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out the which we are pictures, or mere beasts...
-W. Shakespeare-
② 제 1차 밀라노 시대(1482~1499)
레오나르도의 고전 예술은 사실상 제 1차 밀라노 시대에 완성되었다. 이 시기는 그동안 축적된 그의 다양한 재능이 충분히 발휘된 시기이다. 1482년 밀라노로 가서 밀라노의 지배자 스포르차의 궁정에 머물며 수많은 걸작을 완성했다. 밀라노에서의 제작에서는 15세기의 잔재가 완전히 없어졌다. 극적인 내용 표현을 위하여 구도는 빈틈없이 계산되고 주관적 정신의 내용이 객관적으로 표현되어 지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사물을 2차원적으로 나타낼 때 자유로운 상상의 작용을 중시했지만 동시에 그림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을 요구했다. 즉 입체의 형태, 상대적인 위치, 조명, 색, 비례, 구조, 그리고 자세는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어야 했다. 「최후의 만찬」은 객관적 사실과 정신내용을 훌륭하게 융합함으로서 다음 세기 고전양식을 이미 완성하였다. 또한 과학 연구와 저술에 힘쓴 시기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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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rgin of the Rocks
(암굴의 성모)
(The Virgin and Child with St. John the Batist and an Angel)
1483년
유채, 198×123㎝
파리 루브르 미술관 | |
Study of Plants
(화초)
(Ornithogalum umbellatum / Euphorbia)
연대미상
펜, 빨간 초크, 19.9×16㎝
윈저궁 왕실 콜렉션 소장 | |
Madonna Litta or Madonna Nusing the Child
(젖먹이는 성모)
1490년
캔버스 템페라, 42×33㎝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쥬 미술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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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dy with an Ermine
(세실리아 갈레라니의 초상/흰담비를 앉은 부인)
1485~1490년경
유채, 54×39㎝
크라코비아 차르토리스키 미술관 | |
Portrait of a Lady from the Court of Milan called La Belle Feronniere
(라벨 페로니에르
1490년경
유채, 62×44㎝
파리 루브르 미술관 | |
Portrait of a Musician
(음악가의 초상)
1490년경
유채, 41×31㎝
밀라노 암브로시어나 회화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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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을 위한 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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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초상
1490년경
유채, 51×34㎝
밀라노 암브로시어나 회화관 | |
자화상
연대미상
종이, 빨간 초크 33.3×21.3㎝
토리노 왕립 도서 | |
The Last Supper
(최후의 만찬)
1493~1497년
벽화 템페라, 460×880㎝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 수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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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da
1498~1499년
유채, 112×86㎝
로마 보르게제 미술관 | |
Virgin and Child with the Infant St. John the Baptist and St. Anne
(聖안나와 聖母子와 聖 성요한)
1499년경
종이 목탄, 연백, 139×101㎝
런던 국립 갤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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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방탄 유리 뒤에 전시되어 있는 모나리자는 매년 세계 곳곳에서 500만명의 관광객들의 방문을 받는다.
논란점이 되는 작품 속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관계없이 레오나르도의 작품 안에서 한 여인이 짓는 야릇한 미소로써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일 것이다. |
1503년/1506년경
유채, 77×53㎝
파리루브르 미술관
레오나르도의 대표작이며, 일반인들에게 초상화에서 단연 으뜸으로 떠오르는 작품이다. 그림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은 정작 작품의 감상보다 집중되기도 한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피렌체로 돌아갈 때 잠깐 들른 만트바에서 피렌체로 돌아갈 때 잠깐 들른 만트바에서 이사벨라 데스테 후작 부인의 상을 그리고, 그 화고를 가지고 1500년부터 그리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소 풍만하게 보이는 모나리자는 이미 30을 넘은 나이로 생각된다. 그 당시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가는 허리과 작은 얼굴, 가는 목의 여성들의 기준에 반하지만 여성의 신비스러운 미소, 빛나는 눈, 볼의 명암과 흐려지는 배경의 조화는 아름다움을 자아내며 최고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이때 이미 다빈치는 류마티즘과 오른손 마비로 주위의 섬세한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왼손으로 계속 그림을 그려나가며 「모나리자」,「성요한」,「암굴의 성모」와 같은 아름다운 작품들로 자신의 집을 장식해냈다.
「모나리자」를 보면 육체의 정확한 묘사 위에 정신의 깊이나 생명의 신비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수수께끼의 미소 때문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여 낸 독특한 명암법 때문이다. 즉, 색칠을 할 때에 한쪽을 진하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츰 엷고 흐리게 하여, 머리나 팔의 은은한 입체감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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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의 모델이었던 이사벨라 데스테의 초상의 뎃생이다. 모나리자그림의 이마의 넓이, 콧등의 아래쪽이 두드려진 형, 작은 입 그리고 맑은 눈동자 등이 닮아 동일 인물로 추정 되었다.
1500년
연필, 목탄, 빨간초크, 노란 파스텔, 63×46㎝
파리 루브르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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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에 관한 추측설- 또 하나의 진품?
(리더스다이제스트판 「상식백과」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모나리자의 모델은 피렌체의 귀족의 세 번째 부인 모나리자 델 지오꼰도로 알려져 있는데, 유명한 메디치의 정부 '라 지오꼰다'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혼란을 빚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초상화를 그릴 때 항상 두 장 이상을 그렸다고 지적하면서 뉴욕의 소장자인 헨리 퓰리쳐 박사는 자신이 가진 것이 또 하나의 모나리자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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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의 스케치 |
레오나르도는 4년에 걸쳐 이 초상화를 그렸으며, 이 것이 완성되자 이를 지오꼰도가에 넘겼다. 그 후 프랑스와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 가기 직전에, 주일리아노 데 메디치로부터 자기의 정부인 꼰스딴자 다발로스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우연히 꼰스딴자는 모나리자를 약간 닮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라 지오꼰다' 즉 ''미소짓는 여인'이라는 뜻의 별명을 갖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또 한점의 모나리자 델 지오꼰도의 초상화를 손질하여 그 그림의 얼굴을 꼰스딴자의 얼굴로 바꾸어 놓았지만 메디치는 정략결혼을 하기 위해 정부 꼰스딴자를 버렸기 때문에 그 그림을 사지 않았다. 페오나르도는 팔리지 않았던 다른 그림들과 함께 제2의 모나리자를 파리로 가지고 갔고 루브르 박물관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 이 그림이라고 주장한다.
퓰리쳐 박사는 현미경 사진으로 이 초상화를 검사하도록 했는데, 거기에서 나타난 지문이 다른 진짜 레오나르도의 작품들에서 나타난 지문과 일치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는 화필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으로 그림 물감을 문질러 특수한 효과를 내는 버릇이 있었다. 그 겨로가 그의 지문이 뚜렷하게 남아 오늘날 그의 작품의 진짜 여부를 지문의 유무로 판정하
게 되었다.또 하나의 증거로는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의 화실에서 이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라파엘이 그 광경을 그린 스케치다. 라파엘의 스케치에는 배경에 있는 두 개의 기둥 등 서너 개의 특징이 나타나 있는데, 이들은 런던에 있는 초상화에는 나타나 있으나 루브르 박물관의 것에서는 볼 수가 없다. 또한 당시 그 부인은 젖먹이 딸의 죽음을 애도하여 아주 엷은 베일을 쓰고 있었다. 런던판 초상화의 젊은 여인 모나리자는 상중임을 뜻하는 얇은 투명베일을 머리에 걸치고 있다. 모나리자는 미소 짓는 여인이라는 뜻의 '라 지오꼰다'라는 닉네임을 얻고 있다. |
모나리자라 불리는 그림이 세상에는 60점 이상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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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라의 모나리자 |
첫 번째 그림은 다빈치파의 화가가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半 裸의 모나리자」이다.
두번째 그림 Lithograph(석판인쇄)
Lithographer, D. Huot
249 x 196 mm
Achenbach Foundation for Graphic Arts |
모나리자에 관한 추측설-레오나르도 자신이 모델이다?
우에노 마사히코는 일본의 유명한 법의학자이다. 그는 알고 지내던 샹송가수의 아이디어로 모델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 빈치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면서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그린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해보았다. 왼쪽 눈 안쪽의 콧두덩에 조그만 사마귀 같은 혹이 있다. 다 빈치의 자화상에는 반대쪽인 모나리자의 오른쪽 안쪽의 콧두덩에 작은 혹이 있었다. 더구나 모나리자의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가 나뉘는 부분이 언덕처럼 솟아 있다.
다 빈치는 왼손잡이로서 엄지와 검지의 사이에 화필을 들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위에 필기구를 오래 쓸 때 생기는 혹으로 솟아나게 된 것으로 추측해본 것이다.
이 기이한 발상으로 법의학적인 개인식별 방법인 슈퍼포임즈(두 개골 사체가 발견된 경우, 생전에 찍은 얼굴 사진과 두개골 사진을 같은 크기로 만들어 겹쳐서 모양이 일치하는가 여부로 식별하는 것)를 해보았다. 모나리자 사진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염난 자화상을 같은 크기로 조정하여 비춰본 결과 놀랍게도 영상이 거의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다. 수염난 모나리자가 웃고 있는 것이었다. 이 것은 TV에 방영되었지만 그는 유사성이 있으므로 검토할 만한 여지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소견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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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그대가 세계 도처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도록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④ 제2차 밀라노 시대(1506~1513년)
제 4 시기는 1506년에서 1513년까지로, 제 2 밀라노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암굴의 성모」를 완성하였고,「 성 안나」 등의 제작에 착수하였다.「성 안나」 그의 예술의 귀결인 동시에 전성기 르네상스 고전 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기의 그는 오히려 여러 가지 과학연구, 특히 水流에 관한 연구나 운하공학 또는 기계학과 해부학 등에 주력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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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John the Baptist
(성요한)
1513~1516년경
유채, 69×57㎝
파리 루브르 미술관 | |
Bacco/ Bacchus
(바커스)
1511년~1515년경
유채, 177×115㎝
파리 루브르 미술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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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하늘은 인간이 아닌 신을 우리에게 내려보내는데, 그의 생각과 뛰어난 지식의 도움을 받아 우리 모두가 하늘에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Vasari- |
⑤ 프랑스 시대(1513~1519년)
제 5 시기는 1513년에서 19년까지로, 로마·앙부아즈 시기이다. 1513년에 로마에 체재하다가 1516년 프랑소와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 건너가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는 이 시기에 수학연구에 몰두하였고, 앙부아즈의 궁정화가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방대한 양의 수기를 정리하고 여러 가지 사색에 잠겼으며, 운하 설계나 궁정설계를 지휘하면서 충실한 생활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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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rgin and Child with the Infant St. John the Baptist and St. Anne
(聖안나와 聖母子와 聖 성요한)
1501~1519년
유채, 168.5×130㎝
파리 루브르 미술관 | |
첫댓글 그림이 다 엑박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