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0년 넘게 청주 성당을 내 집처럼 생각하며 열심히 일 해 왔는데 도둑놈이라니 !
세상에 어찌 이럴수가 있는가?
아무 증거도 없이 신부가 나를 도둑누명을 씌우다니 !
나는 무작정 청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 미아리 고개에는 아파트가 있는데
거기에는 나의 고종사촌 윤문규 남동생이 고려대 경제학과를 다니고 있었고
여동생 윤선규가 서울대 미술학과를 다니는 수재들입니다.
처음에는 나를 반가워 하다가도 내가 오래 붙어 있자 모두 나를 싫어합니다.
나는 어디에서 직장을 하나 얻고 싶은데 배운것도 없고 기술도 없는데다가 다리를 절룩거리는 병신이기에 그 누구도 받아주지 않습니다.
거기에 말 까지 더듬으니 누가 나같은 녀석을 써 줄것인가?
어느날 고종사촌 동생들이 다른지역의 아파트를 얻어가지고 이사가면서
"형은 어디로 가지?"
능청스럽게 묻습니다.
고모부는 충주에서 시자문위원이고 사업을 하는 부자 입니다.
"내 걱정은 하지말고 가서 잘 살거라"
하자 그들은 돌아갔습니다.
나는 또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편 미아리고게에는 나의 이모님이 아직 장가 가지못한 두 아들을 데리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또 염체불구하고 이모님네 집으로 갔습니다.
그곳 식구들도 처음에는 나를 반기더니 내가 게속 붙어 있자 나를 싫어합니다.
나는 또 그들이 집을 팔고 다른곳으로 이사갈지 몰라 어느날 내가 그 집을 나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노숙자가 되었는데 1960년 후반이기에 아마 내가 우리나라 최초의 노숙자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나는 지하도에서 상자를 하나 깔고 잠을 자거나 층게에서 무릎에 머리를 묻고 잠을 자는데 심야에 경찰이 검문을 하고 나를 파출소로 데려가서 거기 걸상위에서 자게 합니다.
날이 밝으면 나느 밖으로 나와 거리를 헤맵니다.
(계속)
첫댓글 차마 눈물나고 속상하고 합니다.
그때는 나라전채가 어려웠습니다만...
부디 행운을 아니 주의은총을 빕니다.
가연님의 기도는 시공을 초월한 기도라서 감사드립니다. _()_
그 시절엔 한입 덜려고 자기 자녀도 남의집에 보낼때니 크게 노여운일은 아니었지요.
근데 정말 기댈곳이 없군요. 티없이 살려 해도 세상이 가만두지 않는거 같어요.
사실 어려서부터 구박입니다.
부모없고 가진것 없으면 그런가 봅니다.
뭔 소설인가요 자작인가요
어서오세요 낚시님
제글을 처음 보시나봐요. 제가 82년을 살아오면서 느낀 역사랍니다.
그시절 시골에서도 보리고개 있는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였는데
도시에선 더더욱 먹고 살기라 어려웠겠지요
노숙자 집도 없는 또다를 고생의 시작이네요
너무 불쌍하네요 임마누엘 ~~
연지님 어서오세요
제가 못나서 그런걸 어쩝니까?
하하하 감사와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