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6일(사순 제5주일) 자비하신 하느님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데려왔다. 율법에 따르면 그는 돌에 맞아 죽어야 했다.(신명 22,21) 그들은 그 여인에 대해서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당시 유다에서 사형권은 로마 총독에게 있었고 로마법에 따르면 간음의 형벌은 사형이 아니었다고 한다. 율법을 따르라면 황제의 권위에 저항하는 일이 되고, 그 여인을 놓아주라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게 됐다. 진퇴양난의 함정이 있는 질문이었다. 예수님은 즉답을 피하시고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시는 특이한 행동을 하셨다. 이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다. 즉답이 힘들 때 생각을 정리하거나 딴청을 부리는 거처럼 그럴 수 있고, 그녀를 처형하려는 이들의 이름을 땅바닥에 쓰신 거라고도 한다. 성경에 ‘주님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라(예레 17,13)’는 말씀대로 하신 거라고도 한다. 성경 공부를 많이 한 이들은 예수님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섬뜩했을 거다. 어떤 해석이 옳은지 모르겠는데, 분명한 건 그들이 시선과 관심이 그 여인에게서 예수님에게로 완전히 옮겨졌을 거란 거다.
그런데 그들이 사악한 의도에서 이런 상황을 연출했다기보다는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병자를 치료하시고 지극히 불결한 나병환자와 시체에도 손을 대셨다. 게다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하셨고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셨다. 예수님의 행동은 유다 사회의 기초를 흔드는 위험한 거로 보였을 거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자비롭기만 하면 하느님의 정의는 어떻게 되냐는 일종의 항의인 셈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의와 자비는 서로 대립하는 게 아니라 충만한 사랑의 두 가지 차원으로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이라고’ (「자비의 얼굴」 20항) 가르친다. 일반적으로 정의는 악한 일을 하면 벌받는 거라고 여기고 성경에서도 하느님을 정의로운 판관이시라고 말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정의는 단순히 심판하고 벌주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당신께 돌아오게 해서 살리는 것이다. 하느님은 죄인이 벌받는 게 아니라 돌아와 살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고 그들과 어울리시며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 보여주셨다. 자비가 하느님의 정의를 완성한다. 예수님은 그 바라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시선을 당신에게 떨어지게 하셔서 그 여인을 그들에게서, 율법의 단죄에서 풀어 주셨다. 자비는 결코 정의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다가가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나타낸다. 하느님은 죄인이 참회하고 회개하여 믿도록 많은 기회를 주신다.(「자비의 얼굴」 21항)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하신 예수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율법 준수만을 정의라고 여기는 그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게 됐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시자 그들은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단죄하지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잘못을 못 본 체하거나 봐주시지 않았다. 그 여인에게 이렇게 단단히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7-18) 하느님은 우리가, 죄인들이 구원되기를 바라신다. 우리에게 죄를 피하기 위한 율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비하신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자신의 그 죄들을 다 어떻게 할 건가? 지금은 바빠서 잊은 거 같지만, 조용한 시간에 자기 자신과 마주하면 뇌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 한 그 죄들이 다 기억난다. 병원에서 겉은 멀쩡해도 특수 촬영을 하면 속병이 다 보이는 거처럼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 몸, 온통 상처로 가득한 그 몸이 바로 나의 죄들이다. 오래 살수록 자기 죄들을 더 많이 보일 거다. 우리는 그 죄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죽었다고, 없어졌다고 믿는다. 하느님이 정의롭지 못하시다고 불평하기 전에 십자고상을 투시 거울로 삼아 내 허물과 죄를 봐야 한다. 그러면 이웃을 향해 던지려던 돌을 내려놓게 될 거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서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예수님, 하느님의 자비만이 제가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걸 잊지 않습니다. 제가 용서받은 그대로 한다면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께 전구를 청하며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체험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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