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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선사 출가수행 이야기
근·현대 호남 불교의 큰 어르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해안선사(海眼禪師)는 경봉스님과 함께 '東 경봉 西 해안'으로 불리며 선풍을 떨쳤던 선승(禪僧)이다.
스님은 1901년 음력 3월 7일 전북 부안군 산내면 격포리에서 아버지 김해 김씨 치권공과 어머니 은율 송씨의 3남으로 출생했다.
이름은 성봉(成鳳)이라 했으며, 커서는 봉수(鳳秀)라 불렸고 당호는 해안(海眼)이다.
10세를 전후하여 가까운 마을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는데 언행이 방정하고 두뇌가 총명했다.
14세 되던 해 변산 내소사에서 덕이 높은 한학자가 맹자(孟子) 천 독(讀)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필상(筆商)을 따라 한학자 고찬 선생을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당시 내소사 중흥주였던 만허 선사에게 출가하고 불연을 맺게 되었다.
스님은 17세가 되자 호남의 대본찰인 백양사에서 두발을 깎고 송만암 대종사를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그해 백양사 지방학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무오년 스님의 나이 18세가 되는 해 12월, 납월 팔일 성도절(成道節: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음력 12월 8일)을 앞두고 선원에서는 연례행사로 7일간 용맹정진을 하게 되었다.
스님은 학명 조실스님으로부터 '은산철벽을 뚫으라'는 화두를 받고 생사의 간두에 서서 화두 일념에 자타를 몰록,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목탁소리 종소리 죽비소리에
봉새가 은산철벽 밖으로 날았네
누군가 나에게 기쁜 소식 묻는다면
회승당 안에 만발 공양이라 하리라
이것은 그때 당시 스님의 경계를 읊은 송(頌)이다.
여기서 봉이라 함은 스님 자신을 뜻하는 것이다.
이때 7일간 용맹정진이야말로 생명을 걸어 놓고 벌인 한판 싸움이었으며, 스님은 마침내 승리자가 된 것이다.
스님은 1920년, 백양사 지방학림을 마치고 바로 서울로 돌아가 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하여 2년간의 전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그해 7월에 백양사에서 대선법계를 품수하였다.
이제 스님께서는 내외전(內外典:불교경전과 일반서책)을 두루 섭렵하였고 이미 심전개오(心田開悟:마음자리에 대해 깨달음)한 바도 있었으나,
정진의 고삐를 늦추려 하지 않고 더욱 갈고 닦기 위하여 1922년 겨울 삭풍이 몰아치는 만주 벌판을 지나 중국으로 구도의 고행을 떠났다.
그리하여 광할한 중국 천지에 널리 선지식을 참문하여 친견하고 탁마하는 한편 북경대학에서 2년간 불교학을 연수하며 견문을 넓혔다.
1935년 스님의 나이 35세 되던 해 백양사 본말사 순회 포교사의 직책을 맡게 되자 이때부터 스님께서는 본격적인 화화중생의 보살도에 나서게 되었다.
스님의 해박한 지식과 밝은 선지에서 나오는 설법으로 때와 인연을 따라 청중의 근기에 맞추어 법을 설하시니 스님이 가시는 법회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후학들을 가르침에 있어 스님은 명쾌한 논리로 핵심을 설파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여러 해 수행을 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물건을 따라가기 때문(迷己逐物)이라며, 꾀꼬리가 울면 자기를 잊어버린 채 꾀꼬리 소리를 따라가고, 장구 소리와 노랫가락이 들려오면 거기에 정신이 팔려 좇아가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스님께서는 일생을 소박하고 무욕청빈한 생활로 일관하였거니와 복색도 간편하게 입으셨다.
상의는 고름을 달지 않고 매듭 단추를 달아서 즐겨 입었으며 바지는 약간 짧게 해서 대님을 매지 않은 채로 입고 다니셨다.
스님께서는 언제나 무유정법(無有定法:진리하고 할 수 있는 정해진 법이 없다)을 설하셨고 몸소 실천하셨다.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았고 시비에 상관하지 않았으며 때와 연에 맞추고 정한 법 없이 대중의 근기에 따라 제접하였다.
어느 때는 엄하고 무섭기가 서릿발 같은가 하면 어느새 갈(喝:고함지르기)을 하기도 하고 선정에 드셨는가 싶으면 북 광쇠를 쿵쿵 치며 염불삼매에 취하기도 하셨다.
달이 밝으면 시를 짓기도 하고 다정한 도반을 만나면 밤을 새워 곡차를 마시기도 하셨다.
타고난 선풍도골이어서 70이 훨씬 넘어서도 얼굴에 주름살 하나 없이 맑고 고왔다.
1974년 음력 3월 7일 일흔 네 번째 맞이하는 스님의 생신임과 동시에 전등회가 창립된지 다섯 돌을 맞는 날 이틀 후인 9일 새벽, 아침 예불이 끝난 후 스님은 조실방에서 대중을 쭉 둘러보시고 열반을 암시하는 마지막 말씀을 하셨다.
"나는 오늘 갈란다. 내가 떠난 뒤에도 공부 열심히 하고 전등회를 잘 키워야 할 것이야."
대중의 울음과 긴 침묵이 흐른 뒤 한 제자가 여쭈었다.
"스님, 하실 말씀이 있으면 다 하시지요."
"생일날 가고 싶었는데 번거러울 듯 싶어 오늘 간다. 사리가 나오거든 물에 띄워 보내라. 행여 비(碑) 같은 것은 세울 생각 말아라."
"큰 스님, 제자의 도리가 있는데 비는 세워야지요."
"굳이 세우려거든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라 해라."
이어 스님은 열반송이라도 남겨달라는 제자들의 애타는 요구를 끝내 물리치지 못해 게송을 읊었다.
생사 없는 곳에
따로 한 세계가 있으니
때묻은 옷이 떨어져 다하면
바로 이 달 밝은 때이니라
生死不到處
別有一世界
垢衣方落盡
正是月明時
내소사 단풍나무 숲길 왼편 정갈하게 단장된 부도밭에 해안선사 부도비가 있다.
부도비 뒷면에는 '생사가 이곳에서 나왔으나, 이곳에 없다(生死於是 是無生死)'라 적혀있다.
#해안선사(담양인신문)

첫댓글 감사합니다. ()()()
감사 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