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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小白山) 봉우리에 여름에도 빙설(氷雪)이?
○ 조선사(朝鮮史)를 공부(工夫), 또는 연구(硏究)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이 지명(地名)이나 산(山)의 이름, 하천(河川)의 이름 등이다. 역사서(歷史書)에 기록된 산(山)의 이름과 현재(現在)의 것이 같은 것인지, 아니면 이름만 차용(借用)한 짝퉁 산(山)인지, 하천(河川)이름 역시도 같은 경우(境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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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 백 산 (小 白 山)
《在吉林省中部,松花江與瑚爾哈河之間,長白山之支脈也,一名溫德亨山,上有望祭殿,故亦名望祭山,殿爲淸雍正時建,在此以祭長白山之神,(中略) : 길림성(吉林省)중부에 있는데, 송화(松花)강과 호 이 합 하(瑚爾哈河)사이에, 장백산【長白山 : 백두산(白頭山)이다.】의 지맥(支脈)이다. 일명 “온 덕 형 산”이다. (산)위에 “망제 전”이 있으며, 또 그 이름이 “망제 산”이다. 전(殿)은 청(淸) 옹정(雍正) 때 지었는데, 이것은 장백산(長白山)의 신(神)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청사고(淸史考)나 기타 대륙사서(大陸史書)와 조선사(朝鮮史)에 기록된 『백두산 동남쪽에 세웠다.』는 말과 배치(背馳)되는 기록임을 잊지 말자.
● 청일통지(淸一統志)를 인용(引用)하여 기록하기를,
《 謂 小 白 山 在 寧 古 塔 (今 寧 安 縣) 西 北 四 百 里, 巖 岫 嶔 희【山+戱=산 위험할 희】, 冰 雪 夏 積 者, 乃 小 白 山 之 主 峰 也. : 이르기를 소백산(小白山)은 영 고탑(寧古塔 : 지금 영안 현) 서북 400 리에 있는데, 산이 암반과 산굴과 높고 험하여 위험하며, 여름에도 얼음과 눈이 쌓여있는데, 이는 소백산(小白山)의 주봉(主峰)이다. 》
위의 기록으로 보면, 장백산(長白山) 곧 백두산(白頭山)보다도 더 높고, 험하며, 여름에도 얼음과 눈이 쌓여 있는 만년설(萬年雪)의 산이란 이야기다. 과연 그럴까?
이 지방에 이러한 만년설(萬年雪)이 쌓여있는 산(山)은 존재하지 않는다. 청일통지(淸一統志)라면 근세(近世)의 기록(記錄)이기 때문에 시대적(時代的) 환경(環境)의 변화(變化)는 극히 미미(微微)하다고 본다. 백두산(白頭山) 역시 여름에 눈과 얼음이 쌓여 있지 않다. 이는 서북지방의 해발고도가 더 높은 산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다음의 설명으로 이해(理解)될 수 있다.
○ 영고 탑(寧古塔) : 《길림(吉林)의 영안 현에 있으며, 구설(舊說)에 의하면, 만주(滿洲) 최초의 조종(祖宗)이다. : 今 吉 林 寧 安 縣 治.(中略). 舊 說 滿 洲 最 初 之 祖.》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지리학적(地理學的)으로 “만주(滿洲)지방”에 있었다는 것이며, “만주(滿洲)지방”은 『중원(中原) 서북방(西北方)의 황하(黃河) 남북(南北)안과 서북(西北)안의 땅을 말한다.』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결국 길림성(吉林省)이란 지방이 있어야 할 곳은 “중원(中原) 서북방(西北方) 황하(黃河) 북(北)쪽과 서북(西北)지방을 포함(包含)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다. 또한 이곳은 백두산(白頭山)의 동남(東南)지방이어야 맞는 것이다. 이는 대륙 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가 함께 똑같이 기록(記錄)하고 있으니 말이다.
○ 영안 현(寧安縣) ; 옛 숙신의 땅이며, 그 후 읍루(挹婁)의 땅이다. 발해(渤海)때는 그곳에 상경(上京)용천(龍泉)부를 두었으며, 요(遼)는 ‘천복 성’을, 금(金)나라는 이곳에 ‘호이합로 만호’를, 원(元)나라 초에는 ‘호이합군민만호부’를 두었다. 명(明)나라 때는 ‘노 아 간 도지휘사’가 이곳을 다스리며, 야인(野人) 여러 위(衛)를 모두 거느리고 다스렸다. 청(淸) 태조(太祖)가 이곳에서 굴기【崛起 : 기울어진 집안에서 큰 인물이 나는 것】하여, 이곳은 “청대의 발상지”이다. :古肅愼氏地,其後爲挹婁,爲勿吉,渤海時置上京龍泉府,遼爲天福城,金置呼爾哈路萬戶,元初置呼爾哈軍民萬戶府,明奴兒干都指揮使治此.統轄野人諸衛.淸太祖崛起於此,爲淸代發祥地.(中略)》
이곳이 청(淸) 태조(太祖)가 발흥(發興)한 곳이며, 그곳은 옛 숙신(肅愼)의 땅이라 했음에, 현 반도(半島) 동북방(東北方)이란 이야기는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의 굴곡(屈曲)된 역사관(歷史觀)에서 기인(起因)하며, 조선(朝鮮)을 철저(徹底)하게 짓밟으려하는 세력(勢力)들에 의한 역사왜곡(歷史歪曲)』이란 것을 주시(注視)해야 한다.
옛 숙신(肅愼)의 땅이라면, 산해 경(山海經)에서 말하는 “숙신(肅愼)국”일 것이며, 이곳은 “산해 경(山海經)”에서 말하는 북쪽과 서북(西北)쪽 방향에 있어야 하며, 그곳은 ’대 황(大荒)의 땅‘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곳이 반도(半島) 북쪽 현 길림성(吉林省) 땅이라고 한다면, 산해경은 ’일본열도(日本列島)‘ 또는 그 동쪽 ’하와이‘쯤에서 기록(記錄)된 것이어야 한다.
『식민사관이나 반도사관의 폐해』는 이렇게 모든 것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린다.
○ 영안 부(寧安府)는, 영안 현(寧安縣)이며, 영안 채(寧安砦)는 감 숙(甘肅) 평 량 부(平凉府) 지경에 있으며, 영안 보(寧安堡)는 감 숙(甘肅) 중위(中衛)현 황하(黃河) 북쪽에 있다고 한다.
아래의 것 역시 똑같은 맥락(脈絡)의 것이다. 대륙(大陸)의 형편(形便)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스로 엉키고, 섞이게 만들어 놓고 보니, 이제는 어떤 것이 진짜인지 알쏭달쏭할 것이며, 거짓으로 만들어 놓은 것들이 진실인 냥 둔갑(遁甲)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니 “동북공정”이란 양심(良心)없는 파렴치한 짓도 망설임 없이 벌이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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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 청 하 (小淸河)
《在奉天開原縣南二里,與大淸河合流,總名淸河,又西入遼河. : 소 청하(小淸河)는 봉천(奉天) 개원 현(開原縣) 남 2 리에 있다. 대 청하(大淸河)에 합류하는데, 총칭하여 이름이 ‘청하(淸河)’이며, 또 서쪽으로 “요하(遼河)”에 들어간다.》고 하였으므로, 결국 “요하(遼河)”의 지류(支流)이다. 《奉 天 鐵 嶺 縣 之 懿 路 河, 舊 亦 名 小 淸 河. : 봉천(奉天) 철 령(鐵嶺)현의 의 로 하(懿路河)이다. 옛 이름이 “소 청하(小淸河)”이다.》
《 懿路河 : 在遼寧鐵嶺縣南六十里,源出王家林山,舊名小淸河,西流經懿路城南,流入遼河.金史地理志.挹婁縣有淸河,國名抇必剌.卽此. : “의로 하(懿路河)”는, 요 녕(遼寧) 철 령(鐵嶺)현 남쪽 60 리에 있으며, 물은 ‘왕 가 림 산’에서 나오는데, 옛 이름이 “소 청하(小淸河)”이다. 서쪽으로 흘러 “의로 성”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요하(遼河)로 들어간다. 금사(金史)지리지에, 읍루(挹婁)현에 ‘청하(淸河)’가 있으며, 나라이름이 “골 필 랄”이며, 곧 이곳이다. 懿 路 城 : 金 挹 婁 縣. : “의로 성”은 금나라의 읍루(挹婁)현이다.》
● 대 청하(大淸河)를 찾아보면, 위의 소 청하(小淸河) 기록(記錄)과 일치(一致)되는 곳이 없으며, 청하(淸河)는 아예 기록(記錄)이 없다. 중요(重要)한 것은 위에서 말하는 여러 하천(河川)은 모두 곧 『 요수【遼水 : 요하(遼河)】 의 지류(支流)』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래의 기록을 더 참고(參考)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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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경 강 역 고 (盛京疆域考)를 보자.《原注洪武二十四年建韓王府永樂二十二年遷於陝西平涼西北有金山東有分水東嶺北有分水西嶺西有大清河東有小清河流合焉下流入於遼河又北有土河東北有艾河流合焉謂之遼海即遼河上源也 : 원주(原注) : 홍무【명(明)태조(太祖)】24년, 한 왕 부(韓 王 府)를 세웠다. 영락(永樂) 22년에 섬서(陝西) 평 량(平凉) 서북(西北)으로 옮겼는데, 이곳에 금산(金山)이 있으며, 동(東)쪽으로 물이 누어지는 동령(東嶺)이 있고, 북(北)쪽으로 물이 나누어지는 서령(西嶺)이 있는데, 서쪽에 “대 청하(大淸河)”가 있고, 동쪽에는 “소 청하(小淸河)”가 흘러 함께 모인다. 아래로 흘러 『요하(遼河)』로 들어간다. 또 북쪽에는 “토 하(土河)”, 동북(東北)쪽에는 애하(艾河)가 흘러 합해진다. 이르기를 요해(遼海)인데, 곧 요하(遼河)의 상류 근원(根源)이다.》
결국 소 청하(小淸河), 대 청하(大淸河)를 이리 저리로 헷갈리게 설명하고, 뒤죽박죽 만들어 놓았지만, 최종적(最終的)으로 확실(確實)하게 밝혀지는 것은 “성경강역 고(盛京疆域考)”에서 설명의 “한 왕부(韓王府)” 설명에 나오는 바로 그것이다.
『소 청하(小淸河)와 대 청하(大淸河)등이 합쳐져 흐르다가, 요하(遼河)로 들어가니, 이들 하천(河川)은 “요하(遼河)의 지류(支流)” 이며, “요하(遼河)”가 있던 곳은 대륙(大陸) 중원(中原)땅의 평 량【平凉 : 감 숙(甘肅) 평 량(平凉)으로 원주(原州)이며, 개성부(開成府)라고도 한 곳이다. 이전엔 현 감 숙(甘肅)지방이 섬서(陝西)지방이었다.】 서북(西北)쪽 금산(金山)에 있었다.』는 결론(結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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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 언급(言及)된 “금산(金山)과 토 하(土河)”에 대해 찾아보자.
금산(金山) : 『“알타이 산”을 말하는 것으로, 외몽골 서북방에 있다고 하였는데, 아이태산(阿爾泰山)이며, 또 아늑 단(阿勒壇)이다. 또 아이단(阿爾但)이다. 몽고(蒙古)에서는 “금(金)”을 “아이단(阿爾但)”이라 한다. 원래 또 “금산(金山)”이다. 천산(天山)이 북쪽으로 뻗은 줄기이며, 하란(夏蘭)산의 세(勢)가 멀리에 연이어져 있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토 하(土河) : 土 河 卽 老 哈 河. 亦 曰 老 河. 又 曰 塗 河. (遼 史 地 理 志) 中 京 大 定 府 有 土 河. 又 上 京 道 水 州. 東 潢 河. 南 土 河. 二 水 合 流. 故 曰 永 州. (中略) : 토 하(土河)는 곧 노 합 하이며, 또 노하(老河)라 칭하며, 또 도하(渡河)라 부른다. (요사(遼史)지리지) 중경(中京)대정부에 “토 하(土河)”가 있다. 또 상경(上京) ‘도수 주(州)’에, 동쪽엔 황하(潢河), 남쪽에는 토 하(土河)의 두 물이 합쳐 흐르는데, 본래 영주(永州)라 한다.(중략).
● 위의 모든 기록(記錄)을 보면,
『대 청하(大淸河) 및 소 청하(小淸河)는 “금산(金山) 곧 아이태산”에서 발원(發源)하여 흐르는 하천(河川)인데, 서쪽에서 나오는 물이 “대 청하(大淸河)”요, 동쪽 봉우리에서 나오는 물이 “소 청하(小淸河)”이다. 이 두 물이 합쳐져 흐르는데, 이 물은 “요하(遼河)”로 들어간다. 또 북쪽에는 토 하(土河), 동북쪽에서는 “애하(艾河)”가 흐르다가 이 두 물 역시 “요하(遼河)”로 들어간다. 이렇게 여러 하천이 “요하(遼河)”로 들어가 큰물이 되니, 소위 “요해(遼海)”라 했는데, 이 “요해(遼海)”는 “요하(遼河)의 상류(上流)”이다.』라는 설명(說明)이다.
현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는 길림성(吉林省)이나 요 녕 성(遼寧省)의 지리적(地理的) 형편(形便)으로 보면, 위의 설명(說明)은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다. 그러나 이것을 『현 신강(新疆)과 외몽골과 러시아의 세 나라 접경지역』으로 옮겨 놓으면, 옛 역사서(歷史書) 기록이 찬란(燦爛)한 빛을 발한다. 곧 역사(歷史)의 진실의 문이 열린다는 뜻이다.
금산(金山) 곧 아이태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라는 설명이다. 이것을 감추기 위해 지명대사전에서는 적당히 은폐(隱蔽)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곳이 요(遼)나라의 중경(中京)과 상경(上京)이 있었던 곳이다. 이렇게 배열(配列)하고 나면, 그 동(東)쪽지방과 동남(東南)쪽 지방엔 당시(當時)의 “고려(高麗)”가 있었으며, 요(遼)나라에서 “낙타(駱駝)부대”를 이끌고 고려(高麗)를 침략(侵略)한 사실(事實)을, 사실(事實)로 인정(認定)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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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이는 고구려(高句驪)의 부여(夫餘)성과 연결(連結)되는데,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기록(記錄)하기를 :
《通典唐乾封二年薛仁貴破髙麗於金山進拔夫餘城(案夫餘城東接挹婁西接鮮卑在遼為通州金為威平府地). : 통전(通典)에, 당(唐) 건 봉(乾封) 2년, 설인귀(薛仁貴)가, 금산(金山)에서 진격(進擊), 부여(夫餘)성을 쳐, 고려(高驪)를 깨뜨렸다. (안(案). 부여(夫餘)성은 동쪽은 읍루(挹婁)와 접하고, 서쪽에 선비(鮮卑)와 접(接)해 있다. 요(遼)의 통주(通州)는 금(金)의 함평 부 땅이다.) 明 統 志 金山在開原西北三百五十里遼河北岸又西北三十里曰東金山又二十里曰西金山三山緜亘三百餘里與烏梁海接境 : 명 통지(明統志). 금산(金山)은 개원(開原) 서북(西北) 350 리 요하(遼河) 북안(北岸)에 있다. 또 서북(西北) 30 리에 ‘동 금산(東金山)’이, 또 20 리에 ‘서 금산(西金山)’이 있는데, 이 세 산(山)의 뻗은 줄기가 3백 여리이며, “오량 해(烏梁海)”와 접경(接境)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오량 해(烏梁海)”라는 종족(種族)은 어디에 있었을까를 확인(確認)해보자.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 요. 금. 명(遼金明) 때 속해 있던 “오량 해(烏梁海)”를 일컫기를 본래 건주(建州)에 있던 자들이다. : 遼 金 所 置 眀 屬 烏 梁 海 其 稱 故 建 州 者 》 라고 설명한다. 곧 “건주(建州)”라는 곳에 살던 자들을 “오량 해(烏梁海)”라 불렀다는 이야기다.
『오량 해(烏梁海)』에 대해 “지명대사전”은 기록하기를 : 《 亦 作 兀 良 哈, 明 時 居 直 隷 長 城 外. 卽 蒙 古 東 部 地 方, 爲 朶 顔. 福 餘. 泰 寧 三 衛, 後 徙 外 蒙 古 西 北 部, 其 種 爲 突 闕 族, 語 言 風 俗, 則 以 喀 爾 喀 人, 自 稱 東 巴. 居 唐 努 山, 阿 爾 泰 山 之 間. 分 爲 三 部, 一 曰 唐 努 烏 梁 海, 二 曰 阿 爾 泰 烏 梁 海, 三 曰 阿 爾 泰 諾 爾 烏 粱 海. : 또한 “올 량 합(兀良哈)”이다. 명(明)나라 때 직례(直隷) 장성(長城) 밖에서 살았다. 곧 몽고(蒙古) 동부지방인데, 타안(朶顔). 복 여(福餘 : 부여라고 한다). 태 녕(泰寧)3위이다. 후에 이들은 외몽고 서북부로 옮겨갔다. 그 종류는 돌궐(突闕)족이다. 말과 글과 풍속(風俗)은 객리객인이며, 스스로 “동파(東巴)”라 하였다. “당노 산(唐努山)과 아이태산(阿爾泰山)사이에서 살았는데”, 3 부로 나누어져, 일부는 <당노 오량 해(唐努烏梁海)>, 이부는 <아이태오량해(阿爾泰烏梁海)>, 삼부는 <아이태약이오량해>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곧
(1) 당노 오량 해(唐努烏梁海)의 당노 산(唐努山)은, 唐 努 山 : 外 蒙 古 唐 努 烏 梁 海 南 境. 阿 爾 泰 山 之 大 支 幹 也. 唐 書 作 唐 麓 嶺 이며, 唐 努 烏 粱 海 部 : 外 蒙 古 西 北 境. : 당노 산(唐努山)은, 외몽고 ‘당노 오량 해’ 남쪽지경에 있다. 아이태산의 큰 지맥이다. 당서(唐書)의 “당록 령”이며, 당노오량해부는 외몽고 서북 지경에 있다.
(2) 아이태산(阿爾泰山)은, 阿 爾 泰 山 : 亦 作 阿 勒 壇. 又 作 阿 爾 但. 蒙 古 爲 金 爲 阿 爾 但. 故 又 稱 金 山. 天 山 北 出 之 脈. : 아이태산(阿爾泰山) : 또한 아늑 단(阿勒壇)이다. 또 아이단(阿爾但)이다. 몽고(蒙古)에서는 “금(金)”을 “아이단(阿爾但)”이라 한다. 원래 또 “금산(金山)”이다. 천산(天山)이 북쪽으로 뻗은 지맥(支脈)이다.
● 오량 해(烏梁海)란 종족(種族)은.
㉠ 본시 돌궐(突闕)족이며,
㉡ 명(明)때의 삼위【三衛 : 타안(朶顔). 복여(福餘 : 부여(夫餘)라고 한다). 태녕(泰寧)】들이며,
㉢ 이들은 현재(現在)의 『외몽골 서북(西北), 신강(新疆)의 아산도, 외몽골과 신강(新疆)의 접경(接境)지대 북쪽 러시아, 외몽골 중서부』등지에 살고 있던 종족(種族)이다.
㉣ 이러한 종족(種族)들을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었다고 하는 사학(史學)은, 사학(死學)이 될 수밖에 없다. 이들의 남(南)쪽과 서남(西南)일부, 동남(東南)지방엔 “조선(朝鮮)”이 있었다.
【 삼위(三衛)의 하나였던 “복 여(福餘)”는 “옛 부여(夫餘)였다.”는 것을 잊지 말자. 지명대사전에서 “부여(夫餘)”는 현 내몽고(內蒙古) 최 서쪽지방인 하서회랑(河西回廊)의 북쪽지방인 “거연해(居延海)”주위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 동북(東北)쪽엔 읍루(挹婁)가, 그 서쪽엔 선비(鮮卑)와 접경(接境)하고 있었다는 기록(記錄)을 외면(外面)할 수 있는 증거(證據)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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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한 가지 지명(地名)이나, 산(山)의 이름, 하천(河川)의 이름, 종족(種族)의 이름 등등은 그 전고(典故)가 있어야 설명(說明)되어지는 것이며, 이는 곧 지나간 역사(歷史)의 증명(證明)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보라. 그곳에 기재(記載)되어 있는 “지명(地名)”에 대한 “전고(典故)”를 빽빽하게 기록하여 놓았다. 그 지명(地名)의 전고(典故)가 과연(果然) 반도(半島) 땅의 지형(地形)지세(地勢)와 자연(自然)환경(環境)이 맞아 들어가는 것인지를 확인(確認)해 보라는 거다.
조선(朝鮮)의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자손(子孫)들이 수많은 유집을 남겨 놓았다. 그곳에서 말하는 지형지세(地形地勢)가 과연 반도(半島) 땅에 어울릴 수 있는가를 확인(確認)해 보라는 거다.
물론 똑같이 어울릴 수 있는 것들도 존재(存在)한다. 그러나 전혀 어울릴 수 없는 황당(荒唐)한 기록(記錄)들은 모두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의문(疑問)을 갖고, 하나하나 추적(追跡)해 보는 것이 “역사(歷史)연구(硏究)”다.
한글로 다 해설(解說)해 놓은 것은 해설(解說)한 자(者)의 주관(主觀)과 사관(史觀)의 영향(影響)으로 엉뚱한 역사해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원전(原典)을 비교(比較)해보는 것이 기본(基本)이다.
올바르고, 정당(正當)한, 조선인(朝鮮人)에 의한, 조선(朝鮮)의 역사(歷史)가 세워질 수 있도록 다함께 노력해 보십시다.
2012년 06월 08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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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렇군요. 길림은 현 만주가 아니라, 서북중국입니다. 흑륭강이란 강도 원래 흑수로서 흑수는 고지도에 서북중국으로 나온답니다. 참 안성맞춤으로 일치하네요.. 좋은 역사 감사합니다.![므흣](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8.gif)
참고로 우리백두산도 만년설로 뒤덮힌 산이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