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롱뇽 소송’ 천성산, 11월 1일 터널 개통 앞두고 가보니
“올 봄 천성산 웅덩이엔 도롱뇽·알 천지였습니다”
<2010년 10월 17일 중앙일보 일요판-임현욱 기자>
‘도롱뇽 소송’을 기억하십니까. 2003년 시작한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구간 원효터널 공사를 둘러싼 정부와 환경단체 간의 소송입니다.
천성산 내원사의 지율 스님과 환경단체가 터널 공사를 하면 산 정상 인근의 늪이 말라 생태계가 파괴된다며 ‘공사 착공 금지 가처분소송’을 냈습니다. 소송 때문에 터널 공사는 6개월간 중단됐습니다. 공사는 2006년 대법원이 소송 기각 및 각하 결정을 내린 뒤에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구간이 다음 달 1일 개통합니다. 중앙SUNDAY가 7~8일 생태 전문가와 함께 개통을 앞둔 천성산 원효터널 위에 있는 밀밭늪과 화엄늪의 생태계를 둘러봤습니다. 천성산 자락에 사는 주민도 만나 봤습니다. 화엄늪 관리자에게서는 “봄에는 웅덩이마다 도롱뇽과 알 천지였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날씨가 추워 도롱뇽은 벌써 겨울잠 자러 들어 갔을 거예요"(한국 양서 파충류 생태연구소 심재한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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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斷食'의 부메랑
‘決死의 외침’ 대부분은 위선 아니면 기만
<2005년 2월15일 뉴스앤뉴스- 조 규석/언론인>
한국 노동운동사에 영원히 기록될 전태일을 우리가 '아름다운 청년'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 죽음의 순수성이다. 분신 당시의 나이 겨우 22세. 그는 항상 배움에 목말라 했고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고통 받는 동료 노동자들의 불행을 괴로워했다. 결국 그는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며 스스로를 불태워 목숨을 끊었다. 죽음의 결행이었다.
그는 결코 죽기 전에 세상을 향해 '죽음을 무릅쓰겠다' '생명을 걸겠다'는 식의 '엄포'를 하지 않았다. '결사(決死) 투쟁'을 내건 일이 없었던 것이다. 비유하면 죽음을 놓고 사회와 '흥정'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는 그처럼 순수하게 살았고 순수하게 죽음을 택했다. 전태일은 그렇게 해서 민권 변화사의 저술과, 그것을 소재로 만들어 진 영화를 통해 아름다운 청년으로 살아났다.
어떤 개인의 자결(自決)이 사회적 대의(大義)를 위한 순절(殉節)로 되기 위해서는 당대의 상황이 자결이라는 최후 선택이외에는 다른 방식이 없을 만큼 억압적이어야 한다. 전태일의 시대가 그랬다. 그가 목숨을 내놓겠다는 각오 아래 단식 투쟁을 벌였다 한들 그것이 사회적으로 주목받을 턱이 없었고 공권력이 그런 투쟁자체를 용납하지도 않았을, 엄혹한 권위주의 시대였다. 그는 죽음으로 발언할 수밖에 없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이 순절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그 같은 시대 배경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말 그대로 민주화 시대다. 어떤 첨예한 사회 이슈에 대해서도 개인의 소신과 주장을 전파할 수 있는 길이 거의 무제한으로 열려 있고 그것을 얼마든지 집단화 할 수도 있다. 법과 제도가 그 같은 절차를 보장-보호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소신과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음은 물론이다. 말하자면 개인이 어떤 사회적 과제에 대해 생명까지 내놓고 투쟁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의미다.
지율 스님의 '100일 단식'으로 초래된 사회적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지율스님에 대해서는 물론 조계종 전체를 비판하는 누리꾼(네티즌)들의 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움과 네이버 등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안티 지율'을 표방하는 사이트가 8개나 등장해 2000여명이 회원으로 가입했고 정부와 지율 스님간의 합의 무효화를 위한 서명운동도 전개되고 있는 정도다. 천성산 터널을 '결사반대'하기 위해 벌인 단식투쟁의 ,부메랑'이 그렇게 날카롭다.
따지고 보면 단식은,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생명을 거는 일이다. 말 그대로 결사행위다. 더구나 100일 단식이라면 생명을 유지했다는 자체가 기적일 만큼 보통 의지로 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그런 투쟁방식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단식의 목적이나 단식을 통해 얻어낸 결과가 옳은가 그른가를 따져보기 앞서 목숨을 거는, 그 결사행위의 순수성에 먼저 의문을 제기한다.
오늘과 같이 열린 시대에 벌이는 '결사투쟁'은 그 명분에 관계없이 무모한 선택이 되기 십상이다. 목적의 사회적 효율성은 대체로 추상적인데 비해 개인의 희생은 아주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지율스님의 100일 단식과 천성산 터널공사가 바로 전형적 사례다. 만일 지율스님의 단식이 종내는 죽음으로 이어졌다면 자연 보호라는 추상적 기대 때문에 구체적인 생명하나가 희생된 결과가 됐을 터이다.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가 바로 환경운동의 철학적 명제일 텐데도 말이다.환경보호를 위한 결사반대는 그렇게 목적과 결과가 서로 배치한다. 모순이다.
물론 중요한 소득 한 가지는 있는 셈이다. 단식 등의 극한투쟁은 이제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아예 묵살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당사자와 불교계를 향한 '단식부메랑'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더구나 100일 단식이 사실이었는가도 명료하게 입증되지 않은 상황 아닌가.
결국 분명한 것은, 목숨을 내 걸었다는 것 자체가 이 시대에는 비순수로 비치게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사회의 시각은 이미 단식 같은 투쟁방식에 대해 싸늘해지는 추세가 뚜렷하다. 정치권에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정략적 목적의 단식에 대해서는 특히 그럴 것이다. 걸핏하면 결사투쟁을 외치는 노동운동에도 마찬가지다. 환경운동도 예외일수 없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간에 목숨을 걸겠다는 다짐이나 외침은 대부분 위선 아니면 기만이라는 걸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아차린 것이다.
첫댓글 참! 지율스님은 입적하셨나?
촌에 살다보니 과문해서....
燃獄같은? 이 이승에 아직 건재하십니다. 이번에 모처럼 중앙일보의 전화 인터뷰에도 응하셨습니다. 인터뷰에서 스님 말씀하시기를 "천성산 터널 개통하면 내가 할 일 많을 것"이라네요.요즈음은 4대강 관련 일(반대)를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참고로 덧붙이면 천성산 터널'결사 반대' 때 지율스님의 단식일수는 4차례(2003~2005년)에 걸쳐 총 241일이라고 하네요.여성 분으로서 정말 대단한 ! 기개와 인내력입니다. 그건 그렇고 rower님 강원도 생활이 어떠십니까.
지금의 삼청동은 옛날 같지 않더구만. 이곳은 거기 보다는 늙은이 살기에 조금 낳은 것 같네. 앞메, 뒷메사이 골바람이 아침저녘으로 서늘해지구 있네. 환절기 건강 조심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