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 신성한 기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구약이 전하는 대로 우리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이 다른 신을 경배하는 걸 참지 못하는, 정말로 질투하는 신이라서(탈출 34,14) 그런 이들을 모두 죽이는 게 아니다. 하느님 품 또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면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 스스로 ‘질투하는 하느님’이라고까지 소개하시는 것에서 당신 계명을 지켜야만 살 수 있다고 호소하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죽하면 당신의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겠는가?
이제 내일이면 지난 약 4개월의 혼란 불안 답답함이 일단락된다. 그동안 ‘법 기술자’들의 현란한 솜씨와 음모와 상상을 사실로 둔갑시키는 기술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를 정의라고 외치는 똑똑한 사람들의 괴상한 행동들을 거의 매일 봐야 했다. 급기야 법을 지키고, 재판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고 외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식이 구호가 되어버렸고,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뒤집어버리고 내 편이 아니면 전부 악마로 규정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면 될 것을, 그게 그렇게 어려웠나?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판단을 4개월 동안이나 생각하고 외쳐야 할 일인가? 왜 그랬을까? 그들 안에는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고사하고 진실을 찾을 마음도 그것과 마주할 용기도 없기 때문일 거다. 그 대신 그들 마음에 자기 이익만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구세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오히려 그분을 고발했다. 매주 단식을 두 번이나 할 정도로 철저히 율법을 지키고, 매일 율법을 외우고 예언서를 연구하던 그 똑똑한 사람들이 왜 그랬을까? 예수님 말씀대로 그들 마음에 하느님 말씀이 없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요한 5,38)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요한 5,42) 그래서 진리는 철부지 같은 이들의 것이 되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하느님은 결코 어려운 분이 아니다. 믿지 않으려는 이들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아주 멀리 있고 꼭꼭 숨어 있는 존재다. 반면에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내 주위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다.
‘법 기술자들’과 ‘상상을 사실로 둔갑시키는 기술을 가진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들이 악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들 안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 진리를 찾는 마음이 없어서 저리된 거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나도 그럴 수 있었음을 인정하고 감사한다. 그들에게 현란한 법 기술과 둔갑술이 있다면 나에게는 단순한 두 가지 기술이 있다. 그것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참된 것을 알아보고,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신적인 기술이다.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는 것보다 더 친근하게 수시로 예수님과 대화하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을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나는 인공지능보다 스마트하지 않고, 바리사이들처럼 엄격하지도 못하지만 이 두 가지 기술을 계속 연마하면 복잡한 세상사를 단순하게 보고,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도 다시 돌아오게 해주신다고 믿는다.
예수님, 주님은 오늘도 어제처럼 일하시고 내일도 일하신다고 믿습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게 보이지 않는다고 아우성치는 이들에게는, 그러니까 믿는 거라고 하겠습니다. 제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주님을 더 사랑하게 은총을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와 눈을 맞추며 평화롭게 아드님을 따르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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