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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시골의 지방도를 따라
여행하다 보면 의외로 구릉 같은 산이
발달된 곳이 많다.
굽이 굽이 돌아가는 시골길은
한적하기 짝이 없어 복잡한 도시생활에서 벗어난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길 따라 논과 밭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이따끔 조그만 마을들이 나타나지만
인적은 보이질 않고 한적하다 못해 적막하기 조차 하다.
특히 화순지역은 호남정맥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서 마을과 마을은 산을 사이에 두고 드문 드문 떨어져 있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한가로운 시골길을 습관적으로 바쁘게 가고 있는
자신을 나무라면서 쌍봉사에 도착했다.
산속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절은 굽이진 산길을 다 내려 와 평탄한 곳이 시작되는 곳에 있었다.
이럴 수가 !
절을 보는 순간 차는 벌써 절 마당에 들어와 버렸다.
절집이 찻길에서 너무 가까워
부처님 세계를 맞이 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당황스럽고
좀 싱거운 기분이 든다.
뭐랄까 소중한 사람에게서 받은
선물상자의 포장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벗기고 있는데
그냥 허무하게 모습을 드러내었다고나 할까.
지리산 자락의 연곡사와 실상사가 그렇고 장흥의 보림사와 강진의 무위사도
평탄한 곳에 자리한 모습까지
이곳 쌍봉사와 같은 느낌이었다.
모두 오래된 내력이 있는 사찰이라는 공통점은 있으나 집집마다 특색과 분위기가 다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000년을 두고 지내 온 절집이
그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고 그대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절터를 다지면서 축대를 쌓고,
전각을 짓기도 옮기기도 하고,
소실되면 새로 짓고,
부서지거나 낡아지면 고쳐 지으면서
그 오랜 세월을 지내온 곳이 천년고찰이다.
그렇게 절집을 가꾸어 오면서
절 마다 가지고 있는 자기만의 "아우라"를 그대로 유지하고 지켜오기는 정말 어렵다.
쌍봉사에서 가까운 천불산에는 운주사가 있다.
그곳에는 예전에 천불천탑(千佛千塔)의 수많은 석탑과 석불이 있었고 지금도 13기의 석탑과 70기의 석불이 남아 있다. 70년전만해도 3배의 숫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훼손과 도난으로 많이 줄었다.
석불들이 동일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어,
진안 마이산 탑사의 돌탑처럼
한 이름없는 석공이 평생을 두고
조성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투박한 갖가지 형상의 석불은 우아하지도
세련되지도 못하지만
그 모습에는
지배층으로부터 억압받는 민중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이의 글에서
불상의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사찰의 가치를 낮춰보는 견해를 본적이 있다.
아름답지않더라도 나름대로 뜻하고 있는
의미를 볼 수 있으면 그 또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운주사의 창건 주체가
당시의 지방호족이었다는 설과
지역 노비들이 미륵세상을 기원하며 세웠다는 설이 있는 등 명확하지는 않으나,
오랫동안 호족이나 권문세족 또는
양반 사대부들이나 왕실의 원찰(願刹)이 아닌 순수한 민중을 위한 사찰의 역할을 해왔던 것은 틀림없다.
이것은 다른 사찰에서 쉽게 느낄 수 없는 운주사만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이다.
근래 많은 사람들이 운주사를 찿아 절의 재정이 좋아졌는지 여러 불사를 일으켜 그 모습에서 많은 변화가 왔다.
최근에 가보았을 때는 새로운 전각들과 잘 정돈된 경내는 보았지만 예전의 운주사가 가지고 있었던 그 "아우라"는 보기 어려웠다.
쌍봉사는 처음 와 보았지만 정말로 잘 보존되고 지켜 온 절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적인 축조법으로 쌓여진 석축과 옛 전각 터 일 것이라 추측되는 비어 있는 공간이 여유롭다.
일주문과 사천왕문 사이에 있는 주차장이 차도에서 곧바로 연결되어 있어 어색하였으나
근래 쌓여진 것으로 보여지는
길다란 기와 담장이 외부와 단절시켜 주어 나쁘지만 않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3층 목조탑 형식의 대웅전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다.
통로만 남겨 놓고 좌우에는 정성껏 가꾸어진 잔디에는 옛 당우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좀 더 떨어진 왼쪽에는 신축공사를 위한
기초가 닦여져 있어 위치나 형태로 봐서 공양간일 듯 싶다.
대웅전 뒤에는 낮은 석축으로 공간을 나뉘어진 빈 터가 있고, 또 다시 쌓아진 석축 위에 극락전이 있는데 올라가는 계단 양쪽에 있는 오래된 단풍나무가 일품이다.
극락전 뒷쪽 산 아래에는 지장전, 나한전, 호성전이 나란히 자리잡고 끝나는 지역에 요사채 2채가 있다.
산자락을 따라 조성된 좁은 사찰터는 공간배치가 적절히 잘 이루어져 답답하지도 산만하지도 않다.
넓지 않지만 비워둔 공간과
나눔의 역할을 함께 하고 있는 나지막한 석축들이 돋보이는 참 아름다운 절이다.
쌍봉사도 근래에 들어 옛모습을 찿아 복원공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처럼 잘 가꾸어졌으면 좋겠다.
신라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개창한
적인선사 혜철(785~861)의 탑비가
곡성 태안사에 있다.
원래의 비신은 행방을 알 수 없고
지리산 화엄사에 보관되어 있던
필사본에 따라 새로 제작되었다.
이 비문 내용에는 혜철선사가 839년 2월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첫 하안거를
쌍봉사에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쌍봉사의 창건 연대는
최소한 839년 이전으로 보인다
그 이후 당나라 마조 도일의 법맥을 이어받고
'끽다거'로 유명한 조주 종심의 스승인
남천 보원(748~834)에게 법을 받고
847년 귀국한 철감선사 도윤(798~867)이 쌍봉사에 주석하면서 사세를 크게 키웠다.
그는 영월 법흥사의 사자산문 개산조로 알려졌는데 그의 제자 징효 절중이
사자산문의 교단을 형성하였다.
쌍봉사의 사세는 고려 때도 계속되었다.
특히 보조국사 지눌에 이은
수선사의 2세 진각국사 혜심에게
무인정권의 집정 최우가 그의 서자 아들 최만전과 최만종을 출가시켰다.
뒷날 최우가 죽은 후 환속하여
최항으로 개명한 최만전이
쌍봉사에 거처하면서 활동하여
쌍봉사의 사세는 더욱 융성하게 되었다.
이런 쌍봉사도 조선시대에는
유림에게 핍박을 받았는데,
그 예가 죽수서원의 속사(屬寺)가 된 것이다.
죽수서원은 기묘사화 때 능주로 유배되어 사사된 조광조와 아랫마을 출신의 양팽손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쌍봉사는 서원의 사향(祀享)에 따른
여러가지 물품을 공급하고
서원의 보수공사도 책임지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쌍봉사에는 병영이나 수영,
능주목 등 각종 관청에서 갖가지 징수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조선조 때 모든 사찰들이 겪어온 어려움이었다.
임진왜란(1592) 때 절이 불타 버린 후 인조6년(1628)에 중건했고 현종8년(1667)과
경종4년(1724)에 중창했다.
정조10년(1786)에 이조판서 김종수가 사적비를 쓸 때까지만 해도 전각 등 건물이
400여 칸이 있는 큰 사찰이었다.
쌍봉사자문(雙峰獅子問)
절의 뒷산 이름은 계당산이다.
조선 후기의 지도에는 중조산이라고 했고 그 이전에는 문헌에는 사자산이라고 기록되었다.
철감선사의 제자 징효 절중이 지금의 영월 법흥사에서 사자산문을 개창하였기에 철감선사를
사자산문의 개산조라고도 한다.
천왕문 앞에 고증에 의한 연못이 얼마전에 만들어졌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빈 터에 덩그러니 연못만 만들어져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천왕문과 잘 어울릴 수 있으리라 본다.
쌍봉사의 대웅전.
목조 탑이 귀한 우리나라에
법주사 팔상전의 오층탑과 함께 목조 탑파 형식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인 3층으로 된 전각이다.
여느 사찰과 마찮가지로 쌍봉사 역시
정유재란(1597) 때 전각 대부분이 불타버렸었는데,
상량문에 따르면 대웅전이
1628년에 중건했었다 하니 소실 후
곧바로 재건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스님 두 분이라도 계시지만 예전에는 보살 두 분만 계셨다고 한다.
1984년에 동네 할머니 한 분이 촛불을 켜놓고 불공드리다가 잠이 든 동안 화재가 나 대웅전이 모두 타버렸다.
다행히 대웅전에 모셔졌던 삼존불은 동네사람들이 업고 나와 화재에서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대웅전은 1986년에 원상대로 복구된 것이다.
목조여래좌상의 좌우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합장하며 시립해있는 목조입상으로
아주 특이하게 삼존상을 배치한 경우이다.
서울 삼성동 봉은사 영산전에도
이러한 삼존상이 있는데 한참 후인 조선 후기 1895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본래 영산전에는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협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섭존자는 나이가 든 모습으로 얼굴 한가득 웃음을 띠고 있다.
하지만 '염화미소'는 아닌듯 싶다.
아난존자는 지혜의 상징답게 젊고 단아하게 묘사되었다.
불상을 조성한 발원문에 의하면 극락전 본전불과 함께 1694년에 조성되었다.
목조탑파 건축물은 1층 중앙에 심주(心柱)가 있고, 가운데 고주(高柱)가, 가장자리 벽체에 변주(邊柱)를 세웠다. 2층 변주는 고주와 1층 변주 위에 걸쳐 놓은 툇보 위에 세우는 식으로 층수가 올라간다.
법주사 8상전이 그렇다.
이곳의 대웅전 건물은 중심 기둥이 2층부터 설치되어 있다.
1층에 불단을 조성하기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2층의 창방위에 보를 걸고 그 위에 중심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끼웠으며
종도리 안쪽에 2층 변주를 세웠다.
삼층 지붕은 화재가 나기 전에는 팔작지붕이었는데 복원하면서 사모지붕으로
바꾸고 탑의 상륜부를 꾸몄다.
이전에 대웅전으로 사용하면서 그에 걸맞게 지붕을 팔작지붕을 덮었는데 애초에 탑이었기에 이제 원래대로 된 것이다.
부처님 양대 제자 중
왼편이 아난존자이고
오른편이 가섭존자이다.
1984년 화재로 소실되기 전의 대웅전 사진이다.
400년의 세월이 묻어 있는 고색창연한 모습이다.
대웅전에서 극락전 앞으로 가는 계단은 나지막한데도 불구하고 무척 좁다.
의도적으로 좁게하지 않았을까.
마음과 옷깃을 여미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싶다.
양팔을 벌리고 있는 듯한 오래된 단풍나무.
환영의 뜻일까?
극락전에는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가운데 양쪽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하였다.
아미타여래 불상은 1694년에 대웅전의 것과 유사하여 같은 사람이 조성했으라 추정된다.
양쪽 협시불은 이전에 도난당하여 새로 조성해서 모셨다.
지장전에는 주존인 지장보살상을 비롯한 21기의 목조각상이 남아 있다.
지장보살은 좌상이고, 시왕(十王)은 의자에 앉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입상이다.
지장전 조각상들을 조각한 조성기록에 의하면
23기가 있었으며 조성시기가 1667년으로 되어 있다.
당시 송인철과 운혜스님을 비롯한 11명이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어 대웅전의 삼존불과 함께 당대의 미확인 작품의 척도가 되는 조각상이다.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시고 좌우에 모자를 쓰고 있는 귀독대왕과 민머리의 도명존자가 협시하고 있다. 지장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라고 한다.
의자에 앉아 있는 이가 시왕(十王)이다.
원래 귀왕 판관 동자 사자(使者)가 각 2구 씩 8구가 있었으나 2구가 분실되어 지금은 6구만 남았다.
귀왕상.
시왕들 사이에 판관이 서 있다.
나지막한 석축이 띠지어 이어지고 있다.
돌담도 그렇다.
오래된 것에는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다.
그래서 좋다.
호성전.
철감선사와 그와 사형제 간인 조주 종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두분은 당나라의 마조 도일의 법맥을 이어받은
남천 보원의 제자이다.
독경소리가 들려
따라 가 봤더니
스님 한 분이 밭에서 일할 때 쓰는 방석을 깔고 앉아 잔디를 고르면서 독경을 읊고 계신다.
지장전을 지나면 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승탑을 볼 수 있다.
지난 봄 초의선사의 행적을 따라 여행을 했었는데
이곳에도 그의 자취가 남아 있어 반가웠다.
야생차 밭이 있어 다승(茶僧)인 그의 시비를 세웠나 보다. 시승(詩僧)이기도 한 그가 설마 이때야 처음 시를 지었을까.
최초로 쓴 시가 아니라
남아있는 그의 작품 중에 가장 이르다고 해야겠지.
가을이다 보니 차나무 꽃도 열매도 보네.
잘 손질된 정원수처럼 가꾸어진 녹차밭의 녹차나무에 익숙하다 보니 꽃 피고 열매가 달린 야생차나무는 신기하다.
부처님을 모신 곳이 탑(塔婆의 줄임말)이다.
붓다가 열반한 후 당시의 풍습에 따라
다비(火葬)를 한 후 유골과 사리를 안치하기 위하여 불탑을 세운 것에서 유래하였다.
승탑(또는 부도)은 스님의 탑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세계인 절 안에 모시지 못하고
절 언저리에 스님들의 세상을 따로 마련해 왔다.
큰스님이 열반하고 나면 제자들은 성의를 다하여 승탑을 세우고 생전의 행적을 기록한
글을 새긴 탑비를 세운다.
지난번에 글을 쓴 "원주지방의 폐사지"에서
소개했듯이 탑과 비는 당대의 예술과 역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1200년전인 신라 말 868년경에 조성된 철감선사 승탑은 8각원당의 기본형으로
신라 승탑의 최대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국보 제57호로 지정되었다.
승탑도 불탑과 마찬가지로 기단부, 탑신부, 옥개석으로 구성되었는데,
기단과 탑신, 옥개석이 8각형으로된 것을 8각원당형이라고 한다.
이러한 형태가 신라말 고려초의 전형적인 승탑 형식이다.
현존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승탑은
모두 8각원당형으로 되어 있다.
원주 흥법사지의 염거화상탑(844).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861).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880).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893).
이들이 세워진 지역은 제각기 다르나 그 형태는 매우 흡사하다.
옥개석은 목조건축물의 기와골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기단이나 탑신부에는 불 . 보살을 비롯하여 신장神將, 비천飛天, 사자상獅子像 등이 조각되어 있다.
200년 후에 세워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1085)에서는 기단이나 탑신이 방형(정사각형)인 새로운 앙식이 나타나기도 한다.
티베트의 영향이 있는 이러한 양식은
종로 탑골공원에 있는
조선초의 원각사지탑이나
중앙박물관에 있는
고려 때의 경천사지탑에서도 볼 수 있다.
가릉빈가의 모습.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서 설법하실 때
춤을 추며 무곡(舞曲)을 연주하며 나타난,
상체는 사람의 형상이며 하체는 새의 형상을 한 전설의 새이다.
그 소리가 아름다워 묘음조, 미음조, 옥조 등 으로 부르고,
극락에 살고 있다고 극락조라고도 부른다.
옛 신라의 불국토 경주의 안압지와, 황룡사지, 보문사지 등 절터에서 출토된 와당에 조각된 모습이 나타난다.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에는 삼존불을 모신 수미단에도 가릉빈가가 장식되어 있다.
가릉빈가가 새겨진 승탑으로는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탑과
구례 연곡사의 동부도, 북부도 그리고 이곳 철감선사탑의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문경 봉암사는 일년에 단 하루 초파일에만 절문을 개방하니 가 볼 엄두가 안 난다.
소리를 통해 영혼을 울리고 마음에 닿을 수 있는 것은 많다.
우리가 쉽게 얻거나 경험하지 못할 뿐이다.
언젠가 청도 운문사에 간 적이 있었다.
수백명의 학인 비구니가 수행하는 절집이다.
절 앞 개천가에 있는 넓은 밭에서
울력을 하느라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정말로 많은 앳띤 스님들을 기까이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운문사의 새벽예불 소리를 예찬한 글이 생각난다.
속세를 벗어나 수행하는 때묻지 않은,
수 백명의 어린 스님들의 예불소리는 듣지 않아도 상상이 된다.
가릉빈가의 묘음(妙音)은
들리는 것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에서 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뒷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가까이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운문사 새벽 예불시간에 맞추어 찿아가 가릉빈가의 소리를 꼭 느껴보고야 말것이다.
이수 가운데 세로 사각형 공간이 전액을 위한 부분이다.
이곳에 쓰인 글,
雙峰山澈鑒禪師塔碑銘
신라말에는 이곳 계당산이 쌍봉산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비신은 사라지고 받침돌인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거북의 오른쪽 앞발이 살짝 들려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마 생명력을 불어 넣는 한 방법일 듯.
꼬랑지 역시 옆으로 돌아 갔다.
섬세하고도 생명력이 살아 있다.
이수 부분의 뿔은 용의 꼬리인가.
앞뒤 각각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된 것 같은데 꼬리는 두 개 뿐이니 모르겠다.
다시 보아도 참 정교하고 아름답다.
상륜부도 갖추고 있었으면....
지나친 욕심인가.
원주 법천사지에 있었던 지광국사 현묘탑.
경복궁 야외에 세워져 있다.
멀리오중탑 형식으로 지어진
민속박물관이 보인다.
대숲 속의 표고버섯 밭.
스님들의 중요한 식재료이렸다.
백담사 경내에 있는 찻집.
"농암장실."
벙어리 절간이라는 뜻이라는데.
걸레스님으로 이름 난 중광스님이 이곳에 머물 때 받은 호(號)가 농암이라 했다.
워낙 기행으로 이름 난 스님이라 말 없는 바위처럼 살라고 지어준 호가 아닐까.
이곳에 철감선사와 동문인 당나라 조주 스님 어록이 비치되어 있어 소개한다.
문 : 불도가 무엇입니까?
답 : 차나 한 잔 들고가게 !
趙州 스님 어록 중에서
120살 동안 긴 세상을 살면서 터득한 화두일까?
"재촉하지 말게나. 천천히 깨달으라"는 뜻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