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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 묘(지학순주교 묘 포함)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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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신부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
배론성지 관내 약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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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舟論)은 치악산 동남 기슭에 우뚝 솟아 있는 구학산(985m)과 백운산(582m)의 연봉이 둘러 싼 험준한 계곡 양쪽의 산골 마을로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리어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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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론성지내 잔디밭 모습 |
▲ 우측 권역 입구에 있는 무명 순교자의 묘 |
이곳은 오직 하느님만을 선택한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화전과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 나간 교우촌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 전에 배론은 6개 마을로, 즉 아랫배론, 중땀배론, 웃배론, 점촌배론, 박달나무골, 비득재 마을이 있었으며, 70여호가 있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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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성당 |
▲ 순교자의 집 |
배론성지는 1801년 황사영 순교자가 머물며 백서를 썼고, 1855년에는 사제양성을 위한 성 요셉신학교가 세워져 1866까지 신학교육이이루어졌습니다. 1861년에 선종하신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님의 무덤이 있는 곳이며, 또한 장주기 성인을 비롯한 여러 명의 순교자들이 살던 거룩한 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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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사영 순교 헌양탑과 황사영 동상 |
▲ 헌양탑에서 바라 본 신학당 방향 모습 |
황사영은 처삼촌 정약종이 들려준 천주학에 매료되어 1790년에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고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한 후 알렉시오(Alexius) 라는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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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2003년)된 배론 신학교 모습 |
▲ 옹기 가마굴 |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최인길의 집에서 주 신부를 만나고부터는 벼슬길을 버리고 전교사업에 힘을 기울인다. 1798년 서울로 이주하여 살면서 신자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한문으로 된 교회서적을 번역하는 등 활동적인 교회 지도자로 부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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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사영 백서 토굴 입구와 내부 모습(토굴은 1988년 서울대 이원순 교수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박해를 피해 배론으로 피신하여 황심, 김한빈, 송재기로부터 박해의 진행사항을 들었고 교회의 재건방안을 생각하거나 글 쓰는 일로 소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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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론 신학교 우측에서 바라 본 모습 |
그 해 8월 23일 황심으로부터 박해의 소식과 주문모 신부의 순교사실을 듣고는 박해의 경과와 교회 재건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비단에 적어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려고 백서를 쓰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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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론 신학교 내부 모습 |
▲ 배론 신학교 앞에 전시된 사진 |
황심이 9월15일 체포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되었으며 백서는 압수된다. 황사영과 관련자들이 순교한 후 백서 사건은 종료되지만 박해로 인해 많은 순교자가 생겨난다. 하지만 한번 전파된 천주교 신앙의 불꽃은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빠르고 더 넓게 온 나라 구석구석으로 전파되어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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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당터 표지석 |
▲ 묘역 초입에 있는 최양업신부 동상 |
지학순주교 묘역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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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직자 묘역(위 사진 우측에서 3번째가 지학순주교 묘) 전경 |
지학순(1921∼1993). 초대 원주(原州) 교구장. 주교. 세례명 다니엘. 평남 중화군 중화면 청학리에서 출생. 1934년 중화본당 주임 콜먼(Joseph Coleman) 신부에게 영세, 입교하였다. 1935년 중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동성상업학교 을조(東星商業學校乙組)[소신학교]에 입학했으나 1940년 병으로 중퇴한 후 1943년 다시 함남 덕원(德源)신학교에 편입, 중등과·고등과·철학과를 거쳐 1948년 신학과에 진학하였다.
1949년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덕원신학교가 폐쇄되자 월남을 시도했다가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이해 말 윤공희 대주교(당시 신학생)와 함께 월남에 성공, 성신대학(聖神大學)[현 가톨릭大學]에 편입했고 6.25 동란 중 국군에 지원입대하여 전투에 참가, 1952년 2월 횡성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곧 제대하고 가톨릭대학에 복학, 1952년 12월 1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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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학순주교 묘역 전경 |
서품 후 거제도 포로수용소 군종신부, 1953년 청주 복문로본당 보좌신부를 지내고 1956년 로마 프로파간다대학에 유학, 동대학에서 교회법 석사·교회법 박사 학위를 차례로 취득하고 1959년 귀국했고, 귀국 후 청주교구장 비서, 1962년 부산 초장동본당 주임신부를 거쳐 1965년 원주교구의 창설과 함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해 6월 29일 주교로 성성(聖成)되었다.
교구장 부임 후 원주교구의 교세 신장과 발전에 주력, 많은 교육·사회복지기관을 설립하고 신협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1970년대 초반부터 한국의 사회정의·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회 위원장, 정의평화위원회 총재, 한국노동교육협의회 회장, 한국 교회사회선교협의회 회장을 역임했고 이러한 사회정의·인권·노동 문제에 대한 강경한 발언과 투철한 실천으로 인해 1974년 내란선동과 긴급조치 1.4호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 구속 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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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에서 바라 본 지학순주교 묘 |
▲ 성직자 묘역 좌측에서 바라 본 모습 |
원주 교구장으로서 원주교구의 사목과 행정을 총괄하였고, 그밖에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 위원, 주교회의 인성회 담당주교, 평신도사도직 전국 단체, 한국 가톨릭 나사업가연합회 담당주교로 활동하였다.
주요저서로는 <내가 겪은 공산주의>(경향잡지, 제62권 제1호 1970. 1월호∼제64권 제3호 1972년 3월호), ≪정의가 강물처럼≫(형성사, 1983) 등이 있다. 지학순 주교는 1993년 3월 12일 성모병원에서 선종하여, 제천 배론성지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
최양업신부 묘역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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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직자 묘역에서 계단을 따라서 조금만 올라가면 최양업신부 묘역이 있습니다. |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 1821-1861년)은 두 번째 한국인 사제로서, 세례명은 토마스. 양업(良業)은 아명(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일명 대래골, 현 靑陽郡 化成面 禮岩里]에서 출생하였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崔京煥)과 이성례(李聖禮)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이존창(李存昌)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했었다. 본시 서울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洪州)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간).
다락골에서 점차 생활이 넉넉해지고 또 외교인 친척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자 최경환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형제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같이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3년 만에 천주교 집안인 것이 탄로되어 서울을 떠나야 했는데 이 때 최경환은 과천(果川)의 수리산 뒤뜸이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그는 산지를 개간하며 연명해 나아갔다. 최양업은 16살이 되는 해에 이 곳 수리산에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836년초 입국에 성공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즉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했는데, 맨 먼저 최양업이 발탁되었고, 이어 최방제(崔方濟)와 김대건이 발탁되었다. 최양업 등 세 소년은 서울의 모방 신부 곁에서 라틴어를 배우며 출발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모방 신부는 그들을 국외로 내보내어 성직자로 양성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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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신부 묘역 전경 |
세 소년은 마침내 그해 12월 3일 마카오로 가기 위해 의주(義州)를 향해 서울을 떠났다. 이들은 출발에 앞서 그 전날 모방 신부 앞에서 소명(召命)에 충실하고 장상들에게 순종할 것을 선서하였다.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유지 교우들이 그들을 동행했는데 이들은 세 소년을 변문(邊門)까지 인도하고 거기서 새 선교사를 맞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일행이 12월 28일 변문에 도착한 후, 세 소년은 중국인 안내원을 따라 중국 대륙을 횡단, 이듬해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경리부 책임자 르그레주아(Legregeois) 신부는 경리부 안에 임시로 조선신학교를 세워 조선인 신학생 3명을 교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르그레주아 신부 책임 하에 경리부 차장 리부아(Libois) 신부가 주로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후에 조선 선교사로 부임한 데플레슈, 메스트르(Maistre)와 베르뇌(Berneux) 신부 등 선교사들이 마카오에 체류하는 기회에 그들의 교육을 돕기도 하였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아편전쟁을 전후해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으로 인하여 두 번이나 마닐라로 피난해야 했고, 또 최방제와 1년여 만에 사별(死別)하는 등 그들의 유학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나 그래도 1842년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1842년 그들은 아직 수학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실(Cecille) 함장이 마카오의 경리부를 찾아와 조선원정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1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줄 것을 요청했고, 경리부장 리부아 신부는(그간 르그레주아 신부는 파리본부로 전임되었다) 벌써 몇 년째 조선교회와 소식이 끊겨져 있었으므로 세실의 요청을 하느님의 섭리처럼 생각하고 쾌락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의 종말이 가까워지자 프랑스 정부는 중국에서 어떤 이득을 얻어 보려는 심산에서 군함 2척, 즉 에리곤호와 파브리트호를 파견했었는데 세실은 에리곤호의 함장이었다. 리브와 신부는 건강이 약한 김대건을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먼저 에리곤호에 태워 보냈다(2월 15일). 한편 최양업은 파브리트호로 떠나게 되어 있었는데 입항(入港)이 늦어져 7월 17일에야 요동(遼東)교구 선교사 브뤼니에르(Bruniere) 신부와 같이 마카오를 출항하였다.
8월 23일 오송(吳淞)에 이르러 최양업은 먼저 떠난 김대건과 만났다. 그런데 세실은 남경조약이 체결되자(8월 29일) 더 이상 북상(北上)하기를 포기했으므로 두 신학생은 프랑스 군함에서 하선하고 다른 방법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행히 강남(江南)교구장의 주선으로 중국배 한 척을 얻어 우선 요동을 떠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배로 10월 2일 상해(上海)를 떠나 10월 23일 요동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그 곳에 남아 입국을 시도하였고, 최양업은 몽고땅 소팔가자(小八家子)로 가서 페레올(Ferreol, 高) 신부와 합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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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에는 관명(冠名)인 정구(鼎九)로 적혀 있습니다. |
▲ 최양업신부 묘역 뒷편에서 바라 본 모습 |
최양업은 소팔자가(小八家子) 교우촌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하였다. 한편 김대건은 입국에 실패했으나 그간의 조선교회 소식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839년 기해박해로 3명의 선교사를 위시하여 그의 부친 최양업의 부모 등이 순교한 소식에 접하게 되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최양업은 오히려 그들의 순교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피로 물든 조국땅을 오히려 희망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는 동안 페레올 신부가 제3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843년 12월 31일 개주(蓋州)에서 주교성성식을 갖게 되었다. 성성식에 참석한 후 최양업은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소팔가자로 돌아왔고, 얼마 뒤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도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간 김대건은 다시 한 번 훈춘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었다.
1844년 최양업과 김대건은 소정의 신학과정을 끝내고 연말에(늦어도 12월 15일 이전)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았으나 교회법이 요구하는(만 24세) 연령 미달로 사제품까지 받지는 못하였다. 최양업 부제는 계속 소팔가자에 남아 있었다. 한편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와 같이 입국을 시도한 끝에 성공하지만 주교를 대동하지는 못하였다.
최양업은 1845년 한 해를 기다림 가운데 허송한 뒤 1846년 초에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두만강 쪽을 통해 처음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최양업은 요동교구의 베르뇌 신부의 사목활동을 도우며 1846년을 보냈다. 1846년 말 변문을 통해 두 번째 입국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이 때 그는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소식을 들었다. 이제 최양업은 육로(陸路)로의 입국을 단념하고 해로(海路)로의 입국을 시도하고자 홍콩의 경리부로 갔다(그간 경리부는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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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신부 기념 성당 입구 및 전경 |
1847년 초에 홍콩에 도착한 최양업은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한국순교자전기를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겼다. 드디어 입국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이 조선정부로부터 회답을 받기 위해 조선해안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1년 전 세실은 조선 서해안에 나타나 1839년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묻는 서한을 조선정부에 보내면서 1년 후 그 회답을 받으러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왔었다.
라피에르 함장은 메스트르 신부, 최양업 등과 같이 군함 2척을 이끌고 1847년 7월 28일 마카오를 떠났다. 그러나 두 군함은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완전히 난파하였다. 상해로부터 구조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최양업은 육지로 잠입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부득이 구조선을 타고 상해로 돌아와야 하였다. 난파된 군함의 잔해(殘骸)를 거두러 갈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으므로 그 기회를 기다렸으나 그것도 프랑스의 국내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 1848년도 지나가 버렸다.
1849년 최양업은 백령도를 통해 입국을 네 번째로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상해로 돌아온 그는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숙원인 사제품을 받고 동료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신부가 되었다. 최 신부는 다시 육로 입국을 시도하고자 5월 요동으로 떠났다. 연말을 기다리며 7개월 동안 베르뇌 부주교를 도우며 사목경험을 쌓았다. 12월 변문으로 떠났고, 이번에는 입국에 성공했다. 그러나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입국하지는 못했다. 실로 입국 길에 오른 지 7년 6개월, 입국의 시도를 거듭하기 다섯 번만의 성공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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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입구에 세워진 최양업신부 동상 |
▲ 성당 내부 모습 |
1850년 최양업 신부는 6개월 동안 5개도 5,000리를 순회하는 가운데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신자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였다. 1851년 페레올 주교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고 다블뤼 신부도 계속 병에 시달려 쇠약해졌으므로 최 신부는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등 더 많은 공소를 돌봐야했기에 10월부터 공소순회를 시작하여 피로와 궁핍을 감수하며 8개월 동안 5,937명이 살고 있는 교우촌을 돌아야 했다. 최 신부는 여름철의 휴가를 이용하여 충북 배티의 한 교우촌 절골에서 동생들로부터 부모의 순교에 관한 증언 자료와 여러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1853년 2월 초까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간호해야 했으며 그러는 중에도 전국 각처 12,000명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어야 했다.
1852년부터 1854년 사이의 사목활동에서 체포의 위기, 공소의 습격 등 잦은 박해로 선교사들 중 가장 많은 고난을 겪었다. 1855년은 선교사들의 건강악화로 엄청난 사목활동 속에 지내야 했다. 1856년 3월 2일 조선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의 입국으로 마음에 큰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최 신부는 ‘진밭뜰’ 공소에서 외교인들의 습격을 받고 관가에 고발되어 5명이 투옥되는 위험을 겪어야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르그레주아 신부의 요청으로 순교자의 자료를 수집하던 중 기해일기에 빠져있는 순교자 최해성 요한에 관한 증언을 수집할 수 있었다.
1857년 3월 13일 페롱(Feron. 權) 신부의 입국은 조선교회에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최 신부는 3월 25일 성모영보축일날 조선 최초로 열린 주교성성식(다블뤼)에 참석하였고 이어 열린 3일간의 성직자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새로운 공소 개척과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였다. 1858년 조선교회는 흉년으로 인해 생활의 어려움과 혜성의 출현 등으로 민심이 나빠져 장차 조선이 천주교 나라가 될 것이라는 등의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최 신부의 관할 구역에는 8개의 교우촌이 생기고 또 다른 7개소가 다음해에 신설될 예정으로 활동은 계속되었다.
1859년 최 신부는 기해, 병오 박해 순교자 82위가 교황청으로부터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그해 성무집행을 위해 최 신부는 7000리를 걸어야 했으며 관할지역 5개도에 공소만도 100개가 넘었다. 1860년 경신박해로 최 신부는 경상도 죽림의 외딴 공소에서 포졸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순교를 각오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1861년 박해는 다행히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최 신부는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중단되었던 전교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개종운동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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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신부 조각공원 모습 |
최 신부는 박해 때문에 밀린 공소를 너무 무리하게 추진시켰다. 그는 하루에 80리 내지 100리를 걸었고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공소로 떠났다. 그러면서 그는 한 달 동안 나흘 밤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성사집전을 끝낸 그는 주교에게 보고 차 상경하던 중 1861년 6월 식중독과 과로에 의한 장티부스 발병으로 경상도 문경에서 쓰러져 보름 만에 사망하였다. 최 신부의 임종은 배론의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 신부가 지켜보았으며 ‘배론에서 170~180리 떨어진 곳으로 나는 간신히 최 신부가 숨을 거두기 8~9 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그는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고 서한에서 적고 있다.
장례식은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배론 신학교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고, 신학교 산기슭에 매장되었다. 최 신부의 죽음은 조선교회를 위해 그가 유일한 조선인 신부였고 열렬한 선교열에 학력을 겸비한 모범적 사제였다는 점에서 당장은 그 무엇으로도 보충하기 어려운 큰 손실이었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최 신부의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훌륭한 판단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였다. 그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애도하였으며, 다블뤼 주교는 ‘최 신부의 뛰어난 덕행, 그의 지칠줄 모르는 열성, 그의 재능과 뛰어난 재질, 무슨 일이든 해내는 능력 등으로 미루어 현재로서는 그것을 메울 수 있는 길이 없다’고 그의 유덕을 추모해 마지 않았다. - 배론성지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배론성지 안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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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성지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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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표 ↑ 위치 부근에 배론성지가 있습니다. 소재지 :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2리 6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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