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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에 1:9-16
9 왕후 와스디도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
10 제칠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어전 내시 므후만과 비스다와 하르보나와 빅다와 아박다와 세달과 가르가스 일곱 사람을 명령하여
11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12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
13 왕이 사례를 아는 현자들에게 묻되 (왕이 규례와 법률을 아는 자에게 묻는 전례가 있는데
14 그 때에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는 바사와 메대의 일곱 지방관 곧 가르스나와 세달과 아드마다와 다시스와 메레스와 마르스나와 므무간이라)
15 왕후 와스디가 내시가 전하는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니 규례대로 하면 어떻게 처치할까
16 므무간이 왕과 지방관 앞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했을 뿐 아니라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의 관리들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하였나이다
더 1:9-16 / 그와 동시에 왕후 와스디도 아하스에로 왕궁에서 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10) [왕후가 왕의 명령을 거스르다] 7일 잔치가 절정에 달하는 그 마지막 날에 왕은 포도주에 취하여 마음이 즐거웠다. 그래서 아하수에로왕은 항상 자기 곁에서 시중 드는 일곱 내시 곧 므후만, 비스다, 하르보나, 빅다, 아박다, 세달, 가르가스를 불러 이런 명령을 내렸다. 11) `왕후 와스디를 부르시오. 그가 왕비의 면류관을 쓰고 이 어전으로 나오게 하여, 이 나라의 백성들과 대신들이 모두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게 하시오.' 그녀의 용모가 참으로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12)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들이 전하는 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어전으로 나가는 것을 거절하였다. 왕후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왕명을 거절하자, 왕은 혹시 가족들에게서 반역의 음모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수많은 손님들 앞에서 자신의 권위가 흔들렸다는 생각도 들어서 몹시 화가 났다. 그의 온몸에서 분노가 불길처럼 치솟아 올랐다. 13) [와스디 왕후가 폐위되다] 왕은 즉시 역사적인 관례를 아는 현인들과 그 문제를 의논하였다. 왕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왕명과 법률을 잘 아는 모든 사람과 상의하는 것이 궁중의 관례였다. 14) 그 당시 메대와 바사에서 왕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일곱 대신은 가르스나, 세달, 아드마다, 다시스, 메레스, 마르스나, 므무간이었다. 이들은 왕에게 가장 큰 신임을 받는 이들로서, 언제든지 왕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15) 아하수에로왕이 그들에게 물었다. `내가 왕후 와스디에게 내시들을 보내어 명령을 내렸으나 그가 명령에 따르지 않았소. 역사적인 관례에 따른다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옳겠소?' 16) 그러자 므무간이 이렇게 진언하였다. `와스디 왕후는 임금님에게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 저희 모든 대신들에게도 잘못한 것이요, 임금님의 모든 도에 사는 온 백성들에게도 잘못한 것입니다.
이 잔치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국가적인 행사였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진행되기를 바랐으며,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각각의 모든 사안을 세심하게 챙기고 있었습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한 왕후(9-12) 남녀를 분리하던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라 왕후의 잔치도 여인들을 위해 따로 열리고 있었습니다. 왕후가 고관들의 부인들과 영향력 있는 여인들을 위해 잔치를 여는 것은 왕의 통치 행위를 돕는 일이었고 아주 중요한 역할이었습니다. 이때 아하수에로 왕이 남자들의 잔치로 왕후를 불러들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왕후는 자신을 잔치 자리의 구경거리로 보여주려는 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왕후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잃지 않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수에로 왕이 어전 내시 일곱을 보내 왕후를 청했다는 사실은 왕후를 존중하는 예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절대의 권력자는 오직 아하수에로 왕뿐이었으므로 왕후의 거절은 왕의 권위에 상처를 내는 중대한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더구나 그 자리는 바사의 전역에서 온 지방관들이 함께 한 자리였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왕의 권위를 세우는 일은 힘든 일이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 작은 일로도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왕이 현자들에게 묻다(13-16) 잔치가 마무리되었으나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아하수에로 왕은 체면을 구겼습니다. 주변의 신하들로서도 가볍게 볼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왕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자문을 구했습니다. 왕후에 관한 문제는 왕실의 문제이므로 가볍게 기분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기 때문에 단호하지만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때 므무간의 의견은 개인의 의견이 아닌 가장 측근인 고위 관리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도 그의 의견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왕후에게 책임을 물으려 했던 것입니다. 왕후의 행동은 왕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것만으로도 중대한 사안이지만, 많은 백성과 왕이 강력하게 장악하기를 원하는 지방의 관리들 앞에서 왕의 권위에 도전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엄중하게 처벌받아야 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이 므무간의 의견이었습니다.
적용: 세상의 권위와 권력과 다르게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고 인정하시는 권위는 낮아질수록 고귀해집니다. 낮아짐, 희생, 섬김으로 존귀해지신 예수님의 삶에서 똑 닮아야 할 것을 이야기해 봅시다.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은 굉장히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즐거움과 기쁨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겉모양, 표면적인 즐거움과 기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기쁨과 즐거움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보여져야 하며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 설 교 >
보이지 않는 손길
에 1:9-22
에스더의 이야기는 여러 모로 성경의 다른 이야기들과는 다른 독특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장 특별한 것은 10장에 이르는 에스더서의 전체 내용 중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에스더의 이야기가 이스라엘이 아닌 페르시아 제국의 왕 아하수에로를 비롯한 권력의 중심부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페르시아는 바벨론을 멸망시킨 나라로 3대 왕인 아하수에로 당시 127개의 지역을 통치할 정도로 가장 강력한 당대 패권 국가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 이때는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을 당한지 100년이 지난 후로, 이미 유다 백성들 중 상당수가 포로의 삶을 청산하고 유대 땅으로 귀환을 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페르시아 제국에 뿔뿔이 흩어져 유대인 공동체인 디아스포라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휘두르는 권력 아래 비주류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에스더의 이야기는 세상의 중심인 페르시아 제국의 왕궁에서 일어난 사건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힘과 권력의 중심에서 하나님에 대한 언급도 없는 에스더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은혜를 만날 수 있게 될까요? 아하수에로 왕 즉위 3년에 그동안 이룬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전국적으로 6개월 동안 잔치를 베풀었고, 또 다시 수산의 왕궁에서 7일 동안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잔치의 마지막 날 왕은 모든 사람들 앞에 왕후 와스디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싶어 왕후를 부릅니다(에1:11).
하지만 왕후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며 잔치에 나타나지 않았고, 이 일로 왕은 수많은 신하들 앞에서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서든 이 일을 수습해야 했던 왕은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후를 세우도록 하고, 이 일이 제국에 퍼지게 되면 아내가 남편을 거역하는 일이 일어나 가정의 질서가 파괴될 것이기 때문에 제국의 모든 지역에 여인들이 남편을 존경하게 하는 법을 만들어 공포하게 됩니다.
그러면 페르시아 제국의 궁중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저 페르시아 왕의 힘과 권력이 대단하다는 것과 나라와 가정이 제대로 세워지려면 여인들이 남편의 말에 복종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에는 전혀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페르시아 제국에서 살고 있는 힘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왕의 명령 하나에 살고 죽는 힘과 권력의 중심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고, 험악한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살아남게 되는지,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게 되는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 말씀은 2,500년 전의 아주 오래 된 옛날이야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세상도 페르시아 제국의 힘과 권력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힘이 지배하고,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 자존심을 건 싸움이 벌어지는 곳이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권력을 행사할 명분을 찾고, 그것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의 흐름 속에서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이제 앞으로 등장하게 될 에스더를 비롯한 모르드개 역시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그저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자칫 지워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127개 지역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었던 모든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삶을 하나님만큼은 기억하고 계셨고, 하나님만큼은 버리지 않으셨고, 하나님만큼은 그들을 돌아보셨던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 속에서 잊힐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상 에스더서의 주인공이었고, 진정한 승리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승리를 외칠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이끌어 가는 연출자가 되셨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사람들도,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손길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시대의 승리자가 되고, 세상의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오히려 페르시아 제국의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을 마음껏 사용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인 것입니다.
나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살아 계셔서 일하고 계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바로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믿음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가족을 바라보십시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곳곳에 채워 놓으신 것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
메튜 헨리 주석
아하수에로 왕의 잔치(에스더 1:1-9)
이 아하수에로 왕은 바사 왕 중 어느 왕을 말하고 있는지 학자들 간에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다. 모르드개는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사로잡혀" 온 자들 중 한 사람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2:5, 6) 이 아하수에로는 그 제국의 첫 번째 왕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그가 성전 건축을 방해했던 아닥사스다(스 4:6, 7)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메대 족속이었던 그의 증조부의 이름을 좇아 또한 "아하수에로" 라고 불리웠기 때문이다(단 9:1).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그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다리오와 고레스는 단지 120도를 다스렸으나(단 6:1) 그는 "인도에서 구스(에티오피아)까지" 이르는 127도를 다스리고 있었다(1절). 대개 과대 팽창한 나라는 그 무게에 눌려 쇠퇴하고 그것을 점령하던 때와 같이 급속도로 그것을 잃게 되기가 쉽다. 만일 그 거대한 권력이 악한 손아귀에 들어 있다면 그 재앙은 그만큼 더욱 큰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선한 손에 있다면 그만큼 더욱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그리스도의 것이 될 때 그의 왕국은 지금보다 훨씬 커질 것이고 그것은 영원한 왕국이 될 것이다.
Ⅱ. 그의 왕국은 매우 화려하고 장엄했다. 그의 보좌가 견고케 된 것을 안 그는 그의 왕국이 웅대해질수록 더욱 마음이 교만해져 갔다. 또한 그는 극히 호화로운 잔치를 베풀었으며 단지 "그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지출했다(4절). 그것은 헛된 영광이었고 전혀 쓸데없는 허례허식이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왕국의 부함을 의심하지 않았고 또 그와 영예를 다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그의 몇 후계자들과 같이 성전을 건축하고 그 일을 유지하는 데에 그 왕국의 부함과 그의 영예로운 권세를 나타냈다면(스 6:8; 7:22) 그것은 훨씬 더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아하수에로 왕은 두 가지 잔치를 베풀었다. 즉
1. 한 가지는 귀족과 방백들을 위한 것으로 "일백 팔십 일" 이나 계속되었다(3, 4절). 그는 이 모든 기간 동안 똑같은 사람들을 매일 초대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한 지방의 귀족과 방백들을 각각 하루씩 초대하였을 것이며, 그러는 동안 그와 그의 시종인들은 매일 호화스런 잔치를 즐겼을 것이다. 성경 갈데야역 해설자(그는 이 책의 역사에 매우 담대한 부언을 하고 있다)는 그의 신하들 가운데 폭동이 있었는데 이 잔치는 그것을 진압한 기쁨을 위해 베풀어진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2. 또 한 가지 잔치는 "대소 인민을" 위한 것으로 "칠일 동안" 베풀어졌다. 하루하루의 잔치에서 각 백성들을 교대로 초대했는데 그들을 맞아들일 집이 없어서 "왕국 후원 뜰에서" 잔치를 베풀었다(5절). 장소를 여러 개로 나누기 위해 쳐진 휘장이나 참석한 무리를 위해 마련한 장막은 매우 화려하고 값진 것이었다. 그들이 앉은 침상이나 걸상도 그러했고 그들의 발 아래 있는 보도도 역시 그러했다(6절). 온갖 소음으로 시끄러운 이 포도주의 연회석보다는 조용한 가운데 나물 음식을 먹고 한적하게 다정한 친구와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Ⅲ.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는 훌륭한 질서가 잡혀 있었다. 우리는 벨사살 왕이 잔치석에서 잡신들을 찬미하고 성소의 기명들을 더럽힌 일(단 5:3, 4)들은 여기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갈데아 해설판에는 성소의 기명들이 이 잔치에서 사용되어 유다 사람들을 매우 근심케 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선지자의 머리를 마지막 접시에 담아오기를 요구하는 헤롯의 잔치와는 달랐다. 우리는 이 잔치에서 두 가지 일을 칭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1. 그들은 억지로 축배를 들거나 권유하지 않았다. "마시는 것도 법에 따라 했으며" (아마도 이것은 근래에 만들어진 법규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으로 억지로 하지 않게" 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계속 마시기를 권유하지 않았다고 조세푸스는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술잔을 돌리지 않았으나 모든 사람이 각자의 취향대로 마셨다(8절). 그러므로 만일 지나치게 마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실수였다. 그러나 왕이 절제를 귀히 여기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이러한 실수를 저지르는 자는 거의 없었다. 이 이방 나라 왕은 그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가운데에도 이러한 경고를 잊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살펴볼 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나 친구들을 취하게 만들지 않고서는 그들의 행복한 가정을 보여주지 못하고 또 그들을 초대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축배를 든다는 구실 아래 죽음을 담은 죄악의 잔을 돌리는 많은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하박국 2장 15, 16절을 읽고 경계하도록 하자. 그들은 그 친구들의 이성(理性)과 가장 귀한 보배를 훔치는 자이며 그들을 가장 어리석고 가장 약한 자로 만드는 자이다.
2. 그곳에는 난잡한 춤이 없었다. 즉 신사와 숙녀들은 따로 대접을 받았으므로 벨사살 왕의 잔치 때처럼 아내와 첩들이 그와 함께 술을 마시는(단 5:2) 일은 없었다. 또한 헤롯의 잔치 때처럼 딸이 "그 앞에서 춤을 추는" 일도 없었다. 와스디는 따로 부녀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그것은 개방된 왕국 뜰에서가 아니라 왕궁에서 행해졌다(9절). 왕이 이처럼 그의 영예로운 위엄을 보여 주었을 때 왕비와 그 여인들도 그들의 정숙함을 보여 주었는데 이것은 여성들이 갖추어야 할 참된 위엄이다.
명령을 거부한 왕비 와스디(에스더 1:10-22)
우리는 여기에서 아하수에로 왕의 잔치의 흥을 깨뜨리는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광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끝나 버린 욥의 자손들의 잔치와는 달리, 그리고 벽에 손으로 씌어진 글씨로 인해 망쳐버린 벨사살 왕의 잔치와는 달리, 이 잔치는 왕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침통하게 끝났다. 즉 잔치가 거의 끝날 무렵에 왕과 왕비 사이에 일어난 불행한 일로 인해서 그 잔치는 급히 중단되어야 했고, 손님들을 침묵과 수치 속에서 내보내야 했다.
Ⅰ. 왕은, 자신이 취해 있고 취해 있는 많은 신하들이 있는 곳으로 왕후 와스디를 불러오도록 한 것은, 분명 그의 실책이었다. "왕이 주흥이 일어났을 때", 방백들과 백성들에게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여주기 위해 아름다운 옷에 "왕후의 면류관을 정제한" 그녀를 불러오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10, 11절).
1. 그러나 그는 남편된 자신의 명예를 손상시켰다. 그는 아내의 정숙함을 노출시키지 말고 오히려 잘 보호해 주었어야 했다. 오히려 그는 그녀의 "눈가리게" (창 20:16) 역할을 했어야 했다.
2. 그는 그의 아내가 거절할지도 모르는 그런 명령을 함으로써 왕으로서의 자기 체통을 손상시켰다. 그것은 그녀의 덕성에 깊이 관계되는 문제였었다. 여자가 대중 앞에 나타나는 것은 바사 풍습에 어긋나는 일이요, 그가 아내에게 정중히 대하지 않고 그런 무례한 것을 요구한 것은 그녀를 지극히 학대한 것이다. 만일 그가 술에 지나치게 취하여 분별력을 잃지 않았었다면, 이러한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일을 제안하는 자들에게 매우 화를 냈을 것이다. 사람이 술에 취했을 때는 지혜가 없어지며, 이성(理性)도 잃게 된다.
Ⅱ. 그러나 그녀가 그의 명령을 거부한 것도 역시 지혜로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왕후가 오기를 싫어하였다" 고 했다(12절). 비록 왕이 일곱 명의 고급 사신을 통해 공적으로 명령을 보내왔지만-조세푸스(Josephus)는 그가 거듭 보냈다고 말한다-그녀는 계속 거절했다. 만일 그녀가 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순종함에 의해 행해진 일이라는 것이 분명했을 것이므로, 그녀의 정숙함에 대한 비난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한 나쁜 본보기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일 자체가 악한 일은 아니었으므로, 그처럼 고집하는 것보다는 순종하는 것이 더욱 그녀에게 덕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거만스러운 태도로 거절했을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녀가 왕명을 쫓아오기를 멸시했다면", 그것은 분명 나쁜 일이다. 이것은 왕에게는 얼마나 굴욕스러운 일이었겠는가! 그가 그 나라의 영광을 과시하고 있을 때, 그녀 마음대로 행함으로써 가정의 수치를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반려자 사이의 분쟁은 언제나 매우 나쁜 것이며, 그것을 무리 앞에 보이게 된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써 얼굴을 붉히게 되고 또 불화를 야기시킨다.
Ⅲ. 이에 대해 왕은 극히 분노하였다. 127도를 다스리는 왕이었지만 그 자신의 마음은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진노하여 중심이 불붙는 듯하였다(12절). 만일 그가 분노를 누르고 아내에게서 받은 모욕을 가벼운 농담으로 돌려버렸더라면, 그는 더 큰 위로와 신망을 얻었을 것이다.
Ⅳ. 그는 매우 화가 났었지만 이 문제에 대해 그의 궁정 자문들과 의논하기 전에는 어떠한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명을 전하기 위해, 10절에 그 이름이 나와 있는 어전 내시 7명을 보냈던 것과 같이, 이제 다시 명령을 내리기 위해 7명의 자문들과 의논하고 있다. 큰 권력을 지닌 자일수록 그것을 남용하지 않도록 그에게 충고해 주는 조언자가 매우 필요하다.
이 자문들은 매우 학식이 많은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규례와 법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사례를 아는" 박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의 첫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왕은 그들을 매우 신뢰하며 존경하고 있었다(13, 14절). 조언하는 자들이 많을수록 안전한 법이다. 그러므로 왕은
1. 이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다(15절). "규례대로 하면 우리가 왕후를 어떻게 처치할꼬?"
(1) 즉 죄를 범한 자가 왕후였지만, 규례대로 처리해야 했다.
(2) 왕은 매우 화가 나 있었지만, 그는 법에 의한 충고를 듣지 않고서는 어떤 조처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2. 므무간은 왕에게 순종하지 않은 와스디 왕후와 이혼할 것을 제의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이 가혹한 충고를 했고 그 나머지 사람들도 그 제안이 현재 노기가 충천해 있는 왕을 만족시키고 이 후에도 그의 요구를 만족시켜 그를 즐겁게 해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에 동의했다고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조세푸스(Josephus)는 이러한 견해와는 반대로, 왕이 와스디에게 강한 애정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무례함이 법률상 용인될 수 있었다면 그녀와 헤어지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므무간의 충고가 의와 공적인 유익을 위해 매우 신중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1) 그는 왕후가 남편에게 불복종한 일로 인해 초래되는 나쁜 결과를 알려 주었다. 즉 만일 이 일이 묵인되어 처벌되지 않는다면, 다른 여인들도 그들의 남편에게 불복종하게 되고 또 무시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만일 이 불행한 사태가 왕과 그의 아내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면, 그녀가 이겼다고 하더라도 사적인 일이므로 잘못은 그들 스스로의 문제로 남게 되고 그 분쟁은 그들의 비밀스런 일로 감추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적인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또 왕후와 한 자리에 참석한 여인들은 그녀의 거절에 은근히 동의를 표했을는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그녀의 나쁜 본보기는 그 나라 모든 가정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만일 왕후가 고집을 세우고, 왕이 그것에 굴복했더라면(일반 백성들은 대개 궁정의 법도를 따르기 때문에), 여인들은 매우 거만하고 무례해져 그들의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싫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볼품없이 멸시당하는 남편들은 이에 대해 불평을 하나, 그들 스스로도 어쩔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기" 때문이다(잠 19:13; 27:15; 21:9; 25:24). 그러나 "남편을 경외해야" 할(엡 5:33) 아내들이 "그 남편을 멸시하고", 그들에게 "순종" 해야 할 자들이 그들을 "지배" 하려 한다면(벧전 3:1), 그곳에는 범죄와 슬픔, 혼란과 온갖 악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직에 있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일을 모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16-18절).
(2) 그는 왕후 와스디가 이혼 당함으로 해서 어떤 좋은 결과가 따르게 되는가를 알려 주었다. 우리는 그들이 이러한 극단적인 결정을 하기 전에, 그녀가 왕에게 Peccavi-" 내가 잘못 행했나이다" 하고 왕의 용서를 빌며 복종할 의향이 있는가를 타진해 보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만일 그녀가 그렇게 했더라면, 그녀의 잘못으로 인한 불행은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판결도 정지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왕이 기뻐하든 안 하든 그녀 마음대로 계속 완고하게 행할 수 있는 특권을 주장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녀가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판결을 내리고 그것이 결코 변경되지 못하도록 재확인했다(19절). 그리하여 이것이 "모든 부녀가 그 남편을 존경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를 기대했다. 즉 "귀한" 자들의 아내는, 그들이 귀하더라도 그리고 "천한" 자들의 아내는 그 남편들의 천함에도 불구하고 그 남편들을 모두 존경하도록 하게 했다(20절). 이와 같이 모든 남편들은 가정의 법도를 잡고 싶어할 것이고, 아내들이 거기에 순종한다면, 자녀들과 하인들도 역시 거기에 순종하고자 할 것이다. 각 가정 질서가 지켜지도록 하는 것은 그 지방과 나라에 유익을 준다.
3. 이러한 제안에 의해서, 왕후는 왕에게 불복종했으므로 규례대로 이혼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선포했다. 따라서 다른 아내들도 이처럼 그들의 남편에게 의무를 이행치 않을 때는, 이와 같은 수치를 각오해야만 했다(21, 22절). 그들이 왕후보다 나을 수야 있겠는가. 아무튼 이 일이 선포된 것이 왕의 분노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왕의 정책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일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하시어 에스더에게 왕후의 면류관을 쓸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폐위되는 아하수에로의 왕비
에 1장
[내용개요]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 궁에서 백팔십 일에 이르는 성대한 잔치를 열어 모든 귀족들이 먹고 마시며 놀았다. 이로써 왕은 자신의 능력과 위엄을 과시하였다(1-4절). 다음에는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칠 일 동안 잔치를 베풀어 자신들의 기분대로 먹고 마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5-8절). 잔치 마지막 날에 왕은 아름다운 왕비를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초대했으나 왕후 와스디는 이를 거절하였고, 아하수에로 왕은 심히 노하였다(9-12절). 왕은 박사들의 의견을 듣고 온 나라의 부인들이 남편의 말에 순종치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을 남기기 위하여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다시는 왕 앞에 나아오지 못하게 하였다(13-22절).
[강 해]
아하수에로 왕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왕후를 불렀으나 왕후 와스디가 왕의 명을 어기고 잔치 자리에 나오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왕의 신하들은 와스디의 행위가 나라 전체에 미치게 될 악영향을 고려하여 왕후를 폐할 것을 간언하였고, 이어 왕은 신하들의 말을 따라 왕비를 폐하게 되었습니다.
[ 문단분해 ]
1-8 바사(페르샤)왕 아하수에로의 대 향연.
9-12 왕후 와스디도 향연을 열고, 왕이 부르는 연석에는 참석치 않음으로써 왕으로 크게 노하게 하다.
13-22 왕이 지자들과 상의하고, 방백 므무간의 헌책을 받아들여, 남자의 주권에 대한 조서를 내다.
폐위되는 아하수에로의 왕비[에 1장]
[내용개요]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 궁에서 백팔십 일에 이르는 성대한 잔치를 열어 모든 귀족들이 먹고 마시며 놀았다. 이로써 왕은 자신의 능력과 위엄을 과시하였다(1-4절). 다음에는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칠 일 동안 잔치를 베풀어 자신들의 기분대로 먹고 마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5-8절). 잔치 마지막 날에 왕은 아름다운 왕비를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초대했으나 왕후 와스디는 이를 거절하였고, 아하수에로 왕은 심히 노하였다(9-12절). 왕은 박사들의 의견을 듣고 온 나라의 부인들이 남편의 말에 순종치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을 남기기 위하여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다시는 왕 앞에 나아오지 못하게 하였다(13-22절).
[강 해]
아하수에로 왕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왕후를 불렀으나 왕후 와스디가 왕의 명을 어기고 잔치 자리에 나오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왕의 신하들은 와스디의 행위가 나라 전체에 미치게 될 악영향을 고려하여 왕후를 폐할 것을 간언하였고, 이어 왕은 신하들의 말을 따라 왕비를 폐하게 되었습니다.
1. 아하수에로 왕의 명을 어긴 와스디
1) 수산 궁의 잔치
아하수에로 왕은 위에 있은 지 삼년에 모든 방백과 신복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바사와 메대의 장수와 각 도의 귀족과 방백들을 불러 무려 일백팔십 일 동안 잔치를 베풂으로써 그 나라의 영화와 부함과 위엄을 나타냈습니다. 이러한 잔치는 모든 나라의 관리들과 지도층 인사들을 단결시키고 사기를 진작시켜 나라와 왕권의 안정을 기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페르시아는 당시 여로 식민지로부터 많은 공물을 받았으므로 이와 같이 화려하고 웅장한 잔치를 벌여 만방에 힘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a. 도성 수산(에2:3)
b. 느헤미야가 거함(느1:1)
2)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
아하수에로 왕은 술이 취하여 흥이 오르자 어전 내시 일곱 사람을 명하여 왕후를 청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왕이 왕후에게 요청한 내용은 왕후의 면류관을 정제하고 왕의 앞으로 나아와 그 아리따움을 뭇백성과 방백들에게 보이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여러 백성들에게 왕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한 왕은 아름다운 왕후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왕이 베푼 잔치(왕상3:15)
3) 와스디의 왕명 거절
왕이 일곱 내시를 보내어 왕후를 잔치에 나오도록 명했으나 와스디는 왕의 명 좇기를 싫어하여 나오지 않았습니다. 와스디가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잔치에 나오지 않은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백성들 앞에서 왕이 공개적으로 명한 것을 와스디가 거절함으로써 왕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렸다는 점입니다. 왕후가 왕의 위신을 백성들 앞에서 높여 주어야 할 당연한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행한 것은, 그 본분을 망각한 어리석은 행위였던 것입니다. 왕후 와스디는 자신의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왕의 명을 좇아 순종하며 잔치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왕의 위신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a. 남편이 아내를 다스림(창3:16)
b. 남편에게 복종할 아내(엡5:22)
2. 대책을 논의하는 아하수에로 왕
1) 왕의 진노
아하수에로 왕은 왕후 와스디가 자신의 명을 어기고 잔치에 나아오지 않자, 크게 진노하였습니다. 왕은 백성의 사기를 높여 주려고 잔치를 열고 왕후를 나오라고 하였으나 그 명을 왕후가 무시함으로 오히려 왕의 위신이 추락하고, 백성의 사기가 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왕의 진노에 대하여 중심이 불붙는 듯하다고 묘사하였는데,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그 속에서 불이 탔다는 뜻입니다. 왕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던 것입니다. 왕의 명령 거부에 대한 왕의 분노는 곧 진노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a. 사자의 부르짖음 같음(잠19:12)
b. 진노를 감당치 못할 왕의 분노(나1:6)
2) 왕비에 대한 대책 회의
아하수에로 왕은 왕후 와스디가 왕의 명을 어기고 나아오지 않자 진노하여 이 일에 대한 처리를 고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박사들을 불러 이 문제에 대해 자문을 구했습니다. 이는 규례와 법률을 잘 아는 자에게 묻는 전례를 따른 것으로 아하수에로 왕이 일을 개인의 감정적인 차원에서 처리하지 아니하고 법에 따라 객관적으로 처리 하고자 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왕의 사적인 차원에서 보면 단순한 부부간의 문제로 볼 수 있지만, 공적인 면으로 볼 때 왕명에 대한 불복종으로 국법에 따라 처리되어야 할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박사들에게 내시가 전한 왕명을 왕후가 거역한 일에 대해 규례대로 하면 어찌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왕은 이 문제를 규례와 법대로 처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a. 열방의 지혜로운 자들(렘10:7)
b. 바벨론의 모든 박사(단4:6)
3. 박사들의 간언과 폐위되는 와스디
1) 왕과 백성에게 무례를 행한 왕비
박사들은 먼저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 잘못 행했음을 고하였습니다. 와스디는 왕의 명을 거역함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왕의 위신을 실추시켰습니다. 박사들이 와스디의 행위에 대하여 두번째로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그녀의 행위가 왕께 잘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각 도 방백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왕후 와스디가 왕의 명을 공개적인 석상에서 거부한 것은 왕뿐만 아니라 왕의 백성들을 무시한 처사였던 것입니다. 왕이 와스디를 나오도록 명한 것도 잔치에 참여한 백성들 앞에 나와 왕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명을 어겼으므로 왕후는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백성과 방백을 무시한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박사들의 이러한 지적은 왕후라 할지라도 백성들을 존경하여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a. 남편을 멸시함(삼하6:16)
b. 괴악한 일(행18:14)
2) 소문이 염려되는 왕비의 행위
박사들은 왕후 와스디의 악행이 바사와 메대의 온 지역에 퍼져 나가 악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왕후는 모든 백성의 주목을 받고 있는 자로서 왕께 대한 그녀의 악행 소식은 빠른 시간 안에 전지역에 퍼지게 될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왕후 와스디나 왕의 명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다는 소문은 큰 이야깃거리일 것이고 그 소문은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각 가정마다 부녀가 남편의 말을 무시하여 거역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생길 것이고 그로 인해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고 멸시와 분노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박사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왕에게 강하게 주장한 것은 왕후의 행한 일에 대한 소문과 함께 그로 인해 왕후가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되었음을 백성들이 듣게 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백성에게 퍼질 악영향을 막을 수 있으며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왕후가 방자함으로 중한 벌을 받게 되었다는 소문은 모든 백성에 게 악행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a. 모범이 되어야 함(행20:35)
b. 남편에게 순복해야 할 아내(벧전3:1)
3) 폐위되는 와스디
왕은 박사들이 간언을 받아들여서 왕비를 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각 도 각 백성의 문자와 방언대로 모든 도에 조서를 내려 남편으로 그 집을 주관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와스디의 방자함과 그로 인한 징벌을 모든 백성이 알게 되었을 때, 온 나라 백성의 질서를 세울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와스디는 교만으로 인하여 왕비의 영광을 잃게 되었는데 이는 자만과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라는 말씀을 증명하여 줍니다.
a. 왕과 신하의 동의(창41:37)
b. 변개치 않는 규례(에8:8)
결론
와스디의 폐위는 사람이 어느 자리에 있든지 교만하게 행하면 화를 당하게 될 것임을 교훈하여 줍니다. 사람이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믿고 교만히 행하면 결국 와스디와 같이 화를 자초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비히 행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단어해설]
2절. 수산 궁. 고대 엘람 지역에 위치한 페르시아의 수도로 행정 기관이 모여 있으며, 왕의 경호를 위해 견고한 요새로 구축되었다.
10절. 주흥이 일어나서. '술로 인해 기분이 좋아졌다'라는 뜻으로 온전한 이성적 판단 능력을 상실한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13절. 사례를 아는. 문자적으로는 '시대를 아는'이라는 뜻으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말한다. 박사들. 원어 <!ymik;j}:하카밈>은 '지혜로운 자들'을 뜻한다. 이들은 왕의 측근으로 정치 및 행정에 대한 자문 역할을 하였다.
17절. 멸시할. 원어 <t/zb]h'l]:레하브조트>는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을 멸시하거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신학주제]
하나님의 섭리. 본서는 페르시아의 왕후 와스디의 폐위 사건에서부터 이야기가 전개된다. 유대 처녀인 에스더는 왕비 간택을 통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왕비가 된다. 한편 제국의 제2인자인 하만은 유대인을 못마땅히 여겨서 민족 자체를 말살시켜 버리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스더를 통하여 섭리하심으로써 위기에 빠진 유대인들을 구원하신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역사적인 사건들의 전개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볼 때에는 조그마한 사건 하나하나에도 세심하게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운명론과는 다른 것이다. 운명론은 이미 결정되어진 것을 그대로 수행해 나가는 기계적인 것이다. 곧 인생을 닫힌 체계로 간주하는 사고 방식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인생을 열린 체계로 보고 매순간의 결단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생이 진행되는 동안, 인생의 여러 사건들에 부닥뜨리고 결단하는 것은 인간 자신인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이 최종적으로 결말지어지고 난 후에 뒤돌아보면 모든 사건들의 진행 과정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깃들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거대한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섭리와 인간의 운명의 주체적 결단은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게 될 때 비로소 모순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한 신비에 눈뜨게 될 것이다.
[영적교훈]
아하수에로 왕과 왕후 와스디는 부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자기 아내의 의견을 한마디도 물어 보지 않고 무조건 연회에 참석하라고 명령하였다. 고대 국가의 왕은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아하수에로 왕은 자기 명령을 거부한 아내를 죽음으로써 다스릴 수 있었으나 폐위령만 내렸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부부관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이다. 그들은 부부 관계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므로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하수에로 왕이 정당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린 죄는 아하수에로 왕의 책임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폐위 사건을 이용하시어 에스더를 왕후로 만드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계획을 세우신다. 인간의 자발적인 결정과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우리는 이 사건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