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에 유명한 이야기인지라 스포란 말을 달아야 할까 고민했습니다만
일단 저도 모르고 봤으니;; (결말은 알고 있었지만)
이 감상문은 영화 정보를 알고 보는 것에 민감한 분들에게 불편함을 끼칠
영화의 내용과 표현에 대한 묘사가 담겨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 라이트의 신작 안나 카레니나를 익무 시사로 보았습니다.
언제나 좋은 관람기회를 만들어 주시는 익스트림 무비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
조 라이트의 사극을 처음 봅니다;;;
어쩐지 서양 사극에 대해 매력을 못 느꼈거든요. 지금 돌이켜봐도 딱히 재미있게 본 영화가 없는 것 같아요.
거기다가 진입장벽이랄까요.. 뭔가 지루할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 있었거든요. 세상의 어떤 영화든
보지 않고 논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죠.
뭔가 지루할 것 같은 막연한 느낌. 에서 어느정도 힌트가 되었을텐데 저는 사실 고전도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역시나 막연한 그 느낌 덕분이죠. 이쯤되면 교양의 문제이긴 한데, 최근 들어 개선해야 겠단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저도 나이를 먹은 모양입니다.
톨스토이 원작의 안나 카레니나는 그래서 전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얼마 전엔 아나스타샤랑 헷갈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키이라 나이틀리가 비운의 공주로 나오는 줄..
네, 심각하죠. 열심히 고전을 읽겠습니다; 아무튼 전혀 모르고 접해서인지 티비를 틀다 흥미로운 영화를
발견한 것 같은 즐거움이 있더군요. 영화의 줄거리는 뭐.... 간단합니다.
안나의 오빠 오블론스키가 자녀들의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우던 게 발각되고 맙니다.
이혼을 결심한 돌리의 맘을 돌리기위해(;;) 교양 넘치는 안나가 멀리서 그 집안을 찾아오죠.
그런데 안나는 기차에서의 인연으로 젊고 잘 생긴 브론스키와 알게 됩니다.
막연한 이끌림이 시작되지만 그는 돌리의 동생 키티와 이어지고 있던 찰라였죠.
교양있는 유부녀로서의 품위와 끓어오르는 욕망 사이에 갈등하던 안나는 결국 브론스키를 선택하고
이를 알게 된 제정 러시아의 고위급 정치인인 남편 카레닌과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비극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거죠.
다들 아는 이야기인데 저만 몰랐던;; 안나의 이야기는 숱하게 영화화가 된 전례가 있다더군요.
맨날 만들던 밥을 손님께 대접하다보면 대나무밥도 만들고 오곡밥도 만들어야 하겠죠.
조라이트의 버젼은 이 오래된 이야기에 새 생명을 불어넣기위해 무대장치적인 효과를 선택했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무대장치적인;; 효과입니다. 영화는 극장에서 관람하는 연극처럼 시작되는데,
정말로 막이 올라가고 인물들은 시치미를 떼고 그 위에서 연기합니다. 하지만 연극 무대위에서만
이야기가 가능한, 실제 연극의 무대적 요소라고 보긴 어려워요. 무대 위의 막을 준비하는 공간까지
영화 속에선 살아있는 공간으로 이용하며, 심지어 관객석 까지도 미쟝센의 요소로 활용되니까요.
영화 안의 무대적 요소는 관객의 시각적 선택을 앗아가는 카메라의 선택 수준을 넘어서
장면과 장면이 넘어가고 인물과 인물이 이어지는 동선 자체를 마법적 이미지로 탈바꿈시킵니다.
이로써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단 스피드입니다. 전반부에서 중반부까지의 전개는 사극이라는
폼이 가질 수 있는 한계까지 밀어붙인 속도감을 가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또렷한 공간의 이동,
시간의 묘사가 불필요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점프를 설득력있게 만들기 위해서 제작진이 고안한
수 많은 이미지적 표현은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함으로 불평이 나오는 걸 막아주고 있습니다. 영리하죠.
하지만 잃은 것도 있겠죠. 앞서 말했듯 엄청난 속독으로 소설을 읽는 듯한 전개는 다시 말하면
원래 길어야 했던 서사였단 얘기이기도 하니까요. 어디까지나 편법을 이용해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덕분에 중반부까지 확연한 인물에 대한 묘사나 몰입은 차박차박한 수준이라고 보면 될 거 같아요.
물론 이런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 유명한(나만 몰랐던) 안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겠죠.
상념에 젖은 레빈이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가는 시퀸스부터 갑갑한 관객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활짝 열린 풍광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심도 짙은 드라마가 펼쳐지죠.
뭐.. 그런데 아마 이 이야기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분들이 계실 거 같아요.
안나의 선태과 행동 말이죠. 자신의 위치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돌보고 교양있게 사는 것이
삶의 전부였던 안나에게 새로 발견된 이 감정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악녀? 한심함?
글쎄요. 극장의 옆자리에서 독설을 내뱉던 노부인의 태도가 아마 가장 쉽게 이 이야기를
대하는 태도일 것 입니다. 그러한 선택에 대해 누구나 한 마디 해줌으로 사회적 결속을 다지는
역할을 하기도 하죠. 저는 모르겠어요. 그녀는 비난받을 행동을 했고,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저까지 돌을 던지고 싶진 않았어요. 그 뜨거움을 이해하거든요. 돌리에 가까울까요?
결국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 아파하는 안나.
그런 안나 곁에 있지만 점점 무기력해지는 브론스키.
그녀를 용서하지만 가장 큰 상처를 받는 카레닌.
이 감정의 소용돌이를 보면서 역시 살아남는 고전은 이유가 있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중반 이후의 전개에선 정말 엄청 몰입해서 본 것 같아요. 눈 깜빡하니 40분이 흘렀더군요.
다소 과장스럽고 가벼운 영화적 표현부터
불륜과 상처의 늪을 건너야 하는 클라이막스까지 폭이 넓은 연기를 해야했던
키이라와 쥬드 로는 모두 안정적이고 설득력있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자신의 사랑에 확신을 가지고 아이처럼 웃는 키이라 라이틀리의 미소나
상처받지만 흔들리지 않기 위해 꾹꾹 감정을 누르는 쥬드 로의 표정은
통속극에 품위를 넣는다고 할까요. 아름답네요. 물론 브론스키를 연기한
에론 존슨의 유니폼을 입은 테도 정말 멋있었죠. 누구라도 꼬시면 넘어갈 듯한
파릇파릇하고 생기 넘치는 젊은이다웠어요. 키티도 정말 사랑스러웠구요 :-)
이렇게 조 라이트의 사극을 처음 접하게 됐고
아마 다음부턴 챙겨서 보게 될 것 같단 생각을 했어요.
그나저나 키이라 라이틀리가 한창 때를 살짝 지난, 바람난 유부녀로 나오는 게 자연스러운
나이가 되었다니 세월이 참 빨리 흘러가 버렸군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안나의 얼굴이 떠올라
더 처연했던 것 같아요. 정신병을 앓는 게 분명했던 그녀가 조금만 참았더라면,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요? 기찻길에 업드려 신에게 죄송하다고 읊조리던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지
못해 너무 미안하고 가슴 아팠습니다. 사랑이 무언지, 사랑이 아름답다고 누가 그랬나요.
사랑은 그냥, 뜨거운 것임을.

첫댓글 장고 보고나서 이 영화볼까말까 했는데 꼭 봐약겠네요 ㅎ
어찌보면 단순한 불륜얘기인데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가 안타까워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