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제22대 정종왕은 왕 13년, 어느날 민정을 살피고자 미복으로 내관 한 사람을 데리고 밤늦게 장안의 이곳저곳을 순행하였다. 순행을 마치고 환궁하려다가 남대문에 올라 사방을 살피던 중 이상한 일을 발견하고내관에게 말하였다.
"문밖으로 세번째 초가집에서 나오는 저 이상한 빛이 보이느냐?" "네, 보이옵니다." "저러한 서기(瑞氣)광명(光明)은 보통 있는 일이 아니니 빨리 가서 그 까닭을 알아 오너라."하고 하명하였다.
내관은 즉시 가서 알아 본 결과를 이렇게 아뢰었다. "초가집 주인은 매우 빈한하게 사는 늙은 부부 뿐 이옵고, 서기가 나오는 방에는 어제 밤 늦게 와서 방을 빌려 자고 있는 스님 한 사람이 있기에 데리고 왔습니다.
" 종일 걸어와서 곤하게 자고 있던 스님은 영문도 모르고 밤중에 잡혀 온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아무런 잘못이 없는지라 담담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 왕은 더욱 의아한 마음으로 스님에게 물었다.
"대사는 어디 사는 누구인가?" "네 대구에 있는 동화사에서 사는 용파라는 중이온데 어제 늦게 와서 방을 빌려서 잔 죄밖에는 없사옵니다." 하고 정중하게 대답하였다.
어두운 불빛에 보아도 선비인듯한 차림의 점잖은 사람으로 보이고 묻는 말도 매우 정중하여 용파스님도 정중하게 대답하였다. 그는 다시 정중한 말로, "알겠소, 그런데 미안하지만 내가 가는 곳까지 함께 가주기 바라오." 하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걸어간다.
그리하여 함께 간 곳이 대궐이었고 이 선비차림의 사람이 정종대왕인 것도 알게 되었다. 민정을 살피려고 순행하던 정종왕이 민가에서 잠자고 있던 스님을 왕궁에까지 데리고 온 것은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용파스님이 자고 있던 방에서 서기광명이 나온 것으로 봐서 예사 스님이 아니라 도가 높은 스님으로 알고, 대를 이을 태자가 없어 항상 상심하던 임금은 도력이 높은 스님의 도력을 빌어서라도 태자의 출생을 얻어보려는 깊은 생각이었다.
왕은 측근자들과 숙의한 끝에 용파대사에게 태자출생을 기원하는 백일 불공기도를 하도록 의뢰하기로 결정하였다. 용파스님은 이처럼 막중한 왕명을 받고 여러가지로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혼자힘으로는 매우 어려운일이라 생각하여,
당시 천수주력과 기도로 도통했다는 유명한 농산스님을 찾아가서 상의하였다. 농산스님도 간단히 허락할 일이 아닌 것은 알지만 역시 나라를 위하는 일인지라 피할 수 없이 함께 기도하기로 승낙했다
용파스님은 농산스님을 왕에게 추천하여 용파스님은 수락산 내원사에서 농산은 세검동 금선암에서 왕자출생 백일기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막중한 책임을 지고 함께 기도하기로 한 농산스님은 어떤 도인인가.
농산스님은 원래 금강산 만회암(萬灰庵)에서 평생을 천수주력으로 득력하였고, 그뒤 전라남도 장흥에 있는 고금도에 들어가 동굴에 살면서 굴(石花)을 양식으로 하고 천일기도를 시작하였다. 기도한 지 한해가지난 어느날 배 한 척이 표착하였는데 사공은 없고 쌀만 실린 배였다.
오래도록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부처님이 보내 주신 양식으로 생각하고 더욱 굳은 신심으로 용맹정진한 끝에 드디어 도통을 얻었었다.
이리하여 배도 없이 육지에 나와, 그 뒤로 자하문밖 금선암에서 계속 수도하고 있던중이었다. 이러한 수행과 도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용파화상은 농산화상을 자신있게 정종왕에게 추처느 정종왕 12년 7월부터 내원사와 금선암에서 백일기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두 스님은 있는 정성을 다하여 백일기도를 마치었으나 아무런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 스님은 상의하여 다시 백일을 연장하기로 하고 왕께 청하여 백일기도를 다시 정성껏 드렸다.
그러나 또한 아무런 좋은 징조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농산화상은 정중(定中)에서 살펴보니 정종임금에게는 왕자로 태어날 인연을 지은 자가 없으니 진실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농산화상은 갖은 생각을 거듭한끝에 할 수 없이 자신이 죽어서 왕자로 태어나기로 결심하고 내원사 용파에게 이 사연을 편지로 전하고 대궐을 향햐여 분향재배한 후 고요히 앉아 열반에 들었다. 용파스님은 편지를 손에 든 채 금선암으로 달려왔으나 스님은 이미 열반한 뒤였다.
용파스님은 다시 입궐하여 임금에게 농산의 열반 소식과 함께 편지의 내용대로 사뢰니, 왕은 만면의 미소를 지으면서 "대궐에서는 어제밤에 원빈 박시가 농산대사가 연(輦)을 타고 입궐하여 자기 방으로 드는 꿈을 꾸었다. 하니 이는 태자를 얻을 태몽이 틀림이 없도다." 하며 그 동안 기도에 정성을 다한 수고를 치하하였다.
그 후 달이 차서 과연 왕자가 탄생하니 이 분이 바로 제23대 순조(純祖)임금이다. 이리하여 세상에서 순조는 농산의 후신이라 했으며, 그래서인지 순조는 망건(網巾)을 쓰면 머리가 아파서 평생 망건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