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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사 안내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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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정근영 |
| 선조 25년 4월 14일 섬나라 왜국에서 이 나라 조선반도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정발 장군의 죽음으로 부산이 함락되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국토는 왜국에게 철저히 유린되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7년 뒤인 선조 31년 11월 18일 노량진 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의 승리로 전쟁은 끝이 난다.
이 전쟁을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한때는 7년 전쟁이란 이름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었지만 역사용어로는 임진왜란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이 전쟁이 왜국의 분탕질에 그치고 말았는가. 우리 조선은 물론 명나라가 까지 개입한 국제적인 전쟁이 아닌가. 임진왜란은 분명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의 이름은 조일전쟁으로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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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기념탑이 바로 앞에 턱 버티고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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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정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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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창, 삽과 곡괭이, 도끼 등 농기구를 들고 왜군에 맞선 의병들의 조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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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정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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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전쟁을 살펴보노라면 이 나라 조선이 자기 영역을 지켜낼 힘을 가진 나라였는지 조차 의심이 간다. 군인이란 이들이 왜군의 조총 소리에 놀라 삼십육계 줄행랑치기에 바빴으니 말이다. 중장기로 무장한 이 나라의 군인이 더러운 목숨을 연명하려고 도망간 자리에 죽창을 들고, 밭갈이 하던 괭이를 들고, 거름을 뒤집던 쇠스랑을 들고, 왜군의 조총에 맞섰으니 그들의 이름은 의병이었다.
의병, 그들이 있었기에 이 나라는 지켜진 것이 아닐까. 당시 조정에서 이 나라 농민, 서민을 위해 해 준 것이 무엇인가. 사대부들이 백정으로 이름 지어 차별하고, 상놈으로 능욕하였건만 그들은 자기를 무시하고 못살게 군 이 나라의 조정을 지키려고 일어섰더란 말인가. 목숨을 바쳤더란 말인가.
합천은 의병의 발상지다. 국록이라고는 반 푼어치도 입에 넣지 않은 합천 삼가 출신의 남명 조식 문하의 선비들이 민중과 함께 일어섰으니 그것이 의의 시작이다. 내암 정인홍과 망우당 곽재우 장군으로 대표하는 의병활동, 그러나 인조반정이후 의병활동에 대한 역사는 왜곡되고 말았다. 역적으로 내몰린 정인홍은 의병의 이름에서 지워지고 조식의 사적은 불태워진 것이다.
합천군 대병면 성리 합천호반에 세워진 합천 임란 창의 기념관은 조일전쟁 당시 의병활동의 효시가 된 합천의병의 역사를 재정립하고 이름없이 산화해간 의병들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당시 의병활동과 관련된 유물들을 한 곳에 모아서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만든 것이다.
이 기념관은 8년 동안 이 나라 민중이 낸 세금 61억 원을 들여 1만 5648평의 대지위에 기념탑 2동, 사당, 외삼문, 내삼문, 유물관, 강당, 사주문 2동으로 되어 있다.
산기슭을 깎아 만든 탓인지 기념관 전체는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겨 놓음에 따라 각종 건물이 눈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오면 바로 눈앞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있는 기념탑을 보게 된다. 기념탑 세 모서리에 서 있는 조각상을 본다. 죽창, 농민, 괭이, 삽, 쇠스랑 등의 농기구를 둔 농민들이다. 의병이다.
관군이 왜군의 조총소리에 놀라 도망을 쳤지만 이 땅의 민초들은 이렇게 농기구를 들고 왜군의 조총에 맞섰다. 정말 무모하긴 하지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 비겁하게 죽을 수는 없는 것, 죽창을 들고서라도 조총을 든 왜군에 맞서야 했다. 이렇게 우리 백성은 풀이 되어 임란의 태풍에 맞섰던 것이다.
우리는 의병들의 후예일까. 농기구를 들고 맞선 의병의 모습을 보고 일행은 "저 죽창 든 사람이 나다"하는 가하면 또 어떤 이는 "괭이를 든 저 사람이 나다"라고 한다. 의병 후손으로서 긍지일까. 아니면 전 아무개 씨와 같은 오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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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인문 앞에서. 앞줄 흰 셔츠 입은 사람이 이 현판 글씨를 쓴 서예가 정호영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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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정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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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물기념관 안내 데스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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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정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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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사는 창의사란 사당이름과 각종 시설물의 이름을 현상공모로 정한 것인데 공모에 당선한 정호영 선생이 동행을 해서 당시의 사정을 설명했다. 임진왜란 때에 순국한 장군, 열사들의 추모 사당이 많은 데 이미 있는 이름과 겹치지 않고 그 뜻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이름을 생각해 낸 것이 창의사다. 의로움을 크게 드러낸 의병들을 추모하는 사당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조선시대는 유학을 국시로 하는 나라였고 유학의 근본은 인(仁)이라 이 사당을 처음 들어가는 문을 숭인문으로 지었다고 했다. 정 선생의 말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많은 의병이 일어나 왜군에 맞섰는데 남명 선생의 문하생이 가장 많고 퇴계 선생의 문하생은 얼마 없다는 것이다. 퇴계의 뿌리였던 경북 지역엔 임란 유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당시 국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이들이 그들이었는데 국록 챙기는 데 혈안이 되어 나라 지키는 데는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 여기서 섯부른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 깊은 연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숭인문을 들어섰다. 왼쪽에 사적 기념지가 서 있고 담벽 쪽에 천례문이 있다. 오른 쪽으로는 연못이 있고 연못을 지나면 양지문이 있다.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왼쪽에 유물관이 있고 오른쪽에는 경의당이다. 경의당은 강당이다.
유물관을 들어서면 상징부조와 전시관 안내판이 있는 안네 데스크가 맞아준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의병의 발상지 합천, 항일의병의 활약, 합천 의병의 맥을 공부하고 나서 문밖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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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물 기념관안에 있는 임진왜란 때의 싸움을 보여주는 인형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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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정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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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사 사당, 현판글씨의 주인은 누구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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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정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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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사 내부, 위패를 모셔 놓은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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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정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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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충의문이다. 충의문을 들어서면 이제 합천 임란창의 기념관의 중심인 충의사 사당이다. 사당엔 위패를 모서 놓고 문 가까이에는 모셔놓은 위패의 위치와 이름을 알 수 있도록 배치도를 만들어 놓았다.
"초계 정씨가 많다", "문씨가 많다" 등으로 조상 자랑을 한다. 합천 임란 창의 기념관엔 세력다툼이 한창이다. 출향 인사들의 힘자랑을 보는 듯하다. 전직 대통령, 전직 국회의원, 전직 도시사 등이 현판에다 제 얼굴을 드러내듯 직함과 함께 서툰 한문 글씨가 눈에 거슬린다.
전두환 전 대통령, 그가 진짜로 무식한 것인지 아니면 그를 험담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선비 사자도 몰라 '사관과 신사(士官과 紳士)'를 토관과 신토로 읽었다고 한다. 또 미당(未堂)을 말당 선생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회자된다. 그분의 서툰 붓글씨로 내건 창의사 현판이 무서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이 사당에 모셔져 있는 이름 없는 의병들의 마음은 지금 편안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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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에서 내려다 본 창의사 경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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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정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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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사 경내에서 바라본 앞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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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정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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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직 대통령은 충의사 현판, 전직 국회의원은 경의당, 전직 도지사는 충의문 등 출향 인사들이 그 계급에 따라 건물의 계급이 정해져 있다. 분명 이들은 자기의 권력을 이용해서 자기 이름으로 현판을 매단 것이다. 전 대통령 박정희는 대단한 서예가였기 때문에 이 나라 사당의 수많은 현판을 자기 이름으로 내건 것은 아니다.
이 나라 사당의 현판에 빛을 내고 있는 박정희, 전두환 등의 이름은 아직도 그들이 이 나라의 실력자임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합천에서 더욱 빛이 나는 전두환의 이름을 보면 씁쓰레한 생각이 드는 나는 합천 사람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일까.
여기서 밝혀 두어야 할 것은 임란 창의 기념관에서 유일하게 숭인문 현판만 서예가 정호영 씨의 글씨란 것이다. 세력가들의 힘자랑에 전문가는 이렇게 초라하게 한 사람이 구색을 갖추고 있는가 보다. |
첫댓글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박정희야 공과의 문제에 대해서 말할 것이 있을지 모르지만 전두환은 좀 너무한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