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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문화재 김해자 누비장인 | ||||||
[2007-11-28 14:33] 추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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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신 문화가 담긴 누비옷을 세계에 알리겠다"
중요무형문화재 107호 누비장인 김해자 씨의 누비 전시회가 베이징 주중한국문화원에서 열렸다. 한국 전통 누비 분야의 독보적인 인물인 김해자 씨의 누비 전시회 '세상을 누비다'가 베이징에서 개최됨에 따라 한국 전통 누비 문화의 우수성과 작품성을 중국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마련됐다.
주중한국문화원 지하 1층 강당에서 열린 누비 전시회 개막식에서 김해자 씨가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옷을 짓다보면 전세계를 하나로 엮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국 정신 문화가 담긴 누비옷을 세계가 알았으면 한다"며 전시회 개막 소감을 말했다.
주중한국문화원 박영대 원장은 "김해자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본 순간 한국인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느꼈다. 저고리 하나를 만드는데도 꼬박 석달이 걸리는 누비 작업은 강한 정신력과 창의성이 합쳐져야만 완성시킬 수 있는 분야로 누비의 이러한 우수성과 예술성을 세계에 알려야 겠다고 생각했다"며 전시회 개최 취지를 밝혔다. 이번 베이징 전시회에 앞서 지난주 상하이에서 열린 '상하이 실크 박람회'에서 한국 전통 누비옷을 선보였는데, 상하이 시장 및 여러 고위 정부 관료들, 그리고 상하이 시민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전시회를 관람한 베이징 시민들의 반응도 뜨겁다. 지하 1층 전시장에서 김해자 씨의 작품 설명을 듣던 중국인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국 누비옷의 정교함과 섬세함에 매료됐다. 한 관람객은 즉석에서 천만원 상당의 액주름포 저고리 구매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김해자 누비장인은 2002년 일본 NHK 초대전, 2003년 요코하마 퀼트 박람회, 2005년 프랑스 프레타포르테 작품 전시회를 가지는 등 다양한 해외 활동을 해왔다.
한편, 베이징 전시회 개막행사에서는 김해자 선생의 오랜 벗인 한국 무용가 홍성림 선생이 함께 베이징을 방문, 개막식에서 태평무, 살풀이 춤을 췄고, 아울러 권태종씨의 가야금 병창공연도 함께 펼쳐 전시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옷을 짓는다는 김해자씨의 이번 베이징 전시회는 주중한국문화원이 주최하고 주중한국문화원, 누비 문화원 주관, 문화재청 후원이 후원한다. 11월 27일부터 12월 1일까지 5일 동안 주중한국문화원 지하 1층 전시장에서 열리며, 아울러 김해자 선생이 직접 진행하는 누비 특강도 진행된다. 특히 이번 특강에는 김해자 선생의 제자들도 함께 참여해 120여명의 한국 누비 애호가들에게 한국 누비의 진수를 선보인다. 특강은 11월 28일 부터 30일까지 3일동안 주중한국문화원 1번 강의실에서 열리며 참석자 전원에게 한국 누비목도리를 무료로 나눠주고 직접 누비 작품을 만들어 보는 시간도 가진다. [온바오 정은승] | ||||||
"한국에 없는 중국뉴스, 온바오뉴스" -온라인 중국정보, 온바오(on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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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장 김해자 씨
‘누비전시관’ 열다
◇누비 작업 중인 김해자 씨.
중요무형문화재 제107호 누비장 김해자씨가 지난달 경복궁 앞에 전통누비전시관을 열었다.
“우리 전통 누비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넓히고, 누비의 전통을 이을 제자 양성”이 김씨가 전시관을 연 이유다.
현재 김씨의 문하에서 우리 전통 누비의 맥을 잇고 있는 수제자는 5명. “누비 작업 자체가 워낙 고된 노동을 요구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어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리 누비의 전통을 살리자는 데 뜻을 같이하는 이들의 도움으로 전시관을 열게 됐다 한다.
지하 1층 지상 1층 총 18평 규모의 아담한 누비전시관에는 김씨의 누비 작품과 쪽, 홍화 염색작품 50여점이 전시 중이다. 김씨는 이곳에서 매월 둘째 목, 금요일에 누비강좌도 열 계획이다. 또한 이에 앞서 지난 5월 경주에 문을 연 누비 공방에서도 작업과 제자양성을 계속해 나가게 된다.
지난 27일, "김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107호 누비장) 누비전" 개막식이 베이징 주중한국문화원에서 개최되었다. 주중한국문화원이 주최하고 주중한국문화원, 누비문화원이 주관하며, 문화재청이 후원하는 이번 5일간 누비전시에는 중요무형문화재 107호 누비장인 김해자 선생님의 작품을 만나 볼 수 있으며, 누비체험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누비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의복 형태중 하나이다. 천 두장은 포개 안팎을 만들고 그 사이에 솜을 넣어 죽죽 줄이 지게 박는 누비질로 만든 누비옷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방한복이기도 하다. 소박한 모양이지만 따뜻함을 주기엔 부족함이 없었던 이 누비작업은 어느 틈엔가 소리 소문 없이 우리 주위에서 사라져버린 문화이다. 한줄로 이어박아야 하는 홈질이 끊임없이 계속돼야 하는 단순 작업이지만 수행에 가까운 오랜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고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촘촘히 박아내야 하는 지루한 작업의 시간은 급격한 산업화속에서 재봉들을 버리고 한땀한땀 정성들여 놓아야 하는 누비질을 할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사라져버린 누비가 세상에 다시 나왔다. 김해자 선생님의 손길로부터……그리고 세상을 누비려 한다.
개막식에서 누비에 대해 설명하는 김해자 선생님 "손누비는 기술이 아닙니다. 너무도 단순한 바느질의 연속입니다. 고요히 앉아 바느질을 하다보면 온갖 번뇌가 다 생겨납니다. 번뇌가 일어나면 내려놓는 과정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 끈기와 인욕을 배우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손누비의 참 정신일 것입니다." 김해자 선생님의 차분하지만 단호한 설명이다. 궁중 침모를 스승으로 두셨던 분으로부터 누비를 배우게 되고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그러면서 누비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는 누비장 김해자, 그녀의 누비인생 30년,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문명에 눌려 사라졌던 누비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쳐온 김해자 선생의 누비 사랑, 누비는 단순한 바느질이 아닌 하나의 철학이자 정신세계라고 말한다.
누비전 개막식에 참가한 지명인사와 김해자 선생의 제자들
"김해자 누비전" 베이징에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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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한벌 누비면 道가 열리는 것을…"
"순일하게 똑 같은 바느질을 해야 하는 누비는 단순함 가운데 도가있다는 철학을 일러준다"고 누비장 김해자씨는 말한다. /최흥수기자 [빛나는 손끝 - 한국의 장인들] <2> 손누비 김해자 몽골서 유래 보온형 바느질 30년 익혀 일반옷에 계승 "직접 만들어 입는 명품" 누비는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도록 해주는 대표적인 전통 입성. 갈수록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애호층도 두터워지고 있다. 누비 가운데서도 최고의 명품 누비는 당연히 누비장(중요 무형문화재 107호 누비 공예 보유자) 김해자(51)씨가 만든 누비옷이다. 그가 만든 두루마기 한 벌은 모피 코트 한 벌 값과 맞먹는다. 한복 값도 그에 육박한다. 그가 1992년 전승공예대전에서 국무총리상을 탄 두루마기와 한복 한 벌은 한복연구가 이영희씨가 1,700만원에 구입했을 정도이다. 누가 모피코트보다도 비싼 누비 외투를 고를까. “왜 안골라요? 다같이 따뜻한데 모피코트는 무겁지만 누비옷은 가볍잖아요.” 김씨의 제자인 김은주(26)씨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말한다. 김씨가 만든 누비옷은 바늘땀이 매우 정교하여 수많은 점이 찍힌 듯할 뿐 만져보면 한줌에 쥐이듯 옷감의 부드러움이 살아있다.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가 바늘을 든 지 30여년만에 두 손으로 일가를 이뤄냈으니 누비만한 벤처가 없다. 그런데도 그는 남들이 명품 외투를 비싸게 사주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다들 옷을 직접 지어입는 문화를 널리 퍼뜨리고 싶다. 누비 바느질을 하면 우리 전통의 철학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그는 경주와 서울을 오가며 그가 30여년 동안 익힌 누비 바느질의 모든 것을 교육에 쏟아 붓고 있다. 누비는 몽골지방에서 유래했다는 보온형 바느질 방법.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 출토 복식 유물의 절반이 누비일 정도로 많이 쓰였으나 천을 일정한 간격으로 계속 땀을 떠야 하는 작업이 워낙 힘들다 보니 재봉틀의 등장과 함께 손바느질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승복에나 간신히 살아있던 누비의 맥을 일반 복장에도 다시 계승시킨 이가 바로 김씨이다. 그도 처음에는 보통의 한복 바느질로 시작했다. 일본 와세다대에까지 유학한 아버지가 주색으로 집안의 재산을 거덜내고 돌아가신 뒤 그의 일가는 먹고 살기 위해 1970년 서울로 올라왔다. 점잖은 집안 여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당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바느질이 최상급이었다. 그도 삯바느질을 하는 어머니 곁에서 바늘을 들었다. 서울의 동대문 시장 근처에 있던 선미 복장학원에서 한복 만드는 법을 배웠다. 바느질에 재질이 있었던지 72년부터 서울의 이름난 주단집 한복은 대부분 하청 맡기 시작했다. 인사동의 백조주단이니 종로의 한국주단이니 하는 곳들의 한복을 그가 바느질했다. 하지만 한복 바느질은 근근히 먹고 살 정도의 일이었다. 그도 20대에는 바느질을 그만 두려고 방황도 많이 했다. 바늘 하나만 들고 전국을 방랑하기도 했다. “바느질 할 줄 아는 사람이 참 좋다. 바늘 하나만 있으면 세계 어디로도 여행할 수 있다. 한 집에 머물며 옷 지어주면 밥 먹이고 잠도 재워준다”라는 그는 정말 그런 방법으로 80년부터 83년까지 전국을 떠돌았다. 제주의 양로원에 6개월간 머물며 노인들의 옷을 지어주기도 했고 경봉 스님(1892~1982) 타계 직전 1년간은 경남 양산 통도사에 머물며 스님의 옷공양주 노릇을 했다. 충북 천안 성불사,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도 지냈다. 거기서 그는 두 가지를 깨달았다. 승복에 쓰인 누비의 매력과 ‘바느질이야말로 업을 쌓지 않는 일’이라는 깨침이었다. “직업이 나쁜 습관을 만드는 수가 많은데(그는 이것을 업이라고 불렀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깨끗한 일이 바느질이었다. 똑 같은 작업을 공들여 하는 누비는 사람 만나기 싫어하고 똑 같은 일을 좋아하는 내 적성에 맞았다.” 그는 승복을 만드는 황신경(74ㆍ경북 문경)씨에게 누비의 대강을 익힌 후 한복 복식유물을 찾아내서 일상복에 누비를 되살리는 방법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누비는 천을 일정한 간격으로 홈질하는 단순한 작업이다. 그러나 그 작업은 만만치가 않다. 누비질의 간격에 따라 잔누비(3mm간격) 세누비(5mm) 중누비(2.5cm 이상의 드문 누비) 등으로 나뉘는데 8폭 치마를 세누비로 만든다고 해도 8x38은 304cm이니 608줄을 누벼야 한다. 누비기 전에 줄을 긋는 데서 이미 지칠 정도이다. 누비 줄은 바느질 전에 초크로 그리거나 다리미로 자국을 내주어야 한다. 김씨는 “광주 이씨 출토복식(유물 114호)을 92년 재현하기 위해 무명천에 다리미로 누비자국을 냈더니 굳은 살이 석달을 가더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고되고 단순한 작업이 좋았다고 한다. 전통 유물을 재현하면서 그의 ?양식웰옥≠?더 세련되어갔다. 80년부터 누비옷을 만들면서 그는 획기적인 누비질 방법을 찾아냈는데 희한하게도 그것이 전통과 딱 맞아떨어졌다.기계누비에 밀려 단절되고는 문헌으로도 남아있지 않은 조선시대의 누비 기술을 재발견한 것이다. 그 첫째가 올 튀기기. 누비할 자리를 잡기 위해 눈빠지게 올에 줄을 긋다가 그는 올 한 줄을 살짝 당겨주면 무늬가 어긋나면서 누비할 선이 그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85년이었다. 너무도 신기해서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의 박성실 연구원에게 달려갔다. 현미경으로 유품을 관찰했더니 과연 그 방법을 선조들도 쓰고 있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100년동안 못하고 있었구나! 김씨는 “불교서적 ‘신임제록’에 보면 ‘지도지난 유형간택’(至道至難 有形簡擇)이라는 말이 있다. 어렵다, 쉽다는 어렵고 쉬운 것을 가르는 데서 생겨난다는 말이다. 마음을 비우고 자기를 들여다보면 단순함으로 들어가고 그 단순함 속에서 해법이 나온다. 사람들이 단순함으로 가면 도를 통하는데 복잡하게 생각해서 진리를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올 튀기기를 발견한 후부터는 어떤 정교한 누비도 재현이 쉬워졌다. 현재는 그의 제안으로 아예 올을 튀긴 천이 생산되고 있다. 그가 두번째로 발견한 것은 양면누비 기법. 그는 87년부터 누비를 단을 치지 않고 걷어올리는 방식으로 만들어 양면누비 옷을 만들고 있다. 옷을 뒤집어도 입을 수 있어 누비옷 한 벌을 사면 두 벌 산 효과가 난다. 이 같은 방식은 그래서 오랫동안 ‘김해자식 누비’로 불렸다. 그런데 2001년 11월 경기 양주군의 해평 윤씨 묘역에서 소년 미라가 나왔는데 그가 입은 두루마기에서 바로 이런 양면누비 기법이 이미 350년전 조선조 때 있었다는 것이 새롭게 밝혀졌다. 누비에 도가 튼 명인은 어느 시대에 살든 같은 방식으로 최상의 세련됨을 추구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그래서 김해자식 누비라는 이름이 없어졌다”고 김씨는 껄걸 웃는다. 그는 “누비는 옛사람들이 자녀의 무병장수와 전쟁에 나간 지아비의 안위를 기원하며 기도하듯 만든 옷이다. 누비를 남이 만들어주는 명품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 입는 명품으로 삼으라”고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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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원하시는 만큼 해결이 되셨으면 좋겠네요...누비장인 김해자 선생님에 관한 글들을 여기 저기에서 모아서 올려 놓았습니다....참고하세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끝까지 잘 읽었습니다~
긴 글을 읽으시느라 수고 하셨네요.....저도 이번에'누비는 옛사람들이 자녀의 무병장수와 전쟁에 나간 지아비의 안위를 기원하며 기도하듯 만든 옷'이란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덕분에 저도 구경 잘 했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코난님 덕분에 저희가 공부를 잘 한것 같습니다.ㅎㅎㅎ....수고 하셨습니다...
헉....저 땜에 너무 수고로운 일을 하신건 아닌지..감사합니다..(^^)(__)
아닙니다..마음을 다스리고 끈기와 인욕을 배우게 되는 것이 손누비의 참 정신일 것이라시는 김해자 선생님의 마음까지 보게 되는것 같아서 많은 배움이 있었습니다...덕분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