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麻衣太子(鎰)의 略史
마의태자 김부대왕의 휘는 일(鎰)이요, 자는 兼用이시다. 신라 제56대 경순대왕과 죽방왕후 박씨 사이에서 3남1여중 첫째 왕자로 서기 910년에 탄생하였다.
경순대왕께서 56대 대왕으로 즉위하심에 따라 김부대왕(마의태자)은 태자로 책봉되었다.
경순대왕 9년(서기 935년) 10월에 이르러 신라는 후백제 견훤과 고려의 왕건의 세력에 눌려 국력이 크게 쇠퇴해졌다. 경순대왕은 군신(君臣)회의를 열고 나라를 고려 왕건에게 넘기려는 뜻을 밝히자 신하들이 설왕설래(說往說來)하는 가운데 태자는 부왕께 “마땅히 충신의사(忠信義士)들과 같이 민심을 수습하여, 나라를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 이를 의논하는 것이 옳은 것인데, 어찌하여 1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줄 수 있겠습니까”하고 대자의 반대 발언이 있자, 부왕이신 경순대왕은 “지금과 같이 나라가 어지럽고 위태로워서는 더 보존될 수 없노라.”하시면서, “고려와 싸워서 죄 없는 백성들만 참혹하게 죽게 할 수 없는 일이다.”하고 태자와 여러 대신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부왕인 경순대왕께서는 고려 왕건에게 양국하시었다.
그러자, 태자는 모후 죽방왕후 박씨를 모시고 태자비(김영란)의 동생 굉(鍠), 명종(鳴鐘), 덕주공주와 아들 기로(簊輅), 교(較)와 여러 충신열사, 유민들을 거느리고 신라의 서울 월성(경주)을 떠나 문경새재의 관음리에 거쳐 충북 중원군 상모면 월악산(月嶽山)에 당도하여 미륵리에 미륵불(덕주공의의 像)과 5층 석탑을 조성했으며(보물 95,96호), 덕주공주를 월악산 덕주골에 머물게 하면서 덕주사(德周寺)와 미륵불(태자공의 상)을 조성 봉안하였고, 이곳에 덕주산 성을 쌓았으니 길이가 9,900m이다.
태자는 덕주사 미륵불에 구국(救國)을 발원하고 월악산 국사봉을 거쳐 보덕암(普德庵)에 들려 영천약수(靈泉藥水)를 들며 천년 구국한의 대원(大願)을 도솔천 하느님께 빌고 말하기를 “월악산이 물에 비치고 저 아래 항구동에 배가 닿을 때 구국한의 고향(신라)에 가리라, 예언하고(지금 충주호가 생겨서 월악산이 물에 비치고 항구동(港口洞)이 단양, 충주로 가는 부두가 되어 배가 오고가는 항구가 되었다.)
태자공은 월악산을 떠나 남한강의 물줄기 따라 서북방으로 향하니, 다다른 곳이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사(龍門寺)다. 구국을 철천지 한으로 간직한 太子와 신라 광복군들은 독립자존의 정신을 스스로 굳게 하고 또, 후세에 알리기 위해 절의 경내에 천년을 넘게 산다는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이때 심은 은행나무는 1052년이 지난 지금도 용문사의 천연기념물 30호로 지정되어 아직까지도 무성하다.
그 후 김부대왕은 홍천을 지나 한계령에 도착 망군대와 한계산성을 쌓고, 충신열사와 신라 유민들과 조국 광복을 위해 고려와 항전했다.
김부대왕은 다시 인제군 김부리로 거점을 옮겼으며 죽방 왕후 朴氏는 금강산 장안동 장안사의 돈도암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고, 태자비(김영란)도 두 아들을 데리고 모후(母后)를 따라 스님이 되었다.
김부대왕은 조국광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자 신라 유민들은 김부대왕을 위로하기 위하여 대왕각을 건립하여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5월 5일, 음력 9월9일에 제사를 모셨다.
신라 서울 월성(경주) 궁궐에서 기로(簊輅), 교(較) 두 아들을 낳았다. 김부대왕의 맏아들 기로는 이후 扶寧金氏로 칭하였고, 그 후 자손이 크게 번성하였다.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扶安金氏라 부르고 있다.
김부대왕의 둘째 아들 교는 뒷날 강원도 通川으로 이거하여 通川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김부대왕이 고려와 항쟁하다 일생을 보낸 김부리 일대에는 많은 유물과 사적이 있어 대왕으로서 승하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대왕각은 김부리(金富里) 일대에 3곳이 있었는데, 매년 음력 5월5일(단오)과 음력 9월9일(중량절)에 동리 사람들이 모두 모여 제사를 드리는 행사를 천년이나 이어오고 있으며, 1983년부터는 부안김씨와 통천김씨 문중에서 음력 9월9일에 김부대왕의 대제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