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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기 군사 캠페인의 시작. 254년의 북벌.
장의(장억)는 군사들의 선두에 서서 위장 서질과 싸우다가 순사했다.그가 살상한 적병의 수는 서질이 살상한 군사의 배가 넘었다.
- 장의전
다시 농서로 출병하였는데, 적도현을 지키고 있던 장 이간(李簡)이 성을 들어 투항했다. 강유는 나아가 양무(襄武)를 포위하고, 위나라 장수 서질(徐質)과 교전하여 머리를 베어 적을 격파시켰으므로 위나라 군대는 패하여 물러났다.
강유는 승리의 여세를 타고 진격하여 매우 많은 성들을 항복시켰으며, 하관(河關) 및 적도 및 임조 세 현의 백성들을 빼앗아 돌아왔다.
- 강유전
254년 강유의 북벌은 시작부터 화려했습니다.
254년 적도현의 귀순을 받아들이고 대촉 전담 특수부대라 할수 있는 정촉호군을 격파, 지휘관인 서질을 전사시키고 그 일대의 백성들을 촉한쪽으로 끌어들이는 대승을 거둡니다.
희생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장억이 전사하는 피해가 있었지만, 성과와 비교하면 작은 희생이었지요.
그 다음해, 강유는 적도현을 기점삼아 재차 북벌에 나섭니다.
2. 강유의 전성기, 255년.
연희 18년(255)에 또 거기장군 하후패 등과 함께 적도에서 나와 조서에서 위의 옹주자사 왕경(王經)을 크게 격파시쳤다. 왕경의 병사들 가운데 죽은 자는 수만 명이나 되었다. 왕경이 퇴각하여 적도성을 지키자, 강유는 그곳을 포위했다.
- 강유전
정원 2년에 곽회가 세상을 떠나자, 진태가 곽회를 대신하여 정서장군이 되었고, 가절도독옹양제군사가 되었다. 후년, 옹주자사 왕경이 진태에게 말하기를 강유와 하후패가 세갈래 길, 즉 기산, 석영, 금성으로 향하여 병사를 위시로 나아가게 하고, 양주의 군사로 하여금 포한에 이르게 하여 토(정)촉호군을 기산으로 향하도록 하려고 한다고 했다. 진태는 적의 세력으로는 세 갈래 길로 나눌 수 없으며, 아울러 병사의 세력을 분산시키는 것은 피하기 어려우므로 양주의 경계를 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헤아렸다. 그래서 왕경에게 대답했다.
"적의 정확한 소식을 들어 살펴본 결과 그들의 동향을 알았습니다. 동서의 세력이 합치는 것을 기다렸다가 진군합시다."
당시 강유 등은 수만 명을 인솔하여 포한에 도착하여 급히 적도로 향했다. 진태는 왕경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적도에 주둔시키고, 진태의 군사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려 계획에 따라 그들을 공략하도록 했다. 진태는 진창으로 진군했다. 마침 왕경이 인솔하는 군대가 고관에서 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전세가 불리했으므로 왕경은 곧 백수를 건넜다. 진태는 왕경이 적도를 굳게 지킬 수 없으면 반드시 다른 변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군영의 병사를 파견하여 앞으로 가게 하고, 진태는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이었다.
왕경은 이미 강유와 싸워서 크게 패하고 만여 명만이 돌아와 적도성을 지키고 있었고, 그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강유는 승기를 틈타 적도를 포위하였다. 진태는 상규에서 주둔하며 병사를 나누어 요충지를 지키도록 하고 밤을 낮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등애ㆍ호분ㆍ왕비 또한 도착했으므로, 등애ㆍ왕비 등과 삼군으로 나누어 농서로 나아갔다.
- 진태전
이때도 대승, 강유는 군을 셋으로 나누어 북진해 나갔고, 이에 진태는 나눌수 없는 군대라 판단, 왕경에게 자신과의 합류를 대기하라 명령합니다만, 강유군의 빠른 진격속도로 인해 허를 찔려 왕경군과 조우, 고관에서 전황이 불리하자 왕경은 백수를 건너지만 강유는 재차 조서에서 왕경군을 대파하고 적도성으로 몰아넣습니다.
사상자가 수만에 달하는 패배는 삼국지 시대 후반부엔 특히나 보기 힘든 일이지요. 말 그대로 완파를 당한 겁니다.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고성령을 넘어 몰래 행군하여 밤에 적도의 동남쪽에 있는 높은 산위에 이르러 병사들에게 많은 봉화를 밝혀들고 북과 호각을 울리게 했다. 적도성 안에 있던 장수와 병사들은 구원병이 도착한 것을 보고 모두 떨쳐 일어났다. 강유는 최초의 구원병은 반드시 군사들을 모아 출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구원병이 벌써 도착했다는 말을 듣게되자, 이전부터 미리 준비한 계책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위아래가 모우 매우 두려워했다. 위나라 군대는 농서를 출발할 때, 산길이 매우 험난하므로 적이 반드시 복병을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태는 거짓으로 남쪽길로부터 진군하였는데, 강유는 과연 3일간 복병을 배치하였다. 진태의 군대가 몰래 행군하여 갑자기 적도 남쪽에서 나타나자, 강유가 산을 따라 진태의 군사를 습격했다. 진태는 그와 교전하여 퇴각시켜 돌아가게 했다.
양주 군사는 금성을 지나 남쪽으로 옥간판에 도착했다. 진태와 왕경은 비밀리에 날짜를 정하고 함께 강유의 퇴로를 막으려고 했다. 강유 등은 이 계획을 듣고 즉시 도주했다. 적도성 안의 장수와 병사들은 비로소 성을 나오게 되었다.
- 진태전
등애는 적도에서 포위당한 옹주주사 왕경을 풀어주었고, 강유는 물러나 종제에 주둔하였다.
-등애전
위의 정서장군 진태가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포위망을 풀었고, 강유는 퇴각하여 종제(鍾題)에 주둔했다.
- 강유전
그러나 이때의 위군의 피해는 막심했습니다. 옹주가 마비되기 직전이었다고까지 할 정도로요.
등애 등은 주장했다."왕경의 정예병사는 서쪽에서 실패하여 참사를 당했고, 적들의 사기는 더욱 왕성합니다. 승기를 탄 병사는 감당할 수 없고, 장군은 오합지졸로 방금 전쟁에서 진 군사들의 뒤를 잇고 있으며, 장수와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졌으며, 농우는 매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은 `독사가 손을 물면 장사는 손을 자른다` 고 했고, 《손자병법》에서는 `군대가 공격하지 않는 적이 있으면, 지키지 않는 곳이 있다` 고 했습니다. 대체로 작은 손실로써 큰 것을 보존하는 까닭인 것입니다. 지금 농우의 재난은 독사에게 물린 것보다 심하고, 적도 땅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강유의 군대는 그의 예봉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요충지를 차지하고 안전하게 보존하면서 적의 쇠함을 디란 연후에 진군하여 구조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승리를 얻는 방법입니다."
진태가 말했다."강유는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깊숙이 들어가서 우리 군대와 평원에서 선봉을 다투어 한바탕 싸움에서 승리를 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왕경은 성벽을 높게 하고 보루를 깊게 하여 그들의 예리한 기세를 꺾어야 합니다. 지금 적과 교전을 시작했으므로 적으로 하여금 계책을 얻게하여 왕경을 격파하고 적도를 포위했습니다. 만일 강유가 승기를 타고 동쪽으로 진군한다면 많은 식량이 쌓여있는 역양을 점거하고, 병사들을 풀어 항복한 자들을 거두고, 북쪽 오랑캐와 남쪽 오랑캐를 불러 맞아들이고, 동쪽에서는 우리들과 관과 농을 다투며, 사군에 격문을 전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유가 승기를 탄 병사들을 인솔하여 높은 성 아래에서 주저앉는다면, 우리들의 사기는 높아져 힘을 다하고 목숨을 바쳐 적과 싸울 것입니다. 때문에 공격과 구비의 형세가 다르게 되고, 주객이 전도될 것입니다. 병서에서 말하기를, `사다리나 수레를 제조하는 데에는 3개월의 시간이 필요하고, 흙산을 만드는 것은 3개월 이후에야 완성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가볍게 무장한 병사로 깊속이 들어간 강유가 창졸지간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거지를 멀리 떠난 강유의 군대는 식량이 계속 이어지지 못할 것이고, 이는 우리가 신속히 나아가 적을 격파시킬 때입니다. 이른바, 빠른 번개소리가 귀에 미치지 못하는 자연스런 형세인 것입니다. 조수가 적도의 남족에 둘러있고, 강유의 군대는 조수의 북쪽에 있으므로, 지금 우리들이 높은 곳에 올라 유리한 지형을 점거하고 적의 덜미를 움켜쥔다면, 싸우지 않고도 반드시 도주시킬 것입니다. 지금은 적을 방치할 수 없고 적을 오랫도안 포위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까?" (중략)
(전략)
왕경이 감탄하며 말했다.
"식량은 열흘분도 못 남았습니다. 만일 때에 이르러 구원병이 오지 않았다면 성을 들어 궤멸하여 옹주를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
진태는 장수와 병사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앞뒤로 나누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따로 사람을 보내 지키도록 하였으며, 아울러 성과 보루를 수리하도록 하고, 군대를 돌려 상규에 주둔했다.
그 이전에 진태는 왕경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군의 장수와 병사가 평소부터 모두 한마음이었으므로 그들에게 성을 지키게 하면 강유가 단번에 공략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표를 올려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밤낮으로 급히 적도로 달려가라고 했다.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왕경이 도주해 버린 후라 성을 굳게 지킬수 없으므로, 강유가 만일 양주로 가는 길을 끊어 사군의 백성과 만족을 겸병하여 관농의 요충지를 점거한다면 왕경의 군사를 전밀시키고, 농우를 멸망시킬 수 있을것이라고 했다. 응당 대군이 사방에서 모이는 것을 기다린 후에 강유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진태전
기록에도 보아 알수 있듯, 이때 위군의 분위기는 상당히 심각했지요. 농서지역 일대를 상실하네 마네 하는 시점이니.
그 이전에 진태는 왕경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군의 장수와 병사가 평소부터 모두 한마음이었으므로 그들에게 성을 지키게 하면 강유가 단번에 공략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표를 올려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밤낮으로 급히 적도로 달려가라고 했다.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왕경이 도주해 버린 후라 성을 굳게 지킬수 없으므로, 강유가 만일 양주로 가는 길을 끊어 사군의 백성과 만족을 겸병하여 관농의 요충지를 점거한다면 왕경의 군사를 전밀시키고, 농우를 멸망시킬 수 있을것이라고 했다. 응당 대군이 사방에서 모이는 것을 기다린 후에 강유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장군 사마문왕이 말했다."옛날 제갈양은 항상 이러한 뜻을 품고 있었지만, 끝까지 실현할 수 없었소. 이처럼 큰 사업과 계책은 강유에게 맡길만한 일이 아니오. 그리고 적도성은 창졸지간에 공격해서 할 수 없으며, 식량이 적은 것이 긴급한 일이요.정서장군이 신속히 구원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오."
진태는 언제나 한편으로 전쟁에 관한일이 있으면, 걸핏하면 허황된 소리로 천하를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에 위로 보고하는 일을 간략하게 하기를 희망했다. 때문에 그는 역참에 보내는 문서는 6백 리를 너지 않도록 했다.
사마문왕이 순기에게 말했다."진현백(진태)은 침착하고 용감하며 판단력이 있으므로 한편의 중심을 맡아서 공략당한 성을 구할 수 있으니, 병사들의 증원을 요구하지 말고, 또 도정에는 가벼운 사건을 보고하는 것처럼 하십시오. 그는 반드시 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도독대장은 이와같이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진태전
과거 제갈량의 북벌때 위나라의 최고실권자였던 조진, 사마의가 직접 나섰던 것처럼 이때도 위나라의 최고실권자인 사마소가 직접 이 문제를 관리하기도 했지요. 물론 그때처럼 직접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는 건 내부 사정도 있고 해서 무리가 있었겠지만.
비록 마지막 화룡점정에는 실패했지만 이때의 전과는 화려하기 그지 없었고, 관서일대의 위나라 방어체제는 거의 붕괴직전까지 몰립니다.
“농우隴右 사군四郡 등은 매년 적군의 침공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모반하여 적에게 투항하기도 했는데, 그 친족으로 국내에 남아 있는 자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그들을 사면해 주었다.”
- 고귀향공기(조모)
여기에 조서에서도
“.....적군(촉나라)들로 하여금 국경지대를 침범하도록 하였다. 싸움에서 져서 사망한 장수의 수가 모두 천여 명이나 된다. 어떤 이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어 원귀가 돌아오지 못했고, 어떤 이는 적군의 포로가 되어 타향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다.(중략)”
대책으로 장수와 군인들 가족들을 위문케 하고 1년간 부역에 면하도록 합니다. 그것도 안심이 안 되는 지 후속편을 냅니다.
“장병들과 백성들 중에 전쟁터에서 싸우다 사망했거나 조수에 익사한 사람들이 있는데, 유골을 거두지 못하고 들녘에 방치해두었으므로 항상 이 일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그리고 등애를 비롯한 위의 장군들로 하여금 전선에 흩어진 위군 시체를 거두도록 시키죠.
3. 운명의 256년. 단곡전투.
256년, 강유는 대장군으로 승진하고 재차 북진을 감행합니다. 이를 예측한 사람이 위에는 거의 없었고 또다시 기습에 성공할 수도 있었지만, 등애가 이를 읽었다는 게 강유에겐 불운이었지요.
논의하는 자들은 대부분 ‘강유의 병력은 이미 다하여 병사를 내어 다시 공격할 수 없다.’ 고 주장했다.
등애가 말했다. “왕경이 조서에서 패배한 일은 작은 실책이 아닙니다. 우리군을 격파시키고 장수를 죽였으며 창고는 모두 텅 비었고, 백성들은 갈곳을 잃어 떠돌아다녀 거의 멸망 상태까지 되었습니다. 지금 작전상에서 말하면, 적에게는 승기를 타고 공격하는 기세가 있으며, 우리는 허약한 체질입니다. 이것이 첫 이유입니다. 저들은 위아래가 서로 익숙하게 훈련되었고 병기는 예리한데 우리는 장수를 바꾸고 병사를 새로 중원하고 손상된 병기는 아직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적은 배로 행군하고 우리는 육로로 걸으니 수고로움이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셋째 이유입니다. 적도 농서 남안 기산은 각기 지켜야만 합니다. 적은 병력을 한곳에 집중시키지만, 우리는 네 곳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넷째 이유입니다. 남안과 농서를 향한다면 강인의 곡식을 먹을 수 있고, 만일 기산으로 향한다면 1천 이랑이나 되는 잘 익은 보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적을 유인하는 먹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째 이유입니다. 적군은 교활하고 책략에 뛰어나므로 그들이 오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 등애전
이때 기록상으로 보아 등애가 사령관으로서 직접 강유군을 저지할 임무를 부여받은 듯 싶고, 그런 등애가 올 거라 예측했다는 것이 위에겐 행운이고, 강유에겐 불운했다 하겠습니다. 강유의 북진을 예측한 등애는 이에 대응해 방어전을 펴지요.
오래지 않아 강유가 과연 기산으로 향했는데, 등애가 이미 방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곧 동정으로 돌아가 남안으로 진군했다. 등애는 무성산을 점거하고 강유와 대치했다. 강유는 등애와 요충지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지만 이길 수 없었으므로, 그 밤에 위하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여 산길을 따라 상규로 달렸다.
- 등애전
등애의 전략은 아무래도 최대한의 병력을 끌어모아 강유군의 진로가 될법한 곳에 모두 방어선을 펴고 자신의 소수 직속부대로 기동전을 펴는 강유군에 대해 마찬가지로 기동전을 펴서 따라잡은 듯 싶습니다. 갈만한 곳에는 모두 방어병력을 배치해 놓았으니 직속부대규모는 작아도 바로 현지의 방어병력을 동원해 그 전장에서의 필요한 병력양을 보유할 수 있었을 테고, 미리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으니 강병인 강유군과도 싸울 수 있었겠죠. 이건 물량에서 압도적으로 앞서야 가능한 일이지만, 위는 언제나 물량에서 촉보다 우위에 있었고, 많아야 수만 정도의 전력만을 동원할 수 있었던 강유군에 대해서는 더더욱 병력양에서 앞서는 일이 가능했을 겁니다. 미리 요충지를 선점하고 방어에 전념해 장기전이 어려운 강유군의 약점을 노리는 것, 이게 등애의 전략이였다고 추정됩니다.
강유는 이때 비록 작년에 위군을 대파하긴 했지만 기본 전략인 강족과 호인을 날개로 삼아 농서의 길을 끊는 다는 기조를 유지하면서 전진했고, 등애와 기동전을 폈지만 미리 모든 진로에 방어병력을 배치한 등애를 상대로 요충지를 확보하는 데 실패하고, 결국 승부수를 던집니다. 상규로 전진한 것이죠.
윗쪽의 등애전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상규(기산)에는 막대한 양의 보리가 있고, 이를 확보한다면 군량 문제도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위측에도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이며, 당연히 등애가 쫓아올 것이라 예측할 수 있습니다. 강유는 이를 통해 방어준비를 철저히 하고 버티는 등애를 야전으로 끌어내 격파하고, 기세를 몰아 농서를 점령한다면 북벌의 일차 목표를 달성하는 셈이지요.
그러나 장기간의 행군과 군량부족, 위군의 양적 우위를 생각하면 야전으로 끌어낸다고 해도 강유군이 열세입니다.
그래서 강유는 여기에 숫적 열세와 지친 병력을 보강할 방법인 한중군의 합류를 요청합니다만,
진서대장군 호제(湖濟)와 상봉에서 만날 날을 약속하였는데, 호제가 약속을 깨고 도착하지 않았다.
- 강유전.
합류하지 못합니다.
이 원인이 무엇인지는 의문이 많습니다. 호제가 강유를 시기하여 그랬다고도 하고, 진로 곳곳에 방어선을 치고 있던 위군이 한중군을 저지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무언가 뚜렷한 이유가 있는 듯 싶은데, 이는 계한보신찬에서 호제가 의외로 호평을 받고 있기 때문이죠.
어쨌든, 강유가 계획한 한중군과의 합류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강유는 단독으로 등애와 단곡에서 맞부딪치게 되었고,
등애는 강유와 간곡에서 교전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감로 원년(256), 조서를 내려 말했다.
<역적 강유가 해마다 교활한 행동을 하여 백성들과 만족을 동요시켜 서쪽 땅은 편안할 수 없었다. 등애는 이치에 맞는 계획을 세우고, 충절과 용기를 떨쳐 일어나 적장 20여명을 죽였고, 죽인 적군의 병사는 많다. 국가의 위엄을 파와 촉에 떨치고, 무용의 명성을 장강과 민강에 흐르게 했다. 지금 등애를 진서장군, 도독농우제군사로 삼고, 나아가 등후로 봉한다. 그의 식읍 5백 호를 떼어 아들 등충에게 주어서 정후로 삼으라.>
- 등애전
강유는 단곡(段谷)에서 위나라 대장군 등애에게 격파되어 병사들을 뿔뿔이 흩어졌으며, 매우 많은 수가 사망했다. 병사들은 이로 인해 모두 강유를 원망했고, 농서 서쪽 지역에서도 소동이 일어나 안정되지 못했다. 강유는 잘못을 사과하고 책임을 지기위해 자신의 관직을 삭탈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후장군 및 행대장군사로 강등되었다.
- 강유전
결국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강유는 대패합니다. 2년여에 걸처 거두어들인 성과는 단 한번의 전투로 무로 돌아갔고, 하후패를 포함한 장수 20여명이 전사한 패배였죠.
비록 그 다음해에 강유는 재차 수만여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등애가 교전을 피했다는 걸 생각하면 의외로 병력 피해가 엄청나지는 않았을 수도 있긴 합니다.
강유는 촉한 조정으로부터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해 최대로 지휘한 병력도 수만 정도(5만 이하. 기록상 5만이 넘어가면 호왈 10만이라고도 하고, 그렇게 기록하지 않아도 5만이 넘는다고 특별하게 기록해 줍니다. 그 이하는 그냥 수만이지요.)에 추가 병력지원도 부실한데도 수만여 병력을 재차 동원할 수 있었다는 건 병력 손실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단곡전투의 중요함은, 강유가 그때까지 거두어 들인 전략적 성과를 모두 무로 돌렸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였던 것이죠. 촉군 입장에선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투가 단곡 전투였고, 그래서 장수들이 진두지휘하다가 20여명 씩이나 전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강유는 북벌에 실패했고, 그와 여러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촉한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쉬울 따름이죠. 이후의 통일왕조, 서진의 그 막장스러움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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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은 전술적 능력에서도 굉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몇 번 사마의와 붙었는데 발랐을 겁니다. 사마의가 조조가 직접 선발하고 가르쳤던 2세대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건 굉장한 수훈이죠.. 단지.. 강유처럼 촉한의 경우 한 번 제대로 패하면 모든 걸 다 털어먹히게 된다는 걸 아니까 전략적으로 굉장히 신중하게 갈 수 밖에 없었죠..-_-;; 실제로 강유는 딱 한 번 깨지고 옹주일대의 성과를 한 방에 다 날리게 되니까요..
제갈량과 사마의가 정면에서 맞부딪친 건 노성전투 딱 한번이죠. 그리고, 여기서 사마의는 양적 우위를 적극 활용해 후방으로 장합의 별동대를 돌리면서 정면 압박을 갔다가 장합 별동대는 막히고 사마의 본대는 아예 와장창 깨졌고. 이때 위군 전사자가 3천이던가...
제갈량의 전술적 능력이 뛰어난 것 사실이지만 웬지 한신보다는 전술적 능력에서는 밀리는 것 같더군요
제갈량은 항상 자기를 춘추전국시대의 관중,악의에 자주 비교했다고 하더군요...
가뜩이나 인재풀이 부족한 상황에서 하후패의 전사는 심각한 문제죠..-_-;; 장의의 전사도 가벼운 문제같지는 않아요.. 거의 우발적인 전사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서진왕조의 막장스러움을 생각하면.. 우리 입장에서는 다행이죠..ㅎㅎ 광개토 대왕이 만주벌판 먹었을 때가 서진과 오호 16국을 거친 중국사의 막장시대 아니었겠습니까..ㅋ
하긴 그러고 보니 우리 선조들에겐 기회긴 했습니다. 위나라 때까지만 해도 꽤나 큰 수준의 간섭이 있었는데 서진 이후론 뭐, 간섭도 별로 없고...
장의의 전사는 꽤 타격이 큰게 아니었을까요? 조무래기 장수가 아니라 그래도 핵심수뇌부중 하나인 장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