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라일의 「곧은 길」 중
1. 기도는 인간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고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보지 못했다. 진실하게 마음으로 원하지 않으면서 입술로만 구원을 말하는 사람이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 또한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을 읽는 것, 설교를 듣는 것이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학식이 없고 장님일 수도 있고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회개하여야 하고, 스스로 그리스도께 의탁해야 하며, 스스로 하나님께 말하고 기도해야 한다. 구원이 마침내 완성될 때, 성도들은 한 목소리로 그리고 한 마음으로 영광스러운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 노래에는 어떤 불협화음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기도의 훈련을 충분히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찬양의 축제에 합당한 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요컨대 기도 없이 산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며, 은혜도 소망도 천국도 없이 사는 것이다.
2. 기도하는 습관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
생명의 최초의 신호로 호흡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듭나게 될 때 최초의 행위는 기도하는 것이다. 성경에 경건한 사람들의 특징으로서 “아버지를 부르며”(벧전 1:17),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고전 1:2)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성경 시대 이후에 살았던 많은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열의도 없이 위선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아직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주장한다.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정말로 죄인임을 느낄 수 없고, 거룩함을 추구할 수도 없다.
진심으로 기도할 때에는 성령이 함께 한다. 주님께서는 참된 회심의 가장 훌륭한 증거로서 기도를 말씀하셨다. 아나니아를 다메섹에 있는 사울에게 보낼 때 아나니아에게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행 9:11)라는 것 외에는 사울의 회심에 대한 어떤 다른 증거도 말하지 않으셨다. 믿음의 최초의 행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믿음과 영혼의 관계는 호흡과 생명에 대한 관계와 같다. 살아 있는 사람이 호흡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듯이 믿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것도 상상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신앙에 있어서 개인적인 기도만큼 무시되고 있는 의무도 없다.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 사이의 은밀한 계약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해 버리기 쉽고 하지 않고 남겨두게 하는 유혹이 많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전혀 기도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들은 죽어가는 동물처럼 살고 있다. 영혼이 없는 피조물처럼 행동한다. 그들의 생명과 호흡과 그 밖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데도 하나님께 할 말이 없다. 기도를 단순히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기계적인 단어의 나열로 생각하며 중얼거리는 사람이 있다. 입술을 움직이고 혀를 움직인다 할지라도 진실이 담겨 있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시지 않는다. 즉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육적인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인간의 마음의 소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며,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의 감정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공포일뿐이다. 기도하는 것과 죄를 행하는 것은 결코 동일한 마음에서 나올 수 없다. 기도는 죄를 소멸시키고 죄는 기도를 못하게 한다.
4. 기도는 가장 크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신앙의 행동이다.
하나님의 편에서 기도는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눅 14:17). 기도하지 않는 자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가 기도하는 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수단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라도 그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 또한 대단한 격려가 아니겠는가? 예수께서는 그 자신의 전지전능한 중보로 우리의 기도를 향기롭게 하신다. 아담의 불쌍한 자손들이 하는 기도 그 자체는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서 대단한 가치가 있게 된다. 주 예수는 사랑과 은혜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호소하도록 항상 듣고 계신다. 그들을 돕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임무이다. 그들이 하는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한다. 이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 또한 커다란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 것이 성령이 하는 특별한 임무이다. 성령은 그의 도움을 구하기만 한다면, 우리로 하여금 말할 수 있게 한다. 성령은 우리에게 ‘살아 숨 쉬는 생각과 말’을 줄 것이다. 틀림없이 주의 백성들의 기도는 누군가에 의해 듣게 되기를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이 또한 커다란 격려가 아니겠는가?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크고 귀중한 약속이 있다. 한밤중의 친구의 비유와 끈질긴 과부의 비유로 말씀하신(눅 11:5, 18:1)것과, 마 7:7~8, 마 21:22, 요 14:13~14 같은 성경구절은 기도하라는 격려가 아니라면 이 말씀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도는 불가능하고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성취한다. 기도는 홍해를 건너게 했고, 바위에서 물과 하늘에서 만나를 가져왔으며, 태양을 멈추게 했고, 하늘로부터 불을 가져왔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조차도 “나는 만 명의 군사보다도 존 낙스의 기도가 더 두렵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 또한 얼마나 커다란 격려인가?
신앙생활에 필요한 어떤 단계를 거치기 위해서 기도만큼 필요한 것이 있겠는가? 지옥에 있는 마귀에게 기도문을 활짝 열어놓는다면, 지옥마저도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러한 영광스러운 커다란 격려를 무시한다면 마지막으로 어디서 숨을 곳을 찾겠는가?
5. 열심히 기도한다는 것은 거룩하게 되는 비결이다.
하나님의 군대 안에서 가장 앞선 자와 가장 뒤쪽에 있는 자 사이에 대단한 격차가 있다. 모두 똑같이 선한 싸움을 하지만 그 중에서 보다 더 열심히 싸우고 있는 자들이 있고 또한 회심의 순간부터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님의 백성들이 있다. 그들은 어린 아이와 같이 젖만 원하고 단단한 음식은 싫어하며, 말씀은 배웠지만 기초적인 낮은 수준에 머물러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의 떡은 항상 마르고 곰팡내가 나며, 그들의 신발은 항상 낡아 기운 것이며, 그들의 옷은 항상 낡아 찢겨져 있다(수 9:4~5). 반면에, 항상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 그들은 더욱 은혜 받게 되며, 믿음이 더하며 더욱 강해진다. 그들은 신앙이 실제적임을 보여줄 선한 증거를 갖게 될 뿐 아니라 열심히 일한다. 그들은 선을 행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넘어지면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항상 스스로를 가련하고 무익한 종이라고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이기적인 사람에게도 칭송을 얻는다.
그들이 거룩한 생활을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습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두드러지게 거룩하게 되는 일이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 추구할 수 있는 특별한 은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회개할 때, 그가 거룩한지의 여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을 얼마나 열심히 사용했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거룩하게 되었던 방법은 바로 개인적으로 성실하게 기도하는 습관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한다. 위대하게 살았던 하나님의 종들의 생애를 살펴보라. 어떤 순교자들도 개인적인 기도 없이 하나님과 동행한 예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기도는 곧 능력이다. 가장 많이 기도하는 사람에게 성령께서는 가장 많이 감화를 주신다. 기도는 마귀와 넘어지게 하는 죄에 대한 확실한 치료책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우리를 괴롭히는 마귀를 끌어내어 지옥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서 그리스도께 기도해야만 한다. 기도의 가치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6. 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은 타락의 큰 원인이다.
훌륭한 신앙고백을 한 후에도 신앙생활에서 다시 뒤로 후퇴하는 경우가 있다. 베드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감정이 격한 동안에만 큰 소리로 신앙을 고백하다가, 시련의 때에는 주님을 부인해 버린다. 사도를 따르다가 세속으로 되돌아가버린 데마처럼 되어버릴 수도 있다. 타락하는 것은 비참하고 슬픈 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옥이다. “마음이 굽은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가득하겠고 선한 사람도 자기 행위로 그러하리라” (잠 14:14)
타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기도하지 않고 하는 모든 것은 영적으로 마비되는 상태에 도달하는 단계이며, 그 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는 자에게 큰 실패를 맛보게 하신다. 이러한 까닭으로 롯은 망설이게 되었고 삼손은 마음이 침착치 못하였으며 솔로몬은 우상을 섬기는 아내를 얻게 되었다. 베드로는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경고를 무시하다가 유혹의 한 순간에 주님을 부인해 버린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타락한 후에 공공연하게 타락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타락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기도하는 일을 잊지 말라.
7. 기도는 행복과 만족감을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우리는 슬픔이 만연한 세상에 살고 있다. 죄가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는 누구도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하고 관계를 맺는 모든 것들이 근심의 원천이다. 우리의 애착이 커질수록 고통은 더욱 깊어진다. 슬픔 많은 세상에서 즐겁게 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기도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습관이야말로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한다(시 50:15, 55:22, 빌 4:6~7, 약 5:13). 기도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일은 성경에 나타난 모든 성도들이 실행했던 일이다.
기도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신자들을 때때로 슬프게 하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근심걱정을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가사의 성문에서 하셨던 것처럼 그들이 쉽게 그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하신다.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로 결심한다면 메뚜기조차도 짐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전 12:5). 우리와 똑같은 사람처럼 33년을 사셨던 우리의 친구이신 예수께서는 믿고 호소하는 자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지 간에 우리를 행복하게 하실 수 있다. 마음의 평화를 주시고, 만족함을 주시며, 위로를 주시며, 기쁨도 주신다. 기도하는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 그들이 처한 상황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도는 우리가 겪는 시련이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견딜 수 있게 한다. 기도는 시련을 견디어내도록 도와줄 사람을 불러올 수 있다. 기도는 가는 길이 막힐 때 출구를 찾게 한다. 기도는 미래의 가능성이 암담해졌을 때 희망의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광야에서 방황하는 하갈이 근처에 흐르는 샘물을 찾을 수 없었던 것과는 달리 길을 찾게 된다.
<옮긴글>
[출처] 기도는 거룩의 비결이다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