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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2016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김재필
입수
하염없이 눈물 쏟는 애인을
또 하염없는 입맞춤으로 달래본 사람이 알 것이다
같은 이에게 다른 피가 돌 때가 있단 사실을
지뢰를 밟았을 때 떠오르는 감정은 아직 발 떼지 않았다는 것
너는 위험한 마음으로 바닥을 문지른다
너도 이제 그만 목소리를 내보려 한다
그러나 침묵하고 싶지 않을 때에야 침묵다운 무거움이 온다는 걸
우린 이제 알고 있다
네 혀에 도달할 문장을 기다린다
난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늘어지는 고드름처럼
오랠수록 흉기가 되는
조금씩 심장 가까이
이 겨울 속으로 완전히 입수하기 전에
당선소감 - 김재필 / 함께 해줬던 사람에게 보상 되길 바라며 써
Soli Deo Gloria.
준모 형께 감사하다. 이런 날이 오면 가장 먼저 형의 이름을 쓰고 싶었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언어로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런 무능이 허락되기 전까지 어떻게 견뎌야 할까. 이런 태도가 모두에게 중요할 수 없으므로 농담은 필연적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자기 언어를 삼키기 때문에 외롭단 걸 알게 되면 농담은 미운 애인 같다. 만약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을 인간이 언어를 연마한다면, 그런 생은 도대체 어떤 수수께끼의 대답이 되는 건지 생각하며 웃었다. 그런 세계에 누가 거주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언젠가 그런 인간이 방문했을 때, 그에게 필요한 대답을 할 수 있길 바란다.
오랜 시간 함께 해줬던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되길 바라며 썼다.
뽑아주신 황동규 선생님, 정호승 선생님, 김기택 선생님, 문태준 선생님께 감사 인사드리고 싶다. 부족한 작품이지만 가능성을 봐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마음의 빚을 덜게 해주심에 감사하다. 스승이신 박찬일 교수님께 감사하다. 조금이나마 힘이 되셨기를 바란다. 졸업 후에도 이끌어 주신 이형우 선생님께도 감사하다. 제자라 말하기엔 민망하여 성함을 적진 않지만 청강을 허락해주셨던 선생님께도 감사하다. 인정이란 걸 가르쳐주신 김미향 선생님께도 감사하다. 그리고 부모님께 감사하다. 역시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되신다면 행복할 거 같다. 더 많은 분께 감사하고 있다. 말 대신 찾아뵙는 걸로 대신하겠다.
△1988년 전북 무주 출생 △추계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 최근 응모작 추상·관념의 유희 과해 … ‘입수’ 소통의 모호성 벗어나
최근 신춘문예 응모 시는 갈수록 모호성이 두드러지는 부정적 특성을 지닌다. 구체에서 일탈된 추상과 관념의 언어 유희가 지나쳐 소통의 길이 꽉 막혀 있다. 언어와 언어의 시적 관계가 이리 꼬이고 저리 꼬여 도대체 무엇을 왜 이야기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마치 배배 꼬인 언어의 꽈배기를 맛도 보지 못하고 마냥 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시도 인간을 위해 쓰는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인간과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갈수록 그 소통의 길이 막혀있다. 이제는 시의 불통마저도 유행인가. 불통으로 훈련된 투고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분별없는 불통의 세계에서 분별 있는 소통의 세계로의 전환이 시급한 시점이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4편이었다. ‘패러글라이딩 하는 새’(김영미)는 소통이 가능하다는 장점보다 “날개를 펼칠 때보다 접을 때가/ 더 어려운 결정이라는 것을” 등의 통속적 단점이 더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강물학교’(진창윤)는 강물을 찾아오는 겨울 철새들에 대한 진술적 묘사가 진부하고 지루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먼저 탈락하였다. ‘평행한 세계’(강은재) 또한 꿈속과 꿈 밖의 경계를 넘나드는 만남의 세계가 펼쳐져 있으나 결국 “멀리 있어도 우리는 하나인 것 같다” “나도 내가 좋아질 때가 있다 이런 것은 혼자만 아는 비밀이다” 등의 통속적 산문성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당선작 ‘입수(入水)’(김재필)는 비교적 소통의 모호성에서 벗어난 시다. 내가 너(애인)의 사랑의 강물 속으로 입수하는 과정의 순간을 짧으나마 극명하게 그렸다. ‘지뢰를 밟았을 때 떠오르는 감정은 아직 발 떼지 않았다는 것/ 너는 위험한 마음으로 바닥을 문지른다’라는 표현은 이 시의 백미다. 지뢰를 밟았을 때 발을 떼면 생명을 잃게 되므로 발을 떼지 않고 있는 상태, 그 절체절명한 상태에서의 기다림과 그리움이 이 시의 전체적 정조를 이룬다.
다른 시에 비해 작품성이 높다는 장점도 있지만 소통이 가능한 시라는 장점에 더 마음이 기울어져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시를 쓰는 일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일이므로 당선자는 남다른 노력을 통해 한국시단을 풍요롭게 꽃피워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 2016년 《한국일보》시 당선작
위험수목
노국희
물음으로 짜인 나무 그늘에 앉아있어
긴 오후가 지나가도록
지금 나뭇잎 한 장이 세상의 전부인
왕개미 옆에서
나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헤프게 구걸도 해보았다
당신의 삶을 훔치는 것으로
도벽을 완성하고 싶었어
알록달록 실패들을 엮어 만든 바구니를 들고
저기서 당신이 걸어온다
마른 생선 하나를 내어주고는
가던 길을 간다
비릿한 기억이 손 안에서 파닥거린다
목이 없는 생선이 마지막에 삼킨
말들이 마른 비늘로
바스러진다
낡은 허물 위로 매미소리가 내려온다
울어본 기억만 있고
소리를 잃은 말들이
그림자 속에서 가지를 뻗는다
■ 2016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봄
한상록
보십시오. 내게 빈 하늘을 열어
가벼운 마음 옷차림으로 흙을 밟게 하십시오
어디선가 두엄 지피는 향내 그윽하고
새살 돋는 들풀의 움직임 간지럽지 않습니까
돌아오지 않았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꿀벌의 잉잉거림 속에 묻어오고
겨우내 강을 건너지 못했던 나무들의 희미한 그림자가
아지랑이 실핏줄로 살아나지 않습니까
잃은 것이 있다면 내 뜰로 와서 찾으시지요
이제 내 뜨락에 샘을 내므로
흩어진 목숨붙이들 찾아 모으려 합니다
바람만 드나들던 수족관을 가셔내고 맑은 수면에다
튀어오르는 날빛 지느러미를 풀어놓으면
찰랑거리는 햇빛을 입고 내 생의 물보라 아름다울 겁니다
옥상에 내어걸린 빨래 나날이 눈부시어가고
누군가가 돋움발로 벗어붙힌 몸을 넘겨다 보면
산록의 묵은잠을 흔들어 놓을
아스라한 진달래향 더욱 곱지 않겠습니까
저 만치 다가오는 나무들의 길이 보이고
새순같은 배꼽을 드러낸 개구쟁이 아들놈
동화 속의 악당을 찾아 타앙 탕 말을 달리면
그 길목을 따라 몇굽이의 강이 흘러서
우리의 얼어붙은 꿈도 촉촉이 적셔지지 않겠습니까
■ 201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생일 축하해
안지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인데, 신기하지
낯선 골목에 당신의 얼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니
네게선 물이 자란다, 언제 내게서 그런 표정을 거둘거니
누군가가 대신 읽어준 편지는 예언서에 가까웠지
막다른 골목길에서 나의 감정을 선언하니
벽이 조금씩 자라나고, 그 때에
당신은 살아있구나, 눈치 챘지
문장의 바깥에 서서
당신은 긴 시간동안 사람이었지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언젠가 손을 맞잡았던 적이 있지, 짧게
우리라고 불릴 시간은 딱 그만큼이어서
나에겐 기도가 세수야
당신을 미워하는 건 참 쉬운 일이지
오래 마주보고 있기엔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
표정은 쉽게 미끄러지고
벽을 등지고 걸으면 내 등이 보이는 오늘
누구랄 것 없이 녹아 흘러내리지만
언제나 당신은 젖지 않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바랄게
기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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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8월 6일 서울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4학년 재학 중
■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
조상호
입술을 달싹일 때 해안선이 느리게 펼쳐진다 거기 혀가 있다 행려병자의 시체 같은 풀잎처럼 흔들리는 그림자, 달은 빙산이 되어 은빛을 풀어헤친다 물빛을 깨고 비치나무 냄새 번져오는 젖을 희끗희끗 빤다 안개, 서늘한 빗방울, 물방울 띄워올린다 뿌리가 부풀어오른다 물거품처럼
웅웅거리고 부서지고 내장처럼 고요 쏟아져 내리고 내려야 할 역을 잃고 흘러가는 페름 행 전신주 흰 눈송이들 백야의 건반을 치는 사내 -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 길고 가는 손가락 갈라지고 떠도는 핏방울 소용돌이 변두리로 나를 싣고, 창 밖 쁘이찌 야흐 행 마주보며 또 길게 늘어나고 민무늬 토기처럼 얼굴 금이 가고 스쳐가는 가, 가문비나무 그늘 나뭇가지 그림자 일렁이는 시간 산란하는 밤의 시작을 경계를 지나 나는 또 바라보고 있고
마젤란 펭귄들 발자국 소리 울음 아, 미역줄기처럼 늘어지고
움푹 파인 자국, 발자국들, 혀뿌리가 길게 늘어져 꿈틀거린다 하얀 모래밭, 그리고 하얀 추위, 그리고 하얀 포말 기억과 마디가 끊긴 생선뼈와 조개 무덤 사이를 가마우지들 종종 걸어 나오고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 우수아이아, 숲길, 뒤틀린 비치나무 뿌리, 물거품이 사그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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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전북 고창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박사과정 재학
■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족
정선희
공손하게 마주 앉아
서로를 향해 규칙적으로 다가갔다
흑백으로 갈라지는 길들이 뒤섞이더니
우리 사이는 점점 간격이 사라졌다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비가 올 때까지
기도했다는 것
그가 먼저 돌을 놓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끝까지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
입 안에선 쉬지 않고
돌들이 달그락거렸다
우리는 마주 보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위험했다
돌을 던지고
끝까지 서로를 모른 체하고 싶었다
길이 팽창하고
수거함엔 깨어진 얼굴이 가득하고
우리는 맹목적으로 달려갔다
한번 시작한 길은 멈출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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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詩는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우며 내게로 온다
여러 해 전 도시 생활을 접고 이곳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우리에게 온 햇빛과 바람과 풀 한 포기, 아이들과 내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지를 자연에서 배운다. 그것은 소리 없이 물처럼 내게 스며든다. 어떤 과장도 억지도 없이 나를 불러 세우고 일으켜 세운다. 나는 내게 온 어떤 것도 가꿀 줄 몰랐다. 남편도 아이도 부모와 형제도 하물며 이름 없는 풀이며 벌레며 이웃들이랴. 내가 짓고 있었던 것은 시가 아니라 몽상가의 잠꼬대였고 허세였다. 내가 아닌 타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나무와 풀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마음을 읽고 나누고 드디어 그들이 되는 것, 오늘도 햇빛과 바람과 나무들의 살림살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사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시는 나보다 먼저 내게 닿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했다. 몸이 없던 내게 몸을 입혀 수도꼭지를 틀어 밥공기를 닦게 하고 바닥을 훔치게 했다. 밭고랑에 남아 있던 애기파가 등 뒤에 내려앉는 눈을 털어내고 있다. 주저앉아 있던 나를 애기파 한 포기가 가만히 일으켜 세운다. 시는 늘 그렇게 내게로 온다. 시를 쓰기에 앞서 언제나 정직해야 한다고 일깨워주신 이영진 선생님, 내게 온 모든 인연들과 하나 되어 서로를 가꾸어 나가는 것이 시 쓰는 노릇임을 마지막까지 잊지 않으려 한다.
▲ 정신희 / 1961년 경남 거창 출생. 2011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수상. 경기도 광주 거주
[심사평]
깔끔한 표현으로 서정적 구체성·투명성 살려
이번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많은 분이 응모해주셨다.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부쳐진 작품들을 함께 읽어가면서, 일부 작품이 만만찮은 시간을 축적한 결과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의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도 많았고,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쏟은 사례도 많았음을 깊이 기억한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함께 주목한 이들은 모두 세 분이었다. 이혜리, 최혜성, 정신희씨가 그분들인데, 오랜 토론 끝에 심사위원들은 정신희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혜리씨의 작품들은 감각적 장면들을 상상적으로 모자이크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충격과 반응으로 연쇄해 가는 감각 운동이 진정성과 독자성과 연관성을 두루 지니고 있었다. 최혜성씨의 시편은 특별히 ‘미동’이 끝까지 경합하였는데, 매우 밀도 높은 관찰과 표현이 특장으로 거론되었다.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소묘의 집중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결국 정신희씨의 ‘가족’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전언의 구체성과 깔끔한 표현, 그리고 착상과 비유의 과정이 안정된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이 시편은 규칙적으로 서로를 향해 다가가면서도, 맹목과 위험을 동시에 지닌 관계로 ‘가족’을 파악한다. 물론 이러한 파악이 정신희씨만의 개성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당선작은 그러한 파악을 ‘그가 먼저 돌을 놓기를 기다리는 동안/나는 끝까지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는 표현에서 보이는 긴장과 예각적 균열을 통해 보여주고, 나아가 ‘길’의 뒤섞임, 팽창, 멈출 줄 모르는 질주의 형상과 그것을 어울리게 하면서 서정적 구체성과 투명성을 동시에 살려주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점 여러모로 신뢰를 주기에 족했다.
정호승(시인)/ 유성호(문학평론가)
■ 201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스티커
이명우
대문에 붙어있던 스티커를 뜯다가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또 붙는 스티커를 뜯다가
스티커 뜯기를 멈추고 산동네를 떠났다
멈추고 떠날 때는 다 지운 것이어서
지운 것은 없는 것이어서
없는 여기 산동네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 몰랐다
대문을 겹겹이 도배한 스티커 화려하기조차 했다
긁히고 찢긴 조금도 아물지 않는 가업
허파와 심장과 위장이 모두 철대문에 붙어
겨울 냉기를 고스란히 빨고 팽팽해졌다
추락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력서를 쓰고 찢고 쓰고 찢었던 것
부도난 회사의 대표였던 이력은
지급기일을 넘긴 어음처럼 휴지였던 것
부도를 막기 위해 오래전에 빌린 사채가 펄럭이며 휴지를
산동네 꼭대기까지 얼마나 난타해댔던가
골목을 돌며 전봇대 기둥과 자주 부딪친다
골목에는 늘 똑같은 소리로 이자가 와 달라붙는다
눈치 없는 거미줄에 발걸음에 와 걸린다
발이라도 와 걸어주는 이것이 거미줄의 눈치
잠만자는직장여성환영 오십세이상알바모집 선원大모집
배달부즉시출근가능 일수당일대출 신용불량자도대출可
얼어붙은 전봇대를 덮이는 환영, 가능, 대박,
대문에 붙어서 스티커를 뜯어내고 있는 아들이 보인다
컴퓨터 게임 대신 싫증 모르는 스티커 뜯기 놀이
경첩이 떨어지려는 대문을 어서 받쳐보려는데
어제까지 떼어낸 적색 신불자대환영 스티커가
어린 아들의 등에 세습처럼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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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경북 영양 출생. 영양고 졸업.
▲현재 서울에 살며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음.
■ 201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대봉
김 이 솝
파르티잔들이
노모의 흐린 눈에 가을을 찔러 넣는다.
턱밑에 은빛 강물을 가두고 은어 떼를 몰고 간다.
쿵! 폭발하는 나무들.
온통 달거리 중인 대봉 밭에
감잎 진다.
며느리가 먹여주고 있는 대봉을
다 핥지 못하고
뚝뚝, 생혈(生血)을 떨구는 어머니.
남편과 아들이 묻힌 지리산 골짜기
유골을 찾을 때까진 살아 있어야 한다고
삽을 놓고 우는 섬진강변.
귀를 묻고 돌아오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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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대전출생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현재 (주)해외인증센터 근무
■ 2016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둥근 길
문귀숙
허풍빌라에서 내린,
수백억 상속녀가 떨어뜨리고 간
셀 수 없는 동그라미의 말들
깔깔 거리다 휘청거리며 사라졌다
꽃뱀의 뱃속 같은 골목을 후진으로
나오는 오늘 일진은 구부러진 끗발이다
금요일을 발광하는 네온사인을 비켜선
흐린 그림자 하나, 번쩍 손을 들었다
뒷자리에 앉자마자 웅얼거리는 목소리
백미러로 읽어야 하는 목적지가
번져 읽을 수 없다
붉은 신호등 하나를 넘으며 자정의 경계를 넘었다
어떤 넋두리도 용납되는 할증의 시간
갈림길 마다 좌회전을 외치며 더 흐려진 그림자
젖은 넋두리에 수몰된 길을
재탐색하라고 내비*가 얼굴을 붉힌다
붉은 기운이 부족한 사납금만큼 미터를 올리고
대낮처럼 환한 불면의 광장을 지나고
늙은 벚꽃나무가 떨어뜨리는 흐린 시간을
지나 돌고 돌아도 이어지는 길
더 이상 택시로는 갈 수 없는 길
내비가 멈췄다
그림자의 손가락 끝에 만월이 걸렸다.
▲1964년 전남 진도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 201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큐브
강기화
면을 돌린다
네 개의 뿔을 가진 성난 눈초리
다가갈 수 없는 모서리
익숙하지 않은 경계
면을 돌린다
반듯하게 줄을 긋는
곧은 대답
전설처럼 등지고 있는 벽
위로받을 수 없는
네모의 의혹은 커지고
수상한 귀퉁이의 각은 증명한다
면을 돌린다
중앙을 공격한다
눈을 뜬다
놀이가 된 도형
일정한 방향으로
서로 맞춘다
다시 면을 돌린다
갇혔다가 풀려나는
매혹을 느끼며
활기차게 뛰어든다
비즈니스센터의
저녁 창문은
퍼즐의 공식
밀폐된 면과 면이
독기를 띠며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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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부산 출생.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석사과정 재학 중.
국어·논술 학원 강사
■ 201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맹수
정율리
하늘에는 울타리가 없다
이 쪽 저 쪽으로 몰려다니는 철새들
초승달로 기러기 행렬이 지나간다
하늘을 맹수라 불러보다 깜짝 놀란다
이동하는 저 철새들의 몇 마리는
땅으로 혹은 바다위로 곤두박질 칠 거다
초승달이 몇 마리 삼키고
구름이나 혹은 비바람이 또 몇 마리 삼키겠지
기러기들 서둘러 달빛을 벗어나려
한밤의 속도로 튕겨져 나온 행렬
어둠에 묻힌 채 날고 있다
하늘은 야생이다
무엇이든 먹어치우려는 난무(亂舞)의 태생지다
밤낮이 자유롭고 계절도 마음대로 바꾼다
낮과 밤은 서로 피해 다닌다
가끔 날아가는 비행기가 지상으로 떨어지고
하늘을 날아오른 집이며 자동차들이
구겨진 채 떨어진다
빈 껍질만 떨어지는 걸로 보아
저 하늘에 포악한 야생의 무리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울타리가 없으니 야생이다
날아가는 것들은 무엇에 쫓긴 듯 서둘러 날아간다
낮과 밤이 맹수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폭식을 하고
낮엔 낮에 보이는 것들을 사냥하고
밤엔 밤에 보이는 것들을 사냥한다
조용한 날들이 없는 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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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예술대학원 수료, 고려대사회교육원 시창작반수료,
현 삼정문학관 관장.
■ 2016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농림6호
김우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볍씨를 담갔다. 바람 한 잎과 구름을 벗겨낸 햇살도 꺾어 넣었다. 봄 논의 개구리 울음도 잡아다 넣었더니 비로소 항아리가 꽉 찼다.
나흘 밤의 고요가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항아리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저 경건한 나흘, 지나가는 빗소리도 발끝을 세우고 갔으며 파란색 바람이 일렁이다 갔으며 또한 파란 별들이 농부의 발목 근처에서 무수히 떴다 갔다.
항아리 속에서 적막의 힘이 차오른다. 씨앗들이 뿜어내는 발아의 열, 항아리가 드디어 익어가기 시작한다. 촉촉이 스며든 물기에 몸을 여는 씨앗들, 부드러워진 껍질을 걷어내며 깊은 잠에서 눈을 떴다. 귀가 열리고 부리가 생겼다. 몸속에 숨겨둔 하얀 발을 내밀었다. 흙이 묻지 않은 순결한 발들, 뿔을 달고 푸른 들판으로 달려가고 싶은,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며 도란거리는 그들 모습을 보고 나는 씨나락경전을 듣는다.
적막은 발아의 요람
작은 항아리 속에서 거대한 우주가 발아하고 있다.
●‘농림6호’는 1960~1970년대 재배된 볍씨 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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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전남 광양 출생 ▲경기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8년 수주문학상 수상,
▲2008년 전국문화인 창작시 대상 수상
■ 2016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페가를 어루만지다
양진영
허물어지는 것은 새것을 위한 눈부신 산화
나는 철거될 농가의 마룻바닥에 가만 귀 기울인다
그들이 나눈 말이 옹이구멍에서 바스락대고
안 보았어도 떠오르는 정경이 살포시 열린다
문풍지에 꽃핀 청태靑苔는 그들의 회한 혹은 눈물의 자국
뒤틀린 문틀만큼 가족이 부서지는 아픔도 맛보았으리라
거북 등처럼 갈라진 목재에 왜,
산골에서 밭을 일구고 사는 노모의 손등이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인연의 무결이 배어 있을까
헐리는 것은 거룩하다 그것은 촛농과 마찬가지
스스로를 태워 주위를 밝히고 남은 잔해이므로
뜨락에 소나무는 송홧가루를 날려 금빛 보료를
까는데
새집을 짓는다는 설렘은 어디 가고 나는
누가 잠든 것 같아서
누가 숨어서 부르는 것 같아서 자꾸만
방바닥을 어루만진다
평생 주인을 덥히며 보낸 폐가의 일생은
불이었다
나는 안방에 누워 그들의 온기를 느낀다
코끝을 간질이는, 낯익은 엄마 냄새
햇볕을 모아 따스함을 지피는 구들장
그 열기로 앞뜰에 꽃이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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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광주 출생·한국외국어대학 졸업
●(전) 중앙일보 뉴욕지사 기자
●김만중문학상, 목포문학상, 천강문학상 등 수상
■ 201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의자가 있는 골목
- 李箱에게 / 변희수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둘 만한 일이오
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 201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타크나 흰 구름
이윤정
타크나 흰 구름에는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
배웅이 있고 마중이 있고
웅크린 사람과 가방 든 남자의 기차역 전광판이 있다
전광판엔 출발보다 도착이, 받침 빠진 말이
받침 없는 말에는 돌아오지 않는 얼굴이 있다가 사라진다
흰 구름에는 뿌리 내리지 못한 것들의
처음과 끝이 연결되어
자정을 향해 흩어지는 구두들
구두를 따라가는 눈 속에는 방이 드러나고
방에는 따뜻한 아랫목, 아랫목에는 아이들 웃음소리
몰래 흘리는 눈물과 뜨거운 맹세가 흐른다
지금 바라보는 저 타크나 흰 구름은 출구와 입구가 함께 있다
모자 쓴 노인과 의자를 잠재우는 형광등 불빛
그 아래 휴지통에 날짜 지난 기차표가 버려져 있다
내일로 가는 우리들 그리움도 잠 못 들어
나무와 새소리, 새벽의 눈부신 햇살이 반짝이고
어제의 너와 내일의 내가 손을 잡고 있다
새로운 출발이 나의 타크나에서 돌아오고 있다
우린 흘러간 다음에 서로 흔적을 지워주는 사이라서
지우지 않아도 지워지는 얼굴로
지워져도 서로 알아보는 눈으로
뭉치고 흩어지고 떠돌다 그렇게 너의 일기에서 다시 만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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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대구 출생 ▲한양대학교 행정자치대학원 수료
▲커리어 컨설턴트
■ 2016년 한경청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서하
므두셀라
이서하
납작한 주머니에 찔러넣은 손가락들
그 손가락들은 내 안에 들어온 적이 있다
내게 주먹을 쥔 적이 잇다
배가 부은 날엔 혼자 병원에 갓다
두 개의 주머니가 팽창하는 중이다
주머니 속 먼지를 작게 쪼개면
더 작아져 날아가는 티끌처럼
수십 억 년을 떠돈 므두셀라처럼
나의 날은 모래알 같이 많으리라 (욥기 29;18)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어
두 개의 주머니를 오렸다
피 묻은 봉투 속에서도 나는 편안하다
좋은 것만 기억하라는 그의 말이 잠속까지 따라온다
나를 작게 쪼개면 더 작게 쪼개지는
내 아이들
혼자 떠도는 행성이 있다
그 행성의 이름은 므두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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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경기 양주 출생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 2016년 전북도민 신춘문예 시 당선작
화해(花蟹)
하송
냄비뚜껑을 열자 꽃처럼 붉은 꽃게가
철갑을 하고 있다
건들기만 하면 잘라버리겠다는 듯
엄지발을 치켜든다
뭉툭한 가위로 발을 절단하자
소리를 지르는 것은 꽃게가 아니라
가위였다
골수가 울컥 쏟아지자
바다는 잠잠했다
사는 일은 파도가 잠자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갯벌 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기는 것
꽃게, 파도가 거칠수록
두 눈 똑바로 뜨고 등딱지에 힘을 준다
한 평생 꽃처럼 배를 보이지 않는 것이 꽃게다
섬 하나가 안테나를 세우고
육지로 나간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지
바닷바람에 허리가 꼿꼿하다
바다를 버린 꽃게, 절대 바다를 돌아보지 않는다
·화해花蟹 : 꽃게
■ 2016년 제22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정자나무를 품다
염병기
내 고향
동구 밖
수백 살 나이에 지난 세월 움켜쥔 늙은 정자나무는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이다
고향 길에
어김없이 지나야 하는 그 곳은
돌담 길에 호박 엮이듯
어릴 적 추억들도 걸려 있다
옹기종기 모여 동네의 쉼터로
부초처럼 동네를 돌아다니는 이야기
풍문으로 떠돌던 이끼 낀 세월의 얘기도 묻혀 있고
저마다 자신만의 사연으로 바라본다
만만치 않은 세상, 삶이 고달플 때
의연함으로 시절을 버틴 정자나무는
살아온 날에 대한 다독임
살아갈 날에 대한 묵묵함으로 속마음을 대신한다
한 움큼씩 안고 사는 시린 사연도
송두리째 흔들렸던 삶의 모습에도
지나온 세파에 견딘 세월의 약(藥)으로
그 앞에서면 살포시 봄눈 녹듯 치유가 된다
고향 정자나무에서 느끼는 바람결
한 자락 쓸어 담아 가슴에 품는다
말 없는 살랑거림은 존재 의미를 더 하고
굳건함은 의지에 다시 일어나 시작할 마음을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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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경남 거창 출생.
● 서울 광운대 산업정보대학원(무역학) 중퇴
● (주)신한개발S&D 대표이사, 중국 신한그룹 총 경리 역임
● 현 (주)유림기업 전무이사, ㈜핑거팁스 대표/컨설팅
■ 2016년, 제11회 경제신춘문예 시 당선작
솟대
유택상
들판은 왜 저리 푸른가
아버지는 늙어서도 솟대이다
들판을 한 평생 지키시다 한 마리 새가 되었다
지적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땅을 지키기 위해
비를 맞고 눈을 맞고
가난한 살림에 몸피가 말라 있었다
자갈밭을 논으로 만든 옹이는
힘겹게 일궈 온 들판들 언제쯤 아버지 가는 주름살의
내력을 읽어 낼 수 있을까,
이것만은 지켜야 자식들 산목숨 이어줄 수 있다고 콜록콜록 막걸리 한 사발
가득 마시던 순간, 야윈 갈비뼈 사이에 깊이 앓았던 병이 도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들판에서 자꾸 흔들렸다
빛보다 어둠이 두려웠던 나는 들판에서 얼어 죽지 않으려고
아버지의 깃털을 뽑아 내 몸을 덮었다
겨울 동면에도 흘러 들어온 견딜 수 없는 추위 때문에
조금씩 아버지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한 평생 내내 몸이 젖은 들판은 살과 뼈로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
아버지의 몸이 된 들판은
새의 울음 같은 게 스며 있다
바람 찬 방안에서 비가 새는 걸 막으려고
밤새 솟대가 된 몸
밥그릇에 메아리치는 뜨거운 목숨의 노래
수풀 사이 땅바닥에 낙석처럼 버려진 삽 한 자루
아버지의 몸이다
■ 2016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고 진흙이 흘러내리고
지연
무덤 자리에 기둥을 세운 집이라 했다
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고 진흙이 흘러내리고
나는 당장 갈 곳이 없었으므로
무너진 방을 가로질러 뒤안으로 갔다
항아리 하나가 떠난 자들의 공명통이 되어 여울을 만들고 있었다
관 자리에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던 일가는 어디로 갔을까?
한때 그들은 지붕을 얹어준 죽은 자를 위해
피붙이 제삿날에 밥 한 그릇 항아리 위에 올려놓았을 것도 같고
그 밥 그릇 위에 달빛 한 송이 앉았을 것도 같은데
지금은 항아리 혼자 구멍 뚫려
떨어지는 빗방울의 무게만큼
물을 조용히 흘러 보내고 있었다
산자와 죽은 자의 눈물이
하나가 되어 떠나는 것 같았다 어디를 가든
이 세상에 무덤 아닌 곳 없고
집 아닌 곳 없을지도
항아리 눈을 쓰다듬으려는 순간
이팝꽃이 내 어깨에 한 송이 툭 떨어졌다
붉은머리오목눈이 후두둑 그 집을 뛰쳐나갔다
비가 오는 날 내 방에 누우면
집이기도 하고
무덤이기도 해서
내 마음은 빈집
항아리 위에 정한수를 올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