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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訃告)하고 접빈(接賓)하는 법
1. 장례에서 중요한 것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애도하고 통곡한다는 것을 뜻한다. 어른 남자가 마음 놓고 감정을 -- 그것도, 나약하게시리 슬픈 감정을 -- 노출하는 것은 민망한 일이지만, 부모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예외다. 지난 번에 내가 써 올린 글을 두 달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참으로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지만, 어느 정도는 양해가 되리라 생각한다. (특히 모친상의 경우에는 정말로 예외다. 불과 몇 달 전에 부친상의 상복을 입었던 용철이는 연달아 모친상을 당한 후 “어머니는 아버지 경우와 다르다. 많이 다르다. 나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다.”라고 말했다. 전화를 걸어 위로한답시고 몇 마디 말을 늘어놓던 나는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그러나 애도하고 통곡하는 것이 장례의 전부는 아니다.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고인을 보내고 기리는 예식을 집행한다는 것을 뜻한다. 올바르게 보내드리고 올바르게 기리기 위해서는 예법에 맞게, 또 정성을 다하여 일을 치러야 할 것이다. 내가 선친을 허름하고 적막한 납골당에 모신 후 애통해하자 현준이가 참으로 좋은 정보를 한 가지 알려주었다. (중학교 3 학년 때의 현준이 얼굴이 며칠 전에 퍼뜩 떠올랐다. 몸이 아파서 조퇴를 하고 귀가하던 길이였던 것 같은데, 하여간 수려한 얼굴이 파리해진 채 가방을 들고 운동장을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임실 호국원은 동작동 국립묘지처럼 화장한 유골을 매장하고 상석과 비석까지 갖추어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임실 호국원에 가 보았다. 우리 집에서 50분 거리다. 현준이가 말한 그대로였다. 8월 말에 그곳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하였다. 선친은 6.25 참전 용사로, 이제 국가가 제공하는 예우를 받게 되었다. 우리 가족이 얼마나 기뻐하는지를 현준이는 모를 것이다.
그러나 고인을 보내고 기리는 예식을 집행하는 것 역시 장례의 일부일 뿐이다. 장례를 치른다는 것에는 또 다른 중요한 것이 들어있다. 그것은 부고하고 접빈하는 일이다. 알릴 만한 사람들에게 알리고 찾아 준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 -- 이 것 역시 장례를 치른다는 것에 포함되는 중요한 일이다. 애도하고 통곡하는 것은, 말하자면, 내 감정을 상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장례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방심하고 우는 것보다 쉬운 일이 어디 있겠나?) 고인을 보내고 기리는 예식을 집행하는 것은 고인을 상대하는 것 혹은 저 세상을 상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고하고 접빈하는 것은 산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며 이 세상을 상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부고하고 접빈하는 것은 고인을 보내고 기리는 예식을 집행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겠다.
나는 이번에 부친상을 당하여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하였다. 지난 번 글에 쓴 대로, 나는 애도하고 통곡하는 것과 관련된 의외의 경험도 하였고, 고인을 보내고 기리는 예식과 관련된 의외의 경험도 하였다. 이번의 부친상이 내가 경험한 첫 번째 상사(喪事)다. (내 할아버지는 내가 네 살 때 돌아가셨고, 내 할머니는 내가 군에 있을 때 돌아가셨는데, 내보내 주지 않아서 나는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내가 이번의 부친상에서 경험한 의외의 경험 가운데에는 부고하고 접빈하는 일과 관련된 것도 들어있다.
2. 무대와 무송
장례에서 제일 어렵고 제일 망설여지는 것은 부고하는 일이었다. 누구에게 알리는가? 이 판단을 하는 것이 제일 어렵고 제일 망설여지는 일이라는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러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일을 가장 단 시간에 거의 아무렇게나 처리해 버렸다. 장례 절차를 결정한 후 나는, 아는 사람들의 전화 번호를 적어 놓은 손바닥만한 수첩을 꺼내 들었다. 한 20년 써 온 수첩이다. 나는 볼펜으로 체크를 하였다. 이 사람에게는 연락을 한다. 이 사람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는다. 체크가 끝난 후 나는 조교에게 전화하여 연락을 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의 이름과 전화 번호를 불러주면서 연락을 지시하였다.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연락을 할 사람을 선별하였는가? 물론 고등학교 동창이나 대학교 동창, 내 직장인 우석대학교, 성경재, 그리고 내가 속해 있는 도덕교육학회 같은 학회 등에 관한 한,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위와 같은 질문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 단체의 총무나 간사에게 연락을 하면 그 사람이 회원 전체에게 (핸드폰 문자나 이메일로) 연락을 해 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단체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에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선별하였던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이렇게 하였어야만 한다. 즉 그 사람이 나에게 자기의 부고를 전하였다고 가정할 때 내가 의아해하지 않을 사람 -- 이 사람에게 나는 부고하였어야만 한다. 단체나 연락망이 조직되어 있지 않아 개별적으로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지금 생각해 보니, 두 부류밖에 없다. 영서중학교에서 같이 지냈던 교사들과 교육개발원에서 같이 지냈던 연구원들이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조문해 주었다. 창우나 후선이처럼, 그리고 내 대학 동기 하나처럼 몇 십년만에 본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그렇게 오래 떨어져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10년 가까이, 최소한 5년이상은 만난 적이 없는 데도, 친분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 찾아 준 사람들은 더 많았다. 내가 사교에 소극적이라는 것은, 내가 핸드폰도 없이 지낸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젊었을 때도 그랬다. 나는 결혼하여 분가한 후 5년 가까이 집에 전화를 놓지 않았었다. 그러니,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조문해 주었다는 말은, 역시, 많은 사람들이 조문해 주었다는 의미라기보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조문해 주었다는 의미이다.
조문객으로 접빈실이 가득 차서 접빈실을 추가로 하나 더 사용하였지만, 그것은 내 손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내 동생 손님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한조가 “니 동생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 물음이 “니 동생 뭐 하는 사람이기에 조문객이 이렇게 많고 조화가 이렇게 많이 들어오느냐?”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조화가 자그마치 아흔 다섯 (95) 개가 들어왔다. 그 중에 나에게 들어 온 것은 학준이가 보낸 것을 포함해서 네 개다. (학준이가 안 보냈으면 세 개밖에 안 될 뻔 했잖아.) (그 중 내 매제에게 들어 온 것은 열 한 개다.) 내 동생은 사교에 아주 적극적이다. 전화 요금도 엄청나게 나올 것이다. 또 엄청나게 많이 돌아다닌다. 내 주행 거리는 1년에 딱 1만Km인데, 이 아이는 4만 Km가 넘는다. 그러니 사람을 많이 아는 것은 당연하다. 강남 세브란스 병원에 전화를 하여 아버지의 주치의를 결정한 것은 난데, 알고 봤더니, 주치의 윤박사는 내 동생 고등학교 동기의 선생이었다. 이것 역시 우연이지만, 임실 호국원을 관내에 두고 있는 무슨 부대의 연대장은 동생의 육사 동기다. 동생은 며칠 전 남원으로 동기를 찾아가 연대장 관사에서 자고 왔다. 이런 식이다.
이런 식이지만, 나는, 동생의 적극적인 사교가 사업 수완의 일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생은 육사를 1년 다닌 후 중퇴를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동기’들과 연락을 해 왔다. 이 아이는 심지어 초등학교 동창들과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 어머니 말씀을 들어보면, 이 아이는 세뱃돈을 받으면, 친구들에게도 사주고 자기도 사먹고 하면서 그 날로 몽창 다 써버렸다고 한다. 이 아이의 초등학교 동창 중 두 명(희동이와 영복이)은 나도 잘 안다. 물론 내 동생은 내 친구들을 더 많이 안다. 내 동생은 나의 개발원 동료들도 많이 알고 심지어 나의 영서중학교 둉료들도 안다. 얘는 사람을 한번 만나면 잘 잊어먹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얘가 사람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인 것 같다. 분가한 내가 이사를 할 때였는데, 나는, 이 아이가 환타와 콜라를 사다가 이삿짐 센터 인부들에게 웃으면서 따라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이 아이는 대학생이었다. 언젠가 전농동 이모네 집을 방문할 때였는데, 이 아이가 봉투를 만들어 나에게 건네면서 “형, 이모에게 용돈 좀 드려.”라고 말했다. 누가 형인지 모르지. 하여간 우리 사이의 나이 차이는 8년이다.
그러니까 우리 형제는 나이 말고도 차이 나는 것이 많은 것이다. 내가 제일 듣기 좋아하는 말은 “동생은 형보다 더 잘 생겼네. 키도 더 크고.”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동생을 데리고 다니기를 즐겼다. “동생은 잘 생겼네.”라고 말하는 이상한 사람들도 종종 만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요번에 접빈실에서 나는 평생 들어보지 못한 극악무도한 말을 들었다. 개발원 동료(인천 사람임)인데, 이렇게 말했다. “무대와 무송이로군.” 상주하고 한 번 붙어보겠다는 거야? 무대라니, 짜도 너무 짜지? 두고 보자 인천 짠물.
3. 네 개의 조화(弔花)
아흔 다섯 개의 조화가 어머니를 많이 위로하였다. 어머니는 흐믓해하시면서 “너희 아버지, 꽃에 묻혀서 가는구나. 살아 생전에 이런 것을 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꼬.”라고 여러 번 말했다. 나도 아주 흐믓하였다. 심지어 나는 속으로 약간 뻐기기까지 하였던 것 같다. “이것 봐. 우리 집안, 그런대로 괜찮은 집안이잖아.”
그러나 물론 조화의 개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부의금의 총액이 중요한 것도 아니며 찾아 준 조문객의 숫자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첫째로, 아흔 다섯 개의 조화건, 네 개의 조화건, 내가 조화를 받아다는 사실이다. 즉 중요한 것은, 내가 세상으로부터 따뜻한 마음을 받았고 세상에게 신세를 졌다는 사실이요, 내가 그것을 명심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된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다시, 조화의 개수, 즉 부의금의 총액이나 조문객의 숫자다. 반복하거니와, 조화가 많다고 해서 허세를 부릴 것이 없는 것처럼, 조화가 적다고 해서 위축될 것도 없다. 다만 조화의 숫자가 나의 사교의 범위나 나의 사회생활의 규모를 알려준다는 것은 흔쾌히 인정하여야 하겠다. 이런 생각을 하니, 나에게 조화를 보내준 소수의 사람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렇다. 내가 어려울 때 들여다 봐주는 사람들이 몇 명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겨야 하겠다. -- 나는 이 한 마디 말을 하기 위해 이 긴 글을 썼다.
결국 또 교과서적인 뻔한 말이 되어버렸구나. 부고하는 법: 그 사람이 나에게 자기의 부고를 전하였다고 가정할 때 내가 의아해하지 않을 사람에게 부고하면 된다. 접빈하는 법: 나에게 조의를 표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나의 사회생활의 범위를 정해준다는 것을 알고 그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이런 뻔한 말이,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는, 뻔한 말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뻔한 말이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알게 되었지만, 나는, 내가 막연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세상의 신세를 지고 있는 것 같다. 같은 말이지만, 세상은 내가 기대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후하게 나를 대해주는 것 같다. 부조금의 액수만 해도 그렇다. 나는 10만원 이상을 내 본 적이 없는데, 시골에서 올라 온 가난한 친척들이 20만원, 30만원을 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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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저께 오랜 만에 서울에 갔다 왔다. 미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았다. 8월 말 출국한다. (1년 동안 안식년이다. )
미국 어디로 가시나?
영태야 그 조화는 자네 쪽이 아니고 아우 영진 몫으로 보냈다네..반금련의 남편 무대말고 "무송"이쪽으로 말이야ㅋㅋ.... 여튼 자네 글 읽고 또 많은 것을 배웠네..그래 세상은 내가 기대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후하게 나를 대해주지..나도 감사하며 살련다.. 미쿡 잘 다녀오시게나~~
아, 영진이 몫이었구만. 난 그것도 모르고. 알라바마주의 북알라바마대학(UNA)야.
에이 형보다 나은 아우있나..농담이고요~~ 정말 가기 전에 경산친구들과 자리 한번 했으면 좋겠다
그래그래.... 속마음을 이렇게 드러내주는 영태가 멋있다.
출국전에 환송파티 멋있게 하자꾸나^^
언제 출국 하시나? 아무래도 내가 귀국(8월30일 예정)하기 전이겠지?
미국에 오시면 전화 주시게나. (505) 412-5420. 헌츠빌에는 가 보진 않았지만, 그 밑에 있는 몽고메리(알라바마 주의 수도)에선 약 1년
살았었지. 귀한 안식년 되시길 바라네.
예, 잘들 알았습니다. 정확한 출국 날짜는 8월 26일. 목사님, 도착해서 전화할께.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았다지만, 큰일을 치루거나, 어려운 일을 겪다보면 새롭게 깨닫는 것이 항상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때로는 아쉬워하고 후회도 하며 평생을 배우고 사는 것이 아닐런지... 모처럼의 안식년에 많이 배우고 뜨겁게 느끼고 돌아오시길 바라네~~~
안식년 맞아 미국순방길에 오른 조영태 교수.. 환영.... 미국에 오면 핸드폰은 사용하겟지.. 도착하면 연락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