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이 아닌 달을
오늘 복음은 바로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 전의 내용입니다. 다음 주 복음인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당신이 누구 신지, 어떤 분이신 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곳을 다니시느라 지치셨기 때문에 좀 쉬시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려고 제자들과 함께 호수 건너편 한적한 곳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멀리까지 그분을 찾아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기꺼이 맞아 먼저 하느님 나라를 설명해 주심으로서 영적인 목마름을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병든 이들을 다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날이 저물자 사람들이 허기지고 지친 것을 보시고 그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물리적인 기적을 믿지 않는 어떤 신학자들은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9 마일이나 떨어진 곳이다.
사람들이 9 마일이나 떨어진 곳을 오면서 아무런 준비 없이 왔을 리는 없을 것이고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각기 자기들의 몫의 음식을 준비해 왔다. 그들은 그것을 단지 자기들만을 위해 감추어 두었는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빙그레 웃으시며 제자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선뜻 사람들과 나누게 하시었다. 그러자 이것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 것을 나누기 시작했고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충분히 함께 음식을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자기들만을 생각했던 이기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서로 나눌 수 있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바꾸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많게 했던 것은 빵과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다.
이 설명이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 손으로 느낄 수 있어야 받아들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그럴 듯 하고, 또한 서로 나눌 때 거기 풍요로움이 있다는 진리는 틀림이 없기에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설명을 들으며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렇게도 예수님의 기적을 단순히 믿기가 어려운가?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항상 우리의 안목이나 지혜를 넘어서서 어떤 것에 대한 열린 마음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지평입니다.
한편 이 기적이 담고 있는 표지는 사람들이 바라던 것이 무엇이고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시려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 기적의 사건을 보면서 사람들은 참으로 놀라고 “이분이 바로 세상에 오시기롤 되어 있는 메시아이다.”고 하면서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십니다. 불가에 잘 알려진 비유에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바라보라는 말이 있지요.
달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다면 그 손가락은 달을 쳐다보게 하기 위한 표지일 뿐이지요. 그런데,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쳐다보지 않고 그 손가락만을 쳐다보면 달은 놓쳐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이나 이적은 모두 하나의 표지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 있는 달을 바라보는 대신 그 표지인 손가락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빵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빵을 많게 하신 그분이 누구신지를 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여 배불리 먹이신 것은 하나의 표지였습니다.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양식이라는 그 표지를 보고 영원히 살게 할 없어지지 않을 양식에 눈길을 주고 그 표지가 가리키는 의미를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들은 다만 배불리 먹은 빵 때문에 그분을 다시 찾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고 말씀하시면서 당 신 자신이 바로 그 빵, 그 양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당신이 바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고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에게 물으셨지요.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답하지요.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지니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마는 교회의 전례 용어가 조금씩 바뀌어서 교우들이 불편을 겪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왜 전례 용어와 미사 경문 기도문 등을 바꾸었는가라는 질문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많은 용어들이 옛날 말로 생소할 뿐만 아니라 몇 부분이 오역이 있었기 때문에 바르게 옮길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오역이 바로 이 성찬 예식 부분이었는데 제대로 바뀌었습니다. 전에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로 되어 있던 부분이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로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기념한다고 하면 기념식장에서 행사를 치르는 어감을 지니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바라신 것은 그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당신을 기억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당신의 삶과 가르치심,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기를 바라셨지 단지 기념하고 넘어가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늘 마음에 간직하고 소중히 기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기억하고 행하기를 바라신 것은 단순한 예식, 둘러앉아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그 예식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당신이 행하신 그 사랑의 행위, 당신 자신을 빵으로서 내어 주신 그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들이 행해야 하는 것은 단지 이 예식이 아니라, 이것,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나누시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 예식을 하면서 그 본래의 의미를 생각하기 때문에 예를 행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식만을 강조하면 달을 바라보지 않고 그 표지인 손가락만을 바라보는 격이 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합니까? 빵은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밥이지요. 밥이 하늘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서로 하늘을 공유하듯 밥도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말씀은 "나는 당신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줍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온전히 한 몸을 이루기 위해 당신 자신을 기꺼이 빵이 되고 밥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분을 우리 안에 모실 때 우리는 주님과 한 몸을 이룹니다. 그럼 그분을 어떻게 우리 안에 모셔야 할까요?
그분을 온전히 우리 안에 모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분의 본질을 이해하는 만남이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으로 우리는 그분과 한 몸을 이루는 것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니 나를 먹어라"는 말씀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생명을 내어준다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대신 죽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시겠다는 사랑의 의미입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여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유다인들은 따졌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만일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그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면 그 말뜻을 이해했겠지만 그들의 아집이 너무나 높아서 두 눈을 덮고 뒤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두 눈과 우리의 두 귀는 그분을 향해 언제나 열려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 봅니다.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나와 온전히 함께 나누는 사람', 곧 '당신이 주신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분과 큰 일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내 안에 살고 나도 그 안에 산다"고
하신 것처럼. 여러분들, 김치가 김치만두에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뭐라고 하였을까요?
사랑은 자신을 나누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들, 꽃, 반지, 옷, 축하카드 등은 사랑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일 뿐이지요.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내적인 힘에 있는 것이지 물질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나누는 것,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나누고, 당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이고, 그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나누고, 당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당신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이심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당신이 누구냐는 물음을 던지셨고, 스스로 당신이 누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구세주라는 말씀을 '살아 있는 빵'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당신은 '생명의 빵', '하늘에서 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그렇게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구세주라고 하면 '영광의 왕, 모든 압제자를 정복하여 이스라엘을 영광스럽게 만들어 줄 정복자나 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구세주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실 분,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분, 그렇게 하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었으니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사랑의 또 다른 본질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 있는 그대로 느끼고 존중해 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신 분이십니다. 천대 받던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고 그들의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리신 분이십니다. 그 당시 병에 걸린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지은 죄의 결과로 여겼기 때문에 병자를 죄인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럼없이 병자들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가장 큰 죄인으로 소외당하던 세리 자캐오에게도 "어서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러야겠다"며 위로의 말을 건네셨고, 향유를 바르던 여인의 마음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빵을 먹는 사람'들이란 사랑을 나누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들어야
'성체성사'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사랑의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그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나누시는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성체 안에 참으로 당신이 현존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그분을 모실 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분의 힘으로 우리는 힘차게 그리고 기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류해욱 요셉 신부님/예수회 영성 지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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