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김제 금산사를 다녀오다
108절집 답사 계획을 세우고 나서 먼 길은 운전에 자신이 없어서 경상도 지역을 절집만을 돌아보기로 했다.
처남이 운전해주겠다고 했다. 여러 해 전에 관광버스를 타고 전주를 다녀온 기억이 생생하다. 88고속도로로 함양까지 가서, 다시 고속도로로 전주로 가는 길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전주의 인근에 있는 금산사를 찾아가기로 정했다.
10시 쯤에 대구를 출발하여 시내를 벗어나는 데만 40분 가까이 소요되었다. 함양에서 전주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이긴 하였지만 소백산맥과 함께 달리는 길이라선지 운전이 수월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났다.
금산사는 몇 가지에서 유명한 절이다. 미륵불을 신앙하는 도장이고,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서 유폐된 절이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배웠던 역사적 사실이라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널리 알려진 절이다. 그러나 금산사의 얼굴 역할을 한 국보 미륵전이 최근에 불타버렸고, 지금의 미륵전은 새로 건축하였다는 사실이 가슴에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 불타버린 절집이 많다. 이런저런 흉흉한 뒷 이야기가 떠돌지만 뒷 이야기라서 믿기도 그렇고------.
금산사는 미륵신앙으로 유명한 절이다. 미륵신앙은 삼국시대 말에 백제 땅에서 먼저 나타났다. 이곳에서 멀지 않는 익산 미륵사지가 미륵신앙이 성행하였음을 말해준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백제의 고토인 이곳에 미륵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금산사가 중심 사찰이었다. 미륵불교는 구세주 사상이다. 백제의 고토에 백제의 유민이 살고 있는 이곳에서 미륵신앙이 성행한다는 것은 신라정부로서는 걱정거리였다. 실제로 견훤이 미륵사상을 앞세워 후백제를 창업하지 않았는가.
진표율사가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주조를 시작하여 혜공왕 2년(766)에 봉안한 장륙 미륵상이 있었다. 조선 선조 30년(1597)에 정유재란 때 절이 불타면서 없어졌다고 하나. 신라 때 주조한 미륵상인지는 모른다고 한다. 인조 13년(1635)에 수문대사가 다시 주조하여 모셨으나 또 다시 소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1938년에 근대 조각가 김복진이 석고로 복원해서 모셨다. 그 미륵부처님도 지금 계시는지 모르겠다.
금산사 앞에 펼쳐진 김제들은 유서 깊은 벽골제가 있는 곳으로 예부터 논농사를 짓던 곡창지대이다. 금산사를 지탱해준 경제적 기반이었다. 여기는 백제의 고토이므로 이곳 농민이 바로 백제의 유민이기도 하였다. 미륵신앙을 신봉하면서 백제의 회복을 꿈꾸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진표율사가 미륵신앙을 가지고, 점찰교법이라는 교리를 가지고 이들을 제도하면서 법상종을 열었다. 신라의 경주에서는 이들을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진표가 반신라 행동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 사실들 때문에 편안한 기분은 아니었다. 진표는 어느덧 백제 유민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금산사를 품고 있는 모악산은 예부터 토속신앙지였다. 산의 여기저기에 토속신앙의 흔적이 흩어져 있다. 미륵신앙은 토속신앙과 어우러져서 이곳 백성들에게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김제들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농민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들을 발판으로 견훤이 백제 재건의 기치를 내걸고 신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6월도 끝무렵으로 치닫는 절기이다 보니 햇살은 두텁고, 뜨겁다. 절 안에 들어서니 절집도 많이 서 있고 절의 영역이 너무 넓다. 이곳저곳을 살펴보기도 힘에 부친다. 절 마당의 나무 그늘에 처남과 앉아서 더위를 피했다. 집사람은 절집을 찾아가면 절의 구석구석까지 둘러본다. 오늘도 집사람은 기와불사에도 참여하고, 미륵전에도 들리고, 대적광전에도 들려서 불공을 드린다. 나는 집사람이 법당 순례를 끝내고 나오기만 기다리면서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미륵전이 눈길을 끈다. 불타버린 옛 자리에 새로 지은 삼층 목조 건물이다. 미륵전이라는 크다란 현판을 달고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어서 보기가 좋다. 대적광전 법당은 무지하게 크다. 하기야 대적광전에는 여러 부처님이 모시니까 크야 하겠지만, 경제력이 빈약한 절은 꿈도 꿀 수 없으리라. 미륵전과 대적광전 사이에 새로 조성한 금강계단이 보인다. 요즘은 웬만한 절집이면 적멸보궁이라는 현판을 달고, 석가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하는데, 굳이 이렇게 해야할까.
나는 임금님이 사시는 궁궐처럼 법당과 요사채가 요란하게 들어선 큰 절보다는 숲 그늘이 드리우고, 산새소리도 심심찮게 들리고, 간간이 솔바람이 스치듯이 지나는 고적한 절마당이 있는 작은 절이 더 마음에 든다.
고려 때는 대각국사의 외삼촌이고, 세 딸을 문종비로 들여서 각 딸이 낳은 외손이 순종, 신종, 숙종이 된 혜덕 왕사 소현(1038-1096)이 금산사를 크게 지어서 법상종을 중흥했다. 이로서 미륵신앙이 이 절에 대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한 켠에 모셔 둔 이 절의 묘탑 지역에 소현의 묘탑은 보이지 않고, 풀만 무성히 자라나고 있으니, 이 또한 인생 무상이고, 세월 무상인가.
진표가 법상종을 창립한 일대 종사이다. 대구의 동화사도 법상종과는 깊은 인연이 있다. 진표의 법상종 종지는 법주사의 영표에게 이어졌다. 앞서도 대강 말했지만 신라로서는 백제의 고토에 미륵신앙이 퍼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동화사를 창건한 신라 왕자 심지대사가 법주사에 가서 법상종의 법통을 뻬앗아 종지를 가지고 온 전설은 유명하다. (동화사의 창건 설화이기도 하다.) 금산사를 품고 있는 산이 모악산이다. 동화사를 품고 있는 팔공산을 부악산이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연루한다.
금산사가 유명한 절이고, 내가 다녀오고 싶은 절이었지만 너무 크고, 너무 웅장하여 오히려 실망을 했다고 할까. 이렇게 말하려니 내가 무슨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 같아서 쑥스럽다. 하여간에 그렇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