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10시경,
한남동 하얏트 호텔 부근의 남산순환도로를 갔다가 구 단국대학교 건너편 육교 밑에서 줄타기를 했다.
늘 이곳에 차를 댈 때마다 느끼지만 주정차 위반 카메라가 나를 찍고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렇지만 이곳을 지나치면 다시 빈차로 한남대교를 건너야 하기에 꺼림칙하지만 기다려보았다. 채 10분이 흘렀을까, 젊은 여자가 탄다. "강남역 가주세요."
한남 오거리에서 한 번, 논현동 고도일 병원 (택시기사 또한 거기가 반포동임을 아는 자가 많지 않아서 편의상 논현동이라 함) 앞에서 한 번 신호에 걸렸을 뿐 금요일 밤 치고는 아주 수월했다. 당시 나는 Youtube에서 다운로드한 도올 김용옥 선생의 "박근혜는 하야하라"는 영상을 담은 팟캐스트 '고발뉴스'를 듣고 있었다. 의주로 피난 가는 길에서도 반찬 투정을 하고 이순신을 시기한 못난 선조와, 가장 먼저 서울에서 도망쳐 대전에 있으면서도 서울에 있는 양 "대통령과 국군은 어떻게든 서울을 사수한다"며 거짓말을 한 뻔뻔한 이승만에게 일침을 가하면서 국가가 위기에 처할 시 리더라는 작자들의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까발리는 데 통쾌해하면서도 주먹을 쥐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면서 가고 있었다.
고도일병원 앞에서 신호가 바뀔 때 2차로에 있던 나의 택시를 5차로까지 변경했다가 교보타워 사거리를 지나서는 다시 인코스를 파고드는 게 이곳을 지나는 나의 노하우이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베테랑 기사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언제나 강남역은 광역버스와 위성도시에서 올라온 택시들로 길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붐비다 못해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기에 1차로를 달리다가 손님이 내릴 기미를 보이면 아웃코스를 파고드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사거리를 지나자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평소와는 달리 전혀 걸리적거리는 것들이 하나도 없이 쌩쌩 달릴 수 있는 게 아닌가.
'강남역'가자고 하는 손님의 태반은 사실 강남역을 가는 게 아니다. 그 지역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을 아는 손님들은 미리 뉴욕제과나 지오다노 혹은 강남 CGV를 가자고 말한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아직까지 뉴욕제과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른다. 나도 잘 모르고 손님도 잘 모르지만 지금까지 별 불편 없이 이 횡단보도 앞에서 내려주면 군말 없이 그냥 잘 내렸다. 2차로를 달리는 나의 택시는 손님의 부스럭거리거나 움찔하는 기색과 몸짓으로 손님의 의도를 짐작하며 달리기에 요구가 있을 시에 바로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했다.
"횡단보도 앞에 세워주세요." 손님의 요구에 차로를 변경하는 게 힘들 만큼 북적이는 평소의 강남대로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별 무리 없이 차로를 변경했으며 길 가장자리의 광역버스 때문에 그것을 비켜선 안전한 곳에 차를 세웠다. 미터기는 5,600원을 가리켰다. "영수증도 주세요"하면서 손님은 지폐 한 장과 500원 동전 하나와 백원 동전 하나를 주었다. 거슬러주기 좋도록 이미 만들어 놓은 1,000원짜리 5장의 한 묶음과 미터기에서 발급된 영수증을 손님에게 건네주었다.
출발하기 직전에 손님에게서 받은 지폐를 셔츠 앞주머니에 넣으려고 하는데 왠지 촉감이 이상하다.
아뿔싸! 그것은 일만 원권 배추잎이 아니라 누르스름한 오천 원권이었다. 다급히 차에서 내렸다. 손님이 내리고 내가 오천 원권을 인지하기까지는 1,2초나 되었을까. 그 짧은 시간차가 있었지만 내가 차에서 내려 그녀가 걸어갔을 인도로 고개를 돌려 볼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인파였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 그중에서 여자 얼굴만 쳐다본다고 보았지만(사실 그 여자 손님의 얼굴도 모른다) 내 눈에는 다 똑같은 여자들로만 보였다.
방금 내 택시에서 내린 비양심적인 여자분! 어디 계세요? 내 마음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기에 그냥 그 수많은 인파를 훑어볼 수밖에 없었다. 설사 내가 그렇게 외쳤다손 치더라도 그 여자 손님이 "나 여기 있어요"하며 다시 다가오지는 않기에 말이다. 기대와 달리 보람이 없고 허무한 경우에 우리는 허망하다는 말을 쓴다. 오늘 나의 경우가 딱 그 짝이다.
그 지폐를 나는 왜 아무런 의심도 없이 일만 원권으로 생각했을까? 서초동 삼성전자 본사 옆에 차를 세우고 한참 동안 나 자신의 부주의와 무신경에 대해 질책했다. 그 여자 손님이 횡재했다고 키득거리는 소리가 한참을 귓전에 맴돌았지만 허망한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핸들을 잡기까지는 근 30분이 넘어서였다. 나의 착각으로 날려버린 5,000원에 대한 아쉬움도 컸지만 그 여자 손님의 행태가 정말로 못마땅했다. 횡재한 그 여자 손님은 그 알량한 공돈에 나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그 많은 인파 속으로 몸을 던질 때까지 아주 잠시지만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이런 경우 많은 손님들은 "기사님, 이 돈은 뭐죠? 저 만 원짜리가 아니라 오천 원짜리 드렸어요"하며 흔쾌히 그 돈을 되돌려주는 게 사람 사는 모습인데 그런 모습과는 달리 비양심을 목도했으니 내 마음이 편치가 않은 것이다. 물론 나의 잘못이 없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는 '인지상정'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나이가 어려서라고 생각해보지만 이 여자 손님의 모습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남의 실수에 대해 즐거워하고 부정한 돈에 대해서 아무 거부감이 없고 공돈에 대해 "이게 웬 떡"이라는 시선이 결국 세월호 참사를 있게 한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나의 실수에 대해서 겸허한 성찰을 하는 게 아니고 에둘러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나 자신도 반성을 해야 하고 우리 모두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봐야 한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착각으로 사라진 오천 원은 관세청에서 분당까지 간 손님이 미터 요금에 사천 원을 더 얹어주었기에 가까스로 상쇄할 수 있었지만 이 허망한 마음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또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첫댓글 글속에 내재된 사회문제 지적 잘 읽어봤습니다.
직업상 택시기사로서는 승객과의 잘못주고받은 요금 에피소드가 참, 많을겁니다.
그래도, 아주 드물게 아래와 같은 고운 장면도 있습니다...... 이와같이 곱지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