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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길은 내안에 있다
오죠 라즈니쉬 지음/김현국 옮김/태일출판사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오쇼 라즈니쉬(Osho Laznishi, 1931∼1990)
저자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특히 처음 어린시절에서 청년기 시절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분노했었다. 너무나도 화가 났었다. 그리고 잠시 화를 접고 다른 면으로 생각을 해 보았다. 왜 내가 화가 날까? 왜 내가 분노할까? 아마도 나 뿐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모두 동일한 감정을 느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나는, 한국인은 아직도 유교 사상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소위 ‘동방예의지국’에 살고 있고(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최소한도 이상의 예의를 지키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학교의 교육이었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오쇼 라즈니쉬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본인 스스로도 말했지만 철저한 개인주의자, 완벽주의자였던 것이다. 본인의 생각이 옳다면 그리고 그것이 진리라면 사회가 어떻게 요구하든 무엇을 요구하든 상관치 않았다. 할 말은 해야만 했다. 네다섯 살 때 오쇼의 말이다.
“할아버지, 여기서 법문을 하고 있는 이 사람은 단지 얼간이일 뿐이에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하는 말들은 더욱 대단하다. 유교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 7년 동안 나는 정말로 철저한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이제 나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저는 그저 이 가게가 아버지를 망쳐 놓은 것처럼 저까지 망쳐 놓을까봐 그러는 것뿐이에요. 저는 이 가게를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아요. 저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조금도 관심이 없어요.”
“여기 제 손이 있으니 끌고 들어가세요. 저는 적어도 이 추한 단체에 스스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만족감은 가져야겠어요.”
또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나의 분노는 다음글에서 극대화되었다. 선생의 외모까지 낮출대로 낮추어서 비웃는 그의 태도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신의 그의 얼굴을 만들 때 엄청나게 서두른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 오줌이 엄청나게 마려운 상태에서 서둘러 이 사람을 만들고 바로 화장실로 달려갔을 것이다. 얼마나 황당한 용모인가!’
이외에도 마을 연극을 망쳐놓는다든지 학교에 간 첫날 선생을 바보로 만들어버린다든지 하는 그의 면모는 대학에 진학해서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글쎄.. 너무 솔직해서 였을까.. 다른 위인들도 어쩌면 그런 기이하며 돌출된 행동을 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오쇼 라즈니쉬의 자서전에서 분노가 일어난 다는 것은 그가 너무 자세하며 솔직하게 기술을 했기 때문일까?
책을 읽는 가운데 나는 그전에 만났던 인물을 한명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뭐랄까.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그의 채취를 맡았다고 표현하는게 맞을까? 아무튼 오쇼의 글에서 나는 이미 타계한 저명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을 느낄 수 있었다. 세가지 면에서 그러하였는데, 첫 번째는 언어에 대해 표현하는 부분이다. 다음을 보자.
‘내가 깨달음을 얻은 날이라고 말할 때, 나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단어가 없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캠벨 또한 천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 느낌에 있어서 지구상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곤 했다. 이와 동일하게 오쇼 또한 언어는 우리 인류가 만든 것이므로 그 한계를 초월하게 될 때 즉, 깨달음을 표현하고자 할 때 언어로는 아무리 잘 표현한다 하더라도 만족스런 전달이 되지 않음을 토로하고 있다. 후에 오쇼는 명상을 위해, 침묵을 위해 아예 말을 놓아 버리게 된다.
두 번째는 예술에 대한 언급이다. 종교적 통합, 모든 사상의 통합을 위해서는 예술이 중요하고 예술가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어야 한다고 두 사람은 주장한다. 과학과 종교 이 2가지가 모두 통합으로의 역할을 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고 할 때 예술은 그 2가지를 이을 수 있는 가교역할을 할 수 있는 분야라는 것이다. 그 일을 하는 예술가들은 창조성을 가지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적임자들이고.
세 번째는 내면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조셉 캠벨은 천복을 쫓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내면을 여행하는 것이라 말했다. 즉, 자신 안의 진짜 자신을 찾아 대면하게 될 때 그 곳이 바로 천국이요, 천복을 얻는 것이라 표현하였다. 오쇼 또한 마찬가지다. 명상을 권유하면서 결국 자기자신을 찾아 나서라 요구하고 있다. 자신을 찾아 내면 깊숙이 탐구여행을 하다보면 결국 자신을 만날 수 있으며 그것이 곧 깨달음이라 하였다. 그 깨달음이 곧 신이자, 신성이라고 하였다. 캠벨이나 오쇼가 전하는 메시지는 일치한다. 자신을 찾으라는 것이다. 다만 자신을 찾아가는 방법 상에 있어 캠벨은 신화를 동원하였고, 오쇼는 명상법을 소개하였다는 점이 차이가 있을 뿐 그 근본적 메시지는 곧 하나인 것이다.
오쇼는 본인의 깨달음을 세상 부유한 지적 소유자들에게 전파하고 다녔으며 종래에는 깨달음을 보다 더 쉽게 얻기 위한 122가지의 명상법을 개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였다. 또한 자신의 명상법을 더욱 전파시키기 위하여 제자격인 산야신들을 두었으며 그를 통해 전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그는 종교를 주관적인 과학이라 표현하였으며, 예수, 붓다, 마호메트와 같은 신적 존재들을 모두 부인하였다. 또한 성직자들을 날조된 신을 만들어내는 사기꾼으로 묘사하였으며 종국에는 신과 성직자들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라 경고하였다.
그가 죽기 몇 년 전부터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활동을 하려했지만 각 나라들에서는 그를 위험인물로 분류하여 자신의 나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리하여 그는 전세계를 방황하였고 결국 다시 인도로 돌아와 새로운 명상법의 개발과 전세계로부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강연을 하다가 준비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전파하려했던 그의 일생은 그가 만든 아슈람에서 재로 변하여 영원히 자리잡게 되었다. 그가 만든 문구가 새겨진 명판과 함께.
오쇼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단지 1931년부터 1990년 사이에
이 행성, 지구를 방문하다
오쇼 라즈니쉬의 일생
유년 시절
1931년
오쇼 라즈니쉬는 1931년 12월 11일 인도의 Madhya Pradesh에서 자이나교도인 직물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나 7살이 될 때까지 그의 할아버지와 함께 산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가 마음껏 행동할 수 있도록 절대적 자유를 허락해주고, 삶의 진리에 대한 그의 조숙하고 강렬한 탐구를 전면적으로 지원해 준다.
1938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인구 2만의 읍인 Gadawara로 가서 부모와 함께 사는데 그의 할머니도 같은 마을로 이사를 와 스스로 손자의 제자임을 선언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의 가장 관대한 친구가 되어준다.
1946년
14살 때 오쇼는 처음으로 사토리를 경험한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의 명상 실험은 깊어져 갔으며, 영적 탐구의 강렬함은 육체적 건강을 손상시킬 정도여서 부모나 친구들은 그가 오래 살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대학 시절
1952년
3월 21일, 21살의 오쇼는 인간 의식의 최고 정점인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외적 전기는 끝났다고 말한다. 이후 그의 삶의 내적 규율을 갖고 일체성이라는 무아의 경지에서 살면서 외면적으로는 Saugar 대학교에서 학문을 계속하여 1956년 졸업할 때에는 철학 부문의 최고상을 받는다. 그는 인도 토론대회의 우승자로 졸업반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한다.
1957년
오쇼는 Raipur시의 Sanskrit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1년 후 그는 」Jabalpur 대학교의 철학 교수가 된다. 1966년 그는 현대인에게 명상기법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버린다. 60년대를 통해 그는 '아차리야(교사) 라즈니쉬'로서 인도 전역을 여행하고, 가는 곳마다 기성 체제 측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그는 특권계급의 위선을 폭로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최대 권리-자기 자신일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그들의 기도를 폭로한다. 그는 수만 명의 청중들과 이야기하며, 그들의 가슴속 깊이 감명을 준다.
봄베이 시절
1968년
그는 봄베이에 정착해 살며 가르침을 계속한다. 그는 주로 고원의 피서지에서 정기적으로 명상캠프'를 열어 혁명적인 '다이나믹 명상법'을 도입하는데, 그것은 먼저 카타르시스를 허용함으로써 상념의 정지를 돕는 기법이었다. 1970년부터 그는 애정과 개인적 지도로써 사람들을 자기탐구와 명상으로 들어서는 길인 Neo-Sannyas로 인도하기 시작한다. 그는 축복 받은 자라는 의미인 '바그완(Bhagwan)'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1970년
서양으로부터 최초의 구도자들이 도착한다. 그들 가운데에는 많은 전문가들이 있었는데 이 때부터 오쇼의 명성은 유럽,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일본에까지 퍼지기 시작한다. 매달 명상캠프가 열렸고, 1974년에는 푸나(Poona)에 새로운 장소가 물색되어 그 곳에서 그의 가르침은 더 강렬해진다.
뿌나 시절
1968년
오쇼의 깨달음을 기리는 21번째 기념일에 뿌나에서 아쉬람이 열린다. 오쇼의 영향력은 이제 세계적인 것이 되었으나 동시에 그의 건강은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점점 자신의 방에 칩거하게 되었고, 아침에 강의를 할 때와 저녁에 구도자들의 입문을 받아들이거나 조언을 줄 때 두 번밖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게 된다. 동양의 명상에 대한 통찰과 서양 정신요법의 결합에 기초한 치료집단이 창설된다.
2년 만에 아쉬람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성장과 세라피(therapy)의 센터'라는 명성을 얻는다. 오쇼의 강의는 세계와 모든 위대한 종교적 전통을 포괄하고 있었으며 서양의 과학이나 사상에 관한 그의 해박한 지식, 언사의 명증성, 논의의 깊이는 오랜 동서양간의 단절을 해소시킨다.
70년대 후반까지, 뿌나에 있는 오쇼의 아쉬람이 현대의 진리 탐구자들의 메카였다. 열렬한 전통적 힌두교도인 인도 수상 Moraji Desai는 아쉬람을 인도의 변방으로 옮기려 하는 오쇼 제자들의 모든 시도를 방해한다. 그곳에서는 오쇼의 가르침을 응용하여 명상, 사랑, 창조성, 웃음 속에 살아가는 공동체를 창설하기 위한 실험이 가능했을 것이다.
1980년
강의 중에 오쇼를 암살하려는 기도가 어떤 전통적 힌두교파의 일원에 의해 일어난다. 동양과 서양의 공적인 종교, 교회들은 그를 비난하지만 그때까지 오쇼는 전 세계에 25만 명이 넘는 제자를 갖고 있었다.
새로운 국면 -라즈니쉬 푸람, 미국
1981년
5월 1일 오쇼는 침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등의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됨에 따라 그의 육체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가슴과 가슴을 통한 침묵의 교감'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긴급수술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의사와, 돌보는 사람들에 의해 미국으로 보내진다.
그의 미국 제자들은 센트랄 오레곤의 불모지에 있는 6만 4천 에이커의 목장을 구입하여 오쇼를 초대하는데 그곳에서 그는 신속하게 건강을 회복한다. 그리고 동물들이 풀을 너무 많이 뜯어먹어서 고갈되어 버린 황무지를 개간하여 5000명이 살 수 있는 녹색의 오아시스로 바꾸는 모범적인 농업공동체를 급성장 시킨다
해마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오쇼의 친구들을 위해 여름 축제가 열리고, 2만 명이 넘는 방문객들이 라즈니쉬 푸람이라는 이 새 도시에서 숙박하며 음식을 제공받는다.
오레곤 공동체의 급성장과 함께 주요 서방 국가들과 일본에서도 대규모 공동체가 형성되어 독자적 사업으로 생활을 꾸려가게 된다.
오쇼는 종교적 지도자로서 미국 정부에 영주권을 신청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거절한다. 공적으로 침묵할 것을 서약하라는 것이 그들의 요구였다. 동시에 새로운 도시는 오레곤 주정부와 다수파 기독교인들의 가중되는 법률적 공격에 직면하게 된다.
원래 환경보호를 위해 제정했던 '오레곤주 토지 이용법'이, 불모지를 개간하고 환경을 개선하는데 막대한 노력을 기울인 라즈니쉬 푸람에 반대하는 투쟁의 주요한 무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시야말로 전 세계를 위한 하나의 생태학적 모델이 되고도 남을만한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84년 10월, 오쇼는 자신의 저택에서 소수 그룹을 상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1985년
1985년 7월, 그는 라즈니쉬 만디르에서 매일 아침 수천 명의 구도자들에게 공개 강의를 하기 시작한다.
9월 14일, 오쇼의 개인 비서와 공동체 관리를 담당하던 몇 명의 구성원이 갑자기 사라지고, 그들에 의해 저질러진 비합법적인 행위가 밝혀진다. 오쇼는 이 문제를 전면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미 당국자들을 시로 불러 들였으나 당국자들은 이 기회를 공동체에 반대하는 싸움을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이용한다.
10월 29일, 오쇼는 노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샬롯에서 영장 없이 체포된다. 보석심문 때 그는 묶여 있었고, 그의 법정 출두를 위해 마련된 오레곤으로의 귀로는 통상 비행기로 5시간 걸리는 거리인데도 8일간이나 걸리게 된다. 수일 동안 오쇼는 행방불명이 된다. 나중에 그는 오클라호마주 연방형무소에서 '데이비드 와싱톤'이라는 이름으로 서명하도록 강요받았고 그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전염성 헤르페스를 앓고 있는 죄수와 함께 격리 감방에 수용되어 있었음을 밝힌다.
12일 동안 감금당하고 결박당하는 수난을 겪은 후 석방되기 바로 1시간 전, 오쇼가 수감되어 있던 오레곤주에서 보안시설이 가장 잘 되어 있던 포틀랜드 감옥에서 폭탄이 발견된다. 오쇼 이외의 죄수들은 모두 대피했는데도 오쇼는 1시간 동안이나 그 안에 갇혀 있게 된다.
11월 중순, 오쇼의 변호사들은 미 사법제도의 손안에 놓인 그의 생명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고발된 34개의 죄목 가운데 비교적 가벼운 '출입국 관리법 위반' 등의 두 항목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도록 그를 설득한다. 그러나 오쇼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알프레드 항변'에 들어간다. 그 항변은 미국 사법제도의 특이한 것으로, 그에 의해 무죄를 주장함과 동시에 그 죄목에 대한 논쟁을 펼칠 수도 있었다.
그는 40만 달러의 벌금을 물 것, 즉시 미국을 떠날 것, 5년 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을 명령받는다. 그는 자가용 제트 비행기를 타고 인도로 날아갔고, 거기에서 히말라야 산 속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한다.
기자회견에서 미 연방 검사 찰스 터너는 '오쇼의 비서에 대해 이루어진 고발이 왜 오쇼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며 세 가지 요점을 열거하는데, 정부의 첫 번째 관심사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었고 당국자들은 오쇼의 추방이 그것을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둘째, 그들은 오쇼를 순교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고 셋째, 오쇼가 어떠한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었다고 실토한다.
세계여행 -인권에 대한 탐구
1985년
12월, 오쇼의 비서와 동료, 의사는 인도에서 떠날 것을 명령받았고, 그들의 비자는 취소된다. 오쇼는 네팔의 카트만두로 떠나 그곳에서 강의를 재개한다.
1986년
2월, 오쇼는 30일간의 관광 비자로 그리이스에 간다. 그는 그 곳에서 한 그리스인 영화 제작자의 집에 머물며 매일 2회씩 강의를 시작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제자들이 모여들고, 그리이스 정교의 성직자들은 그를 국외로 추방하지 않으면 유혈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정부를 협박한다
3월 5일 경찰이 별장에 난입하여 영장도 없이 오쇼를 체포하고, 곧이어 아테네로 이송한다. 아테네에서는 겨우 2만 5천 달러의 금액을 내고 그를 인도행 배에 태우지 못하도록 당국을 움직일 수 있었다.
3월 6일, 오쇼는 자가용 제트기로 스위스를 향해 떠난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무장 경관들에 의해 7일간의 비자를 취소 당한다. 그는 '미합중국 출입국 관리법 위반'을 이유로 '탐탁지 않은 인물'로 선언되어 스위스를 떠나도록 명령받는다.
그는 스웨덴으로 향했는데 그곳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라이플 총으로 무장한 경관들에 의해 포위되어 '국가의 안전상 위험하다'는 이유로 경고를 받고 즉각 출국하도록 명령받는다.
그는 영국으로 간다. 이번에는 법률상의 이유로 비행기 조종사가 8시간의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오쇼는 일등급 통과여객용 라운지에서 대기하기를 윈했지만 허용되지 않고 호텔에서 1박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대신 그와 그의 일행은 난민들로 북적거리는 작고 더러운 방에 갇히게 된다.
3월 7일, 오쇼와 그 일행은 아일랜드로 간다. 그 곳에서 그들은 관광비자를 받고 리메릭 부근에 있는 호텔로 갔으나 다음 날 아침 경찰이 와서 그들에게 즉시 떠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했다. 그때까지도 캐나다 정부에서는 오쇼의 비행기가 예정지인 카리브해의 안티구아로 가는 도중 연료를 보급받기 위해 캐나다 공항에 착륙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료 보급의 권리에 대한 이 이해할 수 없는 거부는, 오쇼가 비행기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보증을 했던 런던 로이드 보험 협회의 보증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행된 것이었다.
당국을 난처하게 만드는 공표는 일체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다른 채비가 마련될 때까지 아일랜드에 체재하는 것이 허용된다.
이 대기 중에 안티구아는 오쇼의 입국 허가를 철회한다. 홀랜드도 타진했지만 그들 역시 오쇼를 거절한다. 독일은 이미 오쇼의 입국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저지법'을 통과시켜 놓은 상태였다. 이탈리아에서는 그의 관광비자 신청의 심리가 연기된 상태였고, 10개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미루고 있었다.
3월 19일, 뜻밖에 우루과이에서 초청장이 발급된다. 3월 19일 오쇼와 그 동반자들은 세네갈의 다카르를 경유하여 몬테비데오로 날아갔고, 우루과이는 영주 가능성까지 밝힌다. 우루과이에서 모든 나라들이 그의 입국 허가를 거부한 이유가 밝혀진다 오쇼 일행이 '밀수, 마약취급, 매춘'에 연루되어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인터폴의 루머에 대해 언급한 '외교상의 비밀정보(이 모든 것은 NATO의 정보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에 관한 텔렉스가 미리 입국 예정국에 도착하여 경찰이 경계태세를 갖출 시간적 여유를 주었던 것이다. 우루과이도 곧 다른 나라로부터 압력을 받게 된다.
5월 14일, 우루과이 정부는 기자회견을 통해 오쇼가 우루과이의 영주권을 얻었다고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바로 그날 밤 우루과이 대통령 상귀네티는 오쇼가 우루과이에 체재한다면 현재의 미국 차관 600억 달러는 회수될 것이고 앞으로 어떤 차관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하는 미국 정부의 전화를 받았다. 그래서 6월 18일 오쇼는 우루과이를 떠나야 했고, 다음날 워싱턴에서는 레이건이 우루과이에게 1억 5천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한다.
6월 19일, 자마이카는 오쇼에게 10일간의 비자를 허용한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자마자 미해군의 제트기가 오쇼의 자가용 제트기 곁에 착륙하더니 두 사람의 요원이 접근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오쇼와 그 일행의 비자는 취소된다.
오쇼는 마드리드를 경유하여 리스본으로 날아갔고, 잠시 동안 발견되지 않고 머물 수 있었다. 그러나 수주일 후 경관들이 그가 쉬고있는 별장을 포위했으며, 오쇼는 다음날 인도로 돌아갈 것을 결정한다. 이렇게 모두 21개의 국가들이 그를 추방하거나 입국을 거절했다.
7월 29일, 오쇼는 인도의 봄베이에 도착해 그곳에서 인도 친구의 개인적인 손님으로 6개월간 체재한다. 그는 그 친구의 집에 은둔하며 매일 강의를 재개한다.
1987년
1월 4일, 오쇼는 1970년대의 대부분을 보냈던 뿌나 아쉬람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뿌나의 경찰서장은 '시의 평화를 어지럽힐 염려가 있는 문제 인물'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떠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그 명령은 같은 날 봄베이의 고등재판소에 의해 무효화된다. 그러자 1980년 5월 공개 강의 중에 칼을 던져 오쇼를 살해하려 했던 그 힌두교 광신자들이 오쇼를 뿌나에서 추방하지 않는다면 격투기로 훈련된 200명의 기습부대로 아쉬람을 침입하겠다고 협박하기 시작한다.
8월, 소위 '자유세계의 정부'들이 연금 상태로 오쇼를 고립시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제자들은 다시 한번 스승과 함께 하기 위해 뿌나로 향한다.
1990년
1월, 오쇼는 많은 가르침을 남기고 인도의 뿌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종교의 시작은 아니다.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어떠한 경계도 모르는,
오직 영혼의 자유만을,
오직 그대 존재의 침묵만을,
오직 그대 잠재력의 성장만을,
그대 밖의 신이 아닌 오직 그대 자신으로부터 흘러 넘치는
신성(神性)만을,
그대 안에 존재하는 그 신성의 경험만을 아는
나는 완전히 새로운 종교성(religiousness)의 시작이다. (6P)
PART ONE 평범한 인간 전설 속의 숨은 역사
황금빛 어린 시절의 일별들
나에게 있어서의 영성은 순수한 개인성을 필요로 한다. 영성은 어떠한 종류의 의존도 허용하지 않는다. 영성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자유를 창조해낸다. 영성은 결코 군중 속에 있지 않으며 언제나 홀로 있다. 왜냐하면 군중은 결코 어떤 진리도 발견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오직 홀로있음 속에서만 발견되어 왔다.(19P)
나에게 있어 영성은 단지 자신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대신하여 이 일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대를 위해 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스스로 그것을 해야 한다.(20P)
1931-1939:
인도, 마드야 프라데시주, 쿠츠와다
(Kuchwada, Madhya Pradesh, India)
“7년 뒤에는 아이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세요. 하지만 7년 동안 만큼은, 아이는 단지 자신의 타고난 자아가 되어야 해요. 그리고 우리는 끼여들지 않을 거예요.”-오쇼의 나니-(30P)
"얼마든지 아이들을 망쳐 놓으세요. 하지만 저는 거칠어요. 그리고 계속 거친 아이로 남아 있을 거예요.“(31P)
사실은 만약 그대가 어떤 종교라도 믿는다면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종교는 그대 명상의 하나의 방해물이다. 명상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천국도, 지옥도, 형벌에 대한 두려움도, 보상에 대한 유혹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명상은 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명상은 마음을 넘어서 있는데 반해서 종교는 오직 마음 뿐이다. 종교는 마음 안에 있다.(36P)
에고(ego) : 자아 인간이 ‘나’라고 믿는 허상(虛像), 소아(小我). 에고의 허상을 부수고, 그것에 가려져 있던 실체인 진아(眞我) 즉, 아트만(Atman)을 회복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38P)
언제나 자신에게 진실한 나니는 말했다. “바꾸기에 너무 늦는 법은 없어요. 당신의 선택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바꾸세요. 사실 당신은 늙어가고 있으니까 더 빨리 바꿔야 해요. 늙었으니까 바꿀 수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젊은 사람은 바꾸지 않을 여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늙은 사람은 그럴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이미 충분히 늙었어요.”(56P)
반역적이지 않은 사람은 종교적일 수 없다. 반역은 종교의 근본 그 자체이다.(57P)
“사랑에 빠지는 데는 ‘왜’가 없다. 나는 그저 그를 보았고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의 눈을 보았고 내 안에서 신뢰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신뢰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오쇼의 나니-(62P)
반역적인 영혼
나의 관심은 언제나 똑같았다.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대답을 발견하기 전에는 결코 휴식하지 않을 것이며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휴식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68P)
1931-1951:
인도, 마드야 프라데쉬, 가다와라
(Gadawara, Madhya Pradesh, India)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속에서만 죽음을 만날 수 있다.
사랑과 죽음이 함께 그대를 감쌀 때 마치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는 것과 같은 하나의 변형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그때 그대는 결코 전과 같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사랑 없이는,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로 가는 열쇠를 주지 않는다. 사랑이 있을 때,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통하는 열쇠를 건네준다.(69P)
자유가 함께하는 사랑, 만약 그대가 그것을 갖는다면 그대는 왕이나 여왕이다. 자유가 함께하는 사랑, 그것은 진정한 신의 왕국이다. 사랑은 그대에게 땅으로 통하는 뿌리를 주며, 자유는 그대에게 날개를 준다.(69P)
나니는 말했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 걱정할 필요 없다. 그는 충분히 살았단다. 더 이상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그녀는 또 내게 말했다. “잊지 마라. 지금의 순간들은 잊어서는 안 될 순간들이다. 결코 더 이상을 요구하지 마라. 주어지는 만큼으로 충분하다.”(71P)
그 7년 동안 나는 정말로 철저한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이제 나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72P)
나는 말했다. “저는 그저 이 가게가 아버지를 망쳐놓은 것처럼 저까지 망쳐놓을까 봐 그러는 것 뿐이에요. 저는 이 가게를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아요. 저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조금도 관심이 없어요.”(73P)
인간은 명사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창조해냈고 스스로 만든 세상 속에 갇혀버렸다. 인간은 나무들의 세상을, 강들의 세상을, 산과 별의 세상을 잊었다. 나무나 강은 명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나무나 강은 명사에 대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오직 동사만을 안다. 모든 것은 과정이다. 신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다.(100P)
모두가 다른 누군가의 이상(理想)에, 그들의 이상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단지 하나의 복사품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신은 나에게 아무런 본래의 얼굴도 주지 않았단 말인가? 나는 빌어 온 얼굴로, 가면을 쓰고서, 나에게는 아무런 얼굴도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삶이 하나의 기쁨이 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얼굴조차 그대의 것이 아니라면….(104P)
그대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그대 자신이 되지 말라고 배웠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방식은 매우 교묘하고 교활하다. 그들은 “너는 크리슈나처럼, 붓다처럼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붓다나 크리슈나를 아름답게 그려놓아 그대 안에 붓다나 예수, 크리슈나가 되고 싶은 커다란 열망이 일어나도록 만든다. 이 열망이 그대 고통의 근원이다.(105P)
요점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만약 그것이 그대의 의지에 반한다면 비록 천국에 있다해도 그대는 지옥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존재의 자연스런 길을 따른다면 비록 지옥에 있다 해도 그대는 천국에 있을 것이다.
천국은 그대의 진정한 존재가 꽃피는 곳이다.
지옥은 그대가 짓눌리고 다른 어떤 것이 그대에게 강요되는 곳이다.(106P)
“나는 사람들이 웃기를 바래요. 오래된 이야기를 매년 반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졸고 있지요. 모두 그 이야기를 알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모든 대사를 다 알아요.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의미한 일이예요.”
그러나 늙은 전통주의자들, 진부한 사람들로서는 웃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대는 교회 안에서 웃을 수 없다.(112P)
몇 번쯤 넘어지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좋다. 몇 번쯤 길을 잃는 것은 좋다. 해가 될 것은 없다. 그대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돌아오라. 삶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116P)
불멸을 찾아서
그대가 죽을 때, 그대는 그대의 에너지를 풀어놓고 그 에너지와 함께 그대 일생의 경험을 풀어놓는다. 그대가 어떠했든지…… 슬펐든지, 행복했든지, 사랑이 넘쳤든지, 분노했든지, 열정적이었든지, 인정이 많았든지…… 그대가 어떠했든지 그 에너지는 그대 일생의 진동을 담고 있다. 성자가 죽을 때 단지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커다란 선물이다. 단지 쏟아지는 그의 에너지에 젖어드는 것은 커다란 영감을 준다. 그대는 완전히 다른 차원 속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의 에너지에 취할 것이다. 그대는 술에 취한 것처럼 느낄 것이다. 죽음은 하나의 완전한 성취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삶을 살았을 때에만 가능하다.(132P)
7일 동안 나는 기다렸다. 그 7일은 하나의 아름다운 경험이 되었다. 죽음은 결코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 쪽에서는 모든 방법을 다해서 죽기 위해 노력했다. 이상하고 기이한 느낌이 일어났다.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기본적인 것은 이것이었다. 즉, 죽는다고 느끼고 있으면 차분하고 고요해 진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아무 것도 걱정거리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걱정들은 삶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삶이 모든 걱정의 바탕이다. 어쨌거나 그대는 어느 날엔가는 죽을 것이다. 왜 걱정을 하는가?(139P)
깨달음:
과거와의 단절
나는 모든 야망을 잃었다. 누군가가 되고 싶은 욕망도, 도달하려는 욕망도 없었다. 나는 단지 나 자신 속으로 던져졌다. 그것은 하나의 공(空)이었고 그 공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러나 공은 신에게로 가는 유일한 문이다. 그 말은 오직 미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58P)
그대는 내게 묻는다. 당신이 깨달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는 웃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애쓰던 그 모든 어리석음을 보고 나는 정말 정신없이 웃었다. 모두가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깨달음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미 주어진 것을 얻기 위해 그처럼 애를 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대가 이미 그것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얻어질 수 있는 것은 그대가 지니고 있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그대의 본성 그 자체이다.(159P)
‘내가 깨달음을 얻은 날’이라는 말은 단순히 성취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날이라는의미일 뿐이다.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모습 그대로 완전하다. 아무런 발전도, 어떠한 발전도 필요치 않다. 신은 어떤 것도 불완전하게 창조하지 않는다. 설사 그대가 불구인 사람을 발견한다 해도, 그대는 그 사람이 완벽한 불구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은 결코 불완전한 것을 창조하지 않는다.(160P)
내가 ‘깨달음을 얻는 날’이라고 말할 때, 나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단어가 없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는 성취, 달성, 목표, 발전, 성장, 진화와 같은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160P)
노자(老子)는 말한다. 진리가 말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언어는 사용되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161P)
탐구하는 것을 멈춘 그날, 어떤 것을 찾는 것을 그만 둔 그날, 어떤 것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던 그날, 그것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났다. 그 어디도 아닌 곳으로부터……. 그 에너지는 어떤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곳도 아니면서 또한 모든 곳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그것은 나무 속에 있었고, 바위와 하늘과 태양과 공기 속에도 있었다.(164P)
노력이 멈춘 그날, 나 또한 멈췄다. 노력 없이는 그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이 없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애씀이 없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에고나 자아라는 현상은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은 그대 안에 있는 물질이 아니다. 그대는 매순간 그것을 창조해야 한다. 그것은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것과 같다. 페달을 밟으면 자전거는 계속 달리지만 페달을 밟지 않으면 멈춘다.(165P)
에고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계속 욕망의 페달을 밟기 때문이며, 계속 무언가를 얻으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이며, 계속 자기 자리보다 앞을 향해 도약하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의 자리보다 앞으로 도약하는 것, 미래로 도약하는 것, 내일로 도약하는 것, 이러한 것이 바로 에고의 현상이다. 비존재 속으로의 도약은 에고를 만들어 낸다. 비존재에서 나오는 것은 신기루와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165-166P)
그날 욕망이 멎었다. 그날 나는 그것을 보았고 그것이 허망한 일일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무력했고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무언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여러 생을 거치면서 노력해왔지만 일어나지 않고 있었던 그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대의 희망없음 속에 유일한 희망이 있다. 그대의 욕망없음 속에 그대의 유일한 충족이 있다. 그대의 엄청난 무력함 속에 불현듯 전 존재가 그대를 돕기 시작한다.(168P)
붓다들의 힘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전적으로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미꽃이나 이슬방울처럼…… 그들의 힘은 매우 부서지기 쉽고 연약하다. 그들의 힘은 죽음의 힘이 아닌 생명의 힘이다. 그들의 힘은 죽이는 힘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창조하는 힘이다. 그들의 힘은 폭력과 공격성의 힘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연민의 힘이다.(180P)
그대는 그대 주위에 자신의 꿈을 창조해낸다. 그리고 그대가 깨어나지 않는 한 그대는 계속해서 꿈을 꿀 것이다. 세상은 비실재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아는 세상은 그대 꿈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꿈들이 떨어져 나가고, 그대가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만날 때, 그때 진짜 세상이 드러난다.(183P)
그날 밤 나는 텅 비었고 동시에 가득 찼다. 나는 비존재적이 되었고 동시에 존재적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그것은 죽은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별개의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연속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별개의 것이다. 죽은 자는 완전히 죽었다. 그의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184-185P)
그날 밤의 죽음은 전체적이었다. 그것은 죽음과의 데이트이며 동시에 신과의 데이트였다.(185P)
깨달음은 다름 아닌 깨어남이다. 깨달은 사람에게 있어 우리의 모든 삶은 단지 꿈들이다.(187P)
깨달음은 매우 개인적인 노래이다. 언제나 미지의 것이고,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독특하다. 그것은 결코 하나의 반복으로써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코 깨달은 두 사람을 비교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둘 중 한사람, 혹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부당한 짓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고정된 관념도 갖지 말라. 단지 매우 액체와 같은 특질들이 기억되어져야 한다. 나는 굳게 정해진 자격요건이 아닌, 액체와 같은 특질을 말하고 있다.(192-193P)
삶에서 그의 유일한 노력은 ‘어떻게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느냐’일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만이 모든 행동 뒤의 유일한 목적이다. ‘어떻게 사람들을 점점 더 깨어나게 할 것인가?’ 왜냐하면 깨어남을 통해서 그는 삶의 궁극적인 지복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195P)
칼날을 세우며
길 위에서
나의 통찰 속에서 과학, 종교, 예술, 그것은 하나의 삼각형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참으로 다른 자원들이다. 그것들은 다른 언어를 쓴다. 그것들은 서로 모순적이다. 그것들은 표면적으로는 조화되지 못한다. 그것들이 모두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깊은 통찰을 그대가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의 노력은 거의 불가능한 것을 하는 것이었다.(238P)
"선생님께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앞으로 저는 진리를 담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의 통합적인 전체 속으로 가져오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논쟁과 부정에 근거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인류의 지식과 인류의 지혜에 기여한 모든 것들의 본질적인 핵심에 대한 깊은 통찰에 근거한 삶의 방식을 창조하려는 것이예요."(239P)
"그들의 단어를 사용하자.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자. 그들의 경전을 사용하자. 다른 사람의 총을 사용한다고 해서 자신의 총알을 넣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총이야 누구의 총이든 상관없다. 총알은 나의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작용은 총이 아니라 총알을 통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쁠 것이 뭐가 있겠는가?"(253P)
표현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다:
단어들 사이의 침묵들
스승이 되는 매우 드문 사람들은 여러 생을 통해 단어와 언어, 어감, 언어의 아름다움과 운율에 대한 어떤 명료성을, 어떤 통찰력을 얻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언어학이나 문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언어 속에서 어떤 비범한 음악을 발견하는, 평범한 산문에서 위대한 시의 질(質)을 창조하는 문제에 더 가깝다. 그들은 그대가 말을 넘어가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단어를 가지고 노는 법을 안다.(273P)
나는 그대에게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 마음의 기능을 정지시키기 위해 이야기한다.(274P)
나의 목적은 참으로 독특하다. 나는 단지 침묵의 간격들을 창조하기 위해 말을 이용하고 있다.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때문에 나는 모순적이고 불합리하고 관계 없는 어떤 말도 할 수 있다. 나의 목적은 단지 간격들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들은 부차적이다. 그 말들 사이의 침묵들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대에게 명상의 일별을 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그 일별이 그대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대는 이미 그대 자신의 존재를 향해 많이 온 것이다.(276P)
나의 성공은 그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성공은 그대에게 진정한 명상의 맛을 주는 것, 그래서 그대가 명상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무심의 상태가 단지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자격도 필요치 않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278P)
존재는 도덕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존재는 도덕과는 관계가 없다. 존재에 있어서는 옳은 일도 없고, 그른 일도 없다. 오직 한가지 만이 옳다. 그대의 각성과 자각이다. 그때 그대는 지복이 넘친다.(279P)
깨달음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유일한 경험이다.(281P)
명상은 빛을 가져오려는, 기쁨을 가져오려는, 침묵을 가져오려는, 지복을 가져오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명상의 세계에서 그대는 어떤 잘못된 일도 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그것을 완전히 바꾸었다. 종교는 행동을 강조해왔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의식(意識)이다. 그리고 의식은 오직 침묵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침묵은 의식을 위한 올바른 토양이다. 그대의 머리가 소란스러울 때 그대는 그다지 깨어 있거나 의식적이 될 수 없다. 그대가 의식적이고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소란스러울 수 없다. 그 둘은 공존할 수 없다.(285P)
PART TWO 빈 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여러 얼굴
빈 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여러 얼굴
만약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나와 똑같이 절대적으로 비어 있어야 한다. 그때에는 두 거울이 서로 마주보고 있게 될 것이고 두 비어있음만이 비춰질 것이다. 무한한 비어있음이 비춰질 것이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거울...... 그러나 그대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내 안에서 그대 자신의 생각을 볼 것이다.(293P)
나는 섹스가 사랑의 영역에서 법의 영역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왔다. 단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아내이기 때문에 한 여자를 사랑해야 하게 되는 그 순간, 그것은 매춘이다. 법적인 매춘이다.(300P)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전 세계에서 겨우 열두 명만이 그의 이론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물리학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고 하지만 그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이것은 정말 추한 사태이다. 따라서 나의 일은 종교를 창조하기 위한 것이 아닌 종교성을 창조하기 위한 운동이다. 나는 종교성을 하나의 특질로 바라본다. 그것은 조직의 회원권이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내적인 경험이다.(303P)
'깨끗함은 신(神)에 다음 가는 것이다.'라는 옛말이 있다.
이제 신은 없으니 깨끗함만 남았다. 깨끗함이 신이다. 그리고 나는 세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대의 마음에 바퀴벌레들을 넣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가 깨끗한 마음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깨끗한 마음을 알게 되면 그대는 결코 누구에게도 그대의 마음 속에 쓰레기와 똥을 던져 넣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범죄자들이다.(304-305P)
이것은 스승과 제자들의 단체가 아니다. 이것은 스승과 잠재적인 스승들의 모임이다.(306P)
사기꾼
세상의 모든 스승들은 이야기들을, 우화들을 들려주어 왔다. 왜인가? 그냥 간단히 진리를 말하면 된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밤은 길고 그대는 깨어 있어야 한다. 이야기들이 없다면 그대는 잠에 빠지게 된다.
아침이 오기까지는 그대의 관심을 끌어두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스승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진리는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진리를 볼 수 있는 지점으로 이끌려 갈 수는 있다.(308P)
'자칭 바그완(Bhagwan)'
'바그완'이란 경험의 한 상태이다. 임명이나 선거, 직함, 학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전 존재가 신성으로 가득하고 신성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바그와타(bhagwata), 즉 신성(神性)의 경험이다.
신은 없다. 그러나 모든 꽃 속에, 모든 나무 속에, 모든 돌 속에 신성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 안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에만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그 언어를 모른다.(314P)
'바그완'은 비(非) 비교급 단어이다. 그대는 신보다 더 신적(神的)일 수 없다. 신보다 더 신일 수 없다. 그것은 비 비교급 단어이다. 그리고 그 단어는 어떠한 성취도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그대의 본성을 보여준다. 사람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신이다. 단지 그것을 깨달아야 할 뿐이다.(320P)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시인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삶을 향한 나의 접근은 연애소설과 같은 접근이다. 그것은 로맨스이고 상상이 가득한 세계이다. 나는 그대들 모두 신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그대가 그대의 진정한 존재를 드러내기를 바란다. 나를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의 자극이다. 그것은 미묘한 자극이다.(323P)
그리고 서서히 그대는 주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주인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그 주인은 그대 내면 깊은 곳의 핵(核)으로부터 온다. 그 주인은 그대의 심연으로부터 떠오른다. 나는 안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발견했다. 나의 메세지는 간단하다. 나는 내안에서 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가 안을 들여다보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유일한 문제는 '언덕 위의 주시자' 가 될 수 있냐는 것이다. 깨어서 관찰하라. 지켜보는 자가 되어라. 그러면 그대는 충족될 것이다.(324P)
부자들의 스승
그대는 묻는다. "당신은 부유한 자의 스승입니까?" 그렇다. 왜냐하면 오직 부유한 자만이 나에게 올 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부유한 자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내적으로 매우 가난한 자이다. 내가 부유한 자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지적으로 부유한 자이다. 세상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고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발견한 자이다.(329P)
종교는 사치품이다. 최후의 사치품이다. 나는 종교를 그렇게 부른다. 왜냐하면 종교는 가장 높은 가치이기 때문이다.(330P)
농담꾼
웃음은 그대 내면의 근원으로부터 그대의 표면으로 어떤 에너지를 가져온다.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한다. 에너지는 그림자처럼 웃음을 따라온다. 그것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그대가 정말로 웃을 때, 한순간 동안 그대는 깊은 명상적 상태 속에 있다.(343P)
그대가 정말로 웃을 때, 문득 마음은 사라진다. 선(禪)의 모든 방법론은 어떻게 무심 속으로 들어가느냐는 것이다. 웃음은 무심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의 하나이다.(343P)
웃음은 사념없는 상태로 가는 아름다운 전주곡이 될 수 있다.(344P)
롤스로이스 구루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즐겁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명상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을 신의 선물처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352P)
영적인 마음은 물질과 영혼 사이에 어떤 구분도 두지 않는다. 물질과 영혼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전 존재는 하나이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마음이다. 물질주의자는, 여자를 사랑할 때조차도 그녀를 물건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그렇다면 영혼주의자는 어떤 사람인가, 영혼주의자는 물건을 만질 때조차도 그것을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이다.(353P)
스승
스승은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불러낼 수 있다. 그는 그대 안의 무언가를 휘저을 수 있다. 그는 불꽃에 불을 붙이는 그대 안의 어떤 과정을 촉발시킬 수 있다. 그대가 진리이다. 단지 너무나 많은 먼지가 그대 주위를 감싸고 있을 뿐이다. 스승의 역할은 소극적인 것이다. 스승은 그대에게 목욕을, 샤워를 시켜주어야 한다. 그래서 먼지가 사라지게 해야한다.(361P)
위대한 선사 다이에(Daie)는 말한다. "현자(賢者)들, 성자들, 스승들의 그 모든 가르침들이 설명하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이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 이것!'이라는 그대의 갑작스런 외침에 대한 주석들일 뿐이다."
갑자기 그대가 깨끗해질 때, 그대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환희가 일어나고그대의 전 존재가, 그대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춤을 춘다. 그리고 그대는 말한다. "아, 이것! 알렐루야!" 그대의 존재 안에서 커다란 기쁨의 외침이 일어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불현듯 서까래에서 별이 떨어진다. 그대는 존재의 영원한 춤의 일부가 된다.(362P)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그대가 그대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이는 순간 탄생한다. 그대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탄생한다. "지금의 내가 무엇이든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선택이다. 그것은 이 순간의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고 싶다면 그것을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나의 자유이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어떤 사회적 강요도, 어떤 국가도, 어떤 역사도, 어떤 경제도, 어떤 무의식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368P)
내가 꼭두각시 부리는 사람이 없다고, 신이 없다고, 성자가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이 모두 쓰레기라고 말할 때, 나는 그대에게 전적인 자유를 주려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그대가 절대적으로 책임을 지게 하려하고 있다. 이 자유를 즐겨라. 그대가 그대 삶의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이 위대한 자각을 즐겨라. 그때 그대는 내가 '개인'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이 되는 것은 알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며, 경험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개인이 되는 것은 해방되는 것이며,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372P)
나는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달을 가리켜 보여줄 수 있다. 부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지 말라. 이 손가락은 사라질 것이다. 달은 남을 것이다. 그리고 탐구는 계속될 것이다.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의 인간이라도 남아 있는 한, 산야스의 꽃들은 계속해서 피어날 것이다..(376P)
PART THREE 유산
종교 아닌 종교
기독교,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이슬람교...... 이런 것들은 단지 이데올로기이며 교리이며 교의이다. 그것은 단지 예식이다. 진정한 종교는 이름이 없다. 결코 어떤 이름도 가질 수 없다. 붓다는 그것을 살았다. 예수는 그것을 살았다. 그러나 기억하라. 예수는 기독교도가 아니었으며, 붓다는 불교도가 아니었다. 결코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들은 단순히 종교적이었다.(384P)
과학은 객관적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며 종교는 주관적인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다.(386P)
물질의 차원 안에서의 앎을 그대는 객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대의 내면성의, 그대의 내면의 존재의, 그대의 의식(意識)의 차원안에서의 앎, 그것을 그대는 주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종교라는 말은 필요치 않다.(386P)
어떤 것도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 그것이 가학의 근본이다. 그것이 진리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다. 믿지 말라. 물어라. 그대가 믿는 그 순간 질문은 멈춘다. 그대의 마음을 열어두라. 믿지도 말고 믿지 말지도 말라. 단지 깨어 있는 채로 모든 것을 탐구하고 의심하라, 그대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그것이 진리이다. 그대는 그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것은 믿고 안 믿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현상이다. 그것은 그대를 완전히 압도하는 너무나 분명한 확실성이기에 그것을 의심할 방법이 없다.
이것이 앎이다. 그리고 이 앎이 인간을 붓다로, 깨달은 자로 변형시킨다. 이것이 모든 인간 성장의 목표이다.(387P)
아디나타는 신을 제거했지만 공백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붓다는 그 공백을 명상으로 채웠다. 아디나타는 신이 없는 종교를 만들었다. 붓다는 명상적인 종교를 만들었다.
명상은 붓다의 기여이다. 중요한 것은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더 고요해지고, 더 이완되며, 더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식의 중심에 도달하기 위한 내면으로의 여행이며 자기 자신의 의식의 중심은 전 존재의 중심이다.(391P)
이제 나의 노력은 그들의 신을 해체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종교 또한 해체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잊혀질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명상만을 남겨두는 것이다..(393P)
나의 노력은 성직이라는 것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다. 성직은 신과 함께 남아 있었고 신이 없는 종교에도 남아 있었다. 이제 유일한 길은 우리가 신과 종교 모두를 제거하여 어떤 성직의 가능성도 없게 하는 것이다. 그때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자기 자신의 성장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안는다.(394P)
만약 성직자가 없다면 그대는 그대가 어떤 상태이든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대의 책임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의 불행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는 느낌은 그대에게 문을 열어준다. 이제 그대는 이 불행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과 방법들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명상은 단순히 불행, 고통, 고뇌, 근심의 정반대 상태이다. 너무나 고요하고 너무나 영원하게 느껴져서 그대는 그 이상의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명상적인 마음의 상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따라서 그대는 이것을 세 번의 양자도약이라고 부를 수 있다.(395P)
진짜 문제는 성직자이다. 그리고 신은 정직자의 날조물이다. 성직자를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가 신을 버린다 해도 성직자가 언제나 새로운 예식들을 찾아낼 것이다. 그는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낼 것이다.(397P)
명상이라는 말은 무거워 보인다. 단지 단순한, 순수한 침묵이라 부르는 편이 낫다.(399P)
21세기를 위한 명상
마음은 단지 하나의 기계장치일 뿐이다. 말을 할 수도 있고 침묵할 수도 있다. 유일한 문제는 마음이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음은 하인이 되어야 한다. 하인으로서 마음은 훌륭하다. 주인으로서 마음은 위험하다. 그대가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단지 명상속에 있을 수 있을 뿐이다. 명상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존재하는 것이다. 명상은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다.(407P)
동양에는 드야나(dhyana)라는 다른 단어가 있다. 드야나란 무언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집중을 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할 뿐이다. 오히려 그것은 마음의 모든 내용물을 버리고 단지 존재하는 것이다. 드야나가 의미하는 명상은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목적도 없고 만족도 없는 의식(意識)의 상태이다. 그대는 계속해서 버린다. 네티, 네티(neti, neti),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대는 계속해서 좋건 나쁘건 모든 생각들을 거부한다. 모든 생각들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그것이 그대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성(神性)이다.(408P)
명상은 도박이다. 다른 모든 도박에서는 어떤 물건을 내건다. 그러나 명상에서는 우리 자신을 내건다. 명상은 분명히 도박꾼의 행위이지 사업가의 행위는 아니다. 사업가의 관심은 이득이 적더라고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박꾼의 관심은 모든것을 잃을 위험이 있더라도 이득이 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박꾼과 사업가의 차이이다.(417P)
제3의 심리학:
붓다의 심리학
붓다의 심리학은 분석도 아니고 종합도 아니다. 그것은 초월이다. 그것은 마음을 넘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 안에서의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를 마음 밖으로 데려가는 작업이다. 그것이 바로 영어의 무아경(ecstasy)이라는 단어가 나타내는 의미이다.(428P)
그대의 마음을 더 자각하라. 그러면 마음을 자각하는 가운데 그대는 그대가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혁명의 시작이다. 그대는 높이 더 높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마음에 붙잡혀 있지 않다. 마음은 바윗덩이와 같은 작용을 하여 그대를 아래로 끌어내린다. 마음은 그대를 중력의 장(場) 안에 붙잡아 둔다. 그대가 더 이상 마음에 묶여 있지 않게 되는 순간 그대는 붓다장(buddhafield)으로 들어간다. 중력이 그대에 대해서 그 힘을 잃을 때 그대는 붓다장 속으로 드어간다. 붓다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공중부양의 세계 속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그대는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마음은 계속 그대를 아래로 끌어내린다.(433~434P)
치유는 그대가 더 이상 마음에 붙잡혀 있지 않을 때 찾아온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분리될 때, 비동일시될 때, 완전히 벗어날 때, 속박이 끝날 때, 그때 치유가 일어난다.
초월이 진정한 요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심리치료요법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심리에만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더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 그 자체를 치유한다. 마음은 단지 그대의 주변일 뿐이다. 마음은 그대의 중심이 아니다.(434~435P)
사회에서 시작해서 그대 자신에 도달하라. 공동체로부터 달아나지 말라. 세상 속에 살아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는 말라. 관계하라. 그러나 여전히 홀로 남아라. 사랑하고 명상하라. 명상하고 사랑하라. 그러나 선택하지 말라. 사랑 더하기 명상, 그것이 나의 방식이다.(444P)
마음은 그대를 속일 수 있다. 마음은 그 안에 비치는 것이 실재라는관념을 그대에게 줄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이 치워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바로 그것이 명상이다. 명상은 무심의 상태이다. 명상은 마음을 가져간다. 그리고 명상은 그대에게 거울에 비친 그대 존재의 보물이 아닌, 보물 그 자체를 볼 기회를 준다.(460P)
조르바 붓다:
완전한 인간
삶을 아주 즐거운 태도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그대는 양쪽 세상을 함께 가질 수 있다. 그대는 케익을 먹기도 하고 동시에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예술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 소리와 침묵, 사랑과 명상, 사람들과 관계속에 함께 있는 것과 홀로 있는 것. 그대는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을 함께 겪어야 한다. 오직 그때에만 그대는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곳과 가장 높은 곳을 알게 될 것이다.(461P)
나는 가난함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왜냐하면 한 나라가 가난해질 때면 언제나 그 나라는 모든 명상과의, 모든 영적인 노력과의 접촉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외적으로 가난해질 때마다 그 나라는 내적인 가난함을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464P)
그대가 내면의 부유함을 창조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다시 하나의 조화로움이 일어날 때, 즉 외면의 부와 내면의 부가 만날 때, 그때 거기 진정한 만족이 있다.(468P)
명상은 홀로있음의 기술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랑은 함께 있음의 기술을 의미한다. 완전한 인간이란 양쪽 모두를 알며 가능한 한 쉽게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475P)
나의 신인간의 개념은 그리스인 조르바도 되고 고타마 붓다도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신인간은 '조르바 붓다'가 될 것이다. 그는 감작적이면서 영적일 것이다. 육체적이면서, 전적으로 육체적이면서, 육체 속에서, 감각 속에서, 육체와 육체가 가능케 하는 모든 것들을 즐기면서, 동시에 엄청난 의식(意識)이, 엄청난 주시(注視)가 거기 있을 것이다. 그는 예수이며 동시 에피쿠로스일 것이다.(483P)
PART FOUR 오쇼의 일생과 그 주요 사건들
오쇼의 일생과 그 주요 사건들
외부상황은 변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어느 날은 성공하고, 어느 날은 실패한다. 어느 날은 정상에 있고, 또 어느 날은 밑바닥에 있다. 그러나 그대 안의 무엇인가는 언제나 그대로이다. 그리고 바로 그 무엇인가가 그대의 실체이다. 나는 나의 실체 안에 살 뿐이다. 나는 실체를 둘러싼 모든 꿈과 악몽들 속에 살지 않는다.(491P)
1964년 6월:라나크푸르(Ranakpur)명상캠프
[완전한 길(The Perfect Way, Rebel Publising House, India)]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다. 캠프의 앞부분에서 그는 캠프에 참여하기 위한 세 가지 지침을 제시한다.
첫 번째 금언은 현재에 살라는 것이다. 오직 현재만이 실재이고 살아 있다. 그리고 만약 진리가 알려져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현재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두 번째 금언은 자연스럽게 살라는 것이다. 배우가 연극을 마친 뒤에 화장을 지우고 의상을 벗어놓듯이 그대는 그대의 거짓 가면들을 한쪽에 벗어 두어야 한다. 그대 안의 근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나오게 하라. 그리고 그 안에 살아라.
세 번째 금언은 홀로 살라는 것이다. 내적으로 그대 안에 수많은 것들이 부산을 떨게 하지 말라. 그리고 외부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495P)
만약 그대가 사랑에 관한 원초적인 진실을 알기를 원한다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그대가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열린 가슴으로 성(性)의 신성함을, 성의 성스러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열린 가슴과 마음으로 성을 충분히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그대는 성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성을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그대는 더 성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497P)
나에게 있어 산야스란 '나는 나에게 주어져온 모든 것들로부터 나 자신을 완전히 씻어낼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 의지해서, 새롭고, 젊고,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채로 살기 시작할 것입니다.'라고 서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산야스는 다름 아닌 그대의 순수함으로의 입문이다.(501P)
남성의 길은 각성의 길이다. 그리고 각성은 그대가 자신의 존재의 주인이 되는 지점으로 그대를 데려간다. 그것이 '스와미'의 의미이다. 여성의 길은 사랑의 길이다. 그리고 사랑은 그대가 전 존재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궁극적인 지점으로 그대를 데려간다. 그리고 그것이 '마'의 의미이다. 여성은 더 궁극적인 꽃피어남 속에서 모성의 에너지가 된다. 그녀는 전 존재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 그녀는 축복받음을 느끼고, 또한 그녀는 전 존재를 축복할 수 있다. 인간이 그 궁극적인 지점에 도달하게 될 때, 그는 아버지가 되지 않는다. 그는 어머니가 되지도 않는다. 그는 단순히 주인이 된다. 자기 존재의 주인이 된다.(502P)
그대 안에 하나의 혁명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넘어 의식의 세계 속으로 가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어떤 것도 종교적이지 않다.(505P)
우리의 명상은 다름 아닌 비합리적인 존재 속으로의 뛰어듦이다. 그리고 존재는 비합리적이다. 존재는 신비롭다. 존재는 신비이다. 따라서 부디 내가 그대에게 말해왔던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 오히려 내가 그대에게 행하도록 설득했던 것들에 집착하라. 그것을 하라. 그러면 언젠가 그대는 내가 말했던 것들이 모두가 의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508P)
마음의 상태는 신경증적이다. 전 사회가 병들어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그처럼 혼돈명상을 주장하는 이유이다. 그대 자신을 풀어 놓아라. 사회가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 상황이 그대에게 강요해온 것들을 모두 끄집어내라. 그것들을 끄집어내라. 그대 자신을 그러한 것들로부터 풀어놓아라. 카다르시스를 경험하라. 그 과정에서 음악은 도움이 될 것이다.(511P)
흰 구름은 갈 곳이 없다. 그것은 움직인다. 그것은 어디로든 움직인다. 모든 차원이 흰 구름에 속해 있고 모든 방향이 흰 구름에 속해 있다. 어떤 것도 거부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전적인 받아들임 속에 있다. 때문에 나는 나의 길을 ‘흰 구름의 길’이라고 부른다. 흰 구름의 길은 길 없는 길이다. 흰 구름은 움직인다. 그러나 고정된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 흰 구름은 마음 없이 움직인다.
따라서 나는 흰 구름이다. 그리고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들 또한 하늘을 떠다니는 흰 구름들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갈 곳도 없고, 어디로부터도 오지 않으며, 단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머무는 것, 그것으로 완벽하다.
나는 그대에게 어떤 이념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그대에게 어떤 의무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그대에게 이것이 되라, 저것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의 모든 가르침은 단순히 이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대가 무엇이든지, 그대의 상태 그대로 전체적으로 받아들여 달성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흰 구름이 될 것이다.(514-515P)
그리고 이것 또한 기억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이 육체 속에 그대와 함께 있을 수 없다. 언젠가는 육체라는 탈 것을 버려야 한다. 나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면 나의 일은 이미 완성되었다. 내가 이 육체라는 탈 것을 끌고 다니고 있는 것은 단지 그대를 위한 일이다. 어느 날 그것은 버려질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대는 나의 부재 속에서의, 혹은 마찬가지 이야기지만 나의 비육체적인 현존 속에서의 작업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나의 부재 속에서 나를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나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그때는 내가 여기 이 몸 속에 있지 않더라도 그 접촉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517P)
따라서 그대가 나에게 와서 질문을 할 때, 나는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대 자신의 가슴이 기능을 했다면 실제로 어떤 결정이 나왔을까를 알아내기 위해 그대의 가슴 속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나는 결코 나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파괴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정은 외부로부터의 어떤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대가 질문을 할 때, 나는 그대를 들여다본다. 나는 결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를 들여다보고, 그대를 느끼고, 그대가 볼 수 없는 그대 자신의 가슴을 보고, 그리고 그 가슴이 결정하게 한다. 따라서 나는 기껏해야 그대의 가슴을 그대 자신에게 해석해 주는 것 뿐이다. 나는 산파이다.(520P)
내가 선교사가 되지 말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그대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누라, 그러나 강요하지 말라. 나눔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눔은 타인을 매우 존중하는 것이다. 나눔은 폭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강요는 폭력적이다. 그대는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는 단지 타인을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단지 그를 개종시키는데 관심이 있는 것뿐이다. 그것은 옳지 않다. 결코 사람을 어떤 것에 대한 수단으로도 이용하지 말라. 왜냐하면 각각의 사람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523P)
단지 나누고 그것에 대해 잊어버려라. 씨를 뿌리고 계속 가라. 그 씨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보기 위해 뒤돌아보지 말라. 그들의 때가 오면, 봄이 오면, 그때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다.(527P)
엔카운터 그룹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의 모든 것에 ‘직면’해야 한다. 그것이 엔카운터라는 단어의 의미이다. 그대는 억압되어 있는 모든 것을 끄집어내야 한다. 그대는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에 대한 판단 없이 모든 것을 끄집어내야 한다. 그리고 문득 그대는 엄청난 동물들이 그대 안에서 울부짖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동물들은 폭력적이다. 그리고 그대는 비폭력적이 되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대의 비폭력이 그대의 폭력성을 억압해왔다. 아무 이유도 없이 거대한 분노가 일어날 것이다. 그대는 벽을 치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때리기 시작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대는 ‘내가 뭘 하고 있는거지? 예전에는 절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어디에서 이런 것이 나올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물결로, 엄청난 파도로 몰아쳐 올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목적은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부분들이 표현되었을 때……그대의 섹스, 그대의 화, 그대의 탐욕, 그대의 질투, 그대의 분노……그 모든 부분들이 표현되었을 때, 커다란 평온함이 일어난다. 그것은 폭풍 뒤에 찾아오는 고요함이다.(528P)
세상 속에 있어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 말라. 세상 속에 살아라. 그러나 세상이 그대 속에 살도록 허락하지 말라. 그것이 나의 메시지이다.
선가(禪家)에는 이런 말이 있다. “기러기는 자신의 그림자를 비추려하지 않고, 물도 기러기들의 상(像)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다.(543P)
이것이 나의 산야신들의 길이 되어야 한다. 세상 속에 있어라. 세상 속에 살아라. 왜냐하면 모든 욕망은 그대를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모든 야망은 그대의 현재를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탐욕스러워지지 말라. 왜냐하면 탐욕은 그대를 미래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소유욕에 사로잡히지 말라. 왜냐하면 소유욕은 그대를 과거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재 속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탐욕과 소유욕, 야망,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명상의 모든 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각하라. 깨어 있어라. 그래서 이 모든 도둑들이 들어와 그대를 더럽힐 가능성을 갖지 못하게 하라. 명상적이 되라. 그러나 세상 속에 있어라. 그리고 이것이 나의 경험이다. 즉 세상은 엄청나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은 그대를 명상적으로 만드는데 엄청나게 도움을 준다. 세상은 그대가 빗나갈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빗나가지 않는다면 그때 각각의 성공들은 엄청난 기쁨이 된다. 그대는 중심에 남는다. 그대는 태풍의 중심이 된다. 태풍은 그대 주위를 요동치지만 그대의 중심은 영향받지 않는 채 남아 있다.
그것이 진정한 산야신의 길이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영향 받지 않고 변함없이 남아 있는 것……(544P)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자유는 책임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스스로 그대의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때는 다른 누군가가 그대 대신 그 책임을 떠맡게 된다. 그리고 그때 그대는 노예가 된다.(565P)
나는 그대에게 단지 맛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단 그대가 그 맛을 알고 나면 그때 그대는 그것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때 그대를 막을 방법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을 보는 것이다.(586-587P)
이제는 내가 그대들에게 맛을 보여주기 시작해야 할 때이다. 말은 많이 주었다. 그것은 준비였다. 씨앗들은 많이 뿌렸다. 그리고 이제 봄이 매우 가까웠고 그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전체적이 되어야 한다. 강렬하게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 나의 침묵 속에, 나의 기쁨 속에 함께 있어야 한다.
지금은 그대와 나 사이의 이중성이 사라질 때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즉시 그것을 버릴 것이다. 조금 덜 현명한 사람들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그대의 해안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있다. 그러나 오래 머물 수는 없다.(587P)
그대는 그 이상의 어떤 것, 보통 이상의, 당연한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초월적인 어떤 것을 찾고 있다. 그대는 그 길을 익혀야 하며 그 길은 혼자 가야하는 길이다.
나는 그대와 함께 갈 수 없다. 나는 그대에게 길을 보여줄 수 있다. 나는 그대에게 달을 가리켜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손가락은 달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그대에게 달을 보여줄 수 없다. 머지 않아 그대는 나의 손가락을 잊고 그대 스스로 달을 보아야 한다. 그대는 혼자 그 길을 가야 한다.(589P)
기억하라. 그대가 그대 자신 안에서 무엇을 발견하든,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발견하든, 그것은 그대의 현실이다. 그것은 정화될 수 있다. 그것은 사라질 수 있다.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뭔가를 행하기 전에 그대는 먼저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다.(589-590P)
그대의 성장에 대한 나의 접근법은 기본적으로 그대를 나로부터 독립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의존도 노예상태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영적인 의존은 노예상태 중에서도 가장 나쁜 노예상태이다.(590P)
도움이 되는 것은 나의 여기 있음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그대의 여기 있음이며, 그대의 현재에 있음이며, 그대의 각성과 깨어있음이다.(590P)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있으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종교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그것은 축하라는, 삶이라는, 기쁨이라는 신이다. 이 모든 지구는 하나이며 모든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의 일부분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반복되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이며, 인간의 무지이다. 인간이 의식적이 되고, 각성하게 되고, 깨어 있게 되는 그날, 더 이상의 반복은 없게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받지 않을 것이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을 것이며, 알힐라즈 만수르는 살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우리의 가장 위대한 꽃들이다. 그들이 우리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이다. 그들이 우리의 운명이며 그들이 우리의 미래이다. 그들은 우리의 본질적인 잠재력이 현실로 드러난 모습이다.(593-594P)
예전의 과학은 종교에 대한 반발로서 생겨났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새로운 과학은 어떤 것에 대한 반발도 아닌 넘치는 에너지와 지성, 창조성일 뿐이다. 정치는 과학을 타락시켰다. 정치의 관심은 오직 전쟁뿐이기 때문이다. 종교들은 과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종교들은 모두가 미신적이었고 과학은 그들의 모든 신들과 미신들을 뒤엎어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학은 3백년 동안의 이 힘든 시기를 지나왔다. 한편으로는 종교와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모르는 사이에 정치가들의 노예가 되어가면서…….(596P)
그 궁극적인 혁명은 하나의 세계정부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하나의 정부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대는 전쟁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모든 나라는 각자의 군대와 각자의 방어시설, 각자의 무기를 가져야 하며 누가 더 파괴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지를 경쟁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세계정부가 있게 되면 어떠한 육군도, 공군도, 해군도 필요하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은 삶에 헌신하기 위한, 전 인류에 헌신하기 위한 봉사단체로 변형될 수 있다.(597-598P)
나는 치유될 수 없는 몽상가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내가 나의 삶에서 꿈꾸었던 모든 것을 나는 해냈다.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존재계에 제안하는 것만으로 그 모든 일은 이루어졌다.(600P)
오직 조직화된 교의나 신앙체계, 교리, 신학이 없을 때에만 종교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그대들 모두가 기억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점의 하나이다. 단지 이 침묵과 산들바람 속에서 춤을 즐기는 나무들만이 존재할 때, 그대의 가슴 속에는 무언가가 자라난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경전으로부터도 오지 않는다. 아무도 그대에게 그것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603P)
나는 선(禪)을 가리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종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선은 종교가 아니라 단지 종교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창시자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가 없다. 사실 그것은 그대에게 가르칠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인류의 전 역사 속에서 일어난 가장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어있음을 즐기며 무(無) 속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선은 앎이 아닌 무지 속에서 충족된다. 그것은 세속과 신성함을 구분하지 않는다. 선에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성하다.(604P)
나는 불교도가 아니다. 고타마 붓다의 의도 역시 불교도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었고 조직화된 종교를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25세기 전에도 그는 결코 조직화된 종교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진리가 조직화되는 순간 그것은 거짓말이 된다. 조직화된 종교는 다름 아닌 숨은 정치이며, 성직자에 의한 깊은 착취에 불과하다.(608P)
"나의 조상(彫像)을 만들지 말라. 나의 말들을 모으지 말라. 나는 숭배되어야 하는 상징이 되고 싶지 않다. 나의 가장 깊은 열망은 그대들이 모방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는 불교도가 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대 자신의 잠재력은 붓다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붓다-(608P)
이 순간 그대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붓다인 그대 자신을 기억하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의 영원성이며, 그것은 그대의 불멸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 그 자체이다. 그대는 별과, 나무와, 하늘과, 대양과 하나이다. 그대는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다.
붓다의 마지막 말은 사마사티(sammasati)였다.
그대가 붓다라는 것을 기억하라, 사마사티.(614P)
오쇼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단지 1931년부터 1990년 사이에
이 행성, 지구를 방문하다(620P)
에필로그 : 1990∼현재
나는 나의 사람들에게 영감의 원천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대부분의 나의 산야신들이 느끼게 될 그것이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사랑과 같은 특질, 그 주위에는 어떤 교회도 생겨날 수 없다. 깨어있음과 같은 특질, 그것은 그 누구의 독점물도 될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축하, 기쁨, 그리고 신선하고 어린아이 같은 눈을 키워가기를 바란다.
나는 나의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에 따라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그들 자신을 알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길은 안에 있다.(621-622P)
3. ‘내가 저자라면’
개요
오쇼 라즈니쉬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나온 책은 무려 700권 가까이나 된다고 한다. 아마 오쇼 자신도 웬만한 산야신도, 그리고 구도자 또한 그가 나온 책을 모두 읽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만큼 엄청난 양의 책이 출판되었는데 재밌는 건 그가 직접 쓴 책은 한권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강연만을 했고 그를 따르는 산야신들이 그의 강연내용을 모아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그래도 대단하지 않은가?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 하나, 이 책의 부제인 ‘길은 내 안에 있다’ 이것 하나뿐인데 말이다. 즉 자신 안에 신이 있고, 종교가 있고 우주가 있으므로 내면 안의 자신을 만나는 것이 곧 깨달음이란 사실, 진리 오직 그 메시지 하나 뿐이라고 그는 강조하고 있다.
이 책,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또한 물론 그가 쓴 책이 아니다. 그의 강연, 인터뷰, 대화 여러군데에서 그의 어릴 적 이야기부터 죽을 때까지의 이야기들을 모아 자서전 형식으로 펴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오쇼는 과거에 대해서는 항상 잊으라고 말해왔다. 그러므로 그는 자서전과 같은 것은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산야신과 구도자들은 그의 생애를 알고 싶어했고 그를 따르길 원했기 때문에 자서전을 계속해서 원해왔다. 그러한 결실로 이 자서전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앞에서 읽었던 다른 자서전과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할 듯 하다. 아무래도 편집자의 시각이 많이 들어간 책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해야 맞을 듯 하다.
책의 구성
서문
1부 평범한 인간 : 전설 뒤의 숨은 역사
- 1부에서는 그의 태어남부터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살던 7년간의 이야기, 어릴 적 말썽꾸러기로써의 면모 및 침묵을 좋아하던 소년의 이야기, 아버지와의 트러블, 형제간의 불화, 학교 선생님과의 대결, 수많은 사건의 일으킴, 소위 바람잘날 없는 나날들. 대학입학해서의 학창시절, 학문의 탐구, 대학교수와의 만남, 에피소드 등등 수많은 이야기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
2부 빈 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여러 얼굴
- 2부와 3부는 그의 강연 내용 중에서 자서전에 실을 만한 내용들을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다만 2부와 3부는 그 성격이 다소 다르다. 2부가 다소 논란이 되고 해명이 필요했던 내용들을 위주로 하여 편집한 것이라면 3부는 그의 진지한 강연에 맞추어 보다 심도있고 깊숙한 진리에 대한 탐구의 내용들을 실었다. 여기 2부에서는 섹스 구루부터 시작하여 컬트 교주, 사기꾼, ‘자칭 바그완’, 부자들의 스승, 농담꾼, 롤스로이스 구루, 스승까지 제목부터 상당히 흥미를 끌만한 것으로 뽑았으며 그 내용도 보다 쉽고 가볍게 오쇼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배려한 흔적이 있다. 2부는 흥미위주의 편집이라 보면 될 듯 하다.
3부 유산
- 3부에서는 몇 개의 소제목 밖에 없다. 종교 아닌 종교, 21세기를 위한 명상, 제3의 심리학 : 붓다의 심리학, 조르바 붓다 : 완전한 인간 으로 제목부터 상당히 무거움이 느껴진다. 3부에서는 오쇼가 강연을 통해 강조해왔던 종교, 과학, 그리고 명상, 진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상당히 깊은 부분까지 파고 들어간다. 아마도 이 내용들은 이미 오쇼의 다른 책으로 다 출간된 내용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즉 자서전에 다시 실은 것은 가장 중요한 내용 만을 간추려 정리하여 실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만큼 내용들이 알차게 느껴진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파트라 할 수 있겠다.
4부 오쇼의 일생과 그 주요 사건들
- 이 부분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1부가 시간의 흐름과 에피소드에 따라 기술한 파트라고 한다면 2부와 3부는 시간의 흐름이 아닌 내용 위주로 옮긴 글이다. 그러다 보니 편집자의 입장에서 다시 오쇼의 일생을 정리했으면 하는 욕심이 생겨난 듯 하다. 괜찮은 생각이였다. 최종 정리의 장이라 볼 수도 있을 듯 했다. 하지만 간단한 년도별 사건들을 정리한 후 거기에다 다시 강연의 내용들을 집어 넣은 것은 편집자의 과욕이 아니었을까? 차라리 그렇게 넣어야 할 내용이었다면 2부와 3부에서 넣은 것이 맞았을 듯 하다. 그러다 보니 책 두께도 있고 독자의 입장에서 다소 지치는 감이 있었다. 내용 또한 일부 중복되는 내용이 있었고. 제일 아쉬움이 남는 파트였다.
책 구성 중에 재밌는 것이 하나 있었다. 중간중간에 우화를 삽입한 것이다. 자서전에 우화라... 뭐 자서전에 특별한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화가 약방의 감초처럼 중간중간 들어가 있었던 것은 의외였다. 하지만 재밌었다. 책을 읽는 도중 쉬어가는 휴식의 의미도 되었고. 특히나 무거웠던 마음이 우화를 통해(조금은 썰렁한 것도 있었다) 조금은 가벼워지는 시간도 되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저자가 우화의 즐거움과 역할에 대해 강연한 내용까지 추가한 것은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좋은 의미가 되었다. 우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시점에 이 글은 많은 도움이 될 듯 하다.
‘세상의 모든 스승들은 이야기들을, 우화들을 들려주어 왔다. 왜인가? 그냥 간단히 진리를 말하면 된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밤은 길고 그대는 깨어 있어야 한다. 이야기들이 없다면 그대는 잠에 빠지게 된다.
아침이 오기까지는 그대의 관심을 끌어두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스승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진리는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진리를 볼 수 있는 지점으로 이끌려 갈 수는 있다.‘(308P)
아쉬운 점
책 사이즈가 영 마음에 안들었다. 조금만 더 크게 만들어 장수를 줄였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듯 하다. 책이 다소 작은 데다가 양장본이다보니 좁은 지하철, 버스 안에서 책을 읽으며 때로는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책의 여백에 적어두는 나의 독서습관상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다. 여백도 작을뿐더러 조금의 흔들림에도 책이 뒤집히기 일수였고, 넘어간 페이지가 제대로 고정되지도 못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책 읽는 내내 불만이 많았다. 흐흐. 순전히 나의 개인적 불만이었다.
마무리
솔직히 ‘내가 저자라면’이란 글을 쓰기 민망할 정도로 높은 사상을 가진 분이다보니 뭐라 쓰기가 어려웠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괜히 편집자와 책 사이즈만 가지고 트집을 좀 잡아 보았다.
개인적으로 명상가로서의 저자의 이름은 지나가는 와중에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워낙 이쪽 분야에 관심을 가지지 않다보니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커리큘럼의 하나로 이 책을 든 순간 나는 내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것인지. 평범한 일생을 살고 있는 나에게 오쇼의 삶은 충격 그 자체였다. 모르겠다. 지금 상황에서는 어디까지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이고 진실인지.. 어디까지가 내가 반박해야할, 받아들이지 못할 내용들인지.. 그 경계도 명확히 세울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말한 많은 내용들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사실이다. 질문을 통해 우리는 진리에 접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것이 거기 있기 때문에, 예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사실로, 진실로 인정하고 넘어간 것이 또한 사실이다. 그것이 특히 종교에 대해서라면 더욱 그러했다. 종교에 대한 다소 과격한 표현이 아마도 그를 종교계에서는 배척자로 리스트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백지에서 출발한다면 그의 논리는 설득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백지가 아닌 지금의 나의 경우 그렇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워 지는 것이다. 오쇼의 책을 몇 권은 더 손에 잡고 생각을 해보아야만 하겠다.
세상은 넓다. 하지만 사상의 세계는 좁다. 오히려 깊다. 그래서 어렵다. 내면을 찾아가는 여행은 그래서 출발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껍데기로 살아갈 수는 없다. 내 안의 신성을 만나러 가야만 할 것이다. 천복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