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사진과 증언 무엇을 의미할까?
대한뉴스 광주사태 실록 사료

<광주시민으로 위장하고 유혈폭동 선동하기 위해 침투하다가 붙잡힌 간첩의 모습
(북한 인민무력부 직할부대 심리전 대대 소속)

[ 광주시민으로 위장하고 유혈폭동 선동하기 위해 침투하다가 붙잡힌 간첩의 모습 (북한 인민무력부 직할부대 심리전 대대 소속).jpg ] 19.14 Kbyte Download
광주에 해방구를 설치하고 광주시민들에게 북한 방송만을 청취할 것을 강요하던 무장폭도들.
북한의 대남 선동방송에 영향받은 시민군도 있었던 듯하다.
[광주사태 당시 현장에 있던 11공수 61대대장 안부웅씨의 증언]
- 5.18 수사기록 자료 중에서 -
# 5월 18일 상황
- 5월 18일 0시 부로 1공수에서 동국대로 출동, 동국대에 주둔하던 중 여단본부 전체가 이동해서 5월 18일 12시경부터 주둔하려고 천막을 치고 있던 차에 15시경에 단장에게서 광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 광주출동당시 실탄은 개인에게 지급되지 않았고, 후속부대가 가져오도록 조치했습니다. 5월 18일 오후 늦게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 버스에 분승한 뒤 조선대로 이동했습니다.
조선대에 들어가니 7여단 병력이 숙영준비를 했습니다. 도착 뒤 병사들에게 밥을 먹이려 했으나 급히 출동하느라 취사도구를 가져오지 않아 7여단에 가서 우리 대대 취사를 할 수 없는지 알아보니 7여단도 자기 병력들 밥만 할 정도의 취사도구밖에 없었습니다.
31사단 최종회 중령이 겨우 취사도구를 구해주어 병사들 밥을 먹였는데, 그 때가 저녁 11시경이었습니다. 식사 병사들을 취침시켰고, 저도 약간 잠을 잤는데 5월 19일 새벽 2-3시 사이 여단 본대가 열차로 도착하여 조선대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대대가 쳐놓은 천막을 할당해 주었습니다.
# 5월 19일 상황
- 5월 19일 새벽 4시경 작전지시를 받고 대대 숙영지로 내려와 병력을 기상시킨 뒤 지역대장들에게 임무를 주었습니다. 1지역대는 도청, 충장로, 금남로, 2지역대는 동부경찰서 담당 전 지역, 3지역대는 서부경찰서 담당 전 지역을 담당지역으로 하여 파출소 및 주요 목진지에 3-4명을 배치하였습니다.
- 그 뒤 조선대로 복귀하여 잠시 정돈을 하고 있는데 1지역대장에게서 무전보고가 왔습니다.
"충장로 파출소에 배치되어 있던 1개지대가 시위대에 완전 포위되어 돌과 화염병으로 얻어맞고 있는 상황이다. 급히 지원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시위대가 계엄군을 포위하여 돌과 화염병을 던져대는 상황은 우리 역사상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한번 확인을 지시했더니 지역대장이 "지금 병사들이 엄청나게 당하고 있으니 대대대장님이 빨리 나와서 확인을 해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급히 지프에 작전장교 등을 태우고 금남로로 갔습니다.
- 차량 싸이렌을 울리며 가보니 어느 은행 앞에 저희 1개 팀 8명이 2백여명의 시위대에게 포위 당해 그야말로 돌과 화염병으로 타작을 당하는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도망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싸이렌을 울리고 가니까 시위대들이 후속부대가 오는 줄 알고 사방으로 도망갔습니다. 시위대가 해산하고 난 뒤에 보니 최상규 하사는 다리가 부러지고 김영상 중위는 얼굴을 돌로 난타당해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6-7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 상황을 알아보니, 시위대가 충장파출소를 습격했는데 충장파출소를 경계하던 저희 병력이 그것을 막지 못하고 금남로까지 쫓겨다녔던 것입니다.
< "광주사태 진압작전 총괄"에는 이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시위대 2백여명, 충장파출소에 배치된 11여단 61대대 지대 8명을 포위하면서 화염병, 각목 등으로 파출소 기습 공격이에 계엄군 8명은 포위된 채 금남로로 밀려나오며 전원 중상(화상, 창상, 골절) >
- 저는 여단에 상황을 즉시 보고하며, 시위군중들에게 포위당해 우리가 피해를 당했는데 후속부대가 없으면 재차 시위대의 공격이 예상되므로 증원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시간이 5월 19일 10시경이었습니다. 참모장이 알았다며 "62, 63대대가 지금 무력시위 중이니
조금 후 그 2개 대대를 금남로로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잠시 후 차량에 탑승한 62대대가 도착, 62대대장에게 충장로 쪽을 맡아 달라고 했으며 그 뒤 63대대가 도착, 금남로 일대에서 노동청 쪽으로 경계를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11여단 전투상보에는 이 상황을 "5월 19일 10시 40분경 충장로 일대에 군중 2백여명이 집결하여 경계근무 중인 계엄군에게 돌과 화염병을 투척, 이를 제지 하자 소요군중들은 순식간에 2천명으로 증가되어 무력시위 중인 62, 63대대가 현장에 증원되어 소요진압"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그 후 저희 병력은 원래 배치되었던 파출소 등 주요 지역에 그대로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저는 무전으로 저희 대대 지역대장에게 가급적이면 시위대와 충돌하지 말고 건물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5월 19일 오전에 체포한 시위대는 전부 경찰에 인계했습니다. 체포과정에서, 피를 흘리고 다친 저희 대대 병사들을 본 62, 63대대 병력이 흥분하여 시위대를 심하게 때리고 밟고 하는 상황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고발인들이나 청문회 증인들이 주장하는 이런 상황은 시위대 입장에서만 주장하는 피해상황입니다. 계엄군 입장에서 보면 가만히 있는 시위대를 추격하여 때리거나 순순히 해산하는 시위대를 끝까지 쫓아가 때린 것이 아닙니다. 공수대원들은 경계만 하며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하고 있는데 시위대가 먼저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니까 병사들이 흥분하여 때린 격입니다. 공수대원들도 시위대들이 던져대는 돌과 화염병에 무수히 많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저의 대대 병력의 경우, 7-8명 정도씩 목진지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시위대를 강하게 때렸다면 오히려 시위대에게 얻어맞았을 겁니다.
- 5월 19일 14시경 조선대로 복귀, 점심을 먹은 후 다친 병력은 여단본부로 후송시켰습니다.
14시 30분 경, 여단장님이 조선대에 와서 대대장들을 집합시켰습니다. 여단장이 "지금 금남로 한일은행 일대에 약 2천명이 집결, 공공시설을 파괴하고 노상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는 등 난동을 피우고 있다. 그러니 4개 대대 전부 출동하여 이를 해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우리 61대대는 광주일고에서 시작해 금남로를 따라 도청쪽으로 폭동 진압대형을 유지하며 진압할 수 있도록 진출하라고 지시 받아 차량을 타고 광주일고 부근으로 갔습니다. 광주사거리에 이르러 도청 앞을 바라보니 시위대들이 거의 없고 오히려 좌측 시외버스터미널 쪽에 시위대가 잔뜩 몰려있어 여단에 이 사실을 보고하니 "그러면 방향을 바꾸어 그 쪽으로 가서 시위대를 해산하라"고 하여 방향을 바꾸어 갔습니다.
- 시외버스터미널로 가니 시위대가 저희들을 보고 사방으로 도망갔습니다. 시위대를 추격하면 병력이 분산되기 때문에 추격은 하지 않고, 시외버스터미널 로터리 부근에 원형으로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그 곳에서 경계를 계속했는데 간헐적으로 7-8명 정도의 시위대가 돌을 던지는 등 충돌이 있었지만 큰 충돌은 없어 저녁때까지 계속 있었습니다.
- 날이 어두워지자 약 2백미터 정도 되는 지점에서 차량에 불이 나는 것이 목격되어 1개 지역대 병력을 제가 데리고 가보니 "경남" 번호판을 단 타이탄 트럭 1대가 불타고 있었으며, 운전사로 보이는 사람이 구타당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운전수는 경찰에 인계하여 후송시키고 다시 로터리로 복귀했습니다. 저녁식사 때가 되었는데 비가 부슬부슬 오는 상황이었습니다. 노상에서 비를 맞으며 밥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터미널 근처에서 병력들에게 비를 피해 식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 "광주사태 진압작전 총괄"에는 이 상황을 "22시경 광주역 로터리 부근에서 시위대가 화물자동차(경남 소속, 플라스틱 제품적재)를 탈취, 방화(운전사 부상, 계엄군에 의해 후송)"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시위 진압을 할 당시 , 저희 대대는 착검한 적이 없습니다.
5월 19일이면 진압초기로서 초기부터 착검하고 진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한 군에서 사용하는 대검은 날이 서 있지 않고 무딘 상태입니다. 대검으로 물건을 자를 수는 없습니다. 광주사태 유언비어 중에 공수대원들이 대검으로 여자 유방을 잘랐다고 하는데, 물리적으로 군의 대검으로 사람 살을 자른 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5월 19일 저희 병사들의 심리상태가 흥분되었던 상황이었다고는 판단되지 않으며, 전반적으로 저의 지휘에 병사들이 잘 따랐습니다.
그러나 대대병력이 2백여명 이상이 되다보니 병사 개개인들의 시위진압 방법이 과잉이었는지 여부는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지역대장들이 과잉진압이 있었다고 보고한 적은 없습니다.
# 5월 20일 상황
- 20일 오전에는 별다른 충돌 상황이 없었습니다. 당시 1개 내지 2개 팀을 주요 목지점에 배치해 놓았는데 12시경 되니까 시위대가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가 계엄군을 습격하는 방법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시위대 중 40-50대 정도의 사람 2, 3명이 계엄군에게 먼저 말을 걸어 봅니다. '고향이 어디냐, 어느 부대냐, 언제 내려왔느냐'라고 물으나 저희 병력은 답변하지 않고 '해산하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삽시간에 1백여명 이상의 시위대가 집결했습니다.
시위대가 집결하면 앞에서 말을 걸던 사람이 군중 속으로 빠지면서 "우우"하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러면 군중들도 따라하다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순식간에 2-3백명이 모여들어 같이 돌을 던지곤 해 할 수 없이 그 곳에서 우리 대대는 처음으로 최루탄을 사용해 진압했습니다."
- 그런 상황이 저희 대대 작전지역 여러 곳에서 일어났으며, 순식간에 금남로 전체에 수많은 군중들이 집결했습니다.
여단에 즉각 상황보고를 하니 여단에서는 도청을 사수하고 선무작전을 통해 시위군중을 해산하라고 막연하게 지시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금남로에는 1개 지역대 밖에 없었는데 시위군중은 계속 불어나 도청 쪽으로 진출하려고 해 할 수 없이 노동청 쪽 등에 배치되어 있던 대대병력을 금남로쪽으로 끌어들여 시위군중을 막기 시작했습니다.
< "광주사태 진압작전 총괄"에 의하면 '16시경 대치 중인 계엄군(61대대) 배치선 1미터 전방까지 40대 남자가 접근하여 협박'(내용 : 네놈들이 있던 강원도 오음리 지역의 군인가족을 몰살키 위해 시민을 현지로 보냈다)한 후 군중 속으로 뛰어 들며 선동, 시위대 전진 투석, 주동자 체포하려다 계엄군 3명부상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 이후 여단 지시대로 선무작전을 하며 해산을 종용했으나 시위군중은 해산하지 않고 오히려 금남로 지하상가 공사장에 있던 돌을 공수부대에게 던지고 화염병도 던져 그 때부터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에 돌, 화염병과 최루탄을 투척하는 상호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19시경이 되자 최루탄도 다 떨어지고 날도 어두워지고 해서 약간 소강상태였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와서 "지금 무등경기장에 차량 1백여대가 집결, 금남로를 향해 오고 있다"고 귀뜀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여단에 보고하니 여단에서는 "선무작전으로 해산시키라"고만 하고 더 이상 지원도 해 주지 않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상황이 도래했습니다.
- 차량들이 강습 돌파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어 도로상에 장애물을 설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물 마타 셔터가 내려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장애물로 사용할 만한 물건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주위를 자세히 보니 화단이 있어 이를 도로에 옮겨놓도록 지시했습니다. 나무로 만든 줄 알았던 그 화단이 시멘트로 만들었는지 너무 무거워 병사들이 겨우 3개 정도를 도로상에 설치했을 즈음에 금남로 끝부분에서 차량들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번쩍번쩍하며 도청을 향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노동청 앞쪽에서 경찰병력이 돌진하는 시위대 차량에 의해 4명이 압사했다는 보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 금남로에서 도청 쪽으로 밀려들어오는 차량들을 보니 분명히 저희 병력을 향해 밀고 들어 올 것 같아 병력을 인도 쪽으로 비키게 했습니다. 저희 뒤에는 경찰병력도 횡대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이 인도로 비키니까 도로상에는 경찰병력들만 횡대로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당시 공수대원들은 지급받은 최루탄 2개씩을 전부 소비한 상태여서 경찰에게 최루탄을 달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없다고 하다가 "그러면 우리는 못 막는다"고 하자 그 때서야 최루탄 한 박스를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 당시 저희 병력들은 시위군중에게 완전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무전기로만 여단과 교신했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 선무작전만 하라는 지시를 여단에서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장에 있던 지휘관으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여단 지휘부에서는 도청 앞의 급박한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선무활동만으로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경찰병력이 시위대 버스에 의해 4명이 압사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 저희들을 향해 오고 있는 시위대 차량이 우리를 깔아뭉갤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병력들에게 퍼져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 이후 페퍼포그 차량을 도로상에 설치한 화분대 사이에 설치하고 있으니까 버스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화분대를 향해 돌진해 오다 장애물을 발견하고 주춤거린 뒤 핸들을 꺾어 충장로 방향인 62대대 쪽 가로수를 받고 정지했습니다.
62대대 병력이 정지한 버스에 최루탄을 투척해 버스 안에 타고 있던 약 10여명 정도의 시위대를 체포했습니다. 그 버스가 도로를 가로질러 정지했기 때문에 그 뒤에 따라 오던 다른 차량들이 그 버스에 막혀 더 이상 앞으로 진행하지 못하게 되자 자연히 그 버스가 바리케이드 역할을 해, 뒤에 따라 오던 택시, 대한통운 트럭 등도 전부 정지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막히고 얽혀 뒤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니 시위대는 전부 차에서 내려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그 정지 차량을 장애물 내지 엄폐물로 삼아 다시 정렬을 정비했는데, 조금 있다보니 시위대가 다시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몰려들었습니다. 우리 병력은 정지한 차량을 엄폐물로 삼아 시위대를 진압했습니다.
- 21시 정도가 되니 소강상태였습니다. 뒤편에 있던 차량과 택시들은 전부 다 빠지고 큰 차량만 남아 있었습니다. 차량을 다시 가져가는 것에 대해서는 저지하지 않았습니다.
- 21시 경이 지나자 시위대가 앰프를 단 차량으로 도로상을 돌아다니며 최초로 시위대의 선무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애끓는 듯한 소리로 시민들을 자극하는 방송을 했습니다. 목소리와 억양이 마치 이북에서 대남방송하는 여자들의 억양과 똑같아 계엄군 입장에서 보면 전율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시민들이 들으면 분노를 느끼게 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내용은 "지금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려고 왔다.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야 되겠느냐, 금남로로 전부 모여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방송이 있은 다음부터 시위양상이 격렬해졌습니다.
- 그 당시 시위대들은 몽둥이, 쇠파이프, 쇠갈고리, 도끼 등 흉기가 될만한 것은 전부 다 들고 있었으며 시위상태도 이전과 약간 달라졌습니다.
5월 20일 이후부터는, 우리가 시위대로부터 계속 당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체포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시위대에게 안 밀리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골목 근처에서는 저희 병력이 수적으로 우세한 시위대로부터 많이 얻어맞은 상황이어서 골목길 쪽으로는 병력들이 서로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당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 5월 20일 금남로 상황은 계엄군이 시위대를 때렸다기 보다는 우리 병력이 시위대로부터 구타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병력들은 완전히 의기상실하고 공포감에 눌린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돌이 날아오는 상황에서 할 수 없이 병력들을 향해 "대대장과 너희들이 여기서 죽는다. 이 자리를 물러날 수 없다. 죽을 각오를 하고 이 자리를 지키자" 라고 병사들을 격려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다음날 새벽 3시 정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 11여단 전투상보에는 "폭도들은 도끼, 쇠파이프, 농기구, 칼, 화염병 등으로 무장했으며 각지에서 계엄군을 공격하여 19시부터 익일 03시까지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라고 당시상황을 기재하고 있습니다. >
<또한 "광주사태 진압작전 총괄"에는 "금남로를 담당하던 61대대가 매복 특공조를 편성하여 도로변의 화분대를 이용, 차량 저지를 위한 장애물 형성, 최초 진입하는 버스를 기습, 유리창을 파괴하자 버스는 가로수와 충돌(탑승자 8명 체포, 경찰에 인계), 운전사에게 가담 이유를 문의한 결과 폭도들이 위협, 강제 동원임을 확인, 이 때부터 차량 장애물 지대가 형성됨"이라고 기재>
- 경찰은 이미 저희들에게 최루탄을 넘겨 준 다음 어디로 갔는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고, 저희들이 밤 새워 시위대와 충돌할 때엔 경찰이 없었습니다.
- 최루탄 등은 전부 바닥났고, 착용한 방석망도 대대원들이 손으로 대충 만든 것이어서 경찰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엉성했습니다. 그날 상황은 마치 적은 병력의 공수부대와 엄청난 숫자의 시위대가 야간에 패싸움을 벌이는 듯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금남로에는 시간이 늦어서 그런 면도 있겠지만 건물들의 불은 전부 꺼진 상태였고 날씨도 맑은 날이 아니고 그믐 때 정도여서 달빛도 없고, 가로등마저 꺼진 상태였기 때문에 완전히 암흑 속 아수라장이었습니다.
-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물 한 방울 먹지 못할 정도의 상황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나중에 알아보니 여단본부도 시위대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자기들 공격 막느라고 경황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전투사 전투상보에 의하면 5월 20일 20시경, 시위군중의 숫자가 계림동에 3만명, 도청에 2만명, 전대병원 앞에 1만명, 공용터미널 1만명으로 기재)
-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였습니다. 골목골목마다 시위대로 꽉 찼고, 건물 옥상은 전부 시위대가 점거하여 도로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돌진하는 저희 병력에게 건물옥상에서 무수히 벽돌을 던졌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기 부족할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만약 그 당시 지휘관이나 병사들이 겁을 조금이라도 먹고 물러 섰다면 그 자리에서 시위대에게 전부 밟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5월 21일 0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 5월 21일 상황.
- 5월 21일 03시경 정도 되니까 선동방송을 하던 시위대 차량이 시위대를 향해 "조선대로 가자"고 선동했습니다. 그리고는 금남로에서 시위대가 차츰 없어져 제가 여단에 무전으로 "지금 시위대가 조선대쪽으로 가는 것 같으니 대비하라"고 보고했습니다. 금남로에서 시위대가 차츰 없어져 소강상태가 계속됐습니다.
- 08시경 시위대가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금남로에 완전히 꽉 찰 정도로 운집하여 저희 병력 약 10미터 전방까지 진출했습니다.
- 우리로서는 어떻게 진압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시위대도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지는 않고 우리 앞 10미터 전방까지 전진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병력들에게 "눈도 돌리지 말고 서 있으라"고 지시해 병력들은 부동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전날밤과 마찬가지로 돌, 화염병, 쇠파이프 등 흉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 09시경 정도 되니 어제 선동방송을 하던 여자가 시위 군중 사이를 헤치면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리어카를 끌고 앞으로 나왔는데, 나오면서 "죽은 사람이 내 동생인데 계엄군이 죽였다. 살인마 계엄군을 쫓아내야 한다"는 취지로 선동을 했습니다. 군중들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호응한 뒤, 칼과 도끼 등을 든 사람들이 시위대의 전면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 그리고는 우리 병력 바로 앞에까지 와서 도끼로 병사들의 철모를 툭툭 치면서 "이 OOO를 이걸로 골을 빠개 버려?", 그리고 가위, 칼 등을 눈앞에 대고 "이걸로 눈을 쑤셔버려?" 등의 위협을 해 우리 병사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병력들은 꿈쩍도 않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하던 여자가 대화를 하자고 제의하여 62대대장이 앞으로 나가 여자와 대화를 조금 하고 있으니까 갑자기 군중 속에서 62대대장을 향해 돌이 날아와 62대대장이 대화를 하다 말고 들어와 대화가 중단되었습니다.
여자가 방송을 통해 "남자가 칼을 뺐으면 무라도 잘라야지"라고 하며 다시 나오라고 했으나 62대대장이 안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63대대장과 35대대장도 우리 지역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63대대장 보고 "당신이 말을 잘 하니까 당신이 나가서 이야기 한 번 해 보라"고 하자 "35대대장과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니까 안 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제가 나가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 그날 오전에는 시위대가 먼저 돌과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고, 또 시위대의 숫자가 엄청나 충돌이 있었다가는 저희 병력들이 전부 맞아 죽을 상황이었습니다. 병사들도 상당히 불안해 했기 때문에 충돌할 때까지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대화에 응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 대화를 해보니 시위대가 요구하는 내용은 3가지였습니다. "1. 계엄군은 즉각 철수하라, 2.체포해 간 사람들을 즉각 석방하라, 3. 계엄군은 폭력을 쓰지 말라"고 요구하여 잠시 기다리게 한 뒤 대대장들과 어떻게 답변할 것인지를 의논한 뒤
"우리는 전방 지휘관이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 군인이기 때문에 도청을 사수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상 우리 마음대로 철수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신들이 요구했던 사항을 상급부대에 보고하겠다.
둘째, 체포한 사람들은 모두 경찰에 인계했기 때문에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 시위대는 없다.
셋째, 우리 계엄군도 국가와 국민을 위한, 국민으로 구성된 군인이다. 우리가 쓸데없이 폭력을 쓰겠느냐. 지금 봐라, 당신들이 폭력을 쓰지 않으니까 우리도 폭력을 쓰지 않고 있지 않느냐"고 답변했습니다.
- 그렇게 하는 사이 12시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도지사가 계엄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시위대 대표와 약속을 했다고 시위대가 3회에 걸쳐 방송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송을 듣고 여단에 무전으로 문의하니, "철수계획이 없으니 도청을 사수하라. 그리고 계속 선무활동을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2시가 넘어서서 운집한 시위대가 "왜 12시가 되었는데도 물러가지 않느냐"며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단에 다시 한번 확인을 했더니 "지금 계엄회의가 계속되고 있으니 아직 알 수 없다"고 회신이 와서 제가 시위대에게 "지금 계엄회의가 계속 중이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말했습니다.
- 그 때 갑자기 시위대가 웅성웅성해져 살펴보니 시위대 뒤편에서 장갑차와 시위대가 가득찬 5톤 군용트럭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차량을 몰고 저희 병력 앞으로 나와 장갑차와 트럭 등을 저희 병력을 향해 횡으로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저희 병력들과 시위대 차량이 마주 보고 있게 된 것이지요.
- 그 때 61대대와 62대대가 시위대 쪽으로 제일 전면에 나가 있었습니다. 저희 대대에는 장갑차가 배속되지 않아 전면에 병력들만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앞에 시위대의 장갑차와 군용트럭에 탄 시위대가 보였는데 시위대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흉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 때보니 총을 가진 시위대가 군데 군데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병력의 뒤에는 62대대 뒤에 장갑차가 1대 있었고, 그 장갑차 뒤에 63대대 1개 지역대 병력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위대가 몰고 나온 장갑차는 광주 군대 무기고에서 탈취한 신형장갑차로서 바퀴가 궤도로 되어 있지 않고 고무타이어로 된 것이었습니다.
- 13시 경에 이르러 시위대가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 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방독면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의 빵빵 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전열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톤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하고 나간 뒤 저의 대대 정보장교인 장두혁 대위로부터 62대대 이창호 대위가 얼굴에 약간 스칠 정도로 총알을 맞아 비틀비틀 하길래 자기가 부축해 주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 뒤 도망을 가 분수대에 도착한 후 전부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4개 대대병력이 서로 뒤섞인 태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시위대도 더 이상 분수대 쪽으로 돌진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는 잠시 쉬고 있었데 조금 있다가 갑자기 총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뭐야"하고 일어나서 보니까 분수대 옆 충장로 쪽으로 시위대 버스 1대가 저희 병력을 덮쳤습니다.
당시 저희 병력들은 쉬느라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때 버스가 달려드니까 누군가가 버스를 향해 사격을 한 것입니다. 버스는 사격을 받고 분수대에 부딪힌 뒤 방향을 바꿔 충장로 쪽으로 가다 담을 들이받고 정지했습니다.
이 때 관광호텔 쪽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톤 트럭이 동시에 계엄군을 향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차를 향해 부대원들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사격을 하니까 시위대 차량이 주춤하더니 다시 뒤로 물러났습니다. 제가 "큰일났구나" 생각하며 뛰어 다니면서 사격 중지를 외쳤습니다.
사격중지를 외쳐도 동시에 사격중지가 되지 않아 제가 병사들 속을 뛰어 다니며 발길로 걷어차면서 사격중지를 외쳤습니다. 사격을 중단시킨 뒤 병력을 집합시켜 상무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62대대장은 충장로 방향에 있는 농협 공판장 쪽으로 들어가면서 62대대에 배속된 장갑차 소대장에게 시위대의 장갑차가 들어오면 막으라고 지시한 뒤 장갑차 1대만 남겨 놓은 채 도청 앞에서 주변으로 전부 피신했습니다. 이제 도청 앞 광장에는 계엄군이 거의 없게 된 것입니다.
- 이 때 사격명령을 내린 적은 절대 없습니다. 순전히 급박한 상황에서 부대원들이 조건반사적인 사격, 그러니까 돌진하는 시위대의 차량에 압사 당할지도 모른다는 심한 공포감으로 인해 실탄을 삽입하여 발사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실탄을 가진 병사들을 사격통제하지 못한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의 대대뿐만 아니라 다른 대대도 전부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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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좌파들은 이 사실에 대해 명확히 발언해보시라.광주사태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상황을 좌파들의 사관으로 해석한 것은 언젠가 바로 잡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