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신성한 친밀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 예수 그리스도님과 나누는 친교 이외에 다른 중요한 것은 없다. 신앙과 관련된 행위와 생활에서만이 아니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는 내 삶의 모든 것이 되었다. 그분에게 영원한 생명, 그분과 맺은 우정과 형제자매 관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셨다. 그러면서 동시에 늘 당신의 청원을 다 들어주시는 아주 가까운 분이셨다. 그분에게 하느님은 아버지이자 친구처럼 아주 가까운 분이셨다. 영어에는 우리말처럼 엄격한 경어 법칙이 없다. 외국 형제들과 나누는 대화를 직역하면 ‘너’ ‘나’ ‘한다, 해라’이다. 하지만 그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 마음은 존중과 존경이고 동시에 친밀감이고 형제애다. 대 선배 형제에게는 살아있는 성인을 대하는 마음이고 어린 후배를 대할 때는 아들이 있었으면 그랬을 거 같은 마음이다. 예수님과 하느님 사이 관계가 이런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지극한 공경과 지독한 친밀이 하나가 된 거 같다. 서로 사랑하신다. 친구 같은 아버지, 모든 걸 다 맡기는 친구 같은 아들이다. 하느님은 아들 예수님에게 모든 것, 심판하는 일까지 다 넘기셨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2) 아드님은 아버지 하느님이 하시는 그대로만 따라 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반면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하느님은 아주 먼 분이셨다. 그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했던 거보다 더 멀었다. 그들은 그것을 공경과 흠숭이라고 여겼던 거 같다. 어쩌면 그런 마음이 사람들이 가진 하느님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고 내 안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본능적인 두려움 같은 그런 거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물려받아 그런 건지, 죄스러운 육체를 입고 있어서 아니면 죄인이라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입으로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외쳐도 마음은 여전히 무서운 심판자이다. 고성능 투시 카메라가 장착된 위성처럼 나를 쫓아다니며 모든 걸 다 감시하는 그런 존재다. 그런 하느님은 거리상 멀고 마음으로는 정말 멀리하고 싶은 존재다.
살면서 진정한 친구 셋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한다. 사람은 거의 본능적으로 친밀감을 원하는 거 같다. 언제나 내 모든 걸 다 맡길 수 있는 사람, 내 모든 걸 다 보여줘도 부끄럽거나 걱정되지 않는 사람 그리고 끝까지 변하지 않는 관계를 바란다. 그런 사람 셋이 아니라 하나만 있어도 이 거친 세상에서 살 수 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이 그런 분이셨다. 친구 같은 아버지,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신뢰하고 공경하는 분이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하느님이 나에게도 그런 분이라는 뜻이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이 관계는 예수님이 독창적으로 만드신 게 아니다. 훨씬 그 전부터 그랬다. 이사야 예언서는 이렇게 비유한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우리 하느님은 참 좋으신 아버지, 친구 같은 아버지시다.
예수님, 주님과 우정이 깊어질수록 참하느님과 가까워진다고 믿습니다.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으니 지금 여기서도 저희를 친구라고 부르신다고 믿습니다. 친밀감과 지극한 존경심을 합쳐서 주님을 부르고 따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으로 기도하면 아드님과 가까워지는 줄 믿습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