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라
아모 9,11-15; 마태 9,14-17 /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2026.7.4.
오늘 독서인 아모스 예언서 9장은 아모스가 받은 예언 메시지의 결론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은 메우고, 허물어진 곳은 일으켜서 다시 세우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 넘치리라.”(아모 9,13)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자신들은 단식도 자주 하며 경건한 생활을 하는데 비해 그분의 제자들은 단식도 하지 않고 먹고 마시며 방탕하게 지낸다고 비판하는 가운데, 바리사이들처럼 경건하게 살아가던 요한의 제자들까지 와서 그 연유를 묻자,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오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이렇게 일단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영위하는 생활양식을 변호하신 다음,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새로운 생활양식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ㄷ) 이렇게 독서와 복음에서 모두 공통 비유 언어로 포도주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헌 포도주가 아니라 새 포도주입니다.
독서와 복음 모두에서, 새 포도주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뜻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셔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가르치시리라는 메시아 대망 사상이 두 말씀에 모두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던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선포 과정에서 가난한 이들이 육체적인 질병이나 장애로부터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일들이 생겨났고, 이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기쁨을 나누고자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가 종종 베풀어졌습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로 비유되는 새로운 생활양식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여기서 가난한 이들이 겪고 있던 지옥같은 고통의 현실이라든지,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이 체험하고 느끼게 된 하느님이라든지 또는 그들이 새로이 발견한 삶의 희망과 행복 등에 대해서는 보지 못한 채, 그저 먹고 마시는 겉모양만을 보고 율법주의적 경건함의 낡은 잣대로 비난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아모스와 예수님 사이의 시대적 편차에도 불구하고 아모스의 예언자적 혜안은 바리사이들의 이 낡은 사고 방식과 행동양식에 적중하는 바가 있습니다. 아모스는 시골 출신이기는 하지만, 교양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조국과 주변 민족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사건들, 그러니까 당시로서 시대의 징표들을 숙고할 줄 알던 지식인이자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를 파괴시키게 될 아시리아의 위협을 예감하고는 간결한 어조로 이에 대비해야 함을 역설하였습니다. 그 대비란, 하느님의 최고선을 명실상부하게 떠받드는 경신례를 거행할 것과 또 이 경신례의 정신에 따라서 힘 없고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공동선을 증진시켜야 함을 역설하였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최고선을 경신례로 드러내는 일과, 또 경신례를 거행하면서 그에 담긴 사회의 공동선을 실제로 구현하는 일은 종교와 사회의 기본 질서입니다. 우리가 부활 시기 내내 사도행전 독서에서 들었던 바, 초대교회에서 로마제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선교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의 실상은 바로 이 기본 질서를 ‘예수 발현’의 체험으로 깨닫고 순교 정신으로 철저하게 지켰던 덕분입니다. 이 체험과 현상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공동체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증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1코린 15,6)
그런데 신앙이 공인되고 국교화되고 난 이후에, 거꾸로 교회가 로마화되면서 이 기본 질서는 교회 역사의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부르며 조롱한 역사는 무려 천8백 년 동안이나 지속되다가, - 이 오랜 기간 동안에는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 극소수의 성인 성녀들에 의해서만 간헐적으로 수면 위로 분출했었을 뿐입니다. - 산업혁명 이후 가난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일깨운 첫 사회회칙 ‘새로운 사태’가 레오 13세 교황에 의해 반포되면서 가까스로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모인 교부들에 의해서 전면적으로 교회가 쇄신되어야 할 과제로 부각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공의회가 폐막된 지 반세기가 지나가는 오늘날에도 신자들이 경신례를 거행하면서 실생활에서는 하느님의 최고선을 잊어버리는 일이 얼마나 흔한지 모릅니다. 또한 그에 따라서 사회의 공동선이 가려지는 일은 또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이 답답한 사태를 극복하여 보편 및 한국의 초대교회의 활력을 되찾도록 일깨워준 분은 프란치스코 교황이었습니다.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미 성지에서 열린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가한 청년들 및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에서나, 명동 성당에서 가진 종교 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서나 공통적으로 한국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견지해야 할 진리와 공동선으로 나타나야 할 그 실천에 대해서 상기시켰습니다.
- 아시아 주교들에게는, 다른 생각과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대화를 강조하였고,
- 아시아 청년들에게는, 가난한 이들, 외로운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는 가운데 하느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하나인 교회를 일으켜 세우라고 당부하였습니다.
- 한국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진리와 공동선을 향하는 길에 함께 가는 여정에 대하여 상기시키며 감사하였습니다.
-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를 위한 미사에서는, 모든 한국인이 같은 형제자매이고 한 가정의 구성원들이며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더욱더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고 당부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한국인으로서, 이제 의심과 대립과 경쟁의 사고방식을 확고히 거부하고, 그 대신에 복음의 가르침과 한민족의 고귀한 전통 가치에 입각한 문화를 형성해 나가기를 요청한 것도 특기할만 합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비바람이 들이닥치면 무너지기 마련이지만,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비바람이 들이닥칠 때 오히려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기본적으로는 분명히 그렇습니다. 일단 분단 70년을 넘어가는 민족 고난의 이 기막힌 역사적 위기 속에서도 그 위상을 나날이 높이고 있는 한국인들의 성취가 그러하고, 이에 걸맞게 복음화 과업을 해 내고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성취가 또한 그러합니다. 이런 성취에 대해서 아모스가 예언했던 바 그날이 오고 있는 징표라 볼 수 있지만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서 들려오는 하느님 말씀에 비추어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그래서 쓴 소리 같이 들리지만 사실은 애정어린 교황의 충고를 귀담아듣고,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새 포도주라는 복음적 생활양식으로 새 부대라는 새로운 사회를 이룩해야 할 소명을 일깨워야 할 때입니다. 보라, 그날은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