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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문학제'(2017년 4월 27일, 교보생명빌딩 23층 세미나실)
이기형 시의 통일 지향과 전망
맹문재
1.
이기형 시인이 부른 통일의 노래는 한국 시문학사에서 주목할 만한 의의를 지닌다. 통일 문제를 적극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추구해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를 각성시키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어느덧 우리 사회는 통일에 대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통일이 되면 좋겠지만 안 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기형 시인은 이와 같은 상황을 “통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늦게 되어도 좋고 등 통일에 대한 대명제가 사람들 마음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어요. 언론도 그렇고 작가들도 그런 것 같아요.”라고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다. 따라서 시인이 통일을 지향하면서 쓴 시들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이고 시대적이고 그리고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다.
실제로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이 조사한 『2016 통일의식조사』에 따르면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국민들은 ‘매우 필요하다’ 19.5%, ‘약간 필요하다’ 33.9%로 응답해 전체의 53.4%가 원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조사가 처음 시작된 2007에는 ‘매우 필요하다’ 34.4%, ‘약간 필요하다’ 29.4로 응답해 전체의 63.8%가 통일의 필요성을 나타냈는데, 지속적으로 감소해 현재는 국민의 절반 정도만 원하고 있다.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의지와 열망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특히 40대는 55%, 50대는 65.0%, 60대는 74.0%로 2007년의 조사 이후 큰 변화가 없는 데 비해 20대 및 30대의 경우는 7~14%까지 낮아지고 있어 통일이 미래의 세대까지 감당해야 할 민족의 과제인 점을 생각하면 우려된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부른 이기형 시인의 노래들은 큰 의의를 갖는다. 시인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이며 빨치산 투쟁이며 민주화운동 등도 통일과 연관시켜 노래했다. 통일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심화시키고 확장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시들은 우리의 분단 상황을 인식하고 극복 방안을 마련하는 데 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다.
2.
정치판은
헛말의 향연, 이전투구로
한 해를 지새운다
언론판은
정작 보도할 것, 비판할 것엔
입을 다물고
목표를 잃은 채
헛소리로 싸움만 부추겼다
광장엔 허깨비놀음이 벌어지고
진실의 함성은 뒷마당에서 몸부림쳤다
정치판도
언론판도
무통증 중환자
고름바다에서 희희낙락한다
우리 정치판이
자주의 광장으로 꿋꿋이 돌아서고
우리 언론판이
진정 사회의 목탁으로 거듭날 때
겨레의 앞길엔 훈풍이 일어
통일의 함성이
평화의 노래가
삼천리에 은은하리라
―「무통증 중환자」 전문
자본주의 사회에 종속된 “정치판”이며 “언론판” 등을 “무통증 중환자”라고 작품의 화자가 비판한 것은 날카롭고도 정확하다. 실제로 기업의 경영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의 정책이나 언론의 보도 등 어느 하나 “무통증 중환자”가 아닌 것이 없다.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불평등한 결과를 긍정하기 때문에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판은/헛말의 향연, 이전투구로/한 해를 지새”울 뿐이고, “언론판은/정작 보도할 것, 비판할 것엔/입을 다물고/목표를 잃은 채/헛소리로 싸움만 부추”기고 있다. 정치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기보다 자본주의의 조종을 받는 선거를 위해 존재할 뿐이고, 언론은 보도와 비판을 위해 존재하기보다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지침을 전달하기에 바쁘다. 모두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데 함몰되어 사회적 책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를 극단적으로 긍정하는 이와 같은 자본주의 상황에서 “통일의 함성이/평화의 노래가/삼천리에 은은하”게 들리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분단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와 인식이 필요하다.
딘 러스크와 본 스틸웰이라는 미국 사람을 아십니까?
38분단선을 입안한 미국무성의 철부지입니다
타의에 의한 조국 분단
1945년 8월 15일 정오 해방의 인경 소리와 동시에 분류 노도처럼 터진 4천만 형제의 자의에 의해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공산당’을 누가 짓부숴 버렸는지 아십니까?
미군과 친일경찰과 테러단 들입니다
투옥과
고문과
학살의 연속
순전히 생사람을 잡았지요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토의하던 미소공동위원회를 누가 깨뜨렸는지 아십니까?
일본 천황에 굽실굽실 절하던 친일파들과 미국 달러 꾐에 군침이 돈 친미파들이 반탁이라는 구실을 들고 짓부쉈습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井邑發言)을 아십니까?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공언했습니다
자의에 의한 조국 분단
제주도 4·3봉기
14연대의 여순 항거
6·25의 참사가 교묘하게 빚어졌고
지리산의 피어린 항쟁을 죽음으로 몰아
분단선은 저들의 속셈대로 더욱 굳어졌습니다
분단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라도에도 경상도에도 남한 어디에도 있었습니다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칼끝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독재자들은 애당초 총칼로 군림했습니다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귀를 틀어막았습니다
눈을 틀어막았습니다
벌벌 떨어야만 했습니다
굽실굽실 예예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저
1960년의 4·19의 함성
1979년의 부마항쟁의 불기둥
1980년의 광주항쟁의 용광로
쓰라림과 아픔과 뼈저림과 비통의 절정
젊은 꽃들의 잇닿는 투신, 분신의 항거
1987년 6월에 터진 분노한 민중들의 활화산
드디어,
미군은 물러가라고 외친다 (하략)
―「분단사」 전문
1945년 8월 6일과 8일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결과 도시 전체가 잿더미로 변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8일 소련군이 대일전에 참가했다.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한반도에 진격해 13일 청진에 상륙했다. 일본은 15일 12시 쇼와 히로히토(昭和 裕仁) 천황이 모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전시 상황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공격에서 군사적 점령과 일본군의 무장해제로 전략을 수정했다. 이 작업에 참가한 인물이 국무성의 러스크(Dean Rusk) 대령이었다. 러스크는 소련군이 이미 한반도 동북에 진입해 있는 상황인데 비해 미국군은 6백마일 떨어진 오키나와 및 그보다 멀리 떨어진 필리핀에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한국의 수도를 포함시켜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38도선의 분할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권고했다. 트루먼의 명령을 받은 맥아더(Douglass MacArthur) 태평양 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은 9월 2일 일본 항복의 공식 서명과 함께 한반도에서 38도선 이북의 일본군 항복은 소련이, 이남의 일본군 항복은 미국이 접수한다고 포고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남북 분단은 연합국의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처리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은 원자폭탄의 성공을 예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소련군의 한반도 참전을 권장했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할 정도로 한국 문제를 양보했다. 또한 미국은 세계대전 중에 형성된 소련과의 협조가 전후에도 계속되리라고 착각했다. 좀 더 단기적이고 군사적인 차원을 넘어 장기적인 차원에서 한국 문제를 접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위의 작품의 화자는 미국의 군사적 편의주의에 입각해 한국을 분단시킨 사실을 “딘 러스크와 본 스틸웰이라는 미국 사람을 아십니까?/38분단선을 입안한 미국무성의 철부지입니다”라고 고발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분단 결정으로 인해 “4천만 형제의 자의에 의해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공산당’”은 “미군과 친일 경찰과 테러단 들”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다. “조선 임시정부 수립을 토의하던 미소공동위원회”도 “일본 천황에 굽실굽실 절하던 친일파들과 미국 달러 꾐에 군침이 돈 친미파들”에 의해 무너졌다. 그리고 급기야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공언했”다. 결국 “타의에 의한 조국 분단”이 “자의에 의한 조국 분단”의 비극을 가져온 것이다. “제주도 4·3봉기/14연대의 여순 항거/6·25의 참사가 교묘하게 빚어졌고/지리산의 피어린 항쟁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을 뿐만 아니라 “분단선은 저들의 속셈대로 더욱 굳어”졌다. 그리하여 “분단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전라도에도 경상도에도 남한 어디에도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한국의 민중은 결코 죽지 않았다고 작품의 화자는 노래한다. “1960년의 4·19의 함성/1979년의 부마항쟁의 불기둥/1980년의 광주항쟁의 용광로”를 그 예로 들고 있다. “젊은 꽃들의 잇닿는 투신, 분신의 항거/1987년 6월에 터진 분노한 민중들의 활화산”도 내세우고 있다. 비록 외세에 의해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지만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고 있다고, “드디어,/미군은 물러가라고 외친다”고 노래하는 것이다. “군말 말고, 지금 당장/미군은 물러가야 합니다”(「삼천리 통일공화국」)라는 이 의식은 깊은 고찰이 요구된다.
3.
날 건드리지 마
내 여든여섯 쭈그렁 힘줄도 터질 것만 같아
첫사랑이 깨지던 그날도 이렇진 않았어
못 견딜 그리움 매운 분노 모진 슬픔
끝내는 꿈의 설렘
한 핏줄 형제가 바로 저긴데
쉰여덟 해나 지구촌 밖 헤어진 삶이라니
쓸개 창자 다 썩어 문드러진 놈아, 그래도 네가
부끄럼 없이 신사랍시고 고급 양복에 넥타일 매고
점잖스레 싸다닌다냐
정치가 어쩌니 경제가 이러니 예술이 어쩌구 저쩌구냐
혹독 세상의 원흉은, 바로
낯선 안방 불청객이다 생사람 잡는 법망이다
썩들 나가라, 단 한마디라도 소리친 적이 있나
당장 없애라, 단 한마디라도 소리친 적이 있나
오늘 우리 땅에 언론인이 있는가 애국자가 있는가
본시 잘났건만 왜 이렇듯 지지리도 못나게 추락했나
긴 피세월 반천반민(反天反民) 교육 탓이다
하루 바삐 위천위민(爲天爲民)으로
상생하고 홍익인간으로 돌아가야 하느니
가치 척도가 뒤바뀐 이 땅 분통이 터져 어지러워
6·15 큰울림 누가 막아 너나 하나 되는 위대한 꿈이여
뒷산 앞들 오월의 푸르름 가슴 가득히 안고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백두산 높이 솟았으면
솟았으면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전문
작품의 화자는 “한 핏줄 형제가 바로 저긴데/쉰여덟 해나 지구촌 밖 헤어진 삶”을 살아온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통일을 희망하고 있다. 그리하여 “날 건드리지 마/내 여든여섯 쭈그렁 힘줄도 터질 것만 같”다고 외친다. “못 견딜 그리움 매운 분노 모진 슬픔/끝내는 꿈의 설렘”으로 노래하겠다는 것이다. 화자는 그 일환으로 통일을 가로막는 상대에게 대항하고 있다. “쉰여덟 해”나 통일을 기다렸지만 분단 체제의 심화로 인해 가능성이 줄어들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맞서는 것이다. 그리하여 “쓸개 창자 다 썩어 문드러진 놈아, 그래도 네가/부끄럼 없이 신사랍시고 고급 양복에 넥타일 매고/점잖스레 싸다닌다냐”라고 나무란다. “혹독 세상의 원흉은, 바로/낯선 안방 불청객”인데, “썩들 나가라, 단 한마디라도 소리친 적” 없고, “당장 없애라, 단 한마디라도 소리친 적” 없다고 책망도 한다.
작품의 화자가 나무라는 상대는 당연히 친미주의자다. 그는 식민지 속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미국이 주도하는 정책에 순응하고 있다. 화자는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서 “긴 피세월 반천반민(反天反民) 교육 탓”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국민 대신 미국을 섬기는 교육을 받았기에 민족의 통일을 원하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고 있다고 책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자는 “6·15 큰울림”이 필요하다고 제시하고 있다.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방이 정상회담을 통해 발표한 6․15남북공동선언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 통일을 향한 인식을 함께한 이 공동선언의 중심 내용은 우리가 주인이 되어 통일을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산가족, 비전향 장기수 등에 대한 인도적 문제 해결을 비롯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 활성화로 서로의 신뢰를 쌓아가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화자는 “한 핏줄 형제가 바로 조긴데/쉰여덟 해나 지구촌 밖 헤어진 삶이”이었기에 억울하지만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세는 다음의 작품에서도 여실하다.
한 독지가가 한 젊은이를
10년간 도와줬는데도
그가 자립하지 못했다면
독지가는 쓸모없는 자식이라고 그를 포기할 것이다
한 부자 나라가
한 작은 나라를
10년간이 아닌 무려 45년간이나
군대까지 주둔시켜 가면서 도와줬는데도
작은 나라는 여태 자립을 못했다
그런데 그 부자 나라가
작은 나라를 포기하지 않는다
뿐인가, 작은 나라도
끝까지 오래오래 더 도와달라고 죽자꾸나 매달린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는
육, 해, 공 입체작전으로 짓부순다
학생들의 싱싱한 목소리는 최루탄으로 잠재워 버린다
교도소마다 자주와 민주주의와 통일을 외치는
젊은이들의 함성으로 꽉 찼다
어머님,
이런 불행한 아우성의 남녘에
저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어머님을 못 뵈온 지도
손 꼽아보니 벌써 반세기가 되어갑니다 (하략)
―「삼천리 통일공화국」 전문
1943년 11월 27일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루스벨트, 처칠, 장개석이 회담을 가진 뒤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일본은 1914년 이후 태평양 지역에서 탈취한 모든 섬들을 반환해야 하며 만주, 대만, 팽호(澎湖) 군도를 중국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국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자주 독립을 잠정적으로 유보했다. 이러한 결정은 한국 문제에 대한 루스벨트의 신탁통치안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 신탁통치안은 11월 28일 이란의 테헤란에서 열린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의 회담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루스벨트는 한국이 완전한 독립을 얻기 전에 약 40년 간의 수습기간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내자 스탈린도 동의했다. 이와 같은 논의는 1945년 2월 우크라이나의 얄타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회담에서도 계속되었다. 루스벨트는 영국, 중국, 소련의 대표로 구성된 한국 신탁통치안을 제안하자 외국군이 한국에 주둔하지 않는 조건으로 스탈린이 동의했다. 일본이 거의 패망하고 있는 상황에서 루즈벨트의 재촉에 의해 소련군의 극동전 참가가 약속된 이 회담은 한국에 대한 소련의 이익을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 1945년 7월 연합국의 마지막 회의였던 독일의 포츠담 회담에서도 미국, 영국, 소련이 한국의 장래에 대해 논의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도 명시적인 설계를 마련하지 못했다. 연합국은 카이로선언 이후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약속했지만 그들이 합의했던 신탁통치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특히 미국의 경우 신탁통치를 제안했으면서도 구체적으로 합의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스스로 불러들인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입한 것을 본 뒤 38선의 분할을 결정했다. 분단 이후에도 미국 정부와 서울에 주둔한 미군정 간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혼란이 지속되어 통일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한국의 분단에는 소련의 책임 또한 묻지 않을 수 없다. 소련은 한국의 통일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24일 평양에 입성한 뒤 북한의 소비에트화를 추구했다. 소련군이 진주하기 이전에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들이 실질적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소련은 군사력을 동원해 제거했다. 그 대신 김일성을 앞세운 공산당 단독 정권 수립을 통해 소비에트화를 이루었다. 미국은 한반도의 미소 점령정책에 의해 분단이 고정되는 것을 타결하려고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영국, 소련과 함께 회의를 가졌다. 그 결과 한국 민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미소 점령군 사령부의 대표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적 자치의 발전 및 국가적 독립의 달성을 위해 협력 원조한다고 합의했다. 그렇지만 이 협정은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은 동구의 문제를 둘러싸고 불화가 고조되고 있었고, 미국은 자신의 지지 세력인 우익 진영이 신탁통치를 격렬하게 반대하자 남한에서의 탁치안을 포기한 반면 소련은 지지 세력의 확보를 위해 친탁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46년 1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의 예비회담, 3월 20일 1차 미소공동위원회, 1947년 5월 21일 2차미소공동위원회 등이 개최되었지만 결렬될 수밖에 없었다.
위의 작품은 미국에 의한 한국의 신탁통치 상황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10년간이 아닌 무려 45년간이나/군대까지 주둔시켜 가면서 도와”주었지만 “작은 나라는 여태 자립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부자 나라가/작은 나라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등 다양한 차원에서 한국으로부터의 이익을 포기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한국 내의 친미주의자들이 미국에 “끝까지 오래오래 더 도와달라고 죽자꾸나 매달”리고 있기에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친미주의자들은 자신의 정책에 비판하거나 동의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탄압한다. 가령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는/육, 해, 공 입체작전으로 짓부”수고 “학생들의 싱싱한 목소리는 최루탄으로 잠재워 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도소마다 자주와 민주주의와 통일을 외치는/젊은이들의 함성으로 꽉” 차 있다.
작품의 화자는 그 극복 방안으로 이산가족인 “어머니”를 찾는다. “어머님,/이런 불행한 아우성의 남녘에/저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어머님을 못 뵈온 지도/손 꼽아보니 벌써 반세기가 되어갑니다”라고 현재의 안타까운 상황을 호소하며, 비록 통일의 전망이 보이지 않지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옷깃을 여미고 바로 앉아/빼앗긴 세월을 목 놓아 부르며/조국 통일의 시를 엮”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미군은 물러가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어머님을 덥석 업고/삼천리를 춤추며 돌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우리가 통일을 이룩해야 하는 이유는 당위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이 있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이라거나 이산가족의 고통 해소를 위해서라면 전자에, 전쟁의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서라거나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라면 후자에 해당된다. 2016년 현재 국민들 중에서 통일이 되어야 하는 이유로 ‘같은 민족이니까’로 응답한 경우는 38.6%, ‘이산가족의 고통을 해결해주기 위해’는 11.8%로 전체 50.4%가 당위적인 측면에서 통일을 바라고 있다. 이에 비해 ‘전쟁 위협을 없애기 위해’로 응답한 경우는 29.8%, ‘한국이 보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는 14.2%로 전체 44.0%가 현실적인 측면에서 통일을 바라고 있다. 이외에 ‘북한 주민도 잘살 수 있도록’에 응답한 경우는 5.0%인데, 당위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보면 비록 2007년 ‘같은 민족이니까’로 응답한 경우가 50.7%였는데 계속 감소하고 있지만 여전히 당위적인 차원의 통일 담론이 우세하다고 볼 수 있다. ‘전쟁 위협을 없애기 위해’는 2007년 19.2%에서 계속 증가하고 있는데, 지난 10년간 보수적인 정권이 북한의 도발에 대응해 제재를 강화하거나 남북관계를 단절시켜 긴장감이 고조된 면이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차원의 통일 담론을 포함하는 당위적인 차원의 통일 담론을 통일 정책의 방향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
역마다 백두산 표를 안 팔아
나만 미쳤다고 쑥떡인다
과연 누가 미쳤나
흑발이 백발이 되도록
귀향 표를 살려는 놈이 미쳤나
기어이 못 팔게 하는 놈이 미쳤나
그럼, 나는 간다
미풍 같은 요통엔 뻔질나게 병원을 드나들어도
조국의 허리통엔 반백 년 동안 줄곧 칼질만 해대는
저놈을 메다꽂고
걸어서라도 날아서라도
내 고향이 옛날처럼 날 알아보게시리
하얀 머리는 까맣게 물들이고
얼굴 주름은 펴고
아리고 찢어지는 가슴 쓰다듬으며 나는 간다
걸어서라도 날아서라도
―「나는 간다」 전문
“역마다 백두산 표를 안” 파는 것이 엄연한 오늘의 분단 상황이다. 미국과 소련이 고착화시켜 놓은 38선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작품의 화자는 백두산으로 가려고, 다시 말해 분단된 현실을 넘어서려고 한다. 이에 분단 상황을 옹호하거나 방관하는 사람들이 “미쳤다고 쑥떡인다”. 화자는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과연 누가 미쳤나/흑발이 백발이 되도록/귀향 표를 살려는 놈이 미쳤나” 아니면 “기어이 못 팔게 하는 놈이 미쳤나”라고 반문하며 맞선다. 화자의 이러한 자세는 주목된다. 원래부터 한국은 같은 민족의 나라였기 때문에 못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나는 간다”라고 당차게 나선다. “아리고 찢어지는 가슴 쓰다듬으며”, 즉 분단으로 인해 고향을 가지 못한 슬픔과 안타까움과 분노 등을 풀고 가겠다는 것이다. 화자의 그 의지는 “걸어서라도 날아서라도” 가겠다고 할 정도로 강하다. 그만큼 “고향이 옛날처럼 날 알아보게” 하고 싶다는 희망은 절실한 것이다.
이와 같은 면은 “영하 10도 맵찬 거리를 걸어도/난 춥지 않다/통일의 길목에서 네가 풍겨 보내는 열도로/미수 나이는 도망갔다”(「들불」)라거나, “끝은 곧 또 다른 시작/나는 뒤돌아 달린다/북단을 향해/달림을 시작했다”(「토말(土末)에서」)라는 데서도 볼 수 있다. “돌아가고야 말리//내 고향으로/내 옛집으로”(「임진강」)라거나, “첫째도 통일 둘째도 통일 셋째도 통일입니다./남북 7천만이 굳게 손잡고 어깨 겯고 나아갑시다”(「분단 악귀 물렀거라」)라는 노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통일과 무관한 시를/나는 시로 인정하지 않는다/우리 민족 최고의 과제는 통일이 아닌가/겨레는/시대는/통일의 절창을/요구한다/분단이 종언을 고할 때까지/나는 나이에 관계없이 죽지 않고/시필(詩筆)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여든네 살의 선언」)라는 다짐은 결연하기만 하다.
한국의 분단은 강대국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통일을 추구하는데도 그들의 이해와 협조가 필요하다. 한국의 주위에 있는 일본, 미국, 중국, 소련 등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다. 통일된 한국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면적은 세계 190개 국가 중에서 78위, 인구는 12위, 국민총생산은 11위를 점하게 되며, 군사력도 주변국들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따라서 주변국들은 한국이 각국에 적대적인 세력으로 발전하거나 동북아시아를 지배하는 강국으로 부상할 가능성을 우려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면을 인지하고 남북 간의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하여 평화공존을 제도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주변 국가들이 한국의 통일에 관한 당위성과 불가피성을 인정하도록 사실상의 통일 상태를 구현해야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통일에 대해 적극성을 띠어야 한다. 비록 한국의 분단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비롯된 것이지만, 우리 스스로의 역량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해방기는 미소가 냉전체제로 고착화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단결했으면 통일을 이루었을 것이다. 60년 이상 분단 체제가 지속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분단된 현재의 상황을 안정적이라거나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안일함을 반성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우리의 통일이 임박하다거나 어느 날 도둑처럼 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정치인들이 국민을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 2016년 현재 국민들 중에서 통일이 ‘5년 이내’에 가능하다고 응답한 경우는 4.0%, ‘10년 이내’에 가능하다고 응답한 경우는 14%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20년 이내’에 가능하다고 응답한 경우는 25.1%, ‘30년 이내’는 15.2%, ‘30년 이상’은 17.9%이다.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응답한 경우도 24.4%나 된다. 따라서 우리의 통일 정책은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단기적인 전략을 마련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일관되게 추진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저는 통일되기 전에는 죽지 않겠다고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어요. 사천만 민족 모두가 저와 같이 통일을 원하고 있다면 더욱 빨리 이루어지겠지요. (중략) 일상생활이 통일과 연관되어야 합니다.”라는 자세로 통일을 노래한 이기형의 시들은 주목된다. 통일을 원하는 의식이 점점 감소하는 우리 사회를 반성시키는 동시에 통일의 필요성을 자각시키는 것이다. 통일은 우리에게 경제적 면을 비롯해 많은 이익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민족의 분단을 해결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기에 당위적인 차원에서도 필요한 과제이다.
맹문재(孟文在)
시론 및 평론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지식인 시의 대상애』『현대시의 성숙과 지향』『시학의 변주』『만인보의 시학』『여성시의 대문자』『여성성의 시론』, 시집으로 『먼길을 움직인다』『물고기에게 배우다』『책이 무거운 이유』『사과를 내밀다』『기룬 어린 양들』 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