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목호세력 격전지…제주사회 수난으로 남다
(178)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제주일보 기사 승인 2023.06.20.
1295년부터 원나라 등 탐라마 반출
탐라목장 2곳서 10소장으로 확대
공민왕 반원정책으로 목호들 반란
제주서 총력전 끝에 고려로 재귀속
▲탐라목장 거쳐 10소장으로
원제국은 탐라인과 고려인의 탐라목장 접근을 초기에는 금지할 만큼 목호(牧胡: 말 기르는 전문 기술을 가진 몽골인)들을 내세워 군사기밀을 다루듯 목장을 운영했다. 또한, 일본원정을 준비하려 말을 반출하지 않다가, 정벌을 포기한 후인 1295년부터 탐라마를 반출하기 시작했다. 탐라목장 중 수산평인 동아막에서 길러진 말들은 수마포(受馬浦:수뫼밋) 등을 통해, 차귀평인 서아막의 말들은 와포(瓦浦:지삿개, 용수포구)와 당포(唐浦:대평포구) 등을 통해 원나라 등지로 실려 간 것으로 여겨진다.
탐라목장 관리체계는 1300년 이후 동도현과 서도현 등 제주가 두 지역으로 분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277년 동서 2곳으로 출발했던 탐라목장은 1300년대 8곳으로 분화되고, 8개의 목장은 조선시대 10소장의 기반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대원마정기(大元馬政記, 1324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의하면, 말뿐만 아니라 소도 원에 공물로 바쳐야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동아막에서는 말을, 서아막에서는 모동장(毛洞場)을 둬 소를 기른 것으로 추정된다.
1350년대부터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펼치자, 이에 불응한 목호들이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목호의 난은 1374년 최영 장군 부대에 의해 진압되면서 탐라목장은 쇠락하기도 했다. 탐라목장이 운영되는 과정에서 선인들은 목호들과의 접촉이 자연스레 이뤄졌고, 또한 종래의 목축에 몽골 방식을 접목하며 우마사육을 확대해 나가기도 했을 것이다.
조선 개국 초에는 제주의 산야가 우마방목지로 변해갔다. 이로 인해 제주의 농가는 마소의 농경지 침범으로 많은 피해를 당했다. 그러자 1429년(세종 11) 영곡 고득종의 제안에 의해 한라산 중허리(해발 200m~600m 사이)에 목장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성종 때에는 옛 탐라목장을 확대해 10소장으로 분할해, 제주목에는 1에서 6소장을, 대정현에는 7소장과 8소장을, 정의현에는 9소장과 10소장을 뒀다. 이외에도 정의현에 산마장을, 대정현에 모동장을, 우도에 마목장과 가파도에 우목장을 설치했다.
▲고려와 목호의 격전지 제주
이전 내용에서 보듯 목호의 난은 원나라의 쇠퇴기를 맞아 과감하게 시행한 고려 공민왕의 반원정책에서 기인했다. 공민왕은 원에 빼앗긴 동녕부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함께 제주를 또한 되찾고자 시도했다.
그러한 공민왕(1352~1374년 재위)의 반원정책으로 제주는 고려와 목호세력이 수차례 부딪치는 싸움의 무대가 돼야 했다. 목호들은 고려조정이 보낸 관리들을 세 차례나 죽였고, 이에 공민왕은 1366년 100척의 군선을 파견해 목호를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고려군은 목호군에게 밀려 오히려 퇴각해야 했다. 특히 세 번째 목호의 반란은 원이 중국에서 물러난 지 1년이 지난 1369년에 일어난 사건이라 더욱 충격적이다. 원의 지원 없이 100척의 배를 타고 입도한 고려군을 쫓아낼 정도로 목호들은 자체적인 방어능력이 대단했던 셈이다.
제주에서의 본격적인 싸움은 명나라의 개입과 말 때문이었다. 명나라는 원 소유의 말은 명의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1374년에 탐라마 2000필을 고려에 요구했다. 결국, 명은 원의 속국이던 탐라를 고려에 넘겨주는 대신 제주마 2000필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고려관리가 제주마 2000필을 취하려 하자, 탐라목장의 목호는 300필만 내주었다.
명나라가 2000필을 재차 강력히 요구하자, 공민왕은 목호정벌 출정군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고려 정예군 2만5605명과 전함 314척으로 구성된 출정군의 총사령관은 최영 장군이었다. 1388년 요동정벌군이 3만8830명이던 것과 비교하면 목호토벌에 동원된 고려군의 규모는 엄청난 것이었다.
공민왕의 이러한 결단에는 명의 제주 복속기도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지가 숨어 있었다. 1374년의 ‘거대한 전쟁’으로 목호세력은 최후를 맞이했고, 탐라는 다시 고려에 귀속됐다. 하담이라는 사람이 들은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甲寅:1374년)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라는 전투 목격담이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목호의 난은 제주사회의 공동체를 와해시킨 사건이자 제주선인들에게 큰 희생을 초래한 수난의 역사였다.
▲정의현 한남리 정씨 정려비와 법환리 최영장군 승전비
기병과 보병 3000여 명을 거느린 목호군에는 몽골족, 이들과의 혼인으로 태어난 반(半) 몽골족화 된 이들과 고려관리의 잦은 수탈에 반감을 품은 제주선인들이 가세해 있었다. 처음에는 목호군이 명월포(한림읍 옹포) 등지로 상륙하는 고려군을 무찌르며 기세를 올렸으나, 이후 새별오름으로, 홍로로, 탐라 전역으로 밀리며 밤낮으로 한 달여간 싸움이 계속됐다.
전투에서 밀린 목호군 수뇌부인 초고독불화·관음보·석질리 등이 범섬으로 대피하자 최영 장군은 배 50여 척으로 배다리를 만들어 범섬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리고 도망가는 목호들을 쫓아가 전부 살해케 했다. 이를 기념해 법환 바닷가에는 현무암이 아닌 화강암으로 된 최영 장군의 거대한(?) 승전비가 세워져 있다.
목호세력이 산남 중앙에 최후의 저항선을 구축했던 이유는 동서 아막이 위치한 산남 지방이 그들의 근거지였고, 특히 목호의 정신적 위안처인 법화사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법화사는 원나라가 중창한 목호의 성지였다. 하원동에 있는 법화사는 조선 초기 노비 280명을 거느릴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
목호의 난과 관련해 우리의 관심을 끄는 비석이 또 하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열녀 조에 등장하는 정씨의 비석이 그것이다. 열녀 정씨는 고려시대 직원(職員) 석곡리보개(石谷里甫介)의 아내였다. 목호의 난 때 지아비가 죽자 평생 절개를 지켰고 그 사실이 정의현 지역은 물론 제주 전역에 알려졌다. 그녀의 미모를 탐낸 고려군 장교가 그녀에게 결혼을 수차례 강요했으나 그녀는 끝까지 거절하고 수절했다.
1428년(세종 10) 정씨는 열녀 칭호를 받았고 열녀문도 세워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열녀문이 없어지고 비도 마멸됐는데, 이를 애석하게 여긴 한응호 목사가 1834년(순조 34) 빗돌을 마련해 비문을 새겨 놓았다. 이 비는 원래 한남리 원님로 길가에 세워져 있던 것을 2006년 한남리 복지회관 마당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최영장군 승전비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