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93주년 … 일제의 폭압과 지배에 항거한 김해의 독립만세운동과 의인들
총칼과 모진 고문을 뚫고 "대한독립 만세"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우리나라의 자주 통치권을 강제로 빼앗았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1910년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난 일본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약탈로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의 비분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로 승화되었다.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이다.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이다. 김해의 의인들도 3·1운동에 참가했다. 학생과 농민과 유림 등 많은 김해사람들이 수 차례에 걸쳐 일제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조선인의 의기를 보였다. 이번호 '김해인물열전'은 3·1운동에 참가한 김해의 의인들을 소개한다.
3·1운동 학생대표 배동석 독립선언문 가지고 김해로 와
임학찬·배덕수·송세희 등과 의논
3월30일 밤 10시 읍내 중앙거리서 김해 최초 만세운동 전개
지난 1일 김해시는 장유 용두산정 3·1독립운동기념탑 광장에서 3·1절 기념행사를 가졌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김해는 옛 가야의 고도로 가야시대의 역사를 말해주는 유적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일본은 특히 김해에서 수 차례 유적지 발굴을 시도했다. 그 이유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주장이다. 말이 발굴이지, 남의 역사를 도둑질하는 만행이다.
이 주장은 외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정도로 일본의 고대사회가 발전했다는 논리로 펼쳐졌고,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하는 정당화 논리로 이용되었다. 조선의 문명이 풍전등화였을 때 옛 가야의 땅인 김해는 그렇게 일본에 유린당하고 있었다. 구산동 고분군은 말할 것도 없고 회현리 패총은 일본에 의해 무려 10여 차례에 걸쳐 발굴 당했다.
그러나 민족의 의기는 살아있었다. 지역의 유림들과 청년학도들에 의해 독립운동의 불길이 댕겨졌고, 김해사람들이 이에 동참했다.
1919년 3월 30일 밤 김해 읍내에서 만세시위가 처음 시작되었다. 이어 31일과 4월 5일에 하계면(진영시장), 4월 11일에 명지면(명호시장)을 휩쓸었고, 4월 12일에 장유면 무계리에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4월 16일에 칠산 이동리의 시위로 이어졌다.
그 날로 거슬러 올라가 김해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의인들을 만나보자.
김해읍 출신 배동석은 세브란스의전 학생으로 2월 26일 마산의 박순천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고,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학생대표로 활약했다. 배동석은, 선언문을 가지고 김해로 내려와 임학찬·배덕수·송세희 등과 의논하여, 3월 30일 밤 10시 읍내 중앙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본지 2011년 8월 10일자 참조)
허병·송상진·김석암·최계우
4월2일 읍내서 또다시 만세운동
김해 최초의 만세시위는 김해사람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씨를 심었으나 일본군에게 배동석·임학찬·배덕수·박덕수 등이 검거되었다. 이때 검거를 면한 허병·송상진은 4월 2일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거사하기로 결의했다. 3월 31일 허병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4월 1일 밤에 격문을 붙여 동지들을 규합하였으며, 의용대도 조직했다. 4월 2일 오후 4시 허병·김석암·최계우·송상진 등은 김해 읍내의 시장에서 군중들을 이끌며 시위를 전개했다. 일본 경찰은 재향군인을 비롯한 일인 상인·불량배들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시위 군중을 탄압하였다. 고향 미상의 독신이던 최계우는 주인 허병·허종식과 함께 의거를 주도한 후 일본 헌병의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다 숨졌다. 고문의 독으로 인해 감옥에서 출옥한 후 사망했다.
김정태·김성도·김우현·김용환
식민지 농산물 수탈지 진영서
10척 장대 대형 태극기 흔들며
진영장날인 3월31일 "독립만세"
진영에서는 3월 31일 장날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농산물의 집산지로 일찍이 식민지 경제정책의 수탈대상이었던 진영 농민들의 항일의식은 어느 곳 보다도 강했다. 김정태는 김성도·김우현·김용환 등과 함께 각기 금전을 갹출하여 10척 장대에 매어 달 대형 태극기와 소형 태극기, 그리고 격문을 제작했다. 3월 31일 오후 1시께 장터 근방의 흙다리에 대형 태극기가 10척 장대에서 휘날렸다. 진영 하늘에 휘날리던 대형 태극기와 2천 여 명의 시위군중은 일본 경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명지 동명학교 교사 이진석
양왕석·김영두·이규회·지봉구 등과 4월10일 명호장날에 거사
4월 10일과 11일에 걸쳐 명지면 일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명지면 동명학교의 교사 이진석은 동창이자 경성약학학교 학생인 김연복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였다. 이진석은 양왕석·김영두·이규회·지봉구 등과 만나 4월 10일의 중리 명호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진석은 4월 9일 밤 양왕석과 함께 철야작업으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다. 4월 10일 이진석 등과 동명학교 학생들이 명호 장터에 모여들었다. 장꾼이 가장 많이 모이는 오후 2시, 1백 여 명의 학생과 장꾼들이 만세를 불렀다.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의 무력행사로 시위군중은 해산했으나, 이진석은 동지들과 다시 만나 11일 진목리에서 밤 10시에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김해에서 가장 큰 규모 장유 만세운동
4월12일 무계리 장터서 전개
장유면의 만세운동은 김해에서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났다. 김종훤은 고종의 국장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갖고 귀향했다. 김종훤은 4월 11일 김승태·조순규·이강석·최현호·조영우·조항래 등과 만나 이튿날 무계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군중 동원과 태극기 제작을 분담했다. 4월 12일 동리사람 50여 명을 동원한 김승태가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무계리 장터로 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다른 동리에서도 주동 의사들의 인솔 아래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시위군중이 모여들어 그 숫자는 3천 여 명이나 되었다. 일본 군경의 무력 진압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헌병주재소를 습격했다. 당황한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김선오·손명조·김용이는 현장에서 순국했다. 총탄 아래서도 독립을 외쳤던 의사들은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김해의 의인들은 김해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공부하고 있던 곳이나 이주해 살고 있던 곳에서도 만세운동을 주동했다.
고영건·서진령 등은 동래읍 장날에
박도백은 구포시장서 만세시위 주도
장유 용두산정 기념식장에서 어린이가 묵념을 하고 있다. 이 땅의 어린이들은 순국선열이 지킨 나라를 더 빛내어 갈 미래의 주인공이다.
동래읍에서 장날에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한 동래고보의 학생대표인 고영건과 동래고보 3학년생 서진령도 김해 사람이다. 고영건과 서진령은 엄진영·김인호·김귀룡 등과 함께 동래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했다. 독립선언서 500매와 태극기,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와 '오왕약살(吾王藥殺.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폭로하는 뜻)'이라고 쓴 수백 매의 격문을 준비하여 장날인 3월 13일 시위군중에게 배부했다. 장터에 모인 시위군중의 의기와 기개를 보고 감격한 어떤 조선인 경찰과 조선인 헌병 보조원도 제목과 모자를 벗어 던지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동래고보학생들이 주도한 이 만세운동은 지금도 매년 삼일절이면 재현되고 있다.
김해 사람 박도백은 3월 29일 구포 시장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서 대열의 선두에 서서 시위군중을 주도하다가 일경이 쏜 총탄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한림출신의 배치문은 전남 목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울려 퍼졌고, 김해에서도 그 외침은 끊이지 않았다. 국가보훈처의 기록을 통해 김해 출신 독립유공자들의 행적을 살펴보는 동안,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을 수많은 김해의 의인들을 함께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병태 전 김해문화원장(1991~2002, 9~11대 원장)이 '경상남도 각 시·군의 3·1 독립운동(경삼남도향토사연구협의회 발행)'에 게재한 '김해 지방의 3·1운동'에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태극기를 치마폭에 숨겨 장터까지 운반한 이름 없는 기생도 있고, 열일곱 어린 학생들도 있다.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모시던 주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최계우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올라있지 않다.
이름과 행적이 밝혀진 의사들도, 이름 없이 만세를 외친 많은 사람들도 모두 기억하고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93년 전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모든 분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모든 국민들, 김해에서 살고 있는 모든 시민들과 함께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