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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 20060620 라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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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0a 부산강의-라캉(1)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라캉에 대해서 강의를 하겠습니다.
라캉이라는 사람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라캉이라는 사람이 한 게 뭐냐 하면, 첫째는 주체라는 것이 자아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신자부터 해서 모든 인간이 틈만 나면 나, 나. 또는 너, 너. 나, 너, 이런 식으로 나라든지 너라든지 규정된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 너 이런 걸 남발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안 할래. 나는 뭐가 되고 싶어. 나의 어머니는 누구고. 뭐 이렇게 나를 항상 중심에 가져가는 거예요. 나를 집어넣지 않더라도 세상을 볼 때 자기중심으로 이렇게 보고 있다 이 말이에요.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뭔가 숨기고 싶은 것과 나타내고 싶은 것과 완전히 나를 가지고 구분되어 있어요. 숨기고 싶은 것, 드러내고 싶은 것, 이것이 나라는 걸 통해서 구분되어 있다 이 말이에요. 쫙쫙 갈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숨기고 싶은 것에 가장 숨기고 싶은 게 뭐냐 하면 나란 주체에요. 내가 누구냐를 나에게 절대 묻지를 않아요. 그저 사람 살아가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뭐 하고 싶어가 주지요. 모든 행동도 그렇고 생각도. 나는 뭘 하고 싶어. 하고 싶어 가운데 얻고 싶고, 가지고 싶고, 이렇게 사랑받고 싶고, 또 사랑주고 싶고, 뭐 이런 게 있는데 교회로 말하면 예배하고 싶고, 기도하고 싶고, 전도하고 싶고, 뭐 하고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정작 나에 대해서는 내가 누구냐고 되묻지를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복음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라 했지요. 철학에서는 라캉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든 안 하든 간에 그건 나중 문제고, 자기라고 이건 누구냐, 뭐냐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부인해 놓으면 나는 날 부인한다. 나는 날 부정한다. 해도 실컷 부정해놓고 보니까 그게 진짜 나는 숨겨놓고 내가 되고 싶지 않은 나는 마음껏 쓰레기 분리수거하듯이 갖다 버려놓고 나 부인했다. 나, 주님 앞에 모든 걸 버렸다. 정작 자기 자신은 따로 챙겨놓고 말이죠.
실컷 부인했다 해놓고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러니까 화투칠 때 버리고 싶은 피는 마음껏 버리고 쥐고 싶은 광은 꽉 쥐고 있는 거예요. 쥐고 있으면서 나는 모든 걸 버렸다 하는 거예요. 버린 걸 뭘 버렸나 보니까 피야. 쓸데없는 것 버린 거예요.
그래서 라캉은 아주 도발적으로 나에 대해서 내가 누구냐를 그걸 분석해 들어가자는 겁니다. 그걸 내가 누구냐를 어떻게 분석해 들어가느냐 하면, 인간의 모든 나타나는 가운데서 둘로 나눌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의식이 있고 무의식이 있다는 겁니다.
의식이 있다는 말 앞에 뭐가 생략돼 있느냐 하면, 내가 의식한다, 내가 생각한다가 생략되어 있죠. 인간에게 나타나는 게 의식과 무의식인데 의식과 무의식은 어떻게 차이 나느냐 하면, 의식은 항상 나를 전제로 하고 내가 알고 있는 그 무엇, 내가 느끼고 있는 그 무엇을 내뱉고 있는 이게 의식이에요.
보통 교통사고 난 뒤에 환자가 넘어지면, 영철아, 내가 누군지 아느냐? 아아, 어머니. 오오, 네가 깨어났구나. 이렇게 하거든요. 의식이 있다는 거죠. 죽은 놈이 아니고 살아있으니까 이젠 분별력이 있는, 어머니고 내 동생이고 분별력이 있잖아요.
그런데 무의식은 내가 원치도 않는 게 툭툭 튀어나오는 게 무의식이에요. 프로이드는 무의식이 어디서 나오느냐? 꿈속의 세계에서 인간이 의식하지 않고 의도하지 않은, 이거는 내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뭔가 튀어나와서, 그 다음에 중요한 게 뭐냐? 그것이 나를 화들짝 놀라게 한다는 거예요.
사람이 예상하면 놀라겠습니까, 안 놀라겠습니까? 안 놀라잖아요. 엽기 영화나 괴기영화나 여름에 하는 무서운 영화 보면, 처음 내용을 모르고 볼 때는 엄마야, 하고 놀라죠. 그런데 그 영화 보는데 이미 다 보고 온 사람이 옆에서 그 다음에 누구 나오고 이렇게 하면 그건 재미 하나도 없는 거예요.
예상하게 되면 화들짝 놀라는 게 없어요. 축구할 때 모르고 봐야지, 미리 다 보고 보면 약간 재미있지요. 목숨 바치고 정신 나갈 정도로 흥분할 건 아니지 않을 것 아닙니까. 다 아는데 뭐. 상대방이 슛을 날리는데 들어갈지 안 들어갈지 아슬아슬 할 때 안 들어가는 걸 아는 사람은 에이, 안 들어간다. 알지만 들어갈지 안 들어갈지 모르는 미확정한 상태에서는 온 혼을 거기다 다 쏟지요. 들어갈까 말까 들어갈까 말까 그 짧은 순간에 온갖 번뇌를 다 생각한다 말이죠.
이처럼 인간에게는 의식만 내가 느끼고 내가 의도한 것만 되어지는 다 아는 예상된 것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 무의식이 사실은 정작 우리가 찾고자 하는 나를 무의식이 지배하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나에게 무의식이 있다. 나가 설정되어 있고 그 안에서 무의식이 나온다. 이렇게 봤잖아요.
라캉은 그렇게 본 게 아니라 무의식이 나를 그때그때마다 조립한다. 무의식이 나를 삼킨다. 이게 적당한 용어지요.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무의식이 나를 제조한다. 그러니까 무의식이 무엇이냐를 알면 되지, 내가 누구냐를 아는 그것으로 이거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렇다고 증명을 해 봐야 또 그 다음날 꿈을 꾼다든지 누굴 어떤 행동을 만난다든지 내가 예상치도 않은 행동이 나왔을 때 그로 인하여 전혀 내가 의식한 바깥에 내가 의식한 것이 이 테두리라면, 이 테두리 바깥에 무의식 세계에서 이 의식에 난데없이 침범하고 화들짝 놀라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다시 나의 의식에서 만나는 관계성, 이 관계성은 깨져야 돼요. 이걸 가지고 빗금 줄 친다. S에다가 S가 주체인데 주체에다가 빗금을 쳐버리는 거예요. 쪼개져야 돼. 날마다 쪼개져야 돼. 뭐에서? 무의식에 대해서.
그래서 라캉의 모든 학문의 시발점은 무의식의 구조가 뭐냐? 오늘 강의해야 될 하고 싶은 게 그거에요. 무의식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의식은 아닙니다. 의식은 이런, 이런 행동을 하시면, 여러분, 이렇게 이웃을 구제하세요. 라고 하는 것은 의식이죠. 이웃을 구제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웃을 구제하는 주체자인 당신은 착한 사람 됩니다. 이건 아아, 이웃을 구제하면 나는 착한 사람 되는구나. 이거는 의식이고 의식의 결과가 이미 예상되지요. 내가 이렇게 구제하는 것을 무엇 때문에 구제하는가? 본인은 알지요. 목적이 있잖아요. 착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또는 구제함으로 착한 사람 되고. 이건 둘 다 투명하게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마음 속에서 높은 탑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이거는 왠지 죽고 싶다. 우울증이잖아요. 아파트 베란다에 가서 그냥 뛰어내려 버릴까? 이렇게 뛰어내리면 뭐가 되느냐 그 사람은 상관 안합니다. 다만 뛰어내릴까만 생각만 들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 향유, 즐긴다. 베란다에서 뛰어내릴 때 시원하잖아요. 시원함을 즐기죠. 온 몸이 육체적인 몸이.
그런데 뒤에서 안돼! 하고 하지요. 이건 뭐냐? 금지입니다. 뛰어내리고 싶은 욕망을 금지하는 것을 가지고 ‘거세’라고 해요. 금지를 잘라버리면 나는 내 속의 원하는 바는 뭐냐 하면, 15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는 이거에요. 그런데 식구가 말렸어요. 금지했어요. 안돼! 참아! 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게 어디 가겠어요. 분열된 주체에다가 그 다음에 만약에 남편이 여보, 그러면 안돼! 라고 했을 때 남편의 욕망과 나를 일치시키지요.
이걸 Identification. 대문자 I 라고 표현해요. I 에다가 A 라고 해서 A 라고 하는 것은 제가 앞으로 설명할 건데 미리하면, 타인의 기표에요. 타인의 기표란 말은 우리가 신학에서 말하는 이름이에요. 타인의 이름이에요. 타인의 이름과 자기와 일치시킴으로서 한시적인 일시적인 나라고 여긴다. 그러니까 규정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체라 하는 것은 내가 뭐 되고 싶은 것이 아니고 내가 뭐 되고 싶다고 하는 틀조차도 내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다른 내 주위에 있는 외부에서 그걸 타자라고 하는데 타인, 타자에 의해서 주입되는 것으로 일시적인 쪼가리 난 주체, 쪼가리난 주체가 타인의 demand, 타인이 갖고 있는 요구사항, 요구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일치할 때 이것이 바로 한시적인 주체입니다.
이것을 의식세계에서 이렇게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의식세계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조건 된다는 식이기 때문에 이것은 계속 자기 자신이 그런 것처럼 느끼죠. 그런 것처럼 착각을 계속, 그걸 '오인'이라고 합니다. 계속해서 오인하는 거예요. 자꾸 자기 자신에 대해서 순간순간 자기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자꾸 오인을 하는 거예요. 만약에 이게 오인이 아니고 진짜 그런 인간이라면 그런 인간이 어떤 타인, 어떤 요구, 어떤 상황에서도 동일할 수 있어야 되는데 사람은 수시로 카멜레온처럼 그때그때마다 적응하고 변화하거든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보통 촌에서 다른 아낙네들이 옷을 허름하게 입고 있을 때 그 비슷하게 허름한 옷을 중국산 옷을 원피스 입고 다닐 때 그 여자는 분명히 나는 중국산 원피스도 만족하는 그런 인간이다. 탕탕탕. 확정되었어. 90, 80을 살아도 나라는 인간은 이 정도로 겸손한 여자야. 자기는 확정됐다 여기죠.
그런데 그 촌에서 도시로 가서 아이구, 아주머니 그것도 옷입니까? 이런 소리 들으니까 한 몇 년 뒤 길가다가 나는 중국산 가지고 만족 못해. 저 백화점에서 사야 돼. 라고 변했잖아요. 전에 중국산 가지고 만족했던 건 뭡니까? 나에 대한 오인이죠. 나에 대해서 자기도 자기를 몰랐던 거예요. 내가 이렇게 변할 줄 모른 거예요.
지금 라캉의 무의식 구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제가 굉장히 쉽게, 쉽게 하는 겁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데 들어가 봅시다. 대충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데, 더 깊이 들어가면 골치 아픈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라캉의 무의식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프로이드의 생각에서 약간의 변형을 시키지만 그냥 도입을 합니다. 도입을 하다보면 여기서 프로이드에서 어떤 면에서 도입을 하느냐 하면, 이 꿈을 해석할 때 프로이드는 이 꿈에 대한 사건들이 두 가지 형태로만 굳혀져서 꿈에 의식된다는 거예요.
다시 하겠습니다. 무의식이 꿈을 통해서 우리에게 의식되잖아요. 꿈이 무슨 꿈이 되었든 간에 꿈이 어떤 것을 생산했던 간에 우리가 의식되지 아니하면 그 꿈을 꾼 겁니까, 안 꾼 겁니까? 안 꾼 거지요. 무의식이 있는지도 모르죠.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뭔가 있어야 이게 아, 우리가 의식하기를 무의식이 있구나 하는 것이지, 의식되지도 않는 것이 뭐가 있으면 아무리 무의식이 많다 하더라도 의식되지 않으면 그거는 존재하지 않는 거다 말이죠.
이것은 이러한 인간의 딜레마가 장자, 옛날에 중국의 장자 철학자가 있어요. 꿈에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는데 진짜 내가 나비가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느냐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진짜 나비라면 그게 꿈입니까, 현실입니까? 꿈이 아니죠. 현실이죠. 그런데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는 그 자체가 만약에 꿈이라면, 나는 여전히 나비로서 인간 꿈을 꾼 게 되지요. 그죠? 내가 나비가 되었다. 라는 이것을 꿈이라고 생각하는 이 전체가 바로 나비가 인간 꿈을 꾼 것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나비이냐, 인간이냐를 나도 구분 못하고 타인도 구분 못한다 이 말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나비가 인간을 꿈을 꾼다 하더라도 또 여기 더 큰 범주가 생겨버리면 이렇게 생각하는 이것조차도 바로 하나의 꿈일 수가 있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가 꿈꾸다가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아, 꿈이구나. 깨어야지. 라고 했는데 그게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꿈이구나, 깨어야지 생각한 그것이 나중에 그 꿈이 돼지꿈이다 말이죠.
그래서 라캉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럼 이건 해결책이 없어 보이죠. 해결책이 없으면 라캉이 유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해결책이 있으니까 유명한 사람이지. 내가, 꿈, 나비. 다 이게 뭐예요? 이게 언어잖아요. 언어라는 것이 나타나는 것은, 언어는 의식세계에서 무의식세계와 연결되는 그 고리가 언어라는 겁니다. 이게 프로이드하고 약간 다른 점인데.
라캉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언어가 나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아, 이거 함축적이면서도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언어 대신 복음적으로 말씀을 집어넣어 보세요. 말씀이 나를 만든다. 이건 요한복음 1장이죠. 태초가 말씀이 계신다. 그 말씀이 내게 생명이 되었다 말이죠. 말씀이 나를 만든다.
라캉이 기독교신자가 아니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형식이 그대로 라캉에게 나옵니다. 내가 언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 언어가 나를 그때그때마다 나라는 것을 만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꿈이라는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무의식이 있다 할지라도 이게 의식이 되려면, 프로이드는 꿈으로 나타난다고 되어 있고, 꿈을 꾸지만 꿈이 의식되기 위해서는 이게 꿈이 뭐로 되어야 되느냐? 언어화 되어야 돼요. 사건화 되어야 된다고.
그때 꿈에 말이야, 마징가 Z하고 나하고 싸웠다. 이게 뭐냐? 마징가 Z라는 그 개념, 언어 아닙니까? 싸웠다는 동사잖아요. 그게 하나의 문장화되잖아요. 그러니까 무의식세계의 만들어진 언어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의식이 이걸 연결시킴으로서 무의식세계가 있음을 아는 거예요.
여기서 라캉은 프로이드의 꿈의 두 가지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는 ‘응축’이고 하나는 ‘치환’인데 이걸 설명할게요. 응축과 치환으로 나타난다. 꿈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꿈의 사건들은 여러 가지 사건들이 한꺼번에 이렇게 맥도날드 햄버거처럼 층층이 쌓이는 것. 누르는 것 있잖아요. 우리 국민학교 때 그런 장난 많이 쳤잖아요. 안정환이 한 골 넣고 난 뒤에 잡아 댕기고 이리 덮치고 저리 덮치고 하지요.
얼른 보면 사건들이 한 사건이 아니고 온갖 각색 사건들이 햄버거처럼 이렇게 뭉쳐 있는. 뭉쳐 있는데서 한 덩어리로 튀어나오죠. 여기서 엄청나게 중요한 것은 한 덩어리라는 게 제일 중요해요. 왜 그러지 뜯어보면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각색의 꿈들이 사건들이 있는데, 꿈에 그게 한 덩어리로 나타난다. 이게 응축이죠. 이걸 가지고 뭐냐? ‘은유’라고 합니다.
이게 한 덩어리기 때문에 한 덩어리라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경계선을 치는 윤곽을 지니죠. 한 덩어리라는 것은, 그러니까 이 목사님하고 저하고 한 덩어리가 아니잖아요. 왜? 구별돼 개별처럼 떨어져 있으니까. 근데 한 덩어리라면 샘 쌍둥이처럼 같이 붙어 다녀야죠. 한 덩어리라는 말은 결국 뭘 뜻하느냐 하면, 한 덩어리라는 말은 존재지요. 존재라 하는 것은 존재 밖과 존재 안이 구별되는 경계선을 가지고 한 덩어리로 움직여야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치환이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대체에요. 이거는 뭐냐? 변화를 이야기해요. 변화, 또는 변동. 언어를 보면, 언어는 두 가지 밖에 없어요. 존재하고 변화 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서 기차여행을 가는데 화장실에 보니까 레이디, 이쪽으로는 젠틀맨 써 있단 말이죠. 레이디, 젠틀맨 뭔 뜻입니까? 여자용 화장실, 남자용 화장실이잖아요. 원래 레이디란 말을 그냥 한 존재로 보면 이거는 숙녀를 이야기하는데 이거를 여기다 딱 붙이니까 여성용 화장실이 되지요. 의미가 변화되었잖아요. 이게 뭐냐? ‘환유’ 치환되는 거예요. 이 은유와 환유를 합쳐서 ‘비유’라 합니다. 비유, 은유, 환유 다 다릅니다.
그러면 제일 궁금한 게 실체는 어디 있느냐? 실체는 주체가 저게 실체라고 주체가 성립될 때 주체가 성립되는 동시에 주체가 그것을 동일시하려고 활용될 때 순간적으로 실체가 되지요.
이게 솔의 눈이라고 하는데 솔의 눈 음료수다. 솔의 눈은 음료수지만 깡패들한테는 집어던지는 무기가 된다고. 이게 치면 아~ 대한민국 응원도구가 될 수 있다 말이죠. 지금 내가 어떤 행동을 할 주체냐가 확정된 동시에 이거는 ( ) 나에게 하나의 실체로서의 ( ). 목마르다 하면 음료수에요. 지금 때려버릴까, 유리창 깨버릴까? 이거는 유리창 깨는 도구가 된다 이거에요. 지금 나라는 주체가 뭘 하고 싶고 뭘 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노리고 있는 발견케 되는 아, 여기 있네. 요 개념은 그때 내가 결정하는 내가 다 다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처음에 강의할 때 얼른 들었지만, 그 주체는 무슨 주체냐 하면, 쪼가리 난 주체지요. 쪼가리 난 주체가 어떤 개념을 이건 뭐냐 하면, 이것도 쪼가리난 주체가 그때마다 이것도 비유가 아닌 실제개념은 이것도 쪼가리 난 실제개념이죠. 그러니까 쪼가리 난 실제개념을 그냥 따라하지 말고 그냥 은유와 비유 이렇게 하자 이 말이죠. 같은 말이니까. 어차피 은유고 어차피 환유고 어차피 전부다 합하면 어차피 비유다 이 말이죠.
자, 그렇다면 그 다음 이야기가 뭐냐 하면, 그러면 이 무의식이라는 것이 나라고 하는 주체가 무의식이 만들어낸 공장에서 만들어낸 일시적인 나라면, 나란 진정 무엇이냐를 찾아서 무의식세계로 들어가야 되겠죠. 들어가는데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다리가 뭐라 했습니까? 언어지요. 언어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언어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데 언어가 뭐로 되어 있다? 하나인데 여러 가지 사건이 하나로 뭉쳐져 있는 응축과 그리고 다음으로 자꾸 변화를 나타납니다. 하나의 사건을 다른 사건으로 도망치려 하는 거예요. 난 하기 싫어. 난 그런 것 의미하기 싫어.
예를 들어서 남자가 어떤 여자를 좋아할 때 사랑합니다. 당신 사랑합니다. 그러면 여자가 그럼 나와 결혼하겠습니까? 생각할 여유를 주세요. 그러면은 사랑하는 것 같은데 사랑은 아니고 좋은 친구로 지내자.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때 사랑합니다. 하는 것은 은유는 아니에요. 그냥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했잖아요. 사랑하지만 미워하고, 미워하지만 나는 너 좋아하고. 이렇게 복잡하게 한 게 아니란 말이죠. 그냥 솔직하게 사랑합니다. 하고 한 거예요. 다음날 와서 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이랬다고. 곧장 변하지요. 그런데 그런 건 환유가 되고.
은유는 뭐냐 하면, 아, 참, 너를 보니 하늘이 생각난다. 이건 뭐냐 하면, 니 보니 정신이 맑다는 뜻이거든요. 하늘이라는 개념은 ( ) 개념이잖아요. 맑다는 개념이 하늘 개념이니까 원래 푸른 창공 개념과 맑다는 개념이 순간 압축되는 거예요. 그건 은유가 되지요.
하여튼 은유든 비유든 간에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타고 내려간다 이 말이에요. 내려가면 여기서 뭐가 있느냐 하면, 이걸 S, S'라 하는데 아까 S를 주체라 했고 이걸 기표라고 해도 되는데, 언어는 기표와 기의로 되어있다. 이걸 소쉬르가 이야기했는데 이걸 라캉이 그대로 받아들여요.
기의라는 것은 어디서 알 수 없는 곳에서 만들어져요. 알 수 없는, 무정형. 이걸 세모라 해요. 라캉은 세모로. 알 수 없는 곳에서 어떤 기표를 만나면,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 이런 경험 있을 거예요. 뭔가 기분이 굉장히 가볍고 편해지고 그냥 붕 뜬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마음이 만족스러운데 그 단어가 생각 안날 때가 있어요. 상쾌? 아니야, 아니야. 쾌활함? 아니야, 아니야. 한 달 간 생각한 게 맞다. 짱이야 짱. 그러면 이 무정형 뒤에 있는 감정이 짱이라는 단어를 만나서 나는 짱을 느끼는 나라고 하는 주체로 돌아와요. 그런데 짱이라하니까 아, 짱. 그 단어 아니야. 다른 단어 있어.
S에서 S'로 이 기표가 이동해요. 이걸 가지고 미끄러진다고 해요. 아니야, 그 단어 아니야. 짱, 그거 당신이 떴다 이 말이야? 아니야, 아니야. 그 단어 아니야 딴 단어야. 이런다고. 미끄러지니까 분명히 하라고! 분명히. 짱이야, 뭐야! 짱하겠다. 라고 미끄러지는 것을 안 미끄러지게 하는 것을 고정점이라고 해요. 무정형이 이렇게 해서 쪼개진 S가 될 때 기표가 짱, 뭐 적당한 단어가 없으니까. 이 세상의 어떤 수많은 단어도 개념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단어는 없어요. 기표는 없어요.
그런데 제가 지금 이거 이야기하는 것이 의식세계입니까, 무의식세계입니까? 이게 무의식세계에서 지금 언어의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의식세계에서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언어가 있는 거예요. 왜 무의식세계에 언어가 있습니까? 라고 하면, 그게 그 뒤에 나오는데 뭐냐 하면, 이 무의식세계가 내가 만든 세계가 아니고 타인들이 이미 통용한 그런 언어체계가 이미 여기서 스며든 그런 세계가 무의식세계기 때문에.
나는 이걸 선풍기라 하지 말고 오줌이라고 하고 싶어. 그런데 오줌이라 하면 다 알아 듣는데 오줌 누면 시원하다. 말을 못 알아들어요. 아, 뭔가 팬이 돌아가는데 시원한 거 뭐라 하지? 그건 선풍기라 한다니까. 선풍기라 하는 단어 마음에 안 드는데. 선풍기라 해. 선풍기라 정한 거예요. 이건 내가 원치도 않은 남들이 정해 놓은 선풍기 단어를 골라, 골라 사용한 것뿐이에요.
여러분들이 맛있는 걸 찾아서 대형마트에 갑니까, 아니면 대형마트에 있는 가운데 맛있는 걸 고릅니까? 진짜 내가 먹고 싶은 게 있다. 그 대형마트에 없어요. 하지만 그래도 대형마트 가서 카트 끌고 이 중에서 어느 걸 먹을까, 어느 게 제일 맛있을까? 현재 있는 것 가운데 골라잡아서 에이, 맛있다고 하자. 해서 맛있는 걸 고르는 거예요.
애 보고 너 뭐 먹고 싶어. 피자, 김밥, 만두이거든요. 그런데 울렐렐레 이런 거 안 먹고 싶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게는 울렐렐레 하는 게 없어요. 이미 나왔던 메뉴 가운데서 자기가 상상할 때 먹어보고 피자가 제일 맛있다 하면 피자지. 울렐렐레 하는 것은 26년 뒤에 다시 만들어질진 몰라도 지금 없잖아요. 없으니까 그거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라캉의 말이 설득력이 있는 게 뭐냐 하면, 무의식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미 뭔가 만들어진 건데 문제는 우리가 그걸 모른다는 거예요. 다만 우리가 의식하는 것만 무의식 가운데 의식하는 것만 골라서 모아서 그걸 현재 나라고 규정하는 이것이 바로 나란 말이에요.
지난 시간에 강의했잖아요. 세종대왕이 컴퓨터 아냐고. 컴퓨터 모르니 마우스 모르죠. 마우스 모르니 여러 가지 하드웨어 모르지요. 그거는 세종대왕 이후에 500년 후에 나온 개념이란 말이죠. 그러면 세종대왕이 우리보다 바봅니까? 만약에 세종대왕에 500년 후에 태어났으면 진짜 컴퓨터 못 만질 인간입니까? 천만에 말씀. 머리 좋아서 도사일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뭐냐 하면, 비록 500년 후에 나올 컴퓨터를 다룰 능력은 세종대왕께 있다, 없다? 있는데 세종대왕은 다만 모를 뿐이죠.
그러니까 이 말 아닙니까? 세종대왕은 컴퓨터를 못 만지니까 모르기 때문에 자기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기라. 그런데 만약에 세종대왕이 지금 태어나서 나 컴퓨터 못한다. 바보야. 바보입니까? 바보가 아니에요. 바보가 아니잖아요. 다만 전부를 모를 뿐이지, 뭘 몰라요? 현재 내가 어떤 자질과 어떤 개성과 어떤 본성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자기는 세종대왕이 다는 모르고 다만 1400년, 15세기 때 나타나는 가운데서 한글창제하고 뭔가 괜찮은 신하들 등극시켜서 자기가 의식한 걸려든 것만 골라서 난 똑똑한 왕. 이렇게 되지요.
세종대왕이 왕자가 32명이지만, 여자만 천 명되는 솔로몬한테 비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애 많이 낳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세종대왕이 솔로몬만큼 능력이 없느냐? 모르지요. 여자 천 명 놓으면 자식 놓을 그런 정력이 있을 수 있다 이 말이죠. 해구신 먹고 하든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현재 지금 우리가 2006년 이지만 2010년도에 우리 인간들이 어떤 짓을 할지, 내가 거기 가담했으면 어떤 짓을 할지 지금 내가 모른다 이 말이죠. 지금 내가 모르는데 내가 누구다고 무슨 장담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야기 쉽지요.
한경직 목사 90 돼서 미쳤나! 예수 믿게. 나는 마귀 믿는다. 는 소리를 90 돼서 했단 말이죠. 우리도 똥 싸고 오줌 싸고 할 때 에라, 예수 십자가, 복음하다가 십자가 다 때려 부셔버려라. 라고 말이 나올 수 있다 말이죠. 그런 본성과 자질이 우리한테 이미 있는데 우리는 지금 그런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요.
왜? 언어라는 구조로서 아직까지 다 낚아채지 못했으니까. 언어의 개념은 엄청나거든요. 뭐든지 있더라도 언어라는 꿈도 언어잖아요. 꿈도 표현되잖아요. 어디서 막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면 절벽이 개념 아닙니까? 그러니까 모든 것이 언어의 바다에서 우리는 주체 한 개를 잡아놓고 일시적인 나라고 규정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언어의 구조가 층이 두 층으로 되어 있어요. 한 층, 두 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래층은 언어의 구조가 S가 기표라 했어요. 기표가 있는데 기표가 기표'로 변화할 때 무정형이 이걸 딱 잡아서 현재 쪼가리진 나, 그러니까 S가 지금 같은 S가 되어야 되는데 혼동되지요. 하여튼 쪼가리지니까. 이런 주체가 없어요.
왜냐? 모든 주체는 쪼가리 났으니까. 하여튼 이건 구분되어 있어요. 쪼가리 난 S라 보고, 이건 주체로 보면 됩니다. 이거는 기표고. 쪼가리난 주체로 이렇게 한다. 여기에 층이 두 층이 있어요. 한 층이 있고 두 층이 있어요. 아래층은 뭐냐 하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걸 가지고 동일시 과정. 동일화시킨다. 같이 시키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이 이렇습니다.
이 S라 하는 것은 이 기표는 현재 나는 쪼개진 거니까. 쪼개진 나는 항상 다른 이미 기존되어 있는 기표를, 기표란 말 알지요? 어떤 단어에 기표에 대해서 계속해서 의존하니까 이거는 의존했다가 이것은 뭐냐? 타인의 세계. 이걸 A라 해요. 타인의 세계가 재미있어요.
타인의 음성이 나에게 명령을 했을 때 이것은 타인, 지도 잘났습니까, 못났습니까? 지도 쪼가리졌는데. 쪼가리진 타인의 주체, 쪼가리진 타인의 주체. 이 말 이해해야 되죠. 타인인데 니는 뭐 잘났냐? A라는 곳에서 A라는 타인의 요구사항, 모든 단어는 제가 명령한다 했지요. 안돼! 베란다 끝에서 뛰어내리면 안돼! 이 말은 뭐냐 하면, 그것은 그 남편이 자기는 베란다에서 안 뛰어내리잖아요. 그러니까 여보, 나처럼 뛰어내리지 말란 말이야. 나처럼, 나처럼. 어떤 사람이 명령할 때는 내가 알고 있는 걸 명령해요.
이런 것이 언어세계에서 누적되어 있다는 이 말은 복음에 의해서는 이것이 다 깨지죠. 왜냐하면 복음에 의해서는 항상 우리가 예상 못한 우발적인 사건들이 터져버린다 말이죠.
예를 들어서 가나 혼인잔치에서 마리아가 예수님한테 뭐라고 하냐면, 예수여, 지금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할 때에 그 뒤에 말을 우리가 모른다고 할 때에 그 뒤에 우리가 상상한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그 뒤에 말을 여러분 괄호를 쳐 보세요. 당신이 지어내 적어서 소설로 만들어 완성시켜 보세요. 하면,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제가 반드시 어머니의 고민거리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제가 그것 때문에 왔습니다. 제는 하나님입니다. 또 모자란 게 뭐가 있습니까? 포도주요? 예,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이게 딱 그 다음에 나와야 될 텐데 그 뒤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래서 목사님이 되어서 설교를 할 때는 바로 그런 걸 찾아내야 돼요. 이 본문에 대해서 교인들이 이 본문을 딱 보는 순간 아, 오늘 목사님은 이걸 설교할 거야. 라는 예상을 넘어버려야 돼요. 만약에 예상을 넘지 아니하면 자기가 토요일까지 담고 있었던 사고방식이 그 말씀 안에 들어있는 십자가와 충돌시켜야지, 충돌 안 되면 이게 깨지질 않습니다. 먼저 알았어. 안다니까. 뻔하니 아는 건데. 나중에 안 나온다고. 와도 아는 이야기하고. 내가 설교해도 그렇게 하겠다. 이러면 십자가가 의미 없고 십자가 아는 내가 절대 진리가 돼버려요. 쪼가리져 놓고 쪼가리 아니래. 자기는 완전 완성되었대.
라캉의 이론을 이렇게 적용시켜버리면 모든 게 뚜렷해지고 분명해 보여요. 늘 이야기하는 것 있잖아요. 십자가를 믿지 않고 십자가 믿는 나를 믿는다고. 그런 것이 잘못된 줄 알지만 설교하는 본인이나 듣는 교인이나 그런 마음으로 같이 또 만나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그 만남 속에서 주님께 어떻게 또 각자, 각자에게 그게 아니야. 라고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알려 줄 때 그거는 우리는 그냥 기다려야 되는 거예요. 기도하고.
이 정도일 거야. 아마 십자가의 깊이가 이 정도라 하는 그 깊이가 박살나고, 더 깊네. 더 깊어. 이제는 세상에 한국이 깨지든 스위스한테 깨지든 난 몰라. 4강, 8강도 몰라. 그런 것은 나는 생각 안하고 주님 사랑이 더 깊어. 라는 것이 나와야 되는데, 이것은, 자기가 안돼. 내가 4강, 8강 들어가는데 16강 들어가는데 기를 모아야 돼. 오, 교회 갈 시간이네. 하나님 참아주세요. 오늘 교회 못 갑니다. 왜? 응원해야 되기 때문에.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다음주에 또 가면 안 됩니까? 교회는 늘 있는 것이고 월드컵은 날이면 날마다 하는 게 아니니까 참석 안하고 나는 가야 돼. 바로 이런 생각을 교인들은 할 수 있고, 목사도 하필 축구하는데 예배시간 마치고 가야 되겠네. 지금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죽겠는데 설교하게 만드네. 또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말이죠.
그런 순간에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십자가 은혜고 기쁨이고 다 날아가 버리고, 기존에 내가 원했던 나의 욕망, 뒤에 이층에 나옵니다. 일층은 동일시과정이고 이층은 욕망과정 나옵니다. 이층은 어려워요. 그런 욕망이 있음으로서 현재적 나를 완성된 나로 확정짓게 만들죠. 현재 욕망이. 나는 역시 백화점에서 원피스 사야 돼. 그런 여자지. 시시하게 중국산 사러 가느냐? 백화점 물건보고 난 뒤에 갑자기 거기가 놀려면 그걸 확정지었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서울의 압구정이나 강남에 살면 또 달라진다고.
성경은, 왜 이걸 우리가 알아야 되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요. 라캉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고. 뭐냐 하면, "여기가 좋사오니." 그게 대표적인 것 아닙니까? 베드로 자기가 보기에는 완벽한 거예요.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어서. 얼마나 겸손합니까? 초막 넷도 아니고 세 개 해서 자기는 초막 없어도 그래도 좋다 이 말입니다. 초막 셋 해서 엘리야 한 채, 모세 한 채, 예수님 한 채, 자기는 관람만 해도 감사합니다. 얼마나 기분 좋아요. 자기는 그걸로 진리가 완전히 끝을 봤다. 진리가 여기서 종결 되었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누가복음에 보면 그 대목에서 뭐라고 합니까? 아직 남아 있어요. 뭐냐 하면, 십자가가 남아 있어요.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장사하심에 대해서. 주님이 죽어야 되는 그 이야기를 세 번 그 이야기 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있다고. 예수님의 돌아가심,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가 좋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그러면 베드로가 그렇게 이야기할 때 여기에 있으면 좋습니다. 라는 말은 여기가 좋다는 그것이 평소에 베드로의 주체 안에 들어있었지요. 그것이 예수님의 별세 앞에서 깨져야 돼요. 쪼가리 나야 돼요. 그러니까 참여 돼야 돼요. 엘리야와 모세하고 예수님이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적어도 주님께서는 이 별세의 이야기에 이제 제자들, 12제자가 다 참여되기를 원해서 앞당겨서 보여준 거예요.
아까 가나 혼인잔치 다시 해봅시다. 아들아,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주체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어머님에게 효도 하나 끝내주는 저, 예수 아닙니까? 한국교회 목사들 말마따나 완전히 효도 하나 멋지게 하는 그런 예수. 그러면 제가 포도주 만들겠습니다. 이렇게 돼야 되는데 여자여, 그것도 여자여. 완전히 딴 사람 같아. 관계가 갑자기 아들과 어머니 관계가 아니고, 외부에서 낯선 관계가 침투해 버려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한테 그런 이야기하지 마라. 당신이 원하는 당신의 주체가 원하는 욕망을 나한테 강요하지 마라. 왜? 그 뒤에 뭐라 하느냐 하면, 나는 아직도 내 할 욕망이 남아 있다. 그 욕망이 뭐냐 하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차원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지요.
그런데 같은 포도주를 놓고 예수님은 장차 십자가 져서 나올 그 하나님 뜻에 대한 혜택과 적용과 기적을 그 연회장에 있던 손님들은 그건 안 보고, 세상에. 이것도 한국축구 같아. 전반전을 못 뛰고, 후반전을 잘 뛰는 게. 이거는 나중의 포도주가 앞의 포도주 보다 맛이 더 있구나. 미각적인, 육체적인, 감각적인, 생물학적인 그러한 욕구, 라캉에 나옵니다. 욕구입니다.
신체적인 욕구를 요구할 때 깨진 쪼가리가 요구할 때 그 자체를 타인의 욕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 포도주가 맛있다! 예수님이 그게 그런 뜻이 아니다. 이 포도주가 맛있다고 해석을 내리는 것은 너희들이 아직도 장차 예수님이 하실 그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온 거다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 같은 베드로인데 고기를 잡을 때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라. 하였더니만 많이 잡았잖아요. 그 뒤에 만약에 괄호를 해 놓고 우리 보고 내용을 기입하라면, 주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갑부가 되었군요. 주님 은혜가 아니면 주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나와야 되는데,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했다고.
그러니까 하나하나가 라캉하고 안 맞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라캉의 이론도 모르고 성경해석을 해버리면, 그 대목을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될 건데 주님은 이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대면시켜야 될 건데, 베드로가 나 같으면 감사합니다, 이렇게 돼야 될 건데 뭐, 죄인입니다. 에이, 잘난 체하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십자가와 관련 없는 해석들이 막 나옵니다. 제가 보면 해석 저렇게 해선 안 되는데. 우리 목사님은 공부 많이 하셨는데 신학박사인데 그냥 넘어갑니다. 매번 그냥 넘어갈 게 아니란 말이죠.
그런 예가 얼마 전에 있었죠.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유기하지 않는다. 지옥 갈 사람을 미리 뽑아 놓는 그런 잔인한 짓은 안 한다 이거에요. 그런 것들이 나온다는 자체가 그 이야기만 들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모든 이야기가 결국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나온 고백들뿐이다 말이죠. 그렇게 결론내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들이 니는 뭐 아는데? 이렇게 하거든요.
어떤 목사는 말하기를 십자가가 다가 아니고 성경에는 다양성이 있다는 거예요. 십자가도 다양성중에 일부지 십자가가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의도하는 이유가 뭡니까? 깨지기 싫다는 거예요. 날마다 십자가 앞에 깨지기 싫다는 거예요. 십자가는 한번 힐끗 보고 그냥 창고에 치워버리고 십자가 없기를 바란다 말이에요.
교회, 이렇게 여러분들이 목회를 해 보시면 압니다만 복음에 관심 없는 사람의 특징은 교회 쭉 나오다가 한번 빠지다가 뭐, 한번 빠져도 인터넷 듣지, 이렇게 하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진짜 한번 빠지면 인터넷 들어요. 그 다음부터는 드문드문 듣지. 하다보면 그 다음은 사이트 있으니까. 그게 뭐냐 하면, 제가 오늘 강의 처음에 이랬지요. 내가 나에 대해서 알기 싫고, 다만 내가 무엇을 갖고 싶으냐? 더 얻고 싶으냐? 여기에만 관심 있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두 번째 시간에 이층에서.
조금 쉬었다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