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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단들이 기존교회를 비판하면서 기존교회에서 독립하여 자신들의 단체를 설립하고 정당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기존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는 늘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를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로 모이는 성도는 언제나 말씀 앞에서 비판을 받음으로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 앞에서는 그 어떤 존재도 자신이나 인간으로 구성된 단체를 정당하다고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제 아무리 보기 좋은 제도나 형식을 갖추고 있는 단체라 해도 죄 있는 인간의 모임인 이상 정당한 곳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지구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건전하고 성경적인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가 있다고 하자. 과연 그 교회를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당장 눈에 드러나는 모습으로는 정당한 교회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안에도 시기, 탐욕, 불의, 더러움, 분열은 있다.
다만 그러한 인간 내면의 악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언제든 기회가 되면 그 정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그래서 교회라면 늘 말씀으로 인해 비판을 받는 그것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개는 기존 교회의 제도나 형식, 드러난 폐해들을 비판하며 이탈함으로써 마치 자신은 정당한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이것이 대다수 이단들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속은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수장은 다르다는 인식을 하게 되고 결국 그 집단에 속한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이 경계해야 할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즉 ‘내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는 다르다’‘내가 다니는 교회는 다르다’는 생각을 늘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목사가 진심으로 복음만 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능력의 결과인 것이지 그 목사가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언급한 것처럼 교회가 아무리 다르게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제도와 형식, 분위기의 차이일 뿐이지 인간이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도가 이점을 잊지 않는다면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볼 수 있고, 잘못된 가르침 또한 바르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교회를 비판하고 이탈하여 독립적인 단체를 세운 분파들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지방교회’다. 이들은 ‘교회는 우주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요 인간 사회에서 나타날 때에는 한 지방, 한 교회로 나타나는 것이지 때문에 각 교회는 지방 이름을 붙여 단순히 ○○교회이어야지 어떤 교파별 명칭을 갖는 것은 죄다’라고 주장 한다. 이들 교회를 지방 교회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을 지방교회로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주장과 형태를 따라 외부에서 ‘지방교회’로 지칭하여 분리한 것이다. 또한 지방교회는 회복교회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그들이 교회의 본이라고 할 수 있는 초대교회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지방교회의 특징은 각 지역의 명칭을 그대로 교회 명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교파별 명칭을 갖는 것을 죄로 여기기 때문에 당연히 ‘대한예수교 장로회’와 같은 별도의 명칭이 없이 서울에 있으면 서울교회, 대구에 있으면 대구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하지만 도시에서 한 교회로만 모이는 것은 당연히 힘든 일이기 때문에 여러 교회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런 경우에는 ‘집회소’라고 지칭한다
이들의 특징 중에 또 하나는 건물에 십자가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그들이 사용하는 대표 문양이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건물에 십자가를 세우지 않았다고 해서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그것으로 기존교회와 다름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방교회는 중국에서 워치만 니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중국인 위트니스 리(1905~1997)가 1950년대에 독자적인 교회를 개척함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한국의 지방교회는 워치만 니의 직계 제자라고 자칭한 왕중생(한국 본명 : 권익현)의 지도하에 1966년에 시작되었고, 한국복음서원(대표 : 이희득)이 지방교회의 모든 출판물을 보급하고 있다.
지방 교회는 회복 신앙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들은 ‘회복’이라는 말의 의미를 ‘손상 또는 손실이 발생한 후에 정상적인 상태로 복원하거나 돌이키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교회가 역사의 과정 중에서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에서 벗어나 잘못되어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래의 상태나 지위로 복구하고 계신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20세기에서의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가 워치만 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중국에서 워치만 니를 얻으신 주님이 그를 통해 교회를 초대교회 상태로 회복하시고 구원에 대한 정확한 진리와 체험을 제시했고 교회가 세워지는 터와 함께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회복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떤 상태로 회복된다고 해도 결국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설사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먹기 전의 상태로 회복된다고 해도 역시 죄를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이들이 초대교회로의 회복을 말하지만 초대교회 역시 죄인의 모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에도 인간에게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한 예가 구제 문제로 인한 헬라 유대인과 히브리파 사람들의 충돌이다.
만약 초대교회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완벽한 교회였고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초대교회를 하나의 기준으로 세우셨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초대교회를 신앙의 기준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회복을 강조하는 이들은 결국 원래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신앙의 목표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회복을 위한 삶을 강조하면서 매우 위험한 사상을 갖게 된다.
이들은 “우리의 실행은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타고난 사람의 생활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실행은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사람은 거듭나고 변화됨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과 인격과 모든 것으로 취하는 사람이다. 결국 이 사람은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된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사람이다. 오늘날 회복 안에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하기를 실행해야 한다.”(대전교회 홈페이지)고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인합일을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지방교회 측은 신인합일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갈 2:20절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를 근거로 해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에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관계에 있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신자가 믿음이 있고 성령을 받는다고 해도 인간의 악한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성령에 의해서 악한 본성이 제거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이 인간의 본성보다 힘이 약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의 죄를 책망하고 죄를 깨닫게 하며 회개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증거는 본성적 행위가 아닌 거룩한 생활을 실천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나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에 있다.
따라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나의 믿음, 나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능력이 나로 하여금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자로 살게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신자에게서는 놀라운 변화가 있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행위의 주체가 되어 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죄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죄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때문에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 증거하고자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고 생명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방교회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을 마치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한 본성들이 그리스도로 인해 제거되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게 하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회복으로 이해를 한다.
교회에 대해서도 이들은 전혀 다른 말을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고난과 긍휼과 사랑에 의해서 세워진다. 따라서 교회는 자신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고난에 애통해 하고, 죄를 용서해 주신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게 된다. 그런데도 늘 죄의 세력에 끌려가는 자신을 보며 불쌍히 여겨주기를 구하며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자신의 존재에 눈을 뜬 것이 교회다.
그런데 지방교회가 말하는 교회는 영광스럽게 완성된 상태로서의 교회만을 말한다. ‘워치만 니가 본 교회의 이상과 실행’이라는 지방교회의 글에 보면 ‘워치만 니가 세운 상해 교회의 한 기도 집회에서 어느 자매님이 그 당시의 교회 상태를 반영하듯 ‘주여 가련한 상해 교회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워치만 니는 즉시 ‘오 주님, 당신의 교회는 늘 영광스럽습니다.’라고 되받아 기도했답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을 낮은 수준의 상태로 워치만 니처럼 영광의 상태에 있는 교회를 바라보는 것을 높은 수준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방교회의 글에서는 죄와 회개에 대한 내용을 볼 수가 없다.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부활의 영광에만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자가 자신의 죄로 인해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것을 낮은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용서 받은 신자가 또 다시 회개하는 것은 구원 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는 구원파 박옥수의 논리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지방 교회는 죄 사함에 있어서도 워치만 니의 가르침을 따라 다섯 종류로 구분하여 말한다. 첫째는 영원한 사하심인데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 죄를 사하셨기 때문에 사하심을 얻으면 영원히 구원 받고 멸망하지 않는다는 죄 사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완전하고 영원한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자는 영원한 사하심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을 영원한 죄 사함을 누리지 못하는 수준 낮은 믿음으로 간주하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의 의미를 알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다.
신자는 예수님의 용서를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기능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용서를 통하여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인자와 자비로 충만한 용서의 세계를 보게 하시고 그 세계에 속한 것으로 감사하는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신다.
그런데 영원한 죄 사함을 도구 삼아 더 이상 불쌍히 여김 받을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나라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곧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죄다. 그런데도 죄가 무엇인가를 모르기에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죄가 무엇인가를 모르면서 예수님의 죄 사함을 강조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예수님으로 인한 영원한 죄 사함을 말한다고 해도 그 또한 바르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작금의 교회도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는 간접적인 사하심, 혹은 선포의 사하심이라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교회가 주는 사하심이라고 한다. 이들은 요 20:23절의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는 구절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만일 죄인이 복음을 믿고 세례 받는 것과 떡 떼는 것을 원할 때 교회는 그가 참으로 주께 속했다고 믿는다면 그를 받을 것이며 그것이 교회가 주는 사하심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교회를 사용하여 죄가 사함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를 선포한다고 하는데 그리스도의 영원한 죄 사함을 말하면서 또 다시 교회가 선포하는 죄 사함을 주장하는 것은 이중적 죄 사함을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가 누군가를 보면서 그가 참으로 주께 속했는지의 여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교회가 주는 사하심이라고 하지만 결국 사람의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떤 교회도 예수님에게 직접 그러한 계시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회가 하나님께서 사람이 구원 받았는지를 선포하시는 수단으로 세웠다고 하지만 교회는 오직 십자가만을 높이고 자랑하기 위해 세워졌을 뿐이다. 그래서 교회는 누가 구원 받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을 수 없는 인간의 악함을 선포하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은혜의 높음을 증거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이 말하는 간접적인 사하심, 즉 교회가 주는 사하심이라는 것은 성경을 자구적으로 해석한 비성경적인 논리일 뿐이다.
요 20:23절의 내용은 성령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남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거나 교회가 죄 사함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령을 받았다면 그는 복음을 아는 자다.
즉 사도들이 깨닫게 된 복음으로 죄 사함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자가 성령을 받았다면 그것은 사도들의 깨달은 복음의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죄 사함에 있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간접적인 사함을 말하는 것은 사도가 아니라 사도가 깨달은 복음이 죄 사함의 능력이 됨을 간과한 것일 뿐이다. 죄 사함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 보자면 그리스도로 죄를 사함 받은 자에게 죄는 더 이상 사망의 권세로 존재하지 않는다.
신자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가 사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 권세에 붙들린 처지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렇다면 구원파나 지방교회의 워치만 니가 말한 것처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은 죄로 인한 죄책감이 아니라 여전히 죄를 이기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애통이다. 신자는 이 애통과 함께 용서의 은혜가 없이는 결코 죄의 삯인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무능을 실감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접적인 사하심을 말하는 지방교회의 논리는 비성경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세 번째는 회복의 사하심인데, 이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로도 여전히 죄를 범하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새로운 사하심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의 죄는 사하심을 받았지만 또 다시 죄를 범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하심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 믿기 이전의 죄는 예수님의 피로 영원히 사함을 받았지만 믿은 후에도 범하는 죄를 위해 새로운 사하심을 구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죄에 대해서도 인간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의 말일 뿐이다.
죄는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 자체에 대한 선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존재로 변질된 인간 자체를 두고 죄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다스리는 악한 본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떤 행동을 했는가와 상관없이 인간은 선이 나올 수 없는 악한 존재일 뿐이다.
예수님의 용서는 이러한 인간에 대한 용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다스리고 있는 악한 본성 자체를 피로써 덮어주신 용서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용서에는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 현재에 범한 죄에 대한 용서, 미래에 범할 죄에 대한 용서가 따로 있지 않다.
이러한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기 쉬운 것은 예수를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극복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은 죄를 극복하게 하는 능력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믿음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기뻐하고 찬송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다.
그런데 워치만 니는 신자가 예수를 믿은 후에도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기 위해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사하심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죄로 인해 끊어진 하나님과의 교통이 회복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하심을 회복의 사하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교통의 여부가 자신의 회개 여부에 달린 결과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 결정적인 오류는 예수님이 화목제물 되셔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묵살하는 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신자에게 회개는 매일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서 죄를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용서의 세계를 누리고 있으며, 하나님과 화목된 관계에 참예되어 있다. 그렇다면 죄로 인한 애통함과 회개는 왜 있어야 하는가? 죄가 우리로 하여금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고 높고 넓은가를 알게 하기 때문이다
워치만 니가 말하는 사하심의 네 번째는 왕국의 사하심이다. 이는 마 18:23-35절에 임금으로부터 만 달란트의 빚은 탕감 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신의 동료가 빚을 갚지 앉자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둔 것을 알게 된 주인이 탕감 했던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둔 내용을 근거로 한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행함에 따라 징벌을 하신다는 것이다.
워치만 니는 이것을 구원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 또한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후, ‘주의 종’이라 칭함을 받은 후에는 반드시 형제를 용서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주 예수께서 돌아오실 때 하나님이 그를 다루신다는 것이다.
영원한 구원 안에 있기에 생명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행한 것에 따라 징벌을 받으며 천년왕국 시대에서의 신자의 위치는 지금의 행위에 달려 있기에 행함에 따른 징벌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왕국의 사하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용서로 구원을 받은 신자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그에 대한 징벌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신자로 하여금 자기 행함에 대한 긴장감을 가지게 할 수는 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행함에 따른 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나는 구원 받았다’는 안일함보다는 징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효과는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구원 받은 자라고 해도 행함에 따른 징벌이 있다는 것인데 과연 그 징벌은 무엇인가가 의문이다. 구원 받은 자라고 해도 징벌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주가 오시기 전 지금의 세대에서 자기 백성을 진리의 길로 가게 하시고 거룩한 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다. 즉 죄에 대한 대가로서의 징벌이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한 은총의 사건인 것이다.
주가 오신 후 신자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행함에 따라 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과연 그 징벌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있을지 부터 생각해야 한다. 행함에 있어서 완전한 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신자는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행함에 매인 인간적 생각일 뿐이다.
마 18장의 내용은 하나님의 용서의 가치를 모독하는 자는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에 가둔 것은 엄청난 빚을 탕감해준 임금의 자비의 가치를 묵살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라는 말은 우리의 무거운 죄를 용서하신 용서의 가치가 우리 속에 담겨 있는가를 묻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처럼 마음으로부터의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설령 가벼운 잘못은 용서할 수 있다고 해도 내 가족을 해치거나 큰 잘못을 범한 상대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존재며 때문에 예수님의 용서가 아니면 저주에 속한 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아는 신자가 용서의 가치를 알 수 있고, 그 중심에 용서의 가치가 살아있는 그에게서 용서가 나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사하심은 하나님의 행정의 손 아래서 사하심을 얻는다는 ‘행정적인 사하심’이다. 워치만 니는 하나님께서 어떤 원칙에 따라 인간을 다스리시는 것을 하나님의 행정이라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원칙을 가지고 인간을 다스리시는 것은 맞지만 그 일을 굳이 ‘하나님의 행정’으로 말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하지만 워치만 니가 ‘하나님이 인간을 다스리신다’는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어떤 의미로 하나님의 행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지를 알 수 있다.
워치만 니는 하나님이 인간을 다스리시는 원칙을 갈 6:7절의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구절에서 찾는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 심은 그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이고 이 원칙에 따라 인간은 심은 그대로 받게 되고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한다.
가령 누군가에게 인색하게 굴면 돌아오는 것도 인색하고, 후히 주면 후하게 받게 된다는 것인데 과연 우리가 목격하는 세상 현실이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난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워치만 니는 이런 예를 들기도 한다. 비평하기를 좋아하는 한 형제가 있는데 어느 날 다른 한 형제가 아들을 잃자 그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손이 당신에게 있는 것이다”라는 한 통의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주 후에 그 자신도 아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워치만 니가 말하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이고, 이것을 하나님의 행정으로 말하는 것이다. 결국 비평을 거두지 않기 위해서는 비평을 심지 말아야 하고, 미움을 거두지 않기 위해서는 미움을 심지 않아야 한다는 논리인데 과연 인간이 그럴 수 있는지가 문제다.
워치만 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정의 손을 가져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단 하나님의 행정의 손이 우리에게 있으면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행정의 손을 거두어 가시게 하기 위해서 죄를 시인하고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죄를 시인하고 철저히 회개하면 하나님이 행정의 손을 거두어 가시는데 그것이 곧 행정적인 사하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워치만 니는 신자가 죄를 용서 받았지만 여전히 그의 삶에 힘든 재난이 떠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회복의 사하심은 받았지만 행정적인 사하심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워치만 니의 이러한 말들은 예수를 믿는데도 여전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힘든 일에 부딪히는 것으로 갈등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뭔가 해결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전혀 성경과 상관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의 의미를 무너뜨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죄 용서는 워치만 니가 말하는 것처럼 여러 종류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는 완벽한 죄 사함만이 있다. 그러면 죄 사함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에 붙들려 있는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것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가장 존귀하고 필요하고 생명의 유일한 길이 되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으로 나아가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에게 날마다 있어야 하는 회개다.
즉 회개는 신자가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함으로써 그 마음이 온전히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도 본다면 워치만 니는 회개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보지 못하고 인간을 봄으로써 인간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러 종류의 죄 사함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에 대해서도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성육신 하셨을 때 인성과 신성이 혼합되어 사람도 하나님도 아닌 존재였었는데 부활 후에 예수님의 인성이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 전에는 사람의 아들이었지만 부활 후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다만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것임을 증거한다(빌 2:5-8). 그러므로 예수님께 인성과 신성의 혼합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부활로 인해 신분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의 몸이 영화롭게 된 것이다.
위트니스 리가 예수에 대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몸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이원론적 시각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가현설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와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선한 분이기 때문에 악한 육체를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다만 육체를 가진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주장한 가현설에서 나온 영지주의적 사상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위트니스 리는 인간에 대해서도 삼분설, 즉 인간은 영, 혼, 육의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영은 완전하고 선하며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고, 혼은 자신의 자아로서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부분이며, 육은 죄로 인해 죽었기 때문에 그 자체를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를 히 4:12절에 두고 있지만 히 4:12절에서 언급된 혼과 영과 골수는 인간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인을 표현하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 영과 육으로만 구분하여 말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삼분설은 성경에서 벗어난 주장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위트니스 니가 말하는 삼분설에서 인간의 구조 중 하나인 영을 완전하고 선하여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어떻든 인간에게는 완전하고 선하며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을 의에 대해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로 말하고, 영이라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인간 구성체에 대한 말이 아니다. 육이라는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 있는 인간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흔히 생각하는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한 위트니스 리는 인간의 몸을 사단을 받아들인 사단의 거처로, 영은 하나님의 거처로 말하면서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을 사단의 거처인 타락한 몸으로 오셨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예수님의 몸속에 있던 사단이 죽었다고 하면서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를 사단에 대한 승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는 죄를 멸하신 예수님을 영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는 대신 ‘오 주 예수여’라고 외치면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기독론과 인간론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이 말하는 구원론도 잘못되어 있다. 이들은 구원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인간 안에 있던 사단이 제거 되고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사람의 영안에 계심으로 하나님과 영합된 인간이 되는 것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언급했던 신일합일의 상태임을 생각하면 이들의 구원관 또한 성경을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 워치난 니와 위트리스 리의 성경 해석과 가르침을 따르는 지방 교회는 참된 진리를 따라 그리스도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집착한 또 하나의 종교적 이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첫댓글 이 글의 저자는 모든 사람을 객관화 시키시며 그렇게 함으로 마치 자신을 그 객관화된 것의 주인인 양 말씀하시는군요.
우리는 1인칭의 시점으로 살지만 이 글을 쓴 이는 3인칭의 존재로 사시는군요.
아! 3인칭의 존재로 산다는 것이 나쁜 말이 아님을 말씀 드립니다.
게다가 저희 교횐 십자가가 있답니다. ㅎㅎ
신명기 4 : 25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격발하면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중요해요..
다시 말해서 십자가 만들면 우상..
..
위치만 니의 영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을 좀을 읽어 보시고.
문제는
영과 혼과 몸을 구분도 못하는 사람들이 위니만 니를 평가 한다는 것은
더하기도 빼기도 모르는 자가 수학를 논하는 꼴..
지방교회가 위치만 니의 사상을 따르는지는 내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위치만 니의 책을 읽어 볼 만한 책입니다.
그 번역본이 구하기 힘들어서 그렇치.
글 쓴이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예을들어
=그것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가장 존귀하고 필요하고 생명의 유일한 길이 되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으로 나아가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에게 날마다 있어야 하는 회개다.
이 주장은 회개와 자백을 구분 못하는 사람.
즉 더하기 빼기를 모르는 사람..
회개는 죄나 잘못을 뉘우치는 것. 이것은 누구나 할수 있는 행위..
회개를 했으면. 죄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백을 해야합니다.
자백을 하면 용서할 일을 용서를 해 주시고. 징계를 하실 일이 있으면 징계을 합니다.
..
회개는 내 마음에 상태. 내가 죄을 깨닫는 상태가 회개입니다.
사도행전 2 :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너희가 회개하여.
하나님은 회개할수 있은 기회를 재공을 하고.
사람이 회개를 해야 하는 겁니다. 회개의 영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헛소리고
회개할수 있게 한 것이 대표적으로 율법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몽학선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으면.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죠.
이것이 회개는 죄 사함을 받게 하기 위해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상태..
@나그네1004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예수님을 만나서 죄사함을 받는 것.
마태복음 3 :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누가복음 3 : 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 회개해야 하는 겁니다.
회개는 죄사함을 받기 위한 준비..
내 상태을 파악하는 것.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상태..
그럼 죄인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부르러 오신 분..
회개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상태..
@나그네1004
죄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을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것을 구원 받앗다 혹은 거듭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 믿음에서 끝나요.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히브리서..
.
거듭난 사람이라고. 완전하지 못한 것이 있어요..
이것이. 육신..
육신의 정욕..
몸은 예수님의 강림하실때 신령한 몸으로 변화 됩니다.
이 때까지는 우리는 이 육신에 있는 한. 죄와 싸우는 겁니다.
즉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목욕을 한 사람.
그리고 우리가 아직 세상 가운데 살고 있으면.
거듭난 사람으로 죄를 범을 할때 이 때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화목제물이죠.
@나그네1004
자백.
즉 발만 씻는 것에 해당이 되는 것..
예수님의 피의 효력은
구약의 모형으로 보면
대속죄일에 드리는 제사는 일년에 한번. 이것은 히브리서에 설명한 것으로. 영원한 속제로 예수님이 이루신 것이고.
화목제물이라는 것은
죄를 범하면 그때 그때 속죄제를 드립니다. 이것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을 회복하기 위해서 들이는 제물
이것은 자주 서서 드리는 제사에 해당이 됩니다.
이것을 신약에는 자백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요한 일서.
위치만 니의 주장이 틀린 것이 아니고.
저 위글 쓴 사람이.
영과 혼과 몸을 구분하지 못할 뿐더러.
@나그네1004
예수님의 피가 영원한 속죄의 능력과 . 화목제물로써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못하기 때문에..
회개와 자백도 구분 못하는 수준의 글입니다
그런 자가 위치만 니를 평가한다는 것은..
웃기는 짓입니다.
위치만 니는 거듭난 사람이 맞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위치만 니의 대표적인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방교회라는 곳에서 위치만 니의 사상을 따르지는 모르겠으나..
또한 지방교회 사람과 교제해 본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위치만 니는 존경할 사람입니다.
@아들의 영
또 지랄이네..
읽어 봤으면. 그리고 저 위글을 읽고..
위치만 니와 저 사람의 비판에 대해서 . 반론을 해봐.
..
위치만 니가 맞는지. . 아니며 저 사람의 주장이 맞는지.
.
이런 쓰잘때기 없는 댓글 달지 말고.
왜 위치만 니가 맞고 저사람이 틀렸지를 성명해 봐.
반대이면. 왜 외치만 니가 틀렸고 저 사람이 맞는지.
아니면 꺼져..
영육이분설, 영 혼 육 삼분설 모두 성경에 근거가 있으니
어느쪽이 맞는가요
왓치만니의 책은 40년전에 선풍적인 인기가 있어 나도 보았었는데
나중에는 이단성이 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