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10월13일/주일복음말씀묵상/ † 열 명의 고침 받은 문둥병자들/ 아홉은 어디 있느냐? (루카17,11-19)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부터 이적을 행하셨다. 가나의 혼인 잔치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이 최초의 이적이었다. 그 뒤 3년간의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을 행하셨다. 특별히 소경과 귀머거리를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이적을 베푸신 것은 예언의 성취로서 행하신 것이다.
이사61,1절은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완전한 뜻을 띠게 되는데, 곧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자신에게 관련시키셨다(루카4,18-21). 이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은 그 분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확증하는 사건이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치유의 이적을 행하신 것은 그분이 메시아로서의 임무 때문이었다.
이사53,4절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느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말한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기에 치유의 이적을 행하셨던 것이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크신 능력으로 얼마든지 신유의 능력을 행하실 수 있다. 예수님의 이적은 메시아로서의 이적이었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이적은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와 은사로서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 문둥병은 의식법상 “죄”를 상징했다. 따라서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진(마을) 밖으로 격리되어 살아야만 했다(레위13,4-5; 민수5,2-3). 그들은 문둥병이 완전히 나아 제사장으로부터 정결하다는 확인 판정을 받기 전에는 결코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만일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40에서 하나를 감한 태형을 받아야 했다(신명25,3). 또한 문둥병자들은 마을 밖에서라도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면 스스로 문둥병자임을 알리기 위해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크게 외치지 않으면 아니 되었으며(레위13,45), 일정한 거리 이내에는 결코 가까이 가서도 안 되었다.
이와 같은 문둥병에 관한 규례들은 인간이 짊어진 죄의 심각성과 비참함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그 죄로 인해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교훈해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열 명의 문둥병자들을 깨끗케 하신 것은 장차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든 인류를 죄의 고통과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내실 것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었다.
열 명의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고 정결케 해 주신다(요한17,17).
17,11-14절은 “11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한가운데로 지나 가시니라.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로 들어가시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을 만나 멀찍이 떨어져 서서, 13 목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님이여,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거늘, 14 그분께서 그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시니 그들이 가다가 정결하게 되니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거부를 받으신 이후(9,53)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접경지대를 따라 예루살렘을 향하여 남하하신 것이다(11). “멀찍이”곧 멀리 서서, 이것은 율법에 의한 것으로(레위13,45-46; 민수5,2), 문둥병자에게 접촉하면 같이 부정해지기 때문에 문둥병자는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12절)”열 명은 다 같이 불행한 상태였다. 그리고 전적으로 절망 상태에서 구원받기를 원하였다. 이들은 열 명이 있으나 그 중의 어느 한 사람이 더 악하거나 더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죄와 같이 문둥병자는 인간적으로 불치의 상태였다. 사람은 문둥병을 완치할 수 없다.
그 당시에 문둥병자는 사회에서 완전히 문외출송(門外出送)을 당하였다. 그들은 가족과도 격리되어 하느님의 은혜만을 바랐었다. 이것은 죄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하며 절망적이란 것을 대변해준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13).”이것은 문둥병자들이 살려달라고 외치는 처절한 절규였다. 그들의 처절한 절규가 주님의 마음에 닿았고, 그들에 대한 동정심과 긍휼을 베풀 마음이 생기셨다. 주님의 긍휼하심은 사람들의 가장 가난하고 깊은 심오한 영적 상태에서 임하여 새롭게 하신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시니(14),”이 말씀 속에는 “내가 너의 병을 고쳤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왜냐하면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는 것은 몸이 나았을 경우에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몸이 나았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그저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셨다.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그들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병 고침을 얻었다.
15-19절은 “15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돌아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16 그분의 발 앞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그분께 감사를 드렸는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더라. 17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열사람이 정결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그 아홉 사람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들을 찾지 못하였도다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네 길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온전하게 하였느니라하시니라.”라고 말한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돌아와” 돌아온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으므로 다른 유대인 문둥병자와는 달리 북이스라엘 그리삼산에 있던(요한4,20) 자기들의 제사장에게로 가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나머지 9명과 헤어져 홀로 그리로 가다가 돌아왔을 것이다(15). “이방인”은 문자적인 뜻은 “타국인”이다.
이 말은 사마리아인을 하느님의 택한 백성에서 제외시키고 그들을 천대했던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쓰신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경멸적인 이 말을 쓰심으로써 상대적으로 사마리아인 문둥병자의 감사 행위의 고귀함을 칭송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고침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 중에 사례한 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이방사람, 곧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마음은 참으로 안타까웠을 것이다. 인생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한이 없지만, 인생들은 그것에 감사치 아니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받을 세례, 곧 십자가를 지기까지는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12,49-5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후에 이 모든 답답함이 사라지셨다. 그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24,36). 오늘 우리도 답답한 자가 주님께 부르짖어 시험함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답답함을 다 물리친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답답함도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아신다. 우리 주님은 그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을 원하셨다. 우리도 이들 아홉과 같이 우리의 육신의 유익만을 바라고 행복만을 추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신의 문둥병이 고침을 받은 것을 돌아와서 하느님께 감사하였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네 길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온전하게 하였느니라하시니라(19).”이 구절은 육신적인 병의 치유를 넘어선 영적 구원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은 항상 이방인들이다. “선한 사마리아인(10,33-37)”외에 이제 “감사하는”사마리아인이 나온다.
“그분의 발 앞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그분께 감사를 드렸는데” 단 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즉시 예수님께 “돌아와서(15,18)” 엎드려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다. 물론 나머지 아홉 명의 치유 받은 사람들도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제사장들의 정결 선언의 맥락에서 공식적으로 하도록 규정된 것이다(레위14,1-32).
마음의 감사는 언제나 표현이 따르고 마음의 믿음은 언제나 입술의 찬양이 따르기 마련이다(로마10,9). 실제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18), 곧 이 구원사적인 시간에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체험하게 된 구원에 직면해서 사람들은 예수에게 돌아가야만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기 자신을 궁극적으로 보이시는 “곳”이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느님을 찬양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이 질문은 바로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주님은 바로 이 시간에 우리를 향하여, “너도 그 중의 하나가 아니냐?”라고 질문하신다.
알렐루야!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