑암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열려 지는 겁니다. 그런 배경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확실하게 예수님께서 어떤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의 감정과 느낌이나 생각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계획은 가장 선하고 복된 역사입니다. 받아합시다. "기어코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진다!"그래서 어쩔 때는 그렇게 기도하다가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반죽이든지, 완전히 죽던지, 완전히 사라지던지, 어찌 하던지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히 끝을 봐야 됩니다.
끝을 봐야 된다는 말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루다가 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느낌과 내 감정이 이렇고 저렇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중간에 가다가 네가 너무 반발하니까, '안되겠구나!'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기어코 어떻게 해요? 이루어집니다. 받아합시다. "일찌감치 맡기고 순종하자!" 진작 하는 것이 낫습니다. 뭐 '왜, 이렇습니까!' 지만 괜히 괴롭지 그런다고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일찌감치 '주여, 죽여주시옵소서!' 바울이 이 고백을 잘했어요.
그래서 어떤 생각이 오느냐 하면, 그래도 뭔가 내 감정이 들어있을 때는 하나님 때에 따라서 용기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 뭐냐하면, 내가 살겠다는 생각이 되면, 하나님 뭐 이렇게 저렇게 사는데 대한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다가 안 될 때는 어떻게 기도하느냐 하면, 막 낙심도 하고 그렇잖아요. 그러다가 어떤 경우가 생기느냐하면, 진짜 내 중심의 포인트가 다 사라지고 정말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서, 말하자면 복음의 뿌리가 내리는 만큼 뭐가 달라지느냐 하면, 이렇게 달라지는 것을 가끔 느낄 때가 있어요.
여러분 뭔가 여유가 있을 때에, '주여, 죽이려면 죽이시고 살리려면 살리시고 하나님의 뜻에 맡깁니다!' 그건 좀 여유가 있을 때입니다. 덜 답답할 때입니다. 그러나 막상 막다른 골목에 가서 죽음 직전에 이렇게 될 때에, 죽음에 붙잡혔을 때에, 뭐라고 기도하는 줄 압니까? '하나님, 살려 주이소!' 안 당해보면 잘 모릅니다. 그래도 뭐 하나님의 뜻이면 가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뭐 죽겠습니다. 이러는 것은 덜 답답해서 그런 겁니다. 진짜 답답하면, '하나님 살려주이소!' 그것도 안되면 '하나님, 하나님!' 이것밖에 나오는 것이 없어요. 되게 급하면 살려달라는 소리도 못해요.
여러분 여기서 정말 내 감정과 내 느낌이 다 사라지게 될 때에 오는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내 감정과 느낌은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죽는 것이 영광이 된다면 죽게 하시고, 사는 것이 영광이 된다면 살게 하시고, 일이 이렇게 되는 것이 영광이 된다 그러면 이렇게 하시고, 저렇게 되는 것이 영광이 된다 그러면 저렇게 하시고...' 바울이 사나 죽으나 오직 내 안에서 누구만? 주님만 영광되기를 원한다! 그 고백이 간단한 고백이 아닙니다.
거의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뭔가 마지막 막다른 골목에서 결정할 때에, 내게 연관된 것으로 결정하려고 하지 완전히 나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다 맡기고 '주님께 영광되게 하옵소서!' 이게 잘 나와요. 그래서 여러분 '복음에 참 뿌리를 내린다!' 이 말이 보통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결정이 다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우리는 문제생길 때에 내게 연관된 감정으로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직 좀더 기다려봐라! 그릇이 멀었다!' 그래서 받아합시다. "당한 만큼 당해야 눈이 열린다!" 아직 조금 뭔가 이런 저런 소리가 나오거든, '덜 당했구나! 그릇이 덜 만들어졌구나!' 그래서 우리가 삶에 있어서 이런 부분들을 많이 느낄 때가 있죠. 우리 예수님께서 지난 주일에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위대한 선언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를 만족하게 다 이루었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다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뭐라고 하는가하면, 우리 목사님은 말씀대로, 말하자면 말씀이 쭉 진행하는 과정에서 말씀대로 '죽는 것은 죽고, 그 다음에 부활되면 살아날 것이다!' 그러더라 구요. 그러면 부활을 빨리 한 주간 앞당기지 뭐... 그래가지고 오늘 부활을 앞당겼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장사 지내는 그 시간은 지나가도 되겠다 싶어요. 그래서 오늘 말씀대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오늘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예수님께서 고통 하셔도, 애를 쓰셔도, 또 괴로움을 당하셔도, 어떤 면에서 볼 때는 사단에게 조롱을 받는 것 같고, 또 여러 가지 많은 것이 안 보입니까! 지금 예수님께 가시관을 덮어 씌워놓고, 가시로 관을 만들어 가지고 예수님 머리에 눌러 피를 흘리게 만들고, 그리고는 이상한 것을 손에 쥐어놓고, 홍포를 입히고, 조롱하고 받을 것을 쭉 안 받습니까! 당할 만큼 당하도록 쭉 그대로 두시더라 구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마음속에... 더러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는 이런 과정을 준비하면서 내가 지금 당하는 것이 있으니까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어쩔 때는 분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괴롭기도 하고... 왜 그러냐 하면, 여러 가지 정황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은 뭐냐하면, 사단이 조롱하는 것 같고, 사단이 놀리는 것 같고,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멸시를 받습니다!' 이런 소리도 하다가, 그러다가 그것도 가만히 생각하면 내 감정과 연관시키면서, '정말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정말 주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더라 구요.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당할 만큼 다 당하시고 결국 돌아갔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수모의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마지막에 가서 다 완성하시고 예수님께서 고백하신 것이 뭡니까? '다 이루었다!' 그게 뭡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저는 이 시간 강단을 통해서 여러분이 당하는 일과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하여 계획하신 것 다 이루십니다. 이루다가 그만두지 않으십니다. 계획한 것 그만두지 않습니다. 왜?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과 계획은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어코 여러분을 향하신 축복과 계획은 완벽하게 성취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에 오늘 여러분과 제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에, 문제생길 때에, 또 강단에 와서 주일날 말씀 듣는 것이 뭡니까?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내 모든 것을 향하여 계획하신 것을, 하나님이 오늘도 내게 이루실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 붙잡고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야기 아닙니까! 주일날 와서 말씀을 붙잡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어요. 그래서 요즘 우리 신앙생활에서 기도수첩 만들고 말씀이 오늘 이런 말씀인데 어떻게 내게 성취되어 가는가? 기도 수첩을 기록하는 것 얼마나 실질적인 믿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거의 지금까지 우리가 안되어 왔는데 우리가 오늘날 '전도, 전도!' 그러면서 이것이 내게 조금 이루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뭡니까? 이것이 개인적으로 기도응답이 된다! 그런 사건이거든요. 그래서 이 말씀대로 성취되는 이러 놀라운 역사를 구체적으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제게 사실적으로 보여주시는 내용이 되는 겁니다. 그 내용이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6절에 주신 말씀이 바로 예언하신 말씀대로, 이미 여러분과 제게 주신 말씀대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내가 어떤 자세와 믿음의 그릇으로 신앙 생활하느냐? 이걸 정말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뭐 여러 가지 말을 많이 할 수 있죠. 어려운 시대에 어려운 사건과 어려운 문제 어려운 일들이 부닥치는 말세의 시대입니다. 만약에 이런 어떤 분명한 하나님께 향한 기준과,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향하신 주신 축복 속에 세워진 확실한 기준이 없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다. 방황하게 됩니다. 그것이 확실하게 세워진다!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분야에서, 모든 사건 속에서 뭘 보게 됩니까? 비로소 그때부터 응답이라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이렇게 또 응답하시는 구나! 저렇게 또 응답하시는 구나!' 이것이 그 요셉에게 보여준 말씀 아닙니까! 요셉이 분명히 하나님 앞에 엄청난 비전을 보았잖아요.
비전을 보고 난 후에 어떤 문제가 생겼느냐? 더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노예로 팔렸습니다.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럴 때에 그 믿음에 자세를 따라서, '아, 노예로 팔릴 때에 이렇게도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구나! 저렇게도 응답해 주시는 구나!' 그래서 그 형제들과 총리가 되었을 때에 만남 속에서 형제들이 요셉인 줄 알고 너무 두려워할 때에, '내 형제들이여 두려워하지 마옵소서. 하나님이 당신들과 내 형제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당신들 보다 앞서' 뭐라 그랬습니까? '나를 애굽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뭐냐하면 그 형제들과 같이 안 살고 형제들에게 팔려서 쫓겨 나온 사실조차도 요셉에게는 뭡니까? 응답으로 보였습니다. 이게 사실이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특별히 성도들이 이게 보여지게되면 모든 문제 해결입니다. 이게 안 보여지니까, '하나님, 왜 이렇습니까? 하나님 왜 저럽니까?' 하나님이 그걸 모르겠습니까? 더 잘 아시죠.
그러면 왜 굳이 하나님이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그러시고, 예수님이 죽기까지 두셔야 되고,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왜 또 굳이 살리셔야 됩니까? 그 이유만 좀 밝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첫 번째가 여러분과 저를 사망의 손에서, 말하자면 마귀의 사단의 손에서 완벽하게 해방시켜줄 수 있는 자격자가 메시아입니다. 그 메시아의 자격자 중에 중요한 것이 완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 누구이어야 합니까? 완전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사람을 사단의 손에서 건져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이요, 참 신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참 사람으로는 죽었습니다. 이건 눈에 보이는 사건이니까!
참 하나님이라는 표로, 참 하나님이 되셔야 되는 이유로는 반드시 사망에 그대로 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하나님이란 확실한 증거로 부활하셨다!" 할렐루야! 중요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렇고, 후대의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서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이다!' 말씀할 때에 제일 못 믿었던 부분이, '네가 지금 사람으로 있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이라고 사기 치느냐?' 그게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돌멩이를 들고 덤벼들었던 제일 큰 원인입니다.
만약 지금 내가 '나는 하나님이다!'이랬다. 그러면 '네가 지금 박지온이 아니냐! 무슨 그런 사기꾼 같은 소리를 하느냐!' 아마 여러분 중에서 한사람도 안 믿을 겁니다. 안 믿는 것이 당연합니다. 유대당시에 예수께서, '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나는 같다!' 이랬을 때에 제일 못 믿었던 부분이, '나는 참 사람이다!' 그건 믿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다!' 그건 못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참 신이십니다. 참 하나님이신 그분은 생명을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 자체이십니다. 사망과 죽음에 매여있을 수 없습니다. 창조 받은 분이 아니고 바로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사망에 던져짐을 당해도 사망 속에 그대로 방치될 수 없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하나님이라는 증거로 살아나셨습니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다 풀려버렸습니다. 왜? 여러분과 저를 사단의 손에서 해방 할 수 있는 구원자로서 메시아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여기서 완성된 것입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셨느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이 일이 여기서 완성이 된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고 여기서 메시아의 완성된, 다 이루었다는 메시아로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는 겁니다.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다 끝났습니다. 그래서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다 끝났습니다. 다 성취되고 다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직 뭡니까? 그 이름! 바로 그 분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시기에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막 말로해서 우리가 볼수 있듯이 기도하며 갈등하시던 데로 이걸 안 당해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안 거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왜, 그렇게 거쳐야 되느냐?' 믿음 주시기 위해서! 안 거치면 못 믿으니까! '왜, 그렇게 홍해를 갈라야 되느냐?' 그렇게 갈라도 못 믿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인데, 갈라놓고 광야 속에 집어넣었는데도 못 믿고 불평하고 맨 날 죽느니 사느니... 그러니까 여러분 한번 살펴보세요. 신앙생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나의 주되신다! 하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했구나!' 그래 놓고도 늘 불평하고 근심, 걱정, 염려를 팔자로 하고 있잖아요. 밤새도록 염려하다가 아침에 조금 잠들고... 그게 왜 그러냐? 그게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믿는 만큼 내가 어떤 자세로 지금 신앙생활 하느냐? 다 해결되는 겁니다. 그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고 체험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면서도 죽었다가 살아 나셔야 합니다. 그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붙잡고 기도하게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위대한 자격입니다. 이 자격 속에 세웠다는 것조차 우리는 감사 정도가 아닙니다. 깜박 넘어가야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별로 없거든요. 우리가 이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로 죽음에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다윗의 고백했고 바로 성경의 고백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영원한 죽음과 멸망에서 구원할 자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땅에 있으면서 정말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은 오직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구누구는 '내가 죽으면 3일 후에 살아난다!'고 시체를 그냥 놔두고 암만 기다려도 살아나지 않고, 썩어져서 구더기가 굼실거리며 돌아다녀도 살아난다고 놔뒀다가 경찰이 가서 시신을 수습한 사건이 있었던 것을 우리가 잘 알잖아요.
만약에 이 땅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예수님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으면 헷갈려요. 메시아가 누군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간단한데,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여럿이 있으면 헷갈리잖아요. 만약 내가 오늘 중요한 만남을 약속했습니다. 약속할 때에 '이 왼편 가슴 양복주머니에 장미꽃을 딱 달고 나오거든 아무개 그렇게 생각하고 만나자!'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딱 내려서 보니까, 장미꽃을 달고 나온 사람이 수두룩하다! 그러면 헷갈립니다.
여러분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으냐? 우리는 참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신앙을 요구할 때에 어렵게 만들지 안았습니다. 너무 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자주 중요한 역사 속에, 중요한 말씀은 오직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헷갈리지 않도록 너무 편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여럿이 있었다면 이 사람이라고 그랬다가 저 사람이라고 그랬다가 헷갈릴텐데, 하나님이 여러분과 제게 축복주시는 것! 또 너무 축복하신 것은 오직 예수!
그래도 오직 예수 못해요. 이 오직 예수 안 하려고 얼마나 기를 쓰고 이빨을 갈면서 안 하잖아요. 오직 예수! 변화 산에서도 모세도 가고 엘리야도 갔지만 오직 예수만이 남았습니다. 여러분 지금 마음에 여러 가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막 그냥 봅니다. '목사님이 아무리 그래도 이 일은 해 야죠!' 해 야죠. 상관없습니다. 오직 한 분! 딱 붙드세요. 여기에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말세에 어렵고 힘든 일이 닥쳐올지라도 여러분과 제게 약속하신 말씀! 하나님의 계획! 그분이 여러분과 제게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확실하게 오늘 마음에 영접하시고, 모시고 확인하십시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의 능력
마 28:1-10 / 박지온목사
요즘 '기러기 아빠'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나라 교육열풍이 가지고 온 심각한 사회문제죠. 상당히 지금 남자들이 고통을 앓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TV를 봤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하면, 이 기러기 아빠에 대해서 쭉 보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례를 들고 있었는데, 남편 되시는 분이 아이들을 저 미국으로 교육을 위해서 이민을 보냈습니다. 아이들이 가서 공부를 하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그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는 아내도 같이 보내야 되겠죠.
그렇게 아이들과 아내가 떠나가고 자기는 한국에 남아가지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한달 계속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자기 일정량 쓰는 것 외에는 전부다 미국으로, 아이들 교육을 위해 가지고 투자를 하며 다 보냈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무려 10년이 지났습니다. 그 10년 동안 한번도 미국 땅에 들어가 보지를 못했고, 아내와 자식들도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10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해 가지고 번 모든 돈들을 그 자녀들에게 다 투자했습니다.
한 10년 세월이 지났는데, 그때 아내로부터 어떤 전갈이 왔느냐 하면, 집을 다 정리하고 팔아 가지고 그 돈을 좀 붙여달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그때 이 남편이 어떻게 해석을 했느냐 하면, '집을 팔아서 돈을 보내라는 것을 보면 이제 나도 정리해 가지고 들어오라는 신호인가보다!' 그래가지고 먼저 집을 팔아 가지고 돈을 송금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자기도 미국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미국 땅에 들어가서 깜짝 놀랄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아내는 다른 남자와 살고 있고, 그리고 아이들은 10년 세월이 지났으니까 아무런 정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갔으니까요. 아빠 얼굴도 잘 모르고, 또 봐도 멀뚱멀뚱하고... 그래서 아이들은 전혀 반기는 기색도 없고, 그런 어떤 답답한 심경들... 너무 어렵고 힘든 심경을 이야기하는데요.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을 제가 봤습니다.
참 요즘 우리 남자들 불쌍하죠. 뼈빠지게 수고하고 노력을 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 때에 이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참 이 땅에 남자들의 현실이 그만큼 지금 각박해 졌다는 말입니다.
우리 50대 남자들이 가장 놀라는 일이 하나있습니다. 그 아내가 국을 끊여놓고 나갈 때가 상당히 당황스럽다고 합니다. 큰솥에다가 국을 푸짐하게 끊여놓는데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당신이 알아서 내가 없을 동안 밥 챙겨 먹으세요!' 그래서 나가면 이틀이고 삼일이고 일주일이고 안 들어온답니다. 그러니까 늘 그 국 끊여 먹고, 그렇게 밥해먹고 있어야 되는 거죠.
우리 60대 남자들은 이사를 하면 남편이 안 보인답니다. 남편들이 일을 챙기고 또 추진을 하고 일을 해야 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남편이 안보인데요. 나중에 출발할 때 보면, 이삿짐 차 운전석 옆 조수석에 딱 웅크리고 앉아 있답니다. 왜 그런 줄 압니까? 놔두고 갈까 싶어서... 그리고 70대 남자 분들이 참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 아내가 산에 가자고 할 때! 왜냐하면, 고려장 할까 싶어서...
지금 우리 남자들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젊은 남자들은 괜찮으냐? 그렇지도 못합니다. 요즘 우리 젊은 남자들, 아침에 출근할 때에 아내들에게 밥 챙겨 달라고 하면 간 큰 남자라 합니다. 그리고 아예 아내가 깰까싶어서 조용하게 일어 나가지고 거기다가 더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밥을 딱 차려놓고, 그래서 몰래 도둑놈처럼 그렇게 나가야 된답니다. 그게 요즘 인기 있는 우리 젊은 남자들입니다. 참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저도 남자이지만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싶은 게... 지금 우리 정치계도 보십시오. 우리 정치계를 보시면 전부다 여자들입니다. 그 선대 위원장들 다 여자죠. 그리고 당 대표도 여자죠. 그래서 요즘은 여자들에게 잘 못 보이면 표도 못 얻습니다. 그만큼 지금 우리 남자들의 현실이 각박하고 힘들고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 남자들은 이혼을 하면 완전히 알거지가 됩니다. 일본법이 지금 이상하게 되어 가지고 조금 서로 맞지 않아서 이혼을 하면 모든 재산들이 여자에게로 돌아간답니다. 그러니까 이혼만 당하면 우리 남자들은 알거지가 되어 가지고 그렇게 나온답니다. 어쨌든 여자에게 잘 보여 가지고 오래오래 붙어살아야 되지, 그렇지 못하면 쫓겨나고 거지가 되고 전혀 살 기력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여기에 계신 남자 분들 조심하십시오. 조심해서 잘 살아 가십시오. 오늘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요즘 박 목사 참 핍박을 많이 받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전 아직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지금 우리 남자들 처신을 잘 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따지고 보면 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요즘 여자들 큰소리 치고, 또 가만히 살펴보면 자리가 올라가는 것 같고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만히 보면 여자들도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아직까지 매 맞는 여자들이 있고, 집에서 쫓겨나는 여자 분들이 있고, 또 버림받는 여자들도 있고, 어쨌든 수많은 고통과 갈등 속에 살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성경에 보시면 이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 지요. 당장에 우리가 잘 아는 '한나'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아들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얼마나 구박을 받고, 멸시를 당하고, 수모를 당하고... 그때당시 계명이 어떻습니까? 그때 당시 여자들이 결혼했는데, 그 집안에 대를 이어주는 아들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한나가 그랬습니다. 이 한나가 결혼을 했는데 남편의 사랑은 지극히 많이 받았습니다 만은,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 아들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같이 살고 있는 여자들에게 얼마나 멸시를 당합니다. 구박을 당합니다. 수모를 당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괴로웠던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진짜로 버림받았습니까? 내가 진짜로 하나님께 저주받았습니까? 왜 내게는 아들이 없습니까?' 얼마나 처절하고 고통스럽게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나오미는 어떻습니까? 모압 땅에 들어갔는데, 그 모압 땅에서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둘도 다 잃었습니다. 남편 잃고, 아들 잃고 처참한 모습으로 자기 고향 베들레헴 땅으로 돌아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환영했습니다. '나오미야 잘 왔다! 참 잘 결단했다!' 이렇게 격려하고 위로를 하는데, 그때에 나오미가 뭐라고 했습니까? '여러분, 더 이상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불러주십시오!' 나오미라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희락'과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이 '마라'라는 말은 '고통'과 '슬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서 나오미라고 불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본인은 어떤 말을 합니까? '나를 더 이상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 해라!' 왜냐하면, '나는 남편도 잃었습니다! 두 아들도 잃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나는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그런 심령 때문에, '나를 마라라 불러주십시오!' 참 고통의 그 엄청난 충격이 얼마나 컸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십시오. 누가복음 7장에 보시면, 나인성 과부가 나타납니다. 이 나인성 과부도 마찬가지로 남편을 먼저 잃었습니다. 모든 것을 남편에게 의지하고 남편을 바라보고 살았는데, 그 남편이 일찍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소망과 기대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면, 그 아들에게, 그 남은 아들에게 모든 정성을 다하고, 기대고, 의지하고,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이제는 그 아들마저도 어머니를 남겨둔 체 먼저 세상을 떠나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장례행렬이 그 나인 성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이 여인이 괴로웠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도 보시면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자가 나타납니다.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줄 아십니까? 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누가복음 8장 2절에서 말씀합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냐? 오늘 본문 속에 중요한 주인공으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리아가 도대체 누구냐? 우리가 그 사실을 한번 성경을 통해서 확인을 한번 해 봐야되겠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입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지금 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누가복음 8장 2절에서는 뭐라고 소개를 했습니까?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다! 단적으로 말하면, 정신이 미친 여자입니다. 이런 여자가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나서 최고의 축복과 최고의 감격을 맞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다른 성경에서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다! 창기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몸을 팔아먹고 살아가는 그런 비참한 여인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막달라 마리아는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자기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고통과 비통 속에 살아가는 그런 기고한 여인이었습니다.
저는 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이런 추측을 해봤습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가 '처음부터 귀신이 들렸겠느냐? 처음부터 정신이 없고 완전히 미쳐서 그렇게 돌아 다녔겠느냐?'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막달라 마리아가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 수많은 남자들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버림을 받습니다.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서 쓰레기 같은 인생으로, 상처투성이 인생으로 완전히 전락하고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지나가는 남자들이 막달라 마리아를 보면, '저 미친 것! 저거, 저거 창녀다, 창녀!' 그리고 동네에 사는 다른 여자들은 어떻습니까? 이 마리아를 보면서 막 손가락질합니다. '어디 할 일이 없어서 몸을 팔아먹는 창녀가 되어졌느냐?' 그러면서 얼마나 수모를 주고, 천대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상처를 견디지 못한 이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 자신을 비관하고, 고통 속에 시달리다가 정신문제가 왔고, 심지어는 일곱 귀신들린 자리에까지 들어오지 않았겠느냐!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여러분 오늘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남자도 여자도 다 불쌍합니다. 뭐 주도권을 좀더 잡고 들 잡고 그 차이죠. 우리 결혼하면 그렇잖아요. 결혼하면 서로 주도권을 잡고, 서로 매이지 않으려고 얼마나 힘 싸움을 합니다. 큰소리를 치기도 하고, 심지어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그런데 어떻습니까? 결국에는 남자도 여자도 다 망합니다. 이게 지금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에 현실들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렇게 망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 언제 살아났습니까? 반드시 인생들이 살아나는 중요한 기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통과 고통에 처해있는 그런 모든 인생들이 언제 살아났느냐?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만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 모든 인생들이 다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나인 성 과부를 보십시오. 누가복음 7장에 보시면, 지금 장례 행렬이 쭉 지나갑니다. 남편을 먼저 잃고, 그리고 아들도 먼저 잃고, 그래서 비통에 처해진 이 여자가 관을 따라서, 엉엉 울면서 그렇게 그 행렬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맞은편에 다른 행렬이 나타났습니다. 그 행렬이 뭐냐하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나인 성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죠. 여기에 기적적인 역사가 벌어졌습니다. 한쪽에서는 비통해하고 고통스러워서 울면서 그렇게 쭉 그 장례행렬이 지금 지나가는데, 그런데 한쪽에서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살리는 메시지를 가지고 그 나인성에 들어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두 행렬이 만나는 그 순간에 뭐가 일어났습니까?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청년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청년아, 네가 일어나라!' 지금 관속에 누워있습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최고의 고통 속에 빠져있습니다. 그런 한 인생을 향해서, '청년아, 일어나라!' 그때에 숨을 쉬고 일어나는 기적의 역사! 이게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때에 일어났던 기적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잘 봐야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막달라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이 막달라 마리아,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죠. 그런데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다!' 이러면 빨리 생각이 날 겁니다. 예수님의 발꿈치에 향유를 붙고, 그리고 그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던 사람! 그게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일곱 귀신 들렸습니다. 처참한 인생으로 전락했습니다. 몸을 팔아먹고 살아가는 그런 비참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그 인생이 완전히 변화되는 엄청난 기적들이 그 속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목격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십시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그렇죠. 이제는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함께 그 무덤 속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 속에 달려와서, 결국에는 그 뒤에 6절, 7절에 보십시오. 누구를 만났습니까?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 속에서 만났다는 것!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목격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여러분 그냥 예수님을 만나도 그렇게 축복인데, 그런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제일 먼저 만나는 이 축복을 함께 누렸다는 것이죠. 참 축복된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슬픔과 고통과 한숨 속에 처해있는 인생들에게 최고의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바로 그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죽음 속에 처해진 나사로 앞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합니다. 그 누이 마르다가 있었습니다. '내 오라비가 살리라!' 그때에 주신 메시지가 뭡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부활의 역사입니다. 부활의 소망입니다. 이 엄청난 역사를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 기독교 최고의 복음에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늘 복음을 부르짖고, 그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참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가 함께 따라와야 됩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떤 것 하나라도 빠져서는 절대로 참 복음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되기 위해서 뭐가 두 가지 따라와야 됩니까? 첫째는 죽음이 따라와야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죄를 범했습니다. 이 죄의 결과로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죄악의 문제는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죄인이 죄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했을 때에, 내가 죄인인데 그 앞에 있는 죄인을 진짜로 용서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런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 없는 분이 오셔야 됩니다. 죄인이 죄인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죄 없는 분이 오셔서 대신해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치러줘야 됩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모든 죄악문제, 이 저주와 재앙의 문제를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끝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죽음의 문제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죠.
요즘 천주교에서 또 들고일어나고 있습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성모 마리아님은 원죄가 없습니다!' 여러분 진실로 그렇습니까? 마리아도 육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친을 향해서 뭐라고 했습니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 말은 '당신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절대로 살수 없다!' 그 말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만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예수님 대신에 마리아를 그 자리에 올려놓고 자꾸만 거룩하게 합니다. 이건 진짜로 이단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모든 인생들은 한 명도 예외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더니!' 분명히 전제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 다 죄인이죠. 그런데 자꾸만 마리아를 높은 자리로 승격해 가지고, 예수님을 자꾸만 가슴에 품도록 그렇게 만들어 갑니다. 이게 사단의 전략입니다.
요즘 아주 인기 있는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그런 영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서 쭉 이렇게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멜 깁슨'이라고 아주 유명한 배우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이분이 참 어려움을 당하다가 자살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뭔가 이제 충격을 받고 회심을 했는데, 거기에 대한 어떤 자기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서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멜깁슨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입니다. 그러니까 천주교의 관점에서 이 그리스도의 수난! '패션'이라는 영화를 만들었거든요. 여러분 나중에 한번 보십시오. 저도 아직까지 보지는 못했습니다 만은, 내용들을 쭉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시면 예수님의 모습보다는 마리아의 모습을 자꾸만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자꾸만 예수님을 이 마리아의 가슴에 품도록 그렇게 만들어 갑니다. 그러면서 이 마리아의 입에서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내 아들아, 내 아들아!' 그런 내용들이 상당히 전면에 깔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뭔지도 모르고 보면, '야, 마리아 참 위대하다! 참, 자애스럽다! 자비롭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뭔가 그리스도의 모습보다는 마리아의 모습이 더 부각된다는 것이죠. 여러분 그렇게되는 것은 절대로 복음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누가 졌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지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저와 여러분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화를 통해서 또 다른 서적을 통해서 이런 마리아의 모습을 자꾸만 부각을 시키고,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꾸만 덮어놓고 있다는 것! 이게 사단의 전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영화보실 때에 잘 명심을 하십시오. 마리아가 '내 아들아, 내 아들아!' 그러면 '주여, 주여!' 이렇게 말을 좀 바꾸어서 보십시오. 그 선교사 훈련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 구요. 어떤 교수님이 그 영화를 봤는데, 자꾸만 예수님을 보고 '내 아들아, 내 아들아!' 그러니까 그걸 바꾸어 가지고 '주여, 주여!' 이렇게 본다면 그게 좀 맞아 들어간답니다. 그런 시각으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이 죽음에 문제를 보십시오.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이 죽음에 문제!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라는 증거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고, 그와 동시에 둘째로 뭐죠? 부활하셨다는 겁니다. 만일 주님께서 죽음으로 끝났다면 더 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무엇이 따라와야 됩니까? 그 죽음과 더불어서 그리스도라는 증거로 다시 살아 나셔야 됩니다. 이걸 보고 우리는 '부활이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이제는 부활하셔서 저와 여러분들의 부활에 첫 열매가 되었다는 것! 그래서 죽음과 부활! 이게 모든 복음 속에 자리잡고 있을 때에, 여기에 진짜로 기적도 일어나고, 살아나는 축복들이 함께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이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죽어라고 이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어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여러분 그러니까 하나님 아닙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그분이 하나님 아니십니까! 우리가 늘 믿음, 믿음 강조하는데, 믿음이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역사와 사건을 믿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부활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능력이라면, 믿어야 됩니까? 믿지 말아야 됩니까? 믿어야 되는 거죠. 그래서 저와 여러분 속에 이 부활에 산 소망이 있고, 이 부활의 사건들이 믿어질 때에 여기에 기적도 일어납니다. 모든 역사들이 다 회복되어집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축복들이 완벽하게 여러분들의 삶 속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 당시에 믿지 않았던 사람들, '어떻게 부활이 있을 수 있느냐?'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낸 학설들이 도난 설, 환상 설, 기절 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서 도망갔다!'는 겁니다. 그게 도난 설입니다. 환상 설은 뭐냐? '예수님을 사모하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하도 사모한 나머지 꿈에서 허깨비를 봤다!' 그게 환상 설입니다. 그리고 기절 설은 뭐죠? '예수님이 덜 죽었다! 그래가지고 정신 차려 가지고 도망갔다!' 그게 기절 설입니다.
믿지 않으려고 그들이 학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십시오. 믿지 않으려고 이러한 세 가지를 만들어냈는데 결과는 뭐냐하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훔쳐서 도망갔다는 것도, 환상을 봤다는 것도, 기절했다는 것도, 거꾸로 생각하면 살아났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단이 머리가 나빠요. 안 그렇습니까! 그들이 믿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잘못을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결국에는 살아났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과가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로 부활에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만일 여러분들이 지금 부활에 산 역사가 믿어지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아 계신다면 참 불쌍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너와 나처럼 더 불쌍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 부활이 없으면 여러분들은 지금 산으로 올라가십시오. 마음껏 좋은 공기 마시고, 마음껏 캠핑하시고... 왜? 부활이 없는데, 우리가 죽어서 이 땅에서 모든 인생이 끝난다면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가서 마음껏 노시고, 마음껏 즐기시고... 왜냐하면 부활이 없는데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 속에 부활에 산 소망이 주어졌다는 것! 여기에 대한 진정한 감사들이 일어나야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지금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부활에 산 신앙이 심겨져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첫사랑에 대한 감격은 가슴에 묻어둡니다. 어저께 TV를 잠깐 보니까 어떤 중국사람인데 30년 전에 첫사랑을 찾아달라 그러면서 돈을 투자하는 것을 봤습니다. 왜 그렇게 첫사랑을 찾아 달라고 하느냐 물어봤습니다. 그러니까 이 분이 하는 말이 그때 그 감격 그때 그 짜릿한 그 마음속에 있는 감격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그래가지고 그 첫사랑을 좀 찾아주십시오. 이래가지고 전국을 헤매는 모습을 봤습니다.
여러분 첫 사랑의 감격도 중요하지만, 첫 신앙의 감격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첫 신앙의 감격을 키워나가는 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무엇이 신앙에 성숙입니까? 저와 여러분 속에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 그 감격된 마음들을 자꾸만 키워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에 성숙이죠. 문제는 이런 신앙에 감격을 놓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말씀했습니다. '네가 첫사랑을 잃어버렸다!' 처음에 예수 믿고 구원받았던 그 감격, 그 신앙에 감격! 지금 여러분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슴속에 이 신앙에 감격과 더불어서 부활의 감격, 이 엄청난 충격이 여러분의 가슴과 삶 속에 성취되어 질 때에 여기에 최고의 축복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했던 막달라 마리아 또 다른 마리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감격들이 얼마나 컸던지 8절에 보십시오.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막달라 마리아, 다른 마리아! 이 두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습니다. 얼마나 감격에 찾겠습니까! 얼마나 충격을 받고 얼마나 마음속에 기쁨이 일어났던지,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했다고 했습니다. 황급히 달려왔다는 말이죠. 쉽게 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보았다!' 그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달음질하여 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전도입니까, 여러분! 내게 그리스도가 되신 그 주님! 부활하셔서 영원한 소망을 안겨주신 그 그리스도를 말하고 증거 하는 것이, 그게 전도 아닙니까!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오늘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진짜 여러분들이 부활에 산 소망이 있고, 여기에 감격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부활의 소망을 여러분 자신만 누릴 것이 아니고, 이제는 달음질하여 가십시오. 황급히 달려가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비극 속에 처해진 인생들에게, 고통과 실망 속에 처해진 그런 인생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시며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것!' 이 사실을 마음껏 한번 전해 보십시오. 이때에 참 전도자의 삶이 됨과 동시에, 여러분들은 부활에 산 증인이 되어질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이 축복을 꼭 누리십시오.
혹시 여러분 속에서 뭔가 고통과 실의와 낙심에 빠져있는 그런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부활하셔서 영원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그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한번 영접해 보십시오. 혹시 여러분 건강을 잃었습니까? 사업이 실패했습니까? 인간 관계가 깨어져 있습니까? 그런 낙심된 속에서도 부활의 주님이 영접되어 질 때에, 그때에 여러분의 모든 삶들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부활에 축복과 산 역사를 이번 한 주간 마음껏 누리시고 또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마 28:1-10 / 조상호목사
스탠리 존스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도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인도 어느 마을에서 노방전도를 하는데, 한 이슬람 신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가지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소. 메디나(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유적지로, 이슬람 창시자 마호메트의 무덤이 있는 곳)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있는 무덤이 있어 정말 마호메트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소. 하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빈 무덤 밖에 없지 않소?“ 그러자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스탠리 존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말이 사실이오.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오.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셨소.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빈 무덤밖에 없는 것이오.“
여러분! 세상의 다른 종교와 우리 기독교가 다른 점을 아십니까?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덤의 차이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의 창시자는 무덤을 남겼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도, 이슬람의 마호메트도, 유교의 공자와 맹자도 다 죽었습니다. 모든 종교에서는 그들의 종교 창시자의 죽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다른 종교에서도 자신들의 교주가 다시 살아났다는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 죽었고, 그들의 시신이 묻힌 무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세상의 다른 종교들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떤 종교 창시자나 위인들과 달리, 빈무덤을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 전체 분량의 약 3분의 1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물론 인간의 몸으로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부활절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면 기독교도 거짓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면 기독교의 진리도 진실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했을 뿐 아니라, 같은 장 17절과 18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라고 극단적으로 말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여 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지 본문을 중심으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
첫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증언을 적어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신 날은 금요일입니다. 그 날 해질 무렵 예수님의 죽은 시신은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정결한 세마포로 싸여 돌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마27:59~60). 그리고 돌무덤은 거의 1톤에 가까운 육중한 돌문으로 막아놓았고, 로마 황제의 도장이 찍힌 봉인을 붙여 놓았습니다. 이제 황제의 명령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그 봉인을 뜯어내고 돌문을 열 수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생전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9:22)고 예언하셨기 때문에,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무덤 앞에서 철통같이 경비를 섰습니다.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잡혀가는 것을 보고 도망쳤던 제자들이 설령, 다시 용기를 내어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가고자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삼엄한 경비를 뚫고 황제의 봉인이 찍혀 있는 육중한 돌문을 열고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 갈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오늘 새벽이 되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무덤에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마가복음 16장과 누가복음 24장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라고 하는 살로메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저희와 함께 다른 여자들로서 최소한 5명 이상의 여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다음 날인 토요일에 무덤을 찾아가야 되지만, 유대인들은 토요일인 안식일에는 많이 이동할 수 없었습니다. 특별한 경우, 성전이나 회당에 가기 위해 2,000규빗(900미터) 정도까지 걷는 것은 허용되는데, 그 이상은 이동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무덤에 가지 못하고 있다가 안식일이 지난 주일날 새벽, 아직까지 해가 뜨지 아니한 어둑어둑한 때에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간 것입니다. 그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돌문이 이미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무덤에 들어가 보았지만,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빈 무덤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두려워서 어쩔 줄로 모르고 있을 때, 흰옷 입은 한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5절에 의하면 흰옷 입은 그 청년은 천사였습니다.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예수님은 음부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 깨뜨리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무덤에 찾아온 여인들이 빈 무덤만 보았을 뿐, 아직까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인들은 천사로부터 “또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려주라.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로 가셨다는 소식을 전해주라.”(7절)는 말을 듣고 무서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가운데 제자들이 숨어있는 곳으로 달음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한 때 100미터 세계 기록 보유자였던 칼 루이스나 벤 존슨처럼 열심히 뛰었을 것입니다. 한참 동안 달리는 도중 갑자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 할 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 이 장면이 무엇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을 사모하다가 꿈속에서 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으로 완벽하게 부활하셨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은 단지 여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자,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도 요한과 수제자격인 베드로 두 사람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달리는 것을 그리 잘하지 못했던 같습니다. 함께 출발했지만, 사도 요한이 먼저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4절부터 5절까지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사도 요한은 달리기는 잘했지만,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도착했음에도 무덤 앞에서 주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비록 달리기는 못했지만, 그에게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베드로가 먼저 예수님의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요한복음 20장 6절부터 7절까지 보면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가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 수의가 무덤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오래 전에 프랑스의 한 잡지사에서 세계의 저명인사 100명에게 “지구의 파멸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반출해야 할 지구상의 보물이 무엇이냐?”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이탈리아 토리노 성당에 보관 중인 <예수님의 수의>였습니다. 그리고 2위가 미로의 <비너스상>이었습니다. 미로의 비너스상은 인간 예술의 극치로 인정받고 있는 걸작품 중의 걸작품입니다. 실제로 프랑스 루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비너스상> 앞에 섰을 때의 황홀감이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걸작품 중의 걸작품인 비너스상을 제치고, 겨우 폭 1미터 5센티미터, 길이 4미터 20센티미터에 불과한 세마포 수의가 지구상에서 가장 귀하게 보존해야 할 보물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난 97년인가로 기억하는데, 이 <예수님의 수의>가 보관되어 있는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 내부에 전기 누전으로 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원들은 불길에 휩싸인 토리노 대성당 안으로 뛰어 들어가 가장 먼저 꺼내온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소방대원들은 그 속에 있는 명화나 조각품과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호화스러운 각종 물건들은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소방대원들은 화염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을 걸고 뛰어 들어가 3중으로 된 방탄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뜨린 뒤, 이 세마포가 담긴 성궤를 안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여러분! 왜 소망대원들이 하찮은 세마포 한 장을 위해 이처럼 목숨을 걸었을까요? 무슨 이유로 수많은 저명인사들이 예수님의 수의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보물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 수의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 깨뜨리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줄로 믿습니다.
2)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건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건입니다. 처음 예수님께서 무기력하게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자, 많은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은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더 이상 기독교는 이 땅에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서는 힘을 가진 지도자가 이 땅을 떠나고 나면 그와 관계된 것들도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한 시대를 호령하던 알렉산더 대왕(BC 356~ BC323)이 죽고 나니 그의 나라가 끝나버렸습니다.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도 함께 끝나버렸습니다.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품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1769~1821)도 그의 생명이 끝나자, 그를 따르던 참모들은 다 떠나버리고 그가 건설하려던 세계 정복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때 세상을 불안에 떨게 했던 독일의 히틀러(1889~1945)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 독일은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히려 세계에 널리 전파되고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돌아가시자 유대 지도자들이나 제자들조차 모든 것이 끝장난 줄 알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통쾌한 역전승을 거두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역전승하면 무엇을 생각합니까? 아마 연세 드신 분들 가운데 야구를 좋아하시던 분들은 <역전의 명수 군상상고>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권투를 좋아하시던 분들은 홍수환 선수를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1978년의 일인 것 같습니다. 홍수환 선수는 의무 방어전으로 중남미의 푸에르토리코 출신으로 누구든지 붙었다 하면 모조리 초반에 KO 승을 거둘 정도로 무서운 주먹을 가진 카라스키야 선수와 경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경기 전부터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홍수환 선수의 KO 패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자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홍수환선수는 초반부터 몰리더니 경기 초반(2회 ?)에 무려 4번이나 다운을 당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홍수환 선수가 KO 패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홍수환 선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5번째 다시 일어나 <지옥에서 온 사자>라는 별명이 붙은 카라스키야를 KO로 무찔러, 통쾌한 역전승을 거둔 후, 참피온 벨트를 차고 한국으로 돌아온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그 때 <4전5기>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홍수환 선수는 역전의 참피온이었습니다. 얼마나 그 경기가 인상 깊었던지, 26~7년이 지난 지금에도 제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후, 성경을 보다가 홍수환 선수의 역전승도 귀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역전승에는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역사상 최대의 역전승을 꼽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혔을 때, 로마 군병들에게 갈대로 머리를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뺨을 맞고 심한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몸에 걸쳐진 옷이 벗겨지는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실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아 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막15:29~30)는 말로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무 저항도 없이 운명하셨을 때, 유대 지도자들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였습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조차 승부는 완전히 끝난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흘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가 패배하였다!“는 슬픈 소식이 입을 통하여 예루살렘과 갈릴리 지방에 퍼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예상과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완전히 패배한 줄 알았던 예수님께서 보기 좋게 역전승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발꿈치만 상하는 경상을 입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단은 머리가 짓이겨지는 중상을 입고 완전히 패배한 것입니다. 사흘 동안 “예수가 패배하였다!“는 슬픈 소식이 온 세상에 퍼졌지만, 사흘 만에 그 말은 바뀌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께서 역전승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주일 아침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토요일에 지키던 안식일이 주일로 옮겨져 오늘날에는 주님이 부활하신 주님의 날, 즉 주일(The Lord's Day)을 지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를 믿든 안 믿든 대부분의 나라에서 주일을 지킵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모든 원수를 다 이기시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너무 감격해서 미국의 로버트 로우리라는 목사는 시를 적었는데, 그것이 찬송가 150장입니다. 후렴 부분을 보면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망 권세 이기시고 승리하신 줄로 믿습니다. 사단과의 싸움에서 사흘 만에 역전승을 거두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세상을 이기시고 무덤에서 승리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모든 인류에게 희망을 준 사건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인류에게 희망을 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사 지낸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세상의 어떠한 정치 지도자들도 주지 못했던 희망을 전 인류에게 주셨습니다. 러시아 수도인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는 레닌(V.I. Lenin 1870~1924)의 묘가 있다고 합니다. 이미 80여 년 전에 죽은 그의 시신을 썩지 않도록 잘 처리했기 때문에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참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레닌의 시신을 보관하고 있는 관 위에 이러한 글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그는 언제나 모든 사람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새로운 인류의 주인이고, 그는 세계의 구원자였다.” 여러분! 질문할까요? 레닌이 모든 사람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입니까? 그를 새로운 인류의 주인이며, 세계의 구원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그의 나라인 소련을 망쳐 놓았습니다. 그는 공산주의를 발전시켜 공산주의 나라들을 세계에서 못사는 나라로 만들어놓은 장본인입니다. 레닌은 결코 구원자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생명도 해결하지 못하고 미이라가 되어 지금 누워 있습니다. 그러면 북한에서 한 때 신처럼 받들었고, 그가 죽은 지 10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여전히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 수령님”이라고 불리는 김일성이 정말로 위대한 지도자입니까? 아닙니다.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조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이 어떻게 위대한 수령이 되겠습니까? 그는 자기 생명도 구하지 못한 채, 죽어 현재에는 평양의 금수산 의사당인지 어디에, 레닌처럼 미이라가 되어 누워 있습니다. 또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에브라임 링컨이나, 발명왕 에디슨이나,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을 진정으로 위대한 지도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도 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하다고 인정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진정으로 위대한 지도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전 인류에게 희망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기 자신들 조차 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존경받던 성인이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가나, 많은 공적을 이룬 학자나 모든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죽었든지, 병이 들어 죽었든지, 사고로 죽었든지, 아무튼지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이 묻힌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수년 전 인도에서 석가모니(BC 563 ~ BC 483)의 뼈를 발견했다고 인도 전체가 들썩거리고 세계가 들썩거린 적이 있습니다. 그 뼈를 가지고 시가행진을 하고, 그 뼈를 보기 위해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그 뼈에 절을 하고 울며 야단법석을 떤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가모니가 모든 인류에게 소망과 희망을 주지 못했습니다. 석가모니는 모든 인류에게 소망과 희망을 주기는커녕, 석가모니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서 뼈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친히 증명해 주셨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나, 엄청난 부를 가진 부자나, 아무리 힘이 센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신 분이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씀하신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나는 조금 있으면 죽었다가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난다.”고 수차례 말씀 해놓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은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손가락질 당할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일을 많이 행하고 수많은 훌륭한 말씀을 가르쳤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거짓말쟁이로 치부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동안 가르치신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이 전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확실히 증명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영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처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들도 부활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첫 열매가 맺히면 둘째 열매, 셋째 열매, 수백, 수천 개의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처음으로 길을 열어놓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요한복음 11장 25절부터 2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육신이 죽을지라도 영혼은 결코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에도 부활의 능력과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이 아침에 단순히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지식만을 가지고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종교 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일화입니다. 그는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면 죄가 용서된다고 하고, 일부 성직자들만 성경을 가지고서 말씀을 잘못 가르치며, 신성한 성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성직매매 등, 완전히 타락한 카톨릭과 싸우느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기진맥진하게 되었습니다. 갈수록 생명의 위협이 가중되고 일이 힘들어지니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의기소침하여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완전히 탈진하여 무기력한 상태에 있는 그를 지켜보던 그의 아내는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좌절하여 서재에 앉아 있는 루터 곁에 상복을 입은 아내가 통곡을 하며 나타났습니다. 루터는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니, 여보 누가 죽었소?” “예,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는 거요?” 그 때 루터의 아내가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 계시다면, 오늘 당신이 이렇게 맥없이 앉아 있을 리가 없잖아요?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이구, 아이구, 하나님이 죽으시다니....”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의 하나님은 죽으셨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까? 여러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내팽개치고 여러분 혼자 삶을 살려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의 삶의 현장에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모시고 함께 동행 하고 살아가십니까? 주님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를 찾아가셔서 제자들을 만났던 것처럼, 지금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무덤 저 건너편의 놀라운 소망을 약속하실 뿐 아니라, 동일한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을 치유하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갈릴리에서 만나자
마 28:1-10 / 안효관목사
우리 서로에게 인사합시다. “아나스타시스.” 헬라어로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대학 강의실에서 무신론자인 교수가 학생들을 앞에 높고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고 설파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논리로 부활에 대해서 기록한 성경의 말씀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증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학생들은 모두가 숨을 죽이고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있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교수는 의기양양하게 제자들에게 “이제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이 얼마나 거짓인지 알겠지?”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강의실 한 구석에서 한 학생이 조용히 읍조렸습니다. “아나스타시스, 아나스타시스.” 아무리 교수님이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고 논리적으로 증명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자신의 마음 속에서 부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금새 다른 학생들도 “아나스타시스”를 따라서 외쳤습니다. 강의실은 금새 ‘아나스타시스’라는 외침으로 가득차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고 열변을 토했던 교수는 얼굴이 빨개지며 강의실을 도망치듯 빠져나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부활은 인간의 논리로 설명되는 세상적인 이치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거짓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 속에 오늘도 살아계신 그 주님은 분명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었던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시던 날,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여인들이었습니다. 여인들은 걱정하며 무덤을 찾았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이른 아침에 여인들은 무덤을 향하여 가면서 ‘무덤을 막고 있는 그 큰 돌문을 어떻게 열 수 있겠나’ 하는 것 때문에 걱정하며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에는 무덤의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시체로 누워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여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무덤을 지키고 있는 천사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이런 말을 전해 줍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여인들은 이 놀라운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달려가던 중, 이번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뵈옵게 됩니다. 반가움에 겨워 주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를 드리는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도 주님을 뵙기 원하여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새벽같이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을 만난 부활의 주님은 왜 다른 말씀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해다오’ 라는 말씀만 하셨습니까? 여인들에게도 무어라 다른 하실 말씀도 많을 텐데, ‘평안하뇨’ 인사 한마디 하시고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해라’ 하는 부탁의 말씀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만남의 장소를 갈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갈릴리는 빈민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가장 큰 도시였던 로마나, 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서 만나자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학문과 예술의 도시로 알려진 아테네로 가자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죽음과 무덤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이 거룩한 날 아침에 주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만날 첫 번째 장소로 하필이면 갈릴리를 선택하셨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신 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제자들에게 원점으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고향이자 제자들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을 시작한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셨는데, 그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불러 훈련시키셨고, 갈릴리의 온 회당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의 공생애 가운데, 절기를 지키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 외에는 거의 모든 시간을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사역의 출발지였고, 또 3년 동안 공생애 내내 사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이 갈릴리는 출발의 장소이고 신앙의 원점이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난 곳이 갈릴리였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처음 이적을 목격하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곳도 또한 갈릴리였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갈릴리에서부터 푸른 꿈을 안고 인생을 새롭게 출발했고, 새 시대를 건설해야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갈릴리는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신앙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주님을 만나서 제자의 삶을 시작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불러주셨다는 사실에 감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청춘과 일생을 다 바쳐 주님을 섬기리라 다짐도 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가 버린 지금 그들은 어떻게 변해 있습니까? 십자가 사건을 전후해서 그들의 꿈은 산산이 부셔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열정도 식어버렸고,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공포만이 가득한 나약한 패배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그들은 베드로를 위시해서 모두 “우리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지금은 모두가 주님을 버린 배신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자신들의 모습은 그들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실패한 사람들이요, 스승을 배신한 사람들이요,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시작해 보자’는 것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출발해 보자’는 것입니다. ‘지나간 날들의 실패와 좌절은 다 잊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갈릴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실수와 과오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땅에 40일 동안 계시면서 수차례에 걸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단 한번도 그들의 실수와 과오를 책망하시거나 꾸중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나약하고 비겁한 행동을 비판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다시 출발하자고 깨우쳐 주셨을 뿐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믿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도 나는 너희들을 믿는다’ 하는 제자들에 대한 신뢰가 들어 있는 말씀이 “갈릴리로 가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의 형편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자기 자신들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감히 나설 수 없는 신세라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제 도저히 주의 제자로 감당할 수 없으니 고기나 잡으러 간다,’ 그러고서는 갈릴리 바다로 가서 그물 던지는 어부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들은 다시금 주님의 제자로 쓰임 받기에 적절한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비겁하고 무기력하고 나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예수님이 제자라고 믿고 일을 맡기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갈릴리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시작해 보자는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너희들을 믿고 있으니 새롭게 출발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갈릴리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원점에 서서 새롭게 출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우리도 실패했습니다. 배신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등을 돌리고 비겁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다시 주님의 제자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지난날들의 과오를 묻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신뢰하시고, 우리에게 큰 기대를 걸고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새로운 신앙의 출발점인 갈릴리에서 새롭게 출발하도록 우리를 불러 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여러분, ‘갈릴리로 가자’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여 우리 신앙의 원점에 서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능력을 덧입어, 더 힘찬 모습으로 신앙의 행진을 계속해 나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려운 이웃에게로 가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땅은 세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가장 남쪽 지방은 유대 땅입니다. 그리고 중부 지역은 ‘사마리아’라 불리는 지역입니다. 그 다음 북쪽 지역을 갈릴리 호수가 있는 지역이라 하여 그곳을 통칭해서 ‘갈릴리’라고 불렀습니다. 중부지역인 사마리아는 과거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혼혈인들이 된 사람들이 많아서 유대인들로부터 완전히 이방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이방인들보다 더 좋지 않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반면 북쪽 갈릴리 지방은 법적으로나 혈통상에 있어서 하자가 없는 유대인 지역입니다. 그러나 혈통상으로 정당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 갈릴리 지역은 권력이 없는 서민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는 힘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요즘으로 말하면 달동네와 같은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은 가난했습니다.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억압과 수탈을 끊임없이 당해왔고, 모든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땅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정치와 문화 그리고 종교의 중심지로 모든 권력과 부와 명예가 결집된 곳이라고 한다면, 갈릴리는 변두리 인생들이 모여 사는 한(恨) 많은 사람들의 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리 사람들이 더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예수님을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기만 하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갈릴리 어디를 가나 예수님은 열광적으로 환영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만일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시면 갈릴리 사람들의 시대가 이 땅에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 동안 소외되고 억압당하고,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 서러움을 받아 온 갈릴리 사람들은 이 갈릴리 출신의 예수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속국이 되어 당하는 서러움과,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한이 가슴속에 가득 맺혀 있는 이 갈릴리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소망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갈릴리 사람들의 희망이며 미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이 되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다 포기하시고, 어이없게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처형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갈릴리 사람들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철저히 절망했고 좌절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진리가 거짓에 의해 패배당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 가슴 깊이 상처가 남아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가서 그들을 위로하자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권력도 없습니다.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도 없는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자고 하셨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먼저 실망한 자들 곁으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눈물 흘리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가진 것 없어서 멸시받고 굶주림에 지쳐 있는 그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아픔을 껴안고 함께 울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가진 자, 그래서 아무 것에도 부족함이 없다고 배 두드리고 누워있는 사람들에게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하고 멸시받고 서러움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삶의 고통을 겪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함께 갈릴리로 가자’고 요청하십니다.
이 주님은 오늘도 우리 곁을 찾아오십니다. 생활에 찌들리고, 어려운 생활고에 눈물을 뿌리며, 하루 하루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오늘 우리 곁에 다가오셔서, 잃었던 용기를 되찾게 해 주십니다. 꿈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꿈을 주시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내일을 보장해 주시면서, 믿음 위에 굳게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어려운 생활 때문에 힘들어하고 계십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도 비천한 나의 자리에 오실 것입니다. 아직도 풀지 못한 마음의 상처와 아픔, 한(恨)을 안고 사시고 계십니까? 갈릴리에 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내 마음의 상처에 찾아오셔서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아픔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아직도 네 안에 감추고 있는 한(恨)을 꺼내 내 어깨에 내려놓으라.’고 사랑스레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이 아침에 만나 뵙고 힘든 생활 속에 용기를 주시는 그 사랑을 체험하시고,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득 안고 기쁨으로 사시길 축원합니다.
실패와 아픔의 현장인 갈릴리에서 우리를 만나주신 부활의 주님은 이제 우리에게 ‘네 이웃의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우리는, 부활의 감격과 주님이 주시는 용기를 가지고 아직도 갈릴리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보다 먼저 그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려운 이웃이 있는 갈릴리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자신도 힘이 없고 가진 것 없지만, 우리보다 더 어려운 이웃이 아직도 갈릴리에는 많이 있기에 우리를 그곳으로 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실패와 좌절의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육체의 질병으로 인해서 우리와 함께 부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 가득한 얼굴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많은 것을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실패하고 좌절 속에서 주님을 만난 그 감격과 기쁨을 안고 그들에게 찾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서 그들을 위로해 주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언가를 잔뜩 안고 가서 풀어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우리에게 있는 것, 그것을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 가지고 가면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기쁨이 있으면 그 기쁨을 가지고 가서 나누어 주면 됩니다.
우리 주위에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우리의 형제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부활의 주님을 그들에게 알려주는 길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나누어야 합니다. 어떤 모양 어떤 방법으로든지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멀리 가서 부활의 기쁨을 나누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가장 내 가까이에 있는 이웃에게 기쁜 마음으로 가서 마음껏 그들을 축복해 주고 부활하신 주님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기쁨을 안고 가서 주님의 사랑과 평강과 기쁨을 전해주는 그 자리가 우리에게 또 다른 갈릴리가 되어 그곳에서 우리 보다 먼저 가 계신 주님을 만나 뵐 수 있는 기쁨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외형상으로 보면 갈릴리는 초라한 고장이요, 없는 사람이 사는 버려진 땅입니다.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갈릴리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곳은 그들에게 신앙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주님의 한량없는 위로와 힘을 공급해 주는 역사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고통과 좌절 속에서 신음하고 있기에,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그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 갈릴리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겠다.’는 말씀을 남겨두고 갈릴리에 가 계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오늘 우리에게도 그 갈릴리로 오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 초청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갈릴리를 향하여 우리의 발걸음을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그곳에서 잃어버렸던 신앙의 용기를 다시 얻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우리까지도 사랑하셔서 사용하시고 여전히 우리를 믿어 주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갈릴리 사람들과 같이 고통과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나누어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확실하게 만나는 길입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갈릴리에서 만나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새로운 사명을 맡겨 주실 것입니다. 이제 갈릴리에서 새롭게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새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사명을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그 능력을 덧입어서 날마다 승리의 걸음으로 세상을 향하여 힘차게 나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과 함께 계시는 주님을 우리의 갈릴리에서 만나시는 기쁨이 넘치시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마 28:1-10 / 이필재목사
염세주의 철학에서는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때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태어났으면 가장 빨리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은 오래 살수록 고난이 많아지도록 되어 있다는 논리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몸에 건강이 오래 살수록 점점 더 나빠지고 번민이 많아지기 때문에 인간은 세상에 존재할수록 고난만 커지도록 되어 있다는 말을 합니다. 나중에는 우리가 앉았다 일어나는 것조차도 힘이 들어 “아이고, 다리야.”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되면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는 그런 때가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시한부 인생을 삽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가는 길을 나도 갈 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체 가운데 우리 인간만이 언젠가는 내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간다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뜻이 있고 그 자체가 인간 고난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음에 대한 일반적 진리가 나타납니다. “순서대로 왔다가 순서 없이 가는 것이 인생이고 누구든지 가야 되는 숙명적 사건이고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자기 몫이고 내 의사대로 연장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으며 예고를 하지 아니하고 찾아온다. 그리고 이 사실은 누구나 다 싫어하는 사건이다. 슬픔과 공포가 허무감을 주는 인간 최대의 적이 곧 바로 이 사망이 된다.” 차라리 다른 동물들과 같이 죽음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그냥 살아가다가 그냥 죽으면 오히려 행복할 지도 모릅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죽음의 사건을 미리 알 수 있는 지식을 허락하셨는가? 그 이유는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고 영생의 교리에서 찾을 수 있는데 미리 알려주신 것은 미리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됨의 가치가 죽음의 가치를 미리 알기만 하고 해결 방법이 없을 때 인간됨의 가치는 무가치하다. 분명히 죽음을 초월하는 어떤 능력과 영생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미리 알려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삶과 죽음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정의를 가지고 있죠?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지상에서의 모든 사명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비록 일찍 갔다고 하여도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섭리는 거기서 끝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잘 믿고 살다가 가신 모든 형제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기 사명을 완수하고 가신 분들이 됩니다. 반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일이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비록 나이가 100세가 되었어도 그래도 무엇인가는 내 인생의 영적 의미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인간 예수의 죽음과 하나님 아들로서의 부활 사건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이 부활 사건을 우리가 정의할 때, 인류의 역사 안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사건이 더러 나타납니다. 나사로도 죽은 지 며칠이 되어 썩어 냄새가 나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다시 살려내는 그런 기록이 나타나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 복음서 기록을 볼 수 있고, 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장례식 과정에서 예수를 만나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기 편하게 편의상 부활했다고 하는 것이지 진정한 부활의 의미는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런 사람들은 다시 살아나기는 했어도 얼마동안 살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이 부활은 한번 부활한 이후에 영원히 다시 죽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를 말할 때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2,000년 전 예수의 생존시 3년 동안만 존재하다가 소멸된 종교활동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마지막으로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일할 사람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 성경의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수제자의 평가를 받던 베드로마저도 어느 틈에 예루살렘을 도망쳐서 나라의 끝인 갈릴리 호수에 와서 옛날 직업 어부의 생활로 신속하게 돌아간 내용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무덤같이 되어버린 제자들의 사명감이 다시 소생이 됨으로 복음 전파가 시작되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대한 몇 가지 정리가 필요합니다. 가장 기억해야 될 부활 사건의 진리는 오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사건은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미리 선포하신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니” 제자들에게 분명히 죽고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복음으로 가면 8장 31절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또 마가복음 9장 31절에 가면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이렇게 또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으로 가면 24절 7절에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분명하게 예수님이 선포하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예수를 죽인 사람도 그 말씀은 기억하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27장 62~64절에 보면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예수의 예언은 예수를 죽인 사람들까지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공식화된 주님의 예언 발표였습니다. 예언의 말씀대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부활은 미리 말해준 공식 설교였습니다.
예수님의 예언 설교는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것이 있고 긴 시간에 이루어진 것이 있고 아직도 기다리는 것이 있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예언하십니다. 아주 짧은 시간을 예언합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네가 나를 부인할 것이다.” 베드로가 죽어도 그런 일은 안 하겠다고 말했지만 몇 시간 만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베드로가 주님에게 그런 경고를 받았을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몇 시간을, 새벽이 지나갈 때까지만, 닭 울기까지만 긴장했을 것 같은데도 그렇게 못하고 예수님의 예언대로 몇 시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예언의 능력입니다. 열두 제자를 상대로 예언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갈 것이다.” 아무도 그 말씀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다가오니까 말씀대로 다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가룟 유다에 대한 예언도 아주 분명하게 했습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누구입니까?”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그러면 유다가 그 말을 듣고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을 고쳐먹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되는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돈 받고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그런 예언들은 몇 시간, 혹은 24시간 안에 성취된 예언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에 성전 건축의 웅장함을 자랑했습니다. “이 성전은 46년 걸려서 건축한 이러한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예언하셨고,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질 것이다.” 몇십 년 후에 로마군에 의해서 그대로 또 성취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직도 기다리는 예수님의 예언이 있죠? “내가 다시 오리라.” 재림 예언입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말씀을 복음으로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려는 마태의 강조점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예언 말씀을 초점화하는 것으로서 “그가 어떻게 살아났다는 것이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에 대해서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나이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다.” 그것이 마태의 강조점입니다.
부활 사건의 두번째 특징이 나타납니다. 아무도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평소 예수님을 가깝게 모셨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을 보려고 왔다고 그랬습니다. 마가복음은 좀더 자세하게 이들의 목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한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유대의 장례 문화는 납골당 문화이기 때문에 무덤의 관 뚜껑만 보면 시체는 언제나 볼 수 있는 문화로 오랫동안 내려왔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신 것도 그런 환경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지금 마리아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것조차도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이 아닙니다. 죽은 시체이지만 향품이라도 발라드리려고 안식일이 지나간 밤중을 기다렸다가 안식일이 해제되는 시간인 새벽을 이용해서 평소 주님을 향했던 아름다운 여인들의 마음의 표현이 이렇게 나타난 것뿐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기대한 사람은 하나도 안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16장 11절에 보면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리라 하신 그 시간의 개념이 “내가 3년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아니면 “30년 후에 살아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모르겠는데 3일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시간의 길이를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그 말을 어떻게 신뢰해야 되는가? 적어도 그 3일이라는 시간은 기다렸어야 합니다. 그 짧은 3년이 아니고, 30년이 아닌 3일의 약속을 한 사람도 믿지 아니했다는 것이 예수 부활 사건의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더구나 열두 사도는 지난 3년 동안 예수님 주변에서 그를 통해서 표현된 수없이 많은 기적 창출의 현장 목격자들입니다. 베다니의 나사로가 동네 친구였는데 죽어서 무덤에서 썩어 냄새가 나는 현장 상태에서 소생이 됩니다. 권세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서 수많은 동네 사람들이 조문객으로 와서 헌화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살았던 현장에 그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나인성이라는 동네 청년 장례식은 행길가에서 있었던 일로 예수의 말씀에 의해서 장례 운구 행렬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소생해서 살아났잖아요?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이 오병이어를 가지고 5천명 이상이 먹고 열두 바구니나 남은 것을 거둔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 바로 본인들입니다. 그러면 그 많은 초능력 체험을 보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렇게 많은 시간에 “3일 후에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을 한 사람도 믿을 수가 없었다는 이해가 어려운 상황이 부활 사건의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우리 갈보리교회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수준만 하여도 그렇게 많은 일을 우리가 주님과 함께 체험하고 나서“내가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은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떠나지 아니하고 3일 동안 그 자리에서 금식을 하면서 무덤을 지키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길어야 3일인데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런데 예수님 주변의 그 많은 제자들 가운데 하나도 그 사실을 믿지 않고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오늘날 2,000년 지난 예수의 부활 사건을 세상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누가 믿느냐 믿게 하여 주는 자만이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의 자리에서 살아난 사람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불치의 질병에서 현장 치유를 받았는데, 기적 체험자가 많았는데 그들 중에 하나도 믿지 않았어요. 예수님을 통해서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듣고 이는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하던 은혜 받은 자들 가운데도 하나도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신뢰가 없었어요. 그것이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 다음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당시 사람들이 확인된 사건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약 300년 동안 계속해서 박해의 시대를 살아왔던 것이 교회사입니다. A. D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 때 비로소 박해가 사라지고 숨을 쉬고 나왔습니다. 300년 이상을 끝없는 박해 속에서 기독교가 살아왔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후 유대 나라 안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로 직결됩니다. 초대 교회 스데반 집사 는 돌에 맞아 현장 직결 처형되었어요. 야고보도 순교당하고 베드로 투옥되고……. 견딜 수 없던 성도들이 이웃 나라 다메섹으로 탈출하였더니 사울이 그들을 체포할 수 있는 법적 영장을 발부 받아 군사들을 이끌고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베드로서를 보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끝없는 박해 역사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생사의 갈림길에 서면서 어떻게 초대 교회 신자들은 날마다 숫자가 늘어 가는가? 무슨 힘이 그들을 죽음을 각오하게 했을까? 적어도 300년이라는 긴 역사를 끝없는 박해의 역사를 살아왔는데 왜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아졌는가? 예수 부활의 목격자들의 증언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이렇게 말했어요. 나중에 예수의 증언자가 된 이후에 예수에 대해서 증언을 할 때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태반이나 살아있다. 그러면 그들의 증언을 어떻게 할 것인가? 목격자들의 증언은 진리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들의 역사에서 아주 재미있는 동화책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 뜻이 무엇인지 다 기억합니다. 목격자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목격자들의 증언의 힘이 실려서 어떤 핍박과 박해가 다가와도 보이지 않는 힘으로 확산되어서 그 중에서도 계속해서 복음은 확산된 것입니다. 오늘 10절까지 읽었는데 11절 이하를 계속 읽어 가면 예수님의 무덤을 굳게 지키던 로마 현역 군인들의 증언이 나옵니다.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이것은 파수꾼들의 양심선언이에요. “여보시오. 우리는 예수의 무덤 지키는 현장 체험자요. 빌라도 총독의 현장 임무 수행자요. 잘 지키고 있었소. 그런데 그 예수는 다시 살아났소.” 그러면 대제사장들이 할 일이 무었입니까? “아,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 거요?” “아, 그러면 그는 정말 메시아요. 우리가 잘못한 거요. 가자! 부활의 메시아를 맞으러 가자.” 해야 되잖아요? “돈 주면서 거짓말해라. 너희들이 잘 때 도둑질해 갔다고 그래라.” 안 믿을 사람은 재림주가 오셔도 안 믿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4~17절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9절 오늘 말씀에 여러 여자들이 예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고 그랬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3절에서 33절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마가복음 16장 14절 열 한 제자가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누가복음 24장 41~42절 제자들 앞에서 육체 부활의 증거를 구운 생선을 잡수시면서 증거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갈릴리 바닷가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 베드로와 대화하시고 고린도전서 15장 6절의 기록은 오백여 명이 일시에 보는데서 승천하셨다 그랬습니다. 이 목격자들의 증언이 핍박을 무릅쓰고 예수의 복음을 확산시킨 것입니다. 본 자는 말을 해야 합니다. 목격자들의 현장 목격은 진리입니다.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부활 사건에 대해서 반대의 논리는 2,000년 동안 끊임없이 있어왔습니다.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L. 월리스의 작품! 그는 기독교의 진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허구성을 만들기 위해서 책을 쓰기 시작했어요. “예수의 부활은 허구성이다!”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서 예수의 부활의 허구성을 드러내려고 작업하는 도중에 성령을 체험했어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부정하기 위해서 쓰던 글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쓰는 글로 바뀌게 되었으니 그것이 그 유명한 “벤허”라는 작품이에요. 필라델피아에 가시면 “불멸의 네 군목”이라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해군으로서 전쟁 도중 미국의 군함 한 척이 바다에 침몰하게 되었을 때 모든 수명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살기 위해서 바다로 탈출했으나 구명조끼가 모자랐어요. 그런데 그 함대에서 장병들의 신앙을 위해서 일을 하던 네 명의 목사, 군목들이 자기들이 입었던 구명조끼를 모두 벗어서 다른 병사들에게 입혀서 탈출을 시키고 네 명이 갑판 위에서 손을 잡고 “우리는 죽지 아니하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배와 함께 침몰 당하여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영원히 살아있는 “불멸의 네 군목” 이라는 기념관이 세워졌어요.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철학의 도시 고린도에 가서 전도할 때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는 거짓말쟁이로 탄로가 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가 될 것이다.” 그렇게 말했어요. 마르다를 향해 예수님이 질문하셨어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렇게 믿으시는 분들은 “아멘”합시다. 할렐루야!
부활의 증인
마 28:1-10 / 강준민목사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를 보면 고귀한 모든 것은 작게 시작합니다. 첫 번 성탄절은 아주 작게 시작했습니다. 작은 마구간, 작은 구유에 누이신 작은 아기 예수님, 모든 것이 작았습니다. 첫 번 부활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주 조용했습니다. 조용한 새벽 미명에 부활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그리고 작은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식은 전해졌습니다. 부활의 아침을 맞이한 무명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부활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음질하며 무덤을 떠났습니다. 무슨 능력이 이 두 여인을 달음질하는 부활의 증인으로 만들었을까요?
1. 부활의 증인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 올 수 있었던 첫 번째 능력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 나오는 다른 마리아들과는 달리 일곱 귀신들린 여인이었고(눅 8:2) 창기였습니다. 육체도, 정신도, 영혼도 철저하게 타락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마리아에게 들어가면서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무덤을 향해 앉아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랑은 두려움을 정복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경험할 때,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2. 부활의 증인에게는 기쁨의 능력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큰 기쁨으로 무덤을 떠나 부활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음박질하고 있습니다. 두 여인이 경험한 큰 기쁨은 부활의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다시 찾은 기쁨입니다. 극진한 사랑을 베푸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막달라 마리아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랑하는 주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막달라 마리아는 큰 기쁨을 누렸던 것입니다. 상실한 것을 회복했을 때 누리는 기쁨이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부활의 큰 기쁨은 바로 상실한 것을 되찾은 회복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안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시길 바랍니다.
3. 부활의 증인에게는 경배의 능력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은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축복과 능력은 예배를 통해 옵니다. 능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부활의 능력이 있으십니다. 능력을 구하십시오.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을 사모하십시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 일으킨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롬 1:4).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해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8). 우리에게도 능력이 필요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능력을 소유한 부활의 증인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길이 끝나는 곳에 새로운 길을 예비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보십시오. 십자가는 막다른 길입니다. 그런데 그 막다른 길 저편에 부활의 새로운 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절은 회복의 절기입니다. 고갈된 능력을 주님과 연합함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달음박질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부활의 현장에 나타난 이야기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죽으신 주님이 다시 사신 기쁨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세상과 역경을 이기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기쁨이 충만한 생애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마 28:10 / 고흥식목사
“부활”이라는 단어는 우리 기독교에만 있는 단어입니다. 타종교는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다시 살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사셨습니다.
중국의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도 사람이 죽은 다음의 세계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인 자사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겠습니까?”라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生而不知 死後皆知(생이부지 사후개지) - 살아있는 것도 다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은 다음을 알 수가 있겠는가?” 불교의 석가모니도 사람이 죽은 다음에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문제를 “人人皆死 家家有喪(인인개사 가가유상) - 사람마다 다 죽게 된다 어느 집이나 다 초상이 나게 된다. 生者必滅(생자필멸) -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멸망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무덤도 있고, 석가의 무덤도 있고 마호메트의 무덤도 메카에 있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 무덤이 빈 무덤이 되고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믿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수님처럼 마지막 날에 부활합니다.(고전 15:20)
부활절 아침 주님의 큰 소망이 각 가정에 넘치길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에게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산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마 27:63) 그래서 그들은 총독에게 가서 사흘까지 그 무덤을 굳게 지켜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 생각에 혹시 그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해 간 후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셨다”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유혹될 것이기 때문에 그 시체를 단단히 지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마 27:64)
총독은 한 소대의 군인을 시켜 파수하게 했습니다. 15명이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1톤짜리 돌을 옮겨 무덤입구를 막고, 아무도 이 돌문을 못 움직이게 하라는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관인을 찍어 인봉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조작 못하도록 군인들이 굳게 무덤을 지킨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밝히 증명해 주는 자료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했던 어려움이나 힘든 장애물들은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모든 결박을 풀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마다 "예수 부활하셨다 - 아타나시스”라고 인사했고, 저들이 잠자다가 일어나서도 “아타니시스”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인사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굳게 믿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역사는 사실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정확한 표징은 인류사에서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기절한 것인데 무덤에서 회복해서 걸어서 나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심은 로마군인들이 공적으로 확인했고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요19:33~34) 예수님 부활을 부인시키려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가져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마27:64)
예수님은 성경대로 사셨다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것입니다.(고전 15:6) 부활하심을 확실히 아는 것은 사람의 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겁쟁이 베드로가 군인들 앞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할 수 있겠어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겠습니까? 바울도 예수님의 부활을 보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는 포행 자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 즉시 회개합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이성과 지성을 버리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데 목숨을 걸고 로마의 단두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옥스퍼드 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현대 역사학의 기초를 썼습니다. 박사는 영국 외무부 연구자였고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그는 “역사 연구(A study of history”라는 12권 되는 책을 쓰면서 맨 마지막의 결론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더 이해할 수 있는 표증은 인류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맺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이들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는 용서치 않고 반드시 보응 하시고, 의인은 살아 인생의 죽음이 끝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누구나 이 땅에 살다가 죽을 수 있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다시 삽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우리가 부활하여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살전 4:16)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없어질 이 세상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일을 더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프랑스의 절대 군주인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니라”를 외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다 파리 탑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신앙인 “세오조프 체크”는 감옥에 갇혔어도 감옥 안에서 기도합니다. 부활절 아침에 그는 찬송을 했습니다. “할렐루야 구주 예수 부활하사 사망 권세 이겼네” 높은 파리탑에서 큰소리로 부르는 소리를 들은 루이 14세는 충격과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석방시켰습니다.
오늘 어떤 모습, 환경으로 묶여있습니까? 때로는 질병으로 묶여 있을 때도 있고 사람에게, 물질로, 가정에, 사업으로 묶여 있다 해도 주님께 맡기시고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가서 내 형제에게 전하라
마 28:1-10 / 김태한목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서움과 두려움 속에 있는 여자들에게 “평안하뇨?” 하고 물으셨습니다. 2003년 부활절 아침에,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안을 전합니다. 여러분의 심령 속에, 가정에, 그리고 온 누리에 주님의 평안이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평안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I give you my peace.).”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이 누리시던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서로 옆에 앉으신 분들에게 주님의 평안을 전해 주십시오. 서로 “Peace be with you!” 혹은 “주님이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하고 평안을 빌어 주십시오.
부활의 현장을 목격하고, 부활의 첫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여자들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제일 먼저 부활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천사들은 하나님의 메신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들에게 예수님은 부활하셨다는 메시지를 전해주셨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말씀이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누가복음 24:5-6).” 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느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이니까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부활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을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반에 좀 지능이 뒤떨어진 영수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따로 그 아이에게 “너도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부활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을 가져 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다음 주일에 아이들은 제각기 준비한 것을 들고 왔습니다. 어떤 아이는 그림을 그려왔고, 어떤 아이는 예쁘게 만든 계란을 가져 와서 선생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선생님, 영수는 이것을 가져 왔대요.” 하면서 킥킥거리고 웃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보았더니 그 아이가 손에 무엇을 들고 있습니다. “그래? 너는 무엇을 가져 왔니?” 하고 물었더니 그 아이가 “저는 상자를 가져왔어요.” 하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선생님은 “얘가 또 말을 잘 못 알아 듣고 엉뚱한 것을 가져왔구나.” 하면서 “그래? 왜 상자를 가져왔니? 그 속에 무엇이 들었니?” 하고 물었더니 그 아이가 “상자 속에 아무 것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까 그 속에 아무 것도 없지 않아요?” 하는 것입니다. 그 주일학교 선생님이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서 “야, 영수가 오늘은 참 좋은 것을 가져왔구나. 맞아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까 그 속에 아무 것도 없지 않아요?” 하고 그 아이를 칭찬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해서 참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는데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님이 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면 왜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면 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합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면 왜 우리의 삶에 변화가 없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면 왜 낙심(落心)합니까?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고, 말로는 부활 찬송을 부르면서도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부활의 소식을 들은 여자들을 보세요. 그 여자들의 얼굴이 어떤 얼굴이었습니까? “두려움과 기쁨”의 얼굴이었습니다. The New Living Translation Bible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y were very frightened but also filled with great joy, and they rushed to find the disciples to give them the angel’s message.” 여자들이 무서워 했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 무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부활의 메시지를 들은 여자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들이 부활의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서 뛰어 갔다는 것입니다. 너무 기뻐서 여자들은 달려갔습니다. 어서 이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기 위해서 달려갔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들의 얼굴은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왜 요? 우리는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3년 동안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3년 동안 그분을 따라 다녔습니다. 나름대로 그분을 사랑했고, 그분에게 거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나그네 이야기 아시지요? 그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께 있었던 일이오.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놀라운 일들을 베풀어 보인 예언자요, 권능 있는 선생으로 높이 존경을 받는 분이었소.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붙들어 로마 정부에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였소.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고 생각해 왔소(24:19-21).” 예수님의 죽음으로 낙심한 이 두 제자는 터벅터벅 힘없는 발걸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보았자 무슨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삶의 무슨 특별한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삶의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도 붙잡고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사니까 사는 것이지 삶의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 여자들에게는 부활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이제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할 말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기쁨과 생기(生氣)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바빴습니다. 그들에게는 삶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신다고 했습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갈릴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곳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갈릴리는 우리들의 삶의 터전이요 현장입니다. 우리들의 직장이 있는 곳이요, 우리들의 연구실이 있는 곳입니다. 갈릴리는 우리들의 캠퍼스가 있는 곳입니다. 갈릴리는 우리가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곳이요, 오고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이요,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걱정하는 삶의 애환(哀歡) 묻어나는 곳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희들의 삶의 현장에서 너희를 기다리겠다. 나를 만나려거든 그곳으로 오라!” 이런 말 아닙니까?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아무 것도 보장할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surely I am with you always, to the very end of the age., 마태복음 28:19-20).” 이 말씀과 갈릴리에서 너희를 기다리겠다고 하시는 말씀이 묘하게 일치(一致)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생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그 말씀이 나오지요?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6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같은 사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베드로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했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마태복음 16:23).”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요한복음 말씀에는 묘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 만일 내가 가지 않으면 보혜사(돕는 분)께서 오실 수 없다. 내가 가야 그 분이 오신다. 내가 가서 그분을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6:7).”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으로 제자들의 삶의 현장 속에 임재하십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는 성령께서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능력을 주시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이라야 바울이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소위 “if clause”를 말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13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선교(宣敎)하는 것도 헛되고, 또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될 것입니다 (14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한다면 우리가 주을 위해 싸운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차라리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면서 사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32절).” 바울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선교도, 우리의 헌신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니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왜 우리가 선교를 하겠습니까? 왜 믿음생활을 하겠습니까? 왜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유가 없습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가능하게 하고, 선교를 가능하게 하고, 헌신을 가능하게 하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하는 힘과 능력을 줍니다.
바울은 동역자들과 선교 사역을 하면서 이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의 모든 선교 사역을 가능하게 하시는 것은 그들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여러분 가운데 과연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까? 권력을 잡은 사람이 있습니까? 부자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어리석고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여러분을 일부러 선택하셔서 이 세상에서 현명하고 훌륭한 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하찮은 사람들을 불러 쓸모 있게 하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위대하다고 하는 자들을 아무 것도 아닌 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26-29).”
우리 믿음생활에서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일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는 것입니다. 선교 현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라는 개념이 정립된 것이 1952년 빌링겐(Willingen)에서 열린 세계 선교 대회에서였습니다. 불과 50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이미 성경에 있는 개념을 강조한 것 뿐입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린도전서 3:5-7).”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미얀마로 불리우는 버어마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은 버어마에서 37년이라는 긴 세월을 선교했습니다. 그는 버어마가 영국과 전쟁 중이던 1824-26년 사이에 말할 수없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17개월 동안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열병과 몹시 참기 어려운 더위와 굶주림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한 후에 보스턴으로 돌아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드슨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몰려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고난으로 말미암아 허약할대로 허약해져서 혼자 힘으로는 연단에 오를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서 있을 기력이 없어 의자에 앉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뭔가 사람들에게 말을 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연설이 끝난 후에 사람들은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21명의 청년들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우리가 버어마로 가겠습니다. 저드슨을 대신하여 우리가 버어마로 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렇게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 생명을 말하면서도 부활 생명을 장차 내세(來世)에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닐 뿐 아니라 믿는 자에게 주시는 엄청난 삶의 축복을 제한(制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요. 이 말씀이 저에게는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렇게 들립니까?
예수님의 부활 생명은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도 성도들의 삶 속에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선교도 가능하게 하시고, 믿음생활도 가능하게 하시고, 치유도 가능하게 하시고, 기적(奇蹟)도 행하시고, 모든 크리스찬의 삶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소식을 “가서 내 형제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내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서 너희를 기다리겠다.”는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주시는 생의 사명(使命)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생의 미션입니다. 이렇게 말씀이 분명한데도 오늘날 많은 크리스찬들이 이 말씀을 듣지 못한 채 “저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 일로 세월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고,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고 전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고 전해야 합니다.
부활의 첫 증인들이 왜 하필이면 여자들입니까? 베드로는 어디 가고, 야고보와 요한은 다 어딜 갔습니까? 큰 소리 치던 남자들은 모두 어딜 갔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여자들이 이 일에는 적격(適格)이라고 보신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말이 많지 않습니까? 남자들은 입이 너무 무거워서 탈입니다. 입이 너무 무거운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입이 무겁습니까? 좋습니다. 남의 약점을 드러내는 일에는 입이 무거워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는 말을 많이 하십시오. 입이 무거워서는 안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참지 마십시오. 흥분하십시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적합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발견되십시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우리의 얼굴은 기쁨과 환희의 얼굴이 되고, 우리의 발걸음은 빨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는 삶의 이유가 생겼고, 삶의 메시지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을 붙잡고 할 말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먹고 마시자. 내일이면 죽으리라!” 가 아니라 우리는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지 마십시오. 주님은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the firstfruits)”가 되셨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주님이 죽음을 이기셨으니 우리도 이길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으니 우리도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요한복음 16:33). 그 주님과 함께 성령의 능력 안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使命者)로 사십시오. 어떤 모양으로든지 복음과 관계된 삶을 사십시오. 복음을 위해서 공부하고, 복음을 위해서 직장을 잡고, 복음을 위해서 결혼하고, 복음을 위해서 죽으십시오.
부활을 믿는 성도의 사명
마 28:1-10 / 박덕기목사
온갖 꽃들이 만발하는 한국의 봄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봄이 더욱 아름답고 찬란한 것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부활절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약속해 주셨다. 책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새싹에 그리하셨다." 겨우내 죽은 듯한 나뭇가지에 파릇파릇 새싹이 움트는 것을 보면 새삼 생명의 신비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세 가지 특색이 있는데 1)예수님은 남자 없이 성령으로 잉태해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것이고 2)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이며 3)예수님은 죽어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이 세 가지 특색은 오직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특색입니다. 프랑스의 불가지론자 ‘탈래랑’이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고 왕에게 조언을 청했을 때, 왕은 “그대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라. 그러면 그대의 종교를 믿게 될 것이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으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고, 로마 군인들은 철통같이 그 무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원수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공적으로 죽였다고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마귀와 지옥의 세력들은 이젠 하늘나라는 이 땅에 임할 수 없다고 고함을 치고 춤을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소문은 이제 사라진 듯 했습니다.
그러나 사흘 되던 날 새벽에 여자들이 예수의 몸에 향유를 바르러 갔을 때, 하늘에 빛난 광채가 비취고 산이 진동했습니다. 그들이 가보니 무덤 문은 열렸고 파수하던 군인들은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찾아 온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여인들이 본즉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만 그 머리맡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10여 차례 이상 다시 사신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의심많은 도마에게는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시면서 까지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혹은 떡과 생선을 잡수시면서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이전과는 전혀 딴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슬퍼하던 제자들이, 참을 수 없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져있던 제자들이, 벅찬 새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패배감에 사로잡혀 몸둘 바를 몰라했던 제자들이, 승리감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제자들이, 확신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비겁하기 짝이 없던 제자들이,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새로운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박해도, 채찍도, 고문도, 위협도, 죽음까지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자처럼 담대한 사람들이 되어,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소리 높여 외쳤고, 그래서 기독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불교의 비진리성을 극명하게 밝힌 ‘극락의 불나비’라는 책의 저자 김성화 목사는 본래 불교의 승려였습니다. 그는 경북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 불계종 정토종 포교국장과 교육 국장을 역임한 불교계의 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마치 고압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 성경책에는 평소 자신이 그렇게도 염원하고 알려고 노력했던 인간의 생사 문제가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분명하게 풀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옛날 인도의 구시라 성의 시다림에서 한 젊은 과부가 심하게 애통해 함을 본 석가모니는 그 사유를 물은즉 병중의 외아들을 살려달라는 애원을 받는다. 이에 석가모니는 한번도 사람이 죽는 일이 없는 집의 쌀을 한 줌 얻어다가 끓여 먹이면 살아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후에 돌아온 그 과부는 “부처님이시여 하루 종일 다녀도 그런 집은 없어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고 고백한다. 그때 석가모니는 이렇게 가르친다. “자매여 생자필멸이라.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 인연따라 일어나 인연따라 없어지는 것이니, 너무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어떤 해결이나 변화보다는 순리적인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처방은 이와 전혀 달랐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성 과부 외아들의 애통스런 장례 행렬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에 은혜를 베푸신다. 그 외아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리신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생사문제에 근본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있다. 같은 과부의 외아들의 죽음이었는데 불교에서는 죽음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었고, 기독교에서는 생명을 새롭게 얻게 하는 기쁨을 맛보게 한다. 여기에 부활이고 생명이신 참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근본적인 생사문제에 있어서 문제만 제시하였을 뿐 그 해답의 열쇠는 주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제뿐만 아니라 해답의 열쇠까지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에도 죽음을 호령하고, 생명을 호출하는 생명의 주인이심을 입증해 보이신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향하여 “달리다굼!” 하셨습니다.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죽었던 그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었고 말을 했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관속에 시체로 누워 공동묘지로 장례 지내러 가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에게 생을 명했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관속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또 이미 죽은지 나흘이 되어버린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에게 생을 명하였습니다.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나사로는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생(生)을 명(命)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이 주인이 되십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께로부터 생명을 명령받고 일어나지 않을 자 없습니다. 사망을 호령하는 예수님! 아니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 그래서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이렇듯 그 자신이 생명이신 예수님이신지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1. 우리의 신앙이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손발이나 몸이 떨립니다. 그것은 몸의 기능이나 힘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부활 신앙이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죽을까 봐 떨고 망할까 봐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만 확실하면 떨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롬 8:35-39에“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내가 확신하나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일 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그 어떤 환경과 처지 가운데서도 자기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고백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시 사는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데 죽음이 겁날 리 없고,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주님이 계시는데 걱정될 리 없고,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받고 핍박을 받아도 힘주시고 지키시고 이기게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도 부활 신앙이 있다면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같이 실의에 빠져 공허한 삶을 살지 말고, 부활의 소망 속에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1)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내 모든 죄 다 사하시고/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후렴-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걱정 근심 다 맡겼네/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2)주안에서 거듭난 생명/도우시는 주의 사랑/참 기쁨과 확신 가지고/예수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살리.
3)그 언젠가 주 뵐 때까지/주를 위해 싸우리라/승리의 길 멀고 험해도/주님께서 나의 앞길 지켜주시리♪
2.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교회 신자들은 두 가지 사건 때문에 힘을 얻고 주님과 교회를 위해 힘써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따르고 좇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끝이 났다면, 충성을 바쳐 따르고 섬길 대상이 없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예수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들의 절망은 순간으로 끝났습니다. 새로운 희망과 감격과 충성의 대상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한 수고는 하나도 헛되지 않고 다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3. 부활 신앙의 전파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부활신앙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만난 예수, 나를 변화시킨 예수, 내 삶을 바꿔준 예수, 인생을 바꿔준 예수, 이 예수님을 전하는 삶이 진실로 부활신앙의 삶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이 뭡니까? 그것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도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하신 말씀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천사들 역시 부활의 소식을 ‘빨리 가서 전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들, 은혜받은 우리들,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들은, 빨리 가서 아직도 부활신앙을 갖지 못한 가족들에게, 친척들에게, 친구들에게, 이웃들에게 이 기쁘고 놀라운 소식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을 가진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고 내가 은혜 받았다고, ‘나만 좋다’ ‘우리만 좋다’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이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류 최고의 가장 큰 기쁜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그 말씀입니다. 죄와 죽음, 가난과 저주, 질병과 고통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함께 나누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부활의 소식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사람보다 먼저 이 기쁨을 누린 자들입니다. 총동원 전도 주일을 앞두고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영생을 얻으며 반드시 부활할 것이라고 이웃에게 힘써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운동세포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모리라는 노(老)교수, 죽음의 날을 카운트다운 하고 있는 그에게 제자 중 한 사람이 매주 화요일마다 찾아가서 함께 인생을 논하는 내용을 담은 글입니다. 그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는 수긍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을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무어 그렇게 대단히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성도들에게만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이 엄청난 기쁨이요, 소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에릭 사우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성도의 부활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멋진 말이 아닙니까?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면 먼저 떠난 부모님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먼저 떠난 내 남편, 내 아내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내 가슴을 찢어 놓고서 세상을 떠난 내 아들, 내 딸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불구의 몸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몸 안에 있는 질병을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며 그 부활을 바라볼 때마다 “그 날이 되면 나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몸을 입고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소망을 가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들이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부활 생명을 다 얻게 되시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갈릴리에서부터
마 28:1-10 / 조상호목사
‘토머스 제퍼슨’은 1800년에 미국의 3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그는 다른 미국 대통령들과 달리,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연신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 재직시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성경 구절들을 삭제하면서 다시 신약성경을 썼다고 합니다. 그가 삭제한 부분은 대부분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과 관계있는 구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질문할까요? 만약 성경에서 기적을 삭제한다면 어떤 것이 남을까요? 아마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할 수 있습니까? 또 100세 된 노인이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까? 또 넘실거리는 홍해가 갈라졌다든지,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서 200만 명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먹였다든지, 38년 동안 중풍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을 고쳤다든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남자만 5,000명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포함하여 20,000명 이상을 먹였다든지, 예수님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셨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2000여 년 전 오늘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서운 채찍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는 고난을 받으시고 지난 금요일 오후 3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유대법에는 시체를 나무에 매단채로 밤을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신21:22~23).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총독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빌라도총독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리마대 요셉에게 건넸고, 아래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자기가 죽으면 사용하려고 했던, 그러나 아직까지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던 새 무덤에 넣어 장사지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불안했습니다. 살아생전 수차례에 걸쳐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빌라도총독에게 요청하여 경비병을 세워 철통같이 지키게 했습니다. 그것도 못자라 무덤을 큰 돌문으로 막고 거기에 로마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는 인봉을 붙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방법과 인간의 힘으로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시고, 로마 병사들이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찌른 창을 옆구리에 맞으실 정도로 완전히 돌아가셨던 예수님은 당신께서 예언하신대로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날은 예수님께서 사망권세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친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해주신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날은 주님과 달리, 걱정과 두려움의 날이었습니다. 그 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 명의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료를 준비하여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돌무덤으로 갔습니다. 아마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면서도 무덤을 막고 있는 그 육중한 돌문을 어떻게 열 수 있을까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힘 좋은 제자들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하려고 했지만, 다들 도망을 가버렸을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여인들만 예수님으로 무덤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해서 보니, 커다란 돌문이 한쪽으로 굴려져 있고 무덤이 열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조심조심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은 온데간데없고 천사만 보였습니다. 당황하고 있는 그들에게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안다. 이리 와서 예수님의 시신이 누워있던 자리를 보라.“ 그리고 이어서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다같이 7절을 보겠습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여기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드신 후 감람산에 오르셔서 제자들에게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26:32) 고 하신 말씀입니다. 천사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알았기 때문에, 무덤에 찾아온 여인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해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안식 후 첫날 아침에 무덤에 찾아온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지 못하고, 천사로부터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인들은 천사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 기뻐서 급히 뛰어갔습니다. 한참 동안 뛰어가는데, 갑자기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첫 번째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평안하냐?” 이 말씀은 질문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무서워하는 그들에게 “평안이 여러분들에게 있을지어다.”라는 뜻입니다. 절망하고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첫번째 주님의 말씀은 ‘평화’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망권세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평화의 왕’(the Prince of Peace)이시기 때문입니다(사9:6). 주님은 오늘날에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지만, 참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았으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가던 중 한 농부를 만났는데, 그 얼굴에는 평화가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농부에게 평화스런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농부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내 마음은 언제나 기쁠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 날부터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결국 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과거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고 마음에 놀라운 평강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삶의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평강의 왕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참된 평강을 누리는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 있을 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놀라운 평강을 선물로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비겁하게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쳤던 일로 인한 수치심과 회한과 두려움에 싸여있던 그들을 향해 “어찌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라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지나간 허물에 대해 일체의 비난이나 질책 대신에, 오히려 “평안하냐?” “평안이 여러분들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하시며 가장 먼저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여인들은 주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 여기 "발을 붙잡았다"는 것은 왕이나 통치자에 대한 복종과 존경을 표하는 행위입니다. 즉 여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다같이 10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쉽게 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리에서 내가 보잔다’고 말하라" 주님은 "그 놈들은 더 이상 나를 볼 자격도 없다. 나도 그들을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아. 그 녀석들은 나를 배신한 자들이야. 무섭다고 다 뿔뿔이 흩어져 숨어버린 녀석들이야. 나는 그 녀석들을 포기했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서 갈릴리에서 내가 보잔다고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천사들이 알려준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께서 왜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셨을까요? 당시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고, 또 예루살렘에는 사람들도 많이 살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것을 증거하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소식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보자고 하시지 않고,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잃어버린 사명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주님의 사역의 대부분이 이루어졌던 곳입니다. 산상 설교도 갈릴리에서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신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곳도 갈릴리였고, 5병 2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도 갈릴리였습니다. 그곳에서 병자들을 고치셨고 그곳에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갈릴리는 주님께서 제자들과 처음 만나시고, 그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그 곳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주님으로부터 훈련과 양육을 받은 곳이며,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결심한 곳입니다. 결국 그곳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쳤던 제자들이 다시 돌아갈 곳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신 것은 처음 먹었던 마음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신과 좌절과 수치를 경험한 장소 예루살렘이 아닌, 소명과 양육과 사명을 받은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새출발하도록 하기 위해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갈릴리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때가 되면 고기도 잡고, 잡은 고기를 시장에 가서 팔고, 이웃들과 잔치를 하기도 하고, 가까운 친구들이 있는 곳이 바로 갈릴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단순히 일하고 먹고 친구들 만나며 살도록 하기 위해,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땅 끝까지 전해야 할 복음은 바로 갈릴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갈랄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다. 새출발은 삶의 현장에서부터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항상 삶의 현장을 중요시하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은 단순히 회당에서만 사역하셨던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현장(Marketplace)에 많은 관심을 많은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 맨 먼저 제자들에게 삶의 현장인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갈릴리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말씀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최태섭장로님이란 분에 대해서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분은 몇 년 전에 이미 천국에 올라가셨습니다. 그 분은 신앙적으로 훌륭한 장로님일 뿐 아니라, 모범적인 경영인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존경을 받았던 분입니다. 고 최태섭장로님은 우리나라 유리산업의 대명사인 <한국유리>의 회장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한국유리는 지금까지 그 흔한 노사분규 한 번 없었던 회사로도 유명합니다. 그 이유는 노사분규가 없도록 회사가 종업원들의 이익과 복지를 위해 배려를 했기 때문입니다. 최 장로님은 육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교회와 회사와 사회로부터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사랑에 빚진 자”라는 회고록을 내신 적이 있습니다. 제목과 같이 그 분은 자신을 가리켜 “사랑의 빚진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만 있으면 이 빚을 갚으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술회했습니다. 그 분의 회고록에 보면 일대 시대 때 만주에서 비누공장을 경영할 때, 중국동포 중 이씨라는 가짜 기술자 때문에 회사가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르게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씨라는 사람은 기술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자 행세를 하였습니다. 최장로님은 이씨를 믿고 비누 생산을 맡겼더니, 불량 비누가 시장에 공급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비누가 팔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최 장로님이 그를 당장 해고하려고 하자, 그는 울면서 자기 잘못을 빌었습니다. 최 장로님은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회사는 불량품을 만드는 회사라는 오명을 씻고 다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중국이 공산화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대부분의 기업인들이 그랬듯이 최장로님도 “악덕 자본주의 기업가”로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곧 인민재판을 받고 처형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러나 평소 그로부터 후한 사랑을 받아왔던 종업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를 변호했습니다. 이로 인해 최 장로님은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또 최장로님은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만주에서 무역업을 할 때 일입니다. 수십 대 화차 분의 콩을 중국인에게 팔기로 계약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콩 값이 폭등하였습니다. 계약을 어겨 콩을 다른 사람에게 팔면 계약취소에 따른 벌금을 물어 주더라도, 엄청난 이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신앙 양심에 따라 약속한 값에 콩을 전부 넘겨주었습니다. 이 소문이 중국인 사업가들 사이에 퍼졌습니다. 그 후 최 장로님은 중국인 사업가들 사이에서 신용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무역업은 더 크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최장로님은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북새통에는 빚을 갚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이 다시 수복된 후, 최장로님은 정직하게 은행 빚을 다 갚았습니다. 이것이 훗날 그 분의 신용이 되어서, 사업에 큰 도움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최 장로님은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섬기는 교회는 서울에 있는 ‘수도교회‘ 였습니다. 유신정권 당시 이 교회 담임 목사인 김상근 목사님은 반체제 운동에 앞장 서는 목사이었습니다. 정부는 최 장로님에게 김상근 목사를 교회에서 내보내지 않으면, 회사에 어려움을 주겠다고 수차례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차라리 기업을 그만둘지언정, 정의를 위해 애쓰는 목사님을 내어보낼 수는 없다”고 하며 끝까지 목사님을 지켜주었다고 합니다.
저는 최태섭장로님이 갈릴리에서 모범을 보이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장로님은 단지 말로만 모범을 보인 것이 아니라, 회사와 가정과 교회와 서울과 만주, 등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가야할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직장인에게는 일하는 직장이 갈릴리일 수 있고,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다니고 있는 학교가 갈릴리일 수 있고, 사업하시는 분에게는 사업장이 갈릴리일수 있고, 가정주부에게는 가정이 갈릴리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 갈릴리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갈릴리에서부터 새출발하시기 바랍니다. 꿈은 세계를 향하되, 출발은 갈릴리에서부터 하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이 아침에 부활신앙을 가지고 갈릴리로 가서 새로운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가 부활하셨다
마 28:1-10 / 지태일목사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장사한지 3일만에 부활하신 기쁨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보여주신 날입니다.
이 시간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 승리하신 주님께서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위에 풍성한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로 인해 돌아가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부활하셨다는 것, 이것이 사도들의 증언 내용이요,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자랑이요, 능력이요, 비밀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기쁨과 소망이 되고, 힘이 됩니다. 모든 성도들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을 주는 날입니다.
오래 전에 이야기 드렸습니다만,
어느 독실한 기독교인이 거리를 지나가다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억제할 수 없는 감격 속에서 그 그림을 쳐다보고 있는데 한 소년이 옆에 와서 "아저씨,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예수님이시고요, 십자가 밑에서 슬픈 얼굴로 바라보는 분은 예수님의 어머님이에요. 저쪽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는 거구요. 사람들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어요. 저 건너편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무덤이에요"라고 그림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며 말할 수 없는 감격 속에 있던 기독교인은 또 한번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가 소년의 신앙을 감탄하며 길을 가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갑자기 옷자락을 잡아당겼습니다. 방금 전의 그 소년이었습니다. 소년은 헐떡거리며 “아저씨, 제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무덤에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있다 할지라도 부활 사건을 모르고, 부활 사건을 믿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안믿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중요한 공문서에 반드시 찍혀 있어야 할 도장이 빠진 것과도 같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데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잇을 것이요(고전 15:17).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모든 진리를 알고 믿어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역시 헛것이요, 구원받지 못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른 현인이나 성인들과 같은 인간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같을 수 없고 비교될 수 없는 이유가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사건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사상 최대의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환상이나 착각이나 몇 몇 사람들이 지어낸 주관적인 이야기가 아님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기적의 객관적 역사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말씀합니다. 이 부활의 사건은 부활절 때마다 보여지고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람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1절의 말씀을 보면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1절).
안식 후 첫날, 지금의 주일날 새벽에 여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보러 왔습니다. 그 여인들은 돌아가신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체라도 보고 사랑을 표현하고자 무덤에 갔는데 놀랍게도 시체 대신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초자연적인 기적입니다. 자연의 수준에 머물지 않는 초자연적인 기적의 하나님이 그 여인들에게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상상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을 초월한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자연 현상을 초월한 사건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알고 만난 이후로 인간의 기대를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영적인 삶을 매일 살게 됩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행하시기 바람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보려 왔더니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어 무덤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이것은 역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로마 군병들이 무덤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더욱 빈틈없이 지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만이 무덤의 돌문을 여시고 주님을 부활하게 하십니다.
이 시간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능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막힌 돌도 제거하실 수 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습니다. 부활주일은 초자연적인 기적의 날입니다. 평범한 것을 기대한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비범한 것을 보여주시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은 초자연적인 날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날입니다.
다음으로 2절을 보면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은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지구를 흔들어서 당신의 위대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다음으로 강하고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흰 천사가 나타나자 보초를 서던 로마 군병들은 두려워 벌벌 떨며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여인들도 무서워 벌벌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려워 하는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2. 여기서 천사들이 전하여 주는 부활의 멧세지입니다(5-7절).
1) 첫 번째 멧세지는 무서워 말라는 것입니다(5절).
천사가 여자들에게 전한 부활의 첫 메시지는, “너희는 무서워 말라”(5절)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두려움입니다. 불안, 염려, 근심과 같은 종류인 두려움은 우리를 마비시키고 몸과 마음과 영혼을 깨뜨려 버립니다. 부활의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인생이 두렵습니다. 인생 자체가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까 서울에서 춘천을 오고가는 버스 기사가 마뱍을 복용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왜 마약을 복용했느냐고 물을 때 부인이 집을 나갔고 마음이 여러 가지로 뭐해서 이 생각 저 생각하다 어떻게 마약에 유혹이 손을 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생명을 태우고 오고가는 버스 기사가 그렇게 했다는 것은 더욱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걱정이나 근심을 가눌 길이 없어서 그렇게 되는 인생입니다.
오늘 부활절 아침을 맞아 힘든 인생으로 인해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이 있다면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주시는 이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너는 이제부터 두려워하지 말라.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너를 위해 무엇을 못하시겠느냐?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께서 네게 무엇을 주시지 않겠는가? 두려워 말라. 염려하지 말라.”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두려움이 완전히 제거되기를 바랍니다. 염려와 근심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서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마음속 어디선가 무서운 음성이 들리고 불안해지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움이 아님니다. 참 평안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마귀의 음성이요, 세상의 음성이요, 육신의 음성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를 두렵게 하는 세력이 밀려올 때 이렇게 명령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두려움아 사라질찌어다! 물러갈찌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시지 않고 사랑의 영을 주셨습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자신도 두려워 하거나 떨거나 의심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두려움, 염려, 근심, 의심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습관적으로 자녀를 두렵게 하는 분이 있다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자녀에게 용기를 줄지언정 두려움에 빠지도록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내나 남편에게 근심과 두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믿는 성도들, 지체들에게 주의 동역자들에게 오히려 위로와 용기를 주는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들 다 되시길 바랍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주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이기실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잇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마음속에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을 갖고 오신 분들은 바로 이 시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움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소망과 용기의 축복을 받아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 멧세지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두 번째 부활 메시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6절)입니다.
사람은 인간의 수준으로 봅니다. 그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간 것은 죽은 사람을 보러 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부어 드리러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죽은 예수를 거기 그대로 두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과 격려와 힘과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준에서 인간의 생각으로 인간의 한계 속에서 살면 두려움과 불안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사는 우리는 세상의 상상과 기대수준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셔야 되는데 거기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무덤 문을 박차고 나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활시킬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인간의 수준으로 죽은 자가 무덤에 있을 것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하지 마십시다. 인간의 수준을 초월하여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과 그 부활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세 번째 멧세지는 부활의 증거를 제시합니다.
천사의 세 번째 부활 메시지는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6절 하반절)입니다. 무덤에 들어가보니 시체는 없고 시체를 쌓았던 수의만 개어 있습니다. 말씀대로 그 곳에 누워 계시지 않습니다. 빈 무덤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빈 무덤은 여인들에게 부활의 증거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절대로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실 때는 절대로 그냥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믿을만한 충분한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불교가 기독교의 부활절은 흉내낼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덤이 있고 시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를 만든 석가모니가 뙤약볕에 피하여 보리수 나무 밑에서 깨달음에 최고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의 부처가 되기 위해 6년의 고행을 거쳤습니다. 피눈물의 고행으로서도 그의 육척단구의 몸이 죽음을 뛰어넘는 행적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는 80세의 죽어(그것도 금식으로 보리수 나무아래서 고행 해탈하고 난 뒤 음식을 물먹고 죽먹고 해서 밥을 잘 먹어야 하는데 야채 풀뿌리를 잘못 먹어 소화불량으로 죽음) 그의 무덤이 인도의 능수 해안에 여전히 있습니다. 그의 시신은 화장을ㅇ 해서 그 가루를 여덟 부족에게 보내여졌습니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무덤도 중국 산둥성 중남부에 위치한 장평량에 있고, 60세에 군대를 조직하여 메카를 무력으로 장악한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는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무덤을 장식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죽은자 가운데서 성경대로 살아나셨습니다. 증거로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보면 로란타라고 불리우는 돌로된 묘지가 있을 뿐 예수님의 시신이 없습니다. 빈 무덤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며 확실한 사건임을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 종교는 죽음의 종교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가진 부활절 신앙은 너무나 위대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나는 여러 해 동안 여러 시대를 연구하고 여러 저서에 대한 증거를 조사 연구하여 보아도 사람의 역사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다시 부활하셨다는 표증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에 대한 믿음과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십니다. 은혜를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는 내일도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보여주시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보여 주시면서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요20:27)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 나를 향한 들려주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여러분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온갖 의심과 염려와 불안을 내버리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네 번째 멧세지는 갈릴리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천사의 네 번째 부활 메시지는 “그가 갈릴리로 먼저 가셨으니 거기서, 갈릴리에서 너희가 주를 뵈오리라”(7절)입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곳입니다.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다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름으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곳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은 곳도 갈릴리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배우고 귀한 기적을 많이 체험한 곳이기도 합니다. 풍랑이는 바다위로 걸으신 곳입니다. 거센 풍랑도 주님 한번 말씀하시면 잔잔해진 갈릴리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 제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은헤의 바다가 바로 갈릴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던 그 곳이 바로 갈릴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던 갈릴리는 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분은 모태로부터, 주일학교 어린 시절에, 청년 시절에, 중년에, 노년에, 인생의 여기 저기 교회에서 주님의 은혜를 크게 받았던 갈릴리가 다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모른 채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에 빠져 죄 가운데 헤매던 여러분과 저는 어느 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곳이 바로 갈릴리입니다. 만약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왠지 무기력하고 연약하다고 느낀다면, 지금 여러분이 방황과 갈등 속에 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그 장소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곳이 어디입니까? 몇 년 전이었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이 흔들릴 때는 언제든지 옛날 주님을 만났던 그 갈릴리 언덕을 기억하시고 거기로 찾아가십시오. 첫 만남과 첫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혹시 여러분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직도 만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오늘 이 부활의 아침, 바로 이 곳이 여러분의 갈릴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혹시 신앙이 흔들리고 있다면, 혹시 헌신의 결심이 약해졌다면, 옛날 예수님을 만났던 그 곳과 그 시간을 상기하면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이 부활의 날! 여러분의 신앙이 새롭게 회복되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베드로는 닭소리만 들리면 주님앞에 무릎을 끓고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삭케오에게는 뽕나무가 있었습니다. 늘 어렵고 힘들 때마다 내가 주님을 처음 만난 곳, 그렇게 만나고 싶어서 체면도 불사하고 올라갔다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뽕나무는 그에게 갈릴리와 같았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남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고향 부모의 겉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도망갈 때 만나주셨던 벧엘을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의 갈릴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람니다.
3. 여인들의 반응입니다(8-10절).
본문에 여인들은 두 가지로 반응하였습니다. 즉 무서움과 기쁨입니다. 8절을 보면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하였습니다.
1) 먼저는 무서움입니다.
이 때의 무서움은 ‘fear’가 아니고 영어성경을 보면 ‘awe’입니다. 즉 공포가 아니라, 위대하시고 무한하신 능력의 하나님, 부활의 하나님을 뵐 때 느끼는 경외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경건한 마음입니다.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창조주, 부활의 하나님, 나는 비록 연약하고 실수와 죄가 많지만 그래도 나를 끝까지 안아주시고 인도하시고 최후 승리를 거두게 하실 그 은혜의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경외심입니다. 이 부활절 아침에 여러분의 마음에도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새롭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시기 바람니다. 부활의 주님을 경외하시기 바람니다.
2) 또한 그들에게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9절).
상상도 하지 않았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무서워할 때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러 달음질 하려할 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평안 하느뇨? 이 말은 근심이 아닌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때 9절을 보면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라” 말씀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큰 기쁨을 주심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실수하고 방황하며 할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을 때 부활의 주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새롭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실패한 인생, 우리 몸의 질병, 실패한 사업, 실패한 자녀 양육 등 어떤 종류의 실패를 겪었든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새롭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기쁨으로 가득하게 역사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소망을 주십니다. 우리의 기대 수준은 인간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언제든지 새롭게 일으켜주실 수 있습니다. 죽은 가정들, 죽은 사업체들, 죽은 영혼들을 새롭게 하시는 부활의 능력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은 이제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 역사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 여인들처럼 증거하십시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의지하십시다!” 우리가 서로서로 격려하면서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여인들에게 평강을, 기쁨을 회복하여 주실 때 여자들이 나아가 에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10절). 예수님은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을 만나 주시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부활한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나를 찾으라. 내가 너희를 만나주리라.” 말씀하십니다.
부활은 낙심한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힘을 잃었을 때 용기를 줍니다. 어둠 속에 빛을 비춰줍니다. 피곤할 때 휴식을 주십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기쁨을 주십니다.
오늘 2017년 부활철 아침을 맞이하여 바울의 고백과 같이 이제 우리의 옛사람과 모든 죄악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는 그 분과 함께 장사되었다가, 이제 그 분과 함께 새 생명을 얻은 우리 모든 성도입니다. 이제 부활의 소망을 갖고, 부활의 능력으로 최후 승리할 때까지 십자가를 붙들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시기를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