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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플레어는 여러 모로 베키 린치와 대척점에 있는 선수입니다. 우선 전설 릭 플레어의 딸이라는 점에서 일단 인지도를 먹고 업계에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압도적인 피지컬과 훌륭한 기술로 항상 챔피언 또는 챔피언 컨텐더의 위치에 서온 여성 디비전의 대표 선수들 중 하나입니다. 한마디로 금수저라고 볼 수 있지요. 사실 이번 챔피언쉽은 베키가 카멜라라는 다른 선수를 상대로 오랜만에 어렵게 따낸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샬럿이 끼어들게 되어 경기가 1:1이 아닌 트리플 쓰렛 매치 (1:1:1)로 치러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스맥다운 카메라는 이 결정을 지켜보는 베키의 좋지 않은 표정을 보여 줍니다. 둘의 관계가 나빴던 것이 아닙니다. 각본 상으로는 물론 실제로도 절친한 사이였지요. 하지만 베키의 입장에서는 자기를 주눅들게 할만한 커리어를 이미 누리고 있던 샬럿이 자신이 어렵사리 얻은 기회를 빼았으려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것이었고, 팬들이 보는 시각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불쌍한 베키, 이번에도 졌잘싸로 승리와 영광은 샬럿에게 양보하겠구나... WWE의 각본진은 샬럿을 승자로 정하고 이 참에 베키를 악역으로 전환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프로 레슬링 용어로 선역을 face라고 하고, 악역을 heel이라고 합니다. 경기 전까지만 해도 베키와 샬럿 둘 다 face였습니다. 다만 샬럿이 확실히 top face였기 때문에 베키의 heel turn이 논리적으로는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베키 커리어 최대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각본대로 샬럿이 매치에서 승리하여 챔피언쉽을 따냈습니다. 그리고 대인배인양 친구인 위로해 주려는 샬럿에게 베키는 cheap shot으로 응답합니다. 이때 문자 그대로 폭발이 있었습니다! 관객들이 베키의 공격에 실로 열화와 같은 환호를 보내주었던 것이지요. 베키! 베키! chant는 물론이요, 체어 샷을 맞는 샬럿에게 "You deserve it!"이 미국인들 특유의 4박자에 딱딱 맞춰 울려 퍼집니다!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순둥이같던 흙수저 베키가 예전이랑 똑같이 순둥이처럼 위로나 받는 그런 모습 대신 분노에 불타올라 금수저 절친을 배신하고 두드려 패버리는 모습이 그렇게 사이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ㅋㅋ
역시 프로 레슬링 용어로 선역도 아니고 악역도 아닌 모호한 역할을 tweener라고 합니다. 가끔은 각본 상의 tweener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 생명력이 오래 가는 캐릭터는 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악역으로 행동하는데 팬들이 환호하는, 그래서 각본진을 한동안 당혹스럽게 만드는 자생적인 tweener야말로 진짜배기입니다. 그리고 프로 레슬링의 역사를 가만히 보면 그런 선수는 수퍼 스타를 뛰어넘는 메가 스타로 발돋움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프로 레슬링 역대 최고의 스타 중 하나인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입니다. 관객들의 성원이 폭발한 베키의 이번 섬머슬램을 봤을 때 제게는 스티브 오스틴이 드디어 팬들의 마음을 얻었던 1997년 레슬매니아 13에서 치른 브렛 "히트맨" 하트와의 명대결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그때에도 어디까지나 선역은 히트맨, 오스틴은 악역이었습니다만, 피투성이가 된 채로 브렛 하트의 필살기인 "샵 슈터"에 걸리고도 끝내 항복하는 대신 그냥 기절하는 걸 선택한 오스틴에게 팬들은 매료가 되었었지요. 또 다른 역대 최고 중 하나인 더 락 역시 대표적인 tweener입니다.
이후 베키는 매주 열리는 스맥다운 쇼마다 관객들의 커다란 pop(환호)을 이끌어내며 거침없는 행보를 계속합니다. 게다가 기믹 역시 스톤콜드 식의 bad ass 기믹, 즉 거만한 "개쌈마이웨이"에 막싸움 캐릭터를 완전히 장착하는데 성공합니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강한 아일랜드식 영어 억양 역시 왜 진작 선역을 버리지 않았을까가 아쉬울 정도로 지금의 베키에게는 너무나 잘 맞는 옷이었습니다. 9월에 열린 PPV "헬 인어 셀"에서는 드디어 샬럿으로부터 스맥다운 여성 챔피언쉽을 빼았아 냈습니다. 이후에도 대립은 이어져 가장 최근인 10월 28일에 열린 사상 최초의 여성 선수만의 PPV "에볼루션"에서는 샬럿과 last woman standing match를 벌입니다. (프로 레슬링은 항복 또는 쓰리 카운트로 경기가 끝나지만 last man/woman standing match는 상대가 10 카운트 동안 일어나지 못하면 이기는 룰입니다.) 여기서 저명한 레슬링 평론가인 데이브 멜처로부터 4.75점이라는 평점을 받는 명경기를 이끌어내며 승리도 가져갑니다. (이 평점은 WWE 여성 디비전 역대 최고 평점이자 2018년 남, 녀 통틀어 WWE 메인 로스터 싱글 매치 최고 평점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연히 IB Sports에서 방송하는 RAW 라이브를 TV로 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하루를 쉬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이 글도 쓰는 잉여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입니다 ^^;)
현재 스맥다운의 top face는 (사실은 tweener이지만) 베키이고, RAW의 top face는 레슬링을 안 보셔도 잘 알고 계신 바로 그 론다 로우지입니다. 그리고 그 둘의 챔피언 vs. 챔피언 매치가 다음 주에 있을 PPV "서바이버 시리즈"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서바이버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RAW와 스맥다운의 로스터가 4:4 또는 5:5로 팀전을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시리즈 전 주의 RAW나 스맥다운에서는 빌드 업을 위해 상대 쇼의 로스터가 난입하여 공격을 하는 장면 또한 전통적으로 연출됩니다. 오늘도 그랬지요. 그리고 드디어 베키와 론다가 충돌했습니다.
저는 참 궁금했습니다. 베키가 지금 제 아무리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지만 론다 로우지는... 론다 로우지는 프로 레슬링은 한참 넘어선 전체 미국 스포츠 계의 빅 스타입니다. WWE에 영입된 이래 유래없는 푸쉬를 받고 있을 뿐더러, 격투가로서의 실력은 물론이고 외모와 마이크 웍을 포함한 스타성도 고르게 갖추고 있습니다. 게다가 예전의 인성 논란과는 달리 WWE에 들어온 이후로는 매우 겸손한 자세로 진심어린 노력을 다하다 보니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었거든요. 그런 둘이 붙으면 관객들은 누굴 더 응원할까?... 실전 격투기가 아닌 프로 레슬링에서 진정한 승부는 누가 더 관객의 환호를 이끌어내고 짜릿하게 만드냐로 결정됩니다.
시작은 링 위에서 RAW 소속 여성 로스터들이 서바이버 시리즈를 위한 팀 빌딩(?)을 하는 걸로 시작했습니다. 그때 타이탄트론(경기장 내의 대형 스크린)에 락커룸의 모습이 나옵니다. 베키가 론다를 쓰러뜨린 상태에서 팔을 꺾고 있네요! (사실 암바야말로 유도 전공자인 론다의 필살기인데 그걸 베키가 하고 있다니!) 잠시 후 베키의 테마가 울려 퍼지며 열 명 정도의 적군들이 살기 등등하게 기다리고 있는 링 쪽으로 베키 혼자 거만하게 걸어 나옵니다. 저는 이미 베키의 팬이 된 상태이지만 정말 여자 선수가 이 정도까지 멋진(electrofying) 장면을 연출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관중들 역시 이미 광분하고 있었고, IB 스포츠의 해설진들도 베키를 장판파의 장비에 비유하며 흥분합니다.
이어서 베키와 함께 관중석에 숨어(?)있던 스맥다운 소속 선수들이 함께 난입하여 링 위에서는 그야말로 일대 난전이 벌어집니다. 이 와중에 베키는 안면 쪽에 불의의 부상을 입습니다. RAW 선수들이 저항을 해 보지만 기습을 한 스맥다운 선수들이 우위를 점하게 되던 순간, 론다 로우지가 베키에게 공격당한 왼팔을 부여잡으며 동료들을 도우러 링으로 달려옵니다. 이미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베키가 이를 보더니 잠시 링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 나갑니다. 하지만 곧 철제 의자를 하나 들고 다시 들어와 온전치 못한 몸 상태로 분전하고 있던 론다 로우지를 통렬히 공격합니다. 체어샷 한번! 두번! 이때 경기장을 가득 메우는 함성 "One more time! One more time!" 마지막 체어 샷을 날리는 베키! 이제 확실해졌습니다. 베키 린치가 론다 로우지마저 넘어 선 현재 WWE의 top face라는 것이.
위 사진은 상황이 종료된 후 관중석을 통해 철수하는 베키가 링 위에 남은 론다를 멀리 내려다 보며 인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흔히 TV를 보며 "예능신이 도왔다"라는 표현을 쓰곤 하지요. 그런데 베키 역시 프로 레슬링의 신이 도운 것 같습니다. 출혈이 꽤 많아 좀 끔찍하게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 피로 인해 베키의 bad ass, 걸 크러쉬 기믹이 완성된 것 같습니다. 정말 폭풍 간지... 유튜브 등의 댓글 역시 베키에 대한 찬양 일색입니다.
위 사진은 베키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것입니다. 중세 아일랜드에서는 전장에 나가기 전에 얼굴에 무섭게 페인트를 했다고 하는데 이를 센스있게 활용한 것이지요. 베키는 배드 애스 기믹을 단지 링이나 마이크 웍 뿐만 아니라 SNS 상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베키를 보며 여성판 스톤 콜드, 여성판 인민의 챔피언(people's champion)을 떠 올리는 것이 저 혼자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긴 글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진짜 소름돋았습니다. 오늘 마지막 저 세그먼트는 최고였어요...
좋은 글 너무 감사합니다. 흙키야 사랑한다!
흙수저의 성공 스토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도 모르지만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런 피는 진짜인가요?
가끔 작은 면도칼을 가지고 일부러 피를 내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쪽 용어로 블러드 잡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게 아니라 실제 부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이 부상 덕에(?) 전율 넘치는 장면을 연출하긴 했지만, 만일 부상이 심하다면 다음 론다와의 대전은 불확실할지도 모르겠네요.
@모레 일부러요? 야 그건 무섭네요. 그냥 분장으로 하지...종종 글 오려주세요.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진짜 천상악역이 맞았던 선수였어요ㄷㄷㄷ
별무관심인 레슬링도 모레님의 글을보니 재미있네요!
베키의 SNS는 불필요한 논란을 만들지 않는 깔끔함이 돋보이네요.
님처럼 레슬링은 잘 안 보시는, 그냥 농구팬 분들께 현재 베키가 불러온 임팩트를 간단히 설명드린다면 제이미 린의 뉴욕 린새니티 시절을 생각해 보시면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 간만에 wwe 글 잘 봤습니다~
근데 론다 로우지는 ufc를 한동안
거의 씹어먹다 시피 하다 wwe에
말 그대로 순항한 느낌인데
로우디 파이퍼 와 무슨 연관이
있나요?
빨간색 치마를 입고 티셔츠도 착용
하고 나오던데... 단순한
기믹인가요?
로우지란 이름이 라우디를 연상시키는것도 있고 UFC 시절부터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선수가 라우디 파이퍼라고 라우디 로우지라 불러달라고 했었습니다.
별명 사용을 위해 허락도 받았고 실제로 만나기도 했을 정도로 파이퍼를 좋아하는듯 하네요.
요즘 여성부가 더 재미있죠 이유는 빈스 악덕사장이 개입을 안하거든요 남성부는...ㅜ ㅜ
빈스 덕분일지도;;;;; 레슬링 용어로 단체를 대표하는 압도적인 top face를 아이콘이라고 합니다. 역대 아이콘으로 꼽히는 인물은 몇 안됩니다. 이견은 있을 수 있겠지만 대체로 헐크 호건 - 브렛 하트 / 숀 마이클 - 스톤 콜드 스티브 오스틴 - 더 락 - 존 시나 라인입니다. 아직 베키가 아이콘이라고 보기엔 이르지만 단기 임팩트로만 보면 저 여섯에 그닥 밀리지 않는 것 같네요. 그 많은 남성 선수들을 제치고 말이지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팬들이 가히 혁명적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아름답다
피투성이 얼굴로 씨익 웃는 모습에 한 해외 팬의 반응: “이 상태의 베키와 데이트할 수 있다.” ㅋㅋㅋ
살럿도 악역일때가 더 좋았는데..
캐릭터는 확실히 악역이 더 돋보이네요.
베키와 프로레슬링의 팬이기도 하지만, 워낙 글을 맛깔나게 쓰셔서 엄청 흥분되고 기분좋게 잘 읽었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ㅎ
감사합니다. 저도 그 옛날 애터튜드 시절 이후 이런 흥분과 재미는 처음입니다.
요즘 WWE 열심히 시청중인데 에볼루션도 그렇고 최근WWE는 여성레슬러들 경기가 훨씬 재밌다고 느껴집니다. 스토리라인도 남성선수들보다 훨씬 흥미진진하고, 특히 베키린치의 존재감 하나로 WWE의 또다른 전성기가 올꺼라 생각됩니다!!
생각해보니 RAW나 스맥다운과 같은 쇼의 마무리를 여성 선수들로 마무리한 것도 거의 전례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해외 팬들 중 서바이버 시리즈의 메인 이벤트가 베키 대 론다의 경기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의견들도 상당수 있는 것 같네요. 혹시라도 그렇게 되면 그 역시 역사적인 이벤트가 될 겁니다.
아...베키..이번 저 출혈 부상때문에 서바이버 시리즈에 출전할수 없게 되었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화가날 정도로 안타깝네요..ㅠㅠㅠ
거구의 나이아가 범인(?)인데 이 선수가 부상 유발로 원래 악명이 높네요. 하아... 그나저나 너무 아쉽습니다. 부디 베키의 모멘텀이 유지되길 바랄 뿐입니다.
출혈도 출혈인데 뇌진탕 진단받았네요..
WWE가 뇌진탕에 대해서 좀 빡센편이죠.. 아쉽네요.
자연스레 샬롯한테 넘겼네요 ㅎ
다니엘브라이언도 턴힐하는모양새인데... 베키린치랑은 느낌이 다르네요.ㅎㅎㅎ
둘다 흙수저(?) 출신 갑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