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27 '사가모니 부르칸' 주24)에서 R본에서는 SOGOMON BARCHAN, Z본에서는 SOGOMONI BURCHAN이 나온다. 모두 석가모니 부처를 지칭하는 표현이지만, 조금 특이한 표현들이다. 사가모니 부르칸이라면, 몽골식 표현이겠지만, 불왕(佛王)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불왕 혹은 법왕의 의미가 강하다. R,Z본의 표현은 불천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는 카타이 즉 고려인들의 표현방식이다. 지금도 최남석선생님과 불교계 일각에서는 부처님을 불천님 혹은 부천님으로 부르고 있다. - 부도의 하날님이라는 의미이다.
-참고로 몽골비사를 인용해 보자. P253 '그 출정한(그래서 카타이 즉 고려의 항복을 받고) 김에 카신(合申 夏新 夏震 - 동방의 하나라, 신라 즉 탕구트)사람들에게 갔다. 향하여 가니 카신 사람들의 보르칸(BURQAN - 불천이 더 원음이다.)이 귀부하여, "그대의 오른팔이 되어 힘을 바치겠읍니다." 하고 아뢰면서 차카 이름의 딸을 칭키스카안에게 내주었다. 다시 보르칸 칸은....' - 여기서 보르칸 보르칸 칸이라는 말은 훈 혹은 한(周나라)의 세력에게 동쪽으로 밀려난 하(색 사카 스키타이)나라의 잔존세력의 정치시스템은 1200년대까지 아직 정교일치(제정일치 -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와 같은)의 체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 준다. 보르칸(BURQAN - 불천)은 부천님(부처님)을 이르는 이름이고 보르칸 칸은 불천(BURQAN)이라는 고려식 왕호칭에 몽골식 칸을 덧붙인 표현인 것이다. 1200년대까지 '불천님'은 정교일치의 세속군주를 부르던 보통명사로 쓰이던 것을 마르코 폴로와 몽골비사는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단군(檀君)이 여러 제정일치의 군주를 부르던 보통명사로 쓰이던 것같이 말이다.
P231 대카안의 풍모에 대해서 '그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의 알맞은 체격이고, 아주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으며 신체 모든 부분이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장미처럼 희고 붉으며, 눈동자는 까맣고 아름다우며, 코는 잘 생긴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가 봤을 때, 현 몽골인을 보고 코가 잘 생겼다거나, 신체균형이 잘 잡혀 있다거나, 눈동자가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고대부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탈리아인의 외모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 이탈리아인이 '잘생겼다. 균형이 잘 잡혔다. 아름답다. 얼굴이 장미처럼 희고 붉다.'고 표현했다면, 그것은 현 몽골인을 두고 말한 것은 결단코 절대로 아니다. 마르코 폴로가 타타르라고 부르는 몽골인은 현 몽골인은 아니다. 바로 백인인 현 타타르스크인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이다. 칭키스칸과 쿠빌라이는 백인인 것이다. 현 몽골은 조작이라는 증거다. 칭키스칸이 중앙아시아를 침공한 것은 동에서 서로 침공한 것이 아니라, 서에서 동으로 침공한 것이다.
P232 '타타르 종족 가운데 웅그라트(UNGRAT)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매우 잘 생겼고 피부는 흰색이다. 매년 그 종족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100명의 아가씨들을 대카안에게 데려간다.' - 이 글에서 보여지는 인상도 역시 타타르가 백인이라는 것이다. 칭키스칸의 아내 부르테(조치 차가타이 우구데이 톨루이의 어머니)가 이 웅그라트족 출신이다. 마르코 폴로가 타타르라고 부르는 몽골은 결단코 현 몽골이 아니다.
P234 '큰아들의 이름은 훌륭한 칭키스칸을 기리기 위해 친킴(CHINCHIM)이라고 했다. 이 사람은 대카안이 되어 제국 전체의 군주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죽어버렸고 테무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을 하나 남겼다. 이 테무르는 대카안의 군주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가 대카안의 큰아들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주 35)에서 '몽골제국의 역사는 대칸의 계승이 반드시 예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예를 수없이 보여준다. 더구나 1285년 친킴이 죽고 난 뒤 쿠빌라이가 테무르를 황태자로 임명한 것은 1293년 음력 6월의 일이었고, 폴로 일행이 중국을 떠난 것은 그보다 전인 1290~91년경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쿠빌라이의 뒤를 그 손자인 테무르가 이을 것이 분명하다는 폴로의 예측이 적중한 것은 "놀랍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쿠빌라이의 장손이자 테무르의 동복형인 카말라도 무시할 수 없는 후보였다.' - "놀랍다"고 표현했지만, 그 맥락은 "불가능한 일이다"는 내면적 의미를 드러내 주고 있는 말이다. 그것은 즉 후대에, 그것도 아주 후대에 몽골사를 정리하여 현재의 몽골사로 조작해 낸 아주 정통한 전문가가 손을 댔다는 의미이다.
P240 '대군주는 이 궁전 근처에 자기의 것과 똑같은 또 다른 궁전을 짓도록 했는데 그것 역시 하나도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이 통치하고 군림하게 되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궁전의 크기나 성벽의 숫자도 내가 위에서 설명한 대카안의 것과 똑같이 만들게 했다. 친킴의 아들, 즉 내가 위에서 마땅히 군주가 될 것이라고 거명했던 그는 대카안이 되기에 합당한 모든 예절과 관습과 행동을 알고 행하는데, 그것은 대카안이 죽으면 즉시 그가 군주로 선택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교서를 내리고 권위의 인장을 지니고는 있지만, 대카안이 살아 있는 한 그와 완전히 똑같은 권력은 행사하지 못한다.' 주34)에서 '폴로의 이 기록은 테무르가 황태자로 임명되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힘들 정도이다.' - 즉 이해가 안 되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몽골제국의 다이내믹한 대카안 왕위계승의 일반적 관례와는 다르게, 쿠빌라이의 다음 대카안이 테무르인 것을 알고 있는 그 전문가가 달아놓은 사족이 이런 '놀랍고 이해하기 힘든' 구절을 만들어 낸 것이다.
P235 '그(쿠빌라이)가 네명의 정후들로부터 낳은 아들들 가운데 일곱 명은 광대한 지방과 왕국의 왕들이며, 모두 현명하고 사려 깊기 때문에 잘 다스리고 있다.' 그리고 주33) - 1. 도르지 2. 연왕 친킴 3. 안서왕 망갈라 4. 북안왕 노무간 5. 코리다이 6. 운남왕 후게치 7. 서평왕 오그룩치 8. 아야치 9. 영왕 쿠쿠추 10. 쿠틀룩 테무르 11. 진남왕 토곤 - 에서 일곱명의 아들을 잘 정리해 놓고 있다.
'1. 燕王 친킴(CHINKIM) -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니까 트루판 지역의 왕. 북쪽에서 상도와 대도를 지키는 관문을 큰아들에게 맡기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상도는 천산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하미(카미)일 수밖에 없다. 지도를 꺼내 놓고 보면 트루판을 중심으로 상도 하미(카미)는 그 동남에 있어서 감숙성 신라세력(몽골식 용어로 카신-合申-夏新 - 동쪽 하나라)의 목덜미를 움켜 쥐고 있고, 대도 얜치는 신강성 고려세력(폴로식으로는 카타이 혹은 카울리, 몽골비사에서는 키타드, 집사에서는 키타이 혹은 카울리)의 목덜미를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2. 安西王 망갈라(MANGGALA) - P303의 켄잔푸(현 키르키스의 이식쿨호수 아래 千泉, 원사의 경조부)의 왕. 서쪽(파미르 서쪽)에서 제국의 관문을 지키는 것 또한 당연하다. 秦蜀夏隴의 경계지역도 통할했다.(P304의 주20)
3. 北安王 노무간(NOMUGAN) - 트루판의 북부지역을 통할했을 것이다.
4. 雲南王 후게치(HUGECHI) - P318과 주35)의 카라잔 즉 호라즘( 현 투르크메니스탄 지역과 우즈베키스탄 남부 지방)을 운남이라고 부르고, 폴로가 이 지역에 갔을 때는 후게치의 아들 에센테무르가 이 지역을 통할하고 있었다.(P319)
5. 西平왕 오그룩치(OGRUQCHI) - 서쪽을 평정한다는 의미로 보아서, 안서왕의 관할지역의 서쪽지방 즉 키르키스와 타직의 서쪽지방이니, 현 카자흐스탄과 우주베키스탄을 관할하고 있었을 것이다.
6. 寧王 쿠쿠추(KOKOCHU) - 탕구트와 그 남쪽 현 서녕지역이니, 감숙성과 청해성을 관할하고 있었을 것이다.
7. 鎭南王 토곤(TOGON) - 카슈미르 파키스탄 간다라 아프간지역과 그 남부지방을 관할하고 있었을 것이다.
쿠빌라이의 일곱 아들이 관할하고 있는 지역을 분석해 보면, 중앙조정이 바로 중앙아시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P235 '여러분은 대카안이 1년에 석달, 즉 12월과 1월과 2월은 캄발룩이라 불리는 카타이의 수도에 머문다는 사실을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주36)에서 '따라서 쿠빌라이는 음력 10월에 시작하여 겨울을 넘기고 그 다음해 2월까지 대략 4~5달 가량 캄발룩에 머물렀던 셈이다.'
P241 '이제는 이 궁전들이 있는 대도시에 대해서, 그것이 어떻게 또 무슨 연유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캄발룩(칸의 도시)이라는 이름의 거대하고 훌륭한 옛 도시가 있었다. 대카안은 그의 점쟁이들로부터 이 도시가 반드시 국가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크게 반항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런 까닭으로 대카안은 그 옆에다가 이 도시를 건설하도록 했다. 그 사이에는 단지 강(푸리상강 - 현 개도하)이 하나 있을 뿐인데, 그는 모든 사람들을 그 옛도시로부터 새로 지은 도시로 이주하도록 하고, 그것을 타이두(TAIDU - 즉 大都)라고 불렀다. 신도시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살 수 없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없는 사람들은 그대로 옛 도시에 살도록 내버려두었다.' - 송도를 대도라고 부르는 유일한 경우다. 이 한번의 명명이 전세계의 모든 사람이 이 송도를 대도라고 부르는 이유라니, 참 한심하기도 하다. 후대의 조작이 틀림없다.
-송도 개도 개경이라는 고려의 수도를 그 의미만을 따서 캄발룩 즉 황제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 개경의 북쪽에서 동남향으로 흘러서 보스팅호로 들어가는 현 개도하인 푸리상강 건너편에 신도시를 건설하여 타이두(TAIDU-대도)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몽골비사와 집사에서 이 송도를 어떻게 부르는지 찾아보자. 몽골비사 P251에 종도(中都)가 나오고, P470의 원문에 JUNGDU가 나온다. 여기 나오는 U의 발음은 ㅗ로 소리난다. J의 발음은 까다롭지만 반치음^이다. 그래서 종도 중도가 아니라, 송도가 JUNGDU의 바른 발음인 것이다. 다른 예들도 보자 - 집사 2권 칭키스칸기 P273 '몽골인들은 그 지방들을(키타이, 카라키타이, 주르체등의 지방) 자우구트(JAUGUT)라고 부르고, 키타이 주민들의 용어로는 키타이를 한지(漢地)라고 부른다.' -이 JAUGUT가 소구트(소그드, SOGD, 스키타이) 즉 소구르, 우구르, 위구르(유구르)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소구트로 발음하는 것이 정확하다. 요구트 혹은 요구르(유구르)로 발음될 수도 있다. 또 몽골비사 P251의 '주르체드와 주인'이 나온다. JURCED는 JURCEN의 복수형, 그 JURCEN의 발음은 반치음^ㅗ진 혹은 요진이 된다. JUIN도 역시 반치음^ㅗ인 혹은 요인이 되니, 소인 혹은 소진, 요인 혹은 요진 - 人을 고대에 인 혹은 진으로 발음 - 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 여진으로 고정된 것이었는데, 이 ‘주르체드와 주인’은 같은 말의 다른 발음을 동어반복으로 부른 것이다. - 결국, 여진은 요지역 사람이란 말이며, 소구트는 위구르(유구르) 사람이란 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진과 소구트는 완벽히 같은 말의 다른 발음방식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한헌석칼럼 7호의 차르단단 조에서 나왔던 쟈갈도 주르체드와 주인과 소구트와 완벽히 같은 단어의 다른 발음으로 보인다. 차르조우도 CHARDZHOU인데, 프랑스어식으로 읽으면 샤르주가 되어서 CH가 반치음을 표시하는 발음기호임이 확실하다. 이 반치음이 ㅅ, ㅈ, ㅇ으로 소리 나니까 샤르주 쟈르주 야르주로 발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르조우는 야르주이고 야르치 즉 야치인 것이다. 두산백과사전의 ‘반치음’ 조를 인용해서 확인해 보자. ‘반잇소리라고도 한다. 음가(音價)는 유성마찰음 [z]로 추정된다. [s]가 주로 유성적(有聲的) 환경에서, 흔히 후행모음(後行母音) 뒤에 명음도(鳴音度)가 큰 -m, -n, -r 등이 연결될 때 [z]로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된다. ㅿ음은 한자의 초성으로 쓰였으며(而 ·耳 ·穰), 한국어의 모음 사이에서 쓰였고[쳐>처엄>처음(初), >>가을(秋)], ㄴ ·ㅁ 아래에서 쓰였고(안(抱)>안으와) 사잇소리로도 쓰였다(나일흠). 그러나 말의 어두에서 쓰이지 않았으며, 독립된 낱말의 받침으로도 안 쓰였으며, 한자의 초성으로 사용한 ㅿ자(字)는 오늘날 모두 ‘ㅇ’으로 변하였다. ㅿ음은 순경음(脣輕音) ‘ㅸ’과 더불어 개성과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세국어의 한 특징이었으며 《두시언해(杜詩諺解)》 초간본(初刊本)에는 ㅿ자가 쓰였으나 중간본에는 소멸된 것으로 보아 16세기 초 ·중엽에 우리말에서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 반치음^은 S(Z)와 'ㅇ'으로 발음된다는 것이다.
-상도와 이 송도와의 관계를 살펴 보자. S 혹은 Z발음을 J로 표기하고, O발음을 U로 표기하는 집사와 몽골비사의 특징을 이용하여, 송도를 중도(中都)로 표기하여, 송도를 숨기고, 남경 혹은 강화도인 하도에 대비해서 중도 상도를 조작해낸 것이다. 만일 원래 上中下都로 표기했다면, 西京을 右都로 東京을 左都로 표기하는 게 당연할 텐데, 동경 서경을 좌도 우도로 표기한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중도 상도라는 명칭은 조작이다. 그런 명칭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고, 근세 어느 시점에 누군가에 의해서, 어떤 의도로 조작되었다는 말이다. 동방견문록 P86에서 마르코 폴로는 대카안이 있는 수도(소위 '상도')를 케메인푸시(CHEMEINFU市)라고 표기하고 있다. 주39)에서 '한가지 이상한 점은 마르코 폴로가 '케메인푸'와 '산두'가 동일한 도시라는 사실을 어디에서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원조에 그렇게 오래(장장 17년) 있었다면 양자가 같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펠리오는 마르코가 알고 있으면서도 단지 같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 당신이라면, 당신 글을 읽는 사람이 케메인푸(카미)와 상도를 알아 듣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주를 달아서 케메인푸가 바로 상도라고 설명해 주지 않겠는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케메인푸를 상도로 조작을 했는데, 이 P86의 케메인푸 부분을 '부주의하게도' 빠뜨리고 함께 정리하지 못했던 것을 이렇게(알고 있었지만, 설명하지 않았다고 하는 식으로) 땜질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쪽 학자들조차 '한가지 이상한 점'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집사 3권 '칸의 후예들' P377에서는 케이밍푸(KEYMINGFU) 혹은 카이밍푸(KYMINGFU)라고 했고, P411에서는 카이민푸(KAYMINFU)라고 했다. 1930년대에 급조된 新元史에서는 開平府로 등장하게 된다. 현 카미 혹은 하미의 한자식표기인 개명부를 개평부로 바꾼 말인 것이다. 케메인=케이밍=카이밍=카이민=카민=카밀(哈密)=카미일 수밖에 없다. 중앙아시아 조에서 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집사 3권 P413 '그 나라(키타이)에는 커다란 도시들이 수없이 많은데, 그 각각에 어원상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이름을 붙였다.(의미가 있는 이름이 붙어 있다는 뜻) 그 도시들의 장관 등급은 그 도시들의 칭호에 의해 분명해지기 때문에, 어떤 도시의 장관이 더 높은지를 놓고 논란을 벌이거나 ..... 칭호와 품급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되어 있다.
1급:깅(GING,京)
2급: 두(DU,都)
3급:푸(FU,府)
4급:주(JU,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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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급:슌(SHUN,村)'
1290년대까지 마르코 폴로가 본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상도의 명칭과 그 품급은 자신이 부르던 ‘케메인푸’나 집사의 ‘카이민푸, 카이밍푸 혹은 케이밍푸’였다. 즉 1급 경도 아니고 2급 도도 아니었다. 바로 3급 부였던 것이다. 만일 그 당시 명칭이 상도였다 하더라도, 2급 도였다. 물론 대도(수십번도 더 등장하는 캄발룩이라는 명칭 대신에 대도라는 명칭으로 쓰이는 경우는 단 한번 뿐이었다. 이 ‘대도’라는 명칭도 후대의 조작임이 분명하다고 본다.)는 2급 도이다. 이 대도가 언제 건설되고 대도의 통치중심이 언제 끝났는지 한번 살펴 보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지음 '한국사연표'에 의하면,
1264년에 연경을 중도로 함.
1368년에 원 순제 대도로부터 개평으로 달아남.
1369년에 원 순제 화림으로 달아남.
1260년에 즉위한 쿠빌라이 세조가 1264년에 개경 송도를 동영지로 정하고, 그 이후에 송도의 개도하 건너편에 사방 10킬로미터에 이르는 대도성을 건설하게 되는데, 마르코 폴로가 도착한 1275년경에 대도성이 건설되어 있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90년 뒤에 원이 망하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나라의 최고의 전성기라는 세조 쿠빌라이대에 쿠빌라이는 황제가 아니라, 그 품급이 3급밖에 되지 않는 케메인푸에서 마르코 폴로를 맞은 것이다. (P87 '마침내 케메인푸라는 매우 풍요롭고 거대한 도시에 있던 대카안에게로 갔다.) 그리고 기껏해야 그 품급이 2급밖에 되지 않는 대도를 자기 재위기간의 거의 반 이상을 들여, 건설한 것이다. 자기 군사본부인 장군부를 제법 규모 있게 무력으로 탈취한 개경 옆에 건설한 것이다. 아직 천하는 고려천하인 것이다. 고려 황제는 남경(강화도, 현 호탄 혹은 화전)으로 피신해서, 1급의 품급인 경이 건재하고 있는 것이다. 쿠빌라이는 정치상황의 많은 부분을 좌지우지하는 세도가였을 뿐인 것이다.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칭키스칸으로부터 기껏 150년정도였다. 대도를 건설하고 기껏 90년정도였다.
P246 '즉 어떠어떠한 날에 이런 거사를 하기로 계획했으니 봉화를 보는 즉시 수염을 기른 사람들은 모두 죽이고, 다른 도시들에서도 봉화를 올려 마찬가지의 행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수염을 기른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했는가 하면 카타이인들은 선천적으로 수염이 없지만 타타르, 사라센, 기독교도들은 수염을 기르기 때문이었다.' - 무력으로 정복한 정복자와 그 협력자들은 백인계의 수염을 기르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P246 '카타이 사람들은 대카안의 통치를 증오했는데, 그것은 그가 타타르들, 아니 대부분 사라센들을 통치자로 임명해서 보냈고, 카타이인들은 마치 노예처럼 취급당해서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카안의 카타이 지방에 대한 지배권은 마땅한 권리에 의해서 갖게 된 것이 아니라 무력에 의해서 장악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믿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집안에 충실하고 카타이 지방 출신이 아니었던 타타르, 사라센, 기독교도들에게 그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맡긴 것이다.' - 그 지방 사람들이 사라센 즉 이슬람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4편에서 묘사하고 있는 마르코 폴로의 중국의 서남부(중앙아시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의 지방에 대한 묘사-P295~340-는 그 주민들이 온통 불교도(우상숭배자)일 뿐인 것이다. 이 맥락에서 '기독교도들에게 그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맡긴 것'이라는 내용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슬쩍 끼워넣기를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기독교도는 손님으로만 등장하지, 통치자로는 결단코 등장하지 않는다. 기독교도를 그 지방에 대한 통치권자로 내세웠다는 것이 조작이라면, 사라센 즉 이슬람에게 불교도에 대한 통치권을 맡겼다는 것도 조작이 아닐까하고 의심을 해보는 것도 당연한 의심이 아니겠는가? 마르코 폴로와 그 아버지 그 삼촌도 있듯이 이슬람교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교도에게 통치권을 맡긴다는 것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그 지방'은 당시 그리고 조선조까지도 지방왕국이었다. 만약 지방왕국의 군주가 모반을 하여 제거된다고 해도, 그 군주의 혈통 중에서 친원 세력의 사람을 골라서 새로운 군주를 세워야 그 지방정권이 유지되고 시스템이 작동되지, 이슬람에게 그 통치권을 맡긴다면, 그 지방정권은 당장 작동을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타르에게 그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맡긴다면, 어떻게 될까? 어림도 없는 일이다. 타타르가 그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보호하지 않고, 무력으로 그 가문의 통치권을 강제로 몰수하여 자기들이 취득했다면, 그 타타르는 천하에 대한 체면과 명분이 설 수가 없는 것이다. 타타르가 언제라도 지방왕국의 통치권을 뺏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어느 지방왕국이 충성과 의리를 지켜 주겠는가? 연왕 친킴이 트루판지역의 지방왕국을 빼앗아서 그 지방왕국의 왕이 되었다면, 그 지방의 제후나 가문만이 아니라, 그 인근 지역의 제후와 가문들과 백성들마저도 소위 제국의 적으로 돌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 지역의 지방왕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그 지방의 도호부의 도호로서 존재했다고 해야 명분도 있고, 그 지방정권의 협조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타타르, 사라센, 기독교도들에게 그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맡긴 것이다'는 구절은 조작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P248 '85장의 "캄발룩시에서 반란을 기도했던 음모와 그 주동자들이 붙잡혀 처형된 것에 대한 이야기"의 결론부에서, '그리고 그 쿠빌라이는 사라센들의 저주받을 종교가 모든 죄악을 합법적으로 만들고 자기들 율법을 따르지 않으면 누구든 죽일 수 있다는 이유로 저 저주받을 아크마트와 그의 아들들이 자기들은 죄악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종교를 경멸하고 혐오하게 되었다. 그는 사라센들을 불러서 그들의 율법이 명령하는 것들 가운데 많은 것들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그들에게 타타르들의 법에 따라 부인을 맞아들여야 하고, 칼로 동물의 목을 따지 말고 배를 갈라서 잡아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리고 주54)에서 '아크마트 살해사건에 대한 마르코 폴로의 기록은 중국 측이나 페르시아 측 기록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는 이 사건이 타타르, 사라센, 기독교도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증오의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 아흐마드 피살 이후 무슬림에 대한 정서가 악화된 것은 사실이다.'
-주54)가 의미하는 바는 중국 페르시아 쪽의 기록은 이 아크마트 사건을 타타르, 사라센, 기독교도에 대한 증오의 표현으로 그 사건을 묘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입을 빌어 타타르, 사라센, 기독교도들에게 그 지방의 통치권을 맡겼고, 이들에 대한 증오로 인해 아크마트 사건이 발생했다고 조작한 것이 눈에 띈다는 것을 '흥미롭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무슬림에 대한 정서가 악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재미있다. 우리는 몽골(원)시대를 묘사하는 많은 글들에서 몽골시대를 거쳐서 중앙아시아가 이슬람화가 되었다는 사실을 주입 세뇌 받는다. 그러나 이 글이 의미하는 바는 소수의 이슬람이 몽골조정에 참여했지만, 그 소수의 이슬람에 대한 정서가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슬람화라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인 것이다. 더구나 몽골시대의 많은 지역이 이미 이슬람화 되어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제4편 중국의 북부와 서남부에서는 현재의 신강성과 중앙아시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가 모두 우상숭배자 즉 불교도로 묘사되고 있다. 중앙아시아 주변지역이 카타이(고려)의 강고한 불교국가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조작을 하기 위해서, 이 지역을 이슬람지역으로 혹은 이슬람화하는 지역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브루노 바우어의 '실크로드 견문록' P376 '반면 이 민족(키르키스-현 카자흐, 우즈벡, 키르키스지역)에겐 고대 샤머니즘적 전통이 강하게 뿌리내려 있었다. 그래서 16세기의 아랍인들도 그들을 정식 무슬림으로 만들지 못했고, 종교의 힘을 빌리면 이 민족을 좀 더 쉽게 통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19세기에 "이슬람 사원을 지어 주고 물라를 보냈던" 러시아인들도 그들을 이슬람화 하지는 못했다.'
- '이 민족에겐 샤머니즘 전통이 강하다.'는 것은 서쪽 출신들의 샤머니즘 전통을 말하는 것인데, 실제는 불교가 기본이었다. 19세기 이후에 서쪽 출신의 주민들이 주류가 되어있는 것을 이렇게 묘사한 것이다. 잘못된 이해에에서 비롯된 추가적 조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슬람화를 위해서 세제혜택과 교육과 사회문화적 정치계층적 차별대우도 했을 것이다. 아마도 우즈벡의 몇몇 도시는 불교의 바다에 떠 있는 몇몇 섬처럼 이슬람화가 진행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위 예문과 같이 이슬람사원을 지어주고 물라를 보내도 이슬람화하지는 못했다. 당조의 탈라스전투에서부터 파미르 이서 지역이 마치 이슬람 영향권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우리는 잘못 주입 조작된 선입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4편 중국의 북부와 서남부 여행에서 중앙아시아와 그 주변지역이 불교국가였음을 아주 잘 입증해 주고 있다.
-물론 파미르 이동 지역도 살아남기 위해서 20세기에 이슬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위 이슬람지역이라고 하는 신강성, 감숙성, 영화회족 자치구의 장례식 장면을 보면, 마르코 폴로가 묘사하는 것과 같이 순 불교식이다. 그것은 21세기에 들어서서도 마찬가지다. 2003년 12월에 출판된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 3권의 P327 '장예(張掖-甘州)가 가까워질수록 경치가 빠르게 달라졌다. ....어떤 소리가 내 주의를 끌었다. ....소리가 나는 집 앞 긴 장대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등은 높이가 1미터 가량 되는 사층 짜리 탑 모양으로, 여러 개의 지붕이 있는 탑을 흉내 낸 것이었다. 진홍빛의 금단추, 여기저기 파란 점이 있는 등, 색깔이 강렬했다. 벽에는 여러 가지 색깔이 칠해진, 두개의 커다란 종이 원반이 있었다. 장례용 화관이었는데, 고인의 무덤에서 태우려고 하는 것 같았다..... 두꺼운 양탄자를 놓은 문턱에, 하얀색 옷을 입고 머리장식을 한 남자 두 명이 무릎을 꿇고, 땅에 손을 놓고 머리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 마치 20~30년전의 반도의 전통 장례식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상복을 입고 빈소에 곡을 하고 예를 하는 모습이 아닌가? 이것이 이슬람 식의 장례식이라는 말인가? 탑 모양의 등을 켜 놓고 있는데. 이슬람도 탑을 세우는가?
'나는 걷는다' p313 '예쁘고 작은 이슬람 사원-이스탄불부터 수백 개나 봐 왔지만-이 주의를 끌었다. 절과 이슬람 사원을 결합한 희한한 양식이었다. 공 모양의 돔이 있는 것이나 지붕에 초승달이 있는 것은 이슬람 사원의 양식인데, 전체 모양이나 유약을 입힌 기와지붕은 하늘을 향해 솟은 것이 꼭 절 양식이었다.'
-우리는 이 이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마르코 폴로 시대의 장례식과 우상숭배자(즉 불교도)의 절의 양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이 이슬람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게 이슬람이 맞는가? 언제 이슬람화되었다는 말인가? 이 20세기에 벌어진 기이한, 참으로 기이한 도깨비방망이 역사조작 - 현실과 그 속의 인간들의 조작을 포함해서 - 의 일환으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조작되고 이용되었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동방견문록의 어느 부분이 조작이고 어느 부분이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인가? 누구도 그 진위를 구분하고 그 허위를 발라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가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카타이로 왔고, '4편 중국의 북부와 서남부'에서 보여 주는 바와 같이 다시 중앙아시아로 여행을 한다. 어느 중앙아시아의 묘사가 진실인가? 한쪽은(거쳐 왔던) 이슬람으로 묘사하고, 다른 한쪽은(다시 여행하는) 우상숭배자 즉 불교도로 묘사한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 있다. '4편 중국의 북부와 서남부'의 지명을 이 조작자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얜치에서부터 신강지역을 지나서 중앙아시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지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의 여행로를 그대로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물론 주석을 통해서 북경에서부터 현 중국의 서남부로의 여행로로 조작을 하기는 했지만) 다시 중앙아시아로 여행하면서 불교도로 묘사한 내용이 진실이다. 이 사실을 진실로 못 박아 놓고 이해한다면, 동방견문록은 너무나 너무나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보고중의 보고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동방견문록을 더욱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첫댓글P231 대카안의 풍모에 대해서 '그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의 알맞은 체격이고, 아주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으며 신체 모든 부분이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장미처럼 희고 붉으며, 눈동자는 까맣고 아름다우며, 코는 잘 생긴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이 내용은 저의 생각으로는 서양인 또는 몽골인보다는 잘생긴 한국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검은 눈동자의 경우 서양인들에서는 스페인, 이탈리아, 고대 그리스지역에서 보이지만, 대부분 갈색으로 보이고..그렇게 흔히 보이지는 않습니다.. 검은 눈동자는 동양인의 대표적 상징이 됩니다..
부르칸"은...몽골어 "부르한"...신(神)을 이릅니다...하늘님도 이르나...하늘님은 "탱그리"로 더 많이 씁니다..."브르한"은...불국황제(브르항)란 말씀이 맞는듯 합니다...브르=보란=보라=브라...이 음들이 다 합쳐진 희안헌 발음을 해야 발음 잘 했다합니다...^. .^
첫댓글 P231 대카안의 풍모에 대해서 '그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의 알맞은 체격이고, 아주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으며 신체 모든 부분이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장미처럼 희고 붉으며, 눈동자는 까맣고 아름다우며, 코는 잘 생긴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이 내용은 저의 생각으로는 서양인 또는 몽골인보다는 잘생긴 한국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검은 눈동자의 경우 서양인들에서는 스페인, 이탈리아, 고대 그리스지역에서 보이지만, 대부분 갈색으로 보이고..그렇게 흔히 보이지는 않습니다.. 검은 눈동자는 동양인의 대표적 상징이 됩니다..
부르칸"은...몽골어 "부르한"...신(神)을 이릅니다...하늘님도 이르나...하늘님은 "탱그리"로 더 많이 씁니다..."브르한"은...불국황제(브르항)란 말씀이 맞는듯 합니다...브르=보란=보라=브라...이 음들이 다 합쳐진 희안헌 발음을 해야 발음 잘 했다합니다...^. .^
브르(보라)는...우리말 푸른색(하늘색),보라색과도 통해 보이며...영어의 "블루"와도 통해 보입니다.
불교의 색깔이 빨간색,노란색이 주종임은...백색의 "부(불=火=태양)"가 아침저녁으론 원래 빨개서 그런듯 하며...ㄹ"로 앞축됀 "래(내,노르)"가 들어가 태양의 바다(하늘)란 뜻이 돼는게...불=부르=불례=부예=부여 인듯 합니다.
그동안 보라색의 어원을 못 찾았는데, 불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부처의 색을 뜻한다고 해석해도 되겠습니다. 가시광선 중에서 보라색은 자외선 앞에 있는 것으로 가장 강력한 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