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핑진전역은 베이핑과 텐진을 중심으로 화북지역에서 벌어졌다. 중국에서는 이 결전을 핑진전역이라고 하지만 타이완에서는 ‘핑진결전’이라고 부른다. 핑진이란 베이핑과 텐진을 말하므로 랴오선전역이나 화이하이전역에 비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핑진전역은 화이하이전역이 한창 진행될 때 시작되었다.
화이하이전역이 랴오선전역의 꼬리를 물고 시작되었듯이 핑진전역도 화이하이전역과 시기가 겹친다. 핑진전역은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군사위원회의 치밀한 계획 아래 진행되었다. 랴오선전역에서는 공격 방향과 시기를 두고 마오쩌둥과 린비아오의 생각이 달라 한참이나 조정기간을 거쳐야 했다. 화이하이전역은 쑤위가 제안한 작은 전역이 중원을 둘러싼 전면적인 결전으로 확대되었다. 거기에 비하면 핑진전역은 시종일관 마오쩌둥과 중앙군사위의 전략적 판단과 계획이 관철되었다. 핑진전역이 시작될 때에는 공산당이 내전에서 우세를 장악한 뒤여서 마오쩌둥의 계산과 생각대로 진행할 수 있었다.
1948년 11월초, 공산당 화동 야전군과 중원 야전군이 화이하이전역을 일으킬 무렵의 정세를 돌이켜 보자. 서북지역에서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서북 야전군이 후쫑난의 국군 시안공서 병력을 관중(關中)지역(관중지역은 산시성 중부지역으로 시안을 중심으로 바오지, 센양, 통촨, 웨이난등 5시를 포괄한 지역)으로 밀어붙였다. 화북의 쉬샹첸은 화북 1병단을 인솔하여 산시성 성도인 타이위안(太原)을 철통같이 포위해 놓고 있었다. 화북 3병단은 쑤이위안(현재의 내몽골 자치주) 동부에서 국군 화북 초비사령관 푸쭤이 부대의 후방기지인 구이쑤이(구이쑤이(歸綏)는 현재의 내몽골 자지추 성도인 후허하오터)를 포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북 야전군 2병단은 선봉 병단으로 허베이성 지현(薊縣) 지역으로 진격하여 산하이관 입관을 대기하고 있었다. 동북 야전군 주력은 선양, 잉커우, 진저우 지역에서 휴식하며 정돈하고 있었다. 동북 야전군은 한달 후에 산하이관 안으로 진격하여 화북군구 부대와 함께 푸쭤이 집단군을 섬멸할 계획이었다. 푸쭤이 집단군은 동북 야전군과 화북군구 병력 100만 대군의 연합 공격에 직면해 있었다.
핑진전역 중공 지휘부 앞줄 왼쪽부터 네룽전 뤄룽환 린비아오
푸쭤이
푸쭤이는 장제스의 직계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산시성 출신이어서 자연스럽게 산시 군벌 옌시산 휘하에 들었다. 장제스와 펑위샹 그리고 옌시산이 중원을 놓고 다툰 ‘중원대전’에서 푸쭤이는 산둥성 지난과 옌저우, 취푸 등을 잇따라 점령하며 용맹을 떨쳤다. 그때까지 푸쭤이는 옌시산 휘하의 군벌장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중일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항일명장으로 거듭났다. 그는 내몽골 남부의 쑤이위안(綏遠)성 주석 겸 경비사령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1936년 일본군과 일본의 몽골 괴뢰군이 쑤이위안에 쳐들어오자 그는 부하들에게 “일본 도적들이 차하르와 쑤이위안을 침범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장병들의 치욕이다. 애국 군인이라면 한 치의 땅도 넘겨줘서는 안된다.”고 고무하였다. 그리고 “악비는 38세에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나는 이미 38세를 넘었다. 항일하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결의를 밝혔다. 푸쭤이는 용기백배한 병사들을 이끌고 일본군과 괴뢰군을 격퇴하였다.
1937년 말, 일본군이 산시성 성도인 타이위안을 침공했을 때 산시성 주석 옌시산은 주력을 이끌고 성밖으로 나갔다. 야전에서 싸운다는 방침이었으나 세가 불리하니 자신의 병력을 보존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때 푸쭤이는 타이위안성 수비를 맡게 되었다. 그는 성과 함께 운명을 함께 하려는 결심을 굳히고 고향집에 편지를 보냈다. “자식이 살아 있는 한 일본 도적들과 끝까지 혈전을 벌이겠습니다. 나라와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살고도 싶고 의를 따르고도 싶습니다. 두 가지를 함께 가질 수 없으니 목숨을 버려 의를 지킬 것입니다.” 그는 이런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싸웠다.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려고 하자 장제스가 후퇴명령을 내려 부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그후 푸쭤이는 ‘핑싱관 대첩’ ‘신커우 회전’등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는 중일전쟁중에 상장으로 승진하였으며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았다.
푸쭤이는 국공합작 기간에 공산당 인사들과 교분을 쌓았다. 마오쩌둥을 회견한 것은 물론 왕루어페이 등과 우의가 두터웠다. 그는 특히 저우언라이에게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쑤이위안으로 독립하기까지 줄곧 상관이었던 옌시산은 “푸쭤이 부대가 점점 빨개진다. 푸쭤이 부대는 7.5로군이다.”고 경계하였다. 합작 기간에 공산당 부대가 팔로군으로 개편한 데 빗대어 말한 것이었다.
푸쭤이는 청렴할 뿐 아니라 검소하여 ‘포의장군’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1942년 푸쭤이는 고급간부회의에서 12개항의 부패방지규정을 정하였다. “부패하거나 재물을 탐해서는 안된다. 아편과 도박을 금지한다. 위아래 사람을 속이거나 세력으로 농단하는 것을 금지한다. 부하나 인민들의 선물을 받아서는 안된다. 상인들과 내왕해서는 안되며 상업을 겸해서도 안된다. 위반자는 징벌할 것이다.” 그는 주석으로 있는 동안 쑤이위안성에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여 민주적인 통치가 되도록 애썼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팔로군의 ‘3대 기율 8항주의’를 본 따 ‘10대 기율’를 정해 군대가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내전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해방군을 괴롭힌 인물이었다. 그는 핑진전역이 있기까지 해방군에 패한 일이 없었다. 푸쭤이는 내전 초기 화북의 요지인 장자커우를 공격 점령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후로 화북의 해방군은 한동안 기를 펴지 못했다. 홍색수도 옌안을 점령당한 것도 푸쭤이가 장자커우를 함락한 여파라고 할 수 있었다. 화북의 패배에 불만을 품은 주더, 류샤오치등 공산당 수뇌부는 직접 화북으로 가서 군정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왼쪽부터 후허하오터(구이쑤이) 장자커우 바오딩 베이징 텐진. 특별표시한 곳은 산하이관
장제스와 푸쭤이, 서로 다른 계산을 하다
1948년 하반기 들어 정세는 일변하였다. 국군이 동북에서 패하고 화이하이 결전의 패배도 기정사실로 되고 있었다. 이런 형세에서 푸쭤이와 장제스는 각자 이해관계를 놓고 저울질했다. 두 사람은 화북 작전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장제스는 화북이 고립된다고 생각하여 베이핑과 텐진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푸쭤이가 부대를 인솔하고 남쪽으로 철수하면 창장 방어선을 강화할 수 있게 된다. 필요하면 화이하이 전장을 지원할 수도 있었다. 장제스의 판단은 타당했지만 그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베이핑과 텐진을 잃으면 중국 내외에서 정치적 타격을 입기 때문이었다.
푸쭤이는 쑤이위안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지역의 실력자였다. 내몽골과 따퉁, 장자커우 등에 튼튼한 정치적 기반이 있었다. 그가 베이핑과 텐진을 버리고 남쪽으로 철수하면 장제스가 부대를 삼킬 것이 뻔하였다. 남은 길은 남쪽 철수를 하지 않고 서쪽인 쑤이위안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쑤이위안은 중국의 변방이어서 고립될 것이 불을 보듯 훤했다. 11월초, 장제스는 푸쭤이를 난징으로 불러 화북의 작전방침을 논의했다. 장제스는 푸쭤이에게 동남지역 군정장관을 제안하였다. 푸쭤이가 생각할 때 허울뿐인 자리로 자신의 부대를 빼앗길 것이 분명하였다.
푸쭤이는 장제스에게 역설했다. “화북이 아직 위험하지 않으니 베이핑과 텐진, 화북을 장악하는 게 낫습니다. 화북을 지키고 있으면 동북과 화북의 해방군을 묶어둘 수 있습니다. 그러면 화이하이 전선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해방군 화북군구 부대가 국군보다 병력면에서 우세하지 못한 점을 고려하였다. 결전을 끝낸 동북 야전군은 3개월 정도 휴식과 정돈이 필요하였다. 최소한 3개월 안에는 관내 진격이 불가능하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했다. 장제스는 마침내 베이핑과 텐진, 장자커우를 지키고 항구도시인 탕구(塘沽)를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푸쭤이는 방침에 따라 11월 중하순 병력 배치를 조정했다. 청더(承德), 바오딩(保定), 산하이관과 친황다오(秦皇島)는 과감히 포기하였다. 자신의 근거지인 구이쑤이(현재의 후허하오터이다), 따퉁(大同) 등 고립된 두 지역도 포기하기로 했다. 푸쭤이는 4개 병단, 12개 군, 42개 사단과 비정규군 등 총 60만명을 수비구역에 배치했다. 동쪽인 롼현부터 서쪽의 화이안(懷安)까지 500킬로에 걸친 철로 연변에 집중 배치한 것이다. 화북 초비사령부 병력은 푸쭤이계보다 장제스의 직계부대가 훨씬 많았다. 장제스 계가 3개 병단, 8개군 25개 사단인 반면 푸쭤이 계는 1개 병단 4개 군 17개 사단에 지나지 않았다. 푸쭤이는 고심 끝에 장제스계를 베이핑과 동쪽인 텐진, 탕구, 탕산 등에 배치하였다. 자신의 직계 부대는 베이핑과 쉬안화(宣化), 장자커우, 화이안 등에 배치하였다. 이런 부대 배치로 보아 여차하면 장제스 직계부대는 남쪽, 푸쭤이 직계 부대는 근거지였던 서쪽으로 철수할 가능성이 있었다.
핑진전역전 중공의 작전구상도
마오쩌둥의 판단 “푸쭤이 집단군을 베이핑에 묶어 두어야 한다.”
화이하이 전역에서 승리가 분명해지자 중공 중앙군사위는 핑진 지역의 장제스계 부대가 남쪽으로 철수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였다. 그렇게 되면 푸쭤이계 부대도 서쪽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장제스가 철수를 선택하면 인민 해방군은 싸우지 않고 베이핑, 텐진 등 대도시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그런 상황을 가장 걱정하였다. 남하한 부대로 창장 방어선을 강화하면 도강작전에 불리해지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것이 마오쩌둥과 장제스가 다른 점이었다. 마오쩌둥은 늘 심모원려 속에 전략과 방침을 짰다. 내전 초기 해방군이 막 밀리고 있을 때 마오는 “땅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적을 얼마나 섬멸할 수 있는지에 주안점을 두라.” 고 지시하였다. 마오의 이런 태도는 근거지를 빼앗기고 후퇴하는 해방군에게서 열패감을 씻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신축자재한 태도로 주력을 보전하며 국군 병력을 소모시켰다. 장제스는 이에 비해 대도시나 해방구의 점령을 중요시하였다. 빼앗기면 중국 내외의 정치적 타격이 크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후퇴할 시기를 놓치거나 대도시를 사수하다 병력 모두를 고스란히 잃기 일쑤였다.
마오쩌둥과 중앙군사위는 동북 야전군 주력의 관내 진격을 앞당기기로 했다. 먼저 텐진, 탕산, 탕구를 포위한 뒤에 휴식과 부대 정돈을 계속 하기로 했다. 화북 국군의 남쪽 철수를 막기 위해서였다. 1948년 11월, 중앙군사위는 화북지역 작전방침을 제출했다. 푸쭤이 집단군을 화복지역에 가둬둔 채 섬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군사위원회 주석인 마오쩌둥은 시세를 면밀히 관찰한 뒤 다음과 같은 방침을 채택하였다.
“화북 군구 제1병단은 타이위안 공격을 중지한다. 화북 군구 제3병단은 구이쑤이로 철수한다. 푸쭤이 집단군이 고립되었다고 여겨 조기에 철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장제스와 푸쭤이가 동북 야전군의 산하이관 입관 시기에 판단착오를 일으킨 것을 이용해야 한다. 신화사는 동북 야전군의 승리 경축방송을 반복하라. 열병식 등 동북 야전군 지도부가 선양에서 활동하는 소식을 방송하여 적을 현혹시켜야 한다. 화북군구 3병단은 장자커우를 포위하여 푸쭤이 집단군이 서쪽 쑤이위안으로 철수할 퇴로를 차단하라. 푸쭤이가 파병하여 서쪽을 지원하도록 유인해야 한다. 그후 화북군구 제2병단과 동북 야전군 선봉 병단은 베이핑과 장자커우의 연결을 차단하라. 푸쭤이와 장제스계 부대를 묶어두어 동북 야전군이 입관하여 작전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동북 야전군 주력 12개 종대와 특종병 부대 등 80만명은 즉시 휴식을 끝내고 야간행군과 아침 숙영으로 몰래 입관하도록 하라. 화북 군구 주력과 협동하여 핑진전역을 앞당겨야 한다. 베이핑, 텐진, 탕구, 탕산 사이 연결을 모두 차단하여 푸쭤이 집단군의 남쪽 철수로를 막아야 한다. 그 직후에 포위 섬멸을 하도록 하라.”
중공 중앙군사위는 핑진전역에 참가할 부대를 선정했다. 동북 야전군 12개 군, 1개 철도종대와 특종병 종대 합 80만명, 화북 군구 7개 종대, 1개 포병여단 합 13만명, 차하르(차하르(察哈尔) 지역은 중화민국 시대의 행정구역으로 지금은 내몽골, 허베이성으로 나누어져 있다)와 쑤이위안(绥远) 경계 지역의 서북 야전군 8종대와 동북군구 소속 기열찰(冀熱察: 허베이, 러허,차하르 지역 관할), 네이멍구와 기타 지방부대를 합쳐 총계 100만명이었다. 점령지 수비군을 빼면 동북과 화북의 병력을 대부분 동원한 셈이었다. 중공 중앙은 동북야전군 사령원 린비아오와 정치위원 뤄룽환이 100만 대군을 통일 지휘하도록 결정했다. 핑진전역 지휘부는 나중에 조정되었다. 1949년 1월 10일, 린비아오, 뤄룽환에 화북군구 사령원 네룽전을 더해 총전선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총전위는 린비아오가 서기를 맡았으며 베이핑과 텐진, 그리고 장자커우와 탕산 지역의 작전과 도시 접수관리등 일체의 사업을 관장하게 하였다.
산하이관 화북에서 동북쪽을 방어하는 관문이었다.
동북 야전군, 산하이관 안으로 진격하다
1948년 11월 23일, 동북 야전군 주력이 진저우, 잉커우, 선양에서 출발 일제히 출병했다. 이들은 베이핑, 텐진, 탕산, 탕구 등 거점지역으로 은밀히 이동했다. 11월 25일에는 화북군구 3병단 사령원 양청우와 정치위원 리징취안(李井泉)이 인솔하는 제1, 제2, 제6종대가 지닝지역에서 동진했다. 11월 29일, 핑진전역이 시작되었다. 해방군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베이핑, 텐진, 장자커우 수비군에 대하여 “포위하고 공격하지 않거나” “접근한 채 포위하지 않는” 전술을 실행했다. 이에 따라 화북군구 양청우가 지휘하는 제3병단은 장자커우 밖에 주둔해 있는 국군을 공격했다. 3병단은 12월 2일까지 차이거우부(柴沟堡), 완취안(萬全)등을 차례로 점령하여 장자커우를 포위할 태세를 갖추었다.
푸쭤이는 화북군구 부대가 장자커우를 공격한 것이 국부적인 행동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동북 야전군이 아직 입관하지 않았을 때 주력을 집중하여 먼저 화북군구 부대를 격파하기로 결심했다. 그 뒤 동북 야전군이 공세를 취할 때 장거리 원정으로 피로한 적을 요격할 생각이었다. 그는 주력인 35군및 104군 258사단에게 장자커우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펑타이(豊台), 화이라이(懷来)에서 자동차를 이용하여 장자커우를 구원하게 한 것이다. 푸쭤이는 창핑(昌平)에 있던 104군과 줘현(涿縣)에 있던 16군에게 베이핑과 장자커우의 교통을 장악하라고 명령했다. 해방군 지휘부는 푸쭤이의 직계 주력이 서쪽을 지원하도록 유인하는 데 성공하였다. 해방군은 화북군구 2병단 사령원 양더즈의 부대와 동북 야전군 2병단 사령원 청즈화가 즉시 베이핑과 쑤이위안 사이의 연결을 끊었다. 장자커우로 진격한 국군의 퇴로를 차단한 것이다.
12월 5일, 동북 야전군 선봉병단이 베이핑 동북쪽 미윈(密云)을 공격 점령하고 국군 13군 소속 1개 사단을 섬멸했다. 그제서야 푸쭤이는 베이핑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푸쭤이는 35군에게 장자커우에서 급히 회군하라고 명령했다. 또 104군 주력과 16군에게는 화이라이, 난커우에서 서쪽으로 후퇴하게 하였다. 다른 부대들은 베이핑쪽으로 이동하여 방어를 강화하라고 명령했다.
12월 6일, 국군 35군은 자동차를 타고 동쪽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35군은 12월 9일 신바오안에서 해방군 화북 군구 부대에 포위되었다. 베이핑과 장자커우 교통을 장악하기 위해 파견한 국군 16군은 동북 야전군 선봉병단에 포착되어 12월 11일 모두 섬멸되었다. 이어 장자커우가 포위되었으며 장베이, 센화등 화북 지역의 요지들이 잇따라 해방군 화북군구 부대에 점령되었다. 푸쭤이로서는 쑤이위안에서부터 중일전쟁을 함께 치른 직계 주력부대들이 신바오안과 장자커우에서 포위되어 섬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동북 야전군, 산하이관으로 입성하다
전세는 점점 해방군에게로 기울었다. 화이하이 전장에서는 황바이타오 병단이 이미 섬멸되었고 황웨이 병단과 두위밍 집단군도 해방군에 철통같이 포위되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울 때였다. 마오쩌둥의 걱정은 오로지 푸쭤이 집단군이 남쪽으로 도주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12월 11일, 핑진전역 지도부에 전화를 걸어 지시했다. “푸쭤이 부대가 해상으로 달아나는 것이 걱정된다. 장제스, 푸쭤이가 핑진을 빨리 포기하고 남쪽으로 달아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앞으로 2주 동안은 포위하고 공격하지 않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하라. 신바오안, 장자커우는 거리를 두고 포위하지 않도록 하라. 전략적 포위를 하고 전투에서는 포위하지 말라는 뜻이다. 베이핑과 텐진은 부대 배치가 완성될 때까지 대기하라. 먼저 양쪽을 치고 그 후에 중간을 공격하라. 다른 지역의 적은 섬멸해도 좋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덧붙였다. “난커우(南口)(현재 베이징시 창핑(昌平)구에 속한 진이다. 베이징시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서쪽은 모두 공격하면 안된다. 그러면 난커우(현재 베이징시 창핑(昌平)구에 속한 진이다. 베이징시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의 적이 미친 듯이 달아날 것이다.”
작전을 숙의중인 네룽전 린비아오 러룽환 (왼쪽부터)
베이핑으로 행군중인 해방군
화이하이전역에서 해방군이 황웨이 병단을 섬멸한 뒤 마오저뚱은 다시 명령했다. “두위밍 집단군에 대하여 2주 안에 마지막 섬멸전을 하지 말라. 산동 군구는 약간의 병력으로 지난 부근 황허를 장악하고 자오지철로에서 작전 준비를 하라.” 이것은 푸쭤이 집단군이 진푸철로(津浦鐵路)를 따라 지난 방향 칭다오로 도주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이런 지시에 따라 화북 군구 부대들은 신바오안과 장자커우의 국군이 동쪽이나 서쪽으로 돌파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해방군은 여러 길에 차단 진지를 두고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동북 야전군 주력은 피로와 추위를 무릅쓰고 베이핑과 텐진, 탕구 사이로 들어왔다. 푸쭤이는 인민해방군이 갑자기 베이핑과 텐진에 접근하였으며 이미 퇴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푸쭤이는 수비가 곤란한 점을 감안하여 난커우, 줘현, 루거우차오, 탕산(唐山) 등을 포기하고 베이핑, 텐진, 탕구로 수비망을 압축했다.
푸쭤이는 베이핑과 텐진, 탕구 등 방어구역을 두 개로 구분하고 지역 방어를 실행토록 했다. 12월 17일이 되자 해방군은 베이핑을 사면으로 포위하였다. 베이핑의 난위안(南苑) 비행장도 점령당했으며 12월 20일에는 동북 야전군 부대들이 텐진과 탕구간 연결까지 끊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푸쭤이 집단군은 베이핑, 텐진, 탕구, 장자커우, 신바오안, 탕구 등에 전부 분할되어 포위를 당하였다. 푸쭤이 집단군은 서쪽과 남쪽의 모든 도주로를 차단당했으며 장사진이 몇 토막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그제서야 “푸쭤이 집단군이 화살에 놀란 새가 조롱속의 새로 되었군.” 하고 웃었다. 마오는 자신의 의도가 모두 관철된 것을 흡족해 하였다.
푸쭤이, 공산당과 담판을 모색하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공 수뇌부는 푸쭤이를 군사력으로 압박하는 한편 베이핑 무혈입성을 방침으로 세웠다. 베이핑은 춘추시대 연나라 이후 삼천년에 걸친 고도였다. 1949년 당시에는 베이핑을 ‘천년고도’라고 불렀다. 중공은 “천년고도의 문화역사 유적과 2백만 시민을 전화에 빠뜨릴 것이냐?”며 푸쭤이를 압박하였다. 푸쭤이는 본래 공산당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다. 국군 고위지휘관들 가운데 푸쭤이와 웨리이황은 반공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마오쩌둥은 푸쭤이를 명분으로 설득하면 “베이핑을 평화적으로 해방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푸쭤이도 자신의 직계는 핑쑤철도(베이핑-쑤이위안), 장제스의 중앙계는 베이닝 철도(베이핑-랴오닝 지역) 연선에 배치하여 여러 가능성에 대비하였다. 즉 자신의 근거지인 쑤이위안성 쪽으로 철수할 수도 있고 항구도시인 탕구를 거쳐 남쪽 철수 가능성도 열어 둔 것이다. 한편으로는 공산당과 평화적 담판을 통한 해결을 모색하였다.
공산당과 푸쭤이 간에 다리를 놓은 사람은 중국 공농 민주당 서기인 펑쩌샹(彭澤湘)이었다. 펑쩌샹은 1922년 연말에 공산당에 가입한 초기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후베이성등 여러 곳에서 활약했다. 그는 국민당원들 가운데 리지선, 차이팅카이 등 공산당 바깥의 장제스 반대파 인사들과 두루 친했다. 1934년 그는 장제스의 박해를 피해 홍콩으로 망명했다. 홍콩에서 리지선 등과 함께 제3당을 설립하였다. 제3당은 정식명칭이 ‘중화민족 해방행동위원회’로 나중에 공농 민주당으로 발전하게 된다.
펑쩌샹은 국민당 혁명위원회(약칭 민혁) 주석인 리지선(李濟深)과 베이핑 초대시장인 허지공(何其鞏), 중국 민주혁명동맹(약칭 소민혁) 서기인 위신칭(余心清) 등의 위임을 받아 홍콩에서 건너왔다. 리지선과 허지공 등은 푸쭤이의 기의를 이끌어내어 “베이핑을 전쟁의 위험에서 구하자.”는데 뜻을 모은 것이다. 리지선은 본래 황푸군관학교 부교장 출신으로 국민당의 지도인물이었다. 그러나 장제스의 반공정책을 반대하며 줄곧 공산당과 공동항일을 주장해왔다. 그는 송칭링, 장란 등과 함께 공산당이 주목하는 대표적인 친공 인물이었다.
펑쩌샹은 11월 7일과 8일 마오쩌둥이 직접 쓴 편지를 잇따라 받았다. “베이핑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공산당도 동의한다.”는 뜻을 담은 편지였다. 펑쩌샹은 즉시 푸쭤이를 만나 공산당의 회담 개최 의지를 전하였다. 푸쭤이가 결심을 굳히게 된 데에는 다른 사람의 역할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바로 푸쭤이의 장녀인 푸동쥐(傅冬菊)로 텐진 따공빠오사(大公報社) 기자였다.
푸동쥐, 푸쭤이의 딸로 베이핑 해방의 공신이라 일컫는다.
푸쭤이 일가
푸동쥐는 1941년 충칭에서 공산당 계열 청년조직인 후지아오스(號角社)에 가입했다가 1947년 11월에는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베이핑과 화북지역을 총괄하는 초비사령관의 딸이 공산당원이었던 것이다. 푸동쥐는 공산당 진찰기(산시, 차하르, 허베성을 관할) 중앙국의 지시를 받고 베이핑의 아버지에게 갔다. 그녀는 푸쭤이에게 베이핑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산당이 발간한 신문이나 책자 등을 푸쭤이의 책상에 놓아두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아예 자신이 공산당이 파견한 대표라고 밝혔다고 한다. 푸동쥐는 푸쭤이 주변의 상황이나 푸의 심리변화를 즉시 공산당에 보고하였다. 공산당 수뇌부가 푸쭤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푸쭤이의 심리는 점점 평화회담으로 기울어 갔다. 1948년 12월 15일, 푸쭤이는 마침내 인민해방군 핑진 전선사령부에 핑밍르바오(平明日報) 사장인 추이자이즈(崔載之) 등을 대표로 파견하여 담판을 진행했다. 핑진 전선사령부 참모장 류야러우는 푸쭤이 집단군이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희망했다. 그러면 인민해방군이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겠다고 하였다. 푸쭤이는 “화북 연합정부를 설립하자. 그러면 거기 참여하겠다. 부대는 연합정부에서 지휘하면 된다. 이렇게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내용과 시기를 전국에 전문으로 통지하자.”고 주장하였다.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즉시 신바오안과 장자커우의 푸쭤이 집단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마오쩌둥에게 연합정부란 당치않은 소리였던 것이다. 푸쭤이도 공산당의 태도를 전해듣고 적이 실망하였다. 그는 중일전쟁 시기의 국공합작과 같은 관계를 희망하였다. 당시 공산당 홍군을 국민정부군 산하 팔로군으로 개편했던 것이다. 하지만 해방구나 팔로군은 사실상 독자성을 유지한 채 필요하면 공동으로 작전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의 태도는 강경하기 이를 데 없었다. 푸쭤이는 이렇게 탄식하였다. “베이핑 성안의 국군 중 중앙계가 우리의 열 배가 넘는다. 우리야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지만 장제스의 명령에 따르는 중앙계가 무장해제에 응하겠는가?” 푸쭤이는 참모장인 리스제(李世杰)에게 전투준비를 명령하였다. “전투준비를 하라고 명령하게. 서로 조건이 너무 달라 대화가 불가능하네.” 리스제는 “대화가 안되면 전투를 해야지요. 하지만 싸우기는 쉽고 대화가 어렵습니다. 담판에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령관께서 너무 감정적으로 하시면 곤란합니다.”하고 대화를 계속할 것을 권하였다.
|