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연(因緣)
박낙순
새 벽 봄비의 정겨움에 눈을 떠 창밖을 보니 가로등 불빛의 희미함이 안쓰럽
게 보이는, 제 할일 다한 듯 지쳐 보인다.
삶에 지친 영혼들을 희망의 불빛으로 바꿔주려는 듯 밤새워 그 자리에 그
렇게 서 있음에 숙연한 마음까지 들게 한다. 나 역시 어제 떠 놓은 정화수를 다시 정
성껏 갈아 놓으며 모든 인연들을 위해 마른 두 손을 합장하여 본다.
십여 년 전 인생의 최대 고비를 넘긴 힘든 시절 우연한 기회가 있어 서예와 인연을
맺게 되어 그 인연으로 인해 내 삶의 등대불 같은 아니 내 인생의 나침반과도 같은 소
중한 만남으로 다가왔던 그분은 지금도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박목월님의 밤에 쓴 인생론이란 저서에 '인연은 진실로 신비스러운 눈을 가진 운명
이다.'라고 했듯이 예기치 않았던 기회에 살며시 찾아온 인연으로 기뻐하고 예기치
않았던 헤어짐으로 가슴 시리게 했던 지난날 들이다.
가로등 불 빛 만큼이나 희미했던 내 젊은 날의 아픔이 서예와의 인연으로 희망을 주
었듯, 어슴푸레 봄비와 함께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하며 불혹의 나이에 수필과의 인연
또한 내 인생의 마지막 생을 뜻 깊게 마무리 해줄 것 같은 왠지 모를 설레임으로 다가
온다. 미지의 대륙을 발견하는 콜롬보스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수필의 맥을 찾아 인생
의 긴 여행을 하고 싶다. 머리로 쓰는 수필이 아닌 가슴으로, 심장으로 쓰는 나만의
인생의 기록으로 소중한 영혼의 창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언젠가는 서예와 수필을 한데 묶어 책을 내고 싶은 욕심이 앞서지만 꿈이 있는 곳에
길이 있듯이 희망을 갖고 야무진 꿈을 가꿔 보리라 생각한다.
꾸밈없이 소박한 글, 잔잔한 글, 아름답고 따뜻함, 살아가는 나의 인생의 글을 남기
고자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 하겠지만 성심껏 열심히 수필의 길을 가려 한다. 희망
이 될지 절망의 늪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시작한 여행길을 좋은 연을 맺고 싶은
마음이다.
교수님의 강의와 처음 만난 분들과의 인연 또한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불가(佛家)
에서 말하는 생전에 자신이 쌓은 업보에 따라 또 다른 인연으로 이 세상에 다시 만나
게 된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승에서 옷깃한번 스치는 인연이 전생
에서 오백생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모든 분들과의 인연 또한 전생에서 귀한
인연이 있었기에 이렇게 만나지 않았나 싶다.
같은 길을 가는 소중한 분들과의 만남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참을성 없고
빈 머리의 한계가 나를 괴롭히지만 초연한 마음으로 묵묵히 선배님들이 밟고 가시는
그 길을 에 겨워 따라가기 힘들지라도 포기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했던가. 늦게 시작한 수필 공부가 어
떤 참다운 인연이 되어 내 인생의 밝은 희망의 불빛으로 승화되길 바라며 주름지고 야
윈 내 얼굴에서 묻어나는 내면의 아름다운 멋이 배어나왔으면 하는 소망으로 이 글을
써내려 간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내심(內心)의 소산이 모나리자 미소보다 더 아름다운 미소가
저절로 입가에 번질 그 날이 꼭 올 줄 믿으며…….
2005/ 20집
첫댓글 근 20년전 글이니 이제는 느긋한 마음으로
후배들을 바라다 보고 계시겠네요.
아마 처음 글쓰기를 생각한 이들이 갖는
마음이지 아닐까 싶습니다.
같은 길을 가는 소중한 분들과의 만남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참을성 없고
빈 머리의 한계가 나를 괴롭히지만 초연한 마음으로 묵묵히 선배님들이 밟고 가시는
그 길을 에 겨워 따라가기 힘들지라도 포기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