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사당역에서 우리 가족들이 모였다.
아들의 생일이기도 했지만 매달 한 차례씩 만나는 '정례미팅'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처음으로 다섯 명이 식사를 함께 했다.
아들이 '여친'을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이번 식사의 주관자는 아들이었다.
아들은 자기 여친을 배려해서 였겠지만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깔끔한 '일식집'으로 예약했다.
우리가 가끔씩 가는 맛집이었다.
둘은 같은 직장에 다니는 커플이었고 나이는 아들이 두 살 더 많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악수를 나눴고 그녀와의 첫만남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또한 뜨겁게 환영했다.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그녀에게 물어본 건 그게 전부였다.
상호간에 대화를 안 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섯 명이서 왁짜지껄하게 많은 대화를 나눴다.
서로 죽이 잘 맞았다.
아들 여친도 밝은 성격이며 붙임성이 있어 금방 '소통과 공감'의 자리에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그러나 일상적인 대화였다.
면접이나 선을 보는 자리는 아니었기에 사적인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할 필요도 없었다.
직장생활 얘기, 여행과 추억 만들기, 미래의 소망, 커플간의 취미활동, 싸움과 갈등 그리고 슬기로운 해소방안, 딸의 파트너 만들기를 위한 노력, 요즘 근황과 고민 등등 다양한 얘깃거리들이 쉴새 없이 쏟아졌다.
평소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우리들의 대화패턴대로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룸이었기에 망정이지 룸이 아니었으면 옆 테이블에 심각한(?) 민폐를 끼칠 정도였다.
맛있는 음식에 소맥이 몇 순배 돌아갔다.
식사 끝무렵에 딸이 사온 케익으로 생일축하를 해주며 각자가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밤 9시께 식당에서 나오는데 우리 룸을 서빙했던 이모님이 우리 부부에게 조용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어쩌면 식구들이 그렇게 대화를 재밌게 하고 활발하게 하세요? 놀랍고 부러웠어요"
"아이고, 그렇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왔다.
그녀에게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우리가 자주 가는 카페로 옮겼다.
커피와 차는 내가 샀다.
거기서 다시 한 시간 동안 조잘조잘 줄기차게 수다를 떨었다.
아들 여친도 적극적으로 반응해 주었고 간간이 자신의 의견도 게진하며 즐거워했다.
밤 10시께 자하철역에서 헤어졌다.
딸은 동대문구로, 아들 커플은 송파구로, 우리는 산본을 향해 각각 지하철을 탔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 대한 내 평상시 지론이 하나 있다.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은 대개 8할 이상이 '부모책임'이라는 것이다.
강보에 쌓여있을 때부터 고교졸업 때까지만 세세하게 케어하면 된다.
스무 살이 넘었으면 기도하며 지켜보는 것, 끝까지 기다려 주는 것, 갑섭하고 싶어도 내가 내 허벅지를 바늘로 찔러가며 참고 또 인내하는 것,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마약과 폭력으로 물든 삶이 아닌 한 무한의 신뢰를 보내며 따뜻하게 격려하는 것,
이것이 내가 자식을 대하는 소신이자 유일한 '기도제목'이었다.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가족관계를 형성한 지 어느새 33년째다.
지금까지도 이 원칙과 기준은 그대로 적용되었지만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하되, 그 자유 이면엔 더 엄숙한 '책임'이 뒤따른다는 걸 우리도, 내 자녀들도 어찌 모르겠는가.
그걸 알면 됐다.
부연이나 첨언은 사족일 뿐이었다.
사랑은 '블랙홀'이다.
그 심연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
섬광같은 번뜩임으로 발화된 사랑은 활성화 되고 그 위력을 발휘하다가 어느 순간 소멸한다.
별의 소멸도, 꽃의 낙화도 허탈해 할 일이 아니다.
또한 젊음의 유한성도 슬퍼할 일이 아니다.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없다고 해서 인생이 의미없는 것이 아니듯,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고 해서 사랑했던 빛나는 순간들이 허망한 것은 아닐 테니까.
아들과 여친.
결혼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친구로 남을지 난 모른다.
그 점에 대해 그리 큰 관심도 없다.
아무튼 삼 년 간 애틋하게 사랑의 꽃밭을 함께 일궈왔다고 하니 그 점에 대해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이제는 반듯한 성인이 되었고 각자의 길에서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다.
그들의 현명한 선택과 판단을 믿을 뿐이다.
현재의 사랑이 부부의 인연으로 이어져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 없다.
그 결과가 어떻게 전개될지라도 청춘들의 간절한 사랑은 그 자체로 '영롱한 별'이 되고, '불멸의 감동'으로 각인 될 것이다.
그래서 의미있고 예쁘다.
건강한 존재와 가슴 설레는 사랑.
지금 이 순간이, 오늘 이 하루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와 기적의 전부'임을 믿는다.
오늘도 파이팅이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