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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 막 16장]
부활의 새 아침
(막 16:1-6)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예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암담하고 비참했던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33년간 인간의 죄와 고통을 몸소 감내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고통을 경험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안식일이 생긴 이래 가장 편히 쉴 수 있었던 안식일이었습니다. 주님이 무덤속에서 보내신 이 안식일은 구약에 있어서의 마지막 안식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동시에 낡은 종교의 진리와 가치관이 종언을 고하는 날이며, 그것은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새로운 생명의 날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구로하는 가장 어두운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날이 밝아왔습니다. 우주의 역사에 신기원을 이룬 새 날이 온 것입니다. 역사상 첫 부활의 아침이 온 것이며, 이 놀라운 사건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 여자들이었습니다. 빈 무덤, 예수의 부활, 안식 후 첫날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안식 후 첫날
1)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
'안식일이 지나매…그 무덤으로 가며'(1,2절). 여기에 나와 있는 여자들은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로서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예수의 여수제자이며,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작은 야고보 즉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이며(막 3:18) 그의 어머니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요 19:25)와 동일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살로메'는 세베데의 아들들, 즉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이며(마 27:56),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간이므로(요 19:25), 예수의 이모가 되는 여인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이 여인들이 향품을 가지고 예수의 무덤을 찾아간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러 간 것이 아니라 그 시체를 오래 보존하기 위하여 향을 바르고자 해서였습니다. 그녀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 모친 마리아와 함께 있었던 여자들로서(요 19:25) 예수에 대한 남다른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이 이 아침에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찾아간 것은 영원히 장사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들의 충성심이 비록 진리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녀들에게 우주적 대사건인 부활의 첫목격자가 되는 은혜를 입혀 주셨습니다.
2) 열려져 있는 무덤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그 돌이 심히 크더라'(3,4절) 무덤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들은 예기치 않았던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그녀들이 걱정했던 무덤 문이 이미 열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열어놓은 것이 아니라 천사가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마 28:2) 그리고 그 무덤 안에는 이미 '죽음'이란 없었습니다. 생명은 무덤 속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것이며, 열려져 있는 무덤은 이미 무덤이 아닙니다.
2. 첫 번째 부활과 그 증인들
1) 빈 무덤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5절). 무덤 안에서 발견한 것은 죽은 예수가 아니라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옷은 눈같이 흰 천사였습니다. (마 28:2,3) 주님은 이미 무덤 안에 계시지 않고 낯선 청년(천사)이 앉아 있었으므로 여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앙의 열정이 진리를 좇지 않을 때 거기서 생명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녀들의 '놀라움'은 인간의 상식이 진리에 이르지 못한데서 온 결과였습니다. 상식은 진리 앞에서 '경이'를 경험하고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빈 무덤은 부활의 진리에 대한 첫 증인으로서 여인들을 부활의 신앙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2) 천사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6절). 여인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첫소식에 접한 것은 바로 이 천사의 증언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천사는 이를 증언하고 인간(여인들)은 놀라면서 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3. 부활의 의미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6절) 예수께서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말씀은 생명이 죽음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죄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이며, 진리는 승리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인간의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구원하시는 전인 구원에 대한 확증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생명이 사탄의 지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로 이양된 새 생명의 날이며 생명이 왕노릇하기 시작한 날입니다. 부활의 아침은 새 역사의 아침이며, 새 종교의 아침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찾는 그리스도는 죽어있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살아나신 그리스도입니다. 부활은 진리의 정점입니다.
천사가 전해 준 부활의 메시지
(막 16:7,8)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빈 무덤을 여인들에게 확인시킴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틀림없음을 보여 주신 천사는 이제 그녀들에게 부탁을 한 가지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으로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7절) 이것은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주신 주님의 첫 메시지입니다. 그 안에는 부활 복음의 큰 의미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 부활의 소식을 듣는 사람들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7절) 주님은 고난당하시기 전에도 제자들을 사랑하셨지만 (요13:1), 고난 후 부활하신 후에도 자기의 제자들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1)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께선 그의 대적자들과 대중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당신의 제자들에게만 국한시키셨습니다. 주님을 영접지 아니하고 핍박하고 십자가에 매달은 자들에게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오히려 주님께 대한 거부감만 더하게 하고 불신케 하고 믿지 못함으로 인해 그 사실을 어리석은 생각으로 간주케 할 것입니다.(고전 1:23; 행 5:30-33)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메시지는 오직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과 순종함으로 따르는 그분의 제자 된 자들만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메시지를 힘입어 약함에서 강함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허무함에서 희망으로 변화되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베드로의 이름이 들어있습니다.
천사는 특별히 베드로를 지칭했습니다. 이 내용은 복음서 가운데 마가만이 언급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이름이 주님의 천사를 통해서 언급된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으며, 그때의 감격을 믿음의 아들인 마가에게 감격스럽게 전달했습니다. (벧전 5:13) 천사의 메시지는 우리 모두에게 베드로의 기쁨과 같은 기쁨을 줍니다. (1) 부활의 소식은 성도에게 감격을 줍니다. 한낱 초라한 갈릴리 어부의 이름을 하늘의 천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손수 지어주신 것입니다. (마 16:16-18)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거룩한 성도라는 이름은 십자가를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이름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의 생명의 전당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며, 오늘도 주님과 천사들의 입에서 불리워지는 자랑스러운 이름입니다. (마 18:10) (2) 희망을 줍니다.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결코 알지 못한다고 그 이름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막 14:66-72)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배반하고 그 이름을 모독한 배은망덕한 제자라 할지라도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회개의 기회를 만들어 주시며, 그의 믿음과 사명을 회복시켜 주시며, 다시 하늘나라를 향한 귀한 소망을 전보다 더욱 풍성하게 품도록 해 주십니다. (롬 5:8-10)
2. 메시지의 내용
천사를 통한 메시지의 내용은 '갈릴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서 계셨습니다.
천사는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7절)라고 했습니다. 전에 주님과 함께 갈릴리를 떠나올 때, 제자들의 꿈과 믿음은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수난사건을 겪고 난 지금 이들의 신앙과 마음은 상처받고 변질되었습니다. 두려움과 원통함, 허무감과 수치심 등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갈릴리로 금의환향할 수 없는 실패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그들보다 먼저 주님께서 가서 계신다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목자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자기 양떼들을 결코 외롭고 수치스럽고 위험한 지경에 홀로 남겨두지 않을 것입니다. (시 23:3-5)
2) 갈릴리에서 만나실 것을 수차례 약속해 주셨습니다.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예수께서는 고난당하시기 전부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에서 만날 것을 누누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 26:32; 막 14:28) 이제 제자들은 그 말씀을 기억하고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 사탄의 세력을 늘 묵상해야 합니다. 환경만을 바라보거나 자신의 지혜만을 의지하거나 세상의 수단들을 사용할 때 오히려 사망의 깊은 골짜기에 빠져 방황하는 일이 많습니다. 오직 성경을 통하여 언약하신 주님의 신실하신 말씀을 의지할 때 승리가 가능한 것입니다. (요일 3:2,3)
3)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갈릴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는 곳입니다. 그곳은 제자들의 망국의 한과 슬픔이 주님 안에서 보상받고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쉼을 얻는 곳입니다. 성도들 역시 주님을 만나 그와 함께 신비로운 교제를 나누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부활의 첫 목격자
(막 16:9-11)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본문 말씀은 요한복음 20:11-18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것은부활의 첫 목격자가 마리아라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그녀에 대해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라고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특별히 그녀를 소개하는데 특별히 배려를 한 것은 그녀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하는 은총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의미 없이 부활하신 첫 모습을 그녀에게 가장 먼저 보이시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리아에게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합니다.
1.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본문에서 마가가 소개한 대로 그녀는 한 명도 아닌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혀 고통을 당했던 사람입니다. 귀신는 그녀의 정신과 육체를 마음대로 움직였을 것입니다. 따뜻한 가정을 떠나 음침한 무덤가로 밤마다 끌고 다녔을 것이며 여인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상실한 채 귀신의 온갖 더러운 추태를 부려야 했을 것입니다. 또한 일곱 마귀의 힘에 압도당해서 그녀의 영혼은 밤낮 지옥과 같은 어둠 속에서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희망도 소망도 없는 그의 영혼은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저주받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녀를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 주심으로 새사람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예수님 곁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실 때도, 무덤에 장사되어 주검으로 변했을 때도 예수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변치 않고 더해만 갔고 그리하여 드디어는 아무 찾아가지 않는 새벽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그녀는 아담 이래 최대의 사건인 부활을 처음 목격하게 되는 은총을 입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모습을 나타내십니다. 그를 간절히 찾고 사랑하는 자에게 그는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2. 주님을 향한 열정이 있는 자에게는 부활의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통하여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이후부터 열심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고통 받으실 때에도 그의 열성은 변치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고통을 당할 때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렸지만 마리아는 끝까지 주님의 운명을 지켜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 제자들은 어디론가 흩어져 실망 중에 울고만 있었지만 마리아는 이른 새벽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는 열성을 보였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열정을 외면치 않으시고 그에게 나타나셔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안일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자는 주님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성경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어떤 지식적인 노력이나 과학적인 탐구를 통한 열정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 문제의 해결과 생명의 구원을 위하여 갈급한 심정으로 주님을 찾는 열정을 의미합니다.
3.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자에게 부활의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들림에서 고침을 받은 후 예수님의 가시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눅 8:3) 이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많은 복음의 메시지를 들었으며,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7절) 따라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볼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메시지를 들은 자들에게 부활의 모습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메시지를 듣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면, 그들은 하나의 유령이나 환상으로만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경 말씀을 많이 읽어서 지식을 쌓아두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그 당시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제자들은 평소에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자주 들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말했을 때 베드로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께 다음과 같은 어리석은 간구를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마16:22) 그러나 이 말씀을 평소에 듣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말슴 구절은 특별히 암송하는 것이 좋습니다.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창시자 '도슨 토르트맨'은 성경 암송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은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청년회의 성경암송 대회를 위해 암송했던 구절이 매일 그의 심령을 노크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을 얻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늘 묵상하며 가까이 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
(막 16:12,13) “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했을 때 그들은 그 사실을 의심하여 믿지 않았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더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을 믿어야 할 예수님의 제자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14절) 우리의 신앙은 궁극적으로 부활에 대한 신앙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의 말씀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제자들에게 일러주었던 말씀입니다. (마 16:21; 요 11:25)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사실 것으로 말씀하신 장사된 지 삼 일째 되는 날 곳곳에 흩어져 비통에 잠겨만 있었습니다. 도무지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본문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있으나 그들은 믿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들었던 부활의 말씀을 믿고 확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태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습니다.
1) 확신 없는 믿음은 신앙생활에 활력을 주지 못합니다.
10절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했을 때 그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막연히 예수님의 말씀에 확신 없이 따라다니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시자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막연히 어떤 축복을 기대하고 교회를 들락거리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막연히 교회에 출석하면 세상의 축복뿐만 아니라 천국을 소유할 것으로 믿지만 도무지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신앙생활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따라서 어떤 활력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교회활동을 하지 못하고 늘 맥없이 종교생활만 하는 것입니다.
2) 확신 없는 믿음은 감사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그것을 알았다면 그들은 죄 용서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슬퍼하고 울기만 했을 뿐입니다. 내심 그들은 예수님을 원망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던 결과가 같은 동족인 유대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들도 이와 같은 불만 속에서 지냅니다. 교회에 헌금을 드리고 소정의 십일조를 바치나 그들의 마음은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행하질 못합니다. 교회 생활이 그들에게 기쁨이 아니라 부담이 되어 도무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교역자들도 이러한 점에 역점을 두어 영혼구원 사역에 주력해야 할 것입니다.
2. 영적인 안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냐셨다고 기록하고 있으나(11절), 누가복음에서는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6)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영적인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줍니다.
1) 부활의 지식은 세상적 사고방식으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 믿지 아니한 것과, 12절에서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고서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인간의 이성의 눈으로 모든 것을 심판하고자 하는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그 당시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사두개인들은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입니다. 그들은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예수님과의 부활에 대한 논쟁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눅 20:27-40)
2)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영혼 구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이 땅 위에서의 유익만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기 전에는 영적인 안목이 없었다고 보아야 하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그들은 비로소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천국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책망
(막 16:14)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적절한 책망은 매우 효과적인 교육의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도무지 부활의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방황하며, 허무와 분열의 늪으로 빠져들자 주님께서는 드디어 성스러운 부활체로 저들에게 현현하사 책망을 하십니다. 이 땅에서 제자들에게 하는 마지막 책망이 되기에 깊은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약속의 갈릴리를 잊었기 때문에
1) 갈릴리는 첫 사랑의 장소입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거의 갈릴리 지방 출신들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격한 물결 속에서 망국의 한을 씹으며 청춘과 꿈을 권태스러운 그 물질로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흑암의 세월 중에, 빛 되신 주님을 만났고 '나를 따르라'는 부름에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주님과 동행했던 감격스러운 첫사랑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그 정열과 사랑을 주님의 빈 무덤 속에 가둬버리고, 서로 불신하며 멀어져 가고만 있기에 주님께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린 성도와 교회는 주님께 책망을 듣습니다. (계 2:5)
2) 갈릴리는 회복의 장소입니다.
요 21장을 보면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는 베드로의 타락적 선동에 편승하여, 선교의 사명을 버리고 모두 갈릴리로 돌아가서 창고의 그물을 다시 잡았습니다. (요 21:1-4)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해변 가까지 찾아가셔서 조반까지 마련하시고, 밤새도록 헛 그물질을 한 제자들의 허기를 채워주신 후에(요 21:10-14), 곧 베드로와 제자들의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요 21:15-22) 당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신 질문은 그 어떤 엄한 책망보다도 제자들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주님의 귀한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어두운 세상에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주님을 신뢰치 못하고, 주신 직분을 포기하며 낙심과 타락과 허무의 갈릴리로 가야만 할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미 나보다 먼저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 부활의 증언들을 불신하기 때문에
1) 심령이 완악해졌습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의 완악해진 마음을 꾸짖었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갑작스럽고도 비참한 죽음으로 인해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소문이 나돌자 (마 28:11-15) 장로들에게 잡히면 틀림없이 죽음을 당할 것을 알고 공포심 때문에 예민해져서 이성과 사랑을 잃고 서로 의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도는 급격한 환경의 변화와 삶의 위기가 닥치더라도 살아계신 주께서 내 곁에 가까이 계심을 믿고, 성도의 본분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2) 동료들의 증언을 무시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신실한 여인들의 기쁜 소식도 무시하고(막 16:6-11), 엠마오 출신 동료들의 생생한 간증도 외면했습니다. (막 16:12,13) 명 년 동안 주님께 직접 온갖 형태로 신앙교육과 훈련을 받은 그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도, 성경의 예언도, 주님의 부활의 언약도, 동료들의 진실한 고백도 불신하는 것을 볼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 감화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복음의 은총에 관해서는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전 2:9-12;12:1-3) 오늘날도 주님의 자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성경 말씀과 주님의 구속의 언약과 부활사건 등을 믿음으로 순종치 않고, 자신의 유한한 지혜와 삶의 경험과 주관적 감정이나 체험을 중심으로 주님을 만나려다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물은 본능으로 살고, 인간은 동물에게 없는 이성으로 산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성과 감각과 논리를 초월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영적 존재들입니다. (롬 1:16,17; 히 10:36-39)
3. 책망의 유익
주님의 책망은 제자들에게 큰 자극을 주는 지혜가 되었습니다.
1)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제자들을 책망하신 후 주님께서는 세계 선교를 명령하셨습니다. (막 16:15-18)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새롭고 큰일을 맡기시기 전에 때로는 책망과 징계를 통해서 단점을 반성케 하시고, 믿음을 새롭게 무장시켜 주셨습니다. (딤전 3:9,10)
2) 확실한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주님의 책망은 영광스러운 부활체와 더불어 제자들의 영혼 깊숙히 인식되어 일생 동안 결코 '부활의 증인'(행 1:1-8)들의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선교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었던 참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징계와 책망을 받은 후에 욥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게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보나이다'(욥 42:5)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16)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슬픔과 혼란은 지나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가슴속에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 샘물처럼 솟아올랐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주신 주님의 마지막 명령은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1. 복음 전파의 동기
무슨 일이든지 합당한 동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장 순수해야 할 복음 사역을 불순한 동기로 그르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순수한 동기가 필요합니다.
1)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복음 전파 사역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제자들이 스스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형태의 복음 사역이든지 그 주권자는 하나님이심을 늘 유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그 아들의 '몸된 교회'(고전 12:27)를 통하여 만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그럼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2) 성도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복음전파는 또한 성도의 즐거운 마음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실행되어야 합니다. (벧전5:1-3) 전도자 자신의 물질적인 이해관계나 인간관계 및 교회내의 정치적인 지지 세력 확보의 방편으로 이용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전에 중국이나 인도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그 나라들로부터 식민지 침략의 선봉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직 구령의 즐거움을 전도의 동기로 삼아야 합니다.
2. 전하는 사람들
1)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전도인의 자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전도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딤전 6:11) 물질의 노예가 된 사람, 편견의 울타리에 갇힌 사람, 세상의 욕망과 허영의 포로가 된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전도의 사역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대속의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힌 자에게 전도의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고후 5:13,14)
2) 희생하는 마음으로 전해야 합니다.
전도인은 열린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우월감과, 혹은 열등의식과 폐쇄적이거나, 배타적인 사고방식을 품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주께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것을 본받아 우리도 마음 문을 열고 보다 겸손하여 낮은 자세로 복음사역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만을 증거 해야 합니다.
전도자가 전해야 할 내용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곧 예수님 자신입니다. 주님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을 열게 되고(요 14:8-10) 주님의 사역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향하신 거룩하신 뜻을 깨달으며(고전 15:1-4), 또 주님의 언약을 신뢰하므로 죄악을 이기고 영생의 넘치는 삶을 얻습니다. (엡 1:17-19;골 1:11-12) 전도인은 사도바울처럼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며, 또한 모든 인생을 향하여 유일하게 계시된 구원의 진리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4) 생활전체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도는 복음 안에서 거저 주신 구속의 은혜를 즐거이 누릴 권리가 있는 반면에(엡 1:11-14),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하는 전도의 책임도 있습니다. (마 5:14-16) 때문에 신앙과 생활이 분리된 모습으로는 전도의 의무를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3. 전해야 할 대상
1) 만인에게 전해야 합니다.
전도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전에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했으나, 구속의 예언이 성취된 후에는, 이방 만민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아테네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대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신'(행 17:26) 창조 섭리는 구속의 섭리에도 공평하게 적용될 것입니다. 인류는 누구를 막론하고 첫 조상 아담 안에서 죄 성을 유전 받음으로 오늘도 죄 아래서 종노릇하며, 장래에 동일하게 심판과 영벌을 받아야 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사렛 예수로 성육신 하신 것은 죄 아래 신음하는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의한 것으로 그것은 특정한 민족이나 집단만을 위함이 아니었음을 전도인은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2)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더욱 성숙한 신앙인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믿음입니다. 구원의 대가는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치루셨으므로 전도인은 복음이 요구하는 것 외에 다른 무거운 짐을 구원의 조건으로 전해서는 안 됩니다. (행 15:28; 갈 1:6-9) 다만, 진실하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피전도자를 양육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 증거자에게 주시는 신적 능력
(막 16:17,18)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40일 동안 이 땅 위에서 계시면서 때때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직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령을 하셨는데,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상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표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능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서 그것은 복음전파를 용이하게 하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이 권능은 각 은사로 개인에게 주어지고 그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고 하나님의 나라는 건설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악령 제압 능력의 부여
'곧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17절). 귀신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사람과 짐승에게 들어가 불행에 빠지게 하는 악령입니다. 귀신은 여러가지 질병과 불구를 유발시켜 인간을 괴롭히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갈릴리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서는 고쳐주셨으며(눅 4:31-36),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셨으며(마 12:22),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셨고(막 5:1-20), 그밖에도 많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은 제자들에게도 이미 허락하셔서 사도들도 이 능력을 전도 여행 중에 행사했습니다. (마 10:8; 막 3:15) 이처럼 귀신들은 (1) 사람에게 각종 질병과 불구를 유발시킬 뿐만 아니라 (2) 사람들을 부도덕한 길로 인도하고(마 10:1), (3)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 성장을 저해합니다. (엡 6:12) 이러한 귀신들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믿는 자들에게 허락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악령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게 했으며, 복음전도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2. 초자연적인 언어능력의 부여
'새 방언을 말하며'(17절). 이 '새 방언'은 영적인 언어를 뜻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방언과 사람에게 하는 방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모두가 인위적으로 배워서 하는 언어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초자연적으로 발성케 되는 언어입니다. 인간의 언어가 분열된 것은 바벨탑의 붕괴 때입니다. 언어의 분열에 따라 인류는 각 족속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분열된 인류가 하나가 되는 때 언어도 단일 화되어야 합니다. 주의 재림 후에 이루어질 천년 왕국은 온 인류가 하나가 되는 때이며, 이때 인류의 언어는 하나로 통일될 것입니다. 그때 사용되는 언어가 지금 성령이 발성케 하여 나오는 방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년왕국은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세계이므로 그 언어도 영적인 언어이어야 하며 하나의 언어를 사용할 때 비로소 인류는 한 가족이 될 것입니다.
3. 초자연적인 防毒 능력의 부여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18절). 이것은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하여 체내에 들어온 독극물의 독성을 방제하는 힘과 맹수와 독충으로부터 공격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멜리데 섬에서 독사에 물렸으나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으며(행 28:1-6),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았으나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단 6:19-22) 이러한 방독 능력은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특별하신 은혜로 말미암는 경우와 성령의 충만으로 인한 거룩한 능력이 방독능력을 갖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 프란시스나 썬다싱 같은 사람의 생애에서도 이러한 방독 능력과 맹수의 공격성을 제어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4. 초자연적인 치유 능력의 부여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18절).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을 고친다는 것은 성경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복음 사역은 전도와 교육과 신유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예수의 사역은 전인 구원의 사역이었으며, 당신 앞에 찾아오는 병자를 거절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이 신유의 사역은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을 통해서도 나타났으며,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수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병든자가 있을 때에는 교회의 장로를 청하여 병낫기를 기도하라고(약 5:14-16)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병을 고쳐주신 다음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죄와 질병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죄 사함이 신유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의 신유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은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막 16:19,20)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부활하신 후 40일째 되는 날 주님은 승천하여 하늘보좌로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은 땅에 오셨던 임무를 다 끝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승귀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십니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제자들에 의해서 지속되어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된 구속의 원리가 개개인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에 의존해야 하고 그것은 말씀의 증거와 함께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주님은 이 일을 하나님 우편에 게시면서 수행하시기 시작했으며, 그리고 구속받은 성도들을 위하여 할 일도 준비하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의 의미에 대해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승귀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영접
1) 하나님의 영접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19절). '말씀을 마치셨다'는 것은 이 세상에 오셔서 증거 해야 할 진리의 증거를 다 끝내셨다는 뜻이며,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고 최상의 예를 하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위로이며 그 수욕에 대한 영광의 보상임을 뜻하고 있습니다.
2) 구속사역의 완성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19절). 이 말씀을 구속사역의 완성을 뜻하고 있습니다. 인류에 대한 구속 사역은 인간의 죄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므로 주님은 몸소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승귀는 임무 완료의 결과입니다.
3) 생명의 완성
예수 그리스도의 승귀는 인간 생명의 완벽한 성취로서 생명의 의미를 최초로 완성시킨 '인자'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입니다. 이제 '생명'이란 '죽지 않는 것'이란 진리가 확립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 전까지 '생명'은 '죽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영원히 추방해 버린 것입니다.
2. 성도를 위한 중보사역
1) 영원한 대제사장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19절).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로서의 삶이었다고 하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생활은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시는 것이 되며, 앞으로 이 세상에 재림하셔서 다스리실 천년 왕국은 왕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시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히 7:15-17)
2) 성도들의 사역에 대한 지원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20절).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고 하셨습니다. 3년 반 동안 가르치신 제자들을 성령께 위임하셨던 것입니다. 오순절 날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고(행 2:1-4) 권능 있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귀신들린 자, 각종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그리하여 주의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었습니다. (행 1:8)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20절)
3) 성도들에 대한 하늘나라에서의 영접 준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동안 주님은 앞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을 성도들을 영접하기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처소는 영원한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3. 복음전파 사역에의 동참
1) 복음 선포의 권능으로 동참하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시니라'(20절)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할 때 권능이 나타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시키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권능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회개케 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행 2:36-42) 예루살렘에서 전파되기 시작한 이 복음은 예수께서 승천하신지 약 300년 후에는 전 로마 세계를 정복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승리이며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출처: 복있는 그리스도인 원문보기▶ 글쓴이 : 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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