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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
마 28:11-20
11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설 교 >
한국 교회 성장의 역사적 조명
마 28:16-20 / 이필재목사
지금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부름을 많이 받고 한국의 목회자들이 세계 선교를 많이 오고 가는 발걸음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한국 교회가 짧은 역사에 놀라운 성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미국 언론 기관이 조사 발표를 했습니다. 세계에서 교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50대 교회를 발표했는데 그 중에 25개 교회, 절반이 대한민국 교회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같이 십자가를 많이 볼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어느 나라에도 없습니다. 일본은 기독교 역사가 우리 한국 교회보다도 훨씬 긴데도 하루 종일 다녀도 십자가 하나도 구경하기 힘든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 교회 활동도 우리 한국교회가 제일 활발합니다. 7월과 8월은 방학 기간이 되어서 대한민국의 청년회, 대학생들이 단기 선교 팀으로 외국에 많이 가기 때문에 인천 공항은 단기 선교팀 멤버들로 와글와글 합니다. 비행기를 타면 교회인지 비행기인지 분간을 못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또 나타내는 걸 좋아해서 허리에 띠를 찼잖아요? 무슨 팀이라고 해서 와글와글한데 이런 나라는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세계 각국을 많이 다녀보면서 선교 활동을 했기 때문에 자연히 한국과 다른 나라의 비교를 할 수 있는 노하우가 생겼습니다. 서구 사회를 보면 기독교 역사가 거의 1천년에서 2천년인 나라들이 대부분입니다. 여러분, 로마에 있는 성당을 왜 베드로 성당이라고 합니까? 베드로 무덤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벌써 2천 년 전에 이태리를 왔잖아요? 로마에서 전도하다가 죽었잖아요? 그래서 로마는 기독교 역사가 2천년입니다.
인도에 가보면 기독교를 지금도 도마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직계 제자 도마가 인도에 와서 전도를 했기 때문에 인도에 가면 도마 기념 교회가 있습니다. 다 2천 년 전 시대입니다. 또, 바울서신을 보면 에베소교회, 고린도교회, 데살로니가교회를 바울이 다니면서 다 복음을 전했잖아요? 그 나라들은 다 기독교 역사가 2천년입니다. 웬만한 나라들은 다 1천년이 넘었지 1천년 이하는 유럽에 하나도 없습니다. 다 그렇게 역사가 오래 되었는데 우리 대한민국은 2백년 정도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짧은 역사에 세계 제일의 교회 성장이 이루어졌는가?
지금 세계 선교는 두 나라에 의해서 되어지고 있습니다. 미국과 한국입니다. 미국에서 약 6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했고 한국이 2만 명을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점점 줄어듭니다. 한국은 점점 늘어서 앞으로 20년 후에는 한국 선교사가 제일 많아집니다. 제가 몇 년 전 런던에 갔을 때 어느 영국 목사님이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일부러 찾아와서 “어떻게 당신네 나라는 선교 역사가 2백년 밖에 안 되었는데 그렇게 세계에서 제일가는 교회 성장을 가져왔는가? 불행하게도 우리 영국은 기독교 역사가 2천년이나 되었는데도 지금 이 런던에서만 문을 닫아서 부동산에 나와 있는 교회가 7백 개입니다. 교인이 안모이니 교회가 뭐합니까?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이 교회당 건물을 사들이는 사람들이 거의 술집 주인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구조가 술집과 비슷해서 여기 강대상에다 밴드만 갖다 놓으면 금방 술집이 됩니다.
그러니 큰일입니다.” 제가 또 미국 디트로이트에 부흥회를 갔는데 미국 목사가 한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제 설교를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참석했습니다. 끝나고 듣고 저한테 말합니다. “내가 하도 슬퍼서 이 부흥회 참석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지나간 1년 동안에 이 도시에서만 우리 미국인 교회가 24개가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문을 닫는 미국 교회를 사들이는 사람은 다 한인교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당신네 한국 교회는 어떻게 그렇게 성장합니까? 이제는 우리가 한국 교회에게 배워야겠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또 나한테 했습니다.
그러면 왜 서구 교회는 쇠퇴하여 갔는가?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세미나 때 많이 가서 하는 내용을 소개하려 합니다. 제가 그래도 열심을 다해서 연구한 내용입니다. 서구 교회는 신학 의존도가 너무 심합니다. 유명한 신학자가 무슨 말을 하면 거기에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그대로 하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말하면 거기에 따라가고 하는 신학 의존도가 너무 강한데 우리 한국은 복음주의 성격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가 무슨 발표를 해도 큰 영향을 안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한 복음서를 중심으로 바울 서신도 보고 구약도 바라보는 복음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초가 흔들리지 않고 튼튼합니다. 슈바이처 박사를 온 세계가 다 존경하지요? 독일 신학교에서 신학교 교수가 강의하다가 슈바이처 박사의 “예수전 연구사”를 비판했다가 그만 학생들이 데모를 일으켜서 학교를 안 나옵니다. “그렇게 훌륭한 신학자를 왜 비판했느냐?” 사실 우리 한국 교회 목사들 중에 슈바이처 박사의 “예수전 연구사”를 사람보다 안 받아들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저도 안 받아들이는 입장에 서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학 의존도가 너무 강한 것이 서구 교회의 문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몸담아 있던 미국 PCUSA 총회 총무 일을 담당하는 분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단 안에서 제가 목회하는 교회가 많이 성장하고 그래서 그 교단 잡지에 내려고 인터뷰 하러 와서 “당신네 교회가 무엇을 잘해서 어떻게 이렇게 교회가 성장했느냐?” 물어보기도 하고 그랬으니까 자연히 저를 알 것 아닙니까? 저와 마주 앉아서 물었습니다. “우리가 한국에 선교사를 보냈는데 한국 교회는 그렇게 성장하고 미국 교회는 나날이 쇠퇴하는데 한국 교회가 그렇게 성장하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뭐라고 간단히 설명해 주어야 맞는 말이 될까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러면 한번 내 입을 자세히 보고 나를 따라서 해보세요. 잘 듣고 따라해 보십시오.” “하겠습니다.” 내가 뭐라고 했냐면 “믿씁니다! 해보세요.” 그랬습니다. “한국 교회 성장은 이겁니다. 예수님도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셨으니까 믿는다는데 하나님이 어떡합니까? 이것으로 한국은 성장했습니다.”
또 서구의 많은 나라들이 문명과 문화의 발달로 풍요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신앙의 나태함을 가져왔습니다. GNP 1만 달러 될 때까지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2만 달러 될 때까지 현상 유지 했습니다. 2만 달러에서부터 계속 내리막길을 걷는 것이 지금까지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지금 그 시점에 와 있다는 겁니다. 똑같은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교회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지나간 10년 동안 대한민국 개신교회 교인 7퍼센트 줄었습니다. 여러분, 7퍼센트가 성장해도 만족치 않은데 7퍼센트가 줄었습니다. 개 교회 중에 성장하는 교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교인들이 줄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주일학교는 지나간 5년 동안 29.5퍼센트가 줄었습니다.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우리 교육부 열심히 하잖아요? 그런데 서구 사회가 GNP 2만 달러 된 것은 삶이 풍부해 지니까 교회 나와서 기도하고 “하나님 아버지!” 이런 것을 하기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교인이 줄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별히 서구 교회들은 예배의 모범에 있어서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로고스,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의식 중심의 예배가 되어서 교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말로 몇 마디 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하고 무슨 복잡한 의식이 그렇게 많은지 의식 중심이 되었는데 심지어는 평신도들이 성경 읽는 것조차 금지했습니다. 모스크바 박물관에 가보세요. 그렇게 아름답고 큰 성경을 자물쇠로 잠가놨잖아요? 아무도 보지 말라고, 성직자만 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직접 교인들이 대하는 시간을 줄여버리면서부터 교인이 줄기 시작했습니다. 서구 기독교의 권력과 현상은 절대 다수 민초들에게 버림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가 서구 사회에서 얼마나 권력이 커졌는지 나라의 왕도 성직자들이 왕관을 씌어 주어야만 왕입니다. 여러분, 파리에 가시면 박물관에 나폴레옹의 왕관 쓸 때의 그림을 보세요. 성직자들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전부다 팔짱 끼고 비꼬듯 나폴레옹을 쳐다봅니다. 아무도 나가서 왕관을 나폴레옹에게 씌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자기가 자기 손으로 갖다가 자기 머리에 왕관을 쓴 사람입니다. 그리고 벗어서 자기 아내 조세핀에게 씌어줌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성직자들이 인정을 안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절대 권력, 그리고 국가 재산보다 교회 재산이 더 많은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교인이 줄기 시작했습니다. 모스크바 박물관에 이번에도 제가 다녀왔지만 가보세요. 성경책 겉표지에 다이아몬드를 얼마나 많이 박아놨는지, 또 성직자들이 입는 가운에다 다이아몬드를 얼마나 많이 붙였는지 제가 이렇게 보다가 ‘저 성경책 하나만 들고 뛰면 팔자 고치겠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사치했습니다. 그러니까 민중들에게 버림을 당했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데 교회는 이게 뭐냐?” 그러면서 안 갔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교인이 심하게 줄어드는 현상이 왔습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교회 성장 이유는 뭐냐? 몇 가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선교사들의 훌륭한 선교사역이 대한민국을 구원했습니다. 미국에서 특별히 온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지금 한국 선교사들이 외국에 가서 그렇게 하는 선교사 하나도 없습니다. 보세요. 언더우드는 4대 때까지 여기서 살았습니다. 이런 사람 대한민국 선교사는 없습니다. 아직 세월이 그렇게 안 갔지요. 없잖아요? 지난해 언더우드의 4대 후손이 이 땅에서 가방을 들고 떠나면서 남긴 말 “이제는 우리 가족이 한국 교회를 위해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떠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God bless Korea!” 하면서 떠났잖아요? 이것이 보통 일입니까? 선교사들이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훌륭하게 사역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더 훌륭한 사역은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아주 훌륭하게 했습니다. 하나는 학교를 세워서 교육에서, 무지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었습니다. 1985년 8월 3일 최초 선교사 중의 하나인 아펜젤러가 정동에 집 한 채를 구입해서 교실을 만들어서 학생 모집을 했는데 4명이 왔습니다. 이겸라, 고영필, 이종은, 이인탁! 그래서 그 사람들을 놓고 대한민국에서 최초의 신문화 교육을 시켰으니 그것이 곧 배재학교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 이화여대, 연세대학교 할 것 없이 우리나라에 신문화교육의 학교들이 생겨서 무지에서의 구원, 그래서 대한민국이 지금 이렇게 교육 나라로 변하는데 선교사들이 와서 해주었기 때문에 최초의 학교의 세워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수 잘 믿어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제일 대학이 많아진 축복을 받았는데 시작은 선교사들이 다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병원을 세워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질병에서 구원을 입었습니다. 갑신정변 때 수구파, 개혁파 싸움에서 민영익이 칼을 맞고 피 흘리며 죽어갈 때 장안에 있는 용한 한의사 다 불러와도 안 되었잖아요? 그런데 알렌이라고 하는 의료 선교사가 들어와서 금방 지혈제를 놓고 붕대를 감아버리니까 피가 멎어서 살아났습니다. 민영익은 명성왕후의 조카입니다. 이 일을 고맙게 여긴 고종이 그때 기독교를 핍박하지 말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복음의 확산이 이루어졌고 10만 냥의 돈을 알렌에게 주어서 그런 기술의 보급을 이 땅에서도 해달라고 해서 세워진 최초의 병원이 광혜원,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교육과 과학, 의료 이것은 다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 땅에 시작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사역입니까? 우리는 그분들의 사역에 대해서 고마움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사역 때문에 복음의 확산이 이 땅에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다음에는 당시에 한국에 정치적인 조건이 있었습니다. 우리 한반도는 수난의 땅이잖아요? 어쩌다가 우리 한반도 주변에는 세계 4대 강국 가운데 세 나라가 둘러싸여 있습니다. 일본, 중국, 러시아입니다. 그래서 이 세 나라가 번갈아 한반도를 집어 삼키려고 침략해 왔기 때문에 날마다 얻어터지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그때부터 어떻게 해야 이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것인가를 생각하다 친일파가 생겼고 친러시아파가 생겼고 친중국파가 생겼고 이 파벌싸움을 극심하게 한 것이 지금까지 내려와서 우리나라 정책에 계속 파벌 싸움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서구 사회에 대한 동경이 생겼습니다. 서구 사람들이 이 나라를 찾아오면 우리가 구원을 받지 않을까, 좀 잘 살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밀사를 보내서 이곳저곳을 다녔던 것을 우리가 역사에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판국의 정치적 조건 속에서 서구인들이 복음을 들고 오니까, 와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사역만 하니까 복음의 확산이 잘 이루어진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과거 정부로부터의 실망감! 고려 500년은 불교 영향을 미쳤잖아요? 그런데 민중들은 불교가 싫어졌습니다. 왜? 불교가 실제 민중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지 않으니까요. 불교의 세력은 정부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결국은 고려 말년에는 신돈이라는 스님이 나라를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나라가 망해버렸습니다. ‘그러면 그 종교는 과연 우리 민족에게 희망인가?’ 민중들이 실망했습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후 불교는 약간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전국에 있는 수많은 절들이 그때 불타 없어지고 유교 문화가 팽창하는, 종교의 일종의 전환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유교와 민중은 어떤가? 이조 5백년은 더 추악한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양반, 상놈 계급화로 인권이 무수히 말살됨으로 민중은 유교에 있으면서도 유교에 대해서 회의를 갖게 되는 겁니다. ‘종교란 과연 민중의 희망인가? 이런 거 없이 사는 게 훨씬 낫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특별히, 500년 동안 여성차별화 문제는 여성의 인권을 말살시켰습니다. 옛날에 여자는 자식을 못 낳으면 그냥 내쫓았습니다. 여자의 재산권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때리면 얻어맞고 여성의 인권이라고 하는 것은 이조 500년 동안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 하도 두드려 팼기 때문에 지금 남자들이 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와서 여성 인권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여자 교인들이 많은 겁니다. “우리가 살 길은 여기다. 여성의 희망은 기독교 밖에 없다.” 이런 의식이 자연히 생겨서 저는 45년 목회하면서 그렇게 많이 설교를 하고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고 했지만 제가 설교할 때 남자가 더 많이 모인 교회는 군인교회 밖에는 없었습니다. 안방에 있는 여자들을 사회로 이끌어 낸 것이 기독교입니다. YWCA를 만들어서 여성 지도자 양성시켰잖아요? 그래서 그때부터 여자들이 사회에 나오기 시작하는데 김활란 총장, 임영신 총장이 다 거기서 나왔습니다. 한명숙 전 총리도 YWCA 출신입니다. 여성 지도자를 키워낸 것이 기독교입니다. 여성해방운동입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우리의 살 길과 희망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여자 교육이 많아진 것입니다. 안방에 있던 여인들이 다 사회로 나오고 교회로 나와서 그 실력을 발휘하니까 한국 교회가 부흥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에는 한국인의 종교성입니다. 한국인들은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 사상이 있었습니다. 절대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이 비를 내려 주시고 잘 먹고 살게 해주시는 것이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와서 “그 하나님이 이 하나님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가르쳐줄 때 거부감 없이 “아! 그 하나님이 이 하나님이구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한국의 종교성은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경에 나타난 특성입니다. 한국인의 특성과 같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복을 좋아하잖아요? 복을 추구하는 국민 정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 달라고 얼마나 “복(福)”을 많이 써 붙이는지 모릅니다. 봄이 되면 우선 대문간에 큰 “복(福)”자를 하나 써 붙이던가 아니면 등에다 “복(福)”을 써서 매달던가 요즘엔 많이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아주 흔했습니다. 요즘 시집가는 신부들은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신부가 시집갈 때 보세요. 혼수감이 다 “복(福)”이 아니면 안했습니다. 덮고 자는 이불에도 크게 “복(福)”을 씁니다. 또, 세숫대야에도 중앙에 “복(福)”을 써서 세수할 때도 복 받으라고 했습니다. 밥그릇에도 주발 뚜껑 맨 가운데는 “복(福)”자가 쓰여 있습니다. 숟가락에도 “복(福)”자가 쓰여 있습니다. 옷에도 동정 끝에도 “복(福)”이고, 소매 끝에도 “복(福)”이고, 웃거름 끝에도 “복(福)”이고 다 “복(福)”입니다. 심지어는 요강 단지에도 “복(福)”이라고 씁니다. 먹어도 싸도 다 복입니다. 한국의 문화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똑같잖아요? “들어가도 복이요 나가도 복이요 떡 반죽 그릇에도 복이요 광주리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우양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이 복을 받을 것이며 천하 만민보다 네가 더 복을 받을 것이다.” 다 복입니다. 그 복과 이 복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이게 웬 복이냐?” 하고 금방 복을 받아들입니다. 더 신나는 일은 성경에 하나님은 산에서 다 역사하셨습니다. 고산시대의 신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시작이 되었죠? 십계명은 시내산에서 받았죠?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기도했죠? 갈멜산, 겟세마네 동산, 팔복산 다 산입니다. 산이 아닌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는 다 산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도 산신령이라는 것이 있어서 다 고산지대 신 개념으로 신을 만나려면 산으로 가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절대 거부감이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들이 대한민국 선교에 절대 도움을 주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한국 교회가 실제로 다른 나라 교회들보다 잘 한 것은 뭔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 목사들은 개척교회를 열심히 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우리 주변의 세계적인 교회들 역사를 보세요. 다 그 교회 담임 목사가 처음에 개척한 교회입니다. 산비탈에서 어떤 사랑방으로 시작했습니다. 다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개척 교회로 미국 교단에서 일했던 사람입니다. 서구의 목사는 개척교회 못합니다. 우리는 하잖아요? 무엇으로 하느냐? “믿씁니다!”로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 한명도 없는 데 가서 결국 교회를 해내는 사람이 한국 목사입니다. 저도 목사 안수 받고 29살에 개척교회를 하러 갔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5명이라도 있어야 그들을 붙잡고 예배를 보든가 말든가 하지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주일이 돌아오면 목사가 교인이 없다고 주일예배를 묵도로 끝나고 말 수도 없잖아요? 공식적으로 헌금도 하고 설교도 하고 찬송도 부르고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려야지요. 동네 공회당 빌려서 예배드리는데 교인이라고는 제 아내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뭐라고 설교를 해요? 우리 설교자가 제일 힘든 것이 자기 마누라 앉혀놓고 설교하는 게 제일 힘듭니다. 뭐라고 설교를 합니까? 교인 한명 앉혀놓고 설교자 한 사람, 교인 한 사람인데 “회개하라!” 이럴 수도 없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 안쳐다보는 예배만 드렸습니다. 난 날마다 허공만 바라보며 설교했습니다. “예수를 믿으시오.” 듣는 교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땅만 쳐다보고 “짧게나 하슈!” 그런데 해냈잖아요? 그런데도 기어코 교회를 만들어 냈잖아요? 거기 주일학교 출신 가운데 5명이나 목사가 되었다니까요. 이것이 한국교회입니다. 서구의 교회들은 못하잖아요? 그런데 한국 교회들은 다 합니다. 누구든지 다 합니다. 저는 지금도 개척교회만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좋아했고 다 효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후임자가 된 것은 갈보리교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한국 목사들은 심방을 열심히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역입니다. 외국 목사들은 한국 같이 심방 안합니다. 우리는 대심방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집의 사정이 어떻든 “이따가 갈 테니 그런 줄 아세요.” 하면 거기 있어야 합니다. 강제 심방을 하는 겁니다. 집사님이 어쩌다 교회 안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외국 사람들은 ‘아! 그 사람이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러고 관여 안합니다. 생각도 안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는 집사님 한분이 어쩌다 교회 안 나오면 가만 둡니까? 권찰님이 전화해서 “왜 안 나왔어?” 이건 마치 경찰이 도둑놈 잡아내듯이 합니다. 그러면 이 집사님은 벌벌 떨면서 “아, 바빠서 어쩌고저쩌고….” “바쁘다고 교회를 안 나와요?” 막 야단을 칩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구역장이 똑같은 일을 하고 교구장이라는 사람이 똑같이 하고 나중에는 교구 목사님, 담임 목사까지 교회 한번 안 나온 거 가지고 막 혼냅니다. 나오는 게 훨씬 낫습니다. 안 나왔다가는 더 괴롭습니다. 또, 사람이 어쩌다가 다른 교회로 옮겨갈 수도 있지요. 그런데 미국 사람들 같으면 미국 목사는 “OK! Bey bey! God bless you!” 그러면 그만입니다. 한국 교회는 “가기는 어딜 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그냥 그 집에 가서 철야 기도를 하니까 가지도 못합니다. 무식한 것 같아도 관심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안 건드려주면 답답합니다. 어린아이 감기만 들어도 좇아가서 기도해 주어야지요. 이런 곳이 한국 교회입니다. 서구 사람들은 그렇게 안합니다. “한국 교인들에게 배워라. 어렵지도 않은 일인데….” 보세요. 우리 갈보리교인들이 담임목사 심방오라고 할 때 안 간적 있습니까? 100퍼센트 갔습니다. 항상 찾아오도록 문을 열어놓고 항상 만나고 항상 갔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 목사들이 일하는 분량을 보면 제가 미국 교단에서 27년이나 일했는데 미국 목사들의 3배 정도의 일을 해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떻게 합니까? 복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에 인천공항 생기기 전에 김포 공항 최고 책임자가 한국 교회 협의회 회장에게 공문을 보냈습니다. “한국 교인들 제발 김포 공항에 와서 예배드리지 마십시오.” 왜 그러느냐 하면 이민을 좀 많이 갔습니까? 그러니까 집사님이 이민 한번 가시면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5번 불러야 합니다. 왜? 집사님이니까 제직회에서 와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찬양 했지요? 그 다음에 이민 가는 집사님이 여전도회 회장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전도회 회원들끼리 모여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찬양했죠? 어제 만났는데 오늘 또 만나서 다시 만나자고 하지요? 또 남편은 남전도회 회원이입니다. 남전도회 회원들이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찬양했죠? 또 성가대원입니다. 성가대원이 와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찬양하죠? 맨 마지막에 담임 목사까지, 그래서 최소한 5번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서 끝나야 합니다. 김포공항까지 따라갑니다. 그래서 그 많은 교인이 이민 가는데 이쪽에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저쪽에서 더 큰 소리로 통성기도를 하고…. 교회인지 김포공항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서 아무쪼록 성공해서 잘 살라고, 그러나 십일조는 우리 교회로 보내라고 하면서 난리를 치니까 이렇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괜찮습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 한국 교회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계 모든 교회가 하지 않는 영성 훈련이 있다는 겁니다. “영적 능력이다.” 그게 뭐냐? 새벽기도입니다. 미국은 새벽기도를 안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하잖아요? 지금 휴스톤에 제가 처음 가서 그 시절에 한국 사람들이 100리 밖에 한 사람씩 살던 시절인데 다 운전해 다니면서 “제가 휴스톤 중앙교회 새로 개척교회 했습니다. 나오십시오.” 전도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듭니까? 100리 밖에 한 사람씩 한국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 새벽기도를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미국 교회를 빌려서 하니까 그 교회 담임목사 존 크레이그 목사한테 요청을 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새벽기도를 하니까 새벽에 당신들이 하나도 안 쓰니까 이 교회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물었더니 그 교회 담임 목사인 존 크레이그 목사가 나더러 “이 친구가 미국에 와서 영어를 잘 못해서 당신이 지금 오후 5시라고 말했습니까, 새벽 5시라고 말했습니까?” “새벽 5시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새벽 4시에 일어나야 되는데 매일 나와서 설교를 할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다 죽으면 어떡하려고요?” “안 죽습니다. 괜찮습니다.” 나중에 당회 서기인 장로가 사용해도 좋다고 계약서를 가지고 와서 하신 말을 지금도 잊지 않습니다. “새벽 5시에는 하나님도 주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로 깨우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맨 처음에는 두 사람이 나왔습니다. 열심히 해서 6개월이 지났는데 교인이 152명이 되었습니다. “이야!” 그 교회 담임 목사가 깜짝 놀라고 충격 받았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새벽기도해서 그렇습니다.” “이야! 한국 사람이 이 지역에 0.1퍼센트도 안 사는데 우리 교회는 교인이 날마다 주는데…. 한국 교회에 한번 가봐야겠습니다.” “가보세요. 한국 교회는 다 이렇게 합니다.” 한국에서 새벽기도로 많이 모이는 교회를 가 보도록 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호텔에서 한국 교회를 몇 군데 간 겁니다. 수천 명씩 모여서 통성기도를 하는 것을 봤나 봅니다. 돌아와서 첫 주일 설교가 “미국 교회는 죽었다. 한국에 가보라. 하나님께서 관심이나 축복 안하고는 못 견딜 만큼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그 아우성치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밖에 없다. 장래 세계 교회는 대한민국이 주도한다.” 이렇게 설교하면서 통성기도 하는 표현을 “마치 버스가 뒤집힌 것 같이 하더라.” 여러분, 성경에 보세요. 큰 사건 다 새벽입니다. 홍해 새벽에 갈라졌습니다. 여리고성 새벽에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이라.” 야곱이 새벽에 이름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새벽입니다. 마리아가 새벽에 갔다가 예수님을 만났지요? 출애굽기 14장에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기둥 가운데서 애굽의 군대를 어지럽게 하셨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을 무슨 별이라고 했죠? 새벽별이라고 했습니다. 백홍준이라는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새벽기도를 제일 먼저 했다고 교회사에 나옵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조선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 아침마다 일어나서 365일 기도했다고 그렇게 나와 있고, 새벽기도 공동으로 시작한 사람은 1906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 목사와 박치록 장로가 둘이 만나서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도 새벽에 기도했수다래.” “그렇디.” “그러면 우리도 기도해야디요.” 그래서 목사와 장로 둘이서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집사님들이 “목사님과 장로님 둘이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신단다. 우리 잠만 자면 되겠나? 우리도 나가자.” 그래서 장대현 교회 집사님들이 꽉 찼습니다. 그래서 막 새벽기도 하니까 한국교회는 어떤 교회가 뭐 하면 옆의 교회는 샘나서 못 견딥니다. “우리도 하자.” 그래서 1906년에 새벽기도 바람이 대한민국에 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사건이 일어났느냐 하면 1907년 대한민국 교회사에 큰 부흥의 역사가 그때부터 시작했잖아요? 그래서 100주년인 2007년에 다시 그 부흥을 일으키자고 행사를 했습니다. 마귀도 새벽을 이용할 줄 압니다. 여러분, 하와이에 가서 진주만 박물관에 가보세요. 일본의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대장이 “새벽 6시에 우리가 공격 안하면 우리가 진다.” 그래서 함대를 출항시켜서 주일날 새벽 6시에 진주만에 정박해 있는 미국 함대를 다 묵사발을 만들었습니다. 미국 전쟁 역사에 가장 수치스러운 공격을 당한 게 그겁니다. 거기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의 사진과 설명이 다 있습니다. 마귀는 새벽을 이용할 줄 압니다. 여러분, 6·25 전쟁도 공산당들이 주일날 새벽에 일으켰습니다. 사실 성공하는 사람은 새벽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5·16을 낮 12시에 일으켰다면 실패했습니다. 수도 경비 사령부가 있는데 어떻게 넘어옵니까? 새벽 2시에 한강다리 넘었기 때문에 성공한 혁명입니다. 지금 지구가 돌아가는데 지구는 대한민국이 먼저 돌아가잖아요? 한국의 새벽 찬송 소리와 함께 지구가 아침이 밝아옵니다. 새벽은 우리 영혼이 가장 맑지요? 그때 나와서 기도하면 하나님과 교통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난다고 성경에 약속하고 있잖아요? 한국은 이러한 여러 가지 조건이 한국의 성공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온 세계를 다니면서 한국 교회의 소박한 선교 사역을 잘 해나가면 계속해서 하나님이 한국 교회를 축복하시고 21세기는 확실히 대한민국 교회가 세계를 지도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지기를 기도합시다.
목적이 이끌어 가는 공동체
마 28:16-20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자크 엘룰은 “문명시대라고 하는 오늘날에 가장 중대한 사실 중 하나는 모든 것이 수단화되었다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아인슈타인은 20세기 최대 취약점 중 하나는 습관적으로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개탄했습니다. 수단이 목적이 되고 목적이 수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목적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수단으로 변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은 수단인가요, 목적인가요? 돈은 삶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건강이 매우 중요하지만, 수단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을 보면 건강하기 위해서 사는 것 같습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수단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었기 때문에 수능에서 부정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직업을 갖는 것이 인생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어야 함에도 사람들은 직업 자체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갑니다.
무엇을 하든지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내가 공부를 하고 돈을 버는지 모른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목적을 모른다면 나침반 없이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배와 같습니다. 삶의 목적에 따라 방향이 정해지고, 그것이 비전이 되고, 사명이 됩니다. 이것은 삶의 본질이며 분명히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목적은 분명할수록 좋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비전이란 열정을 만들어내는 미래의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사명선언서가 필요합니다. “나는 이것을 위해서 태어났고, 이것을 위해서 먹고, 이것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 연초를 맞아 글로 써보십시오. 이것이 분명한 사람이라면 멋진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유언입니다. 일종의 비전 수여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상에 눈에 보이는 유형적인 것은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건물도, 제단도 남기지 않으셨지만, 유일하게 남기신 것은 제자들에게 던져 주신 비전입니다. 만약 비전을 주지 않고 떠나셨다면 제자들은 평범한 어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지상의 교회는 사명 공동체, 비전공동체, 주님이 주신 사명이 이끌어가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사이즈와 상관없이 비전을 자각하고 그 비전을 품고 있는 교회는 위대합니다. 미국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은 그의 책, 『새들백 교회 이야기』에서 ‘교회는 전통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 인물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 건물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 행사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 구도자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가 있다고 했습니다. 역사가 오래된 교회는 지금까지 해 온 전통에 의해 움직이고, 인물에 따라 움직이거나, 행사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도 있습니다. 릭 워렌 목사님은 성경적인 교회란 목적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 목적은 주님이 주신 대사명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목적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역사 속의 탁월한 삶을 산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목적을 분명히 이해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남기신 마지막 유언 속에 우리가 분명히 붙들어야 할 목적이 있습니다.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것은 성경 말씀 중에서도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지상의 교회들이 받았습니다. 교회는 이 말씀을 받들어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유언을 잊으면, 교회는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됩니다.
교회는 두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이는 공동체와 흩어지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부활의 공동체로 모여서 함께 기뻐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임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납니다. 구별된 백성으로서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모여 예배하고 함께 교제하고 봉사하면서 강력한 결속감을 가지며 세워져 갑니다. 동시에 교회는 흩어지는 공동체입니다. 잘 모이기만 하면 안 되고, 세상 가운데로 잘 흩어지는 교회여야 합니다. 흩어지면 여러분이 있는 곳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임과 흩어짐이 균형을 잘 잡아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복음전도자인 루이스 팔라우 목사님은 오늘날의 교회는 퇴비와 같다고 했습니다. 퇴비는 쌓아 놓기만 하면 악취를 풍기며 썩지만, 밭에 골고루 뿌려 주면 농작물들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모여만 있다면 악취를 풍깁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한가운데로 흩어져야 합니다. 교회가 흩어지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반드시 교회 안에 말썽이 생기게 됩니다. 자꾸 모이기만 한다면 그것은 성장이 아니라 비만입니다. 살찌는 것과 건강하게 되는 것은 다릅니다.
구약이 “오라!”는 메시지였다면 신약은 “가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부름을 받은 백성이며, 동시에 보냄을 받은 백성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약의 교회는 선교적 공동체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잘 모이고 동시에 잘 흩어지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이유는 흩어지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흩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왕국을 세우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늘 세상을 강조하셨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거부하고 멀리해야 할 곳이 아닙니다. 주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팔을 뻗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부르심을 받은 것만 알고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소홀히 여길 때가 많습니다. “가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은 소수의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신약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특정한 은사를 가진 사람만 전도하고, 특수한 사람만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감격해서 전하게 되는 자동적인 반응이지, 은사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조용히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성령이 임하시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입이 열렸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와 기쁨을 보따리에 꽁꽁 싸서 비밀스럽게 믿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팔을 불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가진 사람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심장이 뜁니다. 보내심에 순종하면 우리는 흩어지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온 세계로 흩으셨습니다. 한민족은 흩어지지 않고 단일 민족을 강조하며 외부의 사람들도 못 들어오게 하고 우리도 나가지 않았는데, 이제는 유대인이나 중국인보다 한국이 전 세계로 가장 많이 흩어진 민족이 되었습니다. 한국 민족을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 흩으신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세계 강국에 한국 민족이 골고루 흩어져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에 가장 많이 한국인들이 흩어져 있고, 전 세계에 약 700만 교포들이 나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흩어지면 어디를 가나 교회를 세웁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흩어져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선교적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도 해외 유학으로 엄청난 숫자가 나가 있고,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도 수백만입니다. 다양한 민족과 열방이 오고 가는 이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역사는 선교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교에 헌신하는 민족들을 사용해 오셨고,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힘쓴 나라를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하셨습니다. 한국은 세계 선교에 헌신하는 일에 세계 2위 국가입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그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계 속에서 한국이 경제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것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어려운 때이지만 미국이 건재한 것도 미국이 선교 1등 국가로 쓰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 안에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화가 역사와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과 가정, 민족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어디로 흘려보내느냐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것이 선교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역사에 대한 평가입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주님이 주신 사명과 목적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뒤따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곳을 중심으로 흐르며, 복음 증거의 세계화와 역사의 종말이 맞물려 있습니다. 인류의 마지막 심판의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단들은 거짓 예언으로 혼란하게 하지만,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는 말씀입니다. 모든 열방에 복음이 전파되는 그날이 세상의 끝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비전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갈릴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평범한 시골 출신의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은 과대망상증 환자의 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며 비전 실천가이십니다. 주님의 관심은 모든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가 온 땅 가운데 드러나기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에도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을 확대해야 합니다. 교회도 모든 족속, 열방의 모든 민족에까지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이 일에 쓰임 받기를 원하시며, 우리 모두가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살려두셨고, 왜 가정을 축복하셨으며, 왜 이 교회에 다니게 하셨는가에 대한 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비전, 하늘의 사명에 우리 모두를 부르시기 위한 것입니다.
복음 증거에 대한 순종은 어떤 것에도 양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유언이고 우리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고, 신자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절대 명령입니다. 모이는 숫자보다 얼마나 내보냈느냐가 하나님이 보시는 평가의 잣대입니다. 진정으로 은혜를 받으면 나 중심에서 타인에게로 관심을 쏟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교회도 자기 물질을 나눠주는 이타주의가 되었습니다. 나누고 이웃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지상명령을 잊어버리고, 사람이 늘어가면서도 모이기만 하고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핍박을 통해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힘을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화하고 세상을 향해 최대화하는 일을 할 때 세계 복음화의 비전은 성취될 수 있습니다.
수영로교회는 선교교회로 출발한 선교 지향적 교회입니다. 태생부터 우리 만을 위한 교회이기보다 선교를 위해 세워졌다는 것은 건강한 DNA를 가진 교회라는 뜻입니다.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내가 구원받은 것에 도취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복음을 전하겠다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분명히 이해한 교회로 출발했다는 것은 잘될 수밖에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설립 37년을 맞이하면서 교회의 존재 이유를 반복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크다는 것은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를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는 지상의 사명에 우리가 얼마나 헌신하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건강성이고 교회의 미래와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수십 년 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같은 젊은이들이 수백만 마일의 바다를 건너 가난한 나라 조선에 왔습니다. 그 복음의 열정으로 그 혜택을 우리가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선교하는 교회, 전도하는 교회가 생명력이 있습니다.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내가 살려면 복음 증거를 해야 합니다. 내가 생활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면 건강한 신자입니다. 그러나 한 번도 예수를 전한 적이 없다면 영이 죽어 있습니다. 삶에 감동과 행복이 없으니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일날 1부 예배를 마치고 농어촌 교회로 의료 선교를 나가는 팀들도 있습니다. 한 해에 한 번쯤은 선교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핵심적인 일군들이 선교현장으로 나가 선교에 앞장서야 교회가 생명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전부 교회에 모여만 있다면, 자리나 사역은 한정되어 있어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게 됩니다. 별 일 아닌 것으로 서로 얼굴을 붉히며 소모전을 치르게 됩니다.
역사는 본질에 충실하지 않으면 비본질적인 문제로 시달리게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건강한 교회는 교회 전체가 본질적인 목적에 초점을 맞출 때 가능해집니다. 본질에 충실하지 않으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힘은 분산됩니다. 그러면 이룰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목적을 분명히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교육에서도 부모가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부모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에 방향을 가지고 살면 자녀들은 분명히 따라올 것입니다. 자녀들이 공부를 하고 좋은 직업을 갖되 선교적 삶을 위한 꿈을 갖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목적과 수단이 바뀌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모두가 선교사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훈련된 직장인이라면 출장을 가서 업무도 보지만 현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선교적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비즈니스에서 선교적 마인드를 가진다면 효과적인 선교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단순히 직업인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멋지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주일에 여러 사역을 하고,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고, 열심히 봉사하되 그것 자체로 끝나면 안 됩니다. 어떤 봉사를 하든지 일상의 삶 속에서 선교와 전도에 헌신하지 못하고 봉사로만 끝난다면 그것은 병든 봉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방에서 함께 훈련을 받고, 후원하는 선교사의 사역지를 방문하여 몸으로 봉사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농어촌 봉사를 통해서 전도활동에 참여해 보는 것입니다. 꼭 멀리 나가지 않더라도 선교지를 위해서 정기적인 중보기도와 물질로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일평생 한 국가 혹은 종족을 선택해서 계속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 증거를 위해 헌신할 때 주어지는 축복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복음을 전할 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놀라운 축복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냥 전도하라, 선교하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복음 전하는 자들에게 임재를 약속하시고, 사도행전 1장 8절의 하늘의 권능을 약속하셨습니다.
군대에 가면 먹을 것, 입을 것,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집니다. 우리가 주의 복음을 위해서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 약속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권능을 주시고, 필요하면 물질을 주시는, 하나님의 공급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목적에 내 삶을 실으면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일으키십니다.
2012년을 열면서 여러분의 삶에 어렵고 복잡한 일이 있습니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방법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본질을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 삶을 맞추면,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해결하십니다. 거기에서 내 삶이 풍성해지고, 행복이 일어나고 모든 문제가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인생의 초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후회가 없는 삶, 풍성한 삶을 사는 길은 하늘로부터 받은 사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일치해야 합니다. 이 한해를 살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도 복음 전도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고, 아낌없이 투자와 헌신을 하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새로운 변화
마 28:16-20 / 이영기 목사
오늘은 해마다 맞이하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그러나 개혁의 의미는 이미 퇴색했고, 그냥 하나의 기념하는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교회 개혁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마침, ‘앨런 넬슨’과 ‘진 아펠’이 함께 쓴 <교회를 살리는 교회 개혁>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의 부제가 “정체된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으라!”는 겁니다. 오늘 설교는 이 책에서 부분적으로 좀 인용하려고 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변화되는데, 변화를 추구하는 일은 다른 기관이나 조직보다 교회가 훨씬 어렵답니다. 교회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을 비교해 보면, 교회가 변화에 훨씬 더 느리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교회는 자신을 전통의 수호자로 본다는 겁니다. 영원한 진리는 변할 수 없지만 문화적 전통은 항상 변하기 마련인데, 이 문화적 전통마저 지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교회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정서와 분위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셋째는, 교회는 이익과 손실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없는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같지 않아서 그 효율성을 측정하기 어렵습니다. 넷째는, 변화에 염증을 낸 사람들이 교회를 피난처로 삼는다는 겁니다. 변화는 긴장을 요구합니다. 모험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변화에 염증을 내고 교회를 피난처로 삼는 교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더욱이 교회는 자발적으로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대개 자발적인 변화의 노력을 기울이고자 하지 않는 답니다. 긴장이나 모험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다섯째, 교회에 지도자가 없다는 겁니다. 목회자 역시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려 하거나, 변화를 시도하려고 해도 교인들이 따르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겁니다. 어떻든 이래저래 교회는 변화가 느리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 교회만큼 효율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조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가능한 곳입니다. 둘째로, 교회는 간접비용이 적게 듭니다. 교회의 가장 큰 자산인 사람이 있습니다. 더구나 이 교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섬기며 봉사하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변화를 모색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교회는 응집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변화로 인해 다소 불편이 생겨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넷째로, 교회는 오랜 역사를 가진 조직입니다. 박해 아래 침체되기도 했다가 부흥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믿음으로 삽니다. 다섯째, 교회는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조직입니다. 교회의 효율성은 이익과 손실이라는 눈에 보이는 수치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교회를 움직이는 힘은 물질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그렇기에 소명을 이루기 위해 물질과 시간을 투자합니다. 어떠한 희생도 기꺼이 감수합니다. 여섯째, 교회는 인격적인 감화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른 조직보다 효율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조직입니다.
그런데 왜 변화가 안 되거나 느립니까? 그것은 그 가진 것, 그러니까 이 여섯 가지의 장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보다는 사람의 지혜와 힘이 앞섰습니다. 이젠 교인들도 봉사하거나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응집력도 없습니다. 자존심과 개성이 강해져서 내가 싫은 건 끝까지 싫어합니다. 박해 아래에서, 그러니까 교회가 침체되었을 때도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인들에게는 그것을 이겨낼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박해나 침체가 되었다고 여겨지면 그냥 돌아섭니다. 교회의 영적 가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장의 손익계산에서 손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격적인 감화가 없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변화할 수 있는 자산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해서, 오히려 세상의 방법과 세상의 이해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 부흥의 발목을 잡고 있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예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 경향도 있습니다. 늘 무엇인가 하려고 하면 부딪칩니다. 변화한다고 하는 것은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힘든 겁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지금도 불편하지 않는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지내는데 불편이 없다면 초가집이면 어떻고 나무집이면 어떠냐고 말합니다.
어느 기관이든 조직이든, 현재를 보고 뭔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보다 나은 내일을 바라보고 뭔가 합니다. 그래서 내일을 바라보고 그것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현재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저는 큰 교회가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건강한 교회가 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는 단지 존재하는 것, 있다고 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건강한 교회란 “성장 지향적이고 복음전도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그냥 여기 앉아서 예배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구원의 기관인 교회는 사회 안에 머물러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의 규모가 크든지 작든지, 그 지역 사회에서 구원의 방주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꾸준히 그 일을 위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는 겁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모세 당시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게 하여 사람들을 물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부르짖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게 하시고, 그것을 높이 매달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뱀에 물린 상처가 아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700년이 지난 뒤인 히스기야 왕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구리 뱀을 ‘느후스단’이라고 부르면서 분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이 그것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려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과거의 방법에 지나치게 집착한 겁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에 애착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웨이 우 웨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차를 마시는 것보다 찻잔을 숭배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중요한 것은 차를 마시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차를 마시는 것보다 찻잔을 더 숭배합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도구에 더 집착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에 따라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일에 따라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옛일을 새로운 방식으로 행하실 뿐만 아니라 새 일을 창조해 나가십니다. 여기 ‘새로운 것’이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비슷한 것이나 남아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전에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 기록된 내용들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에는 ‘새’자가 많이 붙습니다. ‘새 노래’, ‘새 일’, ‘새 하늘과 새 땅’, ‘새 언약’, ‘새 영’, ‘새 마음’, ‘새 술과 새 부대’, ‘새 계명’, ‘새 생명’, ‘새로운 피조물’, 하여간 하나님께서는 새롭고 창조적인 일을 하십니다.
변화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적응해 나가든지, 아니면 시대의 낙오자가 되어 결국 문을 닫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교회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유지하는 것을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하자 3천명, 5천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도 초창기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만 외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종교적 분위기는 마치 아테네나 고린도와 비슷합니다. 아테네와 고린도에서의 복음 전도는 서서히 이루어졌습니다. 사도 바울께서 아테네와 고린도에서 설교했더니, 3천명, 5천명이 예수 믿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까? 서로 막힌 의사소통의 담을 헐고,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받은 말씀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사회가 복음을 받아들일 만한 분위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의 욕을 먹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또 한 번의 개혁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 때 만든 구리 뱀을 분향하듯이 옛 것에 매달려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존재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왜 교회가 있어야 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왜 이 교회를 다니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미국 교회의 현황과 관련된 몇 가지를 정리한 ‘조지 바너’ 목사님의 조사에 의하면, 복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10년 동안 교회를 출석하고 있는 교인이 50%에 달한답니다. 평생 한 번도 복음을 전하지 않는 교인이 전체의 65%에 달한답니다.
이런 신앙에 대해 ‘존 오트버그’ 목사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다봅니다. 과연 5년 전보다 더 사랑이 넘치는 기독교인으로 변해 있습니까? 더 기쁘고, 더 친절하고, 더 인내심이 많은 신자로 성숙해 있나요? 삶에 더 큰 평화가 있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나였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으로 살고 있나요?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를 비롯해 어떤 조직이든 효율성을 배가시키려면 가장 기본적인 문제, 말하자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 개혁을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기본적인 물음을 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오아후’에 있는 새 소망 교회의 ‘웨인 코르디에로’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어느 러시아 신부가 낙심에 가득 차서 숲 속을 걷다가 길을 잃고 우연히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무장한 군인이 그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서시오! 당신은 누구며, 이곳에 온 이유가 뭐요?” “뭐라고요?” “당신은 누구며, 이곳에 온 이유가 뭔지 말하시오!” 그러나 신부는 전혀 엉뚱한 질문을 했습니다. “자넨, 월급을 얼마나 받고 있나?” 그 말에 젊은 군인은 경계를 풀며 물었습니다. “아니, 제 월급은 알아서 뭐하시게요?” 신부가 대답했습니다. “자네가 방금 한 그 질문을 하루에 한 번씩 내게 해주면 자네가 받는 월급만큼 주려고 하네.”
“나는 누구며, 내가 여기 온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물음입니다. 그러면서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물음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며 산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을 성취하고자 노력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교회의 사역 동기와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인들과 지도자들이 어떤 가치와 목적을 갖느냐에 따라 사역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역 목적을 분명히 규정해야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전략과 목표를 세울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배와 각종 행사의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배는 단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 역시 그냥 심심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선교회 혹은 CM으로 모입니다. 그렇다면 그 선교회나 CM의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에 맞추어서 활동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 안의 모든 기관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목적과 활동이 성경의 가치와 선교 원리를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 존재의 가장 근본적이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여기에 교회를 세우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예배, 친교, 봉사 등등으로 대답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생명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도, 친교도, 봉사도 결국은 생명 살리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규정해 줍니다. 이 명령은 교회의 존재 이유이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입니다.
교회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성도들 역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기 위하여 살아갑니다.
이 명령은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변화, 교회의 개혁은 이 말씀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오로지 복음이어야 합니다.
전에는 선교 목적으로 교회가 탁아소를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들은 대부분 애기만 맡기려고 하지 자신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미 선진국에서 경험된 것이고, 이제 우리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학교를 세운다고 해서 종교교육을 할 수 있는 거 아닙니다. 종교는 종교고 학교는 학교라는 겁니다. 목원대학교는 기독교 학교입니다. 신학교로 시작해서 대학교가 된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불교 신자도 이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감리교에서 이사를 파송했는데 거부한 적도 있었습니다.
변화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바꾸는 겁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 왜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지만, 알아도 그런데 대해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가 보다 그럽니다.
시골의 어느 교회 벽에 걸린 시계가 고장이 난지 오래랍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시계를 바꾸어 놓을 수 없답니다. 어떤 분이 취임하면서 기념으로 걸어놓은 시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개혁>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샤워하러 들어갔다가 거울의 모퉁이가 금이 간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런, 거울이 깨졌군. 고쳐야겠네.” 그러다가 차일피일 바쁘다 보니 미루게 되고, 그렇게 미루다 보면 귀퉁이의 깨진 것이 아무 불편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집안의 식구들도 아무렇지 않게 거울을 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친구가 집을 방문해서 화장실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깨진 거울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저런, 거울이 깨졌군. 이 집 사람들도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 왜 고치지 않을까? 그래도 내가 말 할 줄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그냥 갑니다.
그러면서 이 책은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이렇게 된다고 말합니다. 낡은 페인트, 진부한 음악, 흐린 조명, 친절하지 않은 안내, 잡초가 무성한 교회마당, 무질서한 교회학교 등등, 이제는 아예 익숙해져서 고치려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의 모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상황을 전혀 불편하게 느끼지 않습니다. 교회 건물의 페인트가 낡아도 누가 어쩌자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화단에 풀이 자라서 연산홍이 다 묻혀도 누가 나서지도 않습니다. 가시풀이 자라서 황매화를 뒤덮어서 황매화가 쓰러져도 그런 줄도 모릅니다. 어린이 놀이터가 많이 망가져서 아이들이 놀다가 다칠 줄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그것이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아마 고치자고 하면 오히려 화를 낼 겁니다. 바꾸자고 하면 불편하지 않은데 왜 그러려고 하느냐고 말할 겁니다. 괜히 돈을 들여서 그럴 거 뭐 있느냐고 할 겁니다.
내 집이 그렇다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집은 내가 좋으면 됩니다. 내가 불편하지 않으면 됩니다. 누가 와서 뭐라고 그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임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마치 교회는 예수 믿는 우리가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인 내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불러와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사람들을 불러와야 합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호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유리가 깨져도 깨진 줄 모릅니다. 깨진 줄 알아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칩니다. 불편한 게 있어도 모릅니다.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 곧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볼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는 것이 변화요 개혁입니다.
우리는 참 좋은 여건을 가졌습니다. 길가의 교회이기에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보기 싫어도 보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조금만 꾸며도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습니다. 이 가을 국화꽃이 한창 피고 있을 때, 마당 여기저기에 국화꽃이 피어있다면 교회가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일부러라도 들렀다 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걸 생각하셔야 합니다.
“교회의 사역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시대에 따라 양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결코 양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생명 걸고라도 싸워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어서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아야 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전도 방법이 다양합니다. 진돗개 전도 방법이 있는가 하면, 고구마 전도 방법도 있습니다. 119전도 방법도 있습니다. 별의별 전도 방법이 다 나왔습니다. 여태까지 이렇게 해왔으니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게 없습니다. 이렇게 해보니 안 되더라고 해서 하지 말라는 것도 없습니다. 시대나 장소에 따라, 지역 사람의 성향에 따라 방법은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변화해야 합니다.
누가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자고 제안할 때, 우리는 대개 그것을 거부하고 과거의 경험에 의존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봤자 효과도 없고, 시간과 돈 등, 힘만 낭비 할 거라고 쉽게 속단합니다. 또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데 대한 부담을 가집니다. 새롭다는 말은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경험에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서도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하신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배에 오르셔도, 늘 똑같은 일이라도, 새로운 방식으로 해보라고 권고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똑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왜?” 하고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왜 저것을 해야 하지?” “왜 저것은 저래야만 하지?” 거듭 거듭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늘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교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교회에 주어진 지상명령
마 28:16-20 / 이동휨목사
1.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Therefore go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and teaching them to obey everything I have commanded you.)는 것입니다. 첫째, “가라”(Go!)는 것이고, 둘째,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셋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그리고 넷째,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Teaching them to obey everything I have commanded you.)는 것입니다. “가라”는 것은 가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 다시 말해 전도, 선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교육, 제자화 교육을 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씀은 성례(聖禮)식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말씀은 장차 세워지게 될 교회에 주어진 3대 명령, 즉 전도(선교), 교육, 그리고 성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같은 교회를 세우실 것을 십자가 고난 전에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마16:16-19)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먼저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택하신 목적이 바로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서임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2:9입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아름다운 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어가는 인생들을 살려 영원히 살도록 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죽어가는 인생들을 살려낼 수 없습니다.
(행4:12)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래서 예수께서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40:9)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사도 바울도 ‘전하는 자가 없으면 어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겠느냐, 보내심을 받지 아니했으면 어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느냐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롬10:14-21)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이처럼 아름다운 믿음의 역사,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만 합니다. 씨뿌리는 자 없이 종자가 땅에 들어갈 수 없고, 땅에 떨어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기에 누군가가 뿌려야 합니다. 옥토도 중요하지만 씨를 뿌리는 자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 씨가 어디에 떨어지든지, 길가에든지 돌밭에든지 가시떨기에든지 좋은 땅에든지 뿌려야만 합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만 합니다(막16:15). 성도 여러분의 향기롭고 아름다운 삶이 되도록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이 아름다운 복음을 전하는 데는 때로 고난이 따르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건강하고 항상 만사형통하기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소식’,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때로 고난과 환난, 병고와 실패 등이 선교적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한 자신의 아픔과 실패를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깨닫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이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5:11-12입니다.
(마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 하였느니라.
나의 고난과 환난, 그리고 병고와 실패 등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가 감추어 있습니다. 이를 깨닫고 고난과 환난 중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가장 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 모습 그대로 복음을 전하는 삶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복음이 되시는 예수를 증거 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아름다운 복음을 전하라>는 것은 지상명령(至上命令)입니다. 그래서 전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죄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성도 여러분에게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십니다.(마28:18-20) 그러므로 전도하지 않는 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역하는 불순종의 죄악입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의 영혼을 지옥에 가도록 내버려둔 직무 유기의 죄악입니다. 전도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살인 방조죄에 해당하는 죄악입니다. 세계적인 부흥사 토레이 박사가 영국 브라이톤이라고 하는 도시에서 대 전도 집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도 집회를 돕는 위원들 가운데 한 명이 저녁 예배 시간이 조금 남아서 음식점으로 들어갔습니다. 손님들이 많이 있을 때인데, 종업원이 와서 주문을 받고 돌아서서 갔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저 종업원에게 전도하라. 전도하라.”라고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주여, 이렇게 음식점에 사람이 많은데 전도를 합니까? 저렇게 바쁘게 일하는 아이에게 어떻게 전도를 합니까? 못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다급하게 몰아치시는 것입니다. “전도하라.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전도하라.” 이 사람이 “이 다음에 제가 전도하겠습니다.”라며 미루었습니다. 전도하라고 하는 성령을 무시하고, 그 지시를 외면하고, 밥을 먹고 돈을 치르고 나오는데 성령이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강권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주여! 이렇게 사람이 많고, 바쁘게 일하는 아이에게 어떻게 전도합니까?”라고 하면서 문을 닫고 나가 버렸습니다. 몇 발자국 가는데, 큰 화를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가다 말고 다시 왔습니다. 다시 오기는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 서서 있었습니다. 얼마쯤 되어서 문 닫을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주인이 나와서 가게 문을 닫는 것입니다. 문을 닫던 주인이 “아까 우리 집에서 음식을 드시고 나갔는데 왜 여기 서 있습니까?” 이 사람이 “다른 일이 아니고, 주인집에서 일하는 아이에게 꼭 한마디 할 말이 있어서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아이고! 선생님이 음식을 잡숫고 나가자마자 그 아이가 자기 2층 방에 올라가서 약을 먹고 자살을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 이 사람이 천 길 만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입니다. “내가 죽였구나! 그래서, 성령이 전도하라고 그토록 강권하셨는데, 그것도 모르고 성령을 뿌리치고 내가 아이를 죽였구나! 예수 믿으라고 한 마디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성령이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이 음식점으로 전도하라고 밀어 넣었는데 내가 못했구나!” 이렇게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우리도 바로 그런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예수 믿으십시오.”라고 한마디만 던져주었으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을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 텐데 그 한마디를 못하고 지내오지 않았습니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지나면서도 한 번도 전도하지 못하고 지나치지 않았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전도하지 않아서 예수 믿지 못하고 죽었다면 그 피 값은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지 않는 것은 살인죄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젊은 청춘을 전도 한 번 하지 않고 흘려보냈다면, 이제라도 회개하고 더 이상 늙기 전에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을 세상 즐기는데 다 써버렸다면, 이제라도 회개하고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많은 물질을 전도하는데 한 번도 쓰지 않으셨다면, 지금이라도 전도하는 일에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딤후4:2)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이 말씀은 힘들 때나 좋을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가리지 말고 항상 힘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하면 다음 달에 하고, 다음 달에 못하면 내년에 하지. 지가 어디 가나?’ 이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은 전도를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형편이 나아지면 하지, 지금보다 건강해지면 전도하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죽을 때까지 전도 못합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오늘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어느 청년이 부흥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막 시작했습니다. 이 청년이 하루는 서울에 있는 남산 공원에 갔는데, 벤치에 시골 영감 한 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영감님을 보는 순간에 갑자기 성령의 감동이 왔습니다. “빨리 저 사람에게 전도하라.” 그때 이 청년이 “주님,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전도합니까? 또 전도한다 해도 교회가 인천인데 어떻게 모시고 갑니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자꾸 다그치는 것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전도하라. 전도하라.” 그렇다고 성령의 감동을 무시했다가는 좋지 못한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노인을 붙들고 전도하는 것도 좀 쑥스럽고 해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성령께서 막 “빨리 전도하라. 빨리 전도하라”라고 몰아 세우더랍니다. 정말 순종을 안 했다가는 저 사람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멸망을 당할 것 같아서 순종했습니다. 할 수 없이 다가가서 “할아버지, 한 5분 내지 10분 정도 급히 말씀드릴 게 있는데, 들으시겠습니까?”했더니, 할아버지가 “젊은이, 뭐가 그리 급한 이야기요?”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청년이 “할아버지, 예수 믿습니까?”라고 여쭈었더니, 할아버지가 “나 그런 거 몰라.”라고 대답했습니다. “교회에 나가신 적 있습니까?” “교회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할아버지, 어떻게 이 연세가 되도록 하나님을 모르고 사셨습니까? 하나님이 할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얼마나 축복하시는데,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고 사시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거야 예수 믿는 사람들 이야기지.” 이렇게 한참 전도하다가 할아버지의 얼굴을 힐끗 보니까 할아버지의 눈동자에 눈물이 핑 돌더랍니다. “아, 먹혀 들어가나 보다.”라고 생각하고는 정신없이 전도하다 보니까 20분이 지났습니다. 이 청년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꼭 예수 믿으세요.”라고 했더니, 할아버지가 “응, 젊은이, 나 예수 믿겠네.”라고 대답을 하시더랍니다. “할아버지, 고마워요”라고 인사드리고 가려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손을 붙잡더랍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젊은이, 바쁘지 않으면 내 이야기 좀 듣고 가.”라고 말씀하시더랍니다. 듣고 보니 기막힌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경상도 상주에서 올라왔는데 아들은 월남 전선에 가서 전사하고, 마누라 하나 의지하고 사는데 마누라마저 죽었다는 것입니다. 먹고 살 만큼 재산도 있고, 농사도 지었습니다. 어느 날, 농삿일을 하러 가다가 가만히 생각을 하니 허망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자식도 없고 마누라도 없는데, 나 혼자 살려고 뼈골 빠지게 일할 것이 무엇이냐?” 그래서, 다 때려 치우고, 집에 돌아와서 “에이! 바람이나 쐬자.”며 돈을 챙겨 들고 서울로 올라온 것입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며칠을 돌아다니다가 결정을 내렸습니다. “자식도 없고 마누라도 없는 세상에 내가 살아서 무엇하나?” 죽기로 결정한 다음에, 몇 군데 약방에 가서 약을 사서 담은 봉투를 주머니에 넣고, 죽을 자리를 찾다가 남산공원으로 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남산공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눈에 띈 빈 벤치에 털씩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죽은 아들과 마누라를 생각하면서 “아! 이제는 끝장이다.”라고 하면서 막 약을 먹으려고 하는데, “할아버지! 한 5분 내지 10분만 급히 말씀드릴 게 있는데, 들으시겠습니까?”라고 하는 젊은이의 소리가 들렸던 것입니다. 그때 이 청년의 마음이 뜨끔해졌습니다. 재가 몇 초만 더 지체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야기를 마치신 할아버지가 주머니에서 부스럭부스럭 소리와 함께 약봉지를 꺼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가 아니었으면 내가 약을 먹었어. 조금만 늦게 왔어도 내가 이 약을 먹었어. 우리 고향에 교회가 있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인 줄 알았지. 듣고 보니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교회가 있구먼. 나 재산도 좀 있는데, 고향에 내려가서 재산도 정리 좀 하고, 교회에 나가서 청년이 가르쳐 준 예수를 믿겠네.” 다른 것은 다 내일로 미루어도 전도는 미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언제 죽을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이 죽지 않고 내 전도를 기다립니까? 그 사람이 죽으면 끝입니다. 그 사람은 살아 있어도 그 사람에게 전도해야 될 내가 죽으면 역시 끝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오늘 이 시간밖에 없는 것입니다. 단 일초도 미룰 수 없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는 내일로 미루었다가 평생 후회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어린 자녀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어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면 저녁 늦게까지 기다렸다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내일 날이 밝으면 찾아 나서겠습니까? 성도 여러분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서1:3-6을 보겠습니다.
(엡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복음 전도를 위해 세상에 보냄받으신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마음에 담고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해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가장 아름답고 영원히 복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교회에 주어진 두 번째 지상명령은 ‘제자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 다시 말해 하나님 말씀을 교육하고 제자화 교육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어도 자기 혼자만 믿고 가족이나 친척, 친구, 이웃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 한 번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으면 답답하고 견딜 수 없어 속이 불붙는 것 같은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축구나 야구 등 경기에서도 시합 내내 주전으로 뛰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경기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뛰어보지도 못하고 벤치에 앉아 구경만하다가 경기장을 나오는 선수도 있습니다. 경기에서 주전으로 뛰는 선수가 바로 예수의 제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실 때, 수많은 무리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간 예수께서 베푸신 수많은 기적과 능력, 그리고 권세있는 교훈에 이끌려 예수를 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조만간 예수가 자기 민족의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등극할 것으로 잔뜩 기대를 걸고 예수를 따랐던 것입니다.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의 이러한 기대를 모르실리 없으신 예수께서 길을 멈추고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4:26-27)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하면, 먼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만 합니다.” 이는 관계의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모, 처자, 형제자매라는 혈육의 인간관계보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더 우선시해야 하고 소중히 여겨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혈육과 더불어 자신까지도 미워하라는 말씀에서 “미워한다.”는 말의 헬라어 ‘미세이’(misei)는 ‘조금 사랑한다.’,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혈육을 사랑하되 하나님보다 덜 사랑해야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정, 사정, 애정, 동정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흘히 하거나 뒷전으로 밀려서는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혈육의 인간관계보다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가장 소중히, 아니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겨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대로 100세의 할아버지 아브람과 90세의 할머니 사래를 통해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은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금지옥엽(金枝玉葉)같은 최고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최고로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아마 속으로 ‘이렇게 힘들게 얻게 하시고서 그 아들을 달란 말인가? 기껏 키워놓았더니 번제물로 바치라고 주셨단 말인가?’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사랑하는 아들을 기꺼이, 지체 없이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고자 칼을 들이댈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칼을 붙들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너를 하나님 경외하는 자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피붙이 이삭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일 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엄청난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일 우선순위로 놓는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같이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나라에서 부모나 친척이나 이웃이나 자식의 요구 그리고 나 자신의 욕심보다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며 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각종 계중, 종친회, 친목회, 동기동창회, 등 혈연, 학연, 지연 등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를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사회입니다. 그래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들과의 관계가 깨질까봐 우선순위를 뒤바꿔 행동할 때가 참으로 많은 것이 신자들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선순위가 되지 않고서는 결단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참된 예수의 제자이고 싶으시면 이렇게 관계의 가치관이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는 인간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토록 소중함을 깨우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0:34-37)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여기 검(칼,劍)은 분명 폭력의 도구입니다. 때로는 예수 믿는 것이 물질이나 인간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고통과 아픔을 주는 검이 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하는 고통과 아픔을 각오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믿는데는 애정의 단절이라는 대가도 치룰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삶에 있어 가족간의 애정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보다도 가정을 창조하신 분이며 가정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결코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한 거룩한 사랑으로 이룩한 부부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관계가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워 보여도 결국 예수 믿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관계, 가족 관계가 깨어진다 하더라도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가, 가족 관계가 인간의 생명을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또한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가족관계, 남편과 아내, 부모 자식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이지 천국에서는 가족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의 관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관계보다 우선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는 영원한 것이고 인간관계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때문에 영원을 위해서는 일시적인 것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가 되는데 드는 엄청난 대가와 비용을 헤아려 보라며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28-32절) 어느 농부가 농사기구와 곡식을 보관하고 도둑으로부터 자기 재산을 지킬 수 있는 망대가 필요했습니다. 이 농부는 망대를 세움으로 얻어지는 여러 가지 유익함만을 생각하고 망대 건축에 드는 재료와 비용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공사를 시작해서 기초 공사를 마치었습니다. 그런데 망대의 골조가 올라가기도 전에 공사비가 다 떨어져서 공사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짓다만 망대는 보기 흉할 뿐만 아니라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돈만 날리고 동네에서도 신망을 잃고 말았습니다. 비웃음거리만 되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철저하게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다가 도중에 그만두게 되면 짓다만 망대처럼 보기 흉할 뿐만 아니라 비웃음거리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문제가 참으로 중대한 것이어서 또 다른 비슷한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군사 1만을 거느린 어떤 임금이 2만 군사를 거느린 이웃 나라와 전쟁이 하게 되었습니다. 현명한 임금이라면 과연 1만의 군사로 2만의 군사와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를 먼저 심사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승산이 없다는 판단이 서게 되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신속히 사신을 보내 평화협상을 벌이든지 아니면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항복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마16:13-28)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며 예수께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때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같은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예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으로 복을 주셨습니다. 이때로부터, 다시 말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예수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들은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임 당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주여, 십자가에 죽으시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며 단호하게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방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베드로를 돌아보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며 호되게 책망하시고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겟세마네의 동산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마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리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생각이고 하나는 예수님 자신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쓴 잔을 옮겨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생각을 부인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을 따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입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기도를 드리실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고 했습니다.(눅22:44) 그만큼 십자가를 지기 위해선 피나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기도 없이 자신을 부인하거나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 십자가를 가로 막아서게 된 것은 기도하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 즉 예수를 등에 업고 출세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자신의 생각에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기도한 후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정하셨지만, 베드로는 그러한 기도도 없이 자신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에 사탄으로 몰리게 된 것입니다. 내 생각과 의지, 내 꿈과 소망을 던져버리고 오직 주님의 생각과 뜻,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자신의 삶의 양식으로 삼는 생활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는 예수의 제자가 되시겠습니까? 베드로처럼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출세와 성공, 부귀영화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일만을 추구하는 사탄의 종이 되겠습니까?
3.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8:34)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을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 “무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제자들”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참된 예수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무리와 제자”의 구분은 바로 이 십자가를 지느냐 안 지느냐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십자가를 지지 않은 “무리”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시겠습니까? 이왕에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제자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10:38에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합당치 아니하다”는 말은 예수님의 마음에 안 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무리입니까? 제자입니까? 교회에는 네 종류의 직분자가 있다고 합니다. 장로, 권사, 집사, 교사, 성가대 등 직분은 없지만 십자가를 지는 사람, 이런 성도를 <제자>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서 직분만 가진 사람, 이런 사람을 <무늬만 직분자>라고 합니다. 직분자도 아니고 제자도 아닌 사람이 있는데 이런 분은 <새 신자>입니다. 직분자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 이러한 성도를 가리켜 <좋은 일꾼>이라고 부릅니다. 교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사람은 제자가 아닌데 직분을 가진 사람이란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직분자라면 더더욱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남의 십자가까지 지면 얼마나 아름답고 좋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주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여러분의 생각과 다를 때 과감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매 순간순간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매 순간순간 자기의 일을 생각하기도 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굴복시키며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는 생활을 해야 날로 믿음과 은혜, 능력이 충만하여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벗어 던져버리고 안일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을 때 참된 제자의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 마카리우스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속에서 예수님이 더없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마카리우스는 예수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실 따름이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또다시 예수님께로 달려가 간청했습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예수님은 그를 모른 체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무척 힘들게 걸쳐 매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끈기 있게 예수님 곁에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달라고 다시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이윽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양어깨에 둘러맨 채 발걸음을 멈추더니 마카리우스에게로 몸을 돌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카리우스가 예수님을 처음 목격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를 져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져 나르려무나.” 사랑 받는 자 마카리우스는 뒤로 돌아 예수님이 가리키신 지점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그는 얼른 자기 십자가를 걸머지고 예수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와 보니 놀랍게도 예수님의 어깨에 걸려 있던 십자가가 온 데 간 데 없었습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겁니까?” 마카리우스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하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다름없단다.” 자기 십자가가 아무리 힘들고 무거울지라도 그 십자가를 사랑으로 지고 예수를 좇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표상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으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는 삶으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날마다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전도하여 제자 삼으라
마 28:16-20 / 윤석전목사
인류 향한 복음 전파를 그리스도인에게 맡기셨으니
주가 흘리신 피 공로가 헛되지 않도록 전도에 힘써야
마태복음 28장 16~20절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 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가 영원히 풍성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한 인간에게 모든 축복을 제한 없이 부여하셨으나(창1:27~28)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말미암아 그 죗값으로 영원히 멸망하게 되었습니다(창3:17~19).
본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자기 생애를 목적대로 보내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어서 인류의 죄를 해결했다는 사실을 모든 족속에게 전하라는 마지막 부탁을 제 자들에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더불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도 주시면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죄 와 마귀와 사단과 지옥에서 끄집어내어 주의 제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로 죄 사함받은 은혜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존재로 지었기 때문에 육신은 세월 속에서 사라져 가지만 영혼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육신은 편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랍니다. 그런데 내 속에 있는 영혼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가는 날에 어디로 갈 것이냐’고 끊임없이 묻습니다. 육신의 귀가 어두우면 영혼이 아무리 애달프게 물어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제 영혼의 소리를 못 듣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영혼이 애타고 갈망하는 요청, 그 목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멸망을 방관하지 아니하시고 인간의 멸망, 즉 사망과 지옥이라고 하는 죗값을 갚으시고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형벌이라고 하는 당치도 않은 죽음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린 피 공로로 인간을 죄에서 완전히 해방하셨으며, 그 증거로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1~2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죄 사함 받은 은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으면 어떡해?”라는 말 자체가 죽음 이후에 대책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죗값으로 지옥 갈 우리를 위해서 지옥을 안 갈 대책으로 아들을 세우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어떤 죄를 짓든지 죗값은 사망 곧 지옥입니다. 지옥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고 우리 인간을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박사 논문도, 노벨상을 받았다고 해 도 그 지식으로 죄 사함받을 수 없고, 영생할 수도 없고, 천국 갈 수도 없고, 지옥 신세를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주신 구원의 복음, 이 것이 지상에서 가장 큰 지식인 줄 알아야 합니다.
전도를 명령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는 죄의 자식, 진노의 자식, 지옥의 자식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속죄하시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옥 자식이 천국 자식이 되었고, 멸망 의 자식이 영생의 자식이 되었고, 진노의 자식이 축복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마귀와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기를 무서워하고 종노릇하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를 받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바꿔 놓았고, 죄와 저주로 말미암아 지옥이라는 절망적인 고통을 영원히 당할 자를 영원히 행복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 시민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든 구세주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에게 영육 간에 이와 같은 축복을 주시려고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성육신 하신 근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어떤 절망적인 신분인지 전혀 모른 채 마귀와 죄의 노예로 살다가 육체가 끝나면 그 영혼이 곧바로 지옥에 가서 영원히 세세토록 고통을 당합니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 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계 19:13~15).
주님은 이같이 고통당할 자가 한 명도 없기를 간절히 바라시고 전도를 명령하셨습니다(마28:16~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전도는 주님의 절대적인 사랑이요,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서 제자 삼으라”하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행하시며 전도하신 것처럼 하여 한 사람이라도 죄로 멸망하지 않게 하여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하신 사명(使命)입니다.
인류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기를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어떤 절망적인 신분인지를 전혀 모른 채 돈의 노예, 지식의 노예, 명예의 노예, 권력의 노예, 육신의 정욕의 노예, 안일의 노예, 평안의 노예, 향락의 노예, 쾌락의 노예, 물질문명의 노예, 육신의 요구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아무리 충족해도 충족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목숨이 끝나면 어떤 것으로도 그 영혼을 책임져 주지 못합니다. 이렇게 대책 없는 것들의 노예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은 단 한 사람도 죄 때문에 지옥 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하셨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죄와 사망을 해결하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몰라 멸망하여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제자 삼으라고 하신 명령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알지 못해서 육체가 죽을 때 영 혼이 지옥 가는 자가 없게 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기까지 고통을 지불하신 그 사랑의 절규요, 다급한 명령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 자신이 주님의 제자인 동시에, 구령의 열정이 불타는 십자가 고통의 분량만큼이나 애절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할 다음 제자를 계속 삼으라는 것입니다.
제자가 없으면 전해 주는 자가 없고, 전해 주는 자가 없으면 듣는 자가 없고, 듣는 자가 없으면 아는 자가 없고, 아는 자가 없으면 어찌 믿을 수 있을까요(롬 10:14). 믿는 자가 없으면 구원받는 자가 없고, 구원받는 자가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속죄의 은혜가 무슨 소용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마가 다락방에 최초로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제자를 사용하여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영육 간에 당하는 저주와 멸망을 십자가에서 해결하시고 인류 구원의 복음 전도를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구원의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하여 멸망하여 지옥 가는 영혼들 때문에 아파하십니다. 또 예수 믿는다 하면서 전도하지 않는 자, 제자 삼지 않는 자 때문에 애타시고 아파하십니다.
주님의 소원은 인류 한 사람도 지옥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예수가 죽을 만큼 죄인인 것을 전해 줘서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죗값으로 꼭 지옥 간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지옥에서 살려 내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죗값을 짊어지고 대신 죽어서 갚았으니 믿고 회개하여 지옥 신세를 면하고 천국 가자고 말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애절한 부탁입니다.
서둘러 전도하여 제자 삼아 주님이 흘리신 피 공로가 헛되지 않게 하십시오. 주님의 마음을 십자가 고통만큼이나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로 지옥 가는 영혼을 방관하지 마십시오. 당신도 주님과 같이 구령의 열정을 지니고 지옥 가는 영혼 구원하지 못해 서 아파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 때문에 제자 삼고, 전도하지 못하는 아픔 때문에 제자 삼고, 전도하지 못하는 것을 못 견뎌서 시행하는 당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끝날까지
마 28:16-20 / 김정호목사
시간의 두 얼굴이라는 글입니다.
“가장 현명한시간은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시간이고 가장 명예로운 시간은 남을 위해 봉사하는 시간이다. 가장 미련한 시간은 사소한 일도 처리하지 못하는 시간이고 가장 떳떳한 시간은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는 시간이다. 가장 분한 시간은 모욕을 당하는 시간이며 가장 비굴한 시간은 변명을 늘어놓는 시간이다. 가장 겸손한 시간은 분수에 맞게 행동하는 시간이고 가장 낭비하는 시간은 방황하는 시간이다. 가장 자유로운 시간은 규칙적인 시간이며 가장 억압받는 시간은 죄를 짓고 쫓기는 시간이다. 가장 파렴치한 시간은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시간이고 가장 쓸모없는 시간은 무사안일한 시간이다. 가장 불쌍한 시간은 구걸하는 시간이고 가장 많은 시간은 사소한 시간을 활용하여 얻은 시간이다.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은 최선을 다한 시간이고 가장 소중한 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시간을 영원으로 바꾸는 가장 지혜롭고 가치 있는 시간입니다.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셔서 상식과 경험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찬양합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만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예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찬양하는 축제적인 부활주일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부활하신 예수님
본문 16-17절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부인하고 은폐하기 위하여 기절설, 도난설을 주장하기로 한 군병들에게 돈을 주면서 입을 막고 총독에게도 거짓말을 하고 문제가 생기면 다 해결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시간으로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그날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아리마대의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장사 지내었습니다. 당시 근동 지역에서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사망 당일이나 사망 후 24시간 이내에 속히 매장하였는데 이는 위생 문제에도 기인하였겠지만 시체에 접촉되면 부정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는 바로 유월절이 시작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더욱 급히 장사를 서둘러야 했습니다. 이렇게 장사되신 후 다음날 곧 토요일은 유월절이자 안식일이었습니다. 본문의 부활 기사는 안식 후 첫날 곧 오늘날의 주일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간을 대략 오전 6시경으로 보면 주님이 운명하시고 부활하시기 까지는 50시간 정도입니다. 일수로는 금요일에서 주일까지 사흘이 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일입니다. 믿음이 결여한 자는 종교적이고 정치적 기득권을 수호하기에 연연했던 당시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나 돈에 눈이 먼 로마 군병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를 부인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바로 천지만물을 주관하시고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오히려 너무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우리말에 “덕분에” 라는 말과 “ 때문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말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주고 있습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태도를 반복적으로 선택하여 ‘경영의 신’으로 불린 일본의 전설적인 기업인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숱한 역경을 극복하고 94세까지 살면서 수많은 성공 신화를 이룩한 사랍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승리 비결을 한마디로 ‘덕분에’라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릴 때부터 갖가지 힘든 일을 하며 세상살이에 필요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저는 허약한 아이였던 ‘덕분에’ 운동을 시작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던 ‘덕분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제 선생이어서 모르면 묻고 배우면서 익혔습니다. 남들 같으면 ‘때문에’ 요렇게 힘들고 요모양이 되었다고 한탄하고 주저앉을 상황을 ‘덕분에’로 둔갑시켜 성공비결로 삼았으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고 그 앞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덕분에’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늘 부정적으로 한탄하며 탄식하는 ‘때문에’로 살고 있습니까? 오늘도 하나님 덕분에, 부모님 덕분에, 친구 덕분에,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 덕분에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멋진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여러분 덕분에 항상 감사하며 살아오고 있다고 고백해 보십시오. 오늘 하루도 사랑하는 많은 분들 덕분에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나를 구원하려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굳게 믿고 예수님의 부활 ‘덕분에’ 구원과 영생과 축복을 누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의심하는 사람들
본문 17절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한 듣기만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보고도 의심하는 자들은 대단히 특이한 자들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이성과 상식과 경험을 뛰어넘는 인류 최대의 엄청난 사건이었기에 믿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나 부활의 사실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함이 타당한가 하는 의문일 수도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이 의심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불신앙과 공포에서 신앙과 기쁨으로의 변화를 주저하는 제자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부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여 절망에 빠진 자들이 의심에서 확신의 상태로 옮겨져 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는 오순절의 성령충만이 필수였습니다. 성령 충만이 없는 곳은 의심 충만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이 임하게 되면 어둠과 의심과 불평과 우울한 영은 순간적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의심은 믿음과 사랑과 충성과 행복과 모든 좋은 것을 빼앗아 갑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Brian Tracy)「백만불짜리 습관 」이라는 책에서 “당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성취하는 모든 것의 95%는 습관의 결과다”라고 말합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고 실패하는 사람은 “실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 작품 「파우스트」중에 “탈피하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뱀은 주기적으로 자신의 껍질을 벗으며 성장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음식을 먹거나 날카로운 곳에 피부를 상하여 병이 들게 되면 자신의 껍질을 벗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의 껍질에 갇혀 죽게 됩니다. 그래서 “탈피하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역시 탈피를 하지 못하면 자신의 그릇된 습관과 고정관념과 그릇된 사고방식 혹은 자신을 타락시키고 파괴시키는 구습(舊習)에 젖어 있게 됩니다. 그런 그릇된 습관이나 관행에서 떨치고 일어나 새로워져야 합니다. 마치 뱀이 자신의 껍질을 벗듯이 사람도 구습이나 그릇된 습관과 왜곡된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 마음에는 의심이 있습니다.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었다가는 모든 것을 잃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도 이웃도 스승도 없습니다. 의심이 일반화 되었습니다. 사람의 말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도 믿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의심하는 불신의 성도가 되지 말아야합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십자가와 함께 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경배하는 믿음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사명의 사람들
본문 19-20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예수님의 ‘지상 대명령’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에 앞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행1:8) 말씀을 흔히 지상대명(至上大命, the Great Commission)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명령을 4대 명령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가라입니다(Go). 성도가 사회 생활을 함에 있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라는 명령입니다. 다시 세상속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처한 가정, 학교, 직장, 선교지 등은 모두 천국 대사의 부임지가 됩니다. 결코 머뭇거리거나 소극적이고 도피적인 생활을 버리고 과감하게 세상 속으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제자를 삼으라(make disciples). 예수님의 지상 명령 중 가장 궁극적인 내용으로서 복음을 전하여 죽어가는 영을 살리라는 명령입니다. 전도의 대상은 모든 인종, 민족,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각자 처한 생활의 일터에서 말과 행동과 인격과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해서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삶이 전도지가 되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셋째, 세례를 주라(Baptize). 외형적인 면에서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교회에 소속이 되어 세례와 임직을 받아야 합니다. 외형적인 교회 제도를 무시하는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는 성경적이 아닙니다. 교회의 모든 신앙적 의식과 행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이름으로 이루어져야합니다.
넷째, 가르치라(teach). 가르치는 것도 내면적인 신앙 목표입니다. 복음을 듣고 교회의 일원이 된 초신자는 구원받은 데서 그치지 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숙해야합니다. 평생 교육에 힘써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지상 4대 대명령에 아멘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국민화가’로 불리워졌던 ‘모세스 할머니’(Grandma Moses 1860~1961)는 놀랍게도 76세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1세 되던 해 세상과 이별하기 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모세스는 평범한 시골 주부였습니다. 그녀는 작은 농장을 꾸려가며 10명의 자녀를 출산하고 그 중 5명을 잃고 난 후 자수(刺繡)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72세 때 관절염 때문에 바늘을 들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대신 붓을 들었던 것이죠. 우연히 수집가 루이스 칼더가 시골 구멍가게 윈도에 있는 그의 그림을 사 갔고 이듬해 미술 기획가 오토 칼리어가 그의 그림을 뉴욕의 전시관에 내놓으면서 할머니는 일약 스타가 됩니다. 유럽과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모세스의 그림 전시회가 열립니다. 1949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그녀에게 ‘여성 프레스클럽 상’을 선사했고 1960년 넬슨 록펠러 뉴욕주지사는 그녀의 100번째 생일을 ‘모세스 할머니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모세스는 시골의 풍경을 그렸으며 그의 화풍은 단순하면서도 밝습니다. 아마 그의 밝은 심성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요? 76세에 그림을 시작하여 국민화가까지 된 Grandma Moses를 보면서 꿈과 희망과 도전을 생각합니다.
누구도 늙었거나 늦은 사람은 없습니다. 희망과 소망과 사명이 없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직도 젊고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이 있기에 살아있고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는 성도는 눈과 얼굴과 표정과 걸음걸이와 언어와 가치가 다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사명을 회복하고 충만하고 충성해야합니다. 사명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드립시다(행20:24). 분명 교회가 달라지고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의 간절한 부탁이며 대명령인 전도와 세례와 교육에 최선을 다합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끝 날까지 함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역사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이제 우리는 의심하는 불신앙의 사람이 아니라 사명을 위해서 충성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주님의 지상명령
마 28:16-20 / 이상웅목사
얼마 전 은퇴하신 한 장로님께서 본인이 만드신 작은 책을 한 권 보내주셨습니다. 그동안 한자동호회 카페에 ‘성서에 나온 한자 용어’를 10개씩 100번 연재한 것을 묶어서 ‘성서한자용어집’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성경의 한자 용어를 찾아 가나다 순으로 정리하고 성경에서 어느 구절에서 나오는지 출전을 밝히고, NIV 영어성경의 단어를 넣어서 ‘성서한자용어사전’을 만드시겠다고 했습니다. 영문과 교수를 은퇴하신 79세의 장로님이신데, 3년에 마치시겠다고 했습니다. 이 사전이 나오면 성경을 읽을 때 옆에 두고 보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말의 많은 단어가 한자에서 왔는데, 성경에는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많이 나오기에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특히 청년들과 성경공부를 하다보면 한자로 된 단어를 잘 몰라 일어나는 해프닝도 꽤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다’는 구절을 읽으면 아이들은 하나님은 말타고 다니지 않고 사자타고 다니셨구나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주님의 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도 地上命令이 아니라 至上命令입니다. 지극히 큰 명령, 영어로는 The Great Commission, 대위임령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많이 접하셨을 것입니다. 아마 선교사님이나 선교를 주제로 하는 설교때 주로 접하셨을 것입니다. 제가 마태복음 성경공부때 이미 몇 번 물어서 아시겠지만 이 명령에는 명령과 같은 동사가 4개 등장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명령형주동사는 하나고, 나머지는 분사형입니다. 물론 분사도 명령적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동사일까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가 주명령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라, 침례를 베풀라,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주님의 지상명령에 한걸음 더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모든 권세를 부여 받으신 분의 명령
먼저 이 명령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누가 주신 명령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언제 주신 명령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마지막 결론 구절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훈련시키셨는지,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기록한 책입니다. 일종의 제자훈련교본 같은 책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3년이란 시간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며 그들을 훈련하는데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제자 삼았던 것처럼 너도 이제 다른 사람, 모든 민족의 사람을 제자 삼아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어디서 주셨습니까? 16절에 보시면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 중간에 갈릴리에서 만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 가서 그 산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 명령을 갈릴리의 산에서 주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유대인에게 산은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는 곳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율법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명령을 받은 곳이 산입니다. 물론 예루살렘도 산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시온산이라 부르기도 했고,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감람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릴리의 그 산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3년간 동거동락하며 훈련을 시키셨고, 무리들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그 기억이 생생한 그 산으로 가신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라 왔다며, 제자로서 어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셨던 산상수훈의 그 장소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했던 기억이 생생한 곳으로 와서 내가 이곳에서 너희를 제자삼았던 것처럼 너희도 이제 모든 민족을 제자삼아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누구에게 주신 명령입니까? 예, 열한 제자들입니다. 17절입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이 구절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뭘 의심했다는 것인가를 가지고 논란이 되는 구절입니다. 제자들중에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다는 이야기인가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과 3년을 동거동락했던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지금 눈앞에 있는 예수님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은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경배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뭘 의심했다는 말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갈릴리의 산에서 만나시고 다른 이야기를 나눈 내용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만나서 딸랑 이 명령만 주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1:3입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은 부활하고 승천하시기까지 40일을 이 땅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있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그 부분에 대하여 의심을 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자들은 경배와 의심 사이에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주님께서 이루실 일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지난 과거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며 예배하지만 앞으로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는 아직 확신이 없는 우리와 같은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100% 확신하며 주님의 길을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확신과 믿음을 사용해주시는 주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이 명령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 18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음을 말하면서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다니엘 7:13-14의 성취입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이 말한 영원한 나라의 소멸되지 않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 나타날 것이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가진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기로 한 그 인자가 예수님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나라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은 왕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그 일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2.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지금까지는 지상명령의 배경을 주로 살펴보았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누가 주신 명령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명령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지상명령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것’입니다. 먼저, ‘모든’이라고 했습니다.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이라고 했습니다. 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전세계는 몇 개국일까요? 기준에 따라 다르고, 생겼다 없어지고를 반복하지만 국제법상에는 현재 242개국입니다. 그중에 한국은 224개국과 교역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민족의 개념은 다릅니다. 현재 약 5,000개의 민족이 있습니다.
카메룬 타운젠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빨리 선교지에 가려는 열정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과테말라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과테말라는 스페인어가 공용어였기에 그는 열심히 스페인어를 배워서 과테말라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과테말라에 가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스페인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한 인디언이 타운젠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똑똑하다면 왜 우리말은 하지 못하시는 거지요?” 이 질문을 받고 토착 인디언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인디언의 언어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선교는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보니까 성경은 이미 민족 개념으로 선교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감추어진 민족이라는 Hidden People이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1934년 그의 나이 23세 때의 일인데, 스스로 위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ors), 한국에서는 GBT(Global Bible Translators)란 선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럼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려면 마태복음 전체를 말씀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이 예수님이 어떻게 제자를 삼았는지를 보여주신 후에 너희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고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삼는다는 것은 제자들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고 이것이 교회를 의미합니다. 네 개의 복음서중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쓰인 것은 마태복음뿐입니다. 가장 먼저 교회란 단어가 사용된 곳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라는 고백후 였습니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한번은 교회의 특권이자 임무를 말씀하신 후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두 세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를 모든 민족 가운데 세우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교회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최소한 목회자가 있어야 하고, 건물은 몇 평이상이어야 하고, 성가대와 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교회입니까? 놀랍게도 예수님의 말씀에는 외적인 조건은 거의 없습니다. 그 기준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임마누엘의 주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주님이 이루신 은혜 때문에 모인다는 것이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인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상명령을 수행함으로 주님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3. 지상명령에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이 지상명령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3개의 분사형 동사를 통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라’, ‘침례를 베풀라’, ‘가르쳐 지키게 하라’입니다. 먼저, ‘가라’는 것은 민족적, 언어적, 문화적,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두 번째 ‘침례를 베풀라’는 것은 예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이고, 제자공동체, 즉 교회로의 입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이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입니다. 침례가 교회로의 입교를 의미했다면, 교육은 그 안에서 신앙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지속적인 활동을 의미합니다. 가르쳐 지킨다는 것에 또 다른 제자를 삼는 것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기준도 단순하지만, 그 교회를 세우는 방법에 대하여 그 방향성만을 간략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선교지를 가서 마음 아팠던 적이 종종 있습니다. 한국의 어떤 교회가 창립 몇 주년을 맞아서 선교지에 교회를 세운다고 헌금을 보내 건물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물론 그 건물이 잘 사용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선교사는 건물 세워놓고 현지인에게 빼앗길까, 건물은 세웠는데 유지비는 감당을 못하여 쩔쩔매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선교지에 건물을 세우면 교회를 세웠다는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이고,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중국은 규제로 인하여 교회가 크거나 복잡할 수가 없습니다. 모임도 세련될 수가 없습니다. 찬양시간에 기타 외에는 악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장소도 잘 꾸며놓을 수가 없습니다. 20명이 넘으면 안전을 위하여 모임을 나누어야 합니다. 제가 볼 때 그렇기에 중국교회는 복제가 잘 됩니다. 대형교회는 복제가 어렵습니다. 정말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교회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기 위해서는 단순성을 배워야 합니다. 핵심을 놓여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 명령을 하시고 한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20절 하반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레너드 스윗은 현대교회의 중병을 한마디로 “예수결핍장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교회에 예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총리를 역임했던 한완상도 “한마디로 한국의 예수교회에는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교세의 양적 팽창과 대외적 선교열을 그토록 자랑하는 한국교회와 교인의 삶 속에서 나사렛 예수, 갈릴리의 예수를 만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위기라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교회에는 항상 예수님이 계신다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마중물교회 창립 9주년을 맞았습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은 한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에 주신 명령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대위임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 바라고, 또 제자 삼는 일에 함께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예수결핍장애라는 중병에서 벗어나는 길이고, 이 마중물교회가 주님과 늘 동행하는 임마누엘의 길을 걷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마 28:16-20 / 박신진목사
“전도합시다!” 오늘은 7월 첫주일에 있을 새생명전도축제의 전도사업으로 <새생명전도작정주일>로 지킨다. 전도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날이다. 앞으로 두 달 동안 온 교회는 전도에 올인할 것이다. 누구나 삼척제일교회 성도라면 이 거룩한 전도의 명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몇 번의 전도설교도 하고, 전도 하는지 안 하는지 점검하고 격려하며 강조할 것이다.
‘예수 믿는 것 어렵지 않은데 헌금 드리는 게 제일 힘들다. 그 다음이 전도다. 기도하는 것도 그 못지 않게 힘들다. 헌금, 전도, 기도만 아니면 교회 다닐 만 할 텐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그 세 가지가 절대로 중요한 게 교회생활이요 그 중 하나라도 버릴 수 없는 게 기독교 신앙이다. 어떤 사람은 제일 힘든 게 전도라고 한다. 남에게 신념을 강요하는 일, 현대인들이 제일 부담스러워 하는 일이 바로 전도인데 그걸 꼭 해야하다니,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어렵지만, 전도는 가장 귀한 일이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기에... 예수 믿는다는 게 무얼까? 예수님을 믿고 전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 할 수 있는 가장 보람 있는 일이 무엇일까? 후회 없이 인생을 살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자기 일에 성공, 부모에게 효도,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을 나누는 일일까? 다 좋은 일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귀한 일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여 그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 아닐까?
영혼을 구하는 일은 복음으로만 할 수 있다. 수양으로, 훈련으로, 때로는 친목이나 교육으로 영혼이 부드러워지고 발전될 수는 있으나, 구원받아 본성이 하늘의 것으로 변화되는 길은 복음 밖에는 없다.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롬10:9-10) 명문대학에 들어가고 뛰어난 재능을 닦아서 어느 경지에 이르러도, 깊은 교양과 도덕을 수양해도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로는 사람이 진정으로 새로워지지 않는다. 복음으로, 예수님으로 닦고 또 닦아 새로워져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에 가셔서 제자들의 경배를 받으신 후에 오고오는 교회와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전도하라는 명령이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교회와 제자들은 그 명령을 따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해야 한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1. 가라
다섯 가지 명령을 내리셨다! 첫째로, “가라!” 하셨다. 누가 전도하러 가는가? 예수 믿는 사람이 전도한다. 구원받고 예수 사랑에 눈 뜬 사람이 전도한다!
사연 많은 수가 성의 한 여인이 물 뜨러 갔다.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 자기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실 분이 예수시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녀는 “그 물을 내게 주옵소서!” 하였다. 예수님을 만나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했다. 그녀는 그날로 바로 나가 전도자가 되었다. 사마리아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주님께로 나아와 주님을 만나고 그들도 구원받았다! 내일이면 늦다! 지금이 주님 만날 때! 예수를 자랑하자! 내 삶에 예수 흔적 있다고 보여주자! 입술로 예수 증거하였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나가 예수를 전하였다. 지금 가라!
미장원하는 집사님, 전도에 미쳐서, 전도가 주업무이고 미장원은 보조업무였다고 한다. 요즘 유명 연예인 좇아다니는 젊은이들처럼 <예수 아미>가 되었다. 남편도 전도의 영이 충만하여 쉬는 날이면 문을 닫고 함께 전도 나가는 부부가 되었다. 80년대에 이런 사람들이 교회부흥과 전도를 주도했었다! 미장원 집사님이 손님을 대상으로 전도하였다. 하루, 파마를 말아주고 틈이 있는 사이에 전도하자는 전화를 받았다. 얼씨구나! 문을 닫고 전도나갔다. 오후까지 전도하여 열매도 맺었다. 돌아올 때, 파마 말아준 집사가 생각나, 아뿔싸! 큰일났구나, 그러나 오히려 그가 미안하여, 몇 번이나 와도 없어 다른 미장원에서 풀었어, 약값이라도 받아, 오히려 미안해, 하였다고 한다.
전도는 누가 하나? 내 안에 예수 들어와 있는 사람이 한다. 어부가 먼저 되어야 어구와 그물이 준비된다. 어구와 그물이 부족하다고 탓을 하고 있을 사이가 없다. “가라!” 하셨으니 가는 것이다! 가면, 전도가 되게 하시고, 예비된 영혼을 만나게 하신다.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예수 생명, 예수 은혜, 성령 역사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라!”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성령께서 도와주신다!
2. 제자를 삼으라
부활하신 예수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하신다. 유대인인 제자들은 교만하였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가지 않았다.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라고 하실 때, 처음 베드로는 반대하였다. 교회 역사에서 전도하는 데 이방인의 방벽을 넘어야 한다. 환영하고 찬성하는 사람에게만 전도한다면 얼마나 쉽겠는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알지 못하고, 복음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전도하여 제자를 삼으라!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씀처럼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전도자가 되어 이방인들을 제자로 삼으라!!
버스에서 여중생 전도, 그 다음날 그 여중생이 전도에 합류, 가장 강하게 전도했다. 이 모습을 보고 어떤 감리교 장로님이 화를 내면서, “믿은 지 하루밖에 안 된 사람이 어찌 전도를 하는가?” 하였다. 그렇다면, 수십 년을 믿고도 전도 못 하는 것이 정상인가, 하루밖에 안 되었어도 전도하는 것이 정상인가? 전도하여 어디 가든지 제자를 삼으라! 그때 지역이 복음화되고, 교회가 부흥될 것이다!
3. 세례를 주라
초대교회의 세례는 교회 안의 의식이 아니라, 공개된 의식이었다. 세상과의 분리, 교회와의 연합을 의미하였다. 전도하는 목적은 한번 교회 와서 구경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례 받아 죄 씻음받고 구원하는 데 있다. 전도하고 예수 믿어 세례를 주려는 것이 전도의 목적이다.
세례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내 안에 일어남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물로 먼지를씻고, 비누로 때를 씻듯이, 죄는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진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가 내 죄 값을 치루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 보혈이 내 죄를 씻습니다.’ 고백하는 것이 세례다!
신앙고백과 고백에 따른 결단이 이어지는 사건이 세례다. 중3에 세례받은 권사님, 교육과 문답을 못했으나 학생회장이니까 봐주었다. 사실은 죄를 책망하고 확실한 고백과 실천이 따르게 했어야 한다. 복음을 설명하라, 복음을 간증하라, 진정한 세례가 따르게 해야 한다. 옛사람 죽고 새사람 살게. 열매 없는 수고는 헛된 것, 껍데기만의 만족도 잘못된 것. 세례로써 전도의 참 열매를 맺자.
4. 가르치라
양육, 자라가야 한다. 내가 받은 것 이상 절대로 줄 수 없다. 그러니 내가 자라고 전도한 사람도 자라게 해야 한다. 신앙은 손자까지 보아야 한다. 먼저 그리스도를 자신이 본받아야 한다. 낳아야 한다. 왜 전도하는가? 예수 생명으로 새 사람 만들려고 전도한다! 그러므로 계속 가르쳐야 한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 전도하고는 거기에 멈추지 말고,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어릴 적에는 젖을 먹어야 한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그 젖을 먹어 빨리 자라도록 해야 한다. 이해가 안 된다, 지루하다, 어렵다... 이런 불평은 어리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전도하는 사람은 짜증내지 말고, 계속 젖을 먹이며 돌보아야 한다. 오래 참고 기도하며 잘 가르치라! 그러면 전도의 열매가 잘 맺힐 것이다.
가르치는 데에는 훈련이 포함된다. 가르치고 말면 행하기 어렵다, 행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행하지는 않고 가르침을 받기만 하는 자가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이다. 한국 교회는 감정적으로 은혜 받아 주님을 영접하고, 신령한 젖을 받고 자라기 시작하기는 하는데, 실천이 잘 안 된다. 왜 실천이 안 될까? 훈련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요, 항복한 사람은 매사에 순종해야 한다. 예배는 바로 드리는가? 기도생활은 하고 있는가? 시간 사용, 물질 사용을 하나님 뜻대로 하는가? 자녀를 양육하고 가정생활을 믿음의 원칙대로 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먼저 믿는 사람이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권면하고 훈련해주어야 한다.
5. 지키게 하라
어떻게 전도하나, 어떻게 가르치나에 치중한 나머지 가르치고 전한 그것이 지켜지는가에 무관심한다. 좋은 신앙은 안방이나 예배드리는 장소에서 판가름나는 게 아니다. 말씀 듣고 눈물 흘리는 사람 가운데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자 많다. 돌짝 밭에 뿌린 씨와 가시덤불에 뿌린 씨는 자라 열매 맺지 못하고 다 없어지고 만다.
죽은 믿음, 예배와 집회와 교육에는 열심히나 기독교 환자가 되어버린 사람들, 여전히 죄가운데 있다. 겔33:30-31,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도대체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며 조롱하듯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말씀을 지키지 않으니 들으나 열매가 없다. 신앙은 완전히 주께 항복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전도하여 순종의 열매를 맺게 하라! 신앙은 손자까지 보아야 한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전도자들은 지키게 하도록 모범을 보이라! 빌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주님의 마스터플랜
주님의 명령대로 하면? 부흥이 임한다. 교회가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에 안된다. 복음 전하는 데 무능한 자들, 주님이 근심하신다. 나는 목사의 아들이었지만 태어나서 20년 동안 전도해본 적이 없었다. 신학교에 가서야 처음 전도해보았다. 전도할 때 믿음이 생기며, 전도할 때 성령 역사를 체험한다. 전도할 때 새생명을 구원하게 된다. 전도에는 거룩한 기쁨이 있다!
‘너희는 가서’, 첫째 가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둘째 제자로 삼으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셋째 세례를 베풀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넷째 가르치라! ‘지키게 하라!’ 다섯째, 지키게 하라. 오늘 우리는 이 다섯 가지를 실천하라는 주님의 멍령을 들었다. 주님은 전도의 명령을 받아 세상으로 나가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는 새생명전도작정주일로 지킨다. 여러분은 마음에 심어두었던 전도대상자의 이름을 써서 내어 교회에 부탁하였다. 두달동안 그들을 위해 특별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그들에게 복음 전하여 어떻게든 예수 믿게 할 것이다. 진심으로 노력하라! 하나님께 그 영혼을 부탁하며 간절히 기도하라! 전도하는 자에게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 전도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며 성령의 능력을 입혀주신다. 전도할 때 참 제자가 되며 하나님 나라 유업을 얻는다!
전도 않는 것은 말씀에 순종치 않는 것이다. 진정한 교회의 발전은 복음의 발전이어야 한다. 누가 주님을 닮은 사람인가? 예수님은 바알세불이라는 욕을 먹어 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머리 둘 곳도 없이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셨다. 주님 닮은 사람으로 하나되는 것, 전도하는 사람으로 가득 찬 곳이 천국이다.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마 28:16-20 / 이강웅목사
서론: 네덜란드하면 풍차와 튜울립을 연상하게 될 것입니다. 본래 네덜란드는 전 세계의 보수신학에 큰 영향을 미친 화란 개혁신학으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네델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발자취를 찾아 그 때의 신앙을 자신의 마음에 불 붙여 보고 싶은 심정으로 교회당을 찾아갔습니다. 멀리서 한 교회 탑을 보게 되었는데 1649라는 글이 써 있었습니다. 그 의미는 그 교회당이 바로 1649년도에 지어진 것이라는 표시입니다. 그것을 보자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해가 종교개혁이 일어난 때와 매우 근접한 시대였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보니 크게 실망스러운 모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건물은 더 이상 교회당이 아니었고, 동사무소 같은 곳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시간마다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나왔습니다. 목사님은 종소리를 들으며 종교개혁 시대의 향수에 젖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실망스러운 모습에 눈물이 나오는 것을 꾹 참아야 했습니다. 그곳을 무거운 발걸음으로 빠져 나오면서 예배도 안 드리는데 왜 종은 치는 것일까를 생각하였답니다.
그런데 교회당을 나오면서 너무나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저녁이 되자 그 교회건물 모든 주변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유흥업 장소로 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도대체 거기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교회당의 종소리는 무슨 의미일까요? 이제 종소리는 시간을 알려 줄 뿐입니다. 종소리에 맞춰 장사를 시작하기도 하고, 또 장사를 끝내기도 합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버젓이 윤락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도시였던 곳이 이제는 교회당 종소리를 들으며 유흥업으로 흥청거리는 도시로 바뀌었다니 말입니다. 그 모습을 보며 마치 선지자 에스겔이 본 아골 골짜기에 널려 있던 허연 뼈들을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햇빛과 비바람에 완전히 백골이 된 것처럼 다시 소생할 수 없는 그런 절망을 느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살았던 그들의 조상들은 로마 카톨릭의 박해 가운데서도 굳게 신앙을 지켰습니다. 주님에 대한 열정과 열심이 있었고,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커다란 교회당을 짓을 정도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소리를 들으며 교회로 발걸음을 향했을 것입니다. 그 종소리는 그들의 모든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은 것은 교회당 바닥과 벽에 붙어 있는 교회당의 유래를 적은 글이 전부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교회는 서서히 그렇게 쇠약해져 간 것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교회가 교회다움의 본질에서 벗어나서 비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교회가 본질을 놓치고 비본질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주님이 소원하시며 기뻐하시는 일 보다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추구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기에 유언과도 같습니다. 보통 유언은 죽음에 직면해서 하는 말이기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가장 진실하게 간절히 소원하는 바를 밝히게 됩니다. 예수님도 가장 소원하는 바를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지상명령(至上命令)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위대한 명령’ ‘지상 최대의 명령’ ‘반드시 따라야 하는 명령’등으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The Great Commission’ 또는 ‘The Great Command’라고 합니다. “가장 큰 명령” “아주 위대한 위임”이라는 뜻입니다. 명령이라는 뜻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위임한다는 의미가 더 큽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사명을 “맡긴다” “위임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가장 위대한 일을 제자들이 맡기며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임을 받은 제자들, 즉 사도들은 모든 교회를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탁하신 말씀은 모든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고, 오늘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귀담아 듣고 실천해야 할 명령입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영적 흑암 속에 갇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종노릇을 하고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은혜의 왕국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바로 우리같은 죄인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제일의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이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이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이를 위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고, 성령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수행할 때 칭찬이 있고 상급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약속이 무엇이며, 과연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교회의 목적과 방향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시기에 말씀을 전하시면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같지 않고, 그 말씀에 권위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병을 고치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어떤 병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절름발이가 나았고, 눈 먼 소경이 눈을 떳고, 문둥병이 들린 피부가 깨끗해졌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도 일으켜 세웠습니다. 야이로 회당장 딸이 죽었을 때 ‘소녀야 일어나라’하자 즉시 일어났습니다. 나이성 과부의 아들은 죽어서 상여가 나가고 있을 때 ‘청년아 일어나라’하자 일어났습니다. 나사로는 죽은지 3일이 되어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나는 상태가 되었지만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 말씀에 붕대를 감아맨 채로 걸어나왔습니다.
또 예수님은 떡 다섯덩이와 물고기 두마리로 남자 장정만 5천명이 되는 사람을 먹이고도 남아 열두광주리를 거둬들였습니다. 큰 풍랑이 일어나서 집채만한 파도가 배를 삼키려 할 때 ‘잠잠하라’ 이 한 마다로 바다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이 분이 뉘시기에 바람과 파도가 순종하는고’하고 놀랐습니다. 제자들의 눈에 예수님의 권세는 이 땅의 사람의 것하고 차원이 다른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인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에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즉 가장 권세 있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하여금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과 온 우주가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만유의 주가 되어 다스리십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것을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핍박 가운데도 로마 황제 시이저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들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핍박을 받았고, 죽어도 기쁘게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가 되심을 믿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선과 악, 의와 불의, 참과 거짓을 명확히 구별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여기에 담긴 뜻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면 분명히 핍박이 있을 것이다. 너희를 대적하는 무리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아라. 온 천하의 권세가 나에게 있다. 세상 권세가들이나 악한 영이 주관자가 아니고, 내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주이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 능력과 권세로 너를 도울 것이다.’ 이것 아닙니까?
여러분, 영혼 구원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 받아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모두 가난할 때에는 노력해도 나라 전체가 가난하기에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때는 하루 세 끼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할 때는 복음을 잘 받아드립니다. 예수를 잘 믿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조그만 노력하면 될 것 같습니다. 돈을 잘 벌면 모든 게 다 잘 될 것 같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돈입니다. 지금 예수 믿기가 참 어려워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 내가 죄인이구나!’하는 각성이 있어야 구세주를 찾을텐데 구원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 일에 팔려 있기에 예수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악한 영이 예수 믿지 못하도록 세상 배후에서 역사합니다. 세상을 화려하게 하여 재미와 쾌락을 보여 줍니다. 현란하게 하여사람들의 혼을 빼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귀를 가리고. 영광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려 버립니다.
이런 장애를 뛰어넘어 한 영혼을 구원하려면 신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사도들에게 능력을 주셨는데 사도들은 교회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많은 능력이 나타나고 이적과 기적이 행해 집니다. 병을 고치는 권세입니다. 귀신을 내쫓는 권세입니다. 그리고 사회를 개혁하는 권세입니다. 에베소 지역에 사도 바울이 두란노 서원을 세우고 2년 동안 하나님 말씀을 전하니까 도시 전체가 미신과 마술에서 깨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죄를 자복하고,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책을 불태웠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부적, 우상, 음란한 책이나 영상물을 스스로 다 불태워 파기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입니다.
지금 악한 영들은 코로나팬데믹 상황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어서 교회를 위축시키고, 복음전파가 중단 되도록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그 분이 세상을 통제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깨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회를 틈타서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모든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2. 우리에게 성취해야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 까닭은 성취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하여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배당을 지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제자 삼으라 하셨습니다. 제자 삼는다는 것은 그 분께 자신을 위탁하여 맡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예수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작은 예수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삼년 동안 제자 삼는 일에 전력하셨고, 이제는 너희가 가서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원어성경으로 이 말씀을 살펴보면 ‘가서(going)’, ‘세례를 주고(baptizing)’, ‘가르쳐(teaching)’라는 분사형 동사 세 개가 명령형으로 된 주동사 ‘제자를 삼아(make disciples)’를 보조하고 있습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주어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 제자 삼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사명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예배를 드리고 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구제사업을 하여야 합니다. 선교도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 위에 분명한 목표는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앉아 기다립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라는 제한 때문에 이를 핑계 삼아 가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만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합니다. 믿는 사람들끼리만 재미있게 신앙생활하려고 합니다. 함께 모여서 은혜를 받은 후 세상으로 가서 영혼 구원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는데 세상에 나가서도 믿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과 점점 담을 높이 쌓고, 아예 기독교 문화 속에서만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 일에 무관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속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하나님 아들도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세상에 가야 영혼 구원하여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세상으로 가야합니다. 교회당을 잘 지어놓고,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3. 우리가 믿어야 할 약속이 있습니다
가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사역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자세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시간과 물질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렇지만 다른 어떤 봉사 보다도 하나님께 칭찬이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므로 내 자신도 즐겁습니다. 피곤해도 내 영혼에서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큰 상급이 있습니다. 영혼 구원하는 이들에게 영광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약속하십니다. (마 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우리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소원을 알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충성하면 주님이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늘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합니다.
이를 위해서 승천하신 후에 약속하신 대로 또 다른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분은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떠나지 않으시고, 내주하십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아무게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구나’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것이 더욱 충만히 나타내 주십니까? 주님의 명령대로 영혼 구원하는 일에 열심인 사람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나를 하나님 일꾼으로 불러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런데 거기에 주님의 임재까지 약속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이제 두렵지 않습니다. 담대합니다.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니 염려하지 않습니다.
결 론
독일의 신학자 헬무트 텔리케가 나치 치하에서 어느날 낮 시간에 교회에서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교회당 옆으로 훤히 뚫려 있는 도로로 히틀러의 군대들이 지축을 흔들며 행진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텔리케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군대의 행렬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한창 꽃다운 나이인 젊은이들이 나치군대의 유니폼을 입고 당당하게 행진해가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텔리케 목사의 마음 한 구석에 깊은 회의의 검은 그림자가 떠올랐습니다. "아,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지금 역사의 주인은 저 젊은이들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히틀러가 아닌가? 히틀러는 저 막강한 군대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해가고 있는데, 나는 히틀러가 쓸모 없어서 버린 장애인들, 나이 많은 몇 사람을 앉혀 놓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도 이런 회의와 절망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의 무능함에 절망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텔리케 목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으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 순간 텔리케 목사는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에게 속삭였습니다. ‘그렇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쥐고 있는 자는 히틀러가 아니고 주님이시다. 그리고 나는 그 주님의 제자이다.’ 그리고 텔리케는 다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와서 주님께서 분부하신대로 그들이 배우고 순종해 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정치 권력을 쥐고 있는 정치 지도자들이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이 세상에 나아가 주님의 제자들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 명령은 예수의 제자인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옛 질서는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전개 될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만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우리의 것이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사용된 것만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천국 곳간에는 나의 헌신과 봉사, 물질과 시간, 재능과 은사로 맺은 열매만이 쌓여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이 지상에서 예배 드리지 못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기도가 그치게 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헌신과 봉사를 하지 않을 날이 올 것입니다. 더 이상 복음 전파할 필요가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을 맞이하기까지 복음은 계속 전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교인과 신자와 제자
마 28:16-20 / 이필재목사
지난해 교회 목표를 “선교지 교회 건축 100개 완성”으로 정했는데 어제까지 116개가 완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협조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선교지 건축 사역, 우물 사역은 중단하지 않고 계속할 것입니다. 열대 지방 사람들은 아주 느리기 때문에 진행이 좀 더딥니다. 그래서 좀 답답하기도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빨리빨리 하는 데는 세계에서 제일입니다. 선교지 건축하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볼 때 너무나 답답하고 느릴 때가 많습니다. 헌금하신 분들은 조급해 하지 마시고 계속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선교사 파송은 이제 자립자급을 위해서 임기약속이 이미 오래 전에 지난 곳은 중단하고 새로운 선교 작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2012년도는 한반도에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북한 사정 전문가들도 지금 잘 모르겠다는 말로 일관하고 예측을 불허하는, 답변이 어려운 불안 요소가 한반도에 생겼습니다. 또, 대한민국은 금년에 총선과 대선이 함께 있어서 일 년에 선거에 관한 뉴스를 지루하게 들어야 될 거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과 관계가 중요한 러시아도, 미국도 대통령 선출이 예약되어져 있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가지는 영향력이 국가 전반에 엄청난 힘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관심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똑같은 생각을 합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세상이 변해갈 것이다.” 이렇게 믿고 다소 불안 요소가 있다 하여도 그런 모든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큰 물결이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찬송가를 부릅니다. 망망한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 배를 띄웠는데 풍랑이 심해서 위험한데 그 바람을 이용해서 돛을 달면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목적지에 갈 수 있다는 하나의 신앙 고백적 찬송입니다. 아마 모든 대한민국 교회들이 똑같이 기도하는 제목, 계속해서 통성기도 하는 것이 민족의 번영과 아름다운 발전, 그리고 통일, 그래서 북한의 주민에게도 자유가 회복되고 그것이 신앙 회복이 이루어져서 교회 재건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우리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새해 첫 아침에 우리 모두가 먼저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또다시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사명이 있다는 뜻이요 죽었다는 것은 그 사명이 끝났다는 뜻이므로 바울 선생은 “그러므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다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신앙 고백했습니다. 다만 우리는 아직 나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새 역사를 생각하면서 오늘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일 년의 새로운 역사 창조를 위해서 출발을 하려는 것입니다. 금년 우리 교회 표어를 “교인에서 신자로 신자에서 제자로” 이런 제목을 정했는데 이것은 신앙의 성숙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을 보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가 마지막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장소는 조용한 산인데 왜 이곳에 모였는가? 예수님이 그리로 오라고 하여서 열한제자가 모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설교를 제자들에게 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므로” 나에게는 큰 권세가 주어져 있음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밝히고 “결국 이 권세를 너희들에게 주겠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그 권세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너희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 제자 삼는 일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제자를 삼는 그런 사역의 부탁을 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되어져서 2천년이 지난 지금의 여러분도 저도 주님의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을 해석하면 “신앙생활의 마지막 성숙 단계는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결론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열한 제자만 있습니다. 열한 제자만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오지 못하게 예수님이 결정하신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지금까지는 군중집회 중심의 전도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될 수만 있으면 수없이 많은 사람 앞에 나타나셔서 눈도장을 찍으시고 많은 숫자를 상대로 설교하시고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나와서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킬 때 남자만 5천명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군중집회 중심의 전도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후에는 정반대로 남이 볼까봐 숨어 다니십니다. 사실 부활하신 이후에 예수님이 군중집회를 유도하셨다면 살아계실 때보다 훨씬 더 큰 군중이 모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 죽었다가 3일 만에 살아난 예수다.” 그러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안하셨습니다. 사실 마태복음 27장 62~64절을 보면 그러한 일을 예상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합니다. 이 사람이 평소에 말하기를 죽었다고 살아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진짜 이 사람이 살아나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시체를 도적질하지 못하게 군병들로 하여금 굳게 지키소서.” 이런 반응이 나타났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을 뒤집어엎을 만큼의 상승효과가 부활 후 나타날 것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절대 그 방법을 쓰지 아니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호산나를 부르던 그 많은 사람과 벳세다 들판에서 부흥회를 하고 오병이어로 떡으로 배부르게 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것을 예수님이 기억해서 지금은 제자 사역만 열심히 하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성숙 단계를 보면 처음에는 누구나 군중입니다. “이게 뭐야?” “뭐가 있대.” “가보자.” “와! 많다.” 거기가 출발입니다. 이것도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출발합니다. 거기서 그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가 열심히 하는 전도 사역 가운데 군 선교가 있습니다. 아주 잘됩니다. 갈 때마다 수십 명씩 세례를 받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제가 설교를 하고 집례를 해서 세례를 준 사람 가장 많았던 날이 6,300명을 논산 훈련소에서 했습니다. 목사들 100명 데리고 가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만약 군대에서 세례 받은 사람이 다 그대로 교인이 된다면 대한민국은 남자 교인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 가운데서 교인이 생기지만 소수가 생깁니다. 그들 가운데 소수가 교회 출석에 용기를 내어서 교회에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은 믿음의 확신이 없는 상태로 얼마동안 자의에 의한, 혹은 이웃의 권고에 의한 교인이 되어서 교회 출석하는 교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성령 체험을 하게 되고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되고 교인에서 신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때는 아주 마음에 진리의 발견에 기쁨이 있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무엇인지, 내가 왜 예수를 믿어야 되는지, 영생의 문제가 무엇인지 마음에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적 희망을 갖게 되고 여기서 멈추어서 신앙생활을 해도 됩니다.
그런데 신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자에서 제자로 가는 것입니다. 이 제자의 개념은 내가 알고 있는 영생 구원의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데 필요한 역할 분담입니다. 이것이 삶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위해서는 내가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할 수 있다는 단계를 말하는 것이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개별적 특징으로 살펴보는 것이 아마 유익할 것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군중 속에 있었습니다. 온 세상에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문이 막 오고 가는데 자기들도 그 소문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관심이 다른 사람보다는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서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셨을 때 그 자리에 그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 군중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따라 나선 단계가 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이 발전합니다. “나를 누구라 하느냐?” 했을 때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을 분명히 함으로 정확한 신앙 고백에 의한 교인에서 신자로 발전합니다. 신앙 고백이 분명하여도 그들의 목표는 세상적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성경에서 우리가 보게 됩니다. 불필요한 요청이나 분위기를 자꾸 만들고 자신들의 삶의 구체적 목표가 주님의 요청과는 반대로 가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느 날 제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바라는 바는 이방인들의 집권자이다. 그 사람들이 사람을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 그것이 되기 위해서 너희들이 그렇게 하는데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제자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중에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다. 섬기려 하고 마지막에 이 제자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사실 신자들도 이 부분에 와서 매우 어렵습니다. 신앙 고백이 분명하고 구원의 확신을 소유했고 철저하게 교회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이 문제, 섬김을 받고자 하는 이 문제는 항상 시험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왜 나를 몰라보느냐? 나에 대한 인격 대우가 이것뿐이냐?” 이런 문제로 자꾸만 시험을 받고 신앙고백자이면서도 어렵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했는데 이민 사회는 교회 공동체가 한인들이 제일 많이 모이는 집단이라서 뉴스를 낼 것이 한인 교회가 제일 많습니다. 교회에서 모든 행사를 하면 지방 신문에 다 냅니다. 제가 있던 교회에서 장로교회이기 때문에 총회에서 장로를 세우라고 해서 장로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다 선서를 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교회의 모범이 되고 어떠한 희생과 어떠한 헌신적 봉사도 남보다 훌륭하게 이 교회를 통해서 잘 해나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주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선서하고 마쳤습니다. 그 이튿날 신문에 크게 기사가 났습니다. “이필재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무슨 교회에서 최초로 장로들이 생겼습니다.” 저는 기사가 났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 장로가 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아침에 신문을 보고 저에게 즉시 전화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신문을 보셨습니까?” “아니요. 못 봤는데요.” “우리 장립식 한 것이 신문에 다 났습니다.” “아, 그런가요? 잘 됐네요.” 그런데 말하는 음성이 언짢습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목사님! 왜 장로들 가운데 내 이름이 꼴찌로 났습니까?” 그것을 전화를 걸어 따지는 것입니다. 저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이 났느냐 하면 ‘나는 이제 큰일 났다. 이 장로와 일하려면 이제 나는 큰일 났다. 괜히 쓸데없는 거 해가지고 행사만 했지 큰일 났다. 바로 24시간 전에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어떤 고난과 어떤 어려움도 내가 감수하면서 서약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가 교회에서 정말 필요한 것인가?’ 그래서 저도 좀 화가 나서 “그 신문 내가 냈단 말입니까? 나는 아직 신문 보지도 못했는데요. 났으면 어떻고 안 났으면 어떻습니까? 꼴찌로 나고 첫째로 나는 게 뭐가 다르단 말입니까? 그게 그렇게 관심 있습니까? 그러면 사표 내십시오. 차라리 안하는 게 낫습니다.” 제가 유해보여도 셀 때는 굉장히 셉니다. “하나님의 일한다고 약속하시고는 그게 뭡니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 문제가 그 분이 신자는 분명합니다. 신앙 고백도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제자화되는 게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저는 이 제목을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신자에서 제자로 가는 이 고비가 아주 어렵습니다. 편의상 예수의 제자는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사도적 제자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 소명이 주어진 자로 열두 제자 같은 맥락의 제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평생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세상을 삽니다. 필요한 훈련을 받고 성령의 지시를 따라 어느 곳이든 선교 사역과 전도 사역, 목회 사역을 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그 중의 하나가 됩니다. 이런 제자는 영적 지도 능력이 있어야 하고 모든 사람을 영적으로 양육해야 하고 성례전을 집례해야 하고 예언자적 사명과 제사장적 사명을 전념하게 됩니다. 이런 제자의 성격이 있습니다. 언제나 대중 앞에 잘 보일수록 효과 상승이 됩니다. 이것을 보이는 제자라고 합니다. 많이 보일수록 효과가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신년 첫 주일인데 만약 제가 이 자리에서 안 보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온 교인들이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아픈가?” 나중에는 “죽었나?” 별 소문이 다 납니다. 보십시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밑에 왔을 때 모세가 소리 없이 기도하러 시내산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안 보이는 겁니다. 모세가 매일 보여야 되는데 40일 동안 안 보이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금송아지 하나 만들어놓고 “이것이 우리를 인도할 신이다.” 안 보이기 때문에 보이는 대상을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교회는 영적 지도자가 안 보일 때 반드시 시험거리가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제자들은 항상 민중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됩니다. 요즘 어떤 교회에 설교하러 가면 이런 강대상에 유리 기둥 하나, 유리판 하나만 세웠습니다. 그래서 쳐다볼 때 설교자의 다리까지 다 보이는 강대상을 많이 해놓았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사도는 온 몸 전체로 설교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디랭귀지(Body language)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교회 가서 설교하면 발장난도 못합니다. 어떤 교회는 강대상을 성 쌓아놓은 것처럼 웅장합니다. 어마어마하게 크고 아무것도 안 보이게 높이도 얼마나 큰지 목만 나옵니다. 제가 그 교회에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강대상을 어마어마하게 해놓았습니까? 얼굴이 보이지도 않겠네요.” 그런데 그 교회 담임 목사의 말이 걸작입니다. “목사님! 저도 이것 때문에 고민입니다.” “뭐가 고민인가요?” “이 강대상을 이 교회 초대 장로님이 해놓으신 것이라서 이거 치웠다가는 그 후손들이 난리가 나기 때문에 치울 수도 없고 안치우자니 옛날 거고 고민입니다.” 사실 교회에서 이런 문제들이 많습니다. 누구의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서 그냥 그대로 가야 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농담 한마디 했습니다. “이 교회 강대상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줄 알았더라면 내가 바지는 안 입고와도 될 뻔 했네요.” 이 보이는 제자는 항상 투명하게, 어디서나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성경에 그래서 사도들이 항상 앞에 나서지 않습니까? “오늘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봉사적 제자가 있습니다. 여러분입니다. 일은 많이 하는데도 안 보입니다. 그래서 이 사도적 제자와 봉사적 제자가 함께 조화를 이룰 때 그 교회는 아주 잘됩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가출하셨지 않습니까? 예수님 이외에 아주 건강한 남자들만 열두 명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매일 식사, 잠자리, 빨래도 해야 되는데 누가 합니까? 그래서 나선 사람들이 봉사적 제자들인데 여인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마르다, 베다니 마리아, 살로메, 구사의 아내, 요한나, 수산나, 헤롯의 청지기, 살로메, 갈릴리 여인들…. 그 사람들이 그런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적 제자와 봉사적 제자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니까 주님의 3년 동안의 선교 사역은 아주 아름답고 훌륭하게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교회들이 하는 프로그램은 제자화 훈련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제목을 보십시오. 전교인 제자화 훈련, 1대1 제자화 양육, 제자 만들기, 충성된 제자…. 이런 제목으로 결국은 우리가 제자화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열두 명씩 그룹을 만들어서 “열두 제자 훈련” 이런 제목으로 하지 않습니까? 사실 제자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 후에 군중집회를 안 하시고 제자화 훈련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훈련시킨 것과 똑같이 너희도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 교인에서 신자를 만들고, 신자가 제자가 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성취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신앙의 마지막 단계는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신자”하고도 한층 업그레이드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마음을 열고 그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그 다음에 누가복음 14장 33절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제자가 쉽지 않습니다. 제자로 산다는 것은 그런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잘했다.” 이게 제자입니다. 이 제자화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삶에 목표를 두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모든 노력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금년 목표를 “제자화”로 정한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주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것이 약속입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열두 제자 외에도 2천년 동안 제자들은 수없이 탄생하였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 나오는 모든 신자들이 이제 주님의 제자로 발전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열두 제자 같은 사역을 감당함으로 우리 한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온 세상을 비출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주님과 함께 살기 위하여
마 28:16-20 / 조용기목사
<서론>
“주님과 함께 살기 위하여”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김주리 씨의 소설 「아직도 그녀는 행복하다」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거, 가끔 참 신기해요. 나 자신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오로지 그 사람만을 생각할 수 있다는 거..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죽을 때까지 사랑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것만큼 아름다운 인생이 또 있을까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그 때문에 사랑하는 청춘 남녀가 결혼하여 함께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수록 주님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켜야 될 규범이 있습니다.
<본론>
1. 주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한다.
첫째로, 우리의 삶속에 주님을 제일주의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제2, 제3, 제4, 제5 주의로 살게 되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내 마음 중심을 점령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나의 모든 생각을 주님이 점령하고 마음을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9절로 20절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항상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께 드리고 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말했었습니다. 괴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영국 격언에 “지옥이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이고, 천국이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그 앞날에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학생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을 대주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난 다음에 고맙다는 편지 한 장도 없고 소식 한 장도 없습니다. 그 대학생만 생각하면 내 마음이 울컥 화가 납니다. 괜히 도와주었다. 그런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장학생은 장학금을 받고 난 다음에 얼마나 눈물 어린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주님께 감사하고, 또 등록금을 대준 그 당사자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더 주고 싶어요.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등불 주고 싶고, 전등불 보고 감사하면 달을 주고 싶고, 달을 보고 감사한 사람 태양을 주고 싶고, 태양을 보고 감사한 사람은 천국을 주고 싶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제일주의로 살면 범사에 감사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좋고 감사하고, 나쁜 것은 좋게 만들어 주실 것이니 좋고,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실 것이니 좋기 때문에 항상 주님 감사하다는 말씀이 입에서 떠나면 안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서 22절에 “감사하지 않으면 우리 생각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어리석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50편에 감사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마음은 지옥과 같고 감사가 없는 가정은 메마른 광야와 같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께 감사함으로 주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기도와 대화를 쉬지 않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가 멀어지면 사랑도 식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뜨겁게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서로 상대에서 대화를 멀리하면 멀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두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손을 잡고 걸어가다가 실개천을 만났습니다.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손을 잡고 걸어가다가 실개천이 점점 커져서 큰 도랑이 되니까 이제 손을 잡을 수가 없어서 서로 쳐다보고 고함을 치고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 도랑이 넓어서 강이 되어 버리니까 그 다음 손을 흔들어서 서로 대화를 하다가 강이 넓어서 바다가 되니까 서로서로 딴 세상에 들어가서 자기 스스로의 인생을 찾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하면 가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대화를 늘 해야 되는 것입니다. 대화를 하지 아니하면 어떤 뜨거운 사랑도 식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 서로 사랑으로 뭉쳐 살려면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들이 항상 대화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식탁에 모여서 대화를 하든지 특별한 시간을 내어서 서로 마주보고 대화를 하든지 대화를 하면 가슴을 열어 놓게 되고 마음이 통하게 되고 사랑이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너무 바쁨으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들, 딸들은 자기 스스로 다 흩어져 살기 때문에 냉랭하고 사랑이 없고 무정하고 인정이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화를 쉬지 않고 해야 되는데 하나님께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늘 기도하라. 꼭 내가 필요해서 부탁할 것이 있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것 없으면 감사기도를 하라.
저는 늘 말씀 드리지만, 불광동에서 개척할 때 장로교 장로님 한분이 새벽기도는 우리 천막교회로 나왔는데 그 장로님은 앉아서 몇 시간 기도를 하고 떠날 때까지 하는 말이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나중에는 제가 그 장로님 싫었습니다. 무슨 기도를 그저, 그저 감사하냐고 그래서 제가 “장로님, 기도를 좀 해야지 그저, 그저 감사한게 뭡니까?”하니까 “목사님 모든 것이 그저, 그저 감사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피난생활 나와서 내 자식들 잃지 않고 고스란히 나왔지요.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해서 교육 다 시키고 먹고 살았지요.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이렇게 늙었지요. 이 교회 잘 나오고 난 장로 되고 우리 집사람은 권사 되고 자식들 다 주님 잘 믿지요. 그 이상 더 좋은 게 뭐가 있습니까? 감사할 것밖에 없어요.” 그것을 몇 시간씩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나중에 신학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다가 하나님 사업 잘하다가 세상 떠나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8절에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기도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기도하니까 힘이 드니까 안하려고 해 그렇지 기도하려면 끝이 없지요. 주님이 기쁘시게 할 것을 찾아서 행해야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우리의 삶속에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행하면 주님과 가까이 있을 수가 있고 주님과 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8절로 19절에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화평의 일을 하고 덕을 세우는 일을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가 땅에 있어서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고 있는 것을 사랑과 은혜를 나누어 주고 나누어 받는 이러한 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크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기주의적 세계 속에서 우리는 전부다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내 것이라고 움켜쥐고 나누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것이 개인의 불행, 가정의 불행, 세계의 불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호인 록펠러는 33세가 되었을 때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는 미국에서 가장 큰 회사를 갖게 되었고, 53세에는 억만 장자가 되어 세계 최대의 부자가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알로피셔라는 병에 걸려 머리카락과 눈썹이 빠지고 온 몸이 말라가는 병인데 의사들은 말하기를 아무리 오래 살아도 1년 이상 못산다는 진단이 내려왔습니다. 그 진단을 받고 그 날 밤 록펠러는 ‘사업이 잘되어 하루에 100만 불씩 벌지만 그 재산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허무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밤에 괴로워하다가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돈은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님이 다 된다. 돈은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님이 모든 것이야!” 외치고 난 다음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와 함께 새벽을 맞이한 록펠러의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습관적으로 교회에 왔다 갔다 하던 그가 이제는 진실로 교회 와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찬송을 하며 죽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리버사이드 교회를 건축하여 전 재산을 드리고 큰 교회를 지었습니다. 지금도 뉴욕의 리버사이드 교회는 제일 아름답고 큰 교회인 것입니다. 그 다음 남은 모든 돈을 다 들여서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가지고서 그 재단에서 가난하고 병들었으나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의료사업에 전적으로 기부를 한 것입니다. 그러자마자 그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게 되어서 의사들이 55세를 넘기기 어렵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록펠러는 98세까지 살면서 사회 많은 활동을 하며 건강하게 살았었습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고 서로 나누어 주는 삶을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자기도 잘살고 남도 잘살고 하나님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제일주의로 산다는 것은 이처럼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찾아 행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는 단계적인 것을 찾기 애를 쓰고 주된 것을 찾지 않습니다. 주된 것을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과 함께 살면 주님이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능력으로 모든 것을 알아서 우리에게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2. 거룩한 삶이 있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살자면 성품이 같아야 함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가정이 이혼한 이유는 결혼을 하고 보니 너무나 성격이 다르다. 성격차이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 물과 기름이 안 섞이듯이 성격차이가 나서 섞이지 않는다. 그러니 할 수 없이 헤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시골 총각들이 호기심 반, 연애 반으로 월남에 가서 혹은 태국에 가서 말레이시아에 가서 결혼을 하고 옵니다. 그리고 와서 조금 지나고 난 다음은 호기심도 사라지고 신기한 마음도 없어지고 나니까, 그 다음 실제 생활에 부딪히는데 말이 안통하지요. 문화가 다르지요. 성격이 다르지요. 아주 생지옥인 것입니다. 가라하면 도로가고 달라고 하면 가져가고 말이 안 통합니다. 세상에 말이 안 통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성격이 다르니까. 그래서 치고 박고 싸우다가 이혼을 하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성격이 같아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성격과 취미가 전혀 다르면 함께 살기 어렵습니다. 그 때문에 결혼하기 전에 오랫동안 사귀어 보고 성격을 알고 취미를 알고 나하고 조화가 되는지 안 되는지 보아서 최소한도 50% 이상이 되면 서로 함께 살 수 있지만 50% 이하가 되면 고통을 당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100% 성격과 취미가 맞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50% 이상만 되면 충분히 좋습니다. 그러나 그 이하가 되면 상당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절로 16절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그 두드러진 성격이 거룩한 성격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정욕, 타락한 문화, 썩어져 가는 구습을 가지고 사니까 하나님 하고 맞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데 우리 인간은 더럽고 추하고 불결하고 세상 습관과 구습을 따라 사니까 하나님이 같이 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양을 치다가 가시넝쿨 속에 불이 활활 타오르므로 그것을 구경하러 가니까 가시넝쿨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어라!”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인간의 신발을 벗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발은 행위를 말하는데 행위를 회개하고 정결하게 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로 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구습을 벗고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변화되어서 새사람을 입어야 하나님과 함께 함께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 그대로 술 취하고 방탕하고 음란하고 세속적인 사람으로 하나님과 같이 살려고 해도 하나님이 떠나고 같이 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가려면 주님과 성격이 같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늘 회개하고 늘 성령충만을 간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매일 같이 세수하지 않아요. 옷도 정기적으로 빨아 입지 않아요. 방도 매일같이 청소하지 않아요. 저는 어릴 때 방청소는 내 담당인데 우리 형제간이 아홉이기 때문에 언제나 방이 어지럽기 짝이 없습니다. 애들이 다 일어나서 그냥 옷도 이 구석 저 구석 던져 놓고 요강에 오줌도 넘치도록 해가지고서 방바닥에 오줌이 흥건하고 뭐 쓰레기가 매일 많습니다. 항상 아버님께서 저에게 소제를 하라고 해서 하루는 소제를 하다가 하도 화가 나서 빗자루를 땅에 확 던지면서 “이놈의 소제 밤낮해도 무슨 소용이냐?” 해놔도 또 더러워지고 또 더러워진다. 아버님이 “용기야 이리 오너라!”가니까 “너 여기 앉아라.” “뭐라고 그랬느냐?” “아무리 소제해도 자꾸 더러워지기 때문에 소제하지 말고 그대로 살자고 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인생은 밤낮 소제하는 것이다. 밤낮 더러워지면 밤낮 소제하고 밤낮 더러워지기 때문에 때를 또 씻고 목욕하고 밤낮 더러워지므로 옷을 빨래하고 밤낮 더러워지므로 얼굴을 씻고 밤낮 양치질을 하는 것은 늘 더러워지기 때문에 씻어야 되느니라.”우리가 한번 의롭다고 영원히 의로워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의롭다가 내일 더러워지고 내일 회개하면 모레 의로워지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물로 씻어 깨끗함을 얻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과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정결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 받는 것은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을 때 성령께서 와 계신 것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성령이 안 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말하기를 “내 성격이 태어날 때부터 고약한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카네기는 성격에 대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밝은 성격은 어떤 재산보다도 귀중한 것인데 성격이란 가꾸고 기를 수 있는 것이다. 사람 마음도 몸처럼 그늘에서 햇빛이 비치는 자리로 옮겨가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늘에 있으면서 춥다고 하지 말고 햇빛이 비취는 양지볕으로 가야 되는 것처럼 마음도 음울한 성격을 가졌으면 밝은 성격으로 옮겨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나쁜 성격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고 한탄하기보다는 지금 자신의 마음을 좀 더 밝은 곳으로 옮겨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죄와 불의로 더러워진 우리의 성품을 주님의 거룩하신 성품으로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회개하고 노력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되는 것입니다.
3. 말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야 주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D.L.무디 는 제일 처음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너무 좋아서 천국에 올라간 것 같았습니다. 즐거워 기뻐서 일터에 가서도 늘 노래를 부르고 했는데 아! 얼마있지 아니하며 중생한 기쁨이 사라지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사라지고 세상을 따라 나갔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일주일 시간을 내어서 산에 올라가서 금식하며 산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충만히 받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이제는 모든 것이 해결 되었다고 하고 내려왔는데, 아! 얼마 있다가 또 옛날로 돌아갔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하나님 나는 화인 맞은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놈이 무슨 천국을 갑니까? 중생했다가 세상으로 나가고, 은혜 받았다가 다 쏟아 버리고, 나는 버림받은 사람입니다.”탄식을 하면서 성경을 읽는데 성경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는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뜨거워져서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렇다. 내가 중생했다고 기뻐하고 기도해서 은혜 받았다고 기뻐하지만 나는 성경을 안 읽어서 은혜가 없고 신앙이 자라지 못하고 정결하지 못하구나!” 그래서 그때부터 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생활은 바뀌어지기 시작해서 마귀가 떠나가고 죄와 세상이 떠나가고, 그 마음속이 점점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성결하고 성령이 충만하게 되었다는 간증을 한 것입니다.
신명기 6장 6절로 7절에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일어나도 누워도 길을 가도 앉아도 하나님 말씀을 늘 묵상하고 강론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가 굉장한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말씀을 통해야 알지요. 많은 사람들이 주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꿈에 나타나 주시옵소서. 환상에 나타나 주시옵소서. 음성을 듣게 해 주시옵소서.”하는데 여러분 그것은 특별한 사항이고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것이 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루 밥은 세 번 먹는데 왜 성경은 하루에 한 페이지도 안 읽습니까? 밥은 세 번 먹어야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말씀을 하루에 몇 페이지고 읽어야 말씀을 통해서 영혼의 건강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로 17절에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는 것은 말씀을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충만하면 말씀이 살아 움직여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게는 역사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송명희 시인의 간증인 것입니다. 그는 은혜로운 시와 찬양을 써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잘 알다시피 그는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온 전신이 마비되어 꿈쩍하지 못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굉장한 신앙인으로써 송명희를 어릴 때부터 휠체어에 태워서 기도하는데는 다 데리고 다니면서 안수 받고 부흥회라는 부흥회는 다 돌아다니면서 안수 받았는데 조금도 낫지 않고 오히려 송명희씨는 그것을 마음속에 수치로 느끼고 아픔을 느끼게 되어서 점점 더 부정적인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탄식을 했습니다. “왜 다른 사람은 건강하게 태어나서 잘 사는데 나는 소아마비로 태어나서 이렇게 무참하게 수치를 당하는가.” 탄식을 하고 고통을 당하다가 그래도 의지할 곳 없으니 절망의 끝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와 만나 주세요! 제 모든 걸 다 드리겠습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자기 눈앞에 빛이 환하게 비취더니 큰 두루마리가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그 두루마리의 글을 자세히 읽어 보니까 거기에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을 믿으라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죽으리라”이런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알아야 되겠다고 작정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작정기도를 하면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성경을 100번을 읽었습니다. 아니 100번이 아니라 10번을 읽었습니다. 내가 너무 칭찬을 많이 했네요. 10번을 읽고 나니까 눈이 확 뜨이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준 사명을 알려 주세요. 하나님 말씀을 10번 읽으면서 마음에 영감이 떠올라 와서 시를 적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시를 적어서 그 시를 책으로 발표하니까 일약에 그 시가 찬송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이 되고 유명해졌습니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곧장 방송국과 잡지사가 인터뷰를 요청했고 각 교회에서 강연을 해달라고 해서 1,500회 이상의 국내외 집회에서 간증을 했었습니다. 송명희 씨는 오늘날도 늘 밝게 웃으며 자신의 모든 생활은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고 말씀해 주시어 늘 그분의 모습 안에서 기쁘게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그 전신마비는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고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그만큼 유명해지고 그만큼 하나님 사역을 많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소아마비가 되므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시를 적게 되고 모든 교회에 환영을 받고 들어가서 강연을 하게 되고 어떤 유명한 부흥사보다도 더 유명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건강해서만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전신을 못 쓰게 만들어서라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 그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말씀이 이 사랑하는 자매님을 변화시킨 것처럼 우리도 말씀을 따라서 나아가야 우리 생활이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늘 가까이 하면 여러분 마음이 천국 문화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전체가 분위기 속에 사는 것입니다. 세상 문화가 꽉 들어찬 곳에는 세상 분위기가 꽉 들어차서 세상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오고 기도회에 모이고 전도회에 가면 하늘나라 문화가 충만합니다. 분위기가 전부 하나님의 분위기인 것입니다. 신앙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돌아보세요. 여러분 친구 중에 세상이 충만한 친구를 만나면 그 친구와 있는 동안에 늘 듣는 이야기가 집값 이야기, 물건 값 이야기, 술집에 가서 노는 이야기, 노래방에 가서 노래하는 이야기, 춤추는 이야기, 나오는 것마다 전부 세상 말을 해서 세상 분위기가 꽉 들어차게 해서 여러분을 세상에 물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잘 믿고 주님 잘 섬기는 친구하고 만나 이야기 하면 하늘나라 이야기, 말씀 이야기, 성령 충만 이야기, 하나님의 기적 이야기를 하므로 마음이 번쩍 눈에 뜨이고 신앙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분위기 속에 살기 위해서 제일 좋은 것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충만하고 말씀을 통해서 나가면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분위기 속에 하나님의 문화 속에 들어가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마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4. 꿈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꿈과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꿈의 하나님이요, 믿음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영어로 되어 있는데 한국어는 잠언서 29장 18절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묵시라는 것이 다른 것으로는 꿈이요, 환상인 것입니다. 꿈이 없으면 환상이 없으면 묵시가 없으면 사람이 방자히 행한다. 내 마음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일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소원 즉 꿈, 환상을 마음속에 집어넣어 주어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 소원, 바람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미래를 가지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마음속에 꿈을 품어야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데 무엇을 성취합니까? 좋은 집에 살겠다는 꿈이 있어야 좋은 집을 구하지 좋은 집에 살겠다는 꿈도 없는데 언제 좋은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새 옷을 사 입겠다는 꿈이 있어야 새 옷을 사게 되지 꿈이 없으면 좋은 새 옷을 사 입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청년, 처녀는 좋은 신랑감, 좋은 신붓감을 맞이하겠다는 꿈이 있어야 사람들을 택할 수 있지 꿈이 없으면 택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꿈이 없으면 열정도 없습니다. 꿈이 있어야 마음에 뜨거운 열정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50년간을 교회 성장을 위해서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정신없이 뛰었는데 내가 지금 돌아보면 왜 그렇게 정신없이 뛰었는가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꿈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은 꿈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속에 열정이 생긴 것입니다. 뜨거운 열정이 생겨서 이 일을 이루겠다고 밤낮 주야로 뛸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꿈이 없으면 그냥 늘 낮잠이나 자고 배가 부르면 배나 툭툭 두드리고 산천구경이나 하고 다니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꿈이 없으면 모든 것을 거기에 집중하고 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꿈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뭘 꿈이 있습니까? 꿈이 있어야 믿지 꿈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데 뭘 믿어요? 그러므로 확실한 꿈이 있으면 믿음도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꿈이 있어야 믿음의 담대함 모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믿습니다 하고 나가는 것은 앞에 나갈 꿈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꿈이 없으면 그런 일을 못합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꿈이 있어야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자란 여러분은 집 담 넘어가는 호박나무잎이 생각나지요? 호박꽃이 피고 호박이 담에 줄줄 달리는 것을 볼 것입니다. 호박꽃이 피면 호박벌레가 와서 꿀을 따는 것입니다. 이 호박벌레는 과학자들이 말하기를 절대 못 날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몸은 2.5센티인데 날개는 너무 가늘고 너무 작아서 과학적으로는 공중에 뜰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호박벌레는 하루에 4백리나 날라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날수 있느냐. 호박벌레는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기가 못 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과학적으로 연구해보니 몸무게에 비해서 날개는 도저히 자기를 띠우지 못한다고 알았으면 낙심하고 날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과학을 모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날개 있으니까 난다고 나니까 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꿈을 갖고 믿음을 갖고 나가면 할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실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범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범이 무서운 줄 모르고 달라 들어서 범을 잡아요. 범이 무서운줄 알면 아예 범이 오면 오그라들어서 싸움도 못해요. 다윗이 골리앗을 대적해서 나간 것을 보십시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사울 하에서 골리앗이라면 두려워서 다 숨었습니다. 왜냐하면 골리앗은 너무나 키가 장대하고 힘이 센지라 대적할 수 없다고 미리 겁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조그만 초립동 소년이 “나는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양을 칠 때 곰이 오면 곰과 싸워서 곰을 물리치고 사자가 와서 짐승을 빼앗아 가면 사자와 싸워서 죽이기도 했는데 구 할례 없는 이방인이 무엇이 겁나냐?” 겁이 없기 때문에 골리앗을 향해서 나간 것입니다. 골리앗이 아무리 찾아봐도 없습니다. “누구냐?” “여기 있다.” 여기 보니까 조그마한 소년입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얕잡아 봤던 것입니다. “너같이 조그마한 소년이 나를 대적해 오냐? 내가 너를 죽여서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으로 만들겠다.” 그때 다윗은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아오려니와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왕의 왕 야훼의 이름으로 나온다. 오늘 내가 너를 죽여 공중의 새의 밥과 땅의 짐승의 밥과 나누겠다. 전쟁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야훼에게 있다.” 그러면서 물맷돌을 가지고 나갔는데 골리앗이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그 얼굴을 가지고 날뛰라고 얼굴을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물맷돌이 콱 박혀서 죽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병사들처럼 골리앗과 못 싸운다고 미리 겁을 집어 먹었으면 과학적으로 계산해서 못한다고 생각했으면 절대로 골리앗을 못 죽였을 것입니다. 자기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고 나갔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해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 되나 하나님의 능으로 영으로 될 수 있다. 믿음으로써 도전하기 때문에 불가능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들에 명하여 저 바다에 던져도 될 것이요 하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와 같이 마음에 담대함이 굉장히 필요한 것입니다. 꿈과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이 같이해서 역사하지 꿈도 없고 믿음도 없고 항상 불안과 공포와 좌절에 벌벌 떠는 사람하고는 주님이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는 가문이 좋지 않습니다.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습니다. 나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가문에 의지하지 않고 과거의 교육에 의지하지 않고 현재 여러분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로 태어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떡으로 살아도 우리는 말씀을 삽니다. 말씀이 할 수 있다면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된다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성공한다면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날 호박벌레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날개를 보고 겁을 먹어서 아예 날려고 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지 말고 못난 것을 인간적으로 보면 것 알지만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나의 조그마한 능력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고 담대하게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제가 1964년 도에 세계 선교를 나갈 때 미국 사람이나 구라파 사람이 저를 만나고 여러 번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 한국은 피선교국으로써 선교사들이 와서 선교를 전한 나라인데 거기에서 구라파에 와서 선교를 하려고 하냐? 너 건방지지 않느냐? 아직까지 한국은 외국에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가 안 되었다.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라!” 그런 말을 나보고 많이 했습니다. 그럴 때 내가 상당히 마음이 위축되고 “정말인가 보다. 나 같은 사람은 세계적으로 나가서 선교를 못할까보다.” 그러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놈아! 무슨 소리 하는 거냐? 그 사람들이 너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쓴다. 너는 후진국 한국의 종이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주의 종이다. 나와 같이 하므로 나를 바라보고 강하고 담대하라.” 그래서 언제나 배짱을 내놓고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못한다는 것에 예수 이름으로 뛰어 들어서 하고 난 다음 이제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지구를 백 바퀴나 돌고 도시의 집회를 4백 도시에서 집회를 하고 수많은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고 수많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는 옛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요 새사람이기 때문에 말씀의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이요, 꿈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하면 도저히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습니다. 내가 바라고 소원하는 미래가 원한다면 지금 그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행동 하십시오. 꿈이 없으면 성취도 없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전진할 때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있는 그 사람은 정말로 의와 평강과 희락을 가지며 참된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면 모든 일이 다 합동하여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들에게 종으로 팔릴 때도 주님이 같이 계셨고 보디발의 집 종으로 10년 있을 때도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종들에서도 1등 종이 되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방에 들어갔을 때도 감옥에도 주님이 같이 하셔서 간수가 요셉만 믿고 열쇠를 맡겼을 정도로 우수해졌고, 나중에는 애굽의 바로왕의 꿈을 해석하고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애굽의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국무총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셨기 때문에.. 요셉이 잘났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성공합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신 가정은 축복받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있는 교회는 부흥합니다. 하나님이 같이 있는 나라는 부흥 발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그래도 지금 1,200만 성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이 나라가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많음에도 불구하고 잘 되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나면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삶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도록 주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되고 말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말씀으로 충만해야 되고 꿈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여러분은 어느 곳에 가나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꿈을 가지고 그런 자화상을 가지고 승리로운 삶을 살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개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세상에 살아갈 동안에 주님이 없으면 자기 제일주의로 살고 세상을 따라 살고 세상의 풍습을 따라 살고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욕심을 따라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 새사람이 되었으므로 우리 삶속에 앉으나 서나 주님 제일주의로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따라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우리는 이 세상과 죄악을 등지고 거룩한 삶을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볼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거룩하게 살게 도와 주시옵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우리 속에 충만하여 말씀으로 살고 말씀으로 가르치고 교훈하며 살게 도와 주시옵시고 마음속에 내일을 향한 꿈과 믿음이 불타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고 앞으로도 우리와 같이 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 나타난 삶을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