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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1)
마 28:11-20
11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1-20 / [경비병이 매수당하다] 여자들이 떠난 뒤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 몇 사람이 성안으로 들어가 대제사장들에게 그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다 보고하였다. 12) 대제사장들은 온 유대 지도자들과 의회를 열고 의논한 끝에 경비병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13)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그들이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고 말하라고 하였다. 14) 또한 그들은 경비병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였다. `만일 총독이 이 소문을 듣게 되더라도 우리가 너희들에게는 아무 해가 없도록 책임을 지겠다.' 15) 경비병들은 뇌물을 받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유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16) [제자들의 사명;막16:14-18,눅24:47-49,요20:21-23] 열한 제자는 예수께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일러주신 갈릴리에 있는 산으로 갔다. 17) 거기서 그들은 예수를 뵙고 경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그가 정말 예수일까 하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1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열한 제자 가운데서도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났지만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과 함께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대제사장들의 거짓말(11-15) 진리를 알고도 거부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이런 악한 일은 욕심에 눈먼 자들을 통해 전염병처럼 퍼집니다.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러 갔을 때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도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일어난 일을 보고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 일에 대해 의논합니다. 그러고는 경비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고 제자들이 밤중에 몰래 와서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말하도록 시킵니다. 예수님은 거짓말쟁이이며, 예수님의 부활도 제자들이 꾸민 일이라고 주장했지만(27:64), 정작 속이고 거짓말한 자들은 그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인하고도 믿기를 거부했으며, 경비병들은 돈에 눈이 멀어 복음의 진리를 거짓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명령(16-20)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붙드십니다. 열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경배하지만 그들 중에서는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가르치셨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복음의 증인으로 세우시면서 마지막 명령을 하십니다. 먼저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음을 상기시키시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온 우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항상 함께하신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지키게 하며 세례를 베푸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적용: 욕심 때문에 복음에 합당한 삶을 부인한 적은 없습니까? 진리를 알면서도 그대로 믿고 행하는 것을 뒤로 미루고 있지 않습니까?
전쟁에 패배한 군인들이 숲에 숨어 살며 자신의 나라가 전쟁에 패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숨어 있는 군인들에게 투항하라, 이제 끝났으니 밖으로 나오라고 말하지만 끝까지 나오기를 거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의심은 지워버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설 교 >
파수꾼의 양심 선언
마태복음 28:11-15 / 이필재 목사
예수님에 대해서 일반인들이 믿기 어려운 네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첫째가 탄생입니다. 결혼 생활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동정녀의 몸에서 어린 아기가 탄생하게 되었는가? 성령의 인도가 없는 불신자들은 매우 믿기가 어려운 사건입니다. 그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것은 예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사건이라서 일반인들은 절대 믿을 수가 없는 그런 부분입니다. 그 다음에 승천입니다. 대기권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확실한 자연 과학적 믿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둥둥 떠서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일반인들이 도저히 믿기 어려운 사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다음에 재림입니다. 예수가 다시 이 땅을 찾아오신다고 하는 약속이 과연 믿을만한 진리인가에 대해서도 일반인들은 믿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믿음 생활을 정리해보면 우리가 이렇게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그 믿음 자체가 내가 예수를 믿고 싶어서 그렇게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게 하셔서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가 어느 날 예수님에게 좋은 대답을 했잖아요? “내가 누구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했는데 주님의 거기에 대한 대답은 “이것을 네가 알게 한 이는 너 자신이 아니다 하나님이 네게 알게 하셨다.” 하나님이 알려주셔서 알게 된 것, 하나님이 믿게 하심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다른 종교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신을 찾아가는 진리를 말하고 있는데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든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찾아 나서는 내용으로 기독교의 진리가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역사하심으로 믿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믿음이 생긴 자체를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축복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믿는 믿음의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과학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겨울이 오고 이 믿음은 틀림없이 그대로 실천되어 집니다. 어떻게 해서 얻어진 것인가? 경험에 의한 믿음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우주 질서의 법칙이 영원토록 변하지 않고 자기 위치대로 그렇게 계속해서 반복되는 질서를 경험하면서 얻어지는 확실한 믿음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믿어지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믿음의 세계는 경험하지 아니한 부분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본 일이 없습니다. 천국에도 안 갔습니다. 그런데 다 믿고 있습니다.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믿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성령의 도움으로 믿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 진리는 모든 기독교 전체가 성령님의 도움을 입어서 내가 그 길을 가게 됨을 성경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반대하는 증언의 소리도 이 땅에 수없이 많이 있었는데 대체적으로 2000년 동안 끊임없이 기독교 진리를 반대하는 증언의 소리가 예수 부활의 사건에 대한 네 가지 학설이 끊임없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오늘 성경말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 도난설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졸고 있는 사이 예수의 제자들이 몰래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가지고 도망간 것을 살아났다고 거짓말 유포시킨 것이라 해서 확산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설이 된 것이라 하여 이것을 아주 논리정연하게 만들어서 유포해 왔습니다. 그 다음은 환상설로 반대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너무나 예수님이 그립고 사모하다 보니까 환상 중에 예수님이 나타나게 된 것을 살아났다고 말하게 된 것이 온 세상에 전설과 같이 확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가사설이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고 기절을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아직 죽지 아니한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유대나라 무덤은 흙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굴에다 그냥 안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일쯤 누워있으니까 기운을 회복할 수 있어서 그때 살아나온 가사설을 오랫동안 말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마지막 네 번째가 신화설입니다. 예수라는 존재도 없었고 십자가에 메달은 일도 없었던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신화적 스토리를 만들어서 소문을 퍼뜨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네 가지 학설이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본래 기독교 복음의 진리는 합리적 논리를 만들어서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믿거나 말거나 사실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말도 되지 않는 듯 한 그 말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위대한 힘이 작용해서 그 힘에 의한 역사가 일어나는 게 기독교인데 이것을 패러독스 진리라고 말합니다. 말을 안 되는데도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세상의 역사를 말하면 금년을 2008년이라고 말합니다. 왜 2008년입니까? 인류가 언제부터 발생해서 세상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인류의 역사가 우리나라만 해도 5천년이 넘었는데 왜 온 세계에 공통적으로 2008년이라고 합니까? 역사를 이렇게 설정하지 않으면 세계는 큰 문제가 옵니다. 그래서 어디서든지 금년이 2008년입니다. 아주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 국가에서도 힌두교 국가에서도 예수 안 믿는 나라에서도 온 세계 어디서나 금년이 2008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야! 너희들 앞으로 역사를 말할 때 내가 태어난 그 때를 기준으로 만들어라!”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관심사도 아닙니다. 아무 말씀도 하신 일이 없는 것을, 지금 세계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준으로 하여 AD와 BC를 나누지 아니하면 역사가 혼란에 빠져버립니다. 역사의 초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있잖아요? 예수님은 죄수라고 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을 분인데, 그 예수 안에 들어있는 어떤 위대함이 예수를 역사의 주인공으로 삼지 아니하고 기초로 삼지 아니하면 세계 질서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공통으로 예수를 믿든지 말든지 역사는 2008년입니다.
그 위대한 힘이란 뭔가? 바로 오늘 성경말씀에서 몇 가지 반영이 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장례에 대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약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있었음이 성경에 기록으로 증명이 됩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마련해준 무덤에 잘 안치가 되었습니다. 본래, 이 십자가의 사형 집행은 하도 흉악하고 고통스러워서 로마 사람은 적용하지 않습니다. 로마 이외의 사람들에게만 그 십자가의 형법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가? 사람을 죽일 때 가장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 것이 십자가 형법입니다. 우리 몸에는 생명을 유지하는 심장이라는, 피를 저장하는 탱크가 들어있습니다. 만약 우리 몸에 어떤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면 이 심장에서는 그 쪽 부분의 피가 모자란 것을 알고 계속 펌프질을 그쪽으로 해서 피를 보내주도록 되어 있는데 그 피가 흐르는 과정이 고통입니다. 그런데 우리 심장에서 가장 먼 곳이 손과 발입니다. 그래서 그 피가 흐르는 시간 동안 수없는 고통을 누리게끔 과학적으로 그렇게 십자가 형법을 만들어서 “흉악한 죄수는 이렇게 죽인다.” 이렇게 발표하고 시작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십자가 형법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선진국들 사형수들을 보십시오. 어떤 때는 부러울 만큼 고요하게 사형을 시키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교수형이라든가 총살형이라든가 하는 것이 가장 짧은 시간에 고통을 모르고 빨리 죽일 수 있는 방법이었는데 요즘은 그렇게도 안하고 편안히 침대에 뉘어서 예방주사 놓는 것처럼 주사 한 대를 살짝 놔주면 고요하게 잠을 자면서 그냥 죽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지었지만 죽일 수 있는 방법은 고요하게, 그래도 인생의 마지막을 마감하는 시간인데 이렇게 죽여야지 너무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은 훌륭하지 않다는 여론 때문에 지금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 형법은 심장에 있는 피가 가장 먼 곳 까지 통과해서 다 쏟아진 다음에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상태에 기절해서 쓰러지도록 그렇게 만든 형법이란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했는데도 죽지 아니할 때는 성경에 보세요. 다리를 꺾도록 그렇게 십자가 형법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운명하신 고로 다리를 꺾지 않았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무덤에 안치된 예수님에게는 세 가지 조치가 행해집니다. 그 조치는 행여나 국민 여론들 가운데 그 동안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건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완벽하게 했습니다. 큰 바윗돌을 굴려다가 무덤을 막았다고 그랬습니다. 유대 나라 문화는 무덤을 막지 않습니다. 다 열어놓습니다. 어떤 때는 저렇게 했을 때 좀 위험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언제나 거기서 관 뚜껑만 열면 시체를 볼 수 있는 그런 무덤 장례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납골당에 문을 걸어 잠그는 법은 없습니다. 다 열어놓습니다. 누구나 다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무덤만을 큰 바윗돌로 막아 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새벽에 무덤을 향해 가면서 걱정하는 말이 성경에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을 굴려 주리요?” 너무 큰 바윗돌로 막았기 때문에 여인들 몇 사람의 힘으로 그 큰 바위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하면서 가는 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그 돌을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인봉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 정부의 권한으로 인봉한 그 인은 로마의 관리가 아니면 아무도 손대지 못합니다. 손대었다가는 큰 피해를 당하게 됩니다. 총독의 인을 찍어서 총독의 명령으로 봉한 것입니다. 그 인은 총독의 명령이 있어야만 뗄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민간인이 그 곁에 갔다가는 오히려 화를 당할지도 모르게 그렇게 인봉을 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군대를 시켜서 보초를 서도록 했습니다. 로마 군대의 방법은 네 사람씩 조를 짜서 네 시간씩 24시간 교대 근무를 총독 명령으로 하도록 했습니다. 그만하면 완벽한 보완 조치를 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완벽한 부활 조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확실해 졌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는 책임을 맡았던 파수꾼들이 그 현장에서 되어진 일을 목격하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대제사장들에게 갔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이 탄로가 나면 신변상에 좋지 않는 일이 생기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일종의 직무 태만으로 벌을 받을 수 있고 큰 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되어진 사실에 대해서 양심선언을 할 수 밖에 없는 강한 충동 때문에 대제사장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예수가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현장 목격자들입니다.” “아니,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나?” “모릅니다. 그러나 살아난 것은 사실입니다.” 이게 패러독스입니다. 말은 되지 않는데 사실입니다. 한 사람이 본 것이 아니고 우리 네 사람이, 그리고 이 새벽에 그 무덤을 찾아온 많은 여인들이 함께 목격했습니다. “예수는 분명히 살아났습니다. 그의 무덤은 지금 비어있으며 굳게 닫혔던 돌은 굴러 무덤의 문은 지금 열려있습니다.” 이런 소식을 와서 군인들이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이 땅에 증거한 사람들은 로마 군인들입니다. 예수의 무덤을 지키던 사람들, 예수님을 못 박았던 사람들이 자기들 입으로 살아났다고 제일 먼저 부활 설교를 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무리들은 심상치 않은 문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절대 거짓말이 아닙니다.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살아날 것이라고 예언한 소문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도 이것이 사실이라고 인정을 합니다. 만약 그 시간에 로마 군병들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 살아났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이러한 완벽한 조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실적으로 증명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시급한 대책을 세우지요? 군사들에게 돈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본문에 많이 주었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많은 돈은 확실히 힘이 있습니다. 뉴스를 보세요. 이 기업에 특검을 들이대서 조사를 한다, 저 사람들한테 특검을 들이대서 조사를 한다 날마다 그러고 있는데 초점은 다 돈입니다. 돈이 그 초점에 있습니다. 부정부패 날마다 떠들지만 초점은 하나입니다. 돈을 어떻게 했느냐? 많은 돈은 그렇게 힘이 있잖아요? 그래서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었습니다. 한 가지 조건을 붙였습니다.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 시체를 훔쳐갔다고 하라.” 이 조건 하나가 명령으로 주어졌습니다. “총독이 알면 우린 어떡합니까?” “만약 총독이 이 사건을 알아서 너희를 벌할 것이 걱정이 된다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총독과 우리는 같은 선상에 있으므로 우리의 권력과 총독의 권한은 늘 내통하니까 총독을 설득해서 너희들을 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든지 로비 활동을 해서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돈 받고 거짓말 하나만 해 달라.” 이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군사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지막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그 사람들은 아무리 거짓말 하라고 가르쳤지만 현장을 목격한 비밀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가서 말했습니다. “예수는 살아났소. 우리는 현장에 있던 사람이요.” 보는 사람마다 말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습니다. “예수가 살아났소. 내가 지키던 사람이요. 내 눈으로 본 것을 어떡해?” 저는 목회 경험상 이 세상에 제일 빨리 퍼져나가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뭔지 아세요? “이것은 비밀이니까 말하지 말아라.” 하는 말입니다. 더 말하고 싶은 충동을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틀림없이 내 입을 떠난 말은 온 세상에 퍼지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그것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다섯 번의 양심선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조용히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지요? 왜냐? 진리는 죽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찬양하면서 부활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뜻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뜻이 뭐냐? 사망을 사망시킨 사건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무서운 장소가 하나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면 영생이라는 것이 약속되어져 있어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되는데 우리 육신은 세상에서 소멸되지만 그러나 영생을 누리는 생명 불멸의 진리가 있는데 그 진리를 우리들에게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신 약속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진리는 다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누가 이 진리를 위해서 몸을 바치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제자들을 다시 만났기 때문에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의 전파! 또 하나, 우리는 우리 생활 가운데서 부활시켜야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절망과 좌절에 거할 수가 있습니다. 부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육신도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활을 소원하고 있잖아요? 만약 어느 나라가 자유가 없다면 그 나라는 자유와 행복이 부활되어져야 합니다. 이 부활은 온 세상의 희망의 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생의 소망과 아울러 이 세상에서의 완전을 향한 회복! 이 두 가지가 부활의 뜻이 있습니다. 반드시 부활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한 세상의 역사 아닙니까? 아마 미국에 있는 모든 목회자들은 부활을 노래하면서 어떻게 설교하겠느냐? 제가 경험한 대로는 “청교도의 신앙을 부활하자. 미국 교회가 어찌 이렇게 가느냐? 우리는 청교도의 신앙을 물려받은 청교도의 후손이 아닌가? 청교도의 신앙을 부활하자.” 그렇게 설교할 것이며, 아마 오늘 대한민국의 수없이 많은 목회자들은 “북한 땅에 동양의 예루살렘을 다시 부활시키자.”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죽었던 것을 다시 살리는 영생의 진리와 이 세상에서의 희망의 회복을 말할 것입니다.
우리 개인적 신앙도 어떨 때는 그렇습니다. 신앙이 좌절과 절망에서 헤맬 때가 있습니다. 부활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잠시 주님을 배반하였다가 그의 신앙이 다시 부활하여서 나중에는 주님을 위해서 순교자가 된 것처럼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서 타락하여 살다가 돌아와서 아들의 자리를 회복한 것처럼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와서 영원히 부활하여 소생한 것처럼 각자 개인의 삶에도 부활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부활하기를 우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모든 것을 정상적으로 회복시키며 아름답고 거룩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래서 절망에서 희망을 갖게 되며 인격이 고상하여 지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힘을 소유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죽인 십자가는 그때까지 가장 흉악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십자가’ 하면 누구나 볼 때마다 몸서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의 모든 상징 마트 가운데 십자가는 가장 평화스럽고 거룩한 상징으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드라큘라’라는 영화를 봤잖아요? 이 세상의 흉악한 마귀를 이기고 물리칠 수 있는 힘은 십자가라고 하는 영화 문화를 만들었잖아요? 봤다는 것은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재판하고 세상에서 증거를 할 때 현장 목격자를 그렇게 찾는 것 아닙니까? 본 사람이 있으면 확실합니다. 본 것은 어떻게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거짓말 할 수가 없습니다. 협박에 의해서 잠시 거짓말을 했다가도 번복합니다.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는 다시 살아났어!”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 “그런 건 나도 모르겠고 살아난 걸 내가 본 걸 어떡하란 말이야?” 가는 곳마다, 아마 그 군병들은 평생을 통해서 가장 흥미롭게 말한 것이 그것일 것입니다. “예수가 살아났어! 나는 현장에 있던 사람이야. 살아난 걸 어떡해?” “네가 말한 것은 과학적이지도 않고 자연법칙도 아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나나?” “그건 나도 몰라. 그런데 살아났어.” 역설적 진리!
저는 미국 여러 곳에서 살았는데 생활 가운데 한국 같지 않아서 불편한 것들이 많이 있잖아요? 미국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자르면 좀 기분이 나쁠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의 없이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 의자가 왔다 갔다 하면서 이쪽으로 보냈다 저쪽으로 보냈다 성의 없이 합니다. 한국같이 잘 다듬어주지 않아서 기분이 좀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발이 좀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교회 나오는 고등학교 다니는 여학생이 “목사님, 제가 해드릴게요.” 그래서 맡겼더니 바가지 없어버린 것처럼 해놨어요. “너도 안 되겠다.” 그래서 머리 자르는 것이 좀 고민이란 말입니다. 저는 미장원에 가서 아가씨들에게 잘라달라고 하기엔 좀 쑥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사는 마을에 한국인 이발소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한국인 이발소가 들어오니 얼마나 좋은지 한국 남자들이 한국 이발소가 생겼다고 좋아하고 저도 그래서 그 이발소에 머리를 자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발소 아저씨는 얼마나 수선스러운지 이발을 하면서 뭔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는지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내 머리를 자르면서 나더러 “교회 다니십니까?” “네, 다닙니다.” “우리 동네에 아주 좋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교인도 많고 그 교회 목사님이 계신데 이필재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신데 어쩌고저쩌고….” 나에 대해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얼마나 재미나게 계속 하시는지. 제가 “그 교회 다니십니까?” 그랬더니 “아, 아닙니다. 아직 안다니는데 나도 나중에 나갈 겁니다.” “이 필재 목사님을 잘 아십니까?” “그럼요, 그 분 모르는 사람이 이 동네에서 누가 있습니까? 잘 압니다.” 이렇게 목회를 하다보면 공인으로 많은 군중들 앞에 항상 나타나야 하기 때문에 사실 해프닝이 많습니다. 비슷한 사람도 많잖아요? 나를 보면 이필재 목사님 닮았다고 하는 분이 그렇게 많습니다. 이발 다하고 나서 “아저씨, 제가 이필재 목사입니다.” “예?” “오늘 나에 대해서 너무 좋은 말만 해주셔서 얼마나 기쁘고 좋았는지 모릅니다. 행복했습니다. 여기 이발하러 오는 사람에게 항상 그렇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이 필재 목사를 봤다고 하십시오. 그리고 말을 하십시오. 우리 집의 단골손님이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팁을 좀 많이 주고 나왔습니다. 파수꾼들의 양심선언! “우리는 본 걸 어떡합니까?” “돈을 많이 줄 테니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나가서 “예수는 살아났어! 우리가 봤어!” 거기서부터 예수의 부활 사실은 온 세상에 퍼진 겁니다. 왜? 사실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의 기쁨을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예수 부활하셨네
마 28:11-15 / 박상훈 목사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부활이 빠져버리면 우리의 믿음은 제대로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장이라고 불리어지는 고전15:13∼14절에서 부활의 중요성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아무리 큰 집이라도 대들보가 바로 서지 못하면, 그 집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잘 믿는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바로 설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그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는 셈입니까?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그저 이 천년 전에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셈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죽음의 권세에 짓눌려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문제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신 능력이 없는 예수를 믿는 셈이 되니까,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자기 자신의 육체적인 부활도 믿지 못하는 셈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내세에 대한 아무런 소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자살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 세상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니까 영원한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원수인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의심스러운 생각을 자꾸 집어넣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견해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대표적인 몇 가지 주장들을 살펴보면서 그 주장들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것인지 검토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의 부활 신앙을 다시 한 번 굳게 세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기절설이 있습니다.
이 설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죽으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견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 때문에 정신을 잃어버리고 일시적으로 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무덤 안의 찬 기운과 또 세마포와 함께 둘러싼 향품에서 나오는 자극적인 냄새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금 정신을 차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신을 차리시고, 둘렀던 세마포를 손수 벗기셨습니다. 때마침 큰 지진이 일어나서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던 동굴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틈으로 빠져 나오실 수가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처럼 잘못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절설입니다. 터무니없는 이론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의 군병들이 만약 예수님이 살아 계셨다면 그것을 몰랐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사형 집행의 전문가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죄수를 죽이지 않고, 살려 내보내면 자기들이 처벌을 받거나 죽게 됩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이 예수님을 살려 내보냈겠습니까? 그들이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분명히 돌아가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안전하게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 그들은 날카로운 창으로 예수님의 허리를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분명히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에게 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 뒤 두 사람은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만일 그 때에 예수님의 숨이 끊어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기색이 있었더라면, 왜 그 두 사람이 몰랐겠습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이 분명하니까, 향품과 더불어서 세마포로 온 몸을 감쌌겠지요? 그러니 예수님이 무슨 수로 숨도 안 쉬시고 사흘 동안이나 기절한 채로 살아 계셨겠습니까?
또 이미 우리 예수님은 엄청나게 많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셔서 피 흘리시고, 가시 면류관에 찢기셔서 피 흘리시고, 손과 발에 굵은 못이 박혀서 피 흘리시고, 또 날카로운 창에 찔리셔서 피와 물을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토록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사흘동안 기절한 상태로 견뎌내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설사 그들의 말대로 예수님이 기절하셨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렇다 할지라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신 예수님이 세마포로 꽁꽁 싸여 있는데, 어떻게 자기의 힘으로 세마포를 풀 수가 있겠습니까? 거기다 로마 군병들의 엄중한 경계를 어떻게 뚫고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또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은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는 두 제자와 함께 오랫동안 같이 걸어 가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신 예수님이 기절하셨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셨다고 해도, 어떻게 그토록 오래 걸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도무지 얼토당토한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고서는 도무지 가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다시금 정신을 차리셨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둘째로, 매장부인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실제로는 무덤에 안치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무덤이라고 생각되었던 곳이 빈 무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수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로마 사람들의 관습에 의하면 죄수의 몸은 무덤에 안치를 시키지 않고, 공동묘지에 그냥 되는대로 가져다 던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상에 달린 두 강도와 함께 공동묘지에 던지움을 당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당초부터 무덤에 시신이 없었으니까 제자들이 가 본 무덤이 비어있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도 논리에 맞지를 않습니다.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군병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있지도 않은데, 큰 돌로 무덤의 입구를 막아놓고 인봉까지 합니까? 거기다가 파수꾼들이 밤새도록 그 앞을 지킵니까? 또 예수님의 시신이 공동묘지에 던지움을 당했다면, 가서 그 시체를 찾아오면 모든 의혹이 해결되지 않습니까? "보아라! 예수의 시체가 여기 있는데 누가 그의 부활을 주장하느냐?"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논박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장부인설도 전혀 설득력이 없는 이론입니다.
셋째로, 환각설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너무나도 갈망한 나머지 헛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 주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한 두 사람에게 나타났어야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전15:6의 말씀을 보시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토록이나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착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외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이론들이 참 많았습니다. 예컨대 텔레파시설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닌데, 그저 하나님이 제자들의 마음 속에 텔레파시를 보내서 제자들을 그토록 믿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하나님을 거짓된 하나님으로 만드는 처사입니다.
또 무덤오인설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여인들이 다른 무덤을 예수님의 무덤으로 오인하고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으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잘못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사기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예수님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가 부활한 예수라고 하면서 사기를 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반박할 가치조차도 없는 주장들입니다. 모두 마귀의 지껄임입니다.
우선 한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본시 어떠한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붙잡혔을 때, "예수님이야 돌아가시든지 마시든지 상관없이 그저 내 한 목숨 살아남아야겠다!"라고 예수님을 버려 두고서 도망쳤던 비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순간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핍박과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담대하게 입을 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들의 목숨을 기꺼이 바쳤습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변화가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컨대 바울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바울이 본시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일에 제일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서 살아도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죽어도 예수님을 위해서 죽겠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해답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들 모두가 자기들의 눈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부활의 신앙 위에 굳게 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그릇된 주장들이 한 가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시신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 어떻게 해서 잃어버렸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 바로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시체도난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중에 몰래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다른 곳에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치 예수님이 부활한 것처럼 거짓 증거를 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겠습니까?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이 주장이 가지고 있는 허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덤에 이르렀을 때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천사는 무덤 입구에 있던 큰 돌을 굴려 내었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무덤 안을 보여주었습니다. 빈 무덤이었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6∼7절의 말씀입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 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여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달려갔습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던 파수꾼들 가운데 몇 몇 사람이 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다 고했습니다. 예컨대 큰 지진이 일어난 것, 하늘에서 흰옷을 입은 천사가 내려온 것, 또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굴려낸 것, 무덤 안에 있던 시신이 없고 빈 무덤이 된 것 등 이 모든 것들을 그들은 대제사장들에게 자세히 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드는 줄 압니다. 왜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들이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먼저 가서 그 말을 고하지 않고, 하필이면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고했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서 받을 처벌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의논하면 무엇인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자세히 고해 바쳤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대제사장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무슨 소리야? 죽은 예수가 어떻게 살아나?"
이렇게 반문하면서 저들은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부인하려고 들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대제사장들은 감히 파수꾼들이 자기들에게 거짓 보고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수꾼들의 보고를 받은 대제사장들은 어떠한 조치를 취했습니까?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그들은 곧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함께 모여 이 일을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을 하셨는지, 안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그에게 가버리면 그 동안 자기들이 누리던 영향력과 권세, 영화 등이 줄어들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회를 모으고 의논한 결과 세 가지를 결정했습니다.
첫째로, 12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그들은 돈을 가지고 파수꾼을 매수했습니다. 파수꾼들이 여러 명이니까 돈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 거기다가 필요하면 앞으로 로마의 총독 빌라도까지 돈으로 매수해야 되니까 상당히 많은 돈이 들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그들은 파수꾼들에게 거짓말을 유포하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에 몰래 와서 시체를 훔쳐서 어디엔가 감추었다고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로, 14절 말씀입니다.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그들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를 돈으로 매수할 것입니다. 만약 빌라도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렇게 으름장을 놓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당신에 대한 좋지 않은 보고를 올리겠소!"
여러분, 빌라도가 어떤 위인이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가 없는 줄 뻔히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리에 내어주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빌라도는 유대인들과 괜히 나쁜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세 가지 조치를 파수꾼들이 듣게 되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그들은 기꺼이 돈을 받았습니다. 그들로서는 주머니에 돈이 생겨서 좋고, 또 처벌받지 않아서 좋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르친대로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거짓된 소문이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한 당시까지,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삼십 년 뒤가 되는 시점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상이 시체도난설의 진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설도 모순투성이입니다. 몇 가지만 대표적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첫째로,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서 어디엔가 숨겼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빨리 손을 써서 예수님의 시체를 찾으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껏해야 열 두명 뿐입니다. 그들을 잡아서 고문하면 왜 입을 열지 않겠습니까? 또 설사 입을 열지 않는다 할지라도 로마의 군병들이나 대제사장들의 종들을 풀어서 예수님의 시체를 색출하면 금방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보아라! 여기 예수의 시체가 있는데 누가 감히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하느냐?"라고 한다면, 어찌 제자들이 거기에 대해서 언급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로마의 군병들은 아무도 그런 시도조차도 하려고 들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들도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쳤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부터 믿었습니까? 예수님이 수 차례 걸쳐서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라 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제자들조차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는 죽지 않는다고 하는 사상이 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은연중에 그런 사상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니까 제자들이 낙심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눅24:11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이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을 때입니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믿지 아니했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책망을 내려가던 두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무슨 책망을 받았습니까? 눅24:25의 말씀입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두 제자는 마음에 더디 믿는다고 예수님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모였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공교롭게도 도마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나중에 도마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
그 때 도마가 그 말을 듣고 믿었습니까? 아닙니다. 요20:25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는 도무지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에서 붙잡혔을 때 자기들만 살겠다고 예수님을 버려두고 다 도망쳤던 겁쟁이들이었습니다. 나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중에 몰래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올 용기가 과연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부활하시지도 않은 예수님을 위해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받쳐 순교까지 합니까?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앞뒤가 서로 맞지 않습니다.
셋째로, 로마의 군병들이 파수를 서지 않고 모두 잠을 잤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물론 여러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은 파수를 서고, 그 나머지는 잠을 잤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병들이 자기들의 책임을 소홀히 하고 모두 잠을 잡니까?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설사 자기들의 말대로 잠을 잤다면,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몰래 훔쳐갔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서로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아울러 그 때 큰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는 큰 돌이 굴러가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을텐데, 한 사람도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세상에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겠지요.
"지나가던 사람이 보고서, 군병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나 이 말도 맞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서둘러 범인을 잡아 잃어버린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것이 급선무지요? 성안에 가서 대제사장들에게 되어진 일을 고하는 것이 급선무였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우리 예수님은 부활한 것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다. 그래야 우리의 부활에 대한 믿음도 굳게 서는 것입니다. 이 세상만 바라보지 아니하고, 영원한 내세를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왜 마태가 오늘 본문 속에서 로마 군병들의 입에서 나온 거짓된 소문을 기록했겠습니까? 여기에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는 줄 압니다. 본문에 나타난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입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의 입을 통해서 부활이 증거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까지 했지만 타락한 종교인들에게 매수를 당해서 진실과는 전혀 반대되는 거짓말을 유포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누구를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증거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18∼20절까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우리들, 살아 계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마음이 뜨거운 우리들, 예수님이 너무 좋고,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는 우리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에게 이 영광스러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을 마감하면서 결론적으로 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주님 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주를 위해서 더욱 힘쓰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를 위해서 흘린 눈물과 땀, 부활의 증인으로서 애쓴 노력은 주님 앞에 서는 날, 주께서 아름답게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부활하신 예수님, 사망의 권세를 깨치신 예수님, 지금도 살아 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대·사·명 (大使命 Great Commission)
마 28:11-20 / 최영기목사
인간은 죽을 때에 가장 중요한 말을 할 것 같은데 의외로 싱거운 말을 하고 죽습니다. 죽을 때에 했던 말을 모아놓은 것을 읽었는데 위대한 인물들의 마지막 말이 의외로 평범합니다. 나폴레온은 "Josephine!"이 마지막 말이었답니다. 처칠은 "지루해 죽겠다"가 마지막 말이었는데 9일 후에 죽었습니다. 독일의 시성 궤테가 죽을 때에 "More light!"이라고 해서 시성답게 더 많은 영감과 깨우침을 갈구했다고 말하지만 당시에 상황을 보면 방안이 어두우니까 커튼을 더 활짝 열어달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마지막 말을 "다 이루었다!"는 환성이었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도 마지막 부탁을 하셨는데 이것을 위대한 사명 (Great commission)이라고 부릅니다. 지난 1년여를 마태복음을 상고해왔는데 마태는 복음서의 마지막을 위대한 사명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경비병들의 위치는 곤란해지고 말았습니다. 시체가 사라졌습니다. 상관에게 가서 천사가 나타났고 시체가 없어졌다고 보고해보아야 믿어주지를 않을 것입니다. 시체를 잃어버리고 구차한 변명을 한다고 할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군기가 엄중했기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을 호송하다가 놓치면 호송하던 군인이 대신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미 죽기는 했지만 빌라도가 봉인한 무덤에서 시신이 사라지는 결과가 생겼다면 중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에게 군인들을 부쳐주었으니까 곤경에 처함 군인들은 일단 대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뇌물을 주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이 씌워질 때까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지고 무덤이 비어있는 사실을 제자들이 훔쳐가서 그렇다고 대부분은 믿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Ⅰ. 인간은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제사장의 사주를 받아 군인들은 자신이 잠들었을 때에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했지만 이 말 자체에 모순이 담겨져있습니다. 잠들었을 때에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했는데 잠든 사람이 누가 훔쳐갔는지 어떻게 압니까?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당시의 상황을 볼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다가 어디엔 가에 감추어 놓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거짓을 선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당시 제자들의 상태가 그런 생각을 할 상태가 못되었고 그런 시도를 한다해도 무덤을 지키는 군인들과 격투를 벌여서 그들을 물리칠 능력이 안되었고 설사 그러해서 예수님의 시신을 감추어 놓고 그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시켰다고 해도 제자 중에 한 명의 배반자도 없이 순교를 감수했다는 사실은 설명이 되지를 않습니다.
1. 인간은 진리보다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옛날뿐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는 이유를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서 그렇다는 이론을 제시하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이렇게 말이 되지 않는 사실을 사람들이 믿을까요? 사람에게는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믿고 싶지 않은 것을 믿지 않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근거 없는 말이라도 자기 생각과 맞으면 진리처럼 믿습니다.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음모론이 제기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근거가 있어서 보다도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 거꾸로 믿고 싶지 않으면 아무리 근거를 제시해도 믿지를 않습니다. 자신이 받고 잇는 오해를 풀어보려고 했던 분들은 무슨 말인지를 알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자신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을 가졌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말도 안되는 사상이나 철학에 빠져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들은 인간은 진리이어서 보다는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안 믿고 싶은 것을 안 믿는 성향을 의식하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사고에 빠져서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조명을 간구해야한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는 진리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고전 2:14). 참된 진리는 성령님이 조명해 주셔야합니다(요 16:13). 그러므로 진리를 알기 위하여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서 성령을 받아야합니다. 그때에 참된 진리가 깨달아집니다. 세상 사람은 알고 믿는다 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덮어놓고 믿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 기초하여서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서 성령을 받을 때에 비로소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누리는 축복이 많지만 제 개인적으로 가장 큰 축복은 인생이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상적으로 부모 밑에서 크지를 못했기 때문에 비관적인 인생관을 가졌습니다. 국민학교 때에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깨지 말았으면 하고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depression에 빠진 것입니다. 그 나이에 자살 충동을 느낀 것입니다. 인생을 이해하고 사람을 알고 싶어서 심리학도 공부하고 이런 저런 사상과 이론에 심취하기도 하고 초월 명상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책을 읽거나 세미나를 들을 때에는 참 좋은데 실제로 살아보려면 잘 안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니 인생이란 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문화를 이해하게 되고 인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믿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계속 확인하여 주셨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주저하시는 분들은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아는 것임을 깨달아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 받아서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3. 믿기로 결정하여야한다
열 한 제자는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갈릴리로 갔습니다. 이때에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의심한 사람들은 사도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때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 이상을 보았습니다. 고전 15:6에 보면 500명이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는데 의심했던 사람들은 이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왜 의심하였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록을 보면 다들 처음에는 잘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부활한 예수님이 한참을 동행한 후에 알아보았습니다(눅 24:15-16). 막달라 마리아도 그러했습니다(요 20:14). 부활하신 모습은 무엇인가 위엄이 서려있고 영광에 둘려 있어서 세상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라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가운데에 "이분이 정말 예수님인가?" 의심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태가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은 부활을 보았다고 다 믿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인 것 같습니다. 기적이 반드시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 때 열 가지 재앙을 이 내리시고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상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또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믿어지지 않았을 때에 예수님이 살아서 이적을 베푸시던 시대에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생각을 더 않습니다. 우리는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안 믿고 싶은 것을 안 믿는 성향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크나큰 능력이 나타나는 현장에서도 얼마든지 안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21세기에 태어나셔서 부활하시고 이 사실을 TV로 찍어서 방영을 했으면 많은 사람들이 쉽게 믿었을 텐데."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를 저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기 원하면서 아직도 무언가 더 큰 증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오늘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증거가 있다고 반드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역사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여러분만큼 똑똑한 사람들이 믿고 있습니다. 또 믿으니까 좋더라는 이미 믿은 사람들의 수많은 간증이 있습니다. 이러한 근거에 기초하여서 더 큰 증거를 기다리지 말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Ⅱ. 교회의 존재 목적은 대사명 완수이다
1.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유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중요한 명령이기 때문에 이것을 대사명(Great Commission)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교회에 주신 사명입니다.
여기에 4개의 동사가 등장합니다. 가서, 제자를 삼아, 침례를 주고, 가르쳐지키게 하라. 이 4개의 동사 중에서 명령형은 제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대사명의 핵심을 말한다면 가서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형성된 사명 공동체입니다. 가서 제자를 만드는 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교회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 두 가지 사역에서 초점을 떼지 않도록 조심하여야합니다. 교회는 상처를 치유 받는 곳이 되어야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되어야합니다. 이민 교회라면 이민들의 안식처도 되어야합니다. 또 말씀을 배우는 곳도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은 대 사명을 이루기 위한 활동이 되어야합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하여 영혼 구원하여서 제자 만드는 사역이 소홀히 되어서는 안 됩니다.
2. 교회 사역을 대사명에 비추어 점검한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대사명을 항상 기억해야합니다. 모든 활동은 이 활동이 대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필요하다면 희생이 따르더라도 과감히 실천해야할 것이요 필요하지 않다면 에너지가 낭비되지 않도록 활동을 없애던지 축소하여야할 것입니다. 예산 집행도 대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필요하다면 큰 지출도 마다 않아야 할 것이요 대사명과 상관이 없다면 가능하면 지출을 줄여야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대 사명에 비추어 ‘영혼 구원하여 전도하는 일’을 사명으로 알고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 주신 대사명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열매를 허락하셨습니다. 작년에 한어부 장년만 163명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매주일 3명 꼴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영혼 구원하여서 제자 만드는’ 사역은 이웃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행 1:8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쉽게 말하자면 전도와 선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금년 여름에 빈민가 선교, 장애자 선교를 포함하여 멕시코, 아르헨티나, 아프가니스탄 선교를 11개 팀이 다녀왔습니다. 작년에 선교국을 통하여 지출된 선교 예산이 약 60만 불입니다. 또 최초로 선교사 파송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대사명에 집중하여 불신자에게 전도하여서 제자 만드는 사역에 집중했을 때에 성도들의 입에서 교회 생활이 행복하다는 고백이 나왔습니다. 계속하여서 교회의 존재 목적을 잊지 않고 이에 집중할 때에 우리 교회는 계속하여 주님에게 쓰임 받고 성도들의 입에서는 계속하여서 행복하다는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3. 같이 하시는 주님 능력을 의지하여야한다
이러한 주님의 대사명을 받는 제자들에게는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가진 것도 없고 교육도 많이 받지 못한 시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만들라는 주님의 명령은 수행이 불가능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한 것이 능력과 임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대사명을 주시면서 또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미래형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로 번역이 되어야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명 주시고 멀리서 지켜보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와 항상 같이 하시는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단과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승리를 등에 업고 소탕전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 이락 상황과 비슷합니다. 이락 전쟁은 연합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함으로써 실제적으로 끝났습니다. 지금도 소규모의 전투가 벌어지고 매일 사상자가 생겨나지만 그러나 이런 것이 연합군이 승리를 바꾸어놓을 수는 없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주님도 승리를 이루시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가지시고 하늘과 땅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땅끝까지 이러한 주님의 승리를 선포하고 사단의 통치 밑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원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대사명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에 우리는 사단의 공격을 받기도 하고 부상을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승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을 엄두를 낼 수가 있습니다.승리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승리합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받으신 주님의 권세를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것으로 만듭니까? 믿음으로 만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주님이 나와 같이 하시고 주님의 대사명을 감당하고자 할 때에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리라는 것을 믿고 이러한 권세가 나타날 것을 기대할 때에 이러한 능력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권세를 등에 업고 질병과 사단과 죄를 정면으로 도전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그 이후
마 28:11-20 / 이성우목사
오늘은 어린이주일로 정하여 지키는 주일입니다. 1923년 소파 방정환 선생의 주장으로 어린이 명절을 지켰으며, 교회는 1957년부터 5월 첫 번째 주일을 어린이주일로 정하여 지켜왔는데 어린이주일을 ‘꽃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1964년 전국 기독교 교육대회에서 기독교 어린이 헌장을 공포하여 어린이들의 권익을 보호해 오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인 어린이들은 조국의 미래이며, 교회의 미래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보호하고 사랑으로 돌봐야 할 대상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들에게 보다 나은 환경을 물려주어야 할 거룩한 사명과 책임이 우리 기성세대 사람들에게 있는데, 요즈음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환경을 돌아볼 때 그렇지 못한 방향으로 자꾸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스러운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이 우리 모두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기성세대인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들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어린이들에게 반드시 물려주어야 할 귀한 유산들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한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창조주요 살아서 오늘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물려주어야 할 텐데 오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이 믿음을 물려주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온통 세상적인 것만이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을 더 많이 물려주고자 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어 보여서 참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들 가정과 주변 사람들에게 서만이라도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믿음을 물려주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부활절을 보내고 맞이하는 첫 번째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 그 이후에 있었던 일들 가운데서 몇 가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핵심적인 믿음의 고백은 다섯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동정녀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신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고 우리의 이성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그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온 세상의 구세주가 되셔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으신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으심을 죽으신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합리적인 생각과 지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믿음으로만 고백되어 질 수 있는 진리입니다.
세 번째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 설 못지않게 이 고백이야말로 과학적인 사고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사건에 대한 고백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의 대전제가 있다면 얼마든지 고백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네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무리 하신 후에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과 상급이 분명히 주어짐을 보여줌과 동시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신앙고백의 내용입니다.
다섯 번째는, 승천하신 그 예수님께서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재림 주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 고백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데, 곧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완전한 구원과 영광의 날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심판과 죽음의 날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고백은 그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없는 위로와 소망을 갖게 하는 신앙고백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 다섯 가지 신앙 고백이 모두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나머지 네 가지의 신앙 고백이 가능해지게 만드는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으로 가장 중요한 고백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들의 진정한 구세주가 되심으로써 우리들의 위로와 소망이 되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절망과 두려움, 그리고 실패와 슬픔이 극복되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영생의 소망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가지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사건 그 이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고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우선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선적으로 하신 일은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번에 걸쳐서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의 몸을 보이시고 그들을 만나주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만나주심을 통하여 부활의 확실성을 증거 해 보이시길 원하셨으며, 만나는 사람들마다에게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며 믿음 갖기를 촉구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적으로 어두워진 눈을 뜰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오셔서 절망과 슬픔, 그리고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는 그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셨으며,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시며 위로해 주심으로 그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을 것과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게 될 때까지 예루살렘 성에 머물러 있을 것을 말씀하셨으며, 그 능력을 받은 이후에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 줄 것을 당부하는 파송에 관한 명령과 목양에 대한 명령, 그리고 주님을 따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이후 마지막 6주간이 넘도록 적어도 서너 차례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나아가야 할 것을 명령하신 것을 사복음서에서 골고루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오늘 본문 말씀이, 요한복음서에서는 21장의 말씀이, 그리고 누가복음서에는 24장 47절 이하의 말씀이, 마가복음서에는 16장 15절 말씀이 바로 그 명령과 관련된 말씀들입니다. 이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복음 전파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그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일에 실패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어서 지쳐 있었던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셔서 조반을 준비하여 먹이시는 사랑을 보이셨으며, 그들에게 능력을 보이시며 재차 사명을 주심으로써 새로운 기회를 주셨으며, 그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심으로 다시 이 땅에 재림주로 오실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이 받은바 사명에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고,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복음서의 내용을 토대로 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그들은 더 이상 절망과 슬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믿음 없는 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평강과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담대히 증거 하는 자로 변화되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행전의 말씀 속에서 부활 이후에 되어진 일들을 살펴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체험하게 된 그들은,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며,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말씀 가운데 굳게 섰으며, 서로 교제하며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공유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서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칭송받는 삶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누렸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부활하신 주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찮은 것이요 오직 주님만이 가장 존귀한 분이심을 알아서 평생을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헌신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으며, 주님께서 분부하신 복음전파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마가복음 16장 15절-16절을 보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구원과 정죄에 대해서 중차대한 책임이 주어져 있음을 깨달아서 파수꾼의 사명, 곧 다른 사람들을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워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진정한 구세주로서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증거 하고자 충성을 다하는 삶을 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한결 같이 지대한 관심을 보이신 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으며,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은혜를 체험하고 사명과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던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한결같은 삶, 곧 복음 전파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면서 충성을 다하는 삶을 살았던 사실에서 우리는 오늘 아침에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아무리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실을 전하지 않으면 그 놀라운 생명의 역사는 그것으로 중단되어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부활의 능력으로 역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써 누구라도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그 은혜와 능력 안에서 살아가게 되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법인데, 이 사실이 전파되지 못하면 더 이상 부활의 열매가 맺히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증거 하는 일은 마치 부활의 능력이 더 많이, 더 멀리 전해짐으로써 부활의 열매가 계속 이어져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그 생명이 정말 사는 것처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진정한 구세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전하는 복음 전파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인 줄로 믿습니다. 이 복음 전파의 사명, 곧 부활 생명과 그 은혜와 능력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가는 일을 위해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먼저 이 은혜와 능력을 누리게 되었음을 믿으시고 이 사명을 감당하시는 일에 제자들처럼 충성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28장 11절-20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 그 이후에 있었던 서로 다른 두 가지 일을 기록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생명의 역사를 가로 막으려고 하는 사단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의 전반부인 11절-15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 성 안에서 벌어진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 경비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고 그들을 매수하여 예수님의 부활소식이 더 이상 전파되지 못하도록 입막음을 하면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문 말씀의 후반부인 16절-20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부활 사건의 당사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을 만나셔서 그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온 세상에 다니면서 증거 하도록 명령하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복음서 이후에 기록된 사도행전 이후의 모든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이 사명을 받은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이 명령을 충성스럽게 감당함으로써 이루어진 놀라운 일들을 기록해 놓고 있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멀리 멀리,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무덤 문을 열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루어 나가시는 생명의 역사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그 누구에 의해서도 결코 방해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사단이 제 아무리 방해하려고 해도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고 이루어져 나가게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사단의 역사를 결박하시고 최후의 승리를 이루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 일을 위해서는 복음 전파에 목숨 걸고 충성할 제자들이 필요함을 깨우쳐 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에 이 세상에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활 생명의 역사를 짓누르고 죽이고자 하는 사단의 역사가 끊임없이 있어왔지만 결국에는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목숨을 걸고 충성했던 복음 전도자들에 의해서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여기 저기 흩어져서 풍성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오게 되어서 저와 여러분들도 이 부활 생명을 누리게 된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부활 생명을 전하는 일에 나서야 할 차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부활 생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나가는 일을 위한 징검다리로 부르셨음을 믿으시고 어떤 상황 가운데서라도 충성스럽게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심으로 부활 생명 전파를 위한 거룩한 징검다리로 귀하게 쓰임을 받으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마 28:16-20 / 박상훈목사(승동교회)
금년 우리 교회의 표어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교회”입니다. 금년 하반기에도 우리 모두 예수님의 충성된 증인이 되어, 복음 전파에 더욱 힘쓰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큰 물고기 153 마리를 잡되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였습니다.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막16:15 말씀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 후에 그들은 예수님의 지시를 따라서 갈릴리에 있는 어떤 산으로 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아와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또 다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 후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 그의 제자들을 자신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행1:8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는 날까지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기셨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파하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흔히들 복음을 전파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켜서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불순종하거나 거역할 수 없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복음 전파는 예수님의 유언이자 예수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의 증인으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날마다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지극히 낮추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28: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무덤을 찾아온 여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28:10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제 곳으로 갔습니다. 따라서 나머지 열한 제자가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지시하신 어떤 산에 이르렀습니다.
갈릴리에는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된 산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산도 있고, 또한 오병이어로 이적을 베푸신 산도 있고, 아울러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화된 산도 있습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시하신 어떤 산으로 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미 여러 번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 후 자신의 무덤을 찾아온 다른 여자들에게도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낮에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도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 날 저녁 제자들이 한 곳에 모였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금 제자 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 때는 도마도 그 곳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갔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있는 말씀처럼, 그 때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제자는 디베랴 바다로 가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이 지시하신 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그 곳에는 열한 제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믿는 다른 제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고전15:6에서 바울이 말씀한 대로, 바로 이 때 오백여 형제들이 그 곳에 모였을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대적하던 자들은 대부분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백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대적하는 자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안전하게 모일 수 있는 장소로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에 있는 어떤 산이 적합했을 것입니다.
마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열한 제자는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자들도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했습니다.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니까 도마의 고백처럼,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이시며 자신의 하나님으로 경배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열한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몇 번 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모인 오백 명의 대부분은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 곳에 오백 명이나 모였으니까, 멀리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이 분명하게 잘 보이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 가운데는 의심이 많았던 도마처럼, 또는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처럼 믿기를 더디 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예수님은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 앞으로 나아오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좀더 그들 가까이 나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평소에 말씀하시던 친숙한 음성으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또한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종전에 의심하던 자들도 예수님께 경배하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에 도사린 의심을 떨치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나아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시작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에게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권세는 인간 세계와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를 총망라하는 절대적인 권세입니다.
이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나아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순종만이 요구됩니다. 이 때 예수님이 나아와 하신 말씀을 지상 명령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을 겁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제자들의 용기를 북돋우어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계22:12 말씀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실 상을 가지고 오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수고는 주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은 우리가 주를 위하여 행한 대로 다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하여 더욱 헌신하며, 또한 복음 전파에 더욱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말씀을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명하신 말씀에 절대 복종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서, 명령형으로 사용된 동사는 하나입니다. “제자로 삼아”뿐입니다. 그 외의 동사들 곧 “가서”와 “세례를 베풀고”와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다 분사입니다. 이들 세 분사는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달성하기 위해서 행해야 할 사항들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지상 명령의 핵심인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는 말씀을 살펴봅니다.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유대인에게도 전파되어야 하고, 헬라인에게도 전파되어야 하고, 로마인에게도 전파되어야 합니다.
행4:12 말씀과 같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아니하면 그 어떤 민족도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만이 모든 민족을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제자로 삼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물론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제자로 만들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데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세 가지 방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시금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1)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2)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3)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첫째, “너희는 가서”입니다. 이 말씀을 행1:8에 기록된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따라서 표현을 한다면 이와 같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한 마디로 복음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찾아주셔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을 가까이는 예루살렘에서 멀리는 땅 끝까지 보내셨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전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잃은 양을 찾는 심정으로 찾아나서야 합니다. “너희는 가서.” 예수님은 우리도 보내십니다. 복음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또한 누구에게라도 적극적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입니다. 세례는 예수님이 명하신 예식입니다. 세례는 예수님과 연합되었음을 외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보면,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그 즉시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성삼위의 이름으로 베풉니다. 이 때 이름이란 단어가 단수형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언제나 일체이시며, 한 이름 곧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언제나 하나 되어, 한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 전파의 사명에 충성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지키게 하라”는 말씀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을 보면, “가르치라”는 단어가 강조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을 배워서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려면,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대로 살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으로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의 지상 명령은 사람을 죽이라 하심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라 하심입니다. 그것도 영원히 살리라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마지못해서 따르지 말고,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적극 순종하며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마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예수님의 위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여 나아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친히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볼지어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먼저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예수님은 항상 미쁘시기 때문에, 자기가 약속하신 말씀을 부인하실 수 없으십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내가”라는 일인칭 대명사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은 하늘에서 지켜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그들을 돕도록 천사만을 보내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과거에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앞으로도 세상 끝날까지, 곧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항상”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승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이신 성령님을 그들에게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그들과 항상 함께 하시며, 그들을 도우시는 보혜사가 되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보면,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 이와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내실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면, 그들은 권능을 받아 담대하게 나아가서 복음을 전파할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바라시는 대로, 그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예수님이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힘으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셨다면, 그들은 매우 곤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질 모든 박해를 이겨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은 그들과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미쁘신 예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있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명에 기꺼이 순종하여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이 주시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 전파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이제는 땅 끝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면서, 성령님의 권능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심고 물을 줄 뿐이며,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 전파는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파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명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그의 제자들을 데리고 가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교회를 남기셨습니다. 이는 그의 제자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 곧 복음 전파의 사명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한 마디로 전도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도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도 복음 전파의 사명이 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충성된 증인이 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갈릴리 명령
마 28:16-20 / 류철량목사
갈릴리는 팔레스타인 북쪽에 있는 담수호를 말합니다. 게네사렛(눅5:1)이나 디베랴(요6:1)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삼년의 전도활동이 주로 이곳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같은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던 어부 출신입니다(마4:18-22,막1:16-20). 보리떡과 물고기로 수천 명을 먹이신 기적도 이곳에서 하신 일이고, 물위로 걸어가신 것도 갈릴리 호수입니다(마8:1-10,요6:16-21). 폭풍을 꾸짖어 잠잠케 한 것도 갈릴리였습니다(마8:23-27).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28:10)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16절) 이 말씀은 갈릴리로 모이라고 하셔서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모였다는 말입니다. 거기 모인 열한 제자들에게 하신 분부를 “위대한 명령”이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가 갈릴리라는 역사성을 생각할 때 “갈릴리 명령”이라 하겠습니다.
경배하는 자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경배했다는 말입니다.
경배가 무엇입니까? 존경하는 마음의 표로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그 분에 대한 경외와 사랑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경배라는 말은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어야 할 거룩한 용어입니다. 예수님을 유혹하던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니 예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수종들었습니다(마4:8-11).
경배는 아무한테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머리를 아무데나 수그리면 안됩니다. 내 몸의 우두머리인 머리는 최고의 머리이신 하나님께만 경배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엎드렸다는 기록이 나옵니다(창17:3,17).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경배 드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을 때를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감격했을까? 얼마나 반갑고 기뻤겠어요. 주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자랑스러웠을까? 그래서 경배했습니다.
바알 숭배자들은 송아지에게 입맞춤으로 경배합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 다가와 간사하게 인사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로마 군병에게 체포하라는 신호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롯유다에게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고 하셨습니다(눅22:48).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라”(시2:12) 경배하는 사람만이 그 분의 명령을 따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께 경배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의심하는 자들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17절) 의심이란 확실히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것입니다. 열한 사람 중에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믿는 것은 억지로 강요할 수 없습니다. 안 믿어지는데 어찌합니까?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8-39)
모든 성취의 방해자는 의심입니다. 강하고 적극적인 믿음이 있어야 전진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8)
물위로 걸어가던 베드로가 물에 빠지게 된 것은 믿음에 의심이 끼어든 탓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31)고 하셨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지 못합니다. 의심 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바랍니다.
권세자의 명령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18절)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가르치는 권세, 귀신을 내쫓는 권세, 죄를 사하는 권세, 풍랑을 잔잔케 하는 권세, 그 모든 권세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지배력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만물의 창조자로서의 왕권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말하기를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런 권위를 주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직답을 피하시고 나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말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 부터냐고 반문하셨습니다(마21:23-25).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의 권세를 받을 때 나는 그 권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 권세자의 명을 따를 때 나도 그런 권세자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합니다. “예수님 권세 예수님 권세 예수님 권세 내 권세 할렐루야 할렐루야 예수님 찬양 합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예수님 찬양합시다”
위대한 명령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19절)
“가라!”는 이 명령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한 말은 내 스스로 한 말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또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내게 명령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분이 하신 명령이 영생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게 그렇게 말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쉬운성경 요12:49-50)
선교사는 하나님이 보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파송된 자들입니다. 그는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 사명입니다.
내가 신학생 시절 어떤 교회에서 사역하는데 나를 오해한 집사님이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당장 돌아가라!고 소리쳤습니다.
내가 그분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교회에 온 것은 당신들이 오라고 해서 온 것 같지만 나를 이곳에 가라 하신 분이 있어 왔다고 했습니다.
사도란 보내는 자의 권위를 부여해서 보냄을 받은 자를 가르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 신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갈1:1)
사도직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주님의 분부하신 일은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이 사도의 직무입니다.
사도는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이 확실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딤전1:1-2)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믿음 안에서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했습니다. 아들이라도 믿음 없는 아들은 명령을 농담으로 여깁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군대는 명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명령에 합당한 응답은 복종입니다. 명령 앞에서 변명은 안 통합니다. 오직 복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명령에 무슨 타협입니까?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계실 때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입추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중풍병자 한 사람을 데려온 네 사람에게서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지붕을 뚫고 환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의 합심, 그들의 수고는 믿음으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구원받아야할 환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것입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눅19:10) 우리가 할 일은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아버지의 집을 채우는 일입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복종하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세우신 것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신 것입니다(막3:14-15).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임마누엘!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은 전도하는 이와 함께 하십니다. 봉사하는 이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으로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하나님이 환상 중에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10)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
예수님의 대위임 명령
마 28:16-20 / 박덕기목사(송정중앙교회)
임금의 명령을 가리켜 ‘어명’이라고 합니다. 임금의 명령은 대단해서 “어명이오. 죄인 아무개는 사약을 받으시오.”라고 하면, 죄인은 지체 없이 독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 지휘관이 그날의 전투 상황에 대해 장교들과 함께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이 물었습니다. 어느 군인이 그 날 가장 탁월한 군인이었는지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어느 장교는 가장 탁월한 군인은, 그 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군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장교들은 이 군인, 저 군인 자기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지휘관은 말했습니다. “아니오. 여러분 모두가 다 틀렸어요. 오늘 전장에서 최선의 군인은 적을 죽이려고 칼을 들어 막 내리치려는 순간, 퇴각 나팔 소리를 듣고 적을 치지 않고 팔을 내리고 나팔 소리대로 후퇴한 군인입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오늘의 가장 고귀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재회하신 사건 및 그들을 향해 주시는 ‘지상 명령’(the Great Commission), 또는 ‘대위임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구속 사역을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앞서 이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하여야 할 바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이 명령을 목숨을 다하여 지켰고, 오늘날까지 뜻있는 성도들에 의하여, 이 명령은 계속 수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주님의 지상 명령에 복종해야만 합니다. 이제 본문 말씀을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6-17절에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마 26:32절에서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 후 나타났던 천사들도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시려고 자신의 제자들을 갈릴리의 한 산으로 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곳에 모인 제자들은,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영광의 주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그곳에 어디냐고요? 바로 하늘의 시온 산에 있는 새 예루살렘성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주님이 우리와 만나기로 약속하신 곳은 이 땅이 아니라, 저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그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그곳으로 전진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것에 미련을 두고 주저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저 약속의 장소를 잊은 성도는 없습니까? 하늘 영광을 얻고 주님을 뵈오려면, 부단히 신앙의 달음질을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저 천국에서 주님과 만나기로 약속한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과 만나기로 약속하신 저 천국을 향하여, 날마다 전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신 장소는 갈릴리였습니다.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갈릴리는 주님이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신 곳이요, 또한 주님의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갈릴리는 대부분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주님의 제자로서의 영광을 얻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 나선 곳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의 죽으심으로, 그 꿈과 소망과 기쁨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슬픔과 절망과 패배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죽은 예수님만을 생각하며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의 모습을 보여 주시고,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천국에 대한 소망과 믿음, 승리의 확신과 사명의 재다짐을 확인시켜 주시고자 갈릴리로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제자들처럼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주님이 안 계신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는 불신앙과 죄악의 권세만 넘쳐나고, 나의 믿음과 소망은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그 신앙의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 우리가 주님을 영접했을 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때의 그 기쁨, 그 신비로웠던 체험, 주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셨던 사랑, 그리고 나의 꽃처럼 아름다웠던 믿음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새로운 신앙의 힘과 확신이 생겨날 것입니다.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외롭고도 쓸쓸한 모습/말없이 홀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을 다 버린 나그네/정녕 그 분이 내 형제 구원했나/나의 영혼도 구원하려나/의심 많은 도마처럼 물었네/내가 주를 처음 만난 날
내가 다시 주를 만났을 때, 죄악으로 몹쓸 병든 몸/조용히 내 손 잡아 이끄시며/병든 자여 일어나거라. 눈물 흘리며 참회 하였었네/나의 믿음이 뜨거웠었네/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내가 이제 주를 만남으로, 죽음의 길 벗어나려네/변찮는 은혜와 사랑 베푸신 그 분만이 나의 구세주/주 예수 따라 항상 살리로다/십자가 지고 따라 가리라/할렐루야 주를 만난 이 기쁨, 영광의 찬송을 돌리리.♪
성도 여러분! 인간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우리 영혼과 신앙이 침체되는 이유는,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주님과 처음 만났을 때의 체험을 기억하심으로, 그 슬럼프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마침내 믿음의 승리를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게 된 열한 제자들은, 주님께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경배’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프로세퀴네오’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제자들은 그 때가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는, 그분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예배드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썩어질 우리의 몸과 같은 몸이 아니고, 영원히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의 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향하여 한없는 외경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하나님이시며,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의 주인이시며, 그 모든 것들에게서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경배를 기꺼이 받아들이심으로,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며,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으로 경배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게 된 제자들이 주님께 경배한 것처럼, 우리의 예배 수준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처음 주님을 믿을 때는, 그저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점차 믿음이 성장할수록,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이 완숙한 단계에 이르게 되면, 주님이 얼마나 고귀한 분인지를 알게 되어 순수하게 경배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조건부 예배는 합당한 예배가 아닙니다. 주님께 은혜를 받든 못 받든, 주님 자체를 사랑하고 존숭하여 경배하는 예배가 순수한 예배요 참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은 지 수십 년이 되었어도, 아직도 무엇을 달라고만 하는 조건부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성장은 곧 예배의 성장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 수준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신 사실만으로도 감격하여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과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찬송 드립니까? 자신의 예배 수준을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8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과거에는 하늘과 땅에 대한 권세가 없었다는 말씀인가 의문이 생깁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 2위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이시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이미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묘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본래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를 지니신 성자이셨으나, 하나님의 인류 구속 계획에 따라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니신 권세를 구속 사역을 완수하시고 부활하시기까지 잠시 유보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구속 사역을 완수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잠시 하나님께 맡겨 드렸던 본래의 권세를 다시 회복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그 주님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예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결과 영적 혁명이 일어나고 역사의 진로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분이었던 나사렛 예수는 개인 개인의 삶을 변화시킴으로, 인류 역사의 모든 선한 일을 일으키도록 하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돈도 군대도 없이 알렉산더, 시저, 마호멧, 나폴레옹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정복하셨고, 학술과 학문도 없이 모든 철학자들과 학자들이 남긴 빛보다, 더 많은 빛을 인류에게 던져 주셨습니다. 그는 수사학적인 웅변도 없이 예전에 아무도 말하지 못했고, 또 앞으로도 못할 생명의 말씀을 하시고, 연설가나 시인이 이룰 수 없는 영향을 온 인류에게 끼치신 것입니다. 그는 글을 한 줄도 쓰지 않았지만, 고대와 현대의 위인들을 다 합해놓은 것보다 더 많은 그에 대한 글을 쓰게 하셨고, 끝이 없는 설교와 토론과 예술작품과 학술서적과 아름다운 찬양의 주제가 되셨습니다. 구유에 나시어 죄수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분이, 모든 문명세계의 운명을 지배하시고 온 인류의 영적 왕국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대주재로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말씀을 가리켜 ‘지상 명령’ ‘대 사명의 말씀’ 또는 ‘대 위임 명령’이라고도 합니다. 이 지상명령이 어느 동사에 초점이 있는가에 따라, 다르게 강조가 될 것이고, 각 분야에서 자기들의 신조로 삼을 것입니다. 선교학에서는 ‘가라’에, 제자사역에 관심 있는 단체에서는 ‘제자 삼으라’에, 기독교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가르치라’에, 기독교윤리학자들은 ‘지키라’에 강조를 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지상 명령은 한 마디로 복음을 시급히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교회의 사활이 걸려 있고, 온 세계 족속들의 영혼이 달려 있는 소중한 것입니다. 왜 전도가 주님의 최대 최상의 긴급명령이요 지상명령입니까?
1)예수님이 이 땅위에 오신 목적이 영혼구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이 멸망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까닭에,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고, 주님께서는 이 땅위에 오셔서 인간을 멸망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2)전도는 모든 일 중에서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할 일이 많습니다. 얼마나 급하고 바쁜 일이 많습니까? 그러나 가장 긴급한 일은,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의 우선순위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긴급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추수기가 되었는데도 추수를 하지 않으면, 봄부터 여름 내내 땀 흘려 수고한 모든 농사가 다 헛수고로 끝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우리는 서둘러서 영혼을 추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3)사람의 운명은 모르기 때문에 긴급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언제 죽음이 찾아올는지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지상 명령을 수행할 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놀라운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실로 위대한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됩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백 년을 해로하자고 굳게 맹세했던 남편이 먼저 가는가 하면, 아내가 먼저 가기도 합니다. 코흘리개 철부지들을 두고 먼저 가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노부모를 놔둔 채 자식이 먼저 가기도 합니다. 행복한 환경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부귀영화도 영원한 것이 못됩니다. 지금 내가 자족하고 만족하고 흐뭇해하고 있는 그것들도, 내 곁에 영원히 있을 것들은 아닙니다.
캐나다에서 목회하시는 어떤 목사님은, 딸이 시집가는 날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그가 운 것은 “조국도 떠나 왔는데, 너마저 떠나는구나!” 라는 생각이 뼈에 사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곧 영원한 임마누엘이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모든 것들이 온다간다 말 한 마디 없이 내 곁을 떠난다고 해도, 온 세상이 모조리 나를 외면한다고 해도, 철석같이 믿었던 것들이 내 곁에서 사라져 간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나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내가 죽는 순간에도 내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또 내가 죽은 후에도 나와 함께 영원히 계시는 분은, 영원한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어차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폭풍도 있고, 환난도 있고, 이별도 있고, 슬픔도 있습니다. 실패도 있고, 아픔도 있고, 죽음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내 곁을 떠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 의지하고 살아갈 필요가 더 절실해지는 것입니다. 구명조끼 하나를 걸치고 자신만만하게 바다에 나가서 배를 타는 것이 인간입니다. 생명줄이라는 밧줄 하나에 의지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암벽을 타오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이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이 사실을 믿고 당당하게,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의 지상 명령, 대위임 명령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감히 어떻게 이 명령에 불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지상 명령이란 순종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어기면 반드시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미국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의 아버지가 운명하기 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한 말은 “한 명이라도 더 예수님께 가도록 해야 해. 한 명이라도 더…”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한 명이라도 더 주님께 인도해야 한다.”는 주님의 지상명령 우리 모두에게 위임하신 대위임 명령이었습니다. 릭 워렌 목사님은 그 아버지의 유언이자 명령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기로 결정한 후,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잠시 스티브 스필버그가 감독한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영상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는 탈무드의 말이 나옵니다. 쉰들러가 구해낸 유대인은 1100명이나 됩니다. 오늘날 폴란드에 사는 유대인은 4천 명이 안 되지만, 쉰들러가 구해낸 유대인 후손은 6천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쉰들러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흐느낍니다. “왜 이 차를 팔지 않았을까? 열 명은 구해낼 수 있었을 텐데....왜 이 핀을 팔지 않았을까? 두 명은 살릴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흐느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는 5월 27일은 영혼 추수주일입니다. 마태복음 강해를 마치면서, 우리는 주님의 대 위임 명령이자, 최후의 유언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좀 더 힘쓰고 애쓰면 한 생명, 한 영혼이라도 더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대 위임 명령에, 우리 모두 반드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마지막 관심
마 28:16 / 이필재목사
3주 전에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이 성경 몇 군데 몇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에도 똑같이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사도행전,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도 부활로 예수님의 관심과 목적은 같은 내용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여기 모인 제자들이 열한명이라고 숫자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명의 사도가 모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지역은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오늘 모여 있는 곳은 갈릴리 산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의 거리는 고속도로로 두 시간 정도 걸립니다. 걸어가면 며칠 걸리는 거리인데 모두 걸어서 갈릴리까지 온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목격했을 때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부탁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가서 내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오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그대로 전했습니다. 이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 만났던 장소이며 피차 약속을 나누었던 영적 의미의 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다시 만나서 옛날을 회복시키려는 주님의 일종의 영적 홈커밍데이(Home Coming Day)를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모임은 일종의 사명 회복 부흥회요 세계 선교를 향한 출정식이 됩니다. 나중에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곳에 모였던 열한제자 중 열 명은 순교자가 되었고 요한은 밧모 섬에 귀향 가서 요한계시록을 남기고 에베소에서 자연사하였습니다. 오늘 나타난 말씀에는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나타나고 있는데 지나간 3년 동안 제자들을 교육한 목적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신 후에 곧바로 하늘로 승천하셨으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의 지상 마지막 말씀이 됩니다. 이 후로는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활동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예수님의 마지막 관심의 말씀을 한번 조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제자들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어느 날 유대 사회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질문을 했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냐?” 지금 예수님이 그런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권세가 무엇인가? 그 권세는 다름 아닌 이 이후로 인간 구원의 권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되어지는 영적 권세를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으로서 예수님이 얻은 하나님의 영적 권세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어느 인간도 예수님의 이름만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이 주어지는 하늘나라의 구원의 권세를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그 권세를 사도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 약속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교회 오실 때 여러 도로를 거쳐서 교회까지 도착하셨습니다. 이 고속도로에 가보면 1분에도 수천 개의 차량이 총알 날아가듯 달려갑니다. 어떤 때는 그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이 참 무섭게 느낄 만큼 무서운 힘의 물결이 계속해서 날아가는 듯한 도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복잡하고 총알 튀는 듯한 차가 오고가는 그 거리 한복판에서 교통순경은 그 밀려오는 자동차들을 손가락 하나로 다 지휘합니다. “서!” 그의 손가락 지시에 따라서 모든 차량이 꼼짝도 못합니다. 아무 말도 안합니다. 누구도 꼼짝 못합니다. 어떤 사람도 교통순경의 그 거만하게 보이는 손가락 짓에 다 순종합니다. 내 사정이 아무리 바쁘고 급해도 소용없습니다. 서라면 서고 보내줘야 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도대체 무슨 권세가 있기에 그 물결치는 거리 복판을 손가락 하나로 다 움직입니까? 국가가 그에게 부여해준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너에게는 이런 권세를 줄 테니 행세해라.” 국가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꼼짝 못합니다. 그래서 잘못한 차는 세워서 벌을 주고 봐주려면 봐주고 마음대로 합니다.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권세는 무엇인가? 사망 권세를 이기고 구원하셨기 때문에 생명의 권세, 영생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믿으면 영원한 권세를 누릴 수 있는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정부가 파송하는 대사를 다른 나라에서 함부로 취급하지 못합니다. 그의 뒤는 그 나라의 권세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못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그 권세를 너희들에게 주겠다. 우리는 세상 권세가 아닌 하늘나라의 권세가 있는 자로서 이 영적 권세를 너희에게 주노니 가지고 나가서 내가 시키는 일을 하도록 하라.” 세상 만국에 파송하는 하늘나라의 복음의 대사 임명장을 나누어 주는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나가서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주님이 주시는 권세는 세상 권세가 아니라서 일을 하는 방법도 세상 법과는 다릅니다. 아마 우리 생각 같으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장소가 예루살렘이고 십자가에 달린 곳이 그곳인데 거기서 부활하셨으면 예루살렘 복판에 한번 광장에 나타나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했던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타나셔서 “보라! 내가 예수이다. 사흘 전에 너희가 나를 그토록 처참히 죽였으나 내가 말한 대로 이렇게 살아났느니라.” 그러면 그 소문이 하루 만에 전국에 퍼져서 나라가 다 뒤집힐 것입니다. 빌라도도 쩔쩔 맬 것이고 가야바 법정에 예수님을 판결해 내준 그 사람들도 쩔쩔 매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이 날 것입니다. 사흘 전에 당했던 그 굴욕적 모든 내용을 뒤집어엎는 그 작업을 한번 하셨더라면 예수님의 권위는 삽시간에 회복이 되고 예루살렘 모든 백성들은 주님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것이라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하시고 ‘갈릴리의 산골짜기까지 아무도 보지 않게 열한 제자만 갖다 놓고 지금 이런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것일까?’ 이렇게 우리는 생각이 됩니다. 여기 열한명의 사도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군중이 아닙니다. 제자입니다. 군중 심리는 언제나 여론 따라 바람 따라 날아다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강사로 예루살렘 군중집회를 열었다면 대 성공적인 집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광고 하나 만으로 군중동원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 교포 사회가 뒤집어엎어졌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소문이 퍼지는데 ‘펠시콜레’라고 하는 미국 사람이 천국에 갔다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증 집회를 하는데 우리 한인 타운에서 한번 하자고 해서 아주 어렵게 그분을 한인 타운에 모셔오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문에 “천국 다녀온 펠시콜레 간증 집회”라고 크게 기사가 나니까 저도 가보았습니다.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많이 왔습니다. 차도 댈 데가 없고 천국 갔다 온 사람의 간증을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몰려 왔는지 모릅니다. 이름도 처음 듣는 사람이고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그 광고 하나로 온통 로스앤젤레스가 그 사람의 간증을 듣기 위해서 와글와글 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광고 하나로 예루살렘을 다 뒤집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로 안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지금 산골짜기에 열한 제자만 불러서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펠시콜레 간증 집회를 못들은 사람은 아쉬워하고 간증 집회 테이프 없느냐고 난리쳤는데 몇 달 후에 발표가 났습니다. 그 사람이 가짜로 했다는 것입니다. 군중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바람에 밀려 돌아다니는 군중은 하나님의 나라 사역자라고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바람이 불까봐서 예수님은 자제시키셨습니다. 어떤 불치의 환자의 고쳐주신 후에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너 제발 병이 났으니까 내 말을 들어야 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잘못 소문이 퍼지면 나는 병 고치러 온 사람으로 알려질 것이다.” 오히려 숨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필요 하느냐 하면 제자가 필요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몸을 바칠 줄 알고 시간을 바칠 줄 알고 물질을 바칠 줄 알고 때로는 생명까지 바칠 줄 아는 제자를 삼으라. 모든 족속이 내 제자가 되도록 너희가 노력하라.”
지금 예수님의 주변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3년 목회의 결산이 오늘 나왔습니다. 한때는 예수님을 따라다녔다는 교인이 1만 명도 넘었습니다. 떡을 먹은 자가 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만 5천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떼로 몰려다녔는데 예수님은 군중에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남은 자는 열한 명뿐입니다. 이제 기독교는 열한 명으로 다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열한 명에게 무슨 힘이 있었는가? 오늘 말씀에는 열한 제자가 제자된 힘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게 그들에게 큰 힘입니다. 제자화된 교인, 제자화된 교회! 이것이 주님의 나라에 도움이 됩니다. 바람에 밀려다니는 교인들, 오히려 그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군중집회를 버리시고 열한 제자만을, 그것도 예루살렘이 아닌 저 시골 갈릴리 산골짜기로 모아서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서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있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이렇게 교육하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으려면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군중은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다 도망가고 맙니다. 제자화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 역사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귀신 들린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돌로 자기 몸을 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 죽을 것도 모르고 자기 몸을 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 들리면 사람이 자기 가정을 돌로 때려 부수기도 하고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자기 손으로 때려 부숩니다. 제가 LA에 살 때 LA에는 갱단들이 많이 있는데 시청에서 어느 동네에 돈을 많이 들여서 공원을 지어서 이 공원을 휴식의 쉼터로 사용하라고 얼마나 예쁘게 페인트칠을 하고 아름답게 화장실도 비누와 화장지까지 시청에서 다 내어보내서 휴식공간으로 제공했습니다. 그러면 그 동네 사람들이 그 고마움을 생각하면서 그곳을 잘 보존하고 서로 쓰레기를 치우고 아름답게 보존해서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며칠 만에 얼마나 지저분하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변기도 다 떼어가 버렸습니다. 쓸 만한 것은 다 떼어가고 아무 것도 안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쉼터가 쓰레기장이 되고 아무나 와서 대소변을 봐서 똥구덩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에 “귀신 들렸다. 자기 동네를 망치는 귀신 들린 자기 동네 사람들” 이라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살고 있는 그 동네의 집값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동네로 누가 이사 갑니까?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동네를 반짝반짝하게 하고 예쁘게 해야 자기들의 삶의 가치가 평가를 받고 자기들의 가치가 올라가서 점점 부자가 될 텐데 귀신들이 들려서 자기가 사는 동네를 귀신 소굴로 만들어 버리니 소용없다.” 이렇게 신문에 났습니다. 제자화 되지 않으면 교인들이 교회를 어렵게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렵게 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제자화 훈련을 그렇게 많이 어렵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보리교회에서는 전도폭발이니 성경공부이니 다 이래서 제자화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갈보리교인들이 갈보리교회를 어렵게 하고 성남 시민들이 성남시를 어렵게 하고……. 귀신들린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군중이 필요치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군중이 몰려와서 “호산나”를 불러주었는데 바람이 한번 부니까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런 사람 필요치 않다.” 군중에 실망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위해서는 제자가 필요하다 하시고 제자들을 불러서 집중 교육을 시키며 “너희도 가서 내가 주는 권세를 가지고 제자를 삼으라.” 그러셨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너희들이 또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복음을 전하라. 선교해라.” 그런 뜻입니다. 사도행전과 복음서에 예수님의 최고의 관심과 마지막 관심이 어떻게 나와 있느냐? 마태복음에는 오늘 말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말씀을 가르치라.” 마가복음에는 “너희는 온 천하에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요한복음에는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주인이라.” 누가복음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이다.” 사도행전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다 똑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위하는 교회가 되고 교인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에 꽤 성공을 해서 잘 사는데 뜻하지 않는 불행을 만났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를 치르려면 목사가 필요하니까 제가 어떻게 그 장례식을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 나오던 사람인데 이 학생이 가끔씩 교회에 나왔던 관계로 그 장례식을 제가 했습니다. 얼마나 낙심이 됩니까? 사업에 성공해서 돈을 잘 벌고 자동차에 관계된 사업을 했는데 종업원이 수백 명이 되고 잘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만나서 낙심이 되어 있는데 제가 장례식을 조심스럽게 아주 성의 있게 잘 진행을 하면서 그분의 슬픔의 마음이 좀 열려서 전도를 했습니다. “이 슬픔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그 기회를 확실하게 제가 만들어 드릴 테니 교회 나오세요. 한번 내 말을 믿어보십시오. 목사의 말을 믿고 밑지는 셈 치고 교회 나와 보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교회를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도 집중적으로 심방도 갔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신앙이 급속도로 자랐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던 세계가!” 그래서 마음이 변하고 기쁨이 오는데 이렇게 간증을 하셨습니다. “우리 아들이 우리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이런 일이 있었구나! 나는 이런 일이 없었다면 평생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닌데! 아들을 통해서 우리 집안이 구원 되었다. 아들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아주 사람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신앙생활하시며 저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나 이제 이거 위해서 살고 싶은데 우리 회사에 종업원들이 많습니다. 우리 회사에 오셔서 한 달에 한 번씩 예배를 좀 보실 수 있겠습니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직장에 얼마든지 사람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 다 예수 믿게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가서 첫 예배를 드리는데 이 사장이 사람들이 찬송가를 모를 테니까 복사해서 찬송가를 나눠주고 의자를 놓고 사장이 “우리 회사에 목사님이 오시니까 여러분이 잘 모르시겠지만 목사님 말씀을 잘 들어보십시오.” 말하고 첫 예배를 드리는데 사장이 깜짝 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찬송가를 하나도 모를 줄 알았는데 얼마나 찬송가를 잘 부르는지 또, 사도신경을 하자고 하면 사도신경을 모두 잘 외우고 “아멘”도 하고 “할렐루야!” 별걸 다 하는 겁니다. ‘가만있어 봐! 그러면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이 우리 회사에 이렇게 많았다는 거야?’ 그래서 놀라서 나중에 설교 끝나고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지금 교회 열심히 나가시는 분 손 들어보세요.” 그랬더니 많이 손을 드는 겁니다. “그러면 예배 끝나고 내 사무실로 여러분들만 오십시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교회 다니는 종업원들은 모두 사장 사무실로 가고 저도 따라 갔습니다. 사장은 나이가 많고 사무실로 온 종업원들은 거의 젊은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첫마디가 뭔지 아십니까? “너희들 뭐야? 야, 이 나쁜 놈들! 나하고 이 직장에서 일한지가 몇 년이야? 그런 인생의 좋은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너희들 가운데 단 한명도 나한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한 사람 없지? 있으면 있었다고 말해 봐! 나는 지금 예수 믿은 지 몇 달 밖에 안 되었어. 그런데 내가 이 영생의 진리를 깨닫고 너무 흥분해서 너희들 다 예수 믿게 하려고 목사님께 부탁해서 오늘 이게 첫 예배야! 그런데 보니까 다들 찬송가 할 줄 알고……. 뭐야? 너희들 다 가짜야!” 몇 개월 안 된 신자인 사장이 막 야단을 치는 겁니다. “너희들 예수 믿은 거 헛것이야. 그런 인생의 좋은 진리를 성경에는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고 했는데 나와 같이 일하면서도 한 사람도 나한테 몇 년 동안도 교회 나오라고 전도한 사람 없으니 뭐야? 너희들 다 가짜야!” 얼마나 흥분하며 화를 내는지……. 그래서 나는 옆에서 맞다 그랬습니다. 왜 그 사람들은 전도를 한마디도 안했을까요? 제자화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를 필요로 하십니다. 떠돌아다니는 군중은 나한테 필요가 없습니다. “너희들 같은 제자가 필요하고 너희들 같은 제자를 또 만들어!”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제자화된 믿음은 누구를 보든지 신앙생활을 권유하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그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다가 손해 볼 때도 창피 당하는 경우도 있고 물질과 시간과 명예적으로 손실이 납니다. 그런데 합니다. 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있던 교회에서는 교단에서 전도왕이라는 상을 준 여 집사님이 계십니다. “나는 선교사도 아니고 가정주부이지만 노방전도는 할 수 있으니까 또 내 이웃에게는 전도할 수 있으니까 내 사명은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이 개인전도 훈련을 받고 그것을 잘했는지 1년에 그 사람이 전도해서 교회에 등록한 사람이 1년 150명입니다. 그래서 교단에서 그것을 알아서 “당신은 정말 훌륭한 전도왕이십니다.” 상을 드린 집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는 못해도 최소한 복음의 장사를 배는 남겨야 합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누군가 나를 전도하고 기도해서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 혜택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 때문에 한 사람을 예수 믿게 했다면 그게 본전치기입니다. 두 사람 전도했다면 배로 남긴 것입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했느니라.” 그래서 예수님이 그 설교를 하신 거 아닙니까? 우리 갈보리교회 제자화 되니까 어떻게 됩니까? 세계 60개국에 1,502명을 갈보리교회 이름으로 선교사 파송했지 않습니까? 주님은 제자가 필요합니다. 제자가 된 사람, 제자의 역할을 하는 교회! 나의 최고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 아는 교회! 그리고 실천하는 교회! 오늘 저녁에 목양협력기구 모이는 날이잖아요? 오늘 보고할 것을 어제 나에게 미리 줬는데 1월에서 4월말까지 여러분이 교회 헌금하신 것 중에서 42.8퍼센트가 외국 선교비로 나갔습니다. 50퍼센트 가까이 여러분이 내신 헌금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장 크게 관심하셨던 일을 위해서 우리 갈보리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제자화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 예수님의 관심을 항상 집중하고 거기에 모든 교회가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약속을 하나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어려운 일을 시키는데 이 약속을 가지고 나가라!” 뭐라고 약속을 주시는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탄생과 마지막을 임마누엘로 장식한 것입니다. “나는 임마누엘로 세상에 왔으며 지금 가지만 임마누엘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겠다.” 그래서 오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바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약속해주신 “나는 제자인 너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이 약속 하나를 움켜잡고 하나님의 역사에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제자화된 사람, 제자화된 교회! 주님은 그런 것을 필요로 하시는 것입니다. 40년 전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닥터 지바고”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러시아에 격동기 시절을 배경으로 해서 지바고와 라라의 눈 덮인 설운에서의 사랑 이야기가 엮어주는 영화인데 인간관계도 복잡하고 삼각관계, 전쟁 통해서 죽고 사는 이야기로 재미있고 관심 있게 만든 영화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어린 소녀가 하나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버지가 그 아이를 길렀는데 전쟁의 위급한 상황이 되니까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버지가 손을 놔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가버린 것입니다. 사실 자기 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아주 험난한 인생 여정을 살게 되는데 마지막 장면이 이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 아이에게 사진을 하나 보여주면서 “사진을 보는 이 사람이 너의 진짜 아버지이다. 만약 코마로프스키가 너의 진짜 아버지였다면 전쟁 중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어도 네 손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네 손을 위급한 상황에서 더 굳게 잡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네 손을 놓고 간 것이다.” 여러분! 주님은 오늘 “어떠한 상황이 와도 제자가 된 자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너의 손을 잡고 갈 것이다.” 그 약속 하나를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린, 주님이 쓰시는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마 28:16-20 / 피종진목사
지금 세계는 어느 한곳도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전쟁과 재난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마 24:7,8). 또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점점 심해지고 있고, 사단의 권세가 성도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마 28:18)로 무장해야 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란
첫째,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권세입니다.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대하 20:6) 유다의 왕 여호사밧은 모압과 암몬 이방 민족들이 그 땅을 침략해 올 때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의지하여 그 땅을 지켜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온 세상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감히 당해낼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의 권세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권세를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이사야 40장 26절을 보면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주권과 섭리를 믿는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해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 121편 1,2절에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당하는 모든 어려움에서 능히 건져내실 뿐만 아니라, 그를 의지하는 모든 자에게 필요를 따라 적절한 도움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전도서 12장 1절을 보면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창조란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것입니다. 절대 주권을 지니신 창조주를 기억하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더러운 귀신을 멸하시는 권세입니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눅 4:35,36)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주님은 말씀 한마디로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심으로 귀신들린 자를 귀신의 지배 하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더러운 귀신을 멸하시고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주시기 위해 존귀하신 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사단의 세력을 철저히 짓밟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사단의 세력을 완전하게 패배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단을 대적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상에서 사단의 세력을 멸하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권세와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9)
셋째, 죄를 사하여 구원해주시는 권세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막 2:10)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병을 고쳐주시고, 예수님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밝히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는 죄를 사하여 구원해주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힘입어 먼저 하나님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사랑하는 여러분!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며, 더러운 귀신을 멸하시고, 죄를 사하여 구원해주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즉 예수님의 권세를 힘입어 영적 싸움에서 항상 승리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위대한 사명
마 28:16-20 / 이규헌목사
그동안 우리는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을 살펴보았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두 가지로 나뉘는데 압축하면 사랑입니다. 많은 계명이 있지만 결국은 사랑입니다. 순종을 한다면 사랑의 순종이고 사랑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모든 계명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그 사랑에 실패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고 율법의 강령의 모든 것이 달려있는 대계명입니다.
신앙에는 두 가지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 하나는 대사명(The Great commission)입니다. 이 양축이 균형을 잡고 가야되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최고의 사명, 명령이 결국은 교회 존재의 목적이고 본질입니다. 누군가 “위대한 계명(The Great commandment)과 위대한 명령(The Great commission)에 대한 위대한 헌신((A Great commitment)은 위대한 교회(A Great Church)를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 말씀을 또 다르게 표현하면 대위임령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당신의 사역을 제자들에게 위임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이제 하늘로 승천하시지만 지상에 남아있는 제자와 교회들이 그 명령, 그 사역을 계속 이어가야하기 때문에 대위임령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떠나시기 직전에 우리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주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시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오시는 그날까지 이 명령을 예수 믿는 우리 모두가 수행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주어진 최대의 미션이면서 우리 주님의 준엄한 명령이기도 하고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명령을 반드시 지켜야 할 이유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주님이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앞부분에도 주옥같은 수없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마지막으로 주신 이 말씀에 우리는 순종을 해야 합니다. 만약 앞부분에 다 순종했더라도 마지막 이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놓친다면 신앙은 실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상사들을 통하여 명령을 받기도 하고 또 이 나라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이 있겠지만 하늘과 땅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명령이고 어떤 명령보다도 상위에 있는 명령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8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합니다. 대사명을 주신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의 사명을 위임해 주셨습니다. 얼마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분이 이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메시아로 등극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보내시고 이 명령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명령을 수행할 때 그 명령을 주신 분이 누구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명령을 주신 분, 우리를 보내신 분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명령을 따라 세상을 향해 복음을 들고 가면 세상은 매우 위험합니다. 복음을 그대로 환영하거나 받아들이는 문화가 아니기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위협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복음을 거칠게 거절하기도 하는 문화 속에서 이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마다 낙심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고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생존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을 가지고 나아갈 때 이 명령을 주신 분이 누구인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 양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은 이리가 득실 되는 곳으로 양은 한순간에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위험한 환경입니다. 그러나 모든 환경 속에서도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이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가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여기서 “너희는”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아무에게나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로 아무에게나 나타나신 것이 아니고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다 알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는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진리를 진리로 깨닫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당신을 드러내신 것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대사명은 한두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대사명은 소수의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지만 이 제자들을 이어가는 오늘 지상의 교회가 바로 이 명령을 위임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을 대상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를 보내셨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1절,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나님이 아들을 선교사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예수님이 그 명령에 순종하고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주님도 우리를 세상 가운데 보내사 구원의 복음을 퍼뜨리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신약의 교회를 가리켜 부활 공동체라고 합니다. 부활의 공동체는 반드시 증인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그 부활을 알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가운에 임하시면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보다 더 강력한 확신으로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은 성령이 임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에 두 부류가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는 사람,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의심하고, 확신이 없는 사람은 부활의 증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기가 막힌 이 소식을 알고 있음에도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의 권능 아래 가슴에 불이 붙어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가라!”라는 명령을 받은 선교 공동체입니다. 구약을 읽어보면 구약은 끊임없이 “오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오라!” “하나님께로 오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가까이 오라!” “회개하고 오라!” 신약은 “가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가라”로 신약의 교회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라!”는 명령을 받은 동사형 교회이기 때문에 오늘 신약의 교회 우리 모든 성도들은 그 복음을 들고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공동체의 특징은 적극적이고 역동적입니다. 그리고 요란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를 보면 사도행전의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자 사람들의 입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예수의 증인으로 천지사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증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방언이 터졌는데 이 방언은 언어를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한 복음을 알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교회는 조용하지 않습니다. 행동하는 교회, 움직이는 교회, 복음을 드러내는 교회입니다. 신약의 교회를 우리의 삶의 기준으로 삼고 움직여야 합니다. 만약에 교회가 울타리를 치고 벽을 높이 쌓고 우리끼리만 행복하고 우리끼리의 구원에 도취된 폐쇄적인 공동체가 된다면 그 교회는 병이 들고 맙니다. 우리 끼리만의 복음의 초점을 맞춘 교회는 교회의 본질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곁길로 빠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선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세상은 복음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 가라는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누군가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이 대한민국에 들어왔습니다. 누군가 복음을 전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알게되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땅 끝까지입니다. 본문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입니다. 어떤 지명에 초점을 맞춘다기보다 복음이 필요한 모든 곳이 우리가 가야할 곳이라는 겁니다. 복음은 한 개인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전 우주적입니다. 어떤 대상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모든 민족”이라고 하는 말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스케일을 보게 됩니다. 나사렛 촌 동네 출신으로 갈릴리 해변에서 활동하셨던 분이 쏟아내는 말씀은 놀랍습니다. 인류를 품고 계신 겁니다. 모든 민족은 지역에 관한 것도 있지만 예수님은 복음이 가지는 영향력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복음이 가진 폭발력은 온 인류, 모든 세대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합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1장에서 말씀했던 것처럼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두나미스, 능력입니다. 주님은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면 이 엄청난 하나님의 구원의 스케일을 보면서 놀라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한참 믿다보면 우리 입에서 엄청난 단어들이 나오고 비전과 스케일이 막 커집니다. 우리 하나님이 온 우주의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사고와 생각의 틀이 넓혀집니다. 모든 민족과 열방과 세계 복음화의 놀라운 일에 우리의 삶이 쓰여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글로벌, 세계화라는 단어가 요즘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코카콜라가 세계화를 꿈꾸기 전에, 구글이나 스타벅스가 이야기하기 전에 주님이 이미 온 세상을 바라보셨습니다. 스타벅스 회장 하워드 슐츠가 꾸었던 꿈이 해운대 주변에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2천 년 전에 시골, 갈릴리 주변을 떠나본 적이 없었던 그분이 모든 민족을 바라보시며 꿈을 꾸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쪽배를 타고 오가셨던 분이 모든 민족을 꿈꾸셨습니다. 그것은 망상이 아닙니다. 지구를 돌고 돌아 2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주님은 지중해 연안의 작은 마을 갈릴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면 전 세계를 갈 수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지구촌 어디에나 접속이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보다도 복음을 전하기에 까다롭고 어렵고 저항이 만만치 않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여전히 복음은 가공할만한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할 때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은 효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방해도 많지만 가능성도 많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보다 큰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능력은 예수님과 비교를 할 수도 없지만 어떻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인류의 문명이 발달하고 교통과 통신이 어마어마하게 발달한 시대 속에서 인터넷을 통해서 온 세계와 접속시키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놀라운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불편하게 여겨지고 거리끼게 여겨지고 거치는 것이지만 오늘도 복음이 필요한 사람에게 정확하게 복음이 맞아떨어지기만 하면 어떤 사람이든 그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돌아오는 능력의 역사가 이 복음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꿈은 어디에 있습니까? 왜 모든 민족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까? 인류가 죄를 범하므로 모든 민족이 타락해 있고, 모든 민족이 망가져 가고 있고 모든 민족이 죄악 가운데서 절망과 고통과 지옥의 길로 가고 있기 때문에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이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미션입니다. 유대 민족이 아니라 모든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예수의 구원이 필요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2천 년 동안 이 말씀을 받은 소수의 제자들은 놀랍게도 그대로 순종을 했습니다.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여 온 세상, 모든 민족, 모든 족속에게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이 역사들이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천 년의 역사 속에 수없는 사람들이 생명과 모든 것을 다 내어 놓고 “가라!”고 하는 명령 앞에 신실하게 순종하고 나아감으로 오늘도 이 복음은 끊임없이 전진되고 모든 민족 가운데 흩어지고 모든 민족 가운데 구원 얻을 백성들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1886년 토마스 선교사가 상선 셔먼호를 타고 한국 땅에 발도 딛지 못하였지만 그가 던진 성경으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지상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 복음을 받은 우리나라는 이렇게 복음화 되었고 복음화는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어 어둠과 무지에서 깨어나는데 큰 일조를 했습니다.
“가라!”고 하는 명령은 매우 긴급한 명령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시급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날마다 듣고 있지만 여전히 오늘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수없는 사람들이 오늘 지구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시간은 종말론적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긴급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종말론적인 시간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성경적 시간관은 종말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 지상에서 40일 동안 계셨습니다. 40일 동안 무엇을 하셨을까요? 사도행전 1장 3절을 보면, 가르치시기를 하셨습니다. 가르치시는 일을 하셨는데 뭘 가르치셨느냐면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다른 것 하나도 없고 예수님이 하신 것은 당신이 부활하신 것을 그들에게 보이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첫 설교의 제목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입니다. 위대한 산상수훈의 절정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놀라운 말씀, 마태복음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사람들이 구하는 염려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 마지막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한가지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그 나라는 완성 됩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 지금 끼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완성이 언제 끝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단서를 하나 주셨습니다. 그게 마태복음 24장 14절의 말씀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도도히 완성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시간의 끝입니다. 긴박합니다. 그게 내일일지도 모르고 오늘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과 연관되어 있습니까? 그 끝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느냐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언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모든 민족, 열방이 다 구원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모든 민족,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기회는 주어야 됩니다. 모든 민족에게 증언 되는 것과 마지막의 때가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긴장감 있는 삶을 지금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라!”라고 명령을 받은 사람들의 초점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관심은 언제나 이 세상,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영적인 눈으로 보면 타이타닉호와 같습니다. 이미 한 방 크게 맞아서 서서히 기울어져 역사의 종말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나면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이 땅을 딛고 사니 이 땅의 삶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것은 사실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이 땅의 것에만 관심을 갖고 모든 것을 쏟아 버리면 성경적 관점을 놓쳐 버립니다. 성경은 뭘까요?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젠가 다 사라질 것입니다. 세계의 역사의 무대에서 영웅호걸이 나와 이 땅에 왕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재패하는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시도들은 끝도 없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도 세계 재패의 꿈을 꿨지만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외롭게 쓸쓸히 인생을 마치고 초라한 인생으로 끝났습니다. 히틀러도 마지막에 권총으로 자기를 쏘아서 죽고 맙니다. 세계 열강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의 싸움이 거대합니다. 2017년 중국의 새해 국방비 예산이 180조입니다. 미국은 684조입니다. 이 사이에 우리가 끼어 있습니다. 힘의 대결이 가속화되고 있고 그 사이에 우리는 끼어 있습니다. 세계 정복의 꿈을 꾸는 나라는 계속 일어날 겁니다. 우리는 세상의 권력자들이 거대한 왕국을 꿈꾸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는 팍스로마나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문명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과학은 극대화됩니다. 유전공학이 발전되면서 100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유토피아가 올까요?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더 아름답고 멋진 세상을 만들겠다는 그 희망을 우리는 믿어도 될까요? 새로운 지도자가 나와 이 땅이 위대한 복지국가로 바꾸어 질 것을 꿈꾸시나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꿈입니다.
성경의 관점은 철저히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복음을 증거하는 겁니다. 아무리 이 땅이 좋아도 이 땅은 여전히 질병과 고통과 절망과 탄식과 한숨이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그분의 왕국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대척점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거절하지 않으면서, 꿈꾸는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위해서 우리는 존재하고 그 나라에 가기까지 어떤 것도 우리에게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복음만이 유일한 희망이고, 복음만이 모든 사람을 구원케 하시는 능력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가라! 모든 민족으로! 그들이 구원을 얻기 까지!”라는 위대한 명령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신자의 눈은 다른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3천 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은 단순히 기적을 이야기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교회가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그 나라는 완성될 것이라는 뚜렷한 징조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끝나고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우리가 할 일은 뭘까요? 이 구원의 복음을 우리 이웃들에게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하는 대사명은 구원 받은 모든 백성들이 물리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대명령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명령을 따라 살아갈 때 마태복음 28장 20절 끝절의 예수님이 마지막 우리에게 주신 약속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계명과 “가라!”라고 하는 대명령 앞에 온전히 순종하며 우리 인생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하여주시고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하실 것이라는 임마누엘이라는 축복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대계명과 대사명을 굳게 붙잡고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대한 사명
마 28:16-20 / 이규헌 목사
그동안 우리는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을 살펴보았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두 가지로 나뉘는데 압축하면 사랑입니다. 많은 계명이 있지만 결국은 사랑입니다. 순종을 한다면 사랑의 순종이고 사랑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모든 계명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그 사랑에 실패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고 율법의 강령의 모든 것이 달려있는 대계명입니다.
신앙에는 두 가지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 하나는 대사명(The Great commission)입니다. 이 양축이 균형을 잡고 가야되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최고의 사명, 명령이 결국은 교회 존재의 목적이고 본질입니다. 누군가 “위대한 계명(The Great commandment)과 위대한 명령(The Great commission)에 대한 위대한 헌신((A Great commitment)은 위대한 교회(A Great Church)를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 말씀을 또 다르게 표현하면 대위임령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당신의 사역을 제자들에게 위임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이제 하늘로 승천하시지만 지상에 남아있는 제자와 교회들이 그 명령, 그 사역을 계속 이어가야하기 때문에 대위임령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떠나시기 직전에 우리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주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시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오시는 그날까지 이 명령을 예수 믿는 우리 모두가 수행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주어진 최대의 미션이면서 우리 주님의 준엄한 명령이기도 하고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명령을 반드시 지켜야 할 이유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주님이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앞부분에도 주옥같은 수없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마지막으로 주신 이 말씀에 우리는 순종을 해야 합니다. 만약 앞부분에 다 순종했더라도 마지막 이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놓친다면 신앙은 실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상사들을 통하여 명령을 받기도 하고 또 이 나라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이 있겠지만 하늘과 땅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명령이고 어떤 명령보다도 상위에 있는 명령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8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합니다. 대사명을 주신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의 사명을 위임해 주셨습니다. 얼마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분이 이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메시아로 등극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보내시고 이 명령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명령을 수행할 때 그 명령을 주신 분이 누구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명령을 주신 분, 우리를 보내신 분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명령을 따라 세상을 향해 복음을 들고 가면 세상은 매우 위험합니다. 복음을 그대로 환영하거나 받아들이는 문화가 아니기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위협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복음을 거칠게 거절하기도 하는 문화 속에서 이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마다 낙심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고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생존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을 가지고 나아갈 때 이 명령을 주신 분이 누구인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 양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은 이리가 득실 되는 곳으로 양은 한순간에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위험한 환경입니다. 그러나 모든 환경 속에서도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이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가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여기서 “너희는”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아무에게나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로 아무에게나 나타나신 것이 아니고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다 알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는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진리를 진리로 깨닫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당신을 드러내신 것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대사명은 한두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대사명은 소수의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지만 이 제자들을 이어가는 오늘 지상의 교회가 바로 이 명령을 위임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을 대상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를 보내셨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1절,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나님이 아들을 선교사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예수님이 그 명령에 순종하고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주님도 우리를 세상 가운데 보내사 구원의 복음을 퍼뜨리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신약의 교회를 가리켜 부활 공동체라고 합니다. 부활의 공동체는 반드시 증인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그 부활을 알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가운에 임하시면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보다 더 강력한 확신으로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은 성령이 임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에 두 부류가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는 사람,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의심하고, 확신이 없는 사람은 부활의 증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기가 막힌 이 소식을 알고 있음에도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의 권능 아래 가슴에 불이 붙어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가라!”라는 명령을 받은 선교 공동체입니다. 구약을 읽어보면 구약은 끊임없이 “오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오라!” “하나님께로 오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가까이 오라!” “회개하고 오라!” 신약은 “가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가라”로 신약의 교회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라!”는 명령을 받은 동사형 교회이기 때문에 오늘 신약의 교회 우리 모든 성도들은 그 복음을 들고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공동체의 특징은 적극적이고 역동적입니다. 그리고 요란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를 보면 사도행전의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자 사람들의 입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예수의 증인으로 천지사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증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방언이 터졌는데 이 방언은 언어를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한 복음을 알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교회는 조용하지 않습니다. 행동하는 교회, 움직이는 교회, 복음을 드러내는 교회입니다. 신약의 교회를 우리의 삶의 기준으로 삼고 움직여야 합니다. 만약에 교회가 울타리를 치고 벽을 높이 쌓고 우리끼리만 행복하고 우리끼리의 구원에 도취된 폐쇄적인 공동체가 된다면 그 교회는 병이 들고 맙니다. 우리 끼리만의 복음의 초점을 맞춘 교회는 교회의 본질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곁길로 빠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선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세상은 복음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 가라는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누군가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이 대한민국에 들어왔습니다. 누군가 복음을 전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알게되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땅 끝까지입니다. 본문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입니다. 어떤 지명에 초점을 맞춘다기보다 복음이 필요한 모든 곳이 우리가 가야할 곳이라는 겁니다. 복음은 한 개인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전 우주적입니다. 어떤 대상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모든 민족”이라고 하는 말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스케일을 보게 됩니다. 나사렛 촌 동네 출신으로 갈릴리 해변에서 활동하셨던 분이 쏟아내는 말씀은 놀랍습니다. 인류를 품고 계신 겁니다. 모든 민족은 지역에 관한 것도 있지만 예수님은 복음이 가지는 영향력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복음이 가진 폭발력은 온 인류, 모든 세대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합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1장에서 말씀했던 것처럼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두나미스, 능력입니다. 주님은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면 이 엄청난 하나님의 구원의 스케일을 보면서 놀라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한참 믿다보면 우리 입에서 엄청난 단어들이 나오고 비전과 스케일이 막 커집니다. 우리 하나님이 온 우주의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사고와 생각의 틀이 넓혀집니다. 모든 민족과 열방과 세계 복음화의 놀라운 일에 우리의 삶이 쓰여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글로벌, 세계화라는 단어가 요즘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코카콜라가 세계화를 꿈꾸기 전에, 구글이나 스타벅스가 이야기하기 전에 주님이 이미 온 세상을 바라보셨습니다. 스타벅스 회장 하워드 슐츠가 꾸었던 꿈이 해운대 주변에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2천 년 전에 시골, 갈릴리 주변을 떠나본 적이 없었던 그분이 모든 민족을 바라보시며 꿈을 꾸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쪽배를 타고 오가셨던 분이 모든 민족을 꿈꾸셨습니다. 그것은 망상이 아닙니다. 지구를 돌고 돌아 2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주님은 지중해 연안의 작은 마을 갈릴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면 전 세계를 갈 수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지구촌 어디에나 접속이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보다도 복음을 전하기에 까다롭고 어렵고 저항이 만만치 않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여전히 복음은 가공할만한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할 때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은 효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방해도 많지만 가능성도 많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보다 큰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능력은 예수님과 비교를 할 수도 없지만 어떻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인류의 문명이 발달하고 교통과 통신이 어마어마하게 발달한 시대 속에서 인터넷을 통해서 온 세계와 접속시키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놀라운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불편하게 여겨지고 거리끼게 여겨지고 거치는 것이지만 오늘도 복음이 필요한 사람에게 정확하게 복음이 맞아떨어지기만 하면 어떤 사람이든 그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돌아오는 능력의 역사가 이 복음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꿈은 어디에 있습니까? 왜 모든 민족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까? 인류가 죄를 범하므로 모든 민족이 타락해 있고, 모든 민족이 망가져 가고 있고 모든 민족이 죄악 가운데서 절망과 고통과 지옥의 길로 가고 있기 때문에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이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미션입니다. 유대 민족이 아니라 모든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예수의 구원이 필요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2천 년 동안 이 말씀을 받은 소수의 제자들은 놀랍게도 그대로 순종을 했습니다.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여 온 세상, 모든 민족, 모든 족속에게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이 역사들이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천 년의 역사 속에 수없는 사람들이 생명과 모든 것을 다 내어 놓고 “가라!”고 하는 명령 앞에 신실하게 순종하고 나아감으로 오늘도 이 복음은 끊임없이 전진되고 모든 민족 가운데 흩어지고 모든 민족 가운데 구원 얻을 백성들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1886년 토마스 선교사가 상선 셔먼호를 타고 한국 땅에 발도 딛지 못하였지만 그가 던진 성경으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지상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 복음을 받은 우리나라는 이렇게 복음화 되었고 복음화는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어 어둠과 무지에서 깨어나는데 큰 일조를 했습니다.
“가라!”고 하는 명령은 매우 긴급한 명령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시급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날마다 듣고 있지만 여전히 오늘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수없는 사람들이 오늘 지구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시간은 종말론적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긴급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종말론적인 시간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성경적 시간관은 종말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 지상에서 40일 동안 계셨습니다. 40일 동안 무엇을 하셨을까요? 사도행전 1장 3절을 보면, 가르치시기를 하셨습니다. 가르치시는 일을 하셨는데 뭘 가르치셨느냐면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다른 것 하나도 없고 예수님이 하신 것은 당신이 부활하신 것을 그들에게 보이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첫 설교의 제목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입니다. 위대한 산상수훈의 절정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놀라운 말씀, 마태복음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사람들이 구하는 염려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 마지막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한가지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그 나라는 완성 됩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 지금 끼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완성이 언제 끝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단서를 하나 주셨습니다. 그게 마태복음 24장 14절의 말씀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도도히 완성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시간의 끝입니다. 긴박합니다. 그게 내일일지도 모르고 오늘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과 연관되어 있습니까? 그 끝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느냐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언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모든 민족, 열방이 다 구원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모든 민족,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기회는 주어야 됩니다. 모든 민족에게 증언 되는 것과 마지막의 때가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긴장감 있는 삶을 지금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라!”라고 명령을 받은 사람들의 초점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관심은 언제나 이 세상,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영적인 눈으로 보면 타이타닉호와 같습니다. 이미 한 방 크게 맞아서 서서히 기울어져 역사의 종말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나면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이 땅을 딛고 사니 이 땅의 삶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것은 사실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이 땅의 것에만 관심을 갖고 모든 것을 쏟아 버리면 성경적 관점을 놓쳐 버립니다. 성경은 뭘까요?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젠가 다 사라질 것입니다. 세계의 역사의 무대에서 영웅호걸이 나와 이 땅에 왕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재패하는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시도들은 끝도 없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도 세계 재패의 꿈을 꿨지만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외롭게 쓸쓸히 인생을 마치고 초라한 인생으로 끝났습니다. 히틀러도 마지막에 권총으로 자기를 쏘아서 죽고 맙니다. 세계 열강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의 싸움이 거대합니다. 2017년 중국의 새해 국방비 예산이 180조입니다. 미국은 684조입니다. 이 사이에 우리가 끼어 있습니다. 힘의 대결이 가속화되고 있고 그 사이에 우리는 끼어 있습니다. 세계 정복의 꿈을 꾸는 나라는 계속 일어날 겁니다. 우리는 세상의 권력자들이 거대한 왕국을 꿈꾸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는 팍스로마나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문명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과학은 극대화됩니다. 유전공학이 발전되면서 100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유토피아가 올까요?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더 아름답고 멋진 세상을 만들겠다는 그 희망을 우리는 믿어도 될까요? 새로운 지도자가 나와 이 땅이 위대한 복지국가로 바꾸어 질 것을 꿈꾸시나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꿈입니다.
성경의 관점은 철저히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복음을 증거하는 겁니다. 아무리 이 땅이 좋아도 이 땅은 여전히 질병과 고통과 절망과 탄식과 한숨이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그분의 왕국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대척점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거절하지 않으면서, 꿈꾸는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위해서 우리는 존재하고 그 나라에 가기까지 어떤 것도 우리에게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복음만이 유일한 희망이고, 복음만이 모든 사람을 구원케 하시는 능력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가라! 모든 민족으로! 그들이 구원을 얻기 까지!”라는 위대한 명령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신자의 눈은 다른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3천 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은 단순히 기적을 이야기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교회가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그 나라는 완성될 것이라는 뚜렷한 징조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끝나고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우리가 할 일은 뭘까요? 이 구원의 복음을 우리 이웃들에게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하는 대사명은 구원 받은 모든 백성들이 물리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대명령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명령을 따라 살아갈 때 마태복음 28장 20절 끝절의 예수님이 마지막 우리에게 주신 약속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계명과 “가라!”라고 하는 대명령 앞에 온전히 순종하며 우리 인생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하여주시고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하실 것이라는 임마누엘이라는 축복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대계명과 대사명을 굳게 붙잡고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